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암리(栢岩里) 반암(班岩)마을
밀양박씨(密陽朴氏)의 9대 선조가 장성(長城)아치실에서 이곳으로 와서 터를 잡았고, 마을의 명칭은 호진(湖陣)이라 하였으나 약 100년전에 반암(班岩)이라 칭하였다.
▶백암리(栢岩里) 답동(畓洞)마을
약 100여년전 이화삼(李化三)이 이 마을에 정착하였으며, 원래 논이
없어서 앞으로 서해바다가 간척사업으로 논이 생길것이라는 뜻에서
답동(畓洞)이라 불리어 졌다.
이곳에는 석구미 해수탕이 있는데 200년전부터 바닷물을 이용한 해수탕을 지금도 하고 있으며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백암리(栢岩里) 동백(冬栢)마을
이조초(李朝初)에 영광정씨(靈光丁氏)가 이 마을에 입촌(入村)하여 현재에 까지 이르고 있으며 나라정씨(鄭氏)는 임진왜란때 이곳으로 피신하여 오늘에 까지 살고 있으며, 마을의 형태(形態)가 동백꽃처럼 생겼다하여 동백(冬栢)이라 불러졌다고 전한다. 현재 동백나무가 동네
해변에 약 200여그루 자생하고 있으며 동백골이라 한다.
▶백암리(栢岩里) 교동(橋洞)마을
조선중엽부터 氏가 살았으나 지금은 살고 있지 않으며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이조말엽에 입촌(入村)하여 현재에 이르렀고 1914년 이전에는 대리골이라 하였는데 대나무가 많은 것을 다리가 많은 것으로 착각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하사(下沙)6里 감전(監田)마을
본래 영광군 영마면 지역으로 정강이 아래쪽 부분으로 하촌이라 불리웠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사리로 되었다. 1952년 염전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963년 서울
주민 정착촌으로 평산마을이 행정구역으로 편성 염전까지 하사리 4리로 내려오가다 1986. 7. 1일 자로 염전마을만 하사6리로 행정재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사리(下沙里) 사등(沙登)마을
110년전 이조말엽 백수(白岫)에서 거주하던 김해김씨(金海金氏), 울산김씨(金氏) 2성(姓)이 가난을 극복하고자 넓은 경작지를 찾던 중 지금의 마을에 안주하면 앞으로 잘살 수 있다고 생각 자연적으로 발생된 마을이며 마을전체가 새모래로 깔려 하사리(下沙里)라 했으며 특히 모래언덕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산이라 해서 사등(沙登)이라 했다.
▶하사리(下沙里) 평산(平山)마을
1592년 임란 중 진주강씨(晋州姜氏),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난을 피해
유황금(油黃金)으로와 정착해 원래 송정(松亭)과 한마을이었으나 35년전 염전이 형성되어 송정해안과 8가구와 함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후 5.16군사혁명 정부가 수립된 후 귀농정착사업을 펼쳐 그 당시
귀농정착민 140세대중 101세대는 지금의 상사리(上沙里) 한성(漢城)부락에 정착하고 나머지 39세대가 정착해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후
86년 염전과 행정구역상 분리 지금에 이르렀고, 옛선조들은 이마을을
보고 평산락안(平山樂安)이라 칭하였고 평산(平山)이란 말은 마을안에 있는 터가 좋은 땅이라는 뜻이고 평산락안(平山樂安)이라는 말은
평평한 산에 가마귀가 앉아 쉬고 있는 땅이 좋은 해안가라는 말로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면 좋은 마을이 될 것이라하여 지금의 평산(平山)은 평산락안(平山樂安)에서 유래되었다.
▶하사리(下沙里) 송정(松亭)마을
임진왜란때 경상도 진주강씨(晋州姜氏)가 왜놈에게 쫓기다가 하사(下沙) 모래밭에 숨어 들어 현재의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 뒷산에 소나무가 무성하게 많았고 바다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때마다
쉬어가는 곳이라하여 송정(松亭)이라고 하였다.
