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을 위한 민족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살육을 자행한 그들과,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을 위해 반란군을 소탕한다는
당위성만으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토벌대....어떠한 명분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들의 행위는 우리들 모두의 비극이며 우리들 모두의 한 맺힌
슬픔이었다.
패주반군과
남로당의 합세 48년 11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빨치산들의 출몰지역은 급속히 확산돼 갔다. 이는 반군 지휘부가 장기 유격전술을
채택하고 병력을 분산시킨 결과였다. 한편으로 이는 14연대 반란군들이 주력을 형성한 지리산 지역의 반군들과는 별도로 각 지방의 남로당
조직이 본격적인 무장 투쟁 조직으로 전환한 결과이기도 했다. 48년의 [2.7투쟁]과 [5.10선거 반대 투쟁]을 통해 부분적인 무장 투쟁
전술을 채택해 비폭력적인 정치 투쟁을 지원토록 했던 남로당은 제주 4.3 사건과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모든 합법활동을 포기하고 유격
투쟁이라는 단일 전술을 채택한다. 14연대 반란이 부른 숙군으로 군 내의 당 조직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손실을 입었지만, 남로당은 1주일
여 동안 전남 일대를 뒤흔든 이 사건 당시 궁핍한 생활에서 비롯된 주민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14연대 반란군의 입산과 곳곳에서
있었던 경찰서,지서 습격으로 상당한 무기를 획득함으로써 무장 투쟁 수단을 확보하기도 했다. 순천과 여수가 탈환되고
군경의 색출 작업이 전개되면서 무장을 갖춘 채 잠적했던 각 지역의 남로당 조직은 14연대 반란군이 주축이 된 지리산의 반군 주력이 분산하자
이들과 합세해 곳곳에서 관공서를 습격했다. 한동안 구례지역에 한정됐던 관공서 습격은 11월 중순 이후
곡성,남원,무주,장수,거창,함양,산청,진주,하동,광양 일대로 번져 나갔다. 지리산의 반군들은 당시 세 방향으로 나뉘었다. 일부는 섬진강을
건너 남으로 이동해 백운산에 근거지를 마련했고, 일부는 태석봉(산청) 일대의 산악지대로 이동했다.남부 소백산맥의 주요 산악을 모두 거점으로 했던
셈이다. 이들이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크고 작은 [보급투쟁]을 서두르면서 주민들은 밤낮으로 이들과 토벌대 사이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낮에는 대한민국,밤에는 인민공화국]이란 말이 이때 벌써 나왔다. 낮에 군경 토벌대가 들어오면 태극기를 게양하고, 밤에는 인공기를
달아 빨치산의 약탈을 모면하려는 어쩔 수 없는 처세가 빛은 말이었다. 그래도 공무원과 우익 인사, 부농들은 빨치산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생필품을 오로지 보급투쟁으로 얻어야 했던 그들은 [생존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과제와 [빨치산은 인민의 편]이라는 주의 주장의 상충을 피하기 위해
공공시설과 부농,우익 인사의 집을 습격,약탈하는 방법을 택했다. 생활상이 극도로 궁핍했던 당시의 지리산 주변 지역 주민들은 소수에 가해지던
빨치산들의 폭력도 두려웠지만 다수를 대상으로 한 군경 토벌대의 닦달 역시 고통스러웠다, 분산된 빨치산들의 거점을 찾는 토벌대의 노력이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구례 전투 이후 잇단 소규모 습격 사건을 대하고서도 토벌부대는 주민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빨치산들은 산악지대 곳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겨울을 지낼 물품을 확보한 채 동면에 들어갔다. 3월 중순께부터는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계속됐다. 그러나 쫓기는 빨치산들의 종적은 좀체 잡히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다. 지리산
주변은 빈농과 나무꾼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대대로 부농들의 전답을 소작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온 그들은 땅에 대해 사무치는 한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하의 암담한 시절을 거쳐 해방을 맞은 뒤에도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궁핍은 떠나지 않았다. 해방 후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전성기를 이루던 때 대다수 주민들은 그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땅을 준다는 좌익계의 선전 활동에 감화를 받았었다. 여순반란
이후 입산 공비들의 활동이 본격화된 때에도 그들은 늘 땅에 대한 약속을 잊지 못했고, 이 때문에 공비들에게 자진해 협조하기도 했다. 한편
자의든 타의든 일단 공비들에게 협조한 주민들은 군경의 지목을 받았고, 그들이 택할 길은 산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빨치산들은 당시의 상황이 만들어낸 공산주의자였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활동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주변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주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을은 은신처이자 정보 수집처이며 식량을 비롯한 물자를 조달할 수 있는
보급창이었다. 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일시적으로 빨치산에 협력했다 하더라도 관용으로써 그들을 어루만져야 하는 것이 토벌을 성공으로
이끄는 최대의 관건이었으나 그것은 단시일 내에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토벌부대의 책임도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위정자들의 안이한
태도였다. 부패와 무능이 만연하고 국민들의 삶이 피폐한 곳에서 언제든 공산주의는 창궐할 수 있었다.
