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를 정치의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맑스와 맑스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언급을 살펴보고, 데리다의 정치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적 맥락과 층위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인지를 분석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정의는 법과 다른 것이다. 법은 힘으로써 정의를 집행할 뿐이다. 정의는 이 집행 너머에 존재한다. 오히려 정의는 법이 아니라, 이 법과 다른 차원에 있는 애도 작업을 통해 호출당하는 것이다. 이 호출은 죽은 자를 불러냄으로써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not-yet-being) 또는 현재 살아가고 있는 자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행위다. 이런 맥락에서 데리다의 용어법에서 애도-유령-정의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존재론(ontology)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윤리(the ethic)의 차원에서 가능하지만, 이 윤리는 존재론적 실체성을 갖는 것이다. 이 실체성은 존재이면서 존재가 아닌, 유령의 질감이다. 데리다의 용법에서 애도는 정의의 명령에 따른 작업(work)이다. 애도 작업은 여러 작업 중 하나가 아니라, "작업 그 자체다". 말하자면, 자크 라캉의 상징계처럼, 애도 작업은 주체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이런 차원에서 애도는 입사(introjection)와 합체(incorperation) 사이에 위치하면서 주체의 출현 자체를 예비한다. 이 주체는 물론 수행적 주체로서 행하는 자다. 이 주체는 "맹세하고, 그 맹세를 선언하며, 그래서 약속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짐으로써, 한 마디로 우리를 실천에 참여시키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수행적인 것으로, 데리다는 이런 수행성을 일컬어, "해석하는 것 자체를 전환시키는 해석"이라고 정의한다. 이 해석은 담론적 해석 밖에서 해석을 사유하도록 하는 무엇이다.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그 지점에서 데리다는 유령을 발견한다.
애도를 통해 출몰하는 것이 바로 유령이다. 데리다에게 유령은 현전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유령은 <햄릿(Hamlet)>에서 제기되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는 문제에 대한 응답이다. 유령은 정의의 자리이다. 이 자리는 해체 불가능한 범주로서 호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유령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은 데리다에게 무의미하다. 오히려 데리다에게 주어야할 정확한 질문은 유령은 어디로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나라"야말로 죽음이다. 이 나라의 경계선에서 유령은 떠돈다. 죽음은 결국 미지이고, 합리적 이성의 추론이 광기와 범벅되는 지점이다. 이 광기의 자리로 유령은 현신한다. 그래서 유령은 광기의 논리다. 고쳐 말한다면, 유령을 불러내는 광기야말로 "정의에 신들린 행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