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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강요 특강(15-1)-그리스도와의 연합, 이중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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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한우리교회 구모영장로
우리는 지금까지 믿음이란 무엇이며,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는 구체적으로 그 삶을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칼빈의 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적인 인식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실 것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확신으로,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원의 서정’(序程 ordo salutis)을 칼빈을 통하여 확립할 수 있다. 즉, “성령의 역사로서의 믿음”→“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한 이중의 은혜=칭의(稱義 Justification)와 성화(聖化 Sanctification /重生 Regeneration)”라는 과정이다. 특히 이번 강의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는데, 이러한 칭의의 근거 또는 기초는 바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轉嫁)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간주(看做)되는 것이다. 다만 칼빈의 칭의론은 그 분량이 너무 많아 3회에 걸쳐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3.11 믿음에 의한 칭의 : 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1. 칭의와 중생 : 용어를 정의함(3.11.1-4)
(1) 칭의의 교리, 그 위치와 의미(3.11.1) 율법 하에서 저주를 받은 인간을 위하여 구원을 회복하는 수단이 단 하나 남아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다만 이러한 믿음 자체가 무엇이며, 믿음이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히 설명하였는데(2.12.1; 3.3 등등), 이를 “이중의 은혜”(곧 칭의와 성화=중생)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첫째로 믿음은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 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성령)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힘써 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하나님의 은혜, 곧 선물 중 칼빈은 둘째의 중생(또는 성화)부분을 먼저 설명한 후 이제 칭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통상 일반적인 논의순서로 본다면 칭의가 먼저 언급되고 그 후에 중생과 그리스도인의 삶(선행)을 언급하는 것이 옳겠지만, 칼빈은 “믿음은 결코 선행을 결하지 않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성도들의 선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순서를 바꾸어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다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칭의와 관련하여 선행의 문제, 즉 구원을 위한 우리의 선행이 요건이라고 보는 가톨릭의 논의에 대한 반박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우선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구원을 세울 토대는 물론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수립할 기초도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토의를 진행함에 있어 “종교 생활의 요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더 많은 주의를 기우릴 것이라 한다.
(2) 칭의의 개념(3.11.2) 칭의와 관련하여 우선 의롭다함을 표현함에 있어,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과 믿음에 의해서 또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표현이 있음을 생각하자.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벌이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죄인이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만은 심판대 앞에서 굳게 설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칭의를 간단히 설명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 하였으며, 또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轉嫁)하는 것이라 말하였다.
(3) 성경에 있는 용법(3.11.3) 누가복음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했으며(눈 7:29), 그리스도께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의롭다함을) 얻느니라”라고 하셨다(눅 7:35). 또한 바울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의롭다 하실 것을 미리 알았다고 말할 때(갈 3:8),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해서 의를 전가(轉嫁)하신다는 뜻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지 않은가? 또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불경건한 자를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다고 말할 때(롬 3:26), 그것은 불경건하여 당연히 정죄를 받을 사람들이 믿음의 덕택으로 그 정죄에서 풀려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욱 명백한 것은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라는 말씀으로,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사면해주신 사람들을 누가 정죄하겠는가”라는 뜻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轉嫁/ imputation)하셨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된(看做 보게 된/ deem or reckon)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의롭다함은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 것이다.
(4) 칭의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납이며 죄의 용서이다(3.11.4)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의 은혜 가운데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기로 하셨고(고후 5:18-20),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칭의는 “용납”, “용서”, “죄의 전가” 및 “화해됨”이라는 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됨”을 말함으로써(고후 5:18-19), “화해됨”은 곧 “의로 인정됨”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며, 그 이전에 용납과 용서가 전제되는 것이다.