▶하사리(下沙里) 중촌(中村)마을
1600년경 인동장씨(仁同張氏), 진주강씨(晋州姜氏), 전주이씨(全州李氏) 3성씨(姓氏)가 정착하면서 5개부락을 형성하였는데 가장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중촌(中村)이라고 했다.
▶하사리(下沙里) 송산(松山)마을
1592년 임진왜란때 전주이씨(全州李氏), 인동장씨(仁同張氏), 진주강씨(晋州姜氏) 3姓이 난을 피해 내려와 안주하였는데 원래 첫 정착지가
해안가 유황김(油黃金)이었는데 그후는 지금의 송산(松山)에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상촌에 진주강씨(晋州姜氏)는 중촌(中村)에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며 전주이씨(全州李氏) 큰 딸은 인동장씨(仁同張氏)와
결혼 지금 상촌(上村)에 안주, 둘째딸은 진주강씨(晋州姜氏)와 결혼
중촌(中村)에 안주해 지금에 이르렀다.
▶상사리(上沙里) 한성(漢城)마을
1961년 5.16군사혁명이후 귀농정착민(歸農定着民)으로 형성되었고
정착민 대다수가 서울지구에서 왔다하여 한성(漢城)이라 하였고, 정착민단장 홍성균(洪性均)외 140세대중 39세대는 평산(平山)에 101세대는 한성(漢城)마을에 정착하였다.
▶상사리(上沙里) 백신(白新)마을
일본인(日本人) 아부가 농지를 조성(간척지)하여 백수읍(白岫邑) 학산리(學山里)에 살고 있는 유영환(愈永煥)에게 토지를 관리하기 위해 관리인으로 정하여 그후에 인척이 기거해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1920년대 白岫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백신(白新)이라고 칭하였다.
▶상사리(上沙里) 상촌(上村)마을
1952년 직후에 난을 피하기 위하여 정착한 장덕춘(張德春)이 가정을
이루고 살아왔으며, 지산교(芝山橋)의 제일 윗쪽에 있으며 모래가 많아 상사리(上沙里)라 했으며 제일 윗쪽에 위치했다하여 상촌(上村)이라고 하였다.
▶상사리(上沙里) 광동(光洞)마을
1590년 이후인 임진왜란 당시 높은 벼슬을 지내다 난을 피해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태평(金太平)이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이 시조가 되었으며, 모래가 많아서 상사리(上沙里)라 칭하였으며 넓은 지역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에 광동(光洞)마을이라 하였다.
▶지산리(芝山里) 이민(移民)마을
1900년경 정부에서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경지 경작을 위하여 군내
각 읍내에서 주민들을 이주시켜 마을이 형성되었기에 마을명을 이민(移民)이라 하였다.
▶지산리(芝山里) 서봉(西奉)마을
지석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삼한시대(三韓時代)때부터 촌락을 이룬
것으로 보나 충주지씨(忠州池氏) 지석(池錫) 가 1626년에 전남 함평에서 거주하고 있다가 이곳에 입주(入住)하였으며 산세(山勢)를 보니 마을 뒤산 산봉우리의 큰 바위들이 춤을 추는 봉황새처럼 생겨서 봉무산이라 불리우는데 서쪽에 있다고 해여 서봉(西奉)이라 칭하였다.
▶지산리(芝山里) 동봉(東奉)마을
1665년경에 김해김씨(金海金氏) 김득환(金得煥)이 김해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귀향 정착하였고, 지형을 보니 마을 뒷산 봉우리의 큰 바위들이 마치 봉황새들이 춤을 춘는것처럼 생겨서 봉무산이라 불리우는데 산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봉(東奉)이라고 했다.
▶지산리(芝山里) 가지(佳芝)마을
1500년경에 죽창(竹窓)마을 정홍(鄭弘) 선생(先生)이 익산(益山)군수로 계시던 중 정유재란을 당해 나라에 충성을 다했고 난후환관(亂後還官)하여 내직(內職)으로 계시다가 혼조연난(混朝延亂)함을 보고 뜻을 버리고 이곳에 정착했다.
▶약수리(藥水里) 목우(牧牛)마을
고려초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혼인하여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장두산 지머리밑에 있는 마을 아침볕이 잘든다고 해서 조양(朝陽)이라 했다.
