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공부(6)
8. 예수의 성장(눅 2:40, 52)
예수 어린시절
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52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가. 내용을 살펴보면
『자라며』
신체적으로 육아의 성장을 말한다. 진행되는 단계는 그의 성전에 보이심과, 유월절에 성전에 머무심, 그리고 세례를 받으심으로 구분된다.
『강하여지고』
심령이 생략되었고, 그는 지혜가 충족하였는데 요한에게는 지혜부분이 없다. 지혜는 영혼의 자질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 위에 있더라.(2:52)
나. 주요 요의
1)성서에서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짧은 생애와 성장과정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본다.
예수님이 태어나시어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30여 년의 생애 중 성서가 전하고 있는 것은 몇 구절에 불과하고 공생애에 들어가서도 고작 3년(눅3:23)에 불과한 보통의 위대한 인물들의 업적에 비하여는 그야말로 너무나 짧은 기간이고 자료 역시 너무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 30년의 사생활은 율법의 시대 즉 암흑의 시대였고 그나마 마태1,2장 누가1,2장에 예수님의 탄생 전후의 사건이 있을 뿐, 성서는 우리들에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침묵이 오히려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더없이 귀한 것이 되었고 이 자료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이상 더 자세한 것은 필요가 없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유명한 인사나 역사적인 인물인 경우 유년시대에서부터 소년, 청 장년 등의 업적을 평가하는 것이 우리들의 관례고 상식인데 비하여, 예수님의 경우는 기록이 너무나 빈약하고 또한 전무한 실정으로 유년시대 소년시대 청년시대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왜 성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기록이 없을까? 성서의 기자가 기록을 누락한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성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많은 위대한 사실의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성서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생애와 같은 유년, 소년, 청년시기를 거치며 성장하였기에 특별히 기록유지에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들하고 같은 생애를 거치며 성장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들 시대의 일에 대하여 자료가 있는데도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당초 하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인으로서의 예수님은 지극히 보통 평범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고 따라서 보통의 소년, 청년이었으며, 어버이에게 의지하며 자라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자녀로서 정직하고 근면한 목수의 자녀로서, 우리들과 같은 처지였음에 틀림이 없다. 우리들의 가정사하고 별로 특별한 점이 없는 자녀이었기에 그래서 복음서 기자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함에 있어서 특별히 이를 써서 남길 필요성을 갖지 못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그 사생활에 있어 평범한 한 사람의 구성원에 불과하고 특별히 다른 가정의 자녀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기 시작하였을 때 누가4:22 마태13:54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실 때에 마을 사람들이 수근거린 사실은 아마도 목수의 아들이었던 자가 어느날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니까 비아냥거림이 이를 잘 증명하여 주고 있다. 이런 사실은 그때까지도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보통의 우리들하고 다름이 없는 보통의 인간으로서, 성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잘 증명하여 주고 있다. 보통의 사람하고 똑같이 발육 성장하고 보통 사람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공생애에 들어가기까지의 세월을 보냈기에 특별히 기록을 써서 남길 필요성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누가복음 2:40.52 절의 기사가 이 침묵을 깨고 있다. 이 부분도 다른 이웃 동년배들의 성장과 특별히 다른 것이 없다. 예수님의 육체적 성장과 지적 발육, 영적 진보들을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같은 나이에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음을 나타낸 것일뿐!. 특이한 의미가 없다. 아니 그 이상의 의미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뛰어나게 현명하였거나 경건하였다는 것이 아니고, 보통의 어린이와 같이 정상적으로 성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세례 요한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하나님과 사람들의 총애가 점점 더해 갔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양친의 사랑과 교육에 의해 무럭무럭 성장하였고, 요한은 구약이고 예수님은 신약이고 요한은 예언자이고,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고, 요한은 의(율법)이고, 예수님은 사랑이다. 때문에 요한은 황야에 있었고, 예수님은 포근한 어버이 품에 있었던 것은 보통의 사람과 다른 점이 없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30년이 되어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까지 예수님은 부모의 품에서 자녀로서 부모님의 말씀을 복종하며 가사의 일에 함께하셨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까지의 생활은 우리들의 생애와 차이가 없었기에 누가의 기자는 그가 완전한 사람이었음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역시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하지 못하였으며 완전하신 분은 오르지 하나님 한분 뿐으로서 예수님이 인간인 점을 보면 우리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음을 잘 증명해주고 있고, 또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약함을 돌보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고" (4:15. 2:17) 말씀으로 잘 증명을 해주고 있다. 또한 그 스스로 우리들을 친구라 부르셨다. (요한 15:14)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 앞에서 "오 주여", "오 하나님이여" 라고 말하며 무릎을 꿇는 경건함을 갖는 동시에 친구로서 친밀감도 또한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참 생명이 있는 것이다.