2. 오시안더(Osiander)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을 논박함(3.11.5-12)
(1)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사상(3.11.5) 칼빈은,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라는 이상한 괴물을 도입해서, 거저 주시는 의를 폐지하는 것은 아니나 이 의를 깊은 안개 속에 묻어버렸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뚜렷이 체험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논박한다. 오시안더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말 한 것은 동의할 수 있지만, 여기서 나아가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이 혼합된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에 의해서 받는 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결합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오시안더는 죄의 용서와 중생을 혼동한다(3.11.6) 오시안더는 “의”라는 명사와 “의롭다함”이라는 동사의 뜻을 두 방향으로 연장한다. 그래서 첫째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값없이 받는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감동시키는 거룩함과 의로움이라고 한다. 둘째는,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푸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3) 칭의를 위한 믿음의 의의(3.11.7) 오시안더에 의하면 믿음 자체에는 의롭다 할 힘이 없고 그 힘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데서 온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에 따르면 믿음은 일종의 그릇으로, 빈 영혼 즉 입을 벌린 영혼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義)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인다고 가르치는 것은, 의롭다 하는 권한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믿음은 의를 받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며, 무지한 자들이 믿음과 그리스도를 혼동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위대한 은혜의 중요한 근거인 동시에 그 원천자이자 분배자시다.
(4)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오시안더의 주장(3.11.8)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므로 그의 신성에 의하여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그의 인성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의가 되신 것은 그가 “종의 형체를 가진” 때이며(빌 2: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스스로 아버지에게 복종하셨기 때문이다(빌 2:8).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하시는 것은 그의 신성에 의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명령을 받은 직무를 따라서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의 권능으로 이루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 칭의는 중보자가 하시는 일(3.11.9)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본질적 의”라는 우월한 가치 때문에 인간성을 초월한 인성을 배제한 신성에 돌리려고 하지만, 성경은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롬 5:19), 또한 그리스도가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의 육신에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반박한다.
(6)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3.11.10)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실 때까지 우리는 비할 데 없는 선을 가질 수 없다면서,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을 중요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유자가 되심으로써 그가 받은 선물을 우리도 나눠가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옷 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킨 것이다. 이는 마치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자기 옷이 아닌 형의 옷을 입은 야곱과 같다.
(7)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은 구원의 확실성을 소멸시킨다(3.11.11) 오시안더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법적인 용어로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실지로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가 비웃는 이유이다. 또한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멸시한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되는데, 여기서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오시안더는 악한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그의 본성에 배치되는 짓이 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의 은혜와 중생은 서로 다른 일이지만 동시에 분리되지 않는다고 본다. 의인에게도 죄의 흔적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그들의 칭의와 생활의 변화는(롬 6:4)매우 다를 것이다. 후자의 생활의 변화는 평생을 통하여 점진적일 것이다. 그러나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위하여 완전하고 충분하며 유일한 의를 가졌기 때문에, 궁극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점진적이기는 할지라도 승리할 것임을 확신케 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8) 오시안더를 논박함(3.11.12) 하나님은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오시안더는 부정한다. 그리고 오시안더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의로 주신 것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의롭다 하는 직무를 제거해 버린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를 위한 의와 생명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는 오로지 법정적으로 전가된 의에만 기초하며, 그리스도와의 근원적인 연합과 성령의 역사를 통한 오로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3. 선행이 의롭다함을 위하여 유효하다고 하는 스콜라 사상을 논박함(3.11.13-20)
(1)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3.11.13) 많은 사람들이 의는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보지만, 칼빈에 의하면 이들 양자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세우면 다른 한 쪽은 반드시 넘어지게 된다고 본다. 칼빈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라”(빌 3:9),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이로니라”(롬 3:27)는 바울 사도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한다.