김지회의
최후 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는 홍순석, 김지회 등 반군 지휘부를 포착하기 위한 요로 매복작전에 돌입했다. 소규모로
분산한 반군들을 지리산을 뒤져 찾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 했던 데다 그들이 반드시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라도 산기슭의 마을을 찾으리라는 계산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 예하의 각 부대는 지리산 자락의 주요 마을에 포진하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 3연대 3대대도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에 주둔해 주변의 산간마을에 빈틈없는 정보망을 깔아 놓았는데 바로 이 그물에 반군 지휘부가
고스란히 걸려들었다. 20여 호의 자그마한 마을인 내산면 반선리의 주막집 여주인을 회유한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3대대의 김갑순 상사는 과부인 여주인에게 화장품을 선물한 다음
[이곳은 공비들의 통로이니 주의를 기울였다가 그들이 오면 밥도 주고 술도 준 다음 가능하면 재우고 꼭 부대로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가끔씩 들르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4월9일 새벽 3시께 반선리의 청년단장이 입석리로 달려와 [지금 30명 가량의 공비들이 주막에
와서 밥을 요구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대대장은 즉시 6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선을 향해 달렸다. 모처럼 따뜻한 밥과 술을 대하고
피곤한 몸을 온돌방에 뉘었던 반군들은 새벽의 정적을 깨고 달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늦었었다. 새벽 달빛이 내리
비추는 가운데 차 위에서 일제 사격이 가해졌고 총성이 멎었을 때는 모두 17구의 시체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또 미처 달아나지 못한 7명의
반군이 손을 들고 나왔다. 생포된 반군 7명중에는 문화부장이 있었는데 그는 토끼털로 만든 상의를 입고 농구화를 신은 채 숨져 있는 사람을
홍순석이라고 확인했다. 홍순석의 안주머니에서는 도장도 나왔다. 또 정치부장,후방부장 등도 시체더미 속에서 확인됐다. 그러나 김지회나 그의
처 조경순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일단 산 속으로 달아난 것으로 간주됐다. 며칠 뒤 반선보다 한결 깊은 골짜기였던 덕동리 달궁 마을에 여자가
낀 수명의 반군이 나타났다는 주민의 제보를 받은 군은 현장에 잠복했다가 문제의 여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바로 김지회의 처
강경순이었다. 그녀에게 김지회의 행방을 추궁했지만 대답은 [반선에서 국군의 기습을 받은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한동안 수색이 계속됐으나 김지회의 행방은 묘현했다. 김상사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주민들을 모아놓고 [최근에 까마귀 떼가 모여드는 곳이
없었느냐]고 물어보았다. 한사람이 [연정(連井) 마을 골짜기에 그런 곳이 있다]라고 알려 줘 일대를 수색한 결과 시체 한 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부패 정도가 심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 쉽사리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평상복을 입고 있었고 신분을 확인할 만한 아무런
물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남원의 지전사에 갖혀 있던 조경순에게 김지회의 신체 특징을 물어본 결과 구례 전투 당시 등에 입은 총상의 흉터를
알려줬는데 사체의 등에서 찰과상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김지회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 사체를 남원으로 옮겨 조경순에게
직접 보였는데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남편임을 확인했다. 결국 김지회는 반선에서 중상을 입고 달아나다 뱀사골 입구의 연정 마을 골짜기에서 숨진
것으로 판명됐다. 14연대 반란 이후 꼬박 6개월만의 일이었다. 경찰로부터 빼앗은 백마를 타고 다니며 군경에 대한 크고 작은 기습전을
지휘했던 그는 빨치산들에게는 신화적인 인물이었으며 군경 토벌대에는 그만큼 골치 아픈 존재였다. 이름없는 골짜기에서 까마귀밥이 되고 만 그의
최후는 나중에 수많은 빨치산들이 맞게 될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처 조경순은 제주도 출신으로 생포될 당시 20세의 나이였다.
그녀는 광주의 전남도리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던 중 입원한 4연대의 청년 장교 김지회를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14연대 반란이 일어나자
함께 산으로 들어간 그녀는 늘 그림자처럼 김을 따라 다녔다. 최초의 여빨치산이라 해도 좋을 그녀는 한동안 군경에 이끌려 귀순을 촉구하는 각종
주민대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끝내 전향을 거부한 채 49년 9월 처형됨으로써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한편 홍순석,김지회 사살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던 반선 주막의 여 주인은 그 후 빨치산 잔당의 습격을 받고 돌에 짓이겨진 눈뜨고 보기 힘들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됐다. 보복과
경고의 뜻을 함께 지닌 행동이었다. 이 사건은 토벌부대의 보호가 미치지 못한 결과라는 점에서 대단한 아쉬움을 남긴 동시에 당시 주민들이 처했던
아슬아슬한 상황을 시사하는 예이기도 하다.
거창
양민 학살사건 견벽청야 (堅壁淸野)를 기본 방침으로 호남.지리산지구 빨치산들을 토벌하던 당시11사단에 의해
51년2월10~11일에 걸쳐 거창군 신원면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9연대(연대장 오익경 대령)와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으로 말 그대로 주민들에 대한 견벽청야 작전이 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이다. 신원면 소재지인 고정리에서 1006번 도로를 따라
대현리 쪽으로 500여 미터 가면 오른쪽에 신원중학교가 나온다. 그 바로 왼쪽 언덕배기에는 두 개의 커다란 무덤과 정으로 비문이 쪼아진 위령비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서기 1951년 1월 6일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과정리에 천인공노할 사실이 있었다. 저
6.25동란의 공산군 남침으로 피를 흘린것만도 겨레의 역사위에 뼈저린 자취를 남긴 일이라 하겠거늘 하물며 일부 미련한 국군의 손에 의하여 죄
없는 양민들이 집단 살육을 당했음이라. 당시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씨의 발의로 국회 조사단의 손에 의하여 그 사실이 천하에 발표된 채 남은
친족과 동포들의 통곡 속에서 어느덧 3년의 세월이 지나가 마침내 희생자들은 얼굴조차 분간할 길이 없어져 1954년 음 3월3일 다만
남자,여자,소아만을 구별하여 새 무덤에 안장하니 남자 1백9명, 여자 1백83명, 소아2백25명 합하여 5백17명이었다. 그리고 다시 6년이
지났건만 고을 동포들은 쓰라린 기억을 잊지 못하고 한덩이 묘비를 세워 그립고 애통하는 정을 표하고자 하므로 이제 그 간절한 뜻을 받들어 붓을
들었건만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은 것이라 차마 무슨 말로 뒷세상에 기록을 남기겠느냐. 다만 여기 손을 씻고 외로운 혼들의 명복을 빌며
부디 후세 자손들에게 정의와 동포애를 가져라 경고할 따름이다. -단기 4293년 경자(庚子) 9월 이은상(李殷相)은 글을 짓고 신자한(愼字漢)은
글씨를 쓰고 신원면민은 삼가 이 비를 세우다.] 4.19직후 국회 양민 학살 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가 당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의
희생자는 5백17명을 포함,모두 7백19명에 이른다. 신원면은 북으로는 감악산(951m), 서로는 갈전산(763m), 보록산(796m),
동으로는 월여산(862m)등에 둘러싸인 오지중의 오지다. 산청군 오부면,차황면 일대에서 준동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의 공세를 피해 군계를 넘어
자주 신원으로 들어왔고 감악산 때문에 거창읍에서 토벌해 들어가기 어려웠던 관계로 수시로 공비들의 침습을 받아야 했다. 51년 2월 당시
9연대는 지리산 동북부의 거창,산청,함양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거창읍에 주둔하고 있던 3대대도 산청,함양에서의 토벌전에 맞춰 2월5일 신원면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에 나섰다. 감악산을 넘어 50년 12월5일 신원지서를 습격한 오부면의 공비들을 추적해 오부면까지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빨치산들이 우글거릴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면소재지인 과정리를 수복한 3대대는 대현리,와용리로 계속
이동해 2월8일에는 차황면에 으르렀다. 당시 약 2개월 동안 신원면을 장악했던 빨치산들은 미리 정보를 알았던지 군 토벌대를 피해 흩어졌다가
토벌대가 지나가자 다시 모여들어 갓 수복된 신원지서를 습격해 경찰 경비 병력을 거창 방면으로 내몰고 면사무소를 불태웠다. 이 습격으로 신원지서의
경찰관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뒤늦게 오 연대장으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질책을 당한 한동석 소령은 급히 부대를 몰아 다시 과정리로 들어가
작전 지휘소를 설치했다. 이번에도 역시 공비들과의 접전은 없었다. 2월10일,3대대는 다시 대현리를 거쳐 와용리 쪽으로 수색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냥 마을을 지나치지 않았다.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따라 청수리 청연 부락에 들어간 3대대는 공비들의 행적을 캐묻다 아무런
소득이 없자 주민 76명을 논바닥에서 집단 총살해 버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3대대는 이어 와용리,대현리의 11개 부락 주민들을 강제
이주 시킨다면서 과정리 신원국민학교의 대대 본부로 끌고 갔다. 10일 저녁, 발걸음이 느려 뒤쳐진 1백6명의 주민이 다시 탄량골에서 학살당했다.
