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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6장 2~6절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 니골라를 뽑아서,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새번역>
초대교회는 오늘도 여전히 변함없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도 부쩍 늘어났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오늘 사도행전 6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자 조금씩 불평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동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평의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그리스말을 하는 유대 사람 즉 ‘헬라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히브리말을 하는 유대 사람 즉 ‘히브리파 본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구제’에 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무렵 신도들의 수효가 점점 늘어나게 되자 그리스 말을 쓰는 유다인들이 본토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과부들이 그날 그날의 식량을 배급받을 때마다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6장 1절, 공동번역>
열두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도 전하면서 구제까지 신경 쓰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제자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언젠가는 발생할 일이 드디어 터진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사도는 바로 공동체를 모두 불러 모아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6장 2절, 새번역>
아마도 공동체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음식 베푸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구제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열 두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존재들이었기에 이 구제를 담당할 사람을 따로 세울 필요성이 절실해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린 상황이 되었기에 열두 사도는 공동체를 불러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사도행전 6장 3~4절, 새번역>
공동체는 사도들의 이 제안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스스로가 그들 안에서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초대교회 최초의 ‘공동의회’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소위 ‘교회 헌법’에 등장하는 용어로서의 ‘공동의회’가 아닌 모든 공동체가 함께 모여 회의하는 첫 사례가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첫 ‘공동의회’의 의미에 대해서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교회는 특정인에 의해 운영되는 공동체가 아님을 선포하게 됩니다.
구제로 인해 나오기 시작한 불평을 열두 사도들 스스로, 자기들끼리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열두 사도들은 문제가 생기자 모든 공동체를 불러놓고 함께 상의했습니다. 열두 사도들에게 말씀을 배우는 공동체라고 해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라는 구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조건 열두 사도들이 말하는 대로 순종해야 하는 존재들이 공동체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열두 사도 역시 자신들의 권위나 특권을 주장하지 않고 그 공동체 안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함께 상의할 마음을 가지는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매우 중요한 마음가짐입니다.
교회는 특정 인물에 의해서 운영되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목회자’에 의해서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열두 사도의 고백처럼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는 얼마든지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함께 일할 동역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목회자들이 먼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동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보다 더 운영을 잘 해 나갈 수 있는 전문가들이 공동체 안에 많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동역자가 잘 운영할 수 있도록 영역을 나누어 함께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오늘 본문과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백성의 송사를 다루기 위해 하루 종일 고생하는 모세를 보면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좋은 제안을 하는 장면입니다. 성경 그대로의 기록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내가 충고하는 말을 듣게. 하나님이 자네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네. 자네는 백성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일을 아뢰게. 그리고 자네는 그들에게 규례와 율법을 가르쳐 주어서, 그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과 그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알려 주게. 또 자네는 백성 가운데서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을 뽑아서, 백성 위에 세우게. 그리고 그들을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으로 세워서, 그들이 사건이 생길 때마다 백성을 재판하도록 하게. 큰 사건은 모두 자네에게 가져 오게 하고, 작은 사건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하도록 하게. 이렇게 그들이 자네와 짐을 나누어 지면, 자네의 일이 훨씬 가벼워질 걸세.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자네가 이와 같이 하면, 자네도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고, 백성도 모두 흐뭇하게 자기 집으로 돌아갈 걸세. <출애굽기 18장 19~23절, 새번역>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세는 장인의 지혜로운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게 됩니다. 그러자 모세의 일이 훨씬 가벼워진 것은 물론이고, 백성도 모두 흐뭇하게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조언을 해준 모세의 장인 이드로도 멋지지만, 그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도 역시 공동체의 한 구성원임을 깨달아, 백성과 해야 할 일을 기꺼이 나눈 모세 역시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세가 모든 백성들을 동역자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열두 사도 역시 공동체를 '동역자'로 생각했기에 함께 일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결코 특정인에 의해 운영되어지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함께 운영해 나가는 공동체였습니다.
둘째, 모든 사람 안에 들기 위한 ‘조건’이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공동체 안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 열두 사도와 함께 모일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은 의도적으로 2절, 3절, 5절을 통하여 공동체 안에 속한 ‘모든 사람’을 강조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이란 단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이 ‘모든 사람’안에 들기 위한 조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당시 공동체 안에 속한 사람 모두를 의미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였든지, 마가의 다락방 때부터 함께했었던지, 최근에 공동체에 들어왔던지, 헬라파 유대인이던지, 히브리파 유대인이던지 이런 조건 하나 하나 열거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라는 단어가 제대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차별도 없이 ‘제자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열두 사도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역’이라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오합지졸 같아 보이던 제자들 바로 자신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이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인간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공동체’로 보셨기에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교회라는 몸은 ‘모든 사람’이 함께 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되기 위한 조건이 ‘믿음’ 외에 더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2절, 새번역>
만약 성경에 교회라는 공동체가 세워지는 현장에서 ‘구약고사’라는 시험을 치르고 통과해야만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중략)...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2장 1~4절, 새번역>
만약 목마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에도 조건이 있었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지금처럼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요한복음 7장 37절, 새번역>
하나님에게 차별이 없다면, 교회 공동체에도 반드시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안에 들기 위한 조건이 초대교회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모두가 ‘결과’에 순종하였습니다.
