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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율어초등 35회 원문보기 글쓴이: 소나무
존제산 산행기
드디어 나는 어제 내고향 율어 존제산과 그 능선 길(호남정맥)에 대한 산행 소원을 풀었다..
고향집을 들러 뒷동산에서 일출 쪽을 바라보며 항상 멀리만 보이던 그 곳 존제산, 어릴 적 초등학교 5학년 쯤인가에 장동마을 뒷 산쯤으로 기억하는 그 산 존제산,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었던 그 곳 존제산과 그 능선 길을 어제 2006년 11월 18일(토요일)에 밟아본 것이다.
그 동안 여느 촌놈들이 그렇듯 고향을 떠나 있다보니 어릴 적 고향산천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타향에서의 이름 있는 산이나 강을 찾아 다니며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내 고향 산천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존재산과 그 산 줄기들은 항상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 산행은 지금 내가 근무하고 있는 영광 원전이 고향에서 가깝고 얼마 있지 않으면 또 멀리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과 금년이 가기 전에 꼭 단행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큰 역할을 했고, 동행해 줄 든든한 회사 동료, 이 동석 과장과 김 준호 과장의 적극적 호응이 결정적 이었다.
사실 두 분 과장은 등산에는 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전문 산악인은 아닌 아마추어 정도다. 나중에 참여하고서 일부 구간에서는 "아차, 이 것 참" 하고 후회도 했을 것이다.
이번 산행을 위하여 인터넷에서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여 정독도 했다. 대부분 호남정맥중 주릿재-존제산-571봉-광대코 삼거리-주월산-방장산-파청재-오도재(치) 구간에 대한 정보였는데 주로 산행기를 기초로 유효한 자료들을 선별하였으나 존제산 공군부대 통과구간은 정확한 정보가 제한적이었다. 시기마다 통과정보가 달랐으나 금년 봄에 통과한 정보를 가지고 시도하기로하고 두 분과 상의하였고 일부 의심스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혼쾌히 동참해 주었다.
금요일 회사일을 마치고 우리 시골집에 와서 따뜻한 온돌 방에서 하루 자고 아침 일찍 주릿재에서 산행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두 과장이 여의치 않아 나만 금요일 저녁 시골집에서 자고 두 과장들은 광주에서 토요일 아침 일찍 내려 와 시골집에서 만나 산행을 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아침 8시 이 동석과장 차를 이용하여 우리 셋은 주릿재에 도착하였다. 차는 주릿재 고개에 놓고 산행을 시작하고 산행이 끝난 다음 오도재에서 택시를 이용하여 다시 주릿재로와서 차를 가져 가기로 하였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처음 도전에 대한 설레임, 우리 중 모두가 처음이라는데 대한 두려움등도 있었다. 시간은 인터넷에서 본대로 8시간 혹은 9시간 정도 모두가 긴장된 가운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림농장 안내판이 나타났으며 KT 통신탑 출입도로인지 혹은 군부대 출입도로인지는 모르나 비포장 도로를 따라 올라 가다 보니 정맥꾼들이 달아 놓은 꼬리표가 나타났다. 꼬리표지를 쫒i아 가로지르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 가니 초반에 숨 가픈 산행이 전개되었고 약 30분 정도 오르니 KT 통신탑 근처가 나타났다. 통신탑 근처에서 욕심을 부려 빠른길을 택하려다 오히려 등산로를 놓쳐 키 높이의 철쭉들을 헤치며 고생도 좀했다. 통신탑 앞에 이르니 바로 앞에 존제산이 나타났고 저 멀리 여자만의 원경도 펼쳐졌다. 날씨는 좀 흐렸지만 그렇다고 늦가을 날씨가 썩 그렇게 좋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비는 오지 않을 것으로 예보하여 날씨는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다.
[KT 통신탑 뒷편의 키높이 진달래 밭에서 - 철 잊은 진달래 꽃이 새롭다]
[KT 통신탑앞에서 바라본 존제산 군부대 일대]
사진 촬영하고 군부대 정문을 향해 전진하기로 하였다.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군부대를 우회하기 위해서였다. 군부대 정문을 향해 도로를 따라 가던중 빗 방울이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으나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고 일기 예보등으로 잠깐 내릴 비로 생각하고 전진하였다.