그리고서 1천여 명의 주민들이 신원국민학교의 4개 교실에 수용돼 떨며 밤을 새웠는데, 2월11일 날이 밝자마자 군경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5백여
명이 300여 미터 떨어진 박산골로 끌려가 떼죽음을 당했다. 이 같은 사건 경과는 신원면 사람이면 누구나 또렷이 증언할 수 있을 만큼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아 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내무장관이 해임되고 당시
민사부장이던 김종원(국회 조사단 방해 사건 주모자)은 징역 3년, 오익경은 무기징역,한동석은 징역10년의 형을 받았으나 1년 정도 복역후 모두
특사로 풀려났으며 한동석은 강릉,춘천 시장에, 김종원은 치안국장을 지내는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반면 한을 안고 살아 남아야 했던 신원면의
주민들은 4.19이후에야 과정리 박산골 희생자들의 위령비를 세울 수 있었다. 60년 5월11일 위령비 건립시 주민들이 방임으로 일관한
학살사건 당시의 박영보 전 면장을 돌로 쳐죽여 화형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5.16 쿠테타로 유족회는 반국가 단체로
지목됐고 묘비는 정으로 쪼인 채 땅 속에 묻히고 봉분은 파헤쳐졌었다. 최근에야 유족들이 다시 모여 위령제를 지내고, 봉분을 다듬고,묻혔던
위령비를 파낼 수 있었다.
이현상의
최후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의 체결로 꼬박 37개월간 계속된 전쟁은 끝났다. 실날 같은 기대속에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계속해 온 산중의 빨치산들에 있어 휴전은 사실상 사형 선고였다. 주민속으로의 잠적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당시 그들의
희망이라곤 북으로부터의 손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한은 2년 동안 계속된 휴전회담을 통해 한번도 공식적으로 남한 내 빨치산들의 안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53년 4월부터 시작된 남로당계에 대한 검거 및 처형은 남한 빨치산의 근간을 위협하는 안으로부터의
칼날이었다. 4월 남로당계
시인으로 [빨치산의 노래]의 작사자인 임화(林和)의 체포로부터 시작된 남로당계의 숙청은 8월 들어 재북 빨치산 총책 이승엽,부책 배철등
10여명의 처형에 이르러서는 되돌일 수 없는 흐름으로 굳어졌다. 제2병단,남부군 사령관,제5지구당 위원장등을 지내면서 남한내 빨치산의
최고지도자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이현상의 죽음도 이 같은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현상은 공식적으로 53년 9월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됐다. 당시 서전경사(서부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 2연대장이었던 차일혁씨의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에 남아 있는 이현상의 사살
경과를 살펴보면 [이형련의 정보를 바탕으로 서전사 전방 지휘소를 용강에 설치하고 2연대는 본부를 쌍계사로 전진 배치했다. 이현상이 있다고
알려진 빗점골은 쌍계사에서 4km 남짓한 거리였다. 9월6일 빗점골 부근을 수색하던 618부대는 원범리에서 빨치산 송덕룡 부대원 7명이 마을에
나타나 식량을 빼앗아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창기 1소대장은 이들을 추격해 아침을 먹고 있을 때 기습, 김진영과 김은석을 생포했다. 심문결과
두 사람은 제 5지구당이 해체되기 전 이현상의 7인조 호휘병으로 있었다. 둘에게서 다시 한번 제5지구당의 해체와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돼
빗점골에 은신하고 있고 조만간 경남 도당으로 이송될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나는 김진영과 김은석을 수색대에 편입시켰다. 9월 13일,
서전사 작전 명령 9호가 하달됐다. 빗점골을 완전 포위.수색해 이현상을 생포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작전은 같은 지역에서 작전을 펴고 있던
국군 56연대로 인해 연기됐다. 국군 측에서도 모종의 정보를 입수한 듯했다. 9월17일, 나는 수색대로 하여금 빗점골 일대의 6개 지점에
매복케 했다. 수색대는 20시께 3~4명의 공비들과 조우해 접선을 벌였으나 공비들은 순식간에 도주하고 전과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빗점골에
공비들이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고 이현상의 은신 가능성도 높아졌다. 이미 호휘병도 없이 거의 감금 상태에 있는것이나 다름없는
이현상이라지만 평생을 공산주의 운동에 몸바쳐 온 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작전 상황을 보고받았다. 다음날이
18일 상오 11시 김용덕이 지휘하던 수색대로부터 전과 보고가 있었다. -어젯밤에 전투가 있었으나 공비들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방금
일대를 수색하다가 늙은 공비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김진영과 김은식에 의하면 이현상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엎드려 있는 시체를 발견하고 몇 발의
확인 사살을 하긴 했지만 이현상은 등에 총을 맞고 죽은 것 같습니다. 어제 야간전투 중 총에 맞아 죽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뒤에서 가슴까지 관통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맞은 것 같습니다 - 이현상외 5명의 공비 시체와 노획
무기를 쌍계사에 옮겨 놓았다. 김진영,김은석에 의해 일차로 확인하고 본부 수색대 양희근 외 여러 명의 재확인으로 이현상이 틀림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이현상의 시체는 40대 후반의 중늙은이의 모습이었다. 줄이 선 미제 군복 바지와 농구화가 깨끗한 차림이었다. 군복 안에는 일기와
한시가 적힌 수첩, 가래가 있었고 호주머니에서 염주가 나왔다. 그리고 허리춤 깊숙이 소련제 권총이 들어 있었다. 그 권총은 작아서 호신용으로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보급이 전혀 없던 빨치산들로서는 그 특수 소제 권총은 실탄을 구할 수가 없어서 무기로써는 전혀 가치가 없었다.
