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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OTAX]카오스#연구&토론# 원문보기 글쓴이: JELL
폰노이만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유태인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적 수학의 신동이었으며
후에 그의 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어려서 7개국어 능통(영어는 조금 성장후에 배웠음)
고대 그리스어,라틴어 회화까지 자유자재 구사,
고대 그리스어,라틴어 농담을 할정도,
6살 나이에 비잔티움 문화사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학식을 갖추어서
은행가 아버지와 토론과 그리스어 농담을 주고 받았다고 함
6세의 나이에 8자리 나눗셈 자유자재
어릴 적에 놀이로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완전하게 암기해 보였다,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않는 사진과 같은 초기억력,
컴퓨터 같은 수준의 계산 속도,
8세 때에는 미적분법을 마스터,
12세의 무렵에는 대학원 수준의 수학함수론을 독파했다.
함수론은,
대학의 이공계의 학생이 1, 2 연차에 배우는 수학으로,
고교시절에 수학이 자신있는 학생이라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그는 17살에 베를린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18세에 수학 논문 저널에 발표 시작
이어서 취리히 대학에서 화공을 공부하였고,
이어서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였다.
1926년 그가 23살 때 취리히 대학에서 화공학 박사학위를,
부다페스트 대학에서는 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3세에 이미 유럽 최고 레벨 수학자
그후 3년간 그는 주로 수학의 오퍼레이터 이론을 양자론에 적용하는 연구를 하였다.
193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Princeton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32년 고등 연구소가 설립되자
27세(1930년) 미국 Princeton 고등연구소 초대 6명 연구교수로 초빙
수학분야의 6명 전임교수중 최연소.(6명에는 Einstein도 들어 있었다.)
양자 역학을 수학적 이론화한 사람
집합론,Operator Theory, 해석학,게임이론 등 다방면의 수학논문 발표
컴퓨터 구조의 창시자(소프트웨어 개념 창시)-폰 노이만 아키텍쳐
폰노이만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자계산기의 발전에 대한 공헌으로 유명하다.
그는 '프로그램-저장 컴퓨터'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것의 중요한 두 가지 구성요소는 정보저장과 메모리에 저장된 프로그램에 따라서
메모리에서 서로 다른 '레지스터' 사이의 전달을 조직화하는 조종단위이었다.
그래서 순차적으로 작업이 수행되는 컴퓨터를
흔히 '폰노이만 기계(von Neumann machines)'라고도 한다.
그는 미국의 원자탄계획(Manhattan project)에도 참여하였는데
J. L. Tuck와 함께 원자탄 계획에 필수적인 '고폭발성 렌즈'를 개발하였다.
폭축 렌즈를 설계한 John Von Neumann 존 폰 노이만
일반적으로 폭탄은 폭발하면 내부의 압력이 급격하게 커져서
폭약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물건들도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폭탄의 파괴력의 원천이다.
원자폭탄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원자 폭탄에서는 최종 과정의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내부적으로 한 번의 사전 폭발이 있어야 한다.
즉 핵분열 물질은 임계질량 이상이 되어야만 연쇄반응(Chain Reaction)을 일으키므로
임계질량 이하의 핵분열 물질 덩어리들을
순간적으로 고속도로 모아 임계질량 이상의 덩어리가 되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임계질량 이하의 덩어리들을 모으게 하는 내부 폭발이 먼저 있어야 한다.
폭축(爆縮) 또는 내부 폭발이라고 부르는 이 폭발에서는
탄환이나 표적으로 쓰이는 핵분열 물질은 흩어지게 하면 안된다.
가능한 한 장소로 모여 들어야 한다.
이것은 폭발의 일반 원리와는 다른 종류의 폭발이다.
우라늄의 경우 초속 900m 이상의 속도를 가지고 있어야 임계질량 이상의 덩어리가 된다.
우라늄-235를 사용하는 폭탄(맨하탄 프로젝트에서 리틀 보이 (Little Boy)라는 별명으로 불렸다)에서는
대포의 포신 양쪽에 임계질량 이하의 덩어리를 놓아두고
고성능 폭약의 폭발을 통해 두 쪽각을 합치면 된다.