믿음은 우리의 자랑을 없애버린다. 행위의 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은 자랑할 이유가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점에서, 행위에 의한 의는 결코 믿음에 의한 의와 관련시킬 수 없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믿음과 행위의 두 근원에서 나와 합쳐지는 의 - 이런 의를 생각해내는 사람들의 몽상과 작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2) 중생한 사람의 행위도 칭의를 얻지 못한다(3.11.14) 칼빈은 궤변자들이 행위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중생의 결실이라면, 사람은 이런 행위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함에 대하여, 율법의 의는 율법이 명하는 것을 준행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라면, 믿음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는 것이다(롬 10:5, 9). 그리스도의 은혜인 성화와 의는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행위로의 중생은 결코 의가 될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아브라함의 생활은 영적이었고 거의 천사와 같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기에 충분한 행위의 공로가 그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신 것이라 성격은 증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3) 은혜와 선행에 대한 로마 교회의 교리(3.11.15) 스콜라철학자들, 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에게서 공로에 대한 보상을 기다리는 양심의 확신이 믿음이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의를 전가해주시는 일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성화를 추구하는 것을 도와주시는 성령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은혜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우리의 어떠한 공로도 개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경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은혜를 성화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펠라기우스주의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고 칼빈에 따르면 펠라기우스와 극한 대립을 하였던 어거스틴도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는 은혜를 성화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가르침은 매우 훌륭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만은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4)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데 대한 성경의 판단(3.11.16) 성경은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완전성만을 보라고 한다. 칼빈은 그래서 참으로 칭의의 순서는,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결하고 값없이 베푸시는 인애하심으로써 죄인을 포용하시며, 그 다음에 사람이 하나님의 인애를 느끼게 하셔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에서 구원 전체의 근거를 얻도록 하신다고 말한다.
(5)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3.11.17)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여,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롬 10:5) 말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롬 10:6)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롬 10:9)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바울의 이 말 속에는 율법은 행위의 의를 돌리고, 복음은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거저 의를 준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의 약속은 값없이 주는 것,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는 것이지만, 율법의 약속은 행위를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이것이 그 차이점인데, 보통사람뿐 아니라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없다.
(6) 칭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3.11.18)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12; 합 2:4). 바울은 율법과 믿음은 다르다고 말한다. 믿음의 의를 얻기 위하여 별도의 행위의 공로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과 율법이 다른 점은 의를 행위에 연결시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도움이나 의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빈손으로 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7) “믿음만으로”(3.11.19) 궤변가들은 다양한 트집을 잡지만, 칼빈은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롬 3:28)는 것 이외에 다른 그 무엇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사람들은 “만”(only)이란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이 말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거저 주시는 의가 아니면 믿음에서 오는 의라고 할 수 없다고(롬 4:2) 주장하는데, 이 말에 대하여 그들은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 그 외에도 칼빈은 롬 1:17, 3:21, 3:24, 3:28을 통해서 이를 분명히 하면서, 이에 반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롬 3:20)이므로 의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고 분명히 말한다(그외 참고로 롬 4:15, 롬 4:4-5, 롬 3:27, 갈 3:21-22).
(8) “율법의 행위”(3.11.20)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의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 부분을 강조하는 무리들에 대하여, 칼빈은 무지한 자들이 트집을 잡는 것이라 말한다. 특히 이들 중에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이(갈 5:6) 의롭게 한다는 사도의 고백을 따라,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므로 의는 사랑(caritas)에 의존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의를 얻게 하는 믿음의 힘이 사랑을 행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믿음이 의를 얻게 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고 그 외의 방법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롬 4:4)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입은 믿음의 의는 당연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의를 부여하는 곳에서만 인정된다.
4. 다만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2.11.21-23)
(1) 칭의와 화해와 죄의 용서(3.11.21)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다시 받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원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그 오점을 씻길 때이므로, 이런 점에서 “의”는 한 마디로 “죄의 용서”라고 부를 수 있다.
(2) 칭의와 죄의 용서 사이에 있는 긴밀한 관계를 성경에 의하여 증명함(3.11.2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바울사도는 의와 화해를 서로 구별하지 않으며,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근거로 얻는 의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의는 완전히 덕성에 있지 않고 죄의 용서에 있다”고 했으며, 베르나르드(Bernard)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그러나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는 죄의 사면에 있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의 자비로 용서를 받는 자들만이 의롭다”고 말한 데서도 죄의 용서와 의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3)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것이다(3.11.23) 사도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했는데,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의 의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사람이 자신만으로서는 의롭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며 전달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과 같다.