빨치산의
궤멸 사사건건 이현상에 반기를 들었고 제5지구당 해체 이후 사실상 서남지구 빨치산들을 총 지휘했던 전북 도당 위원장
방준표는 54년 1월 31일 남덕유산의 아지트에서 죽음을 맞았다. 경남 거제 태생인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한때 교직에도 있었다. 46년 대구
철도 파업에 연류돼 수배를 받고 월북해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유학했었다.전쟁이 나자 전북 도당 위원장으로 임명돼 내려왔고 전북
도당 유격사령관을 겸해 가장 세가 강햇던 전북 유격대를 이끌었다. 53년 7월 북한 중앙당으로부터 파견된 연락원 5명을 장악하고 이현상
숙청(평당원 강등)에 앞장섰던 그는 토벌대에 포위되자 끝까지 저항하다 죽음을 맞았다. 방은 산중에서 부안 출신의 신단순이라는 간호원을
애인으로 삼았는데 21세의 약골이었던 그녀도 방과 같이 최후를 같이했다. 방은 당시 만40세였다. 한편 전남 도당 위원장으로 방과 나란히
이현상 숙청에 앞장섰던 박영발은 54년 1월 중순 뱀사골 비트에서 35연대 수색대에 포위돼 권총으로 자결했다. 경북 봉화의 빈농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토목 노동자로 해방후 전평(노동조합 전국평의회) 토건 노조위원장을 지냈다. 47년 월북해 박헌영의 추천으로 그도 모스크바 공산대학 6개월
특별 과정을 이수하고 전쟁이 나자 전남 도당 위원장으로 내려왔다. 그는 방과 달리 도당 위원장 직책만 맡고 유격 사령관 자리는 그대로
부위원장이었던 김선우에게 맡겨 두었다. 체력이 달렸으나 정신력은 대단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구빨치 출신으로 전남 도당 유격대를 지휘했던 김선우는 54년 2월 27일 광양 백운산 아지트를
습격받자 수류탄으로 자결했다. 일제 때부터 지하 운동을 했던 그는 전남도 유격사령관을 맡아 백아산과 백운산을 오가며 빨치산들을 지휘했는데
지식인이었던 그는 역사,이론서를 늘 탐독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그의 아지트에도 수북히 쌓인 책들이 발견됐다. 한때 호남,지리산 지구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던 이들 빨치산 간부들이 이처럼 빠짐없이 생포,사살되고 극소수를 제외한 빨치산 수부대들도 잇달아 전멸함으로써 54년 봄 들어
호남 지리산 지구는 실로 오랜만에 평정을 되찾았다. 55년 4월1일,마침내 지리산의 입산 통제 조치가 해제됐다. 오랫동안 전투지역이 돼 온
지리산이 드디어 평화의 산으로 되돌아 왔고 골짜기와 능선에서 끊이지 않았던 총소리와 비명소리는 사라졌다. 그 이후에도 지리산과 덕유산 등을
떠돌며 산짐승 같은 생활을 영위하던 공비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55년 4월 1일 현재 남한 전역에는 59명의 공비들이 활동하고
있었고,56년 12월 31일에도 43명이 산간을 떠도는 것으로 파악됐다. 많아야 3,4명이 몰려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던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치안을 위협하는 빨치산이 아니었다. 낮이면 산속에 숨어 있다 밤이면 살금살금 내려와 민가에서 먹을 것을 빼앗아 가는 살쾡이와 같은 생활로
생명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들은 잃어버린 부속품을 지칭하는 듯한 망실 공비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63년 11월 12일, 지리산 기슭인
산청군 삼장면 상내원리에서는 새벽 어둠을 가르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랫동안 경찰의 수배를 받아 온 지리산의 마지막 공비 두 명중
이홍이(李洪伊)가 사살되고 정순덕(鄭順德)이 총상을 입고 생포되는 순간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십여 년이 지나도록 산중을 헤매며 끝내 총을
놓지 않았던 정순덕은 여자의 몸이란 점에서 특히 많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마지막 망실 공비 정의 생포로 빨치산은 흔적조차 끊기고 역사의
기록으로나 남게 됐다.
빨치산토벌기(1) 여기에 씌여 진 글들은 빨치산의 무장투쟁 일지와 토벌작전 일지를 참고하여 간략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날짜별로
나열해본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 일정입니다. 정확한 숫자를 열거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였고, 또한 당시 사상자 집계에 대해선 신뢰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판단 되어지지만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인지라 가능한 한 들춰본 자료들을 그대로 따르려고 했습니다.
48년 6월
2일 대구주둔 6연대의 1차 반란사건이 발생한다. 곽종진(郭鐘振) 특무상사와 이정택(李正澤) 하사가 주동이 되어 병사들을 선동하고,
병기창을 부순후 박격포,기관총등을 꺼내 트럭 5대에 나눠타고 시내로 진출하려고 함. 그러나 군의 제지를 받자 40~50여명이 인근
팔공산으로 도주함, 이 사건으로 8명의 병력 소실을 가져옴.
10월 22일경 여수 14연대의 반란 주동자들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처음 김지회와 홍순석이 먼저 지리산으로 피하고 나중 여수의 잔류 병력을 이끌고 지창수가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 문수골로
스며든다.