▶약수리(藥水里) 압고(押告)마을
고려초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이곳에 정착하여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혼인을 하고 그 슬하 막내자손이 정착했고, 약수리마을 뒷산을 장두산(장군이 말을 타고 왔다해서)이라고 정했다
▶홍곡리(虹谷里) 백동(栢洞)마을
1800년대부터 영광김씨(靈光金氏)가 거주했으며, 산세(山勢)가 험하고 전답(田畓)이 거의 없는 부락으로 마을 주변에 잣나무가 자생하여
숲을 이루어 백동(栢洞)이라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잣나무를 찾아볼
수가 없다.
▶홍곡리(虹谷里) 지암(芝岩)마을
지석묘(支石墓)가 여기저기 있는 것으로 보아 마한시대때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이 되나, 1500년경에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이 마을에 입촌해 살았고 산맥(바위)이 계속 이어져 마을에 있는 산쪽으로
뻗어있어 마을을 지암(芝岩)이라 했다고 한다.
▶홍곡리(虹谷里) 장수(長水)마을
1700여년경부터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주축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고,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흐른다하여 마을 명칭을 장수촌(長水村)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대전리(大田里) 대동(大東)마을
1536년 전북(全北) 부안(扶安)에 살던 삼봉(參奉) 장구지(張九知)가 임진왜란때 난을 피해 입주하였으며 원래 한밭들이라 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전리(大田里) 동(東)쪽에 있다하여 대동(大東)이라 개칭하였다.
▶대전리(大田里) 대서(大西)마을
1536년 전북(全北) 부안(扶安)에 살던 삼봉(參奉) 장구지(張九知)가 임진왜란때 난을 피해 입주하였으며 원래 한밭들이라 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전리(大田里) 西쪽에 있다하여 대서(大西)라 개칭 하였다
▶대전리(大田里) 무동(畝洞)마을
해주정씨(海州鄭氏) 정원교(鄭遠敎)가 군남(郡南)에서 살다가 1906년에 피신하러 백수(白岫) 대전리(大田里) 대골이라는 곳에 정착하였는데 대골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무동(畝洞)으로 개칭하였다.
▶대전리(大田里) 가동(佳洞)마을
약 1600년경 영광정씨(靈光丁氏) 정평원(丁平元)이 전북 태인에서 살다가 父 정언(丁言)이 권력을 남용하다가 피신하러온 곳이 가작골인데 옛날에 가장터가 있다하여 그렇게 불렀으며 지금은 가동(佳洞)이라 불리우고 있다.
▶대전리(大田里) 유동(油洞)마을
1700년경 대산대씨(大山大氏) 대영조(大永祚)가 영광 대산(大山)에서 거주하다가 유동(油洞)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나무틀로 참기름을 짜낸 마을이라하여 유(油)자를 써서 유동(油洞)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양성리(良城里) 호곡(虎谷)마을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원(文元) 가 아들 안정과 함께 임진왜란때 난을
피하여 장흥군 옥치면에서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였으며, 산세(山勢)가 호랑이 모양처럼 생겼다해 범실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凡자를 호(虎)자로 실자를 곡(谷)자로 한문 표기로 하였으나
현재도 마을에서는 범실이라 불리우고 있다.
▶양성리(良城里) 칠백(七栢)마을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안정(文安正)은 고려 공민왕때 탄생한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의 12대 손이며 그분의 父 문원(文元) 과 함께 임진왜란때 화를 면하기 위하여 장흥군 옥치면에서 옮겨왔으며, 칠백(七栢)의 옛 이름은 치복이라 했으며 그 이유는 산세(山勢)가 꿩이 엎드려 있는 모양과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칠백(七栢)으로 부르게 되었다.
▶양성리(良城里) 압촌(押村)마을
1690년경 문성균(文成均)이 이 마을에 입촌하였을 때는 덕동(德洞)이라 하였는데 그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삽촌(揷村)이라는 유래는 문성균(文成均)이 집에다 우물을 파니 물이 잘 나오므로 마을명을 붙였다고
한다
▶양성리(良城里) 복용(伏龍)마을
약 1700년경 남평문씨(南平文氏) 문만(文萬) 가 정착하였으며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비가 자주와야 하므로 엎드려서 용에게 빌었다는 뜻에서 복용(伏龍)이라 전해오고 있다한다.