육신의 연약은 행위를 방해하나 믿음의 광채는 죄의 용서를 얻게 하며 행위의 과오를 덮는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취로 좋은 냄새를 풍기며, 우리의 악을 그의 완전성으로 덮고 묻어버려야 한다.
3.12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칭의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1. 하나님의 존엄성과 완전성에 비추어 칭의를 논함(3.12.1-3)
(1)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않다(3.12.1) 칭의를 말할 때는 인간 법정의 공의가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 법정의 공의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해서 모든 부분이 완전무결한 것, 아무 부패나 오명이 없는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고한 선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능력과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서, 너무나 불완전하고 미련한 우리 인생이 어찌 담대히 설 수 있겠는가?
성경은 인생에 대하여,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러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욥 4:17-20),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 15:115-16)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쳐 보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공포와 고민만이 넘쳐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저주 받기에 충분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칼빈은 모든 사람이 하늘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죄책을 인정하며, 용서를 받고자 기꺼이 엎드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칭의 논의 전체는 어리석고 무력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2) 사람 앞의 의와 하나님 앞의 의(3.12.2) 우리가 태양을 볼 때 그 태양의 엄청난 광채로 말미암아 시력이 마비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처럼 정작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고 식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고 자부하지만, 태양빛조차도 비길 데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앞에서는 한없이 보잘 것 없고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을 따라 인간의 본성을 바로 직시하게 되면,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2-3)라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3) 진정한 의의 증인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3.12.3) 어거스틴(Augustinus)은 “경건한 사람은 모두 이 썩을 육신의 짐을 지고 현세의 생명의 연약함 중에서 신음하면서 한 가지 의망을 품고 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시며,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만이 그 희망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베르나르드(Bernard)는 “구주의 상처를 제외한다면 약한 자가 안전하고 든든하게 쉴 곳이 어디 있는가?” “구주의 힘이 강할수록 더욱 안심하고 거기서 산다.”…“나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노래할 것인가?” “오, 주여, 저는 당신의 의만을 기억하겠나이다.”라고 했다.
2.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인 자기비판은 선행이 있노라는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만든다(3.12.4-8)
(1)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 기반이 없어진다(3.12.4) 밤에 찬란한 별들이 태양 앞에서 빛을 잃는다면, 사람의 가장 희귀한 순진성일지라도 하나님의 순결과 비교할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밖에 보이는 선행만을 존중하며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순결성 앞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결한 의지뿐이다.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속이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그 위선도 같은 운명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같이 진지하게 진정한 의미의 의의 규준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대로 판단한다면, 모두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보통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순전히 불의이며 정직이라고 보는 것은 부패이며,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치욕이다.
(2) 모든 자기 찬양을 버리라(3.12.5) 하나님의 완전성을 생각해 본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기에 대한 아첨이나 맹목적인 사랑을 일체 버리고, 자기를 검토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쓰고 있는 의의 가면 때문에 우쭐해 하지만, 주께서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결을 저울에다 다신다. 그러므로 자기 검토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심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러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 25:4, 6)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망각함으로 인하여 구속의 은혜를 모르는 인생은 가장 불쌍한 존재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선 교만한 마음을 철저히 꺾지 않는다면,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 유명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약 4:6; 잠 3:34).
(3)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3.12.6)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하게 되는 방법은 “철저하게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자기가 아직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겸손이라 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겸손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 태도 또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하여 첫째로, 우리는 모든 자랑을 버리고 완전히 겸손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힐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로, 이 겸손은 어떤 점잖은 행동으로 우리의 권리의 털끝만한 부분을 주에게 양보하는 것과도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4)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3.12.7) 우리의 지존하신 주께서는 말씀으로 하는 설명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비유로 올바른 겸손의 모습을 그려 보이신다. 즉, 주께서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태도를 비교하면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하심으로써(눅 18:13), 세리를 통한 겸손의 모범을 실물교육으로 보여 주셨다.