10월 27일 여수 14연대 반란이 진압되고 여수를 탈환한 진압군은 남원,구례,화개면,하동,거창,함양등지를 포위하고
지리산으로 도주한 김지회,홍순석을 추격한다. 이때까지 지창수는 광양 백운산에서 아직 지리산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나, 11월 1일까지
실시한 토벌작전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지리산에서 내려오게 된다. 그러나 토벌군을 비웃듯이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란군은 구례,곡성,광양,산청등지의
경찰서나,지서를 습격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진압군이나 반란군 모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어서 쉽게 토벌군의 눈을 피할 수 있었으며,
또한 손쉽게 지역을 오가며 습격을 할 수 있었다.
11월 3일 구례읍 간문리에 배치되어 있던 하사관 교육대는 김지회가 이끄는
반란군의 야간 습격을 받는다. 또한 이들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지서를 점령하고 학교에서 술에 취해 잠든 교육대원을 고스란히 사로잡는다. 그리고
90여명을 포로로 잡고 유유히 지리산으로 잠적해 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11월 5일 진압군 12연대 2대대가
지리산 산동으로 수색작전을 펼치던중 반란군과의 교전이 벌어지는데, 이날 선두에 섰던 5중대 대부분인 70여명이 반란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고
사망 40여명, 부상자 50여명의 큰 피해를 당한다. 그러나 이날 교전에서 반란군의 사상자는 3구 뿐이었다고 한다. 일방적인 패배를
당한셈이다.
11월 7일 11월 3일 잡혀갔던 하사관 교육대생들이 반란군의 부역을 하고 여비까지 받아 돌아온다. 그리고 그날
새벽 자신감이 붙은 김지회 부대는 토벌대를 격파하고 민심을 반란군측으로 돌려 세울 목표로 다시 구례에 침투를 하게 된다. 그러나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토벌대에 의해 많은 사상자를 내고 김지회도 등에 총상을 입고 화엄사 방면으로 퇴각을 한다.
이후 구례에 국한되어 활동하던 반란군들은 남원, 산청,하동,광양등 지리산 인근지역으로 활동무대를 넓혀가기
시작한다. 또한 지리산을 거점으로 광양 백운산과 남원을 거쳐 덕유산, 그리고 산청을 거쳐 소백산맥을 잇는 근거지를 설정하면서, 다가올 겨울에
대비하여 보급투쟁에 서두르게 된다. 이때문에 인근 주민들은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를 내 다는 이중 생활로 말도 할수없는 고초를 겪는것은
뻔한 일이었다. 한편으로 반란군들은 산악지역 마을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정치공작을 지속적으로 해 나간다.
12월 6일 (대구
6연대) 거창방면에 파견되어 있다가 원대복귀 명령을 받은 대구 6연대 1대대 2개 중대병력 380 여명중 좌익계 이동백(李東伯) 상사등이
달성군 월배 부근에 이르러 장교 9명을 사살하고 팔공산 부근으로 도주함.
49년 1월 30일 (대구 6연대) 재무대(보급)
선임하사관과 20여명의 좌익계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중대원의 호응을 받지 못하자 그대로 부근의 산악지대로 달아나버림. 대구지역은 해방전부터
공업화가 상당히 앞서 잇어서 좌익계가 유달리 강했는데 10월 1일 인민항쟁 이후 경찰의 추적을 받던 좌익계 청년들은 당시 대구 6연대에 대거
입대를 해 버림으로 인해 6연대의 성향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들이 벌인 일련의 사건은 여수 14연대의 반란으로 숙군작업에
나서자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날것을 염려해 벌인 일종의 탈출극 성격에 가까웠다. 그러나 팔공산에 입산한 이들은 46년 10월 1일에 발생한
[10월항쟁]의 야산대와 합류해 팔공산 일대를 유격전의 근거지로 확보하게 된다.
3월 1일 육군본부는 호남방면의 남북지구
사령부를 지리산 전투 사령부(지전사)와 호남지구 전투 사령부(호전사)로 개편하고 토벌작전을 강화 시킨다. 이때 지리산지구 전투 사령부 사령관에
정일권씨가 맡게 된다. 그리고 3월 11일부터 지리산 주요 지역에서 토벌작전을 펼치나 쫒고 쫒기는 숨바꼭질만 계속하게 된다.
3월
21일 김지회,홍순석이 이끄는 반란군은 덕유산 인근의 거창군 북상면 황점부락을 점령한다. 그리고 마을 주민의 제보로 추격하는 토벌대와
3월 29일 안의면 인근에서 교전을 벌이고 반란군 90여명이 사살을 당한다. 이후 반란군은 토벌대의 포위망을 뚫고 함양의 괘관산으로 잠입하여
지리산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4월 9일 김지회,홍순석이 이끈 반군 30여명은 지리산 뱀사골 입구인 산내면 반선부락의
주막에서 토벌대의 회유에 넘어간 주모의 속임수에 빠져, 모처럼 따뜻한 밥과 술을 마시고 온돌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 든다. 지리산의 살벌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이들에게는 천하의 진미를 마지막으로 맛 본 것이었다. 반선리 청년단장의 신고로 토벌대가 들이닥치고 새벽 밤 하늘을 가로지르는
총성에 순식간에 17구의 시체가 나 뒹굴게 된다. 홍순석은 현장에서 사살되나 김지회와 그의 처 조경순의 모습은 행방이 묘연했다. 그러나 조경순도
며칠뒤에 반선에서 체포가 되고 김지회는 수색 끝에 연정(連井,현재는 없어진 마을임)마을 골짜기(뱀사골)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한편
홍순석,김지회의 사살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던 반선주막의 여주인은 그 후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차마 눈뜨고는 못 볼, 처참하게 돌에 짓이겨
살해된다. 경찰이나 토벌대의 사후 관리가 소홀했던 탓이었다. 이후 주력 간부들을 잃은 반란군들은 60~70여명이 지리산 부근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산속을 전전하게 된다. 그리고 지전사의 활동도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하지만 지리산 주변 야산대의 빨치산들은 지리산 지구와 달리
소규모로 움직이며 꾸준히 토벌대를 괴롭힌다.