▶양성리(良城里) 시(市)마을
1770년경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채옥(金采玉)이 경주에서 거주하다 입주했고 마을의 지형(地形)이 자라형국이라하여 자라등이라 하였으나 시가지 형성으로 변모되어 시(市)이라 하였다.
▶천마리(川馬里) 금자(金子)마을
200년전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천기(曺川基)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원래는 子마을과 金마을 2개마을로 형성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金마을 첫자(金)자와 자 마을 끝자를 따서 金子 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천마리(川馬里) 조암(朝岩)마을
약 200년전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정승(曺正昇)이 영암에서 살다가
영광군 영광읍 단주리 셋터라는 마을에 들어와 살았으며 그후 그의
둘째 동생인 조한일(曺漢日)이 이 마을에 정착하였으며, 마을 앞에 높다란 산을 대절산이라 불리었고, 부엌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그 바위의 모형을 본 따 조암(朝岩)이라고 하였다 한다.
▶천마리(川馬里) 신상(新上)마을
연대는 미상이고 인동장씨(仁洞長氏)와 진주정씨(晉州鄭氏)가 최초로 마을에 정착했고 구수봉(九水奉)의 주령이 따뜻한 뒷산 바위가 새롭고 신기하다고 하여 신상(新上)마을 이라고 하였다.
▶천마리(川馬里) 오마(嗚馬)마을
진주강씨(晉州姜氏) "감역공(監役公)" 이남(二男) 부사정(副司正) 강혁(姜革)이 혼란한 국사(國事)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낙향(落鄕)하여 대대(代代)로 자손(子孫)들이 번창하여 지방토호(地方土豪)로서 약 500년 세거(世去)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마을 뒷山이 마형국(馬形局)과 같다하여 오마(嗚馬)라고 하며 근방(近方)에 천마시풍(天馬時風)의 "터"가 있다고 전한다.
▶죽사리(竹寺里) 신촌(新村)마을
약 1600년경에 김해김씨(金海金氏)와 경주최씨(慶州崔氏)가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때 새로운 마을이란 뜻으로 신촌(新村)이라 하였고
지금 마을 중간에서있는 정자나무도 그때 정착자가 심었다고 전한다.
▶죽사리(竹寺里) 장동(莊洞)마을
이조중엽경 성씨미상의 누군가가 이곳에 정착해 살았으며 당초에 신탑, 탑동, 장동(長洞)등 3개 마을이 있었으나 일제시대 이후 3개 마을을 합해 장동(長洞)마을이라고 불렀다.
▶죽사리(竹寺里) 신정(新亭)마을
조선중엽(효종대쯤 추정)경 밀양박씨(密陽朴氏)(성명미상)가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고 하며 이 곳을 신정(新亭)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애초에는 본 마을 옆에 싯둘고개라는 마을이 있어서 싯둘(칼이나 낫을 가는 돌)을 생산 사용하였다고 하며 현재는 이싯둘고개와 신정마을이
합하여 신정이라고 부른다고 전해진다.
▶죽사리(竹寺里) 운제(雲堤)마을
이조중엽에 밀양박씨(密陽朴氏)와 이천서씨(利川徐氏), 이씨(李氏) 3인의 귀양살이차 지금 천정리(天定里) 천기동(天基洞)에 자리를 잡아
살다가 밀양박씨(密陽朴氏) 후손이 이곳 운제(雲堤) 마을에 정착 마을이 형성되었다.
▶죽사리(竹寺里) 명산(明山)마을
조선중엽 진주강씨(晉州姜氏)(성명미상)가 마을을 이루었는데 이 마을 뒷산은 산세(山勢)가 좋아 명산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 마을은
산세(山勢)가 좋아서 인정 많은 효자(孝子)와 선비들이 배출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이조말 고종 29년 10월에 현판된 효자각이 있다.