그러나 플루토늄-239를 사용하는 패트 맨 (Fat Man)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플루토늄-239는 중성자가 풍부하게 존재하는 원자로에서 핵변환 과정에 의해서 만든 것이므로
이 속에는 플루토늄-240이 상당량 함유되어 있다.
이 플루토늄-240은 자연 핵분열 반응속도가 큰 물질이다.
그리고 플루토늄-239와 240은 중성자 하나의 차이이므로 분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라늄 폭탄보다는 더욱 정교한 폭발 장치가 필요하다.
안그러면 플루토늄-240의 자연 핵분열로 김빠진 맥주 꼴이 되고 만다.
v 임계질량 이하의 플루토늄 덩어리 주변에 고성능 폭탄을 구형으로 두르고
고성능 폭탄의 폭발로 플루토늄이 안쪽으로 뭉쳐지도록 한다.
폭탄에 의해서 만들어진 충격파가 구의 중심을 향해서 진행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충격파로 모아진 플루토늄은 임계질량 이상이 되어
반응 개시장치(Initiator)에 의해서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은 광학 렌즈가, 특히 볼록 렌즈가 렌즈 전체에 비춰진 빛을
렌즈의 초점에 모아 놓는 이치와 비슷하기 때문에 폭축 렌즈라고 불렸다.
이 폭축 렌즈를 설계한 사람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이며
세계적인 수학자와 이론물리학자인 존 폰 노이만이었다.
이 폭축 렌즈의 성공으로 그때까지 절망적이었던
플루토늄 폭탄의 가능성이 활짝 열렸다라고 맨하탄 프로젝트 기술사(技術史)는 크게 쓰고 있다.
노이만은 폭축 렌즈에서 만들어지는 충격파의 유체역학적인 운동에 대한 이론을 세우고
그것의 수치 계산까지를 모두 해냈다.
일반 폭탄의 폭발에 대한 그의 유체역학적 연구는 탱크 철판을 관통하는 바즈카포,
전방향으로만 폭발하는 크레모아 등의 제작을 가져왔다.
그가 로스 알라모스에서 폭축 렌즈를 설계할 때 보인 탁월한 암산능력을 사용했다고함,
수소폭탄에서는 삼중수소를 사용해야 하며
그 필요한 양의 삼중수소가 얼마나 될 것인지 시뮬레이션이 필요했다.
이것은 방대한 계산을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계산 문제는 필라델피아 대학에서 최초로 만들고
매릴랜드주의 육군의 아버딘 포사격 실험장에 있던 애니악(ENIAC)을 사용했다.
노이만은 이 경험으로부터
프로그램 내장식(Stored Program) 계산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는 전자계산기라고 해도 기억장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일일이 조작원들의 조작에 의해서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옛날 전화교환원이 프러그를 이리 빼고 저리 꼽고 하던 식이었다.
기계 속에는 수치만 들어갈 뿐 조작절차(Algorithm)는 조작원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이다.
노이만은 계산할 수치와 알고리즘을 계산기의 기억 장치 속에 넣어 두었다가
순서에 따라 조작원의 개입없이 자동적으로 모든 계산을 수행하는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또 2진법을 사용할 것도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컴퓨터라고 부르는 것과
길바닥에서 흔히 파는 값 싸고 키보드가 달린 전자식 계산기를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어 오늘날 우리가 널리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초기에는 아날로그 컴퓨터에 대비되는
디지탈 컴퓨터를 노이만형 계산기라고 한 때 불리우기도 했다.
노이만은 직접 매니악 (Maniac)이라는 프로그램 내장식 전자계산기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의 고등학교 수학교사가 예언한 세계적인 수학자는
이 전자계산기의 발명에서도 여지없이 실현되었다고 할 것이다.
또 그는 수학의 다른 방면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게임이론으로서 그가 선구자적 업적을 남긴 분야이다.
이것은 전쟁 전략 뿐 아니라 실제 생활의 전략에도 적용되고 있다.
말년에 그는 원자핵 사용의 선두적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수학회장을 지냈고, 원자력위원회 위원도 지냈다.
폰노이만은 그 당시 전설적 인물이었으며 그에 대한 일화도 많다.
그는 운전을 잘 하지 못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교통사고 뒤 진술서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오른쪽의 가로수들은 시속 6마일의 규칙적인 속도로 나를 스쳐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 중 하나가 내 길을 막았다."