8월 4일 제주 4.3사태의 주역이었던 김달삼이 북한에서 유격전 교육을 받은
정예대원을 이끌고 남파된다.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남하한 이들은 경북 영양군 일월산 일대에서 지방 공비들을 규합하고 북한에서 해상으로 수송돼어
온 무기를 경북 영일에서 수령받아 완벽한 무장을 갖춘채 경주 북방 보현산을 기점으로 [동해여단]이라 불리며 활발한 유격전을 벌인다. 그리고
북한은 수시로 김달삼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육로와 해상을 거쳐 남파 유격대를 파견하기도 한다. 이들이 인민유격대 제3병단으로 이현상의 인민유격대
제2병단과 함께 끈질기게 활동을 한다. 한편 49년 6월말 북한은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속칭 조국전선)을 결성하고 북로당과 남로당을
통폐합하게 된다. 이후 남한내의 빨치산들도 인민유격대로 재 편성이 되고 활발한 병력충원 사업을 벌여 7월 이후에는 빨치산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12월 1일 지리산 지구와 호남지구의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동계 토벌작전이 또 시작된다. 이 토벌작전중 사살
3백50여명, 생포 1백80여명,귀순 약 5천여명이라는 전과를 올리고 50년 3월 토벌이 끝나게 된다. 그리고 50년 6월 민족 최대의
비극 6.25가 발발한다.
50년 8월 25일 8월10일 달성군에서 미군 통신시설을 파괴한 지리산지구 이현상부대는 25일 경남
창녕의 미군부대를 습격하여 백여명을 사살하고 탱크및 차량등을 파괴한다. 이후 9월에는 북한의 정규군과 합세하여 작전을 펼치기도
한다.
51년 7월 이현상이 이끈 승리사단,인민여단,혁명지대등의 독립 4지대는 51년초 소백산지구에 이르러 스스로를 [조선인민
유격대 남부군]으로 부르게 된다. 이후 7월들어 덕유산 송치골에서 열린 6개 도당 회의를 통해 남부군은 4지대와 6개 도당 산하 빨치산 부대를
포괄하는 통합 사령부의 명칭이 된다. 그리고 이현상은 남부군의 총사령관이 된다. 그러나 이현상이 북한의 당 중앙으로부터 지휘권을 위임받은바
없다하여 전남도당 박영발과 전북도당 방준표는 이현상의 권위에 반발을 한다.
8월 18일 남부군은 거림골,중산리골 입구를
가로막은 시천면, 삼장면의 경찰 방책을 3일간의 작전끝에 격파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한편 남부군은 백주 대낮에도 토벌대와 정면 승부를 하곤
했는데 이들은 많은 병력 손실을 잃지만 한동안 침체되어 있던 빨치산 활동에 크게 자극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후 11월까지 빨치산의
활동은 어느때보다 활발하여 열차습격, 은행습격,사찰습격등 전국 각지에서 준동이 끊이질 않는등, 말 그대로 인공사태가 일어난다. 이에 백야전사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개시하게 된다.
11월 30일 토벌작전 사령부가 남원에 설치되자 지리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될것을 미리 예견한 남부군 소속 사령부의 소수 인원과 전북도당 사령부는 각각 광양 백운산과 전북 장수쪽으로 빠져
나갔다. 당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대규모 공습이 있을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왜 지리산을 빠져 나가지 못했을까? 그것은 토벌 작전이 시작되리라곤
생각했었지만 3개 사단과,4개 전투경찰연대, 7개 전투경찰 대대 등, 4개 사단규모의 대 병력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다만 토벌에 대비해
겨우내 산에서 지내야 할 식량과 탄약등의 비축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남부군 직속 81,92사단과 경남도당 57사단은 무장병력
3백명으로 하동의 악양면을 기습한다. 알다시피 악양은 형제봉,신선봉,칠성봉,구재봉을 능선으로 연결하고 그 중앙에 광활하고 비옥한 땅이
있는곳이다. 남부군은 형제봉과 구재봉을 거점으로 악양면을 습격해 마을 주민 5~6백명을 동원하여 벼를 찧는등 겨울철 식량과 보급품 조달을
한다. 그리고 쌀, 소50여두와 ,이불등의 보급품들을 마을 주민들을 이용해 원강재를 거쳐 남부능선을 넘어 조달 해 간다. 보급투쟁을 벌이던
남부군을 토벌대 26연대 3대대가 분기봉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고 이때 남부군 무장대 7명이 사살된다.
12월 1일 전북도당
909연대와 장수 군당의 무장 병력 2백여명과 충남도당 68사단 백여명은 덕유산을 떠나 지리산으로 남하 하다가, 전북부대는 전북 장수의
수분리(水分里)에서 토벌대에 포착되어 추격을 받고 간신히 달궁쪽으로 스며든다. 그러나 충북 부대는 마천의 법화산에서 토벌대 8사단의 공격을
받고 지리산에 닿지도 못한채 궤멸해 버리고 만다.
12월 2일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파도리와 악양면,그리고 산청의 구곡산과
내대리(거림)를 거점으로 수도사단이 토벌에 나서 소규모의 접전만 가진다.
12월 3일 구례 문수리와 악양의 묵계,등촌리와
중산면 중산리,그리고 북으로는 만복대와 세걸산, 함양 휴천면의 문정리,산청의 금서면등으로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지만 남부군과 쌍방이 주고 받는
접전만 있었을 뿐 별다른 전적은 없었다.
12월 4일 수도사단 기갑연대는 구곡산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중산리와 거림골 일대
소탕작전에 들어간다. 당시 거림골에는 악양에서 보급투쟁을 한 이영회(李永會)의 57사단이 있었는데 이들과 전투가 벌어진다. 공군 F-51무스탕기
편대의 지원아래 대공포탄 8발을 거림골에 투하 하는등의 대규모 공습으로 사살 34명, 생포 5백 10명의 전과를 올린다. 당시 거림골에는
빨치산의 아지트와 사령부 건물로 쓰이던 초막등이 몇 채 파괴된채 있었고, 악양에서 보급해간 쌀가마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고 한다. 한편
생포된 포로들중에 대부분은 악양에서 보급투쟁시 끌려간 민간인들 이었으며, 이들은 포로 수용소를 거친 다음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풀려났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한편으론 12월 1일 달궁으로 스며 들었던 전북도당 909연대와 장수 군당은 토벌대 8사단
21연대와 격전끝에 십여명이 사살되고 나머지는 도주를 하게 된다.
12월 7일 노고단,반야봉,명선봉,세석,천왕봉에 이르는 지리
주능선에 대한 본격적인 수색작전이 전개 된다.
