|
낮지만 많은 것을 품은 겨울 강천산에서 끊임없이 걷다
1. 일자 : 2011. 12. 18(일)
2. 장소 : 강천산(584m)
3. 행로 및 시간
[주차장(11:20) -> 병풍바위(11:30) -> 깃대봉 삼거리(12:06, 495m, 왕자봉 1.6km) -> 깃대봉(12:26, 572m) -> 왕자봉 삼거리(12:39) -> 왕자봉(12:43) -> 형제봉 삼거리(13:00) -> (중식 -13:20) -> (495봉/490봉) -> 북문(14:03) -> 서문(14:25, 철마봉 1.2km, 남문 1.8km) -> 철마봉(14:51) -> 노적봉(15:08) -> 남문(15:15) -> 동자암(15:21) -> (암문) -> 동문(15:41) -> 강천사 갈림(15:47, 강천사 3.8km) -> 제 2강천호(16:23) -> 구름다리(16:32) -> 강천사(16:40) -> 주차장(17:10)]
4. 동행 : 홀로, 미투리 산악회
< 강천산 산행을 준비하여 >
전북 순창과 전남 담양군의 도계를 이루는 강천산은 비록 산은 낮아도 깊은 계곡과 기암절벽이 병풍을 치듯 늘어선 모습으로 ‘호남의 소금강’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등산로 초입부터 병풍바위를 비롯 용바위, 비룡폭포, 금강문, 삼인대, 하늘다리 등 명소들이 즐비하고, 금성산성에서 조망되는 담양호의 전경도 근사하여 볼거리가 많은 산이다. 산 위는 육산, 아래는 골산인 관계로 바위들이 거의 산중턱 아랫녘에 몰려 있는 형상이다.
강천산 또 하나의 명소는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고찰 강천사인데, 한때는 천 여명의 승려가 있던 큰 절이었다고 한다. 절 뒤로 치솟은 암벽과 암봉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멋지다.
강천산이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에 선정된 이유는 ‘군립공원(국내 최초)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강천계곡 등 경관이 수려하고 조망이 좋은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도선국사가 개창한 강천사가 있으며, 산 이름도 강천사에서 유래.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성산성이 유명’ 등이다.
여러 정보로 추정해 볼 때 강천산은 가을 단풍과 여름 계곡의 자연미와 강천사와 금성산성의 인공미가 어우러진 호남의 명산이다. 철 지난 감이 있지만 코스 선택에 달인이신 미투리 최 대장님이 추천하는 길이니 무조건 믿고 따르기로 한다.
출발 전 코스를 머리에 그려본다. 해발 160m 강천사 주차장에서 출발 병풍바위를 감상하고 지능선에 올라 붙어 안부 삼거리(495m)까지 오르는 1시간여의 길이 오늘의 최고 난코스이다. 이후 큰 고도 변화 없는 깃대봉, 왕자봉(정상), 형제봉까지 주 능선이 1시간, 이후 담양호의 경치를 감상하며 북문까지 1시간, 북문에서 금성산성을 따라 남문까지 1시간, 이후 하산 길은 40여분, 식사시간을 포함하면 총 5시간의 산행이 될 것이다. 일요일이라는 부담은 있지만 겨울날 오르기에는 무리 없는 높이와 시간이다.
< 희망사항 >
86번째 백대명산 산행이다. 80번째가 넘을 때 부턴가 토요 산행 만으로는 목표로 한 백대명산 중 안내산악회가 추천하는 새로운 산을 선택하기가 점점 어려워짐을 느꼈다. 방법이야 차를 몰고 가던가, 아니면 평일 혹은 일요 산행으로 선택의 폭을 넓히는 것인데, 남은 대부분의 산들이 거리가 멀어 차를 가지고 가기에는 부담이 크고, 평일 산행도 거의 불가능하니 남은 것은 일요 산행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번 주가 바로 그렀다. 미투리에서 강천산 예고가 있길래 일요일 저녁 일단 신청을 해 버렸다. 새로운 산을 가고 싶은 바램이 그만큼 크다.
