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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祖)와 종(宗)의 차이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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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祖) |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7명. |
종(宗) |
27명의 왕 중 9명을 뺀 나머지 왕들로 수성(守城)을 한 왕에게 붙임. |
군(君) |
연산군.광해군 |
< 참고 문헌 >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교양국사연구회, 문학박사 이현희 「이야기 한국사」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당시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지금의 간도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 손자 춘이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다. 그러나 이자춘은 원이 고려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당시 원나라는 원주민과 이주민의 대우를 달리하기 위해서 차별
호적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원의 이와 같은 이주민 차별 정책은 이주민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이자춘 등의 고려인 관리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자춘은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하게 된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원은 명에 의해 중원에서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의 힘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실시하였고 이를 위해 동북면 유민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공민왕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한
이자춘은 아들 성계와 함께 공민왕을 도와 고려가 99년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그는 고려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성계는 1362년 쌍성총관부를 재탈환하기 위해 침입한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키면서 장수로서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1369년과 1370년에 걸쳐 만주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동녕부를 공격했으며
1376년(우왕 2년)에는 군사를 남으로 몰아 왜구 토벌에 나섰다. 1377년을 전후하여 고려에 창궐하고 있던 왜구를 경상도, 전라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크게 물리쳤으며 1380년에는 소년 장수 아기바투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하였다. 이 전투를 흔히 황산대첩이라 부르는데, 최무선이 화약과 화통을 응용한 포를 등장시킨 것이 이때이다.
*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
1388년 이성계는 명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격했다. 개경을 함락시킨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명령한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폐위시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 이 해 4월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그리고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고는 드디어 요동 정벌을 감행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위화도에 당도한 것은 5월이었고 전열을 가다듬어 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이었는데
장마가 시작되어 압록강 물이 불어나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에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한다.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와 최민수는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낸다. 그리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창왕은 겨우
아홉 살의 나이에 올랐으니 이때가 1388년 6월이었다. 그러나 창왕이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이유로 이듬해 11월 폐위 당하고 제 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을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이다.
그 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었고 마침내 3년 뒤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로써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조선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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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7월에 고려 국왕으로 등극한 이성계는 즉위 초에 고려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등도 고려의 것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이듬해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그 후 1394년 10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이성계는 1)개국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 편찬과 2)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3)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렇게 이성계는 새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성공하지만 왕자들 사이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 노년에는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성계는 즉위 직후 계비 강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이에 불만을 품었던 첫째 부인 한씨 소생의 방원이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일곱째 아들 방번을 살해하는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이켰다.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 2년 뒤 1400년 방원의 동복형
방간의 '제 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채 소요산을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이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며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 24일 창덕군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일기를 마쳤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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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성혁명론을 실천한 풍운아 정도전
조선의 개국은 역성혁명론의 결정체였으며 이러한 논리를 고려왕조에 대입한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도전은 이미 국운이 기울어 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조선의 개국은 정도전의 역성혁명론의 실천임과 동시에 그가 염원하던 유교적 오아도 정치의 실습장이었다. 정도전은 꿈에도 그리던 새
왕조 주창에 성공하자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우선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였고, 「경제문감」을 저술하였으며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나간다.
이 뿐아니라「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해 왕이 나아갈 길을 밝혔으며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 같은 노력은 사병 혁파에 위기를 느낀 이방원의
무력 동원으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이방원은 자신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더불어 세자 방석도 죽여버렸다. 이때가 1398년으로 정도전의 나이 62세였다.
이렇듯 정치, 경제, 사상, 병법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조선 개국을 이끌었던 그가 후대에 이르러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된 것은 태종의 권력 집착에서 비롯된 정권 찬탈을 미화시키려는 조선왕조의 의도적인 매도 때문일 것이다.
* 장수를 군왕으로 이끈 무학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새로운 왕국 건설의 당위성을 가르쳤다면 무학은 이성계를 일개 장수에서 군왕으로 이끈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정도전이 이성계를 통해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면 무학은 이성계에게 군왕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이처럼 조선을 개국하는 데에 정도전의 역할 못지않게 무학의 공헌도 지대했다.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자초이며 18세에
수선사(송광사)로 출가하였고 용문산의 혜명스님에게서 불법을 전수받았다.
무학은 천문지리와 음양도참설에 밝았고, 파자점과 해몽술에 능했던
모양이다. 그를 찾아온 이성계가 문(問)자를 짚어보이자 어느 쪽으로
보나 군(君)이라고 하며 그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가 하면 꿈에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다는 이성계의 말을 듣고 그것은 임금 왕(王)자라고 하여 후에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성계는 그를 스승으로 대했고, 조선개국 이후에도 왕사로 받들었다. 무학은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조선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왕도를 정하는 일과 왕궁을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는 등 노년의 거의 전부를 조선의 건설에 쏟았다.
하지만 조선의 중심 세력은 성리학자였고 그것은 곧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치로 이어졌다. 무학은 이런 현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소임이 끝났음을 알고 조용히 왕사직을 물러나
수행에만 전념하다가 1405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것이 조선 개국의 주체이면서도 전혀 그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 무학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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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74세를 향수하는 동안 3명의 아내에게서 13명의 자식을 얻었다.
* 신의왕후 한씨
태조의 첫째 부인이자 정비인 신의와후 한씨는 본관은 안변이며 증영문하부사 한경의 딸이다. 그녀는 이성계가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하던
때에 영흥으로 시집와서,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씨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등의 6남과 경신, 경선 등 2녀가 있었다.
* 신덕왕후 강씨
태조의 둘째 부인이자 계비안 신덕왕후 강씨는 본관은 곡산이며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이다. 그녀는 신의왕후 한씨와는 달리 권문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참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개국 이후에도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기까지 한다. 강씨 소생으로는 '제 1차 왕자의 난'때 살해당한 방번, 방석 형제와 경순공주가 있다.
* 진안대군 방우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장자이다.
* 방과(정종)
제 2대 정종실록에서...
* 익안대군 방의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셋째 아들이다.
* 회안대군 방간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넷째 아들로 '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원과 대립하였다. 방원군대에 패배해 생포된 이후로 죽을 때까지 유배지를 전전했다. 난을 일으켰음에도 방간은 태종과 세종의 배려로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58세의 일기로 홍주(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에서 죽었다.
* 방원(태종)
제 3대 태종실록에서...
* 무안대군 방번
신덕왕후 강씨 소생으로 태조의 일곱번째 아들이며 '제 1차 왕자의
난' 때 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18세였다.
* 의안대군 방석
방석은 방번의 연년생 아우로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신덕왕후 강씨와 정도전 등의 의향에 따라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제 1차 왕자의
난' 때 방번과 함께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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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을 내친 후에 왕씨 일가를 모조리 멸족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전국에 방문을 붙여 왕씨들을 한 곳에 모아 수장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방문의 내용은 왕씨들에게 섬을 하나 내줄 테니 강화 해안에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는데, 기왕에도 불안에 떨고 있던 왕씨들은 이러한 약속을 믿고 강화도행 배를 탔다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이때 이성계
일파의 모략임을 간파한 일부 왕씨들은 배에 오르지 않았으며 그들은
산 속에 숨어 살면서 대개 자신들의 성씨를 전(全)씨, 옥(玉)씨, 전(田)씨, 용(龍)씨 등으로 속여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태조실록'에는 왕씨의 후손들은 아버지 성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어머니 성을 따르도록 한 기록이 있어, 이성계가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하려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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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둘째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했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출신의 개국 공신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한 강씨의 영향력은 마침내 세자 책봉에까지 미치게 된다.
태조는 첫째부인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1392년 8월, 그때 방석의 나이 불과 11세였다. 혈기왕성했던 한씨 소생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처사에 분개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자 책봉에 가장 불많이 많았던 방원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개경의 최영 부대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정몽주를 살해해 개국 반대 세력을 제거했는가 하면, 왕대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등위시킨 주인공이었다. 따라서 공적을 따진다면 세자 자리는 당연히 방원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조선 개국 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왕후 강씨와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을 상실하고 개국 공신 책록에서도 제외당하는 굴육을 맛보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세자 자리마저 강비의 소생인 방석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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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제 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다. 태조는 이때 병중이어서 내막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뒤늦게 방번, 방석 형제가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는 무척 상심하여 왕위를 내놓고 말았다. 방원이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 이거이 등 방원의 심복들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은 극구 사양했다. 이에 따라 장남인 방우가 1393년에
이미 병사하고 없었기에 방원의 뜻에 따라 둘째인 방과가 세자에 책봉되고 곧 왕위를 이었다.
방과가 비록 세자에 책봉되고 곧 왕위를 넘겨받긴 했지만 실권은 방원에게 있었다. 방원 일파는 정종 즉위 후 정사공신에 서훈되었으며,
또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병권 집중과 중앙 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제 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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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 형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달인 1398년 9월 둘째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 2대 왕으로 등극했다.
영안군 방과는 원래 왕위에 뜻이 없었다.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그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방원)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세자 되기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방원의 양보와
권유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개월 후에 태조가 물러나면서 왕위에 올랐다.
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종조 때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좌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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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은 정안왕후 김씨를 포함해 총 8명의 부인에게서 15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을 두었다.
* 정안왕후 김씨
정종의 정부인으로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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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에는 정종에게 왕좌를 내주라고 권고한 사람은 정안왕후 김씨라고 한다. 김씨는 정종이 왕위를 더 오래 유지하고 있다가는 방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자리에서 정종에게 그만 물러날
것을 권고했고, 정종 역시 그녀의 생각과 같았기에 권고받은 바로 다음날 왕위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만큼 정종과 정안왕후는 잠자리에서조차 죽음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동생 방원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실권없는 왕과 왕후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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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대 태종실록
1400년 정월, 방원의 바로 윗형인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방원과 그의 사병들이
이들을 조기에 진압하였고 이 일로 방원은 세제의 자리를 확보한다.
'제 2차 왕자의 난'은 일명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계승과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제 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조선의 세력 구조는 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변화되어 이들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방원의 동복 형제들은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세력이 방원에게는 만만치 않은 위협요소였다. 특히 넷째형 방간은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때문에 방원은 이들 형제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방원은 정도전이 추진하던 병권 집중운동을 이어받아 다른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방원이 정략적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조짐을 보이고 또한 왕위 계승에 대한 조정의
중론이 방원 쪽으로 흐르자 방간은 시기심과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박포가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밀고하자 그 말의
진위도 가려보지 않은 채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방간은 방원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형제들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방원을 지원하고 있었다. 개성 한복판에서 형제간에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지만 결과는 방원의 승리였다.
싸움에서 패배한 방간은 체포되어 유배당하고 박포는 붙잡혀 사형당하는 것으로 방간의 난은 막을 내렸다. 이 일로 방원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고 결과적으로 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에
방원을 세제로 책봉하고 이어 11월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와 같이 '제 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세력 판도는 물론 사회적인 영향력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권력이 방원에게 집중되면서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방간의 난이 수포로 돌아간 후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시키는 데 그쳤다. 오히려 방간이 병을 당하면 의원을 보내 그를 치료하게끔 도와주기도 했다.
방간은 방원의 배려에 따라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홍주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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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은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1400년 '제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뒤 세제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방원은 세제로 책봉되자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나갔다. 그 일환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켰으며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실시해 노비의 변속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 3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자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노비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하였고
과거제도에서도 공거, 좌주문생제 등 귀족 위주의 관리 등용 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주력했다. 종교정책에서는 숭유억불이라는 개국 이념에 따라 불교와 도참사상을 억제했다. 대외정책 또한 안정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명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 약재, 역서 등을 수입하여 실리를 취하는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
밖에도 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겼으며 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였다.