12월 15일 제 1기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고 이때 집계된 빨치산의 피해는
사살 9백 40여명, 생포 1천 6백여명, 총기 노획등의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된다. 한편 빨치산 포로들중 북한의 중앙민청 부위원장(위원장은
김일성) 이었던 오운식(吳雲植,당시30세)이라는 거물급도 있었다고 한다. 오는 나중에 육본으로 이송된후 대북 선전 공작원으로 잠시 활동하다가
그의 산중 처(妻)와 함께 동반 자살을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이 된다. 그러나 덕유산,가야산,운장산등의 토벌대 집결지를 뚫고 빨치산
7백여명은 소백산맥을 타고 도주를 한다.
지리산
토벌기(2) 12월 16일부터 52년 1월 4일까지 제2기 작전실시 당시 빨치산의 병력으로는 전북 북부부대는 45사단을
주축으로 전주의 운장산에 약2~4천명이 포진해 있었고, 46사단과 53사단등이 전북도당 남부부대로 내장산, 회문산,성수산(장수군),장안산 일대에
1천5백~2천5백의 총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 박영발 도당위원장과 김선우 총사령관의 지휘아래 있었던 전남 유격대는 화순의 백아산과 순천의
조계산, 광양의 백운산 일대에 약 2천명의 세력을 두고 있었으며, 충남도당의 68사단은 덕유산 주변으로, 경남도당은 산청,거창,함양
주변으로 맴돌고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했었다고 한다.
12월
19일 지리산 반야봉에서 토벌대 예비연대가 빨치산 50여명을 포착해 사살시키고, 경찰연대가 거림에서 재집결을 시도하는 빨치산 잔당
1백50여명을 격퇴시킨다. 이들은 모두 지리산을 떠돌고 있었던 남부군 직속 81,92사단과 이영회의 57사단 소속이었다. 특이한것은 예비대대가
빨치산을 토벌한것은, 그리고 그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지리산에서 당한것은 그만큼 많이들 지쳐 있었고, 추위와 굶주림에 직면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이를 반영하듯 21일에는 노고단에서 줍다시피 33명의 빨치산을 생포한것이 좋은 예이다. 한편 전북의 운장산을 포위 해 들어간
수도사단은 진안군 상전면 고산방면으로 탈출하는 빨치산을 추격해 사살 13명,생포 29명이라는 성과를 올리지만, 21일 새벽 1시경 전북도당
주력부대 약 1천여명은 토벌대의 포위망을 뚫고 고산방면으로 탈출을 해 버린다.
12월 23일 추격한 수도사단은 빨치산
주력부대와 장수군의 성수산 부근에서 추격전을 벌이나, 24일에는 토벌대를 비웃듯이 다시 한번 포위망을 뚫어 버린다. 그리고 28일까지 추가
배치된 토벌대는 빨치산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7백90여명 사살,4백 70여명을 생포하나, 토벌대에게도 약 50여명의 전사와 사상자를 내게
된다.
12월 27일 전북의 회문산,내장산은 전북지구 유격대 남부지대 노영(盧嶺)병단과 46사단이 활동하던 곳이며
특히,회문산은 전북지구 도당이 자리 잡은곳이란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19일부터 시작된 군경토벌대의 쌍치면 가마골 전투에서 빨치산은 사살
4백17명, 생포 8백51명의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이때 생포된 대부분의 빨치산들은 오랜 추위와 굶주림에 모두 지쳐 있어서 싸움다운
싸움한번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죽고 생포되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한편 이 전투에서 토벌대에게도 39명이라는 전사자를 냈었다고
한다.
52년 1월1일 수도사단은 덕유산 일대를 포위해 들어가고 기갑연대는 무주에서,또는 거창과 장수에서 각각 덕유산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간다. 그러나 빨치산의 기습으로 토벌대의 대대장을 포함한 3명의 전사자가 생기게 된다. 한편 수도사단과는 달리 나머지 사단들도
박영발과 김선우 사령관이 이끄는 전남도당 추격을 위해 백아산,화학산으로 투입되고, 또다른 연대들은 백아산,무등산,유치지구,조계산등의 전남도당
사령부 토벌에 들어간다. 이 기간동안 사살 1백50여명, 생포 2백여명에 이른다.
1월4일 지리산 주변의 전남,북. 그리고
충남 도당 유격대와 일전을 치룬 토벌대는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 81,92사단을 찾아 지리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를 위해 지리산 주변의 퇴로인
회문사,조계산,백아산등과 대구 팔공산,장안산등도 차단을 하게 된다. 또한 전남도당이 옮겨온 광양 백운산도 함께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6일부터 대대적인 지리산 토벌 작전이 감행된다.
1월 18일 지형이 험하고 추위가 혹독해서 토벌대의 발길이 미치기 힘들것으로
짐작되던 지리산 천왕봉,촛대봉 일대로 몰려든 빨치산은 기갑연대와 26연대의 압력에의해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죽음의 대성골 한가운데로
걸려든다. 막다른 골목길에 몰린 빨치산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야간 전투로까지
이어진다. 박격포가 비오듯 쏟아지고 공군기들의 폭격도 끊이질 않았다. 백야전사의 작전이 시작된 이래 정규전과 다름없는 전투가 지리산 대성골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대적으로 치뤄진다. 이 전투에서만 사살 3백명,포로 2백 51명이나 되어 대성골에 몰려있던 적세의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이로써 남부군 직속 81사단과 92사단, 그리고 경남도당 57사단은 크나큰 피해를 보게된다. 이후 경남도당 57사단은 떠돌이 부대로
전락하게 되고 만다. 일설에서는 지리산 대성골 당시 전투에서 사라진 빨치산들이 수천명에 이른다고 하고 있으나 그당시 지리산 전역을 통털어
빨치산 총세는 2천명을 넘지 못했었다. 그리고 주변의 세석,거림,범왕리 전투를 합해서도 빨치산이 입은 타격의 총 수는 8백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경남도당의 위원장 남경우와 부위원장,조직부장,선전부장등 수뇌부가 전멸하고,전남유격대 지리산 파견부대장인
오신태,구례군당 조용길등이 사망한다.