10. 예수의 성장(눅 2:41-51)
12살 시절의 예수
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또는 내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여야 50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가.내용을 살펴보면
『해마다』
아켈레오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열두살』
주님은 스스로 인생의 기간들에 순응하셨는데.(3:23)
『머무셨더라』
연대 순을 토대로 보면 우리는 이것이 주일날 일어났다고 추정할 수가 있다.
『아이 예수』
누가는 예수님을 잇따라서 태중의 아이(1:42), 아기(2:12), 아기(40), 아이(43), 선지자(24:19)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첫번째 만들어진 인간처럼 한꺼번에 완전히 다 자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인생의 모든 단계를 순서대로 거치셨다.
『알지 못하고』
사사기 14:6, 9 예수님은 한 말씀으로 알려주셨을 법 하지만 그들이 없는 데서 그의 지혜가 입증되는 것이 나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하심으로 그가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았을 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50).
『있는 줄로 생각하고』
이것을 보아 많은 부분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지켜보듯이 예수님의 부모도 예수님을 지켜보았지만 당연히 부모 곁에 있는 것으로 여겨 소홀이 하였던 것이다.
『선생님들 중에 앉으사』
위험을 위하여 그리고 한 생도나 선생같이 하시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협의하시는 형태.
『듣기도 하시고』
가르치시지는 않았다. 그의 어린 시절을 하나님이 질서 가운데 계획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모친은 가로되』
요셉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모친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야 했다.
『가로되』
공개적으로.
『어찌하여』
이 행동으로 네가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였느냐?.
『조심하여』
마리아의 마음에는 사흘 동안 많은 생각이 오갔을 것이다.
『가라사대』
부드럽게, 동요도 없이
『어찌하여』
이것은 예수님의 첫번째 기록된 말씀이다. 그는 그들이 그를 잃어버렸다고 비난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무라셨다. 그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다른 곳 아닌 성전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들은 그렇게 많은 증거들을 보았으니 알았어야만 했다. 필요한 것을 알면 조용해지기 마련이다.
『내 아버지』
그가 예수님을 아들로 삼으신 것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되신 것보다 오래 전이고 바로 이 행동이
『내가 있어야 될 줄을』
그는 그들에게 그가 그의 순종을 어기지 않으셨음을 그렇게 알리셨다.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그 자신이 그들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을 선언하시고 그의 부모의 주의를 환기 시키셨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자원하여,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실 분의 놀라운 순종이다.
『마음에』
그녀가 비록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어도.
『자라가며』
인간의 본성에 맞추어 그리고 자연의 지혜에 따라.
『그 지혜와』
해가 더해감에 따라 그의 신체가, 그러므로 그는 알맞은 사람의 크기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영혼과 육체를 받아 은혜로 제한되었을 때부터 해마다 더 사랑스러워지도록 권면을 받으셨다.
나. 주요 요의
1) 예수님의 12살 때의 뜻밖의 행동에 대하여
유월절에 일어났던 뜻밖의 사건에 대하여 육신의 부모는 하늘이 무너지고 참담한 심정에 놓였다. 그것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고 예수답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12년동안 한번도 부모의 말씀을 거역한 일이 없었고 걱정을 끼친 일 또한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너무나도 큰 사건이었다. 최근에도 종종 지구상에 큰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지만 대사건이 발생할 때처럼, 발생시에는 어느날 갑자기 성난 파도와 지진과 폭풍으로 대사건을 일으키고도 다음 순간에는 언제 그랬던가 하면서 그야말로 발생 전 보다도 더 조용히 고요히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예수의 이 사건도 그런 사건이 아니었나, 아마도 그것은 누가가 30년의 침묵을 깨고 이 사건을 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어떤 기이한 힘에 이끌리어 이 같은 행동이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다운, 단순한 무의식적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에 더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알 때, 비로소 예수님이 보통의 인간 아들로써 또 하나님의 아들임이 더욱더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의 두 아버지
예수는 이 사건을 통하여 육의 아버지와 참 아버지를 발견한 것이다. 지금까지 부모님으로부터 귀로만 들어오던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되었을 것이고, 그 때 참 아버지 품에 한동안 안겼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18년 이후에 그가 최종적으로 부모를 떠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서 일어서신 일의 전형적인 예고를 암시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에게는 두 아버지가 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영원한 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인 것이다. 우리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이는 아버지 즉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하고서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가 없다라고, 하며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적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나보다도 그 부모를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모순된 말씀이다. 그러나 사실임에 어찌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랑은 모순이고 참으로 어떻게 보면 잔인하다. 그러나 이 모순 속에 이 잔인함 속에 하나님의 아니 하나님 아니고서는 갖지 못한 순수한 사랑이 숨겨있음을 알고, 큰 진리에 순종하며,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육신의 부모께 거역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바로 부모님에게 복종하는 길임을, 참 자유를 얻는 길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깊고도 심원한 진리 앞에 인간은 마냥 초라해짐을 부인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