태종은 이처럼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고 조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제 시절부터 추진하던
이러한 일련의 개혁정치는 1418년 그가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고, 이러한 개혁에 힘입어 세종 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태조은 상왕으로 물러나기 전인 1418년 장자인 양녕대군이 절제없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권을 이양했다. 그는 상왕이 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 박습의 옥을 치죄하였고 병선 227척, 군사 1만 7천여
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1422년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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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무구 형제의 옥
1407년 7월에 발생한 이 사건은 1406년 8월에 태종이 세자 양녕에게
선위(왕위를 넘겨줌)할 뜻을 표명하면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태종은 재위 18년 동안 네 차례의 선위 파동을 일으키는데 제 1차 선위 파동이 민무구 형제의 옥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태종이
선위를 표명하자 왕비 민씨의 동생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를 통해 이른바 협유집권, 즉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 집권 이전에는 남편의 등극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른 후 잉첩들만 가까이 하자 이에 심한 투기심을 드러내 태종과의 불화가 잦았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서 아버지 민제와 왕비인 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할 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태종은 옥이 일어난 지 2개월 만에 민무구 형제의 죄과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지만 정비 민씨와 장인 민제, 장모 송씨의 면목을 생각해 가급적 생명만은 보전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민씨 형제는 유배중에도
대간 등의 논핵을 가중시킬 행동을 자주 하다가 결국 1410년 자진하였다.
민무구, 무질 형제가 죽은 후 그의 형제들이 형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무휼, 무회 형제도 사사(賜死, 죽일 죄인을 예우하여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하는 것)시켰으며 그들의 처자도 변방으로 내쫓음으로써 민씨 일가의 옥사는 종결되었다.
* 육조직계제 단행
태조은 세제 시절부터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육조직계제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의정부를 설치하면서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한 이 조치는 1414년에야 완성을 보게 되었고 마침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다.
따라서 그때까지 '왕-의정부-육조' 체제이던 국정이 '왕-육조'로 전환되면서 왕권과 중앙 집권이 크게 강화되어 왕조의 안정을 이루게
된다.
* 거북선 개발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실록'부터이다.
태종실록의 태종 13년에 보면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 태종 15년에는 좌대언 탁신이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거북선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종 대에 이 거북선의 조성 흔적이 있는 것은 왜구와의 수전에 대비한 것이거나, 또는 대마도 정벌 같은 왜구 토벌 작전을 감행하기 위한 준비책이었을 것이다.
* 신문고 설치
신문고는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정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 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 1401년 8월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따 설치되었다.
* 한양으로 다시 천도
건국초에 조선조정은 세 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정종 원년에는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다시 왕궁을 옮겼다.
이때 개경으로 다시 옮긴 이유는 우선 한양의 시설이 미비하여 개경을 그리워하는 신민들의 정이 심각하다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왕실의 큰 불상사인 골육상잔의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 간 이후에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세제 방원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다. 태종은 등극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5년(태종 5년) 9월에 창덕궁이
준공되자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후로 한양은 5백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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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총 12명의 부인과 29명의 자녀를 두었다.
* 원경왕후 민씨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82년(우왕 8년)에 방원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1400년 2월에 방원이 세제에 책봉되자 세제빈으로 정빈에 봉해졌으며 이해 11월에 방원이 조선 제 3대 왕에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태종보다 두 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불화는 우선 궁녀 문제에서 출발하여 태종의 후궁 간택 문제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왕비의 동생 민무구 형제 사건으로 불화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그녀는 그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민씨는 4남 4녀를 낳았으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자들과 정순, 정경, 경안, 정선
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 양녕대군
1394년(태조 3년)에 태어난 양녕은 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 자는 후백, 부인은 광산 김씨 한로의 딸 김씨였다. 양녕은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고 사냥이나 풍류를 좋아해 자주 태종의 화를 돋우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그가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말도 있으나 정확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천명을 누리다가 1462년 69세를 일기로 죽었다.
* 효령대군
효령은 1396년(태조 5년) 태종 이방원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보, 자는 선숙이었다. 부인은 정역의 딸 예성부부인으로 그녀와 슬하에 6남 1녀,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효령은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한때 자신이 세자
자리를 넘겨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동생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 충녕대군
제 4대 세종실록에서...
* 성녕대군
넷째인 성녕은 태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세 때 홍역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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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가면 못오는 함흥차사
한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는 함흥행 사신. 태종은 그동안 문안사신을
자주 보내어 부왕의 하회를 기다렸으나 이성계는 번번이 화살을 쏘아
이 사신들을 모조리 죽였던 것이다. 한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는 이 사절을 일컬어 함흥차사라 하였고 후세까지도 이 말이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가면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기에 사신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판중추 부사 박순이 자청하여 함흥으로 떠나게 되었다.
박순은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길을 떠나 태상왕을
만나뵙게 되었다. 차사로서 온게 아니고 벼슬을 그만 둔 후 사해를 두루 돌아다니고 있는 줄로만 안 이성계는 옛친구였던 박순을 반갑게
맞아들여 그날부터 같이 침식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때가 되어 박순은 성심을 다해 길고도 꾸밈없는 충간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간언했다. 이때 태상왕은 만가지 시름이 교차되며 묘한 감정이 드는
것이다. 한참 망설이다가 며칠 있다 돌아간다는 말을 들은 박순은 감동을 이기지 못해 몸둘 바를 몰랐다. 이렇듯 태상왕의 마음을 바꾸게
하여 느긋한 마음, 느긋한 걸음으로 귀로에 오른 박순은 용흥강에서
태상왕을 모시고 있던 신하들에 의해 목이 베어 그가 타고 갔던 말 위에 관을 싣고 돌아갔다.
이때 함흥땅 본궁에선 이성계가 박순이 강을 건넜으리라 믿고 있다가
그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태조가 마음을 바꾸어 박순을 추격하라는 분부를 내릴 때, 태조는 박순이 이미 용흥강을 완전히 건넜으리라 믿고 명하였던 것이다. 박순의 느긋한 걸음걸이가 황천행이 될 줄이야... 사람의 힘으로는 미루어 알 수 없었으니 정말 짖궂은 운명의
농간이었음을 실감나게 해 준다.
박순의 함흥행이 실패로 끝나고 다시금 함흥차사를 보냈으나 태조는
돌아올 줄 몰랐다. 그 후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이성계는 겨우 돌아오게 되었으며 태상왕을 맞이하는 날 왕후 민씨와 하륜의 지략으로 태조가 쏜 백우전(白羽箭)의 환을 면할 수 있었다.
* 양녕대군의 폐세자 사건
양녕의 폐세자 사건과 관련하여 야사에는 실록의 기록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때부터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도 동궁 뜰에 새덫을 만들어 새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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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년 6월에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은 폐위된 양녕 대신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두달 후인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니 그가 곧
조선 제 4대왕 세종이다.
태종은 '충녕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면서 세자에 책봉했다. 이처럼 태종은 충녕의 학문과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에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세종 대는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기틀을 확립한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의례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 나갔다.
세종 시대의 권력 구조나 정치적 양상은 세종 19년(1437년)을 분수령으로 두 시기로 구분된다. 세종은 이때를 전후하여 국가 기강의 중심이었던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변혁하여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사를 의정부로 넘기는 한편,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결재하도록
하는 등 이전에 비해 더욱 유연한 정치를 펼쳐나갔다. 또 언관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이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없어졌다.
세종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었지만 의정부서사제의 정착에 힘입어 오히려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 정치를 이끌어냈다. 세종 대의 이러한 업적은 집현전의 효율적 운영에
따른 것이었다. 집현전은 이미 고려시대에 설치된 기관으로 조선 정종 시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지만 세종조 초에 이르러 기능이 대폭
확대되었다.
집현전은 단순한 학문적 사업만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인재의 양성과
새로운 문화의 정착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세종은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을 위한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젊고 유망한 학자들을 채용하였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쓰던 고어와 외국의 언어를 연구하여 훈민정음 체계를 완성했으며,「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 서적과 역사, 법률, 지리, 문학, 유교, 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과학 기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 '혼천의'같은 천체 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했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어냈다. 이 밖에도 세종은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다. 또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불서 번역 사업을 펼치는 한편,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섬기게 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祀典)에 올려 제를 올리게 하였다.
세종 대가 이와 같은 빛나는 유산과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을 훌륭하게 보필한 신하들과 학자들의 노력도 간과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세종이 이들의 보필을 수용할 만한 인격과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유교와 유교 정치에 대한 깊은 소양, 다양하고 깊은 학문적 성취와 탐구력,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 문화에
경도되지 않는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시키는 추진력과 신념,
백성과 신하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인간애 등을 고루 간직했던 세종의 뛰어난 인성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학문적 업적을 일구어 내는
구심체였다. 천부적인 능력과 뛰어난 인성 그리고 넓은 덕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기틀을 닦아놓은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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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시대는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도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천문학에서부터 농학, 인쇄술, 화기제작, 의학, 아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적인 변혁이 시도됐다. 이 중에서 특히 천문학 분야의 발전은 가히 '과학 혁명'으로 불릴 만하다.
* 서운관
서운관에는 조선 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의 간의대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다가
1431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 제작과 2년 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본격적인 천문 연구에 돌입할 수 있었다.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된 석축간의대는 높이 6.3미터, 길이 9.1미터,
넓이 6.6제곱미터 규모의 천문 관측대였다. 이 간의대와 주변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혼천의
천체 관측 기계로 문헌에는 1432년 6월에 최초로 만들어 졌으며 두
달 뒤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기술제작진이 정초, 정인지 등의 고서 연구를 바탕으로 고안한 것이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서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 해시계
현주일구, 천평일구 :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
정남일구 :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앙부일구 :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 물시계
자격루 :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옥루 :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 측우기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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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대의 명재상 황희와 맹사성
조선사를 통틀어 황희와 맹사성에 비견할 만한 뛰어난 재상이 또 있을까. 이들은 세종 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융성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1363년에 개성에서 태어난 황희는 불과 14세 때 음보로 복안궁녹사가 되었고, 21세에 사미시에 23세에 진사시에 4년 뒤인 1389년 2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에는 성균관하록에 제수되었다. 황희는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지만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후 태조와 태종의 신임을 받으며 성장을 거듭했다. 1418년에는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유배되었고 1422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등용된 후 1432년에 이르러 영의정부사를 맡았다.
충청도 온양 출신의 맹사성 역시 27세가 되던 해인 1386년에 처음으로 문과 을과에 급제해 관직에 올랐다. 맹사성은 1360년 태생이므로
황희보다는 세 살이 많고 관직에도 3년 먼저 올랐다. 맹사성 역시 조선 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황희가 고려 망국 후에 은거한
것과는 달리 맹사성은 태조로부터 예조의랑직을 제수받는 등 관직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승진을 거듭해 1408년에는 사헌부 수장 대사헌의 직책에 올랐다. 맹사성도 1408년 역모 사건을 취조하는
중에 발생한 사건으로 왕족을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되지만 간신히 죽음은 면하고 관직을 떠나야 했다. 그 후 세종이
즉위하던 1418년에 다시 등용되어 공조판서에 오른 후 이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찬성사의 자리를 맡았다.
