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아시아금융위기 (하편)
1997 Asian Financial Crisis
3. 국가별 상황
3.1. 태 국
1985년부터 1996년 사이에 태국의 경제는 연평균 9%씩 성장하여,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성장율을 보였다. 이에 반해 물가인상율은 3.4-5.7%의 상대적으로 낮은 모습을 보여주었다.(주16) 당시 태국 바트화는 미화 1달러 당 25바트로 고정되어 있었다.
1997년 5월 14-15일, 태국 바트화는 대규모 투기적 공격에 시달렸다. 1997년 6월 30일 차왈릿 용짜이윳(Chavalit Yongchaiyudh) 태국 총리는 바트화를 평가절하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이 발언이 태국 정부로 하여금 국제투기세력에 대항해 미국 달러에 대해 고정환율이 적용되던 바트화를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결국 금융, 부동산, 건설분야가 광범위하게 얼어붙으면서 잘 나가던 태국 경제가 멈춰섰다. 또한 대규모 노동자들이 귀향을 해야 했고, 60만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귀국을 해야 했다.(주17) 바트화는 빠르게 가치를 상실하며, 이전 가치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폭락했다. 1998년 1월 바트화는 미화 1달러 당 56바트까지 떨어졌다. 태국 주식시장은 주가총액의 75%를 상실했다. 당시까지 태국 최대의 금융회사였던 "파이낸스 원"(Finance One)도 파산했다.(주18)
태국 정부는 결국 1997년 7월 2일에 바트화에 대해 변동환율제도를 적용시켰다. 1997년 8월 11일, "국제통화기금"(IMF)은 170억 달러에 달하는 긴급자금지원을 조건부로 지원했다. IMF의 조건에는 파산절차(재조직 및 구조조정)에 관한 법률정비, 은행 및 금융기관들에 대한 강력한 규제장치 도입 등이 포함되었다. IMF는 1997년 8월 20일에 39억 달러에 달하는 또다른 구제금융(bailout)도 승인했다.
태국 야당들은 이 평가절하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이 이익을 보았다고 공격하기도 했다.(주19) 사법부가 이 진상의 수사에 착수했고, 전 내각 멤버 중 한 사람인 사노(Sanoh)가 이 평가절하에 차왈릿, 탁신, 타농(Thanong), 뽀낀(Pokin) 등 네 사람이 개입했다고 증언했지만,(주20) 탁신은 물론 어떠한 정파에 대한 고소도 없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2001년에 태국 경제는 회복되었다. 세수가 증대되면서 예산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되었고, 예정보다 4년 빠른 2003년에 IMF의 부채를 모두 갚았다. 2008년 7월에 태국 바트화는 34바트선을 유지했다.
(주16) http://www.columbia.edu/cu/thai/html/financial97_98.html.
(주17) Kaufman, GG., Krueger, TH., Hunter, WC. (1999) The Asian Financial Crisis: Origins, Implications and Solutions. Springer, pp.193-198.
(주18) Liebhold, David. Thailand's Scapegoat? Battling extradition over charges of embezzlement, a financier says he's the fall guy for the 1997 financial crash. TIME.com. 1999-12-27.
(주19) Pressure from below: Supporters of the new, improved Constitution now have to help turn words into action, 1997-10-10.