1월 25일 지리산 전투에서 승전고를 울린 토벌대는 섬진강 건너 광양의 백운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당시 백운산은 전남도당이 이동해 와 있던곳이었으며 백운산내에는 백운산부대와 7연대,88정치공작대,광양 군당등이 토벌대와 전투를 치르지
않아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가올 토벌에 대비해 보급투쟁에 전념해서 어느 빨치산 부대보다 보급투쟁만큼은 유능하다는 평가를 얻고
있었다고 한다. 지리산의 빨치산들이 보급투쟁을 재대로 하지 못해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을때 전남도당의 백운산유격대 14연대는 넉넉한
보급투쟁으로 토벌작전에 미리 대비를 한것이다. 그결과 25일 아침 백운산 억불봉에서 토벌대인 기갑연대 3대대 본부가 습격을 당해 11명의
사상자를 기록하게 된다. 그리곤 부대의 보급품인 배낭,담요,내의,반합등을 전부 노획하여 백운봉쪽으로 도주를 한다. 당시 백운산지구의
빨치산은 다른 부대와는 달리 토벌부대 주위를 흐린다음 후방을 치고 빠지는 교란작전에 능했다고 알려진다.
1월 26일 대대적인 수색,섬멸전에 돌입한 토벌대는 31일에야 막을 내리는데 근 한달간의
토벌작전중 수도사령부는 지리산,백운산 공격으로 사살 1천8백여명, 포로 1천5백여명의 전과를 올린다. 그리고 8사단도 회문산,조계산,화학산등의
주변 산들의 토벌에서도 사살 1천7백여명,생포1천9백여명의 전과를 올리며, 전북의 운장산,덕유산 일대를 수색했던 서전사(서부지구 전투사령부)도
사살 1백여명,생포 6백여명의 전과를 올리고 막을 내린다. 이후 2월 8일부로 8사단은 토벌작전을 마치고 전방으로 귀대하며,나머지 빨치산
잔당들은 수도사단과 서전사,경찰대가 주로 맡게 된다. 그리고 백야전사도 2월8일부로 임무 해제되게 된다. 그러나 최소한 2천여명의
빨치산들은 52년 3월 이후에도 계속 흩어져 활동을 하게 된다.
53년 9월 18일 7월 27일 37개월간 지속되었던
6.25가 끝나고 휴전협정이 체결된다. 그리고 약 2개월 뒤, 지리산 빗점골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등뒤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관통상을
입고 빨치산 5명과 함께 사살이 된다. 당시 이현상의 사살 전과보고는 군과 경찰이 서로 자기들의 공이라고 우기는 헤프닝도 발생하나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의 손을 들어준다. 한편 북한 평양의 열사묘에는 [남조선 혁명가 이현상, 1905년 9월 27일생, 1953년 9월 17일
전사]라는 묘비가 있다고 한다. 즉 이현상은 남부군 총사령관도 아니고,조선의 혁명가도 아닌 남조선의 혁명가였던 것이다. 이는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 당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것이다. 즉 이현상은 9월 6일에 제 5지구당 해체와 함께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던 것이다.
54년
사사건건 이현상에게 반기를 들었던 전북도당 방준표 위원장은 남덕유산 아지트에서 토벌군의 수류탄 투척으로 40년의 세상살이를 마감한다.
그는 신단순 이라는 부안 출신의 산중처와 함께 아지트에서 24시간동안 저항을 하다가 최후를 맞는다. 한편 전남도당 위원장으로 이현상의 숙청에
앞장섰던 박영발은 1월 중순경 지리산 뱀사골의 비트에서 수색대에 포위돼 권총으로 자결을 한다. 또한 남경우의 후임으로 경남도당을 도맡았던
조병하는 2월 6일 지리산 비트에서 수색대에 생포된 후 5월 17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리고 또한 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으로
묘사되었던 전남도당 부위원장 김선우는 2월 27일 백운산 아지트가 포위되자 수류탄으로 자폭을 한다. 김선우는 일제때부터 지하 운동을 했었으며
전남도당을 맡아 오다가 박영발이 도위원장으로 내려오자 부위원장으로 내려 앉았던 인물로 지식인 빨치산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의 아지트에서도
수북히 쌓인 역사, 이론 서적들이 있었으며 늘 책을 가까이 두고 탐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54년 5월 25일부로 토벌대가
해체되고 남은 잔당들은 남경사(남부경찰사령부)에 맡겨졌으나 이또한 55년 3월말로 해체되고 7월 1일부로 서남지구 전투경찰대도
해체된다.
그리고 55년 4월 1일, 지리산의 입산 금지조치가 해제된다. 그러나 지리산과 덕유산을 산짐승처럼 생활하는 빨치산이
완전히 없어진것은 아니었다. 56년 12월 31일에도 43명의 빨치산들이 지리산 주변 산간을 떠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낮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살쾡이 처럼 마을에 나타나 먹을것을 빼앗아가는, 일명 잃어버린 부속품을 지칭하는 망실 공비라는 이름으로 살아들 갈
뿐이었다. 그리고 63년 11월 12일, 산청군 삼장면 상내원리 기슭에서 새벽을 가르는 한방의 총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랫동안 경찰의
수색을 피해 도망다니던 지리산의 마지막 망실공비 두명중 이홍이(李洪伊)가 사살되고 정순덕(鄭順德)이 총상을 입고 생포되는
순간이었다. 전쟁이 끝난후 십여년이 흐른 세월이었다.
위에서 열거한 숫자의 기록들이 전부 맞다고는 할 수 없을것이다. 이는 군
당국의 기록으로 당시 전과를 올리기위해 일부러 숫자를 부풀려 보고를 했거나, 중복되는 숫자도 있었을것이다.그리고 애꿎은 주민의 희생도 전과로
기록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토벌작전중 마을을 지나칠때면 어른,아이,부녀자,혹은 노인들도 무참히 토벌대에 의해 죽여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포로로 생포된 사람들도 대부분 이념과는 상관없이 끌려간 사람들이었을 것이므로 이들이 그당시 모두 분류되지 않고 수용소를 거쳐 풀려 났다는것도
지금 현 시대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전쟁이 끝난지 50년이 넘었다. 당시의
포화(砲火) 소리는 귓전에서 멀어진지 오래지만 이념과 사상을 떠나 그들이 왜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잠을 잊은채로 지리산에서 울부짖었는가를
한번쯤은 생각해 봤으면 싶다. 지리산을 찾았던 그들은 해방전,후의 계급적, 민족적 모순과, 그리고 지배세력과 민중과의 대립사이에서 취할
수 있었던 가장 최후 수단의 하나였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그들은 민족에게서도, 또 다른 지배세력에서도 버림받아야 하는 처참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진흙탕의 뻘구덩에서 살과 피를 짓이기며 이념과 권력의 욕에 의해 사라져간 그들을 보듬어야 할 사람들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의 몫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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