황희와 맹사성의 성품을 본다면 황희가 분명하고 정확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게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황희는 주로 병조, 이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 이들의 이러한 다른 일면은 세종의 왕도 정치 구현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그러나 맡은 역학과 성격을 떠나 곧고
청렴하며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만큼은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다. 세종 시대를 풍미하며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치던 두 사람 중
맹사성이 먼저 세상을 떴다. 만년에 가서 벼슬을 사양하던 맹사성은
1438년, 79세를 일기로 칩거하고 있던 온양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또 한사람의 명재상 황희는 조선의 재상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이다. 1449년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무려 87세라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영의정 직에 머물러 있었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세종의 정치에
조언했으며 세종 사후에는 문종의 치세에 도움을 주었다. 1438년 맹사성이 죽고 나서도 황희는 14년을 더 살다가 1452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 과학혁명의 주창자 장영실
세종 시대의 과학 혁명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주도한 사람은 단연 장영실이었다. 세종의 과학적 열정이 아무리 대단했다 하더라도 장영실
같은 인물이 없이는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장영실이 가장 먼저 만든 것을 물시계였다. 이 물시계의 개발로 그는
정 5품 벼슬에 올랐고 이후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장영실은 세종 14년에 시작된 천문관측기인 간의대 조성 작업을
이끌었다. 그는 간의대에 혼천의, 혼상 그리고 별자리표와 방위지정표로 구성된 정방안 등을 설치하였다.
장영실의 과학적 업적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해시계의 하나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였다. 장영실은 해시계, 물시계의 제작
이외에도 금속활자 주조 사업에도 참여해 조선시대의 활판인쇄술의
대명사인 갑인자와 그 인쇄기를 완성했다.
이처럼 장영실은 과학 발전에 일생을 바친 조선시대 최고의 기술과학자였다. 천체의 원리 뿐 아니라 자연 동력의 원리에도 밝았으며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면모를 과시하며 세종 시대의 찬란한 과학 혁명을
이끌어낸 선구자였다. 하지만 그는 노후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아산의 명신'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년을 아산에서 보내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 음악의 귀재 박연
세종 대의 빛나는 업적 중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시까지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음악 체계를 정리했다는 점이다.
박연은 조선시대 최고의 음악 이론가였다. 그가 어떤 경로로 음악에
심취했으며 음악의 대가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조선의 음악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이 박연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세종은 다방면에 소질이 풍부한 인물이었고 왕자 시절부터 음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연유로 박연을 특별히 가까이 하였는데 그것이 조선 음악을 한층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세종 대의 음악적 부흥은 크게 아악의 부흥, 악기의 제작, 향악의 창작, 정간보의 창안 등으로 대변될 수 있는데 이는 모두 박연이 이룬 것이었다. 조선의 음악은 좌방과 우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좌방으로는 흔히 궁중음악으로 일컬어지는 아악이 있고, 우방으로는 민속악을
대변하는 향악과 당악이 있었다. 박연은 음악의 정리 작업에 앞서 중국의 고전들을 통해 참고자료를 확보했으며 이후 아악기와 아악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아악의 정리 과정에서 향악과 아악의 조화로운 결합을 시도했다.
이 같은 음악적 공헌은 그를 중국 순임금 시절의 유명한 음률가인
'기'에 비견하게 하기도 했다. 그는 축과 악현의 제도를 개정했는가 하면 악현의 제도를 옛 것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조선은 악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독자적인 음악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정리되지 않은 채로 민간에만 남아 있던 향악을 궁중악으로 끌어들여 민족 음악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노년에 더이상 정사를 맡아볼 수 없는 나이가 되자 고향 영동으로 내려가 그 곳에서 죽을 때까지 향악의 발전에 최선을 다하다가
1458년 81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 농사직설을 집필한 정초
세종 대의 영화를 가능케 한 가장 근원적인 요인은 경제적 안정이었다. 당시의 사회가 농경 사회였던 만큼 경제적 안정은 곧 농업과 기술의 발전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발전은 이에 관한 실용 이론서의 간행에서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책이 「칠정산내.외편」과「농사직설」이었다. 이 책들은 주로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집필되었는데
이 집필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정초였다. 특히「농사직설」은 개인에
의해 집필된 최초이자 최고의 실용 농학서였다. 정초는「농사직설」이외에도 음악서인「회례문무악장」, 윤리책인「삼강행실도」등을
지었다. 게다가 장영실 등이 만든 천문관측대인 간의대 제작을 관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초의 생애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세종조에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고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중요한 책들을 편찬했는데도 이렇듯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것은 아마 세종의 업적을 높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정초는「농사직설」의 서문에 '풍토가 다르면 농사법도 달라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 점이 곧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즉 각
지역에 따라 그곳에 알맞은 농사법을 수록했는데 이는 농민들의 절실한 요구 사항이었다. 정초의 이러한 농업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중농주의 실학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와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
튼튼한 국방력 없이 국가의 안녕을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종 시대의 영화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세종 시대의 국방을 담당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노략질을 일소시킨
이종무와 육진을 개척하여 변방의 안정을 정착시킨 김종서였다. 이들
두 사람은 서로 30년의 격차를 두고서 이종무는 세종 전반기, 김종서는 후반기의 국방을 도맡았다.
1419년 5월 왜선 39척이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조정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대마도 정벌 후 대규모의 왜구는 사라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은 평화 시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수십 년간 계속되던 조선의
근심거리를 제거하고 대일 외교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이종무는
1425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조선을 위협하는 세력에는 왜구 이외에도 북변의 여진족이 있었다.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끊임없이 한반도 진입을 시도했으며 조선초에도 내습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은 두만강 주변에 여섯 성을 개척토록 하여 북방을 안정시켰는데 이 일을 김종서가 맡았다. 김종서가 약 10년간의 노력 끝에 육진 개척을 완수하고 나서야 조선은 비로소 안전지대가 될 수 있었다. 김종서의 육진 개척은 서북 방면의 사군
설치와 아울러 세종의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를 계기로
우리 나라는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으로 북계를 확정할 수 있었고 고려시대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던 여진족의 내침으로부터 한동안 벗어날 수 있었다. 육진 개척 후 김종서는 경상 3도순찰사, 의정부 우찬성
등을 거쳐 문종 대에는 좌의정에 올라 대단한 위세를 떨쳤지만 1452년 단종 원년에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어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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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헌왕후 심씨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의 본관은 청송으로 문하시중 심덕부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의 딸이다. 1408년에 충녕군 도와 가례를 올려 빈이 되고 1418년 6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8월 세종이 즉위하면서 왕후로 책봉되었다. 심씨는 8남 2녀의 자녀를 두었고 1446년 52세로 죽었다.
* 안평대군
1418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용, 호는 비해당, 낭간거사, 매죽헌 등이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결혼하였고 1430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은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난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은 이에 반발하여 황표정사 회복에
주력하였으나 이듬해 계유정난으로 황보 인, 김종서 등이 살해된 두
자신도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교동으로 옮긴 후 36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안평은 어려서 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서, 화 모두에 능해 섬절이라 불리었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 안견의「몽유도원도 발문」이 대표적이다.
* 임영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넷째아들로 이름은 구이며, 자는 헌지이다. 1428년 대광보국 임영대군에 봉해졌으며 1430년 안평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 광평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아들로 이름은 여, 자는 환지이다. 1432년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1436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437년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방번에게 봉사손으로 입양, 아버지 세종과는 오촌지간이 되어 왕가의 종실이 되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서예와 격구에도 능했지만 아깝게도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금성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아들로 이름은 유이다.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태조의 여덟째 아들 방석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세조 시절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우다가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자로 처형당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2세였다.
* 평원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일곱째아들로 이름은 임, 자는 진지이다. 1434년
8세에 평원대군에 봉군되고 1437년 종학에 입학, 이 후 학문에 진력하다가 1445년 1월 두창(천연두)으로 죽었다.
* 영응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덟째아들이며 이름은 염이다. 1441년 영흥대군에 봉해지고 1443년 역양대군, 1447년에 영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여 1450년 세종은 영응대군의 저택인 동별궁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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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학문을 좋아하는 정도가 너무 대단하여 새벽에 일어나면 정당에 나가기 전까지는 꼭 독서를 했다.
어느 날 밤이 이슥한 후 왕이 내시를 보내 집현전 학사 중 오늘 누가
숙직하며 글을 읽고 있나 보고 오라는 명을 내렸다. 내시가 어명을 받들고 집현전에 이르러 살펴보니 신숙주가 독서하고 있었다.
"신숙주가 홀로 독서하고 있는 줄 아뢰오."
"그래, 신숙주가 누구더냐?"
"집현전 직제학 신장의 아들이옵니다."
"신장도 글을 잘 하더니 아들도 역시 공부를 열심히 하는구나. 부전자전이로다."
왕은 감탄하며 또다시 나가 보고 오라고 하였다. 여전히 신숙주는 자지 않고 글을 읽고 있었다. 밤중이 되자 이번에는 왕이 친히 집현전을
찾았다. 신숙주는 촛불을 켜놓고 단정한 자세로 여전히 글을 읽고 있었다. 왕은 독서하는 소리에 취하여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숙주가 고단하여서인지 꾸벅꾸벅 졸다가 책상에 엎드린
채 그대로 자고 있었다. 왕은 살그머니 들어가 자기가 입고 온 수달피
웃옷을 벗어 신숙주의 등 위에 덮어주고 나왔다. 선비를 아끼는 따뜻한 인정이었다. 그래도 청년 신숙주는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아마
따뜻한 김에 잠이 깊이 든 모양이었다.
아침에 수달피 웃옷을 보고 깜짝 놀란 신숙주는 간밤에 상감이 들어왔다 갔다는 소리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소문이 궁중에 퍼지자 선비들은 더욱 감격하여 독서에 열중했다. 세종 때 집현전에서 좋은 책이 많이 나온 것과 훈민정음의 창제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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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치세 기간은 자그마치 31년 6개월이었다. 세자 향은 세종 즉위 3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로 머물러 있었는데,
이 기간 중 8년 동안은 세종 대신 섭정을 했기 때문에 세종 치세 후반기는 왕자 향의 치세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왕자 향이 세자에 책봉된 것은 1421년으로 그의 나이 8세 때였다. 그리고 즉위초부터 각종 질환으로 고생을 한 세종이 병상에 누운 것은
1436년(세종 18년)으로 향의 나이 23세 때였다. 이듬해 세종은 드디어 왕세자에게 서무결재권을 넘겨줄 것을 결심했다. 말하자면 왕세자의 섭정을 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세종은 실질적으로 상왕으로 물러앉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세종은 왕세자의 섭정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로 세자의 섭정이 좌절되자 세종은 별수없이 업무량을 줄일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의정부서사제였다.
의정부서사제란 부분적인 내각제를 의미한다. 즉, 육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들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심의한 다음 결론을 내려 왕에게 결재를 받는 형식이다. 이는 곧 정도전이
왕도 정치의 표본으로 내세웠던 재상 정치의 일부였다. 조선은 개국
초기에 재상 정치를 정치이념으로 내걸었으나,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하고 태종으로 등극한 후에는 의정부가 중심이 되는 재상 정치를
폐지하고 왕이 직접 육조를 관장하는 육조직계제를 도입해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런 제도는 세종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육조직계제는 왕이 모든 실무를 관장해야 하기 때문에 왕의 업무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니었다.