(주20) http://www.antithaksin.com/041_Sanoh_View.html. |
3.2. 인도네시아
1997년 6월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는 금융위기와는 거리가 먼듯이 보였다. 태국과 달리 인도네시아는 물가인상율도 낮았고, 무역수지도 9억 달러 이상 흑자를 기록했으며, 외환보유고도 200억 달러가 넘었고, 금융분야의 구조도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인도네시아 기업들이 미국 달러화로 차입하였다. 이전 수년간 인도네시아 루삐아(rupiah)화는 달러에 비해 강세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기업들의 선택은 적절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국 화폐의 약세가 이어지자 이러한 달러 차입이 주는 영향이 통제가능한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1997년 7월 태국이 변동환율제도를 시행하자, 인도네시아 통화당국은 자국 내 환율변동폭을 8%에서 12%로 증가시켰다. 8월이 되자 인도네시아 루삐아화는 갑작스레 심각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1997년 8월 14일 관리변동환율제는 완전 변동환율제로 조정되었다. 이후 루삐아화의 가치는 더욱더 평가절하되었다. IMF가 230억 달러의 긴급구제금융 지원을 발표했지만, 기업부채 및 대규모 루삐아화 매도, 달러에 대한 강한 수요가 겹치면서 루삐아화의 가치는 더욱더 가라앉았다. 9월이 되자 루삐아화 및 "자카르타 증권거래소"(Jakarta Stock Exchange: JSX)가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 국제 신용평가회사 "무디스"(Moody's)는 인도네시아의 장기 부채들을 "정크본드"(junk bond)로 그 등급을 낮추게 되었다.(주21)
루삐아화 위기는 1997년 7월에 시작됐지만, 실제로 그 위기가 강화된 것은 기업들의 대차대조표(balance sheets)가 발표되는 11월에 이르러서였다. 루삐아화의 평가절하로 달러 빚을 많이 빌린 기업들의 경우 높은 비용부담에 직면했고, 많은 이들이 루삐아화를 매도하고 달러를 매수함으로써 루삐아화 가치하락을 더더욱 부채질했다. 1998년 2월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은 수드라자드 지완도노(J. Soedradjad Djiwandono)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총재를 해임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98년 5월 대규모 시위의 압력으로 결국 30년간 집권했던 수하르토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비비(B. J. Habibie) 부통령이 그 자리에 올랐다. 환율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달러 대 루삐아화의 환율은 대체로 1달러당 2,600루삐아 정도를 유지했다.(주22) 1998년 1월 23-26일의 일시적 환율이 1달러당 14,000루삐아에 달하면서 1월의 달러 대 루삐아화 환율은 1달러당 11,000루삐아에 이르렀고, 이후 6-7월의 약 6주간 1달러당 14,000루삐아 수준을 지속했다. 1998년 12월 31일의 환율은 정확히 1달러당 8,000루삐아를 기록했다.(주23) 1998년 인도네시아의 GDP는 13.5%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3.3. 한 국
한국의 거시경제적 펀다멘탈스는 좋았지만, 공격적인 확장과정에서 대규모 차입을 한 기업들로 인해 은행권이 대규모 부실채권(non-performing loans)을 안고 있었다. 당시 세계수준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한국의 기업들은 대규모 기업집단을 구축하기 위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업들이 이익이 없고 사업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정도의 차는 있지만, 일정 부분 정부의 통제하에 있던 한국의 재벌들은 단순히 자본투자를 흡수하는 작업만 해댔다. 결국 과도한 부채가 주요한 패인이자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97년 7월 한국의 3번째 자동차제조회사인 "기아자동차"(Kia Motors)가 긴급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사진) IMF 사태를 초래하여,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무능한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습.
아시아시장 불황을 인식하여 "무디스"는 1997년 11월 28일 한국의 신용등급을 A1에서 A3로 낮췄고, 12월 11일에는 다시금 B2까지 하향조정했다. 이미 11월 들어 한국의 주식시장은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등급조정은 이같은 추세를 가속시켰다. 서울의 증권거래소는 1997년 11월 7일에 4% 촉락했고, 이러 11월 8일에 하루 하락폭으로는 사상 최대치인 8%가 폭락했다. 11월 24일 IMF가 강도높은 개혁을 요구할 것으로 알려지자 다시금 7.2%가 폭락했다.
1998년 "현대자동차"(Hyundai Motors)가 "기아자동차"를 인수했고, 50억 달러가 투입된 "삼성자동차"도 이 위기 속에 해체되었다. 또한 "대우자동차"가 미국의 "제너랄 모터스"(General Motors: GM)에 팔리기도 했다.
이 사이에 한국의 원화는 1달러당 600원대에서 1,700원 이상까지 가치가 하락했다. 한국은 1960년대 이래로 1인당 GDP가 80달러 정도에서 2007년 현재 21,000달러로 성장하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경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업집단(재벌)과 마찬가지로 한국 정부 역시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 위기의 여파로 GDP 대비 국가채무율이 13%에서 30%로 증가하여 거의 2배가 되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 위기를 "IMF위기"(IMF crisis) 혹은 "IMF사태"라고 부른다.