사실 열두 사도는 공동체가 세운 일곱 집사의 이름을 보면서 처음에는 살짝 당황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히브리파 유대인 열두 사도와 헬라파 유대인 일곱 집사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등 일곱 집사의 이름만 듣고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모두 헬라계 유대파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참 재밌는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실로 놀랍고, 공동체의 결정은 절로 박수가 나오게 만듭니다. 구제에 대한 불평 이면에 존재했던 ‘언어’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음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일곱 집사가 뽑혔습니다.
이러한 첫 공동의회의 결과에 모든 사람들이 순종하였습니다. 당연히 열두 사도도 공동체의 결정에 순종하였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논의한 일이었기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곱 집사를 뽑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일곱 집사를 뽑은 것에 대해 아무런 잡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집사를 뽑은 결과에 순종했던 교회 공동체의 전개는 사도행전 6장 7절에서 자연스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도행전 6장 7절, 새번역>
먼저 하나님께서도 이 결과에 동의하셨음을 보여주십니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많은 호감과 공감을 끌어냈을 것입니다. 계급이 존재하고, 자기들만의 리그가 존재하던 예루살렘 공의회와는 다른 행보를 걷는 교회 공동체의 공동의회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공동체 안에 속한 100%가 결과에 만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에 만족했다는 것이 아니라 ‘순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동의회’에서의 결정이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면 가장 좋겠지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을 100% 만족시킨다는 전제가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조건 없이 참여하여 결정한 일이라면 내가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결과에 승복하고 순종할 줄 아는 사람들이 바로 초대교회 공동체였음도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모두 함께 조건 없이 모여 회의한 결과가 나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도 초대 교회 모든 구성원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의견이 결정되더라도, 나는 만족할 수 없더라도 교회 공동체가 함께 결정한 결과에 ‘순종’하는 것도 내가 배워야 할 신앙의 여정인 것입니다.
기억하십니까? 교회가 첫 발을 내딛기 직전, 사도행전 1장 후반부에서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대신할 한 명의 제자를 다시 뽑았습니다. 바사바라고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과 ‘맛디아’ 중 제비를 뽑아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그 때에도 모인 자들은 물론, 요셉 역시 그 결과에 순종했습니다.
무엇보다 당사자 ‘요셉’은 열두 사도 안에 들지 못했다고 그 공동체를 뛰쳐나갔던 것이 아닙니다. 뽑히지 못했다고 좌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교회 공동체에 남아서 하나님을 위해, 공동체를 위하여,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였음을 사도행전 15장 22절~32절, 17장 8절과 골로새서 4장 11절 등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사바 유스도 요셉’ 역시 우리가 잊지 말고 배워야 할 멋진 신앙인입니다. 여러분이 이 ‘요셉’ 이었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렇게 요셉처럼 초대교회 공동체 역시 공동의회에서 나온 결과에 ‘순종’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6장 강해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2021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공동의회’에 대해서 목말라하는 동시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속한 교회에서 열리고 있는 ‘공동의회’는 왠지 참석하고 싶지 않은 회의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당회’나 ‘제직회’가 더 왕성하여 ‘공동의회’가 열리지 않는 교회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의회’를 요청해서 열린다고 해도 발언권이 제한되거나 참석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하는 분들의 불평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가 함께 고민하고 상의해야 할 ‘의제’조차도 나눌 수 없다는 생각이 찾아들면서 성도들은 점점 교회에 무관심해지고, 특정인에 의해서 자꾸 운영되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 6장에서 열린 첫 ‘공동의회’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특정인에 의해서 운영되지 않는 공동체, 아무 조건 없이 모두 함께 참여할 수 있었던 회의, 그리고 회의의 결과에 순종했던 무리들, 이 삼박자가 다시 우리 교회 안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공동의회’가 회복될 때 교회라는 공동체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결코 다른 사회 공동체와 동일한 형태로 운영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계급이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조건이 존재하고, 차별이 존재하는 공동체가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안건도 모르고, 회의에 참여할 수 없는데 결과에는 무조건 승복해야 하고 따라야 하는 ‘복종’의 형태도 존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공동의회장이 싸움터로 변하거나, 네편 내편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다른지, 그 정체성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는 다른 공동체, 세상 사람들이 모였지만 하나님 나라 사람들이 된 공동체, 세상에서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한 공동체, 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임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여러분, 현재 여러분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공동의회’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공동의회’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오늘 사도행전 6장 본문을 보면서 함께 고민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시길..간절히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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