잔병이 많았던 세종은 더이상 육조직계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의정부서사제를 도입한 이후에도 세종은 업무를 결재할 만큼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섭정 체제를 구축했다. 세종은 우선 세자가 섭정을 하는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을 설치하고, 그곳에 첨사, 동첨사 등의 관원을 두었다. 첨사원의 설치와 함께 세자 향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세자의 나이 29세 때였다. 세종은 이 섭정 기간 동안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 조회를 받도록 하는 한편,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청하도록 하였고,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세자의 결재를 받도록 했다.
세자 향은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혔고, 여러가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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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 2월 세종이 죽자 문종은 8년의 섭정을 끝내고 마침내 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원래 병약했던 그는 세자 시절의 업무 과중으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된 상태였다. 즉위 후에는 병세가 더 심해져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했다.
문종은 1414년(태종 14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향, 자는 휘지였다. 8세 되던 해인 1421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29세 되던 해인 1442년부터 세종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 역수 및 산술에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했다. 또한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8년 동안의 섭정에 이은 즉위였기에 문종 시대의 정치는 세종 후반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세종 대에
비해 다소 위축되었다. 그것은 세종이 집권기 절반을 병석에 누워 있었고 또한 후반기에 세자에 의한 섭정이 계속되었기에 수양, 안평 등
다른 왕자들의 세력이 비대해져 있었던 탓이었다. 왕자들의 세력이
심상치 않게 조성되자 언관들의 종친들에 대한 탄핵이 잦을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문종 집권기 내내 종친과 언관들 사이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문종은 언관의 언론에 관대한 정치를 펴 이 시대의 언관들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척불언론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세종 말기에 세종과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호불정책에 의해 각종 불교행사가 행해졌고 궁에
내불당이 조성되는 등 불교 융성 정책이 활발했지만 유신들은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종이 즉위하자 유학 중심의 언관들은
왕실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이는 대부분 문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렇듯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언로를 더 넓히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輪對: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와 같이 관대한 정책을 기본 통치 방향으로 설정한 문종은 우선적으로 「동국병감」,「고려사」와 「고려사절요」,「대학연의주석」등을 편찬하게 했다. 이는 곧 문종이 역사와 병법을 정리해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고려사」와「고려사절요」등을 정리한 것은 단순한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 제도, 문화의 정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진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동국병감」의 편찬은 병법의 정비와 군정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그는 즉위초에 스스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해 총 12사로 분리돼 있던 군제를 5사로 집약시키고, 군제상의 세세한 부분들을 개선, 보완하기도 했다. 문종은 이렇듯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했으나, 건강악화로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야만 했다. 이때가 1452년 5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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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 현덕왕후 권씨
현덕왕후 권씨는 1441년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었다. 단종 이외에 경혜공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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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중 궁궐 두 세자빈의 비운
일찍이 문종이 동궁에 있을 때 김오문의 딸을 취하여 세자빈으로 삼았는데 이가 휘빈이다. 휘빈 김씨는 나이가 세자보다 많았음인지 시집 온 후부터 남성을 안 데 비해 동궁은 아직 여자를 아는 눈이 트이지
않았다. 정열적인 휘빈은 세자의 정열을 북돋아 주기에 골몰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여자의 유열을 한번 느껴본 세자는 육체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고 여자를 알고부터는 궁녀들의 모습, 걸음걸이와 심지어는 치마 속의 육체까지도 상상하며 관능미 넘치는 궁녀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되니 자연히 세자빈 김씨의 처소에는 발길이 뜸해지고
날이 갈수록 몸도 더욱 약해져 갔다. 세종은 이러한 동궁의 건강이 염려되어 혹시 세자를 매혹시키는 궁녀가 없나 하고 지켜보도록 했다.
이러한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세자빈은 시녀들과 세자를 끌어들일
여러가지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자가 자주 출입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의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그렇게 하면 다시는 그 궁녀의 처소에 출입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이는 등 여러 방법을
써보았다. 하지만 후에 이 사실이 탄로가 나게 되고 일이 커지게 되어서 세자빈 김씨는 폐서인이 되어 친가에 내쫓기게 되었다. 이런 일을
부끄럽게 여긴 김오문은 딸과 부인을 비상으로 자결케 한 후 자신은
무관답게 배를 갈라 최후를 마쳤다.
이후 궁궐에는 새로운 세자빈을 맞을 준비를 했고 종부소윤 봉려의
딸이 새로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봉씨는 세자와 동갑이었고 몸집도 작고 유약했지만 겉보기와는 아주 달리 보기 드문 색광이요 음탕한 여자였다. 아마도 죽은 폐빈 김씨의 원혼이 씌어서 지독한 색광을
골라 넣어주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농염한 여인이었다. 이러한 봉씨는
세자에게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항상 욕구불만이 되어 짜증과
신경질이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게 되었고 세자는 그것이 부담스러워
자연 발길이 뜸해졌다. 그런데 이때 궁녀 중 한 여인이 세자의 아이를
잉태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매우 놀라운 일은 세자에게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세자빈 봉씨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동궁에게 만족하지 못하던 세자빈 봉씨는
동궁 시비와 매일 유열의 밤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은 처녀로 한평생 살아야 하는 구중 궁궐 속의 궁녀들 간에 은밀히 행해지는 동성간의 애정행위였다. 이런 행위가 발각이 되면 그 궁녀는
회초리를 맞고 궁중에서 추방하게 되어 있는데 하물며 장차 국모가
될 세자빈이 천한 시비와 그와 같은 행위를 한다는 것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이후로 세자빈 봉씨의 변태성 동성애는 열도를 더해갈 뿐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비밀은 없는 법, 이 사실이 중전에 알려지자 소헌왕후의 노여움은 대단했다. 세자빈을 불러 사실여부를 문초하였더니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 소행이 당연한 듯 속시원하다는 식으로 털어놓아
버렸다.
이 일로 다시금 조정대신들과 의논 후 세자빈 봉씨의 죄목 다섯가지를 들어 폐출을 결정하였다. 이후 폐빈 봉씨는 친정으로 와서도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아버지
봉려는 봉씨에게 자결을 권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 딸을 목졸라 죽인 후 자기도 스스로 자결하였다. 폐빈 김씨가 생죽음을 한 뒤, 다시
맞아들인 세자빈 봉씨마저 폐출당하여 생죽음을 하였고 세자는 나중에 왕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승하하였다. 또 조선 500년 역사상 너무도
쓰라린 비극 단종의 애사가 있었으니, 이들 원혼의 사무친 한이 그같은 엄청난 비극을 빚어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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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은 병약하여 많은 후사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세자빈 권씨마저
몸이 약해 외아들 홍위를 나은 지 3일 만에 죽었다. 그래서 홍위는 세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서조모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라났다. 혜빈
양씨는 후덕한 여자였다. 태어난 지 불과 3일 만에 어머니를 여읜 세손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렇게 양육된 홍위는 여덟 살이 되던 1448년(세종 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홍위를 무척 아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한 그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세종은 자신도 이미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처지였고 세자 향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있었다. 세종이 이런 간곡한 부탁을 한 것은 바로 혈기왕성한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아들 수양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죽음을 앞둔 연로한 왕은 어린 세손이 그들 대군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일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홍위는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그 때 홍위의 나이 열살이었다. 조선 제 5대 왕으로 등극한 문종은
세종이 예상한 것처럼 오래 살지 못하고 즉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일)을 남기고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홍위의 나이 1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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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은 어린 나이인 12세로 왕위에 올랐다. 스무 살 이하인 미성년의
어린 왕이 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당시 궁중의 사정은 그렇지도 못했다.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왕비도 없었다. 비록
세종의 후궁 중에 혜빈 양씨가 있기는 하였지만 후궁인 탓으로 정치적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단종은 수렴청정조차도 받을 수 없는 처지로 즉위한 것이었다.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 태어난 단종은 조부인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세손 시절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고,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이개와 유성원이 그의 교육을 맡았다.
단종이 즉위하긴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했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인사 문제에서도 대신들은 황표정사 제도를 썼는데 이는 조정에서 지명된 일부 신하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을 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모든 정치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이른바 고명대신들인
황보 인,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인 안평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간의 세력 다툼은 급기야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김종서, 황보 인 등의 대신들이 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피살하고,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죽였다. 계유정난으로 고명대신들이 거의 참살 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난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안평대군은 사사시키고 우직은 진도에 유폐시켰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신임 절제사로 부임하던 박호문을 참살하고 난을 일으켰지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처럼 정치적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듬해 윤 6월에 수양대군이 왕의 측근과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이후 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는 사건으로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단종은 1681년(숙종 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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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조선 제 6대 왕으로 즉위하자 조정은 고명대신에 의해 장악된다. 이는 곧 조정이 신권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권의 팽창이 왕권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왕권을 위협한 것은 수양을 위시하여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왕족들이었다.
당시 조정은 영의정의 황보인, 좌의정의 남지, 우의정의 김종서가 포진하면서 계속적으로 권력을 잡고 있었다. 한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는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됐다'고 했다. 또한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도 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의 예는 곧 의정부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왕권이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하지만 대신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세력을 키워 수양대군을 제거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수양은 자청해서 명나라에 고명 사은사로 간 바 있는데 만약 의정부가 그를 제거하려 했다면 이 기간에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양은 그의 수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을 다녀왔다. 이는 곧 당시 김종서 등이 수양의 행동에 별로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수양은 명을 다녀옴으로써 의정부 대신들에게
자신이 정권에 대한 야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의정부 대신들을 안심시켜 허를 찌르겠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이는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이 명에서 돌아온 뒤 급진전된 점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수양대군은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에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6개월 뒤에
드디어 거사를 감행했다. 그는 우선 김종서를 제거한 후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했다. 또한 친동생 안평대군을 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사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형제들 중 뜻을 달리했던 금성대군을 유배시켜서 죽였으며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낸 후 다시 노산군으로 그리고 서인으로 전락시켜 죽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수양대군이 왕권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또한 비록 의정부 대신들이 조정을 쥐고 있었다고 해도 이는 적어도 왕권에 대한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왕이 권한을 펼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한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이 개국 초부터 재상 중심제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할 때 사실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어도 통치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계유정난은 수양과 그 주변 무리들이 왕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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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역모로 단정 지은
사람들은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세조 즉위 4개월 만에 발생했는데 집현전 학사 출신의 대신들과 일부 무인들이 주동이 된 사건이었다. 1455년 윤 6월에
수양대군이 왕으로 등극하자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의 문관들은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들과 모의하여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
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 되었다. 당시 세조는 명나라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순간에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사실을 알림으로써 결국 무위로 끝나고 만다. 결국 이 사건으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등과 이에 연루된 17인이 투옥되었다. 이들은 모두 옥이 일어난 지 7일 만인 6월 9일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중종 때 이들 중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은 사육신으로 기록되었다.
집현전 학사 출신의 단종 복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폐되었는데, 이때 또 한번의 단종 복위 사건이 발생한다.
두번째 단종 복위 사건은 수양의 친동생이자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일으킨다. 수양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자 이에 항의하다가 유배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유배지를 전전하던 금성대군은
순흥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 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거사 직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해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단종 복위 움직임은 비단 이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계유정난 직후에 발생한 '이징옥의 난'도 따지고 보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막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세조 집권 이후 생육신들을 비롯한 유생들이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수양대군의 왕권
계승은 당시 조선인들에겐 왕위 찬탈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대에 단종을 위해 충절을 보였던 신하들을 높이 평가했던 점으로 미루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논쟁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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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왕후 송씨
송현수의 딸로 단종과의 사이에서 후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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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절개로 살아온 생육신 중에 조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려는
수양이 단종의 선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평소 아끼던 서책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통곡하였으며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쫓겨나자 동문 유생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두문불출,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조려는 어떻게 해서든 단종이 있는 곳을 찾아가기로 했지만 영월에
있는 단종의 거처를 가려면 여러번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지 하고 생각한 조려는 영월을 향해 떠났다.