저앞에 내려다 보이는 이동벌판과 산줄기마다 매달린 자연마을들이 여간 다정하기 이를데 없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들, 그런데로 너르디 너른 저 벌판들, 여순 반란사건때 해방구였다고 소설 태백산맥에서 묘사된 바로 그벌판, 그 마을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군부대로 가는 길에 바라 본 이동 들판과 마을들]
군부대 정문이 가까워지자 지뢰지역 표지판들이 곳곳에 나타나 약간은 긴장감도 돌았으나 개의치 않고 전진하니 출발부터 한 시간 후에 비로소 정문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우회할 길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자신있게 걸어왔던 정문앞에 도착하니 수집자료에서 보았던 우회로는 철조망으로 차단되고 정문은 체인 자물통으로 굳게 잠겨있었다. 도착해서 느낀 것이지만 존제산 우회로는 군부대에서 그때 그때 발견하면 차단하거나 막아버려 인터넷이나 소문 등으로 수집한 정보만으로는 통과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두 세가지 정도의 최신 루트 정보를 가지고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군부대 정문 앞에서 - 철문은 쇠사슬로 굳게 잠겨있다. 그러나.....]
큰일났다. 낭패다. 이걸 어떻하나. 철조망 밖으로 우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회로는 없었다. 지뢰조심 표지판도 무시하고 우회로를 개척하기로 하고 철조망 왼쪽으로 내려 갔으나 이건 정글 저리 가라였다. 옷과 손이 찢기고 전진도 쉽지 않았다. 빗방울도 계속 조금씩 내렸다. 저 앞을 보니 시간 좀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얼다. 군인들이 버린 각종 음료수병과 옷가지 등으로 상당히 지저분하였다. 환경단체가 이런데 보면 시끄럽겠다는 것과 군부대 철수시 환경 복원할려면 고생 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기전에 대책수립이 필요하며 저 아래 마을들이 알면 항의가 빗발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마을 사람들은 여기서 내려간 지하수 우물 물 먹고 살고 바로 상수원이 이 곳 산능선, 계곡등이 아닌가 말이다. 그 동안 약 40년 넘게 군부대가 주둔해 왔으니 아무리 청결하게 유지했다고해도 오염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전진해야 했다. 뒤 따르던 김 준호과장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며 마지 못해 따라오는 것 같았다. 약 30분 정도 지났지만 얼마 전진하지는 못했다. 그러던중 정문 근처에서 사람들이 왁자지껄했으며 올려다 보니 남여 등산객들이 웅성거리며 우리에게 우회로를 물었다. 우회로는 다 막혔으니 우회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별 수 없이 이쪽으로 우리를 따라 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묵묵히 전진했다. 잠시후 저위에서 우회로를 찾았다는 소리와 함께 후퇴하여 자기들 뒤를 따르는 것이 빠르다고 했으며 우리 일행 두 과장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빠르다는데 동의하여 다시 정문 쪽으로 돌아갔다. 정문에 도착하니 우회로 개척에 헤맨시간이 1시간정도 였다. 우리에게 군부대 통과 길을 알려준 그 사람들은 동두천 산악회에서 온 정맥 탐사꾼 들로 40 여명이 관광버스를 타고 와서 세벽 4시반에 빈개재에서 시작하여 이곳을 통과하고 있었으며 무남이재에서 오늘 산행을 종료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회로를 찾으면서 얼마나 몸을 혹사했는지 오늘 산행에서 두 과장에게 맛보일 욕심으로 준비한 돌배즙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제 저녁 시골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께서 올해 열린 돌배를 따서 가마솥에다 끓여 즙을 낸 배즙을 맛보라고 내놓으신 것을 이번 산행에 동참할 두 과장들에게 맛보이려고 2홉 소주병에 넣어 배낭 옆주머니에 넣고 산행중이었으나 이것이 분실된 것이다. 그나마 어제 저녁에 한컵 따라 마셔서 덜 억울했지만 애석하였다. 사실 어머니께서 만드신 배즙은 바로 전날인 11월 17일 KBS TV의 VJ 특공대 "2006 겨울 가마솥“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가마솥으로 끓이는 장면이 방영되었던 그 배즙이었다. 2홉 소주병 8병을 만드셨는데 그중에 한 병이었다.
군부대 안 군 막사들은 이미 폐쇄되었으며 군인들은 보이지 않고 통과 길은 아주 안전하고 좋은 상태여서 차라리 정문을 개방하여 정맥꾼들을 안전하게 통과하도록 유도해주는 것이 훨씬 군의 이미지 개선에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회하다가 지뢰라도 터지면 군 이미지 문제도 있고 원망이 어떻겠는가? 현재 군부대 철조망등 시설물 형편상 정맥꾼들은 밤을 세워 왔다가 되돌아 가지는 않을 것이고 군부대를 원망하며 지뢰등을 무릅쓰고 우회로를 찾을 것이고 지뢰라도 터지면 원망은 하늘을 찌를 것이므로 초병을 세워 밤을 제외하고 안전하게 유도 통과시켰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해 보았다.