지도를 살피니 강천산은 산성산(603m), 광덕산(564m)과 더불어 ‘ㄷ자형’산세를 이루고 있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산들이 넓게 펼쳐 있으니 계곡이 좋은 것은 당연지사라 생각하고 확인해 본다. 약 5km에 이르는 강천계곡의 협곡주변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능선에서 이어진 산성산 일대는 병풍처럼 금성산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성 서쪽은 깨끗한 수질을 자랑하는 담양호가 자리하고 있다 한다. 높이는 고산준령 급은 아니지만 강천산은 풍광으로는 예사 산이 아니다. 겨울이라 수량이 줄어 계곡의 묘미는 덜 하겠지만 기암절벽과 산에서 굽어보는 호수의 전경이 이번 산행의 백미가 될 것이다. 잎 떨군 나뭇가지 사이로 펼쳐지는 암봉과 호수가 있는 풍경을 즐기고 싶다. 재작년 인군 추월산 보리암 하산 길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 동기 중에 ‘강형’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다. 동기들 보다 나이가 많아 이름을 부르기가 뭐해서 입학 초부터 부른 아명이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불려지는 친구이다 (가끔 내 필요에 의해 형이라고도 한다^^). 그 친구의 이름이 ‘강천X’이다. 이번 주 오른 강천산과 같다. 한 때 나와 함께 죽이 잘 맞는 ‘산 동무’였는데 지금은 지방에 거주하고 있어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 인연이라는 것이 참 묘해 친구의 이름과 같다는 것 만으로도 강천산은 늘 찾고 싶은 산이었다. 아마도 그와 주말 등산을 계속 같이 했다면 작년 가을쯤에 올랐을 것인데, 홀로 오르기가 싫어 미루어 오다가 이제야 찾게 되었다. 이 번 산행을 다녀 오고 나면 강형과 연락을 취해 만남을 이어나갔으면 한다.
주말 일기예보를 보니 따듯하던 날씨가 목요일부터 추워진다 한다.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바람 쌩쌩 부는 능선에 올라 콧김 불어가며 바라보는 암봉의 자태와 유유히 흐르는 담양호의 전경이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진다. 계절에 걸맞게 나라는 산꾼도 야생에 좀더 적응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며 일요일 아침을 맞는다.
(여기까지는 산행 전 준비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순창 가는 길에 >
일요일 아침, 공기는 싸늘하지만 바람이 잦아 추위가 어제보다 한결 덜하다. 7시 40분 복정에서 버스에 오른다. 버스 안은 20명 남짓의 손님으로 빈 자리가 많다. 최대장님이 마이크를 잡는다. 이렇게 나마 산행을 갈 수 있어서 고맙다 하신다. 내가 할 말인데, 큰 박수로 내 마음을 전한다.
산행 코스가 바뀌었다. 당초 남문에서 하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동문까지 더 가서 강천사를 지나 원점 회귀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대장님 말로는 이왕 이 먼 곳까지 왔으니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가자는 취지이며, 길 사정과 시간 상황을 보아가며 최종 코스를 결정하자고 하며, 인원이 많지 않으니 모두 함께 움직이자고 제안한다. 대장님의 코스 선택 능력이 탁월함은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 될 경우 6시간이 넘는 긴 산행이 되어 귀경 시간이 무척 부담스럽게 됨을 알기에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진정성이 베어 있는 말투와 실제 산행 시간을 보아가며 최종 결정을 하자는 대안 제시가 걱정을 가라앉힌다. 20명 남짓이라면 버스 운행 원가에도 못 미치는 수익일 것이고, 이럴 경우 범인 같으면 대충 짧은 코스를 안내하고 일찍 귀경하는 것을 택할 것이지만, 그는 진정한 산꾼이기에 자신을 믿고 따르는 등산객을 달래어 더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난 그 마음을 읽었다. 고마우신 분이다. 모든 것을 대장에게 맡기고 일단 취침 모드로 돌입한다.