▶학산리(學山里) 학동(學洞)마을
1600년대 정유재란시 화순오씨(和順吳氏) 오영준(吳永俊)이 함평군
손불에서 살다가 군서면 덕산리에서 보면 학(鶴)의 날개처럼 생겼다고 학동(鶴洞)으로 불렀으나1914년부터 학동(學洞)으로 표기되었다.
▶학산리(學山里) 하대(下大)마을
1770년경 밀양박씨(密陽朴氏) 박기성(朴基聖)이 죽사리(竹寺里)에서
거주하다가 아들을 데리고 입주했는데 원래는 영마면(令麻面) 하대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학산리 하대(下大)라 개칭되었다.
▶학산리(學山里) 풍선(豊仙)마을
1668년경 신주(辛州) 은대우(殷大遇)가 전북 고부에서 살다가 이곳에
정착했고 학산리 앞까지 바다였을 당시 풍선(風船)부락에 나룻터가
있었고 배가 풍랑에 파선되었다하여 풍선(風仙)이라 칭하였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으로 개칭되었다
▶학산리(學山里) 상대(上大)마을
병자호란 당시 기계유씨(杞溪兪氏)가 무안군 해제에서 거주하다가 학산(學山)에 피난하여 상대(上大)에 정착하였다.
▶논산리(論山里) 월산(月山)마을
인동(仁同) 장씨(張氏) 장성식(張聖植)이 군서면 남계리 황곡마을에 살다가 선조들이 선산이 천정리(天定里), 천마리(川馬里)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위치에 머물게 되었고 1914년 이전에는 영마면(令麻面)에 속했는데 1914년 5개면이 통합되면서 백수읍(白岫邑) 논산리(論山里) 월산(月山)마을로 변하였다.
▶논산리(論山里) 용(龍)마을
1800년경 강릉(江陵) 유씨(劉氏) 유선경(劉善慶)이 전북 고창군 고수면에 살다 용에 입주했고, 마을뒷산이 용체형이고 마을앞산이 체형이라 용라 칭하였다.
▶논산리(論山里) 금정(金井)마을
1750년경 현풍(玄風) 곽씨(郭氏)가 천안리(天安里) 평지(平地)에서 살다가 들샘물이 좋다고 하여 터전을 잡았는데 쇠금자(金)와 샘정자(井)를 따서 금정(金井)마을로 불러지게 되었다.
▶논산리(論山里) 청용(靑龍)마을
1760년경 화순군 화군면 감들리에 거주하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조홍(曺洪)이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王子맥이 있다하여 술왕골이라 부르다가 1900년대 청용(靑龍)마을로 개칭되었다.
▶논산리(論山里) 만년(萬年)마을
1760년대 동래(東萊) 정씨(鄭氏)가 전북 임실군에서 살다가 이곳에 정착하였으나 마을 뒷산이 마치 만월(萬月)형이고 마을 지형이 둥근모양을 한 지형이라고 하여 만년동(萬年洞)으로 호칭 지금에 이르렀다.
▶장산리(莊山里) 上마을
1780년 무렵 경남 김해에서 거주한 김상(金相)이 과거등용애 실패하자 유랑생활을 하다 황토흙이 많고 배교통편이 좋아 도자기 굽기에 뜻을 두어 입주하였다
▶장산리(莊山里) 월천(月川)마을
임진왜란 당시 갑경휴(甲慶休)가 난을 피해 입주하였고, 마을 옆을 끼고 있는 장산천(莊山川)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월천(月川)이라 칭하였다.
▶장산리(莊山里) 하둔(下屯)마을
무오사화시 은둔생활을 하기 위해 서울에서 낙향하게 된 강계손(姜鷄孫)이 입주하게 되었고 원래 마을주변에 배가 닿아 배를 메는 자리가
있어 주계촌(舟繫村)이라 했으며 그후 군사들의 기지로서 피마장(避麻場)이라 했으며 말을 기를 수 있는 장소라 해서 1진이 상둔(上屯), 2진이 중둔(中屯), 3진이 하둔(下屯)이라 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장산리(莊山里) 월계(月桂)마을
연안김씨(延安金氏)가 조정에 등용되어 있던차 중상모략으로 신변에
위험이 있어 피신 중 이곳에 입주(入住)하였는데 마을의 지세(地勢)가
마치 달(月)과 같고 마을을 두르고 있는 산맥이 달(月)의 계수나무 모습과 유사하다하여 월계(月桂)라 칭하였다.