부대를 통과하여 (통과시간 불과 10분정도) 정상에 오르니 저 아래 모암재(느재)가 보이고 사람 키 크기의 철쭉밭이 펼쳐져 있었으며 봄철 철쭉 꽃들은 듣던데로 정말 장관이겠다 싶어 다시 한번 꼭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멀리 571봉이 보이고 그너머로 주월산등이 펼쳐졌다. 정맥꾼들이 닦아놓은 등산로는 서울 근교의 여느 등산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이번에도 40 여명의 단체 정맥꾼들을 보았듯이 국내 정맥 탐사는 이제 숫적으로 상당한 수준인 것 같았다.
[군부대를 지나 내려다 본 모암재(느재)와 571봉 일대]
영양분이 넘치는 검은 빛의 숨쉬는 흙은 산행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하였으며 조금 전의 우회로 개척에서 입은 상처들과 여전히 떨어지는 가랑비 마져 기분좋게 떨쳐버리기에 충분하였다.
존재산에서 모암재까지는 한참을 내려가는 길이었으며 모암재를 지나 임도를 조금 지난후 571봉을 오르는 등산로는 상당히 가파른 길로 허벅지까지 자란 비에 젖은 가을 풀잎들이 조금은 장애물로 느껴졌으며 특이 등산복 하의를 젖어드는 축축함은 경쾌한 산행의 장애물이 되었다.
생각보다 높아보이는 571봉 정상에서 바라본 세상은 정말 장관이었다. 오른편 율어쪽은 모암마을을 비롯한 조금은 작은 선암리 마을들, 왼편으로는 벌교쪽으로 통하는 마을들과 저수지등이 펼쳐졌고 앞쪽으로는 조성의 대곡리 저수지와 주변 마을들이 상당히 촘촘히 박혀있었다. 율어쪽 바로 아래 보이는 잘 가꿔 놓은 잔디밭 축구장(?)과 연못이 한눈에 들어왔으며 이곳이 소문으로 들은 흑염소 방목을 하는 농장인 모양이었다. 이 곳까지 올라오는 임도도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선암리와 모암마을 그리고 흑염소 농장]
571봉을 지나서 다음 목적지인 광대코 삼거리까지는 평탄한 능선길로 능선길 좌우로 율어와 조성이 훤희 내려다 보여 동네마다 가가호호를 셀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조성 대곡 저수지 윗편의 골프장 건설지역은 헤쳐 놓은 토사들이 뚜렷하게 눈을 사로 잡았다. 골프장이 완공되면 이곳 산행 길도 사람들의 발자국에 더 많이 단련되리라 생각해 본다. 날씨가 화창했더라면 더 멀리 시계를 ?暉? 훨씬 많은 꿈의 실현도 가능했을 것이다. 드디어 광대코삼거리가 나타났고 여기서 초암산 길과 주월산 길이 나누어졌다.
초암산은 내고향 참샘마을에서 항상 보이는 산이고 언젠가는 직접 가봐야 할 산이지만 오늘은 접기로하고 주월산을 향해서 전진하기로 했다.
[광대코 삼거리 이정표에서]
광대코 삼거리에서 부터는 등산로를 따라 하얀 나일론 줄이 길 양편에 설치되어 등산로를 이탈할 가능성은 없었다. 지금까지의 등산로가 우거진 잡초속에 정맥군들의 발걸음만으로 다져논 길이었다면 하얀 나일론 줄에 의해 인도되는 지금부터의 등산로는 고속도로와 같은 느낌이 들어 정맥군들에게는 여간 고맙기 그지 없었다. 소재 면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광대코 삼거리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주월산을 향하는 길은 경사진 내리막이었으나 밟은 흙은 검고 부드럽기 그지없어 피곤을 느낄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부터는 산행길이 훨씬 가벼워 질거라는 느낌이었다. 다만 불만족스러운 것은 이슬비가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광대코 삼거리 경사지를 내려오니 그 유명한 무남이재 사거리 이정표와 만날 수 있었고 조성면 대곡리와 겸백면 원수남간에 상당히 잘 정리된 임도가 나 있었다. 또한 신선한 것은 이 곳에서 비교적 자세한 등산로 지도 현판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셋은 기분좋게 기념사진을 한 컷하고 잠시 쉬는 동안 동두천에서 온 정맥꾼들과 이별을 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위안이 되었는데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했다. 조성면 대곡리 쪽에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단다. 시계를 보니 12시를 조금 넘었다. 점심 식사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단은 더 전진하여 주월산 정상부근에서 식사를 하기로하고 준비해간 귤 몇 개와 군것질로 떼우고 일단 전진이다.