3.4. 필리핀
1997년 5월 "필리핀중앙은행"은 지급준비율을 1.75%인상하고, 6월 19일에 다시금 2%를 인상했다. 7월 2일과 3일에 태국발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필리핀중앙은행"(Philippine Central Bank)은 외환시장에 개입하여 페소(peso)화를 방어하는 한편, 1997년 7월 중순경에는 "아시아금융위기"의 공격의 한 가운데에서는 기준금리(overnight rate)를 15%에서 30%로 인상했다. 1달러당 26페소 정도이던 환율은 1999년 중반에는 1달러당 38페소로 가치가 떨어졌고, 2001년 8월 중순에는 1달러당 54페소까지도 했다.
2001년에는 조셉 에스트라다( Joseph Estrada) 대통령이 주로 "웻텡"(jueteng: 필리핀 토착형 도박게임) 관련 비리가 중심이 된 스캔들에 빠져들어 어수선했지만, 최악일 때 경제가 0.6% 마이너스 성장한 데서 2001년에는 약 3% 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1997년 "필리핀증권거래소"(PSE)를 대표하는 "PSE종합주가지수"(PSE Composite Index)는 최대 3,000포인트에서 약 1,000포인트까지 추락하기도 했다. 페소화는 더욱 더 떨어져 1달러당 55페소까지도 내려갔다.
그해 말, 에스트라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정국에 돌입했지만, 상원의 여당 세력은 더 이상의 절차를 진행하지 않는 안건을 가결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제2차 EDSA 혁명"에서 정점에 달하게 될 대중적 저항을 불러왔고, 결국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사임하고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Gloria Macapagal-Arroyo)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아로요 대통령은 간신히 이 사태를 진정시키고 1997년 말경에는 1달러당 50페소 정도까지 낮추고, 2007년말 현재 1달러당 41페소 정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07년의 필리핀주식시장은 사상 최고점에 달했고, 경제성장율도 7% 정도로 과거 20년 중 최대성장을 보였다.
3.5. 홍 콩
우연한 2가지 사건이 원래는무관한 것이었지만, 1997년 7월 2일 태국 바트화가 붕괴한 것은 영국이 홍콩 주권을 중국에 반환한 지 꼭 24시간 이후에 발생했다. 1983년 이래로 홍콩 달러는 미화 1달러당 7.8 홍콩달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7년 홍콩의 물가인상율이 미국에 비해 상당히 높아서, 홍콩달러 역시 투기적 자본의 압박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홍콩의 통화당국은 홍콩달러를 방어하는 데 미화 10억 달러 이상을 사용했다. 당시 홍콩의 외환보유고는 800억 달러로, 이는 당시 M1 통화의 700%이자 M3 통화의 45%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따라서 홍콩 통화당국은 간신히 그 고정환율을 방어할 수 있었다.
주식시장도 요동을 쳐서, 1997년 10월 20-23일 사이에 "항생지수"(Hang Seng Index: HSI)가 23%나 폭락했다. "홍콩 금융관리국"(Hong Kong Monetary Authority: HKMA)은 환율을 방어할 것이라 약속했다. 1998년 8월 15일 기준금리가 8%에서 23%로 인상됐고, 이는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500%나 인상된 것이다. HKMA는 홍콩의 독특한 환율제도로 인해 투기자들이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그들은 대규모로 홍콩 달러를 순매도하면서 자동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환율의 인상은 주식시장에 압박을 가해 투기자들이 주식시장에서 단기차액을 획득했다. 따라서 HKMA는 1998년 8월 중순부터 항생지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HKMA 및 도날드 창(Donald Tsang, 曾蔭權: 현 홍콩정무장관) 금융관리국장은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홍콩 정부는 다양한 회사들의 주식 150억 달러(1,200억 홍콩달러) 상당을 사들였다.(주24) 이로써 일부 회사들의 대주주가 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HSBC(홍콩상하이은행)는 홍콩 정부 지분이 10%를 차지했다. 1999년 홍콩 정부는 약 40억 달러(300억 홍콩달러)의 수익률을 올린 "홍콩 트레커펀드"(Tracker Fund of Hong Kong)를 창출하며 이 주식들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3.6. 말레이시아