▶장산리(莊山里) 입용(入龍)마을
연안김씨(延安金氏) (성명미상)가 임진왜란의 난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입주하였으며 마을 뒷산에 산봉우리가 8개 있으며 산세(山勢)가 용(龍)의 형태처럼 생겼다하여 입용(入龍)이라 칭하였다
▶천정리(天定里) 금계(金鷄)마을
한국현(韓國鉉) 10대조가 임진왜란 당시 난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했으며 마을 뒷산에 바위가 많고 그 중 바위하나가 새벽녘에 닭이 우는 형상이 있어 김계(金鷄)라 칭하였다.
▶천정리(天定里) 평지(平地)마을
약 400여년전 임진왜란 당시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임시 난을 피해
이곳에 정착했다가 터를 잡고 살아왔다고 한다
▶천정리(天定里) 대흥(大興)마을
이조시대 350여년전 대흥부락 뒷산에 대흥사(大興寺)라는 절이 있어
대흥(大興)이라 했는데 원래는 영광군 구수면 대흥리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백갑읍(白岬邑) 천정리(天定里) 대흥(大興)부락이
되었다
▶천정리(天定里) 천기(天基)마을
이조시대 400여년전 난을 피해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정착하게 되었으며 마을 서쪽에 있는 산형체를 따라 선녀가 내려와 베짜는 형국을 이루었다고하여 하늘 (天) 터(基)를 써 지금의 천기(天基)라 칭하였으며 지금부터 350년전 함평(咸平) 이씨(李氏)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길용리(吉龍里) 입석(立石)마을
1800년초경에 박광배(朴光培)의 10대 선조가 마을의 지형을 살펴보니 마을 뒷산에 바위가 서있어 입석(立石)이라 칭하였다.
마을이 형성되기전 백제시대 중국으로부터 법성포와 구갑(九岬)2리를 거처 불갑사(佛甲寺)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이곳에 큰 절을 지었는데 이곳을 수두암(水頭岩) 절터라하며 고려시대에는 구봉국사(九峰國士)를 배출하였다 한다.
▶길용리(吉龍里) 문암(門岩)마을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전남 무안군에 살다가 이곳에 와서보고 바위의
형상이 많은 문인을 배출하리라 하여 문암(門岩)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길용리(吉龍里) 용암(龍岩)마을
1700년경에 김해김씨(金海金氏) 김계식(金系植)의 10대조(祖)가 이마을에 귀양살이를 하면서 바위의 모양이 마치 용(龍)과 같다하여 용암(龍岩)이라 하였다.
▶길용리(吉龍里) 범현(帆懸)마을
평산신씨(平山辛氏)가 마을의 지세(地勢)가 범상치 않아 성현(聖賢)이
배출될 곳이라 하여 이곳에 입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불교 영산성지(靈山聖地)(원불교 영산선원에 따른 각종 건축물인
영산원(靈山院)이 있음), 정관평(貞觀平)(소태산(少太山)이 최초의 9인제자와 더불어 이지역에서 최초로 막은 방언 간척사업이며 그 당시
농민들은 염두도 내지 못한 간척사업을 성공한 효시로 알려짐)이 있으며 원불교에서는 창건정신이 깃들인 땅으로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다
▶길용리(吉龍里) 구호(九虎)마을
1884년경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성삼(朴成三)이 군서면 마읍리에서
이곳에 와 산세(山勢) 및 지세(地勢)가 좋다하여 이곳에 터를 잡았고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산(山)이 아홉 봉우리였으며 그 형상이 호랑이
아홉 마리가 노는 형상이라 하여 구호동(九虎洞)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길용리(吉龍里) 영촌(永村)마을
1884년경 부터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성삼(朴成三)이 군서면 마읍리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여 터를 잡고 살게 되었으며 현재는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함께 살고 있다.