조려는 피로도 잊은 채 걸음을 재촉하여 일주일 만에 영월에 닿아 단종 있는 곳을 향해 사배를 올린 다음 원호를 찾았다. 원호는 단종이 영월로 오자 바로 이곳에 집을 짓고 매일 조석으로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절하면서 일편단심을 불태우는 집현전 직제학이다. 원호의 집에서
며칠 있으면서 단종의 성수무강과 광명의 날이 찾아오기를 기원했다.
그 후 조려는 다시 함안으로 돌아왔으나 상감을 그리는 마음은 일각이 여삼추라.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다시 영월을 향해 떠났다. 그는 이처럼 영월과 고향을 몇번이고 왕래하면서 단종을 그리워한 것이다.
그러던 중 함안에 있을 때 단종 최후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상감의 옥체나마 염습하기 위해 영월로 길을 재촉하여 한밤중에 영월 강가에
닿았다. 강을 건너려 했으나 배가 보이지 않아 알몸으로라도 강을 건널 작정이었는데 그 때 무언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감각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는 순간 거긴 커다란 호랑이가 도사리고 있었다. 조려는 두려운 마음을 누르고 호랑이에게 말했다.
" 너는 동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호랑이이다. 너는 영월 적소에서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신 상감이 계심도 모르느냐? 나는 그 상감을 뵙고자
하여 강을 건너려는 참이니 네가 영물이라면 내가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와다오! " 그랬더니 호랑이는 조려를 등에 태우고 단숨에 강을 건넜다. 조려가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산중으로 사라졌다.
단종의 시신 곁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조려는 시체 앞에서
한참 통곡 후 사배를 올린 다음 너무도 초라한 염습을 정성껏 마쳤으며 명복을 빌었다. 그 후 다시 강가에 와서 강을 건너려 할 때 아까 그
호랑이가 다시 나타나 조려는 다시 호랑이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넜다.
다시 함안에 돌아온 조려는 전보다도 더 큰 슬픔에 잠겨 세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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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은 친형 문종보다 3년 늦은 1417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 자는 수지였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친형 문종과는 딴판으로 무예에
능하고 성격이 대담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진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년)에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도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 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했으니 그가 곧 조선 제
7대 왕 세조이다.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세조는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에 앉혔다. 하지만 이듬해 좌부승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 사건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에
유폐시킨다. 그리고 1457년 9월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다시 한 번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사사시키고 단종도 관원을 시켜 죽였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의정부서사제를 폐지시키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고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배출소로 자리잡았던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반면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시켰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으로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동국통감」을
편찬, 「국조보감」을 편수,「경제육전」을 정비,「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관제도 대폭 뜯어고쳤다. 영의정부사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 같은 중앙 문신 위주의 정책은 지방 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민생 안정책으로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농업을 위해「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오륜록」을 찬수해 윤리 기강을 바로 잡았다.
이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 중심이 아닌 측근 중신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어쨌든 세조 대는 지나칠 정도의 왕권 강화책 덕분으로 왕권이
조선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다.
세조의 정치는 왕권 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으나 정치 문화에서는 '문치 대화 정치'를 멀리하고 힘을 앞세우는 '무단 강권 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 사육신과 생육신
성삼문, 하위지 등은 수양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 복위를 기도하게
된다. 또한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인 김시습을 비롯 원호, 이맹전
등은 수양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접하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다시는
관직에 나오지 않는 등 수양의 왕위 찬탈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단종 복위 사건을 주도한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사람에 대해 중종대의 사림파들은 왕을 위해 충절을 지킨
'사육신'으로 추앙했으며 또한 이때 세조에게 한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을 사육신에 대칭하여 '생육신'으로 높여 불렀다. 이 중 남효온은
사건 당시 불과 두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장하여 세조의 부도덕한
찬탈 행위를 비난함으로써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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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양의 '좌장' 권람
세조의 심복 세력 중 수양대군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인물은 권람이었다. 그는 한명회와는 동문수학하던 사이로 단종 등극 후 김종서 등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 불만을 품고 집현전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도모한다.
권람은 권근의 손자이자 권제의 아들이다. 1416년에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컸다. 그래서 책 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고적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쌓았고, 이때 한명회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삼는다. 그는 한명회와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는 약속을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한 사람이기도 했다.
1450년, 3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로 그는 향시와 회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전시에서는 4등이 되었으나 장원한 김의정의 출신이
한미한 덕으로 장원이 되었다. 같은 해에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 교리로서 수양대군과 함께「역대병요」의 음주를 편찬하는데 동참하여 그와 가까워졌다.
권람은 수양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켜 성공하자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된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1년
뒤에는 이조판서에 올라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를 겸했다.
1458년 신숙주와 함께「국조보감」을 편찬하고 그해 12월에 의정부우찬성, 이듬해에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에는 좌의정이 이르렀다.
이처럼 성장을 거듭하던 그는 1463년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이듬해부터 신병으로 고생하다가 1465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 수양의 '장량' 한명회
권람이 수양대군의 좌장 역할을 했다면 한명회는 '장량'격이었다. 말하자면 수양대군을 보좌한 최고의 책사였다. 한명회는 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돼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이다. 1415년에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읜
탓으로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서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모사에 능하고, 책략에 뛰어난 과단성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한명회가 없었다면 계유정난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거사 국면에서 눈에 띄는 역할을 했다. 정난 성공 후 그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고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일개 궁직에 있던 그가 불과 13년 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 우선 그는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 중에 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신숙주와도 인척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친우인 권람과도 사돈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466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때 그는 이시애의 계략에 말려 신숙주와 함께 하옥되는 지경에 처하지만 결국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된다.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는 세조의 유지에 따라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으로서 정사의 서무를 결재했다. 그리고 1469년(예종 1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으며 이 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후 좌리 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노년에는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대단한 권세를 누리다가 1487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났는데 이때 그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 사건에 관여했다 하여 부관참시(관을 파내고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을 당했으나 중종 때에 신원되었다.
* 세조의 '위징' 신숙주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징은 당 태종의 문화 통치를 수행하여 당 태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세조가 신숙주를 당 태종의 '위징'에 비견한
것은 자신도 당 태종처럼 신숙주를 통해 문화 통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신숙주를 신뢰했다는 뜻이된다.
신숙주는 1417년 태생으로 세조와는 동갑내기이다.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이 그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 정유의 딸이다. 그는 한명회와는 달리 일찍 관직에 나갔다. 22살이 되던 1438년 사마양시,
생원, 진사시 등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이 됐다. 이후 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13차례나 요동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대단히 총명한 인물이었다.
신숙주가 수양과 가까워진 것은 1452년 그와 함께 명나라를 다녀오면서 부터이다. 당시 수양대군은 중국의 고명에 답하기 위해 사은사를
자청했는데 신숙주는 이때 서장관으로 그를 수행했다. 이듬해 4월 조선으로 돌아온 뒤부터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결국 수양의 거사에 신숙주는 간접 지원의 형태로 가담하게 되었다. 계유정난이 성공으로 끝나자 신숙주는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된 뒤 곧 도승지에 올랐다. 1455년 수양이 즉위한 뒤에 그는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주문사로 명에가서 새 왕의 고명을 청하고 인준을 받아옴으로써 세조는 명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조선 제 7대 왕이 된다.
이후 신숙주는 1456년엔 병조판서, 이듬해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오른다. 그리고 3년 뒤인 1462년 마침내 영의정부사직(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러나 그는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1464년에 영의정부사직을 사직한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그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정계에 남아 있다가
1475년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에 대한 당대의 평은 '대의를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으나 후대에는 사육신, 생육신 등을
좇는 도학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기회에 능현 변절자'로 평가되었다.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단종
복위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것은 곧 신숙주가 집현전 학사 출신 벗들에게 변절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왕들의 귀감이 될「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했으며 또한 훈민정음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거> 등의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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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왕후 윤씨
정희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1418년 홍주군에서 태어나 1428년 가례를 행했으며 처음에는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468년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맏아들(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성종)을 그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도 했다. 섭정 기간 중에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과단성 있는 행동으로 조정을 안정시킨 그녀는 1483년 3월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 소생으로는 덕종(의경세자), 예종 등
두 왕과 의숙공주가 있었다.
* 의경세자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이름은 장, 자는 원명이다. 1445년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이 해에 한확을 딸 한씨(소혜왕후)를
맞아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잔병이 잦았으며 그 때문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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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죄의 댓가
세조와 세조의 가족들은 즉위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 가서는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그러자 세조는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그 피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제 8대 왕인 예종도 명이 그리 길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지 1년 2개월만에 죽었다.
* 칠삭동이 한명회
한명회는 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아왔으며 대제학을 지낸 개국 공신 한상질의 손자였다. 한상질의
아들 한기는 본시 똑똑하지 못해 끝내 높은 벼슬자리에 오리지 못하였다. 한상질의 손자인 한명회는 하도 못생겨서 어릴 때부터 칠삭동이라는 별명으로 아이들의 놀림감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머리가 남달리 컸기 때문에 대갈장군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한명회는 명문의 후광을 입어 열살이 넘자 중추부사 민대생의
사위로 장가들게 되었다. 한명회의 장모되는 허씨 부인은 한명회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아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민대생은 이같은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한명회를 사위로 삼았다.
민대생의 딸은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래서인지 한명회는 못생겼어도 딸은 예쁘게 잘 낳아서 왕비로 시집을 보내니 민대생의 사람보는
눈이 정확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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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아들들은 몸이 유약해서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그 죄가를 받는 것이라고도 했다.
예종은 1450년 태생으로 이름은 황, 자는 명조였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음에 해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57년 형 의경세자가 횡사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7일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즉위하긴 했으나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데다가 건강마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섭정과 원상제도라는 두 가지 형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행사해야 했다. 섭정은 모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뤄졌는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행한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정희왕후는 성격이 대담하고 결단력이 강한 여자였기에 예종의 유약한 성품을 잘 떠받쳐 주었다. 또 예종도 세자 시절에 왕의 서무에 참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국사 처리가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예종 시대의 조정은
그다지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왕권은 미약했다.
또한 왕의 업무 결재 능력의 미숙함을 보조하기 위해 원상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원상제도는 세조가 죽기 전에 예종의 원만한 정사
운영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신하들에 의한 섭정 제도였다. 왕이 지명한 원로 중신들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서무를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 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정치 보조를 바탕으로 예종의 1년 2개월 동안의 짧은 치세가 이루어졌다. 1468년에 유자광의 계략으로 '남이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을 처형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다. 또한 그 해 6월에는 각 도에 있는 둔전(병영에 예속된 전답)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9월에 최항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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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이 14개월 밖에 안 된 예종 대에도 대대적인 숙정 작업이 있었다. 이 숙정 작업은 한명회, 신숙주 등의 승정원 원상 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남이, 강순의 역모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약 30명의 무인 관료가
죽고 그 가솔들이 노비로 전락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무과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다. 그는 세조 시대 최대의 위기를 몰고
온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고 병권의 수장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1468년 세조가 죽자 그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강희맹, 한계희 등의 훈구
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에 비하면 예종은 유약하고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다. 예종은 그 때문에 촌수로 당숙뻘이나 되는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훈구 대신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오자 즉시 병조판서직에서 해임시켜 버렸던 것이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직으로 물러났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이 광경을 보면서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병조참지로 있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고변해 그를 역신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는 남이를 위시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으로 모두 처형되었다. 또한 조경치의 장인인 김개가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들의 측근 30여 명도 함께 죽였다. 그리고 이 밖의 가솔들과 친분 관계가 있는 자들은 공신녹권이 몰수당하고 종으로 전락시키거나 변방에서 종군하게 하였다.