바리새인과 같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 앞을 떠날 때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마 9:13). 그렇기 때문에 세리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알아 완전히 겸손한 자리로 나아갈 때에,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는 은혜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5)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자기만족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3.12.8)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면, 우리는 모든 교만과 자기만족을 버려야 한다. 자기의 의를 미련하게 믿을 때, 하나님 앞에 추천할 만한 공로가 있노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교만하게 되고 자기만족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불신하는 생각이 깊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믿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우선 우리 안에서 타도되지 않으면, 주를 향하여 충분히 비약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 자신 안에서 이미 절망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완전히 뽑아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만 믿고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을 준비가 된다. 자기를 비우는 사람은 -즉 없는 의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한 가짜 의를 비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의 열매를 분배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만족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이다.
3.13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1. 칭의는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고, 계시는 그의 공의에 도움이 된다(3.13.1)
(1) 칭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일에 유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먼저 주의 영광에 손실이나 지장이 없게 해야 하며, 그 다음으로 우리의 양심이 주의 심판대 앞에서 평화로운 안식과 고요한 평온을 느끼게 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시는 것이라 증거한다(롬 3:25). 그리고 나아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를 변호할 구실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소간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고 하였다.
(2)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렘 9:24). 이 말씀은 우리가 주만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고전 1:30-31),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2.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3.13.2)
(1)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보편적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의로운 행위와 힘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여호와께서 온 것임을 확인하고, 이 사실을 단순히 고백정도가 아니라 맹세를 해야 한다고 칼빈은 지적한다.
(2) 의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우리는, 의에 대한 찬양을 전적으로 주의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하였는데, 그의 의도는 분명히 신자들의 귀에 하나님께 대한 찬양만이 들려, 육에 붙은 모든 자만을 압도하며 침묵시키게 하려는 것이다.
(3) 사람이 의의 한 부스러기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그는 불가피하게 모득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그만큼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자기 의를 보아서는 양심에 평안을 얻지 못한다(3.13.3)
(1)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의의 선물이 아니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무한한 추악 속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양심 속으로 깊이 내려가서 자기가 한 일을 검토한다면, 그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일이 모두 잘된 듯이 달콤한 안도감을 즐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고민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인가? 행위대로 판단한다면 그는 정죄를 받아야 할 근거를 자기 속에 느낄 것이다.
(2) 그러나 성실하게 자기를 검토하는 신자들에게는, 위선에 사로잡혀 자화자찬하며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과는 다른 근심과 고민을 한다. 즉,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면 무거운 빚이 아직도 자기를 누르고 있으며, 자기 앞에 제시된 조건과는 거리가 먼 것을 깨닫고 절망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근심과 고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거나, 변하거나, 상하로 동요하거나, 주저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망설이거나, 절망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변함없고 완전한 확신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며, 쉴 곳과 설 곳이 있다는 것이다(고전 2:5; 고후 13:4).
4. 자기의 의에 유의하는 것도 약속을 무용하게 만든다(3.13.4)
(1) 우리의 공로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자비하심이 구원을 이루게 하는 원천이다. 따라서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확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거저 부르시며 의롭다하신 것이므로, 신앙은 원래 눈을 감고 귀를 곤두세우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들으려고 애쓰며, 사람의 가치나 공로를 전연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2) 신자들은 죄의 용서를 받을 때까지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시면서 수행하신 속죄 행위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떨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한 고통에서만 우리의 평화를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사 9:6), “우리의 화평”(엡 2:14)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통해서만 우리의 양심의 모든 동요를 진정시킬 수 있다.
5.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만 양심이 평안하며 기도에 기쁨이 있다(3.13.5)
(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롬 5:1)고 확신하지 않으면 양심의 고요한 기쁨을 유지할 수 없다. 동시에 이 확신의 근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다(롬 5:5).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됨을 확신하게 될 때, 우리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39)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에 이르게 된다.
