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조공 휘 감 옥천 선생(1530~1586.8)의 조부 이조참판 휘 순 (호 옥봉1465~1527.6)님 께서 한양에 계실때 선고 희빈당 정견공(1504~1556)은 휴암 백인걸 선생(1497~1579.9.기호학파의 거두 정암 조광조 선생의 수제자)의 학덕과 인품을 흠모하여 혼인지교를 맺으신 사돈관계 이시다.
휴암 백 선생께서는 중종 때(1537) 식년시 문과로 급제하고 출사 하였으나,기묘사화(1519)시 역적으로 몰린 기묘사림의 일파라는 이유로 성균관에 오래 있다가 예문관검열·예조좌랑·남평현감 등을 역임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대신 윤원형 및 정난정 일당과의 밀지 정치의 폐단을 직간한 상소문이 문제가 되어 왕에게 삭탈관직 당했고, 을사사화에 반대로 소윤 윤원형 일파에 의해 재차 적폐세력 으로 몰리게 되어 삭탈 관직 당해 유배나 다름 없는 파주 월롱 덕은리의 비바람이 들이치는 허름한 생가에서 외로이 돌아보는 이 없는 환경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을 가르치며 빈한히 생계를 이어 가실 때,
진양과 함안의 수천석지기 부자이신 옥천공의 선고 희빈당 께서는 백 선생님의 충절과 학풍 그리고 덕행을 존경 하시어 자녀 혼인을 약속한 인연으로 가문에 미칠 사화의 영향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옥천공이 17세 때인 1546년경 그간 오간 휴암 백 선생님과의 자녀 혼인약속을 실행에 옮기신 대의와 유학을 숭상하신 당대의 대인이 이셨다.
명문대가 부자집 청년 옥천 조감은 수원백씨 여사님과 결혼하여 파주에 정착하여 몰락한 장인이자 스승인 백 선생 가족의 생계와 스승의 성리학 연구생활을 전담 하는 주경 야독의 험난한 신혼을 보냈다.
이후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 안변에 유배를 가시게서 되어 옥천 조감과 용주학당에 또 한번 고난의 시기를 맞게 되었고 1551년 백 선생은 해금되서 고향으로 돌아와 파주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치중 하였는 데 이때 17세우계 성혼과 22세의 옥천 조감이 백 휴암 선생의 문하생으로 역사적 만남이 으루어졌다.
한편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문인이며 백휴암 선생의 친구인 성수침 선생(1493~1564.1) 께서 처가 파평에 1543년 부터 은거하며 우계에 죽우당을 짓고 학당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백 휴암 선생도 함께 파평에서 후학을 가르치시다가 1565년 승문관 교리로 출사 하시어 경직에 오래 계셨으며 후에 제자율곡 이이와 함께 파산서원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셨다
선고 희빈당 께서는 17세의 옥천공에게 이르시길 휴암 백 선생의 따님과 혼인약속을 하신 연유를 말씀하시고 편지와 결혼 예물 그리고 서당 운영에 필요한 재물을 갖춰 주시며 어린 옥천공에게 파주 도착 즉시 백 선생께 친영의 예를 갖춰 16세의 수원 백씨 여사(1531~1620.7)님과 혼례를 올리고, 그 즉시 생관에서유학과 신혼의 혹독한 생활을 하게 되셨다.
이에 옥천공은 비바람 들이치는 학당 생관에 머물며 아드님 휘 의도공을 득남 하시고, 수년후 득녀 하셨는 데, 17세의 우계 공(1535.6~ 1598.6)이 학당에서 수학하면서 부자집 자손의 티를 안내고 허름하한 나물 밥도 마다치 않고 청빈낙도를 즐기며 태연히 성현다운 모습에 감복해 집우관계를 맺고 태아 혼인을 약속했으며, 모든 유생들도 기골이 장대하며 거침 없는 인간관계를 이어가는 옥천공의 인품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한다.
어명으로 유배나 다름 없는 생을 이어가시는 스승이며 장인이신 백 선생님을 친부모 처럼 모시고 어린 처가 식구를 건사하며 가르침을 배워 기호학파의 일원으로 힘든 성리학자의 길을 걸으셨다.
이후로 1551년 이후 백 선생님 께서 해금돼어 관직에 복귀 하여 정착 할 때 까지 약 20여년간 처가와 학당의 운영을 위해 소요되는 재원을 함안 본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며 백 선생님을 친부모 모시듯 하셨다( 우계선생 지음 옥천공 묘갈)
후일 옥천 선생께서는 부모님 별세 하신 후 장인 휴암 백 선생님을 지근에서 모시고 하는 효심과 백 선생님의 간청으로 1575경 함안의 많은 전 재산을 정리해 파주 능산리에 정착하시고 후학 양성과 관직을 수행하시면서 처가를 돌보시며 후손의 번성을 기약 하셨다
지금은 파주 입향조이신 옥천 조감 선생의 후손들이 함안,서울,부산 창원 ,대구,진주,파주, 양주, 안성,진천,증 전국 각지에 만여명에 이르며 사회 정계,재계,학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성실히 본분을 다하고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옥천 조감 선생은 1570년 뒤늦게 진사시를 거쳐 관리로 성리학 학자로 후학을 양성 하셨고 충직하시며 기골이 장대하신 체구에 인품과 덕성이 중후하시며 성현의 높은 뜻을 후생들에게 일깨워주는 성품에 청년 우계와 율곡의 칭송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늘 대장부의 길을 걸으시며 후학을 지도하신 표상을 기리고자 지역 유생들이 파산서원 경현단과 용주서원에 배향되어 인품을 기리고 있는 바 자랑스런 성리학자이신 선조님 이시다.
옥천공이 22세 때 17세의 우계공과 용주학당에서 맺은 집우사이로 태아 혼인을 약속한 신망이 돈독한 관계로 발전하였으며, 옥천공의 여식 함안조씨 여사님과 우계공의 아들 성문준공이 혼인하여 3남3녀를 슬하에 두어 다복하셨다.
또한 우계 (21세)공은 불교에서 환속한20세의 천재 율곡공을 문하생으로 받아주는 곳이 없자 우계공은 이를 아타깝게 생각해 스승 휴암 백선생에게 간청하자 인품과 학문적 자질을 높이 보시고 학당에서 학업을 함께하게 됐는 데 옥천 조감,우계성혼,율곡 이이는 백 선생과 성수침 선생을 스승으로 한 동문 수학 사이가 된다..
오늘을 사는 후손들이 불민하여 기록을 보존하지 못한채 공의 업적과 행장이 과소 평가되고 있는채로 구전 되오고 있는 현실이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참고로 네이버 밴드 " 옥천 조감 선생 연구회"에서 자료를 볼 수 있슴.
위치 :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능산1리 산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