남이의 역모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롸 기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남이의 옥을 날조 사건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책은「연려실기술」인데 여기에서는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 이후에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적 영웅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조선 중기의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책임이 유자광에게 있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선징악적인 가치관이 강한 조선 사학도들은 유자광을 참사를 획책하는 극악무도한 간신배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남이의 역모'는
단지 그 간신배 유자광의 날조극이라고 믿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다.
현재 남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설화들은 그의 출생, 결혼, 입공, 죽음 등의 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4단계는 모두
원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 테면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다 죽어가던 낭자가 살아남았다는 등 대개는 그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다. 이 때문에 민간과 무술에서는 남이 장군신을 믿는 신앙이 형성돼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이는 용맹을 떨쳤던 남이의 위용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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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순왕후 한씨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는 영의정 한명회와 부인 민씨의 큰딸이다. 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친언니인 동시에 촌수로는 그녀의 시숙모가 되는 셈이다. 그녀는 1460년에 당시 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예종과
가례하여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1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 후 1472년(성종 3년)에 장순왕후에 추존되었다.
* 안순왕후 한씨
안순왕후 한씨는 청주부원군 한백륜의 딸이며 1460년 한명회의 딸이었던 세자빈이 병사하자 1462년 예종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예종이 병사했기 때문에 1471년 인혜대비에 봉해졌다. 그러다가
1497년(연산군 3년)에 다시 명의대비로 개봉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죽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었다.
* 인성대군
인성대군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는 유년 시절에 죽은 것으로 판단된다.
* 제안대군
제안대군은 예종의 둘째아들이며 안순왕후 한씨 소생이다. 4세 때 부왕인 예종이 죽자 왕위 계승의 첫번째 후보로 올랐으나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의 반대로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그는 1525년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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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의 둘째 아들은 1470년 5세의 나이로 제안대군에 봉해졌으며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리고 12세에
사도시정 김수말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안순왕후가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에 14세에 다시 박중선의 딸과 혼인하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쫓겨난 김씨를 잊지 못해 1485년 20세 때 성종의 배려로
그녀와 다시 복합하였다.
1498년 안순왕후가 죽은 후로 홀로 거처하였으며 평생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는 노래를 즐기고 사죽관현 연주에 뛰어났다. 그래서
연산군이 네 차례나 음률을 잘 아는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그에게 내렸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패관잡기에서는 '그는 성품이 어리석었다.'고 기록하는 한편 '그것은
몸을 보전하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즉 왕위
계승전에서 밀려난 사람은 언제든지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고의로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보신책 덕분이었는지 그는 1525년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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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은 불과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남긴 채 요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예종이 죽던 날 세조비 윤씨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조선 역사상 왕이 죽은 날 곧바로 다음 왕을 앉힌 예는 없었다. 그 때문에 조정 대신들은 논란을 일으켰으나 윤비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더구나 그녀 뒤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대신들이 미처 손쓸 틈도 주지
않고 조선 제 9대 왕으로 13세의 자을산군(성종)이 결정되었다.
자을산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데에는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다.
예종의 아들 제안군이 엄연히 존재했고 또한 자을산군의 형 월산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힌 것은 바로 정치적 결탁이었다.
정희왕후와 정치적 결탁을 한 사람은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동시에 바로 자을산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물론 신숙주, 구치관 등의 원상들도 이에 동조했을 것이다. 이는 정희왕후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될 것이 없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을 경우 그녀는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것이 왕권을 안정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이 결탁과정에서 그녀의 생각은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다는 것이었고, 한명회는 자을산군을 내세웠다. 논의 과정에서 정희왕후는 장손인 월산군을 지목했을 것이지만
한명회의 반대에 부딪쳐 자을산군으로 낙착을 보았다. 정희왕후와 권신들은 이러한 선택이 종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예종이 죽던 날 곧바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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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의 어린 나이로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희왕후는 곧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성종이 성인이 되자 7년 동안의 섭정을 끝냈다. 비록 수렴청정으로 다져진 왕권이었지만 성종은 치세에 능했다.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 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해 나갔다. 그 결과로 그는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뜻의 성종(成宗)이라는 묘호를 얻었을
만큼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성종은 1457년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와 세자빈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로 추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혈이다. 태어난지 두 달도 못 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사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곧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예종의
아들 제안군과 성종의 형 월산군을 대군으로 격상시켰으며 특히 월산대군은 좌리공신 2등에 책봉하여 불만을 무마시켰다. 그녀의 이 같은
조치는 종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한명회 등의 권신들과의 결탁을 위해 성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으나 그녀는 대의명분 없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발을 조금이라도 무마시키려 했던 것이다.
정희왕후에 의핸 7년 동안의 섭정기에 있었던 주요사건으로는 1469년 12월에 호폐법을 폐지하여 민간에 대한 관의 감시를 줄였고 「경국대전」의 교정작업을 완료했으며 숭유억불정책을 강화하여 불교의
장의 제도인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염불소를 폐지하여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 것도 금지했다. 한편 외촌 6촌 이내에는 결혼을 금하고 전국 교생에게 의무적으로 「삼강행실」을 강습케 하는 등 일련의 유교 문화
강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윤대비에 의한 이러한 일련의 유교 문화 강화책과 민생 안정책은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신숙주, 한명회 등이 주도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종이 어린 나이로 섭정을 받는 처지였기에 정사는 신권 중심으로 이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476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끝내고 성종이 편전을 장악하면서 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은 우선 조정의 서무 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젋은 사림 출신 문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 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고려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몽주와 갈재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을 철지히 견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또한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성종은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성종은 도학 정치 사상에 입각하여 성균관에 존경각을
지어 경전을 소장하게 했으며 양현고에 관심을 가져 학문 연구를 후원하고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교육기관의 경비를 충당케 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과 서적을 나누어 주어 관학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또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 두무포에 독서당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 저술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편찬 사업을 융성시켰는데, 그 결과로 노사신 등의「동국여지승람」과 서거정 등의「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그리고 강희맹 등의 「오례의」, 성현 등의 「악학궤범」이
간행되는 등 다양한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성종은 1479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 백성들은 개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 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 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성종 후기의 이런 부분적인 병폐는 옥에 묻은 티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로 부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 오던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되었고, 각종 문화 서적들을 편찬해 민간 생활의 질을 높였다. 또 성리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학문과 정치를 하나로 묶었으며, 조선의 정치 이념인 유교를 완전히 정착시켜 민간 교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변방의 야인을 토벌하여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남방의 왜구들은 외교적으로 관리하며 지배하였다. 이는 민생의
안정과 태평성대로 귀결되었다.
성종은 1494년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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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정계의 가장 큰 변화는 중앙 정계에 사림 세력이 진출한 일이다. 고려 말의 정몽주나 길재의 학풍을 잇는 이들은 스스로 도학적
실천을 구현하는 군자임을 내세우며 사회의 일대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직(1431 - 1492)이었다.
김종직은 경상도 밀양 출신으로 1453년 진사를 거쳐 성종이 성년이
되던 1476년에는 고향인 선산의 부사로 재직중이었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정사를 주관하게 되자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며, 이 때부터 영남 사학의 거두로서 또한 성종의 근위 세력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1483년에 우부승지에 오른 김종직은 이어 좌부승지, 이조참판,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그의
제자 김굉필, 유호인, 김일손 등도 등용되기에 이른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김종직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를 비판하였으며, 세조의 불의에 동조한 신숙주, 정인지 등의 공신들을 멸시하였다.
세조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단순히 상소에 그치지 않고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것에 대한 반발로 「조의제문」-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것에 세조가 단종을 폐한 것을 비유하여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 - 을 남기게 된다. 이 글은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김종직의 제자에 의해 사초에 올려지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고려 말의 정몽주와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아버지 김숙자에게 글을
익힌 김종직은 문장에 뛰어났으며 사학에도 두루 능통해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제자 김굉필은 조광조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여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이처럼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 보여지듯이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리려는 의리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정신은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제자들은 절의와 의리를 내세우며 이를 저버린 훈구 척신 세력의 비리와 부도덕을 비판하고 나섰다.
김종직은 1492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 때는 부관침시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종 때 다시 신원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청구풍아」, 「점필재집」, 「당후일기」, 「이존론」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밖의 많은 저술들은 무오사화 때 훈구 세력에 의해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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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로 부터 조선 초에 걸쳐 반포된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 오던 「경국대전」이 수차의 개정 끝에
25년만인 1485년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 우리 나라에 전해져 오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문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이 책의 편찬 연혁은 세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각종 법전들을 총체적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법전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통일 법전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까지 조선의 법전은 임시법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왕이 즉위하거나 사건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법령이 계속 쌓였고, 이에 대한 결함이 발견될 때마다 속전을 간행해 보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통일 법전의 편찬 작업은 1460년(세조 6년) 7월에 시작되었고 1468년
1월1일부터 시행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이 때 마련된 법전을 최종적인 것으로 확정하지는 않았다. 이 법전이 아직까지 미비한 것이라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세조 대에는 통일 법전 작업이 거기에서
멈추었고, 나머지 작업은 예종 대로 넘어갔다. 예종도 육전상정소를
설치하여 1469년 9월까지 작업을 매듭짓고 이듬해 1월 1일에 반포하기로 결정했으나, 예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 일은 성종 대로 넘어가게 된다.
성종은 즉위하자 「경국대전」을 수정하여 1471년 1월 1일부터 공포하여 시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이다. 하지막 이 책은
누락된 조문이 많아 다시 개수하여 3년 뒤인 1474년 2월 1일부터 시행하였는데, 이 책이 「갑오대전」이다. 이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 중에 시행의 필요성이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그러나 1481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있자 감교청을 설치하고 대전과 속록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1485년 을사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전」이다. 「을사대전」을
시행할 때는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 「을사대전」은 최종적으로 확정된 조선왕조 영세불변의 만세성전이 되었다. 25년 동안의 참으로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었다.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바로 이 「을사대전」을 가리키며 「신묘대전」, 「갑오대전」을 비롯한 그 이전의 법전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을사대전」은 현재까지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일한 법전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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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
이 책은 1481년(성종 12년)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의 시문을
첨가한 것이다. 편찬체제는 남송의 「방여승람」과 명의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1차 수교는 1485년 김종직 등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 때 시문에 대한 정리와 연혁, 풍속, 인물 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구성에 따라 고적 편목이 첨가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 얺는 성씨, 봉화불을 꽂던 봉수의 양조 등이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 임사홍, 성현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하였으나
내용상으로는 큰 변동이 없었다. 제 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 23년)에 착수하여 1530년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를 '신증'이라는 두 자를 삽입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고 했다. 이 중종시대본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희귀해져, 현재는 일본 경도대학 소장본이 유일하며, 1611년(광해군 3년)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동국통감」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 등이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로 총 56권 2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은 1458년 세조에 의해 시작되어 1476년 성종 대에
와서 비로소 고대사 부분이 완성되었다. 이 고대사 부분은 「삼국사절요」라는 이름으로 따로 간행되었으며, 이후 1484년에 고려사를 완성해 「동국통감」으로 합본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1485년에 성종과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되어 개찬한 「동국통감」만 남아 있다.