금융위기가 있기 전에 말레이시아의 GDP의 5%에 이르는 막대한 경상수지(current account)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인기있는 투지처였고, 그러한 현상은 "쿠알라룸푸르증권거래소"(KLSE)를 통해 반영되고 있었다. KLSE는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마찬가지로 시장 자체 규모를 능가할 정도의 고도의 자본집중화를 통해, 정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당시 정부에서 추진하던 "와와산 2020"(Wawasan 2020: "비전 2020"이란 의미) 계획에 따르면, 말레이시아는 2020년까지 성장을 지속할 것으로 기대됐다. 1997년 초반 KLSE 지수는 1,200을 상회했고, 말레이시아 링깃화는 미화 1달러당 2.50링깃 정도였으며, 기준금리는 7% 이하였다.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가 평가절하된지 며칠 후, 말레이시아 링깃화는 투기세력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기준금리가 8%에서 40%로 인상됐다. 이러한 조치는 주식 및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와 더불어 집중적인 매도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1997년 말에 이르면 여러 지표들이 투자적격 등급에서 정크본드 등급으로 떨어지고, KLSE 지수도 1,200 이상에서 600 이하로 떨어지면 주가총액의 50% 이상을 상실하고 만다. 또한 1달러당 2.50링깃이던 환율도 1달러당 4.10링깃 수준으로 평가절하된다. 결국 마하티르 모함메드(Mahathir Mohammad) 총리는 엄격한 통화관리를 실시하면서, 환율도 1달러당 3.80링깃으로 고정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1998년 실물경제의 골깊은 침체로 과거 수년간 처음으로 맞이하는 불황의 늪으로 들어갔다. 건설분야는 23.5% 감소했고, 제조업은 9%, 그리고 농업 부문은 5.9%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1998년 말레이시아가 기록한 GDP는 마이너스 6.2%였다. 이 해의 링깃화 가치는 미화 1달러당 4.70링깃 이하였고, KLSE 지수도 270을 밑돌았다.
1998년 9월 다양한 기제를 동원해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이란 발표가 있었다. 그 중 한 방편이 기존의 고정환율제도에서 변동환율제도로 전환시킨 것이다.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인 "네가라 은행"(Bank Negara)은 당시 환율을 미화 1달러당 3.8링깃으로 고정시켜 두고 있었다. 말레이시아는 IMF 지원을 거부하고, 강력한 자본통제를 실시했다. 다양한 관리당국이 설치되었다. 기업들의 부채는 "기업채무조정위원회"(Corporate Debt Restructuring Committee)에서 담당했다. 부실패권 전담기구인 "다나하르따"(Danaharta)는 자산의 순차적 혐금화를 위해 은행들로부터 부실채권을 손절매하여 사들였다. 또한 자본금확충을 위한 예금보험기구인 "다나모달"(Danamodal)도 설립했다.
성장은 느린 속도로 안정됐지만, 지속가능한 페이스를 유지했다.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도 확실한 흑자로 돌아섰다. 은행들은 자본 비율을 높였고, 부실채권(NPL)도 순차적으로 정리했다. 소규모 은행들은 보다 대규모 은행들이 매입해 합병했다. 재무관리가 불가능한 많은 수의 금융사(PLC)는 정리되었다. 2005년 말레이시아의 경상수지는 14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주25) 하지만 자산가치는 이전 최고 수준까지 회복하진 못했다. 2005년 위기관리를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던 환율제도도 개정했다. 하지만 이전의 완전 변동환율제도가 아니라 싱가포르 달러와 유사환 관리변동환율제도가 되었다.
3.7. 싱가포르
금융위기가 퍼져나가면서 싱가포르 경제도 짧은 불황에 돌입했다. 이러한 짧은 기간과 미약한 영향은 싱가포르 정부의 능동적 관리능력에 신뢰를 부여했다. 예를 들어 경기연착륙을 위해 "싱가포르 통화관리국"(Monetary Authority of Singapore: MAS)은 완충장치로 싱가포르 달러가 20% 정도 점진적으로 평가절하되도록 허용했다. 또한 "잠정개선사업"(Interim Upgrading Program) 및 관련 건설사업에 대한 발표도 시의적절하게 이뤄졌다. 또한 노동시장도 그 기능을 자율에 맡겨두는 대신, 가처분소득(disposable income) 및 국내수요에 영향을 덜 미치면서도 인권비를 삭감할 수 있도록 "국가임금위원회"(National Wage Council: NWC)가 "중앙연금준비기금"(Central Provident Fund, CPF: 국민연금에 해당)의 조치에 사전동의를 해주었다.
