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정신으로 검도를 지키신 - 범사 8단 박영헌 선생님에 대해 쓴글입니다
첫인상
선생의 집은 단촐한 가옥이었다. 남해에서도 약간 안쪽으로 들어 앉았다. 그나마 선생은 약한 기관지 탓에 바닷 바람을 부담스러워 하신다.육안으로 보기에 1m 50cm정도의 어디서나 쉽게 볼수 있는 노인네 같은 모습이나 자세히 보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단아함이 옹골차 있었다. 주변엔 검도를 하시는 분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지로 선생을 보고는 무도를 하시는 이라 믿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차라리 선생은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닌 선비로 보여진다.우린 마치 오래묵은 대나무 숲속에 은거하는 은자를 뵙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선생이 말문을 열길 기다렸다.
1.눈으로 배우는 검도
"4살 때 고향 남해에서 부모님을 따라 일본 땅에 들어갔었지. 그후 25살 때 해방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아왔어"선생은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수학하셨다.검도는 12살 때 무덕정에서 입문을 했다. 선생은 숙부가 일본인 장사꾼에게 칼을 맞아 다친 것이 너무 억울해서 검도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당시에는 배우는 사람이 많아 눈치껏 배워야했다. 1시간이라는 수련 시간은 겨우 두 번 들어가면 종이 땡땡 쳤다. 그때는 발을 걸어 넘어뜨리 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다행히 선생은 유도 초단까지 땄었기 때문에 그런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소한 체력으로 버티기 힘들어 유도를 그만두고 검도로 전향했던 것이다.일본에선 가스, 전기 용접을 하며 생활을 하였고, 퇴근후엔 직장 동료와 청년들에게 검도도 가르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중매로 고향 해남 아가씨를 일본으로 초청해 결혼을 한 것이 22살 때였다. 마침 과일을 들고 사모님이 들어오셨다. 사모님(정봉선, 76세)은 선생과 달리 키도 크시고 건강하게(?) 생기셨다. 날카로운 선의 선생 얼굴과 굵직굵직 하게 생기신 사모님의 얼굴은 참 대조적이었다. 일본 사범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시가 다꾸미라는 해군 장교였다. 노인?br> ?그분의 특기는 찌 름이었는데 어떠한 상황에서도 들어오는 찌름에 속절없이 당하셨단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에 선생보다 작은 키지만 빈틈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기세, 시가 선생의 찌름이 무서워 한동안 죽도를 잡지 못했다고 한다.
2.그리운 조국으로
선생은 고향 남해로 귀국했으나 어릴 때부터 일본에서 자라 말이 통하지 않아 고생을 많이했다. 처음엔 시계도 고치고 초상화도 그리다가 사진관을 차렸다. 때론 일본에서 익힌 용접기술로 생계를 이었다. 그래도 선생은 검도 가르치는 것을 계속했다. 해남 남면 초등학교 교사를 가르치는 것을 시초로 중,고등학생은 물론 일반이나 서면 경찰 지도까지 이어졌다.죽도도 직접 깎아주고, 호구도 망가지면 기워주고, 장소도 경찰서 도장을 빌리기 전엔 산에 가서 가르치기도 했다. 비가 오면 흠뻑 젖던 그 시절, 호구는 일본인들이 남긴 것을 썼고, 죽도는 대나무를 통째로 잘라 손잡이만 남겨놓고 앞부분을 4조각 내서 죽도 흉내를 내던...죽도가 약해서 워낙 잘깨져 마음은 조마조마하고, 가죽이 없어 떡베(일종의 삼베)나 그것이 없어 장갑을 호완 대신으로 착용했다. 그러니 수련중에 맞아서 아파하는 학생들이 속출하고... 호면은 머리에 방석을 덮어쓰고...
3.진짜 검도
"75살 까지 현역 사범을 했지. 큰 아들(박승일. 4단)은 서해 경찰서에 근무하고, 막내 아들(박승철, 4단)이 검도의 대를 이어 고맙기 그지없어.한국의 짚단 베기는 문제점이 많아. 썩은 짚단을 자르는 건 속임수야. 우린 썩은 짚은 솎아내어 진짜만 추려서 굵직하게 해놓고 하나만 베기도 참으로 어려운데 한손 놓고 자유자재로 벤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단전에 힘을 모아 위에서 아래로 힘껏 베어도 겨우 잘라내는 베기를 (이때 잘라지는 소리는 '팍'하고 난다)엉터리로 하는 후배에게 충고를 해주지. '그리 베면 남들이 보기엔 베는 것 같지만 실제는 기술이 향상되지 않으니까 제대로 단단한 짚단을 놓고 베라'하고 말이야. 실제로는 한 손으로 하는 건 베어지지 않아. 허리가 제대로 중심이 잡히고 손목이 살아있어야 베어지는 것이야"선생은 일본에서 발도술(현 거합도) 3단을 받았다."칼로 밀고 또는 당기면서 베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깨달아야해. 그만한 수련이 되야 칼을 쓰는 거지. 엉터리로 배워서 쓰는 사람이 많아 안타까워"뒷발을 세우는 사람이 많은데 뒷꿈치를 올려선 힘이 없으니 주의 했으면 하신다.본국검법에 관해 기자가 물어보니 답하기 곤란하다고만 하신다. 그래도 끝? br> ?간청하니 조심스럽게 말씀하신다. "우리에게도 검도의 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내세운 본국검법이 그 의도는 참 좋으나 검술보다는 검무에 가깝다고 생각해. 그 이유는 한 발을 들어 찌르거나 뛰어 들며 치는 것은 실제로 치명상을 주기 어려운 약점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하신다.