졸다 깨다 하다 보니 1시간 만에 정안 휴게소에 도착했다. 휴식을 마치고 탑승하는 사람들 사이에 지난 금원산에서 일행을 무려 1시간 이상 기다리게 했던 여자 2분이 보인다. 이 ‘금원산 지각녀’들은 당시 자기들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장거리 코스를 택해 볼 거 다 보고 유유히 하산한 장본인 들이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변경된 코스는 무척 긴데, 이 여자들이 또 산에서 농땡이 피다가 볼 것을 다 보고 약속된 시간보다 늦게 나타나 나를 화나게 만들 것 같다. (이런 종류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는 경우가 많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11시 20분 순창 땅에 도착했다. 들머리에는 눈이 내린다. 많이는 아니지만 흩날리고 있으며 그 때문에 온 세상은 잿빛에서 흰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험난한 산 길이 예상되어 기분이 가라앉는다.
< 병풍바위에서 북문 >
잘 정돈된 상가지역과 매표소를 지나 널찍한 도로 길을 따라 산 길로 접어든다. 출발 10분만에 우측으로 범상치 않은 암벽에서 폭포수가 떨어진다. 병풍바위이다. 폭포는 예상치 않았는데, 겨울치고는 제법 많은 물이 떨어지고 있다. 눈 때문에 덮어 쓴 모자를 벗고 사진을 찍는데 카메라가 심상치 않다. 태백산 하산 길에서와 같이 화면이 희게 변한다. 고쳐서 쓸 일이 아닌 것 같다. 오래 전부터 렌즈에 반점이 끼고, 촬영 사진 수도 수 천 장이 넘어가니 선명도도 떨어짐을 느꼈는데, 이제 제 수명을 다 해 가고 있는 것 같다. 기계의 내구성을 탓하기 전에, AS센터에서 ‘이 카메라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십니까?’ 라고 물을 정도로 내가 산이라는 험한 환경에서 사용했음이 상기되었다. 그래도 싼 가격에 사서 2년 6개월 동안 나와 여러 산을 오가며 ‘제 2의 눈’되어 준 내 동반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오늘 산행에서는 스마트폰이 카메라 역할을 대신 한다.
< 눈과 조릿대 길 >
병풍바위 옆으로 깃대봉으로 향하는 길이 나 있다. 초입은 비탈이다. 클램폰을 할까 그냥 갈까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오르막이라 길이 생각보다 미끄럽지 않고, 배낭에서 꺼내고 신고 하는 번거로움이 싫어 일단 그냥 오른다. 한참을 가다 보니 일행들이 하나 둘 클램폰을 신는다. 그래도 난 그냥 간다. 맨 신발에도 눈 길에 종아리가 당겨온다. 초반 된비알은 항상 힘겹다.
30분만에 고도 572미터 깃대봉 삼거리에 도착했다. 매 10분당 고도 차를 100미터씩 높여 왔다. 잠시 평지 길이 나오더니 다시 오르내리막이 반복된다. 마지 못해 클램폰을 찬다. 가뜩이나 고장 난 카메라를 어찌해야 하나 하고 머리가 무거운데 때를 놓쳐 찬 클램폰 때문에 더욱 화가 난다. 산에서는 무언가 생각이 나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 현명하다. 아니면 마음에 짐이 되어 계속 신경을 건드린다. 예를 들면, 목 마르면 물 마시고, 길을 잘못 들면 미련 없이 되돌아 나오고, 샛길로 잠시 돌아 가서라도 좋은 풍경은 감상하고 등 등이 그렀다.
얼추 1시간 만에 깃대봉까지 왔으니 빠른 행보다. 깃대봉 삼거리까지만 오면 이후 고도 차가 없으니 편한 능선 산행이 될 것이라 추측했는데 아니었다. 낮으나마 오르내림이 반복되어 심신을 지치게 만든다. 깃대봉을 지나며 길은 초록의 조릿대 길로 변한다. 금방 내린 흰 눈을 살포시 덮어 쓴 키 낮은 대나무의 푸르름이 산꾼의 마음을 잠시 환하게 만들어준다.