홍콩과 달리 싱가포르 정부는 자본시장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고, 주식시장의 "스트레이츠 타임스 지수"(Straits Times Index)가 60%나 떨어지는 것도 방치했다. 이후 1년이 채 못되어 싱가포르는 금융위기의 여파에서 빠져나왔고, 다시금 성장궤도를 지속해나갔다.(주26)
3.8. 중 국
1994년부터 중국의 위안화(인민폐, 人民幣, Rénmínbì: RMB)는 미화 1달러당 8.3위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1997-1998년 사이의 아시아경제위기 소용돌이 속에서, 아세안(ASEAN)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수출경쟁력을 위해 중국이 위안화를 평가절하할 것으로 기대를 한 서구의 투기세력이 중국 위안화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이미 환율을 평가절하시킨 다른 아세안 국가들에 비해 가격경쟁력에서 열세에 있었다.
하지만 위안화의 태환성 부족이란 특성이 투기세력으로부터 통화가치를 방어해주었고, 고정환율제도도 유지키로 결정했다. 이로써 아시아 내 중국의 경제적 위상은 개선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을 반영하여 2.3% 절상하기도 했다.
다른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달리, 중국 내 거의 모든 외국인투자는 유가증권 형태가 아니라 토지 위에 건설된 공장이라는 형태로 되어 있었고, 이 점이 중국에서 자본이탈이 가속화되는 것을 방지시켜 주었다. 한국이나 여타 동남아 국가들과 비교해서 중국은 금융위기의 영향을 덜 받긴 했지만, 경제의 구조조정에 대한 필요가 대두하며 1998년과 1999년에 성장율이 급격히 둔화됐다. 특히 중국 정부로 하여금, 은행부문이 안고있던 대규모 부실채권 및 통상분야의 지나친 미국의존도 등 경제 및 금융 부문의 취약성을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겨주었다.
3.9. 미국과 일본
"아시아발 [경제] 독감"(Asian flu) 미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들 시장은 붕괴하진 않았지만,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1997년 10월 27일, 다우존스 산업지수(Dow Jones Industrial Average)는 아시아 경제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면서 554포인트(7.2%)나 폭락했다. 뉴욕 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 NYSE)는 영업시간을 약간 연장시켜야만 했다. 경제위기는 소비심리와 소비자신뢰도 위축시켰다.
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관계로 일본 경제도 영향을 받았다. 일본경제는 다른 모든 아시아 국가들을 다 합친 것보다 2배 정도의 규모여서, 아시아 국가들은 항상 일본에 대한 무역적자를 보이고 있었다. 일본 엔화는 대량 매도사태로 1달러당 147엔 수준까지 평가절하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세계 최대 외환보유고를 가진 나라여서, 손쉽게 방어한 후 원상으로 회복시켰다. 일본의 실질 GDP 성장율은 이전 해의 5%에서 1997년 1.6%로 급격히 둔화됐고, 경쟁국들의 저가공세로 인해 1998년에는 경기후퇴를 하기도 했다. 아시아 금융위기는 일본에서도 파산율을 높여주었다. 게다가 한국 원화의 평가절하와 중국의 정상상태 이윤이 겹치면서, 여러 일본 기업들이 노골적으로 경쟁력 확보가 불가능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주27)
이 위가가 몰고온 또 다른 장기적 변화로는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에 변화가 초래된 점을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루 약 50년간, 미국은 상당히 인위적 무역환경을 지원하거나 환율을 통제하여 일본을 지원해주곤 했지만, 이제 그러한 지원은 제한적 차원에서만 진행되었다.(주28)
(주27) Pettis, Michael (2001). The Volatility Machine: Emerging Economies and the Threat of Financial Collapse. Oxford University Press, pp.55-60.
(주28) Pettis, Michael (2001), p.79. |
4. 결 과
4.1. 아시아
이 위기는 거시적 차원에서 엄청난 영향을 미쳐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서 통화가치와 주가가 급락했고, 자산가치도 하락했다.(주29) 1997년 아세안(ASEAN)의 명목 GDP는 92억 달러가 감소했고, 1998년에도 GDP 총액이 2,182억 달러에 머물러 31.7%나 감소했다.(주30) 또한 많은 산업들이 붕괴하여 1997-1998년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빈곤선에서 허덕였다. 인도네시아, 한국, 태국이 이 사태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국가들이다.