*「동문선」
1478년 성종의 명으로 편찬된 우리나라 역대의 시문선집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문학 총서이다. 이 책은 목록만 해도 3권이나 되며 합본은 45책으로 되어 있다.
「동문선」 편찬 작업에는 서거정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 강희맹, 양성지 등을 포함해 총 23명이 참여하였다. 「동문선」은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외에도 신용개 등에 의해 편찬된 것과 송상기 등에 의해
편찬된 것이 있는데 이 세가지 중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의 것을 「신찬 동문선」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악학궤범」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성현 등이 편찬한 약서이다. 총 9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이 치밀하고 정확하여 조선 초기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악학궤범」은 1493년 성종의 명에 의해 예조판서 성현, 장악원제조
유자광, 악원주 신말평, 전악 박곤, 김복근 등이 편찬하였는데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와 악보가 너무 오래되어 헐었을 뿐만 아니라 요행히 남은 것은 모두 잘못되어 있어 새로운 악규집을 편찬한다는 취지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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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정비 공혜왕후를 비롯해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이들에게서 16남 12녀의 자녀를 얻었다.
*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의경세자가 사가에
있을 때 시집을 왔으며 1455년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 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이 사건으로 후에 연산군이 폐비사건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 공혜왕후 한씨
성종의 첫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딸이다. 한명회는
첫째딸을 예종에게 시집보내고, 둘째딸을 자산군에게 시집보냈는데,
그래서 이 두 딸은 자매이자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기묘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 1467년 12세의 나이로 한 살 어린 자산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474년 19세의 나이로 소생 없이 죽자 공혜왕후에 추증되었다.
* 폐비 윤씨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윤씨는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일로 폐비되어 사약을 받아 사사되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폐비사건을 알게 되었고 신원을 모색해 1504년에 제헌왕후에 추숭했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관작도 추탈된 뒤 다시는 신원되지 못했다.
폐비 윤씨는 세자를 낳은 왕비이면서도 투기심과 부덕함으로 인해 폐비 당했다가 결국 참극을 당하고 말았고,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져 급기야 조선 조정에 엄청난 살생극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된다.
* 정현왕후 윤씨
성종의 세번째 부인이며 중종의 친모이다. 우의정 윤호의 딸로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으며 1479년 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출되자 이듬해 11월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497년 자순대비에 봉해졌으며 1530년 68세를 일기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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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는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다. 한때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왕비
윤씨는 성종이 다른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왕 주위의 후공들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 두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빈으로 강등될 지경에 처하게 된다. 숙의의 신분에서 내전 최고 위치이자 국모인 중전의 자리에 올라왔는데 다시 빈으로 강등된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윤씨는 성종의 배려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질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급기야 만백성의 어버이인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국모의 체통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중전으로 부터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왕의 체통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법도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던 만큼 왕의 분노도 컸지만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격분은
더한 것이었다.
이 일로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하들은
왕비를 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바로
다음 왕이 될 왕자의 어머니였던 까닭이다. 따라서 폐비론을 내세웠다가는 다음 왕에 의해 보복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감히 누가 목숨을 내놓고 세자의 어머니를 폐하자고 하겠는가. 하지만 왕과 인수대비의 입장은 달랐다. 어쩌면 성종 자신은 부부의 정
때문에 왕비를 폐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수대비는 폐비론을 굽히지 않았다. 여기에 한명회의 훈구 세력과 김종직 등의 사림 세력이 가세했다.
그 때문에 성종은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씨를 폐비시키고 말았다. 사가로 폐출된 윤씨의 수난은 단순히 서인으로 전락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폐출된 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조정 대신들 간에는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윤씨의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윤씨의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윤씨의 동정론이 대두되자 성종은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오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사사한 이후
폐비 윤씨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를 어기고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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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시대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종의 정치력에 힘입어 조정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화의 이면에는 서서히 퇴폐 풍조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스스로 군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호기는 그의
가족 관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30명에 가까운 자식들을 얻었다. 결국 이런 호기가 평지풍파를 예고하는 불씨를 낳고 말았다. 그 불씨가 바로 희대의 폭군 연산이었다.
세자 융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당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자라났다. 융은 윤씨가 폐출될 당시에 불과 네 살바기 어린 아이에 불과했고,
또한 성종이 폐비 윤씨에 대한 사건을 일체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자 융은 어머니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천륜은 속일 수 없었던지 융은 정현왕후 윤씨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물론 정현왕후 역시 폐비의 자식에게 사랑을 쏟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인수대비는 융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 고울 리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에게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융의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었다.
이런 성장 배경 탓인지는 몰라도 융은 결코 양순한 아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게다가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향도 있었다.
성종은 이런 성격을 가진 융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이때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 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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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른다.
연산군은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윤씨가 왕비에 책봉되자 그는 연산군에 책봉되었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조선 제 10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 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은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은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정책에서도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다. 하지만 이 4년 동안 연산군은 누차에 걸쳐 사림파 관료들과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명분과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은 사사건건 간언을 하는가 하면 연산군에게 학문을 강요했다. 원래 학문에 뜻이 없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시하던 연산군은 그 때문에 사림들을 귀찮게 여겼다.
이 때 때마침 일어난 것이 1498년, 무오년의 이른바 무오사화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집요한 간언으로 자신과 대립했던 사림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일부 훈신 세력까지 제거하게 되었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산은 급속도로 조정을 독점하게 된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 연산군은 임사홍에 의해 폐비 윤씨 사건을 알게 되었고 이
일로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생극을 자행한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 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홍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민심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급기야 1506년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산군 폐출이 성공하자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는데 두 달 뒤인 1506년 11월 그는 그곳에서 3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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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士禍)는 '사림의 화'의 준말로서 말 그대로 사림 세력이 화를 입은 것을 말한다. 사화는 당초 일으킨 쪽이 훈척 계열에서는 난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나 당한 쪽인 사림 측은 올바른 인물들이 죄없이 당한
화라고 주장하여 '사림의 화'라는 표현을 쓰다가 사림계가 정치적으로 우세해진 선조 대부터 사화라는 표현이 직접 사용되었다.
조선조에 사화는 무오(연산), 갑자(연산), 기묘(중종), 을사(명종)사화
등 네번에 걸쳐 일어났다. 이 사화는 주로 세조 시대에 형성된 공신과
외척, 인척 세력이 도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 세력의 정계 장악을
저지시킨 정치적 사건들이었다.
* 무오사화
성종에 이어 등극한 연산군은 학문을 싫어하고 언론을 귀찮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림을 배척하고 있던 연산에게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척 세력이 불을 붙이게 되었다.
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으로 은유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글과 이극돈 자신의 비판 상소문을 보고 분노해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 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 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뻔했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 부도한 행위를 했으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은 사림 세력을 싫어하던 차였다.
그래서 즉시 김일손을 문초하게 하였다.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도하던 바대로 진술을 받아내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 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림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史禍)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 갑자사화
무오사화로 언론 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황에서 연산군의 국정 운영은 방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제거된 마당이라 그에게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고, 간언을 하는 이도 없었다.
더군다나 대신들은 한결같이 연산의 비위에 맞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 행위를 일삼았다. 매일같이 궁궐에서는 연회가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뽑아올린 수백 명의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등 종친간의 상간을 범하기도 했고, 여염집 아낙을 궐내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화로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국고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이 향락과 사치에 마음을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기반까지 몰수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막상 왕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그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 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런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 중에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종 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
사건을 들추어 낸다. 임사홍의 밀고로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한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이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 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처럼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 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정치 투쟁이었지만,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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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비 신씨
신승선의 딸로서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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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괴팍스럽고 포악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성종과 주위 사람들이
세자의 다소 포악한 성품을 우려했던 일화들이 야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두가지이다.
성종이 어느 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데없이
사슴 한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등을 핥아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심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는 허침과 조사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 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사서는 엄하고 깐깐한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융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 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사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
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사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사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사서를 가장 먼저 죽여버렸던 것이다.
세자 융에 대한 이 두 가지 일화를 통해 그가 집요하고 끈질기며 자신의 잘잘못에 관계 없이 자신을 질책하고 위협하는 존재를 용서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그가 왕이 된 뒤에 두 번의 사화를 거치는 동안 더욱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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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 후 연산군의 폭정은 더욱 노골화 되고 있었다. 민생과 국정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거사 계획을 가장 먼저 준비하던 사람은 성희안이었다. 성희안은 가장 먼저 박원종에게 접근하였다. 그 때 박원종은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된 상태였다. 그이유는 그의 누이 박씨 부인 사건
때문이었다. 박원종의 누이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후실이었는데
인물이 절색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 그녀에 대해 흑심을 품고
있던 연산군은 마침내 큰어머니인 그녀를 궁으로 불러 들여 겁간하였는데, 이 때문에 박씨 부인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후로 박원종의 연산군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성희안과 박원종은 거사에 참여할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 거사 계획을 세워 거사를 결행했다.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들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 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반란군들은 사전에 대궐로 진입하여 내응하기로 약조되어 있던 신윤무 등의 도움을 얻어 쉽게 궐내를 장악하였다.
거사에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간언한다. 정현왕후는 처음에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성희안, 박원종 등이 중심이 된 이 반정거사는 예상보다 쉽게 성공리에 끝났고, 이로써 12년 동안의 연산군과 궁중 세력의 독재 정치는 종식되었다. 학정은 끝나고 정치의 주도권은 훈구 세력에게 돌아갔다.
이는 곧 조선의 정치 형태가 성종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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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종 일파의 연산군 폐위 사건으로 중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반정
공신 세력에 밀려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림 세력이자 급진 개혁론자였던 조광조를 끌어들인다. 하지만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훈신, 척신 세력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를 숙청시키고 만다. 이후
조선 조정은 훈신, 척신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전개되어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중종은 1488년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역, 자는 낙천이다.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으며, 1506년 9월 박원종, 성희안 등이 연산군을 폐출하고 그를 옹위하자 조선
제 11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중종은 등극한 뒤 가장 먼저 연산군의 폐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 기강을 바로 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왕의 자문을 담당하던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여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과시, 시가독서, 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하여 문벌 세가들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중종반정에
성공한 공신 세력의 힘이 너무 막강하여 거의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중종 즉위 4년
후인 1510년 영의정직에 있던 박원종이 죽어 공신 세력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한편에서는 반정 이후 지속된 계혁적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었다.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대개 갑자사화로 정치 일선에서 밀려났던 사림의 위주로 형성되었다. 당시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은 조광조였다. 그는 무오사화로 유배중이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10년 사시미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인물로서 당시 급진 개혁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급기야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 들인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철저한 유교 정치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광조의 주장에 따라 유교적 도덕관을 심기 위해 여씨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으며 천거 등용제인 현량과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 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해서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더군다나 도학적 정치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워 조광조, 김식 등 신진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로써 조광조를 통한 4년 동안의 중종의 개혁 정치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후 심정 등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면서 중종 중반기 이후에는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었다.