< 강천산 정상에서 >
< 북문에서의 대장님 >
왕자봉 삼거리에 닿는다. 왕자봉까지는 멀지 않지만 왕복해야 한다. 작은 비탈을 넘어 오른 강천산 정상 왕자봉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다. 경치도 없다. 온통 눈이 만들어 놓은 안개만이 자욱하다. 강천산 하면 사방으로 멋진 풍광이 압권이라는데 아쉽다. 길을 되돌아 내려 와 형제봉으로 향한다. 10여분 만에 형제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형제봉으로 향하는 길에는 금줄이 처 있다. 가지 말라는 것이다. 시간은 오후 1시, 배꼽 시계가 울어 댄다. 미투리 일행들이 자리를 편 길 귀퉁이에 나도 작은 식당을 차린다. 반쯤 식은 죽과 밥, 김치만으로도 ‘왕자’ 부럽지 않은 맛을 느낀다. 이 즐거움마저 없었다면 오늘 산행은 너무 힘겨웠을 것이다.
밥 힘으로 다시 길을 나선다. 길은 긴 내리막이 이어지더니 고도를 다시 평평히 잡고 금성산성으로 향한다. 산허리 길이 지루하게 계속된다. 내린 눈은 간간이 깊게 쌓이기도 하고, 녹아 진창이 된 곳도 있고, 낙엽과 덩어리 되어 클램폰에 달라 붙기도 한다. 말 그대로 길 사정이 변화무쌍하다. 클램폰을 벗어 버린다. 발이 잠시 해방감을 느낀다. 길 우측으로 산 봉우리 사이로 안개가 피어 오르고, 그 밑으로 호수의 흔적이 보였다가 사라지곤 한다. 큰 기대를 안고 풍광을 즐기려 했는데 눈 길만이 계속된다. 40여분의 변화 없는 지루한 길은 북문에서 끝이 났다. 495봉 혹은 490봉 부근에 전망 터가 있었으나 연무로 인하여 기대하던 담양호의 모습은 그 존재마저 확인할 수 없었다.
< 북문에서 동문 >
2시경 도착한 북문은 문루는 없는 돌 성곽 지역이다. 사방이 트여 개방감이 좋다. 대장님이 후미를 이끌고 나타났다. 두 팀의 여인네들을 이끌고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금원산 지각녀 외에도 중년의 여인들이 대장님 곁에 붙어 있다. 그녀들 때문에 귀경이 지연되지 않기를 다시금 바래본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은 성곽을 따라 내리막이 길게 이어진다. 성곽 뒤편으로 담양호의 전경이 연무 속에서 잠시 얼굴을 내밀고 있다. 호수 뒤편으로는 추월산이 높다란 모습으로 서 있다. 산 중턱 어딘가에 보리암이 있을 것이다.
< 북문에서 서문 하산 길 풍경 >
성곽을 따라 내려서는 길이 무척 미끄럽다. 다시 클램폰을 차기가 싫어 가는데 까지는 가볼 요량이다. 내리막 중간 지점에 키 큰 소나무가 이정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금성산성의 일부인 북문 주변의 성곽은 최근에 개 보수 되었는지 돌에서 새 것의 느낌이 든다. 눈 쌓인 길을 제외하고는 하늘도, 호수도, 성곽도 모두 회색 빛이다. 간혹 지나 온 산 길에 안개가 드리웠다가 걷히는 모습이 목격된다.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길을 조심스레 내려선다. 건너편 성곽이 훤하게 조망되는 길의 개방감이 참 좋다.
북문에서 서문은 20분 거리. 서문을 지나자 그간의 긴 내리막이 끝없이 먼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러고 보니 출발 이후 작은 오르내리막이 계속 반복된다. 낮은 산이라 얕보았다간 큰 코 다치기 딱 좋은 다이나믹한 길의 연속이다. 산은 그 높이로 험함과 평이함을 예단해서는 안 됨을 다시금 확인하다.