[무남이재 등산로 지도 앞에서]
하얀 나일론 줄을 따라 주월산을 향해 올라갔는데 생각보다는 쉽게 정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 정맥능선 길이 그러하듯 주월산 정상도 완만함의 연속으로 정상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아 일단 급한불은 껏다 싶은 정상 부근의 바람막이가 되는 장소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점심은 산행꾼들이 그렇듯 간단한 김밥을 준비하였다. 일인당 두줄씩으로 오늘 아침 김준호과장이 광주에서 이른 아침에 사온 것이다. 아파트 지역내 김밥집 아주머니는 주말 아침 세벽이면 찾아오는 단골과는 달리 오늘은 낮선 사람이 찾아오니 궁금했던 모양이다. 산행길이 어디냐 자주 등산하느냐 등 신원파악에 열중이더라는 것이다.
김밥과 준비해간 간식등을 먹어 치우고 또 전진해야만 했다. 주월산 정상이 가까웠기 때문에 확인해야만 했다. 바로 보이는 곳이 정상이려니 생각하고 올라가니 컨테이너와 찢어진 비닐 하우스가 나타났다. 페러글라딩장 표지판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아마도 페퍼글라딩을 위한 동호인들이 준비해 놓은 시설물들 같았다. 이쯤에 이르니 생각보다 많은 이술비가 내리고 있었고 비닐 하우스는 우리들의 비가림을 해줄 최적의 장소였다. 잠시 배낭을 점검하고 비닐 옷을 입기로 하였다. 좀 칙칙하지만 바지로 스며드는 싸늘한 가을 비를 내버려 두기는 부담스러웠다.
무장하고 조금 돌아가니 페러글라딩 활공장이 나타났다. 잔디를 심어 잘 정리된 넓은 활공장이었으며 눈 앞에 펼쳐진 저 아래 동네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득량면 예당평야와 간척지 갑문들 아닌가? 그리고 보니 571봉 정상에서부터 광대코 삼거리, 주월산 페러글라이딩 표지판 있는 곳까지 왼쪽 산 아래 펼쳐진 경치는 조성면 대곡리, 대곡 저수지, 골프장 건설공사장등의 연속이었다. 마음 한 구속에는 언제쯤 저 경치를 벗어나나 기다려온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부터는 왼쪽으로 예당들판을, 오른쪽으로 겸백면의 산자락을 보면서 전진이다. 가야할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그러나 목적지가 어느정도 나타난다. 지나온 길은 저 멀리 까마득하여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저 길을 지나왔다는 말인가? 우리들은 서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다음 목적지 방장산을 향해 전진하였다.
[주월산에서 바라 본 예당 들판 일대]
주월산에서 방장산을 향하는 등산로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길잡이였던 하얀 나일론 줄과는 아쉬운 이별이고 등산로로서는 제법 잘 정리된 작은 폭크레인이 지나간 정도되는 주변 마을 사람들이 자주 찾는 등산로 정도되는 산행길이 우리와 함께하였다. 이술비도 멈추고 등산로 는 제법 어우러진 소나무 숲과 검정색 영양분이 풍부한 흙을 밟고 걷는 기분은 이번 산행을 시도한 또 다른 소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방장산까지는 즐거운 산행이었으며 어렵지 않게 방장산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방장산 정상에는 KBS 중계소가 있었고 산 아래 주민들의 산행로이고 중계소 직원들이 사용하기 위해서 인지는 모르나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비닐 옷도 벗어버리고 이제 한시간 정도면 목적지 오도치에 도착하겠다는 느낌이 들어 어머니께 전화를 해 시골닭 백숙을 부탁드렸다.. 좀 죄송하기는 했지만 회사 동료들이 이번 산행에 동참해 주어 그리도 그리던 이번 산행을 결행할 수 있었지 않은가? 닭 백숙 정도는 어머니께 죄송하지만 할 수 없다. 두 과장들은 불편하니 절대 반대다. 바로 광주로 가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럴 수 있는가?
저 아래 득량쪽은 예당벌판, 간척제방, 갑문들과 국도 2호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고 오른쪽으로는 저멀리 보성강 댐이 뚜렷하게 보였다. 정말 새롭다. 여기 오지 않았으면 볼 수 없는 장면아닌가. 보성강 댐은 1936년에 준공된 설비용량 5천 킬로와트 용량의 아주 소형 설비로서 전력생산용으로는 손해인 설비다. 지금은 전력생산보다는 예당들판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 주 목적이란다.