(2) 칼빈에 따르면, 칭의에 관해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일에 무엇을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특강 15-1 정리]
우리는 이미 지난달에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은 믿음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특강 12)을 배제한 그 어떤 신학적 이론도 논의할 의미가 없다. 그런데 칼빈은 칭의를 논하기 전에 중생과 회개를 먼저 언급하였는데(특강 13, 14), 그 이유는 믿음은 결코 선행을 결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칭의를 논하기 전에 “성도들의 선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칼빈의 ‘구원의 서정’(序程 ordo salutis)을 말함에 있어 이미 언급한 중생과 성화는 물론 칭의론에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전제되어야 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칼빈은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요시 여겼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터 잡은 칼빈의 ‘구원의 서정’(序程 ordo salutis)은 어떻게 정리해 볼 수 있을까? 그 대강을 개관한다면 다음과 같다. 믿음이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인한 믿음과, 나아가 그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곧 이중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과정(ordo)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이중의 은혜란 무엇일까? 칼빈의 논의에 따르면 “첫째로 믿음은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 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성령)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힘써 하게 되는 것”이라 본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이중의 은혜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를 두고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선행한다는 점이며, 이러한 연합을 통하여 은혜가 파생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 이중의 은혜(유익)가 칭의와 성화(중생)이다. 그런데 칼빈에 따르면 믿음으로 인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로부터 이중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므로, 칭의와 성화는 구별 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분리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성령의 역사로서의 믿음→그리스도와의 연합→이중의 은혜=칭의와 성화(중생)]
그렇다면 칼빈은 칭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하며 이해하고 있을까?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은혜로 주시는 것이며(sola fide, sola gratia), 이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이다 따라서 칼빈에 따르면 칭의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 하였으며, 또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轉嫁)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칭의는 법정적인 어휘로 우리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옷 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킨 것이다. 이는 마치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자기 옷이 아닌 형의 옷을 입은 야곱과 같다. 따라서 칼빈은 “칭의는 오로지 법정적으로 전가된 의에만 기초하며, 그리스도와의 근원적인 연합과 성령의 역사를 통한 오로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칭의가, 우리 자신을 본질적으로 의롭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접붙임을 받았다는 것이며, 또한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이 자신만으로서는 의롭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轉嫁 imputation)되며 전달됨으로써 의롭다고 간주(看做 deem)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칭의를 논함에 있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중요한 개념이지만, 여기서 하나 더 논의해야 할 개념이 바로 간주(看做)이다. 칭의가 법정적인 용어이지만 전가는 그리스도의 의를 그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전시키며 칭의의 법정적 성격을 보전한 ‘사법적 전이’(judicial transfer)라면 간주는 이러한 전가의 결과로서 의롭다고 여긴다(본다)라는 선언으로 이 간주 개념이 더 법정적인 어휘이다. 따라서 한 번 더 칼빈의 ‘구원의 서정’을 기술한다면, 믿음은 성령의 역사를 전제로 하며, 이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중의 은혜의 결과로 드러나며, 이중의 은혜는 칭의와 성화로 드러난다. 그리고 칭의는 전가와 간주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전가의 선행조건이며, 또한 전가는 간주의 선행조건이기도 하다.
특히 칼빈은 칭의를 논함에 있어 두 가지 일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먼저 주의 영광에 손실이나 지장이 없게 해야 하며, 그 다음으로 우리의 양심이 주의 심판대 앞에서 평화로운 안식과 고요한 평온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하며,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만 양심이 평안하며 기도에 기쁨이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롬 5:1)고 확신하지 않으면 양심의 고요한 기쁨을 유지할 수 없다. 동시에 이 확신의 근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다(롬 5:5).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됨을 확신하게 될 때, 우리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39)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에 따르면, 칭의에 관해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일에 무엇을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하는 것에 불과함을 유의해야 한다.(2013년 10월 27일 주일 오후예배 구모영장로 특강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