서문에서 눈에 보이는 긴 언덕을 올라서자 다시 철마봉으로 향하는 산 줄기가 나타난다. 계속 걷기만 했는데도 갈 길은 아직 멀다. 풍광이라도 좋으면 참고 가겠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희뿌연 연무뿐, 힘겨운 다리에 희망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
철마봉에 올라섰다. 천애 절벽이 성벽을 대신한다. 어떠한 적도 이리로는 오르지 못할 것 같다. 철마봉 하산 길을 잘못 들어 바위 난간 길을 기다시피 네 발로 겨우 내려왔다. 순간의 방심이 눈 길에서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겠다.
노적봉을 지나자 멀리 남문의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목표가 생기자 다시 발에 힘이 난다. 지금 이 순간은 시각이 다른 모든 감각들에 우선한다.
< 연무 속에서 보이는 담양호 >
< 안개에 젖은 산 길 >
남문에서 선다. 시간은 3시 15분 산행 전 예상했던 것처럼 4시간이 소요되었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쉬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코스 자체가 만만치 않다. 당초 계획대로 이곳에서 외남문을 지나 하산 하면 딱 좋으련만 다시 2시간
이상을 더 가야 한다.
무전으로 대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반 동문 쪽으로 가서 광덕산으로 더 갈 것인지 상황을 보자는 것이다. 큰일이다. 누가 우리 대장님 좀 말려야겠다. 어두워지고 나서 하산할 거라면 몰라도 빨리 강천사 방향으로 하산해야 할 것이다.
지난 금원산 산행에서 초보 산꾼의 티를 내며 산을 잘 아는체하던 남자가 선두대장을 서고 있는데 동문으로 향하는 길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다. 영 미덥지가 않다. 일단 동자암 방향으로 길을 나선다. 금성산성 안쪽 길은 제법 너른 평지가 이어지고 그 중심지에 작은 암자, 동자암이 서 있었다. 돌탑으로 담을 만들고 그 안쪽에 작은 법당이 보인다. 남루하지 않은 작은 절 집의 전형이다.
시루봉 방향으로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아! 끝이 없는 길. 힘에 겹다. 작은 암문이 나타난다. 동문과 시루봉이 갈라진다. 선두대장이 최대장님에게 길을 묻는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지금 시루봉과 광덕산을 지나 하산하면 6시가 넘어도 주차장에 도착하기 힘들 것입니다. 동문으로 갑시다.’ 라고 쏘아붙였다. 이 사람들이 길과 시간 사정을 제대로 알고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인지도 의심이 되었다. 대장과의 무선에서 남문에서 길 가에 놓아 둔 길안내 표시를 누군가가 방향을 돌려 놓았다고 단정하는 애기를 들은 이후 선두대장에 대한 신뢰가 더욱 무너진다. 아무래도 나는 내 길을 가야겠다.
< 멀리서 본 남문 >
3시 40분 동문에 도착했다. 미투리에서 나눠준 지도가 아닌 내가 준비한 상세지도를 살피니 북바위 전에서 우측으로 하산하여, 계곡을 따라 제 2 강천호와 강천사를 지나 하산을 완료하자면 2시간 이상이 소요될 것 같다. 5시 이전 하산이라는 목표는 사라지고 어두워지기 전에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으로 목표가 바뀐다. 다른 일행은 시간에 대한 압박이 별로 없어 보인다. 내일 출근에 대한 부담이 없는 분들인가 보다.
동문을 지나 작은 언덕을 올라서자 강천사 갈림이 나타난다. 강천사까지 3.8km, 아! 멀다. 미끄러운 내리막을 내려선다. 고도에 대한 부담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눈 길에 대한 부담은 여전히 크다. 비교적 완만한 길이 지나자 돌이 많아지고 계곡이 나타난다. 길은 곳곳에서 협곡의 기운마저 돈다. 곳곳의 기암괴석의 절벽들이 눈 길을 끈다. 계곡의 수량도 제법 많다. 이 겨울 물이 흐르는 계곡을 경험하는 것도 행운이다.