4.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 마라.
선생은 노름 따위의 잡기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게 옳은 길이 아니면 생각지 않는 고지식함 때문에 꿋꿋이 사범의 길을 가실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검을 다룰 때 특히 왼손목 관절을 잘 써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계신다. 선생은 키가 작아서 다부지게 손목을 조여서 치는 기술을 주 특기로 한다. 시범을 보여주시는 선생에게서 항상 타격후에 특시 상대방의 목을 겨누는 것을 발견했다."타격부위 별로 48가지의 기술이 있고 고단자의 경우 겨우 10~20가지밖에 사용 못하고 있는데 기술의 원리를 하나하나 터득해 가면서 정신세계를 찾아 가는게 검도의 묘미지. 열심히 정신차리고 배워야 할 시기에 자기는 하지 못하면서 남들에게 가르치려만 하고 배운 것 을 끝까지 고치려 하지 않고 흐지부지 하는 제자들 보면 가슴이 아파. 검도는 힘도 아니고 기술이지. 또 기술보다는 정신이고. 그런 제자는 대련을 통해 가르쳐. 상대방의 힘을 죽이고. 오는 길을 칼로 누르며 빈 틈을 노려치면 헛 힘을 쓰다가 그제서야 잘못을 깨닫고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 선생의 제자 중에는 훌륭한 분이 많다. 포항의 이은범 사범은 어릴 때 엄마의 등에 많이 업혀다닌 탓에 안짱다리여서 교정을 하는데 애를 먹
으셨단다. 그밖의 울산의 장태형, 경북의 김두길, 이실관, 이해화, 홍명호, 김승호, 박경옥, 유재주, 정갑재 등의 제자가 있다. 지금은 선생의 공로를 기념하는 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고 제자들이 성의껏 모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평생 배워서 평생 써먹지 말라.
"배운바 그대로를 실행하려는 사람이 진정한 사범이야."검도는 수심이다. 말 그대로 마음을 닦는 과정이지. 검도는 정신 수련이니까 배워서 악용하지 말고 본질에 맞게 행하라. 즉 평생 배워서 평생 써먹지 말라." 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쁜 일에 써먹지 말라는 노선생의 간곡한 당부!중앙에서 활동을 하지 않은 이유를 물으니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하신다. 과거 서울이나 대구 등에서 고단자들이 좋은 자리를 권했으나 '저희가 배우지 않겠다면 모를까 열심히 배우려 하는데 고향을 버리고 가실 수 있습니까'하고 제자들이 말려서 차마 뿌리칠 수 없었고 또 부양 가족이 있는 터전을 버리기도 싫으셨단다.요즘도 몸이 아프지 않으면 시합을 자주 보러가신다. 검도 인구가 부쩍 늘어난걸 보면 경남에 검도의 씨앗을 뿌린 당사자로서 너무나 마음이 흐뭇하시단다.
6.끝없는 열정
"요즘 젊은이들은 욕심을 부리다가 가르침에 바쁜 경향이 있어. 좀더 세밀하게 가르쳐야 할 대목을 건성으로 넘기는 경향?문제야. 검도장에서 고함을 지르는 것도 고쳐야 해. 검도장에서 만큼은 신성미가 있어야 해. 칼의 각도도 문제지. 편도로 치는 경우도 고쳐야 해. 우선 사범부터 똑바로해야지. 그래야 오래가도 손색이 없는 선수. 어디든 어느 곳에서든 잘 배웠다는 말을 듣는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거야." 선생의 요즘 바램이다.
7.갈대밭에서 선생과 작별을!
선생은 참으로 점잖은 분이셨다. 예와 도를 알고 직접 실천하시는 분이시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왜 그분이 고향 남해를 지켰는지 그 의문점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저마다 잘나서 남을 인정하지 않는 요즘에 꿋꿋이 참 길을 걸으신 선생의 행적은 경이롭기 조차하다. 자신의 칼로 상대를 해하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선생은 몸소 우리에게 교훈을 남기신다.'평생 배워서 평생 써먹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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