1891년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少太山) 박빈(朴彬)이 태어난 생가가
있으며 (길용리(吉龍里) 영촌(永村)), 삼밭재 마당바위가 있는데 이곳은 소태산(少太山)이 산신(山神)을 만나기 위해 5년간 기도를 한 넓은
바위이며 노루목 대각지(大覺地)가 있는데 이곳은 소태산(少太山)이
대각을 한 터이다
▶구수리(九岫里) 구미(九尾)마을
경주정씨(慶州鄭氏) 운영(雲永)이 1800년도 초기에 정착해 살다가 이사하고 1900년경에 경주최씨(慶州崔氏)와 천안전씨(天安全氏) 이 마을에 입촌(入村)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구수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목단 동북쪽 구갑산(九岬山) 밑이 자리옆으로 지역의 꼬리라는 뜻을
빌어 구시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구수리(九岫里) 한시(韓侍)마을
조선 중기 1650년경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대략 짐작이 되며, 옛날에는 모래미라 하였으나 1924년경에 목단(木丹)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이곳 모래위에 목단이 많이 자생되었으나 현재는
없고, 거주하고 있는 경주 최씨(崔氏)와 청주(淸州) 한씨(韓氏)는 약
1800년도 입촌(入村)하여 살고 있다
▶구수리(九岫里) 은선(隱仙)마을
자세한 연대는 누가 촌명(村名)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시랭이
서남쪽에 있는 마을에 隱仙岩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은선(隱仙)이라 하였다.
▶대신리(大新里) 덕산(德山)마을
김해김씨(金海金氏) 김경장(金京長)이 고려말엽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산세가 용(龍)의 형태를 하고 있어 덕망이 있게 보이는 산이라해
덕산(德山)이라 하였다.
이 마을에는 지방 문화재 기념물 재 23호(號)인 정서재란열부순절지(丁西再亂烈婦殉節地)가 있는데 함평 월야에 살던 동래(洞萊) 진주정씨(晉州鄭氏) 문중의 부인이 정유재란 당시 일본놈들이 겁탈을 하려고 하자 이곳까지 피신하였으나 계속 추적하자 12부인이 순절하였다하며 정서재란열부순절지(丁西再亂烈婦殉節地)에서 바다쪽으로 50m쯤 가면 바위의 형태가 한쪽은 처녀의 유방과 같이 생기고 다른쪽은
검은 바위로 되어 있으며 그 밑에서 물이 나오고 있으며 이 물은 신경통에 좋은 음양수라고 한다
▶대신리(大新里) 묵방(墨防)마을
380년경에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상언(朴尙彦)이 경남 밀양에서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을 버리고 글을 벗삼아 생을 보내기 위해
방랑생활을 하다가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산세(山勢)를 보니 등잔을 걸어 놓은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속담 등하부명(燈下不明)을
인용, 어둡다는 뜻으로 묵방(墨防)이라 칭하였다 한다
▶대신리(大新里) 장암(長岩)마을
약1400여년경 수원백씨(水源白氏) 백일락(白日樂)이 수원에서 거주하다 조정에 등용되어 있던차 중상모략으로 신변에 위험이 따르게 되어 피신하게 된것이 유래이며 마을이 바위로 둘러 쌓여 있어 장암(長岩)이라 부르고 있다
▶대신리(大新里) 매정(梅亭)마을
약1500여년경 이천서씨(利川徐氏) 서국선(徐國善)이 벼슬을 하였으나 당파싸움으로 물러나게 되어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대신리(大新里) 신흥(新興)마을
1680여년경 전주이씨(全州李氏) 이한(李翰)의 31대손 이사빈(李士彬)이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새롭게 흥(興)하라는 뜻에서 신흥(新興)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신2리(大新里) 山(대추뫼)마을
1680년 강갑(康甲) 대출척(大黜陟)으로 남인이 몰릴때 함양박씨(咸陽朴氏) 퇴사정(退辭亭) 상환(尙煥)이 부호군(副護軍)벼슬을 버리고 남하(南下)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
되었으니 연화정수(蓮花淨水)로 알려진 터였다. 마을에 대추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대추뫼(초山)라고 칭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