< 제 2 강천호 부근에서 >
작은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자 다른 세상이 나를 맞는다. 호수가 나타난다. 그 위로 빙벽이 형성되어 있다. 인공인지 자연인지는 몰라도 폭포수도 떨어진다. 여기가 바로 제 2 강천호이다. 규모는 작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춘 휴식장소이다. 한참을 호수와 눈과 빙벽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감상하다 강천사를 향해 길을 나선다.
호수에서 10분 거리, 널따란 길을 걸으니 강천산의 명물 구름다리가 하늘 위에 솟아 있다. 지난 가을 행락객들로 붐볐을 주변에 정적만이 감돈다. 잠시 한가로운 여유를 즐겨본다. 다시 10분 거리에 강천사가 길 가에서 나를 반긴다. 길과 절이 한 몸이다. 담장도 없고 인도 건너편이 대웅전이다. 먼 발치에서 강천사에 잠시 눈 길을 주고는 서둘러 길을 이어간다.
< 강천사 구름다리 >
< 대나무 숲에서 >
도로가 빙판으로 변해 있다. 길 가를 걷는데도 몇 번이나 자빠질 뻔 하다가 매표소를 거의 다 와서 발라당 엉덩방아를 찌었다. 그 덕에 정신이 번쩍 들어 바삐 길을 걸으니 오전에 지났던 병풍바위가 보이고 이내 주차장에 도착했다. 5시간 50분의 긴 산행이 마무리 되었다. 작은 성취의 기쁨보다 귀경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 강천사 하산 길 풍경 >
< 에필로그 >
힘겨운 걸음으로 버스에 오르니 하산 한 이들이 적다. 추위를 피하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먹음직스러운 조기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늦은 귀경 때문에 얼었던 내 마음은 맛 난 음식에 일순간 녹아 든다.
하나 둘 하산 객이 늘고 식사는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맛났다. 내 기억은 하산 후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음식 중 이 보다 더 맛있던 것을 찾아 내지 못했다. 5시 45분 대장님이 피로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이후에도 한참 후 금원산 지각녀와 또 다른 여자 일행이 나타났다. 오늘도 역시 늦었다. 그녀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하고 마음을 고쳐 먹기로 한다.
6시 20분 버스가 서울로 향한다. 버스가 출발하자 대장님의 수고 했다는 소박한 마무리 인사가 이어졌다. 역시 진정성이 묻어 있다. 산길에서 잠시 가졌던 대장님에 대한 원망의 생각을 이내 후회한다.
버스가 제 속도에 오르자 눈을 감고 오늘 산행을 복기해 본다.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간다. 온통 잿빛의 세상에서도 겨울 나무는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었다. 적당한 경쟁과 공존의 조화를 느꼈다. 오늘도 난 길을 나섰고, 그 길 위에서 다시 갈 길을 찾았다. 그 길을 참 멀었다.
눈 내린 세상이 밝은 이유는 어두운 곳부터 하늘빛이 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눈 내린 세상이 따뜻한 이유는 차갑고 낮은 곳에 하늘의 손길이 더 오래 머물기 때문이라 했다. 눈 내린 세상이 평화로운 이유는 명암의 경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라 했다. 눈 내린 산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늘을 넓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눈이 있어 오늘도 눈은 즐거웠던 산행이었다. 조금 더 넓고 따듯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야겠다.
산 길을 걷는 여정 자체가 내게는 보상이다. 좋아하는 산 길을 원 없이 걸었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인간이 아직 덜 성숙하여 작은 일에 화내고, 근거 없이 속단하고, 함부로 생각을 피력하고, 남을 비방하고 등 등. 산 길을 걸으며 내가 한 많은 옳지 못한 생각과 행동에 대해 오늘도 깊은 반성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