이러한 정국의 불안은 국방 정책에서도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 성종, 연산군 대에만 해도 비교적 잠잠하던 왜구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세력권을 넓혀 나가더니 기어코 폭동을 일으켜 한때 제포,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을 공격하는 등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한편, 북방에서는 야인들의 내침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와 같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북방에서는 야인이 극성을 떨자 조정은 왕권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정로위를 설치하는 한편,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외침에 대비한 임시 합좌회의 기관인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사회면에서는 조광조의 개혁 정치의 여파로 유교주의적 도덕 윤리가
더욱 정착되어갔다.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주의적 향촌 질서를 조성했고 「소학」, 「이륜행실」, 「속삼강행실도」 등의 책을 간행하여
민간에 유포하고 교화하였으며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안향의 영전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세워 유교 정신의 고착에 더욱 주력하였다.
문화면에서는 1516년에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동활자를 주조하였고 「사성통해」, 「속동문선」, 「신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다.
경제면에서는 저화와 동전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의복, 음식, 혼인 등과 관련된 사치를 금지하였으며 신임 관리자들에 대한 환영 배례를
금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을 가하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정치적 혼란과 국방의 불안 탓으로 별로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
중종은 조광조 같은 급진 개혁파를 등용하여 단시일에 사회 개혁을
단행하고 정치 혁신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무리한 조치였다. 개혁이 급진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왕 자신이
개혁의 방향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왕은 조광조를 뒤따라가기에 급급했고, 마침내는 조광조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껴 훈구파에 의한 그의 제거에 동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조광조 입장에서 보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된 것으로 개혁을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비록 조광조가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 하더라도 중종은 일정 수준에서 개혁의 강도를 조절하고, 다른 한편으로 훈구 대신들의 입지를 마련해 주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했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부왕인 성종의 정치 형태를 모범으로 삼아 균형 정치를 통한 조선의 영화기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성종만큼 뛰어난 정치력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38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왕위에 머물렀던 중종은 1544년 11월
14일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그 다음날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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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하고 훈구파의 과대한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하여 신진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한다. 중종이 끌어들인 사림파의 거두는 조광조였다. 중종은 조광조를 앞세워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펼쳐나갔다.
첫번째 개혁 작업은 향약의 실시였다.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 사회, 즉 중국의 하, 은, 주 삼대에 걸친 이상 사회를 민간 속에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향약은 지방의 자치를 설정한 민간 규약으로 유학적 도덕관의 실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왕도 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두번째 개혁 작업은 현량과의 도입이었다.
조광조는 종래의 과거 제도가 본질적인 모순으로 인해 학업을 모두
시험 준비에만 한정하도록 하는 폐단을 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품과 덕행을 판단할 수 없게 한다면서 이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천거 제도가 바로 현량과였다.
향약과 현량과 실시 이외에도 조광조는 전통적인 인습과 구태의연한
제도를 혁파하고 궁중 여악을 폐지했으며 내수사의 고리대금업을 중지시키도록 했다. 또한 성리학적 윤리 질서와 통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주자의 「가례」와 「삼강행실」을 보급하고 이교적 이념이 담긴
기신재, 소격서 등을 없애고 「소학」 교육을 장려하여 유교 사회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이 같은 일련의 개혁 정치는 너무나 과격하고 성급하게 실시된 나머지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극단적인 개혁 성향은 마침내 중종의 정치 행위에까지 간섭하게
되어 왕을 철저하게 성리학적 규범에 맞춰 생활하도록 강권하게 되었다. 때문에 중종은 점차 조광조의 경직된 도학 사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훈구 세력은 더 이상 사림파의 급진적 성향을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직해 조정을 문란케 하고 있다고 탄핵했다. 마침내 무서운 기세로 세력권을 팽창하고 있는 사림에게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대대적인 사림파 숙청 작업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곧 기묘사화이다.
이로써 4년 동안의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그의
도학적 왕도 정치는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개혁 작업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명재상 이율곡의 「석담일기」에 잘 드라나고 있다. 율곡은 이 책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의 정치적 실패의
원인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이처럼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보다는 미숙한 정치력과 극단적인
개혁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그의 사상은 따르되 그의 극단적인 개혁성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개혁 방향만은 옳게 평가되어 명종 대를 거쳐 선조 대에는 사림이 정치 세력의 중심이 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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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량과를 통해 도학적인 구현의 터전을 마련한 조광조 일파는 마침내
본격적인 훈신 제거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이 때문에 훈구 세력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고, 마침내 1519년에 이른바 반정 공신 위훈 삭제
사건(반정 공신에 올라 있는 신하들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들의 공신 자격을 박탁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기로 그 반발이 폭발하고 말았다. 때마침 중종도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 정치에 염증을 내고 있던 터였다. 중종의 이런 내면을
잘 읽고 있던 훈구 세력은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짜고 실행하였다.조광조를 몰아내는 데 앞장선 사람은 남곤, 심정,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 등이었다.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하면서 조광조가
왕권을 넘보고 있음을 피력했다. 그리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이라고 쓰고 벌레가 그것을 갉아 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주초는 조(趙)를 분리한 글자이므로 '조씨(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었다. 이는 비록 미신에 불과했지만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몹시 불쾌해
했다.
한편 홍경주와 남곤, 김전, 고형산, 심정 등은 밤에 은밀히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성하여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이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했다. 이들의 상소가 있자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일단의 사림 세력을
치죄하도록 했다. 그 결과로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고 곧 사사되었다. 그 외 신진 사림 세력의 사람들은 귀양갔다가 사형되거나 자결했으며 이들을 두둔한 자들은 파직되었다. 이 사화가 일어난 해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를 기묘사화라 하고, 이때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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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속의 대학자 서경덕
서경덕은 지방의 하층 관리직인 수의부위로 있던 서호번의 아들이며,
자는 가구, 호는 화담이다. 그의 어머니가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19세 때 선교랑 이계종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평생을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을 즐기다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어린시절 영특하였으나 가계가 빈곤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1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유학 경전인 「상서」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그는 어릴 때부터 대단히 사색적이었다.
그는 지나친 독서와 사색 탓으로 과로에 지쳐 다시는 책을 손에 잡을
수 없을 만큼 몸이 상했고, 이 때문에 21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1년여 동안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만 했다.
이후 그는 31세 때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학문연구와 교육에만 매달렸다. 1531년 어머니의 간청으로 4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1544년(인종 즉위년) 김안국 등이 후릉 참봉에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렀다.
그가 이처럼 은거생활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은 사회가 심한 혼란기에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사림과 훈척 세력의 대립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불안은 결코 그를 불행으로 몰고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에 나가지 않고 은둔을 고집한 덕분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학문 수행의 결과물인 「화담집」 같은 저작들은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만년에는 천하의 명기이자 시인인 황진이와 함께 자연을 향유하면서도 선비로서의 인격을 잃지 않는 고고한 학자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와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러 송도삼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로, 겨우
서당에서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 밖에 받지 못했다. 그의 스승은 자연과 책뿐이었다. 그 때문에 서경덕은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는 1546년(명종 1년)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후 1575년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85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개성의 숭양서원, 화곡서원 등지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는데, 이 책에서 '원이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행론' 등의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밝히고 있다.
* 시대를 앞선 여성 시인 황진이
황진이에 대한 확실한 생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서경덕, 벽계수 등과
교류한 것으로 봐서 중종 때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이며 개성출신이다.
그녀의 전기에 대해서 상고할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기에 간접
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야사에 전해지고 있는 그녀에 대한 기록은 분량은 많지만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라 내용의
신빙성이 적은 것이 흠이다.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고 전해 내려오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보태진 경우도 있어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기록들에 따르면 그녀는 황진사라는 양반과 진씨 성을 가진 현금이라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고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이 두 내용 중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 더
우세하지만 그녀가 기녀로 살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더 유력시되고 있다.
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 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여덟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 때 벌써
한문 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렇듯 아름답고 뛰어난 규수로 자란 그녀가 기생이 된 이유를 야사는 동네 총각 하나가 그녀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사건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이 이야기는 야사부분에서 다루기로 한다.)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 춤, 악기, 한시 등에 두루 능했기 때문에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당대의 내로라 하는 선비들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남게 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 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서경덕을 유혹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녀는 많은 선비들과 이 같은 관계를 즐기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했고, 그 가운데 수많은 시들을 남기기도 했다. 「해동가요」와 「청구영언」에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등 주옥같은 시편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마흔 전후에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죽기 전에 자기가 죽거든 관을 짜지 말고 개미, 까마귀, 솔개의 먹이가 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말은 세상의 여자들에게 교훈이 되게끔 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하지만 황진이의 자유스런 삶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오히려 그녀 자신의 시적 근성을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후에 개성 근처의 장단에 묻어 주었다. 지금도 장단 판교리에는
황진이의 무덤이 있으며 그녀가 살던 입우물 고개에는 약수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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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원래 신수근의 딸 단경왕휘 신씨와 결혼했으나, 반정이 성공하여 등극한 뒤에는 공신들의 반대로 그녀를 폐위시켜야 했다. 그 후 2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을 두게 되었는데 그들에게서 총 9남 11녀의 자녀를 얻었다.
* 단경왕후 신씨
단경왕후 신씨는 익창 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며, 연산군의 비 신씨의
외질녀이다. 그녀는 1487년에 태어나 1499년 12세의 나이로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렸다. 1506년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그녀는 처음에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는데 1515년 장경왕후 윤씨가 죽었을 때 한때 그녀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이행, 권민수 등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신씨는 홀로 자식도 없이 외롭게 한 평생을 보내다가 1557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영조 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 장경왕후 윤씨
장경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1491년 호방현 사제에서
태어나 고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1506년 중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에 봉해지고, 1507년 중종 비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515년 세자(인종)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죽었다.
* 문정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지임의 딸로 1501년에 태어났다.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인종 집권시에는 툭하면 인종을 찾아가 '우리 모자(그녀와 명종)를 언제쯤 죽일 거냐'고 하면서 괴롭혔다고 한다.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펼칠 때에는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며, 수렴청정에서 손을 뗀 뒤에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 해 조정을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심지어는 왕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 놓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지나친 집권욕은 결국 명종 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 조정을 패권 다툼의 장으로 몰아갔던 희대의 악후 문정왕후는 1565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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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마바위 이야기
중종은 대군시절에 신수근의 딸 신씨와 결혼했으나 반정이 성공한 후에 그녀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공신들의 압력에 못이겨 신씨를 폐위하긴 했지만 그녀에 대한 종중의 애정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중종은 그녀가 보고 싶으면 자주 높은
누각에 올라가 그녀의 본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다. 신씨의 집에서는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중종의 애틋한 그리움의 정을 달래기 위해
집 뒷동산에 있는 바위 위에다 신씨가 궁중에 있을 때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 놓았다. 왕은 바위에 펼쳐진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를 보고픈 마음을 삭히곤 하였다는 것이다.
* 아름답고 뛰어난 규수로 자란 황진이가 기생이 된 이유
인물이 출중하기로 소문난 황진이를 연모하던 순진한 한 젊은이가 그녀에게 속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혼자서 속앓이만 하다가 그만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다 못한 젊은이의 어머니가 황진이의 어머니 진씨를 찾아와 자신의 아들을 사위로 맞아달라고 간청을 하지만
진씨는 이 애원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딸에게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젊은이는 마침내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젊은이의 장례가 있던 날 상여가 나가는 도중 황진이의 집앞에 다다르자 멈춰서 꼼짝도 하지 않자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황진이는 자신을 속옷을 그 상여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마침내 상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후로 황진이는 스스로 기생이 될 것을 결심하고 기생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기계에 투신한 지 오래지 않아 명성을 얻게 되어 한양에까지 그녀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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