[방장산에서 바라 본 보성강 댐]
방장산 정상에서 우리가 지나온 행로를 돌아보니 정말 희미하게 펼쳐진 존제산, 571봉과 광대코 삼거리, 주월산 등으로 이어지는 능선들이 우리들의 발자취를 의심케 할 정도였다. 이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컷씩하고 다시 전진이다.
내리막으로 치달르니 파청재에 이르렀다. 등산로 표지판을 보니 오도재로 가는 길 표시가 없었고 오도로 가는 길 표지만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능선길을 따라 전진해야 우리가 향하는 오도재에 도착하는데 길이 뚜렷이 안보여 오도로 향하는 길을 따랐지만 오도는 오도재 아래의 작은 마을 이름이었으며 결국 우리는 오도재 중턱에서 목적하는 지방도와 만날 수 있었다. 시각은 오후 4시30분 정도 그러니까 8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주릿재 군부대 통과를 위해 우회로를 물색하느라 소모한 1시간을 제외하면 7시간 30분이 실제 소요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산행은 초행 길로 늦 가을 산행은 빨리 시작해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함이 앞서 충분한 휴식없이 좀 서두른 결과라는 생각도 해본다.
파청재에서 내려오는 길은 약간은 지루했지만 그래도 밟는 흙은 부드러웠고 이번 산행이 예사로운 산행이 아니어서인지 정말 가쁜한 기분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겸백 택시를 불러타고 우리 시골집이 있는 참샘마을로 가서 닭 백숙을 먹은 뒤 내차를 타고 이동석 과장 차가 주차되어 있는 주릿재로 가기로 했다. 택시비는 오도에서 참샘마을까지는 8천원이었고 운전기사에게 물어보니 오도재에서 주릿재까지는 2만원이라는 것이다.
[오도마을 입구에서 등산을 마치면서 - 택시 기사에게 한 컷 부탁]
택시에 몸을 싣고 참샘 마을로 향하는 몸은 피곤이 밀려오는 것 같았지만 마음은 정말 뿌듯했다. 그 동안 동경했던 기억 속에 멀리있던 그 산들을 직접 밟아보지 않았는가? 이번 산행을 감행하도록 용기를 주었고 기꺼이 함께해 준 두 과장들이 고마울 수가 이를데 없었다. 그 분들이야 특별한 의미가 있겠는가. 하루 호남정맥 중 한 구간을 가 볼 기회와 이슬비 내리는 날의 산행, 좀 긴 시간 그렇게 힘들지 않은 산행을 했다는 정도의 느낌에다 굳이 특별한 것이라고는 겁 없이 지뢰를 찾아 한 시간 정도 해멘 결과 지뢰를 찾지 못했다는 것, 군 부대를 어렵게 지나 등산해 본 경험 정도가 특별했지 그렇게 큰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한번 더 올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니 대답이 한번 정도는 와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산행로라는 정도의 대답이다.
다음에는 목적지와 시작지를 반대로, 초암산도 한번, 오도재에서 중간점인 느재까지 구간 등 일부구간 정도를 도전해 보고 싶고 더욱이 아내와 아들, 딸과 함께 다음 산행을 준비하리라 다짐해 본다. 퇴직 후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기적으로 산행을 할 좋은 등산로라고도 생각해 본다.
참샘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께서 시골 닭을 두 마리나 삶아 놓으셨다. 닭이 작아 두 마리를 잡으셨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맛있게 먹고 한 5년전에 담궈놓은 매실주 한잔씩을 마시고 주릿재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들은 주릿재에서 차를 타고 주변의 낙안민속촌 근처에 있는 낙안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주릿재를 올라가면서 우리가 오전에 지나갔던 능선을 시선으로 더듬어 보니 뿌듯하기만 했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렀다. 우리들은 샤워를 서둘러 끝내고 두 사람은 바로 광주로 향하고 혼자서 참샘 집으로 돌아왔다.
운전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 동안 그리워했던 존제산과 주변의 산능선을 밟아보고 산능선의 숨소리까지 느낌으로 받아낸 하루가 정말 잊지 못할 날이었다. 나 같은 희열과 느낌을 맛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이번 산행에 동기부여를 하고 에너지를 공급한 또 한가지는 대학 졸업반인 우리 딸이 몇일전 삼성전자 입사시험에 합격했단다.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아마도 이런 일들이 이번 도전에 결단과 동기부여의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참으로 행복감을 느끼면서 참샘마을 집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준비해 놓으신 뜨끈 뜨끈한 사랑채 온돌 방에 등을 대고 그냥 쓰러졌었다. 아마도 기억은 못하지만 행복한 꿈도 많이 많이 꾸었을 것이다.
2006년 1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