미화 1달러당 환율변동 (주31)
통화 종류 |
1997년 6월 |
1998년 7월 |
태국 바트 화 |
24.5 |
41 (40% 하락) |
인도네시아 루삐아 화 |
2,380 |
14,150 (83.2% 하락) |
필리핀 페소 화 |
26.3 |
42 (37.4% 하락) |
말레이시아 링깃 화 |
2.5 |
4.1 (39% 하락) |
한국 원 화 |
850 |
1,290 (34.1% 하락) |
국가별 GNP 변화추이 (주31)
국가 |
1997년 6월 |
1998년 7월 |
태국 |
1,700억 달러 |
1,020억 달러 (40.0% 감소) |
인도네시아 |
2,050억 달러 |
340억 달러 (83.4% 감소) |
필리핀 |
750억 달러 |
470억 달러 (37.3% 감소) |
말레이시아 |
900억 달러 |
550억 달러 (38.9% 감소) |
한국 |
4,300억 달러 |
2,830억 달러 (34.2% 감소) |
위의 표를 살펴보면 1997년 7월 중순 위기가 한창일 때 필리핀은 기준금리를 32%로 올렸고, 인도네시아는 1998년 위기가 가중되자 기준금리를 65%까지도 올렸음에 불구하고, 이 2개국의 통화가치가 한국, 태국, 말레이시아보다 결코 나은 상황을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한국, 태국, 말레이시아는 기준금리를 20% 이하로만 유지했다. 바로 이 점이 아시아금융위기에 대한 IMF의 고금리 처방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도록 만들어주었다.
경제위기는 또한 정치적 지각변동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 사례로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 대통령이 사임했고, 태국에서는 차왈릿 용짜이윳 총리가 사임했다. 또한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와 IMF를 특정해 비판대상으로 지목하는 반-서구적 정서도 발생했다. 태국의 경우 일본 투자자들은 남았지만 막대한 양의 미국 투자는 빠져나갔고, 그 자리를 유럽의 투자자들이 채워나갔다.(인용각주 필요) 또한 중앙 권력이 약화됨으로써 이슬람 및 여타 분리주의 운동들도 격화되었다.(주32)
이 위기가 초래한 보다 장기적 영향으로는, 위기 전후로 상대적 소득역전 현상이 발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97년 인도네시아의 1인당 명목 GDP는 42.3%가 곤두박질 쳤고, 태국은 21.2%, 말레이시아 19%, 한국 18.5%, 필리핀이 12.5% 감소했다.(주30)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발표하는 <CIA 월드 팩트북>(CIA World Factbook)의 보고에 따르면, 1997-2005년 사이의 구매력 기준 1인당 소득이 태국은 8,800달러에서 8,300달러로 감소했고, 인도네시아는 4,600달러에서 3,700달러로, 말레이시아는 11,100달러에서 10,400달러로 떨어졌다. 동일한 시기의 전세계 1인당 소득 평균은 6,500달러에서 9,300달러로 증가했다.(주33) CIA의 분석결과는 인도네시아 경제의 경우 2005년 현재도 1997년 이전보다 규모가 작은 상태로 이는 "대공황"(Great Depression) 시기에 발생했던 현상과 유사한 것이라 평가했다.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보면, 대량의 투자와 경제적 중심점이 일본 및 아세안 국가들로부터 중국 및 인도로 옮겨지기도 했다.(주34)
경제학자들은 이 위기의 강도와 전이속도, 그리고 역학관계 등에 대해 강도높게 연구하기도 했다. 이 위기는 여러 나라들에 영향을 미쳤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단 몇개월만에 과정들이 진행됐고, 위기의 각 단계마다 선도적인 경제전문가들은 특히 국제기구들이 배후에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특히 경제학자들에게 흥미로왔던 점은 이 위기가 대부분의 선진국 경제에 큰 해를 입히지 않은 채 신속하게 종료됐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점은 호기심을 자극해 금융경제학(financial economics) 서적 출판이 러쉬를 이뤘고, 어찌히여 이 위기가 발생했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문헌들도 많이 출판되었다. 많은 비판가들은 이 위기에서 IMF가 취한 정책들을 비판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례는 전직 월드뱅크(World Bank) 연구원을 지낸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의 저서였다.
이 위기로 인해 정치적인 면에서 약간의 발전도 있었다. 특히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우가 이에 해당하며, 이들 국가에서는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의 개성도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급속한 인플레이션(물가인상율)은 스하르토 정권을 약화시켜 1998년 정권붕괴를 가져왔고, 그 틈바구니에서 동티모르도 독립을 얻어낼 수 있었다.(주35)
(주29) Tiwari, Rajnish (2003). Post-crisis Exchange Rate Regimes in Southeast Asia, Seminar Paper, University of Hamburg, pp.1-3.
(주30) http://www.adb.org/Documents/Books/Key_Indicators/2001/rt11_ki2001.xls.
(주31) Cheetham, R. 1998. Asia Crisis. Paper presented at conference, U.S.-ASEAN-Japan policy Dialogue. School of Advanced International Studies of Johns Hopkins University, June 7–9, Washington, D.C.
(주32) S. Radelet, J.D. Sachs, R.N. Cooper, B.P. Bosworth (1998). The East Asian Financial Crisis: Diagnosis, Remedies, Prospects. Brookings Papers on Economic Activity, pp.5-6.
(주33) The Asian financial crisis ten years later: assessing the past and looking to the future. Janet L. Yellen. Speech to the Asia Society of Southern California, Los Angeles, California, 6 February 2007.
(주34) Kilgour, Andrea (1999). The changing economic situation in Vietnam: A product of the Asian crisis?
(주35) Weisbrot, Mark (2007년 8월). Ten Years After: The Lasting Impact of the Asian Financial Crisis. Center for Economic and Policy Research, p.6. |
4.2. 아시아 바깥
"아시아금융위기" 이후로 국제투자자들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대출을 망설이게 됨으로써, 세계 여러 지역 개발도상국들의 경기가 둔화되었다. 이 위기의 강력한 충격은 유가를 급락시켜, 1998년 말경에는 1배럴당 8달러 수준까지 하락했다. 이로 인해 "석유수출기구"(OPEC) 회원국 및 기타 석유수출국가들의 재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석유를 통한 세입이 줄어들게 되자 "1998년 러시아금융위기"가 발생했고,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자 미국의 대형 투자사 "롱텀캐피탈메니지먼트"(Long-Term Capital Management: LTCM)는 4개월만에 46억 달러의 손실을 입고 파산했다. 금융시장의 붕괴를 막고자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 의장이 이끄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36억 2,500만 달러에 이르는 긴급구제금융을 조달하기도 했다. 1990년대 말에는 주요 이머징마켓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위기에 빠지고 만다.(주36)
(크메르의 세계 추가 자료사진: The Times)
LTCM 창립자 존 메리웨더.
일반적으로 이 위기는 워싱턴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 및 IMF와 "월드뱅크"와 같은 국제기구들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현상 중 하나였다. 이들 국제기구들은 1999년 반세계화 운동(anti-globalization movement)이 벌어진 이후 선진국들에서 거의 동시에 비판을 당하기도 했다.
아시아금융위기 이후 미국 시애틀, 카타르의 도하, 멕시코의 칸쿤, 홍콩에서 4차례의 주요한 협상(라운드)이 진행됐지만 의미있는 협상안을 도출해내는 데 실패했다. 시래의 원인으로는 개발도상국들의 주장이 보다 강해졌고, 각국이 세계 규모의 기구보다는 역내 혹은 양자간 FTA 성사 쪽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 사태 이후 중국, 일본,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환율공격에 대비하여 외환관리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 또다른 위기가 발생하자 범-아시아 통화스왑 제도가 도입됐다. 하지만 대단히 흐미로운 점은 브라질, 러시아, 인도는 물론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자국통화 가치를 하락시켜, 외환보유고를 증가시키는 일본식 모델을 따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미국 경기부양을 위한 부동산 투자(2001-2005) 및 주식자산 버블(1996-2000)을 일으키면서 미국국채(treasury bonds) 판매량을 사상 최대로 증가시켰다.
(주36) The Crash transcript. PBS Frontl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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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실상 1997년 위기를 시작으로 특히 아시아 지역을 필두로... 세계적인 경제, 사회 구조가 변했습니다... 즉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사회가 전혀 다른 사회로 변한 것입니다...... 당시 캄보디아 경제는 타격을 받을 것이 별로 없어서 별 영향이 없었습니다만... 동남아의 다른 국가들을 이해하려면, 대충 이 시기를 출발점으로 해나가면 ... 현재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아마도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를 살펴봄으로써, 보다 확대된 역내 문제들을 살피는 데 큰그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 주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비교적 오래 걸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