다른 일화도 있다.
그는 수와 관련된 그의 능력을 자랑하기를 좋아하였다.
그의 첫 번째 컴퓨터가 완성되어서 시험을 하게되자 누군가가 이런 문제를 냈다.
"오른쪽에서 4번째 자리수가 7인 가장 작은 2의 지수는 얼마인가?"
컴퓨터와 폰노이만은 동시에 문제 풀기를 시작하였고 결국 폰노이만이 먼저 풀어서 승리하였다.
하루는 폰노이만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현대 수학은 너무나 광범위하여서 누구도 그 아주 작은 일부분 밖에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폰노이만 선생님은 수학에 대하여 자신이 어느 정도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아주 신중하게 한참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대답하였다. "28퍼센트". (MJK).
어셈블리어로 코딩하는 제자를 보면서
"왜 이 논리적인 기계로 그런 사무적인 일을 하는가?!"라고 한 일화
0100010 같은 기계어로 논리를 짜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던것이다.
또한 머리란 저장능력과 처리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두가지 전부 뛰어났다고 한다.
책을 읽고 몇주가 지난후 친구가 내용을 물어봤지만
한자 틀림없이 정확히 이야기했다고 한다.
1940년대 프린스턴대학과 고등연구소에는 세계 정상급 천재들이 모였습니다
2차대전 직전에 히틀러가 유럽에서 쫓아낸 유태인 과학자들이 프린스턴,하버드,MIT로
갔습니다
2차대전 독일군 암호를 해독한 Alan Turing도 프린스턴에서 공부했으며
폰 노이만이 그의 지도교수였습니다
괴델(Godel)도 프린스턴에 있었습니다..그리고 Van Kaampen 등 많은 천재 수학자들이
프린스턴에서 20세기 위상수학, 해석학, 대수학 문제들을 풀어나갔습니다
이러한 초특급 천재들 가운데서도 폰 노이만이 머리가 가장 좋았다고 합니다
고등연구소에서 세미나를 하면,
폰 노이만은 항상 듣다가 공식 틀린 것을 지적했으며
전혀 모르는 분야의 세미나를 들어도 금방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틀린 내용을 빨리 찾아냈다.
수폭의 효율 개산을 위해서
페르미는 대형 계산자로,
파인만은 탁상 계산기로,
존 폰노이만은 천정을 향해 암산해서,
존 폰노이만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값을 냈다.
하루 4시간의 수면 시간 이외는 항상 사고
수학자가 3개월의 고심 참담의 끝에 마침내 푼 문제를
노이만은 일순간에 풀었다.
노이만은 스스로가 발명한 컴퓨터와 경쟁해 승리했다,
노벨상 수상자로조차 따라갈 수 없는 머리의 회전
뇌내에 장착된 면적 1 헥타르 정도도 있는 버추얼 화이트 보드가 있어
노이만은 종이와 연필을 사용하지 않고,
두뇌만으로 복잡한 사고를 할수 있었다고한다,
너무도 뛰어나서 인간이 아니라 악마라고 의심까지 받은 사람,
초기 애니악(에드삭?) 컴퓨터와 암산 대결을 해서 승리(무한급수 1~2초에 암산했음)
같은 연구소에 있던 아인슈타인이 폰노이만의 빠른 두뇌회전에 놀랐다고함,
게임 이론 창시자
(영화 뷰티플 마인드의 존 내쉬가 발전시킨 게임이론은
폰 노이만이 처음 만듦),
토마스 하디의 약 600여 페이지 되는 (테스)를 읽고
그 절반 이상을 관사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폰 노이만은 어린시절부터 읽은 모든 책을 구절까지 기억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괴물같은 기억력 때문에 어학에 대해 별로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고함,
나이 먹고 나서 배운 영어 회화, 작문 실력이 미국 사람과 같은 수준이 되었으며
폰 노이만은 헝가리 출신이라서,
영어를 나이 먹어서 배웠다.
아인슈타인도 비슷한 시기에 영어를 배웠는데,
아인슈타인은 영어 발음이 서툴렀으나
존 폰노이만의 영어 발음은 정확하고 매우 유창했다,
그런데 폰 노이만은 영어, 독일어,프랑스어,그리스어, 라틴어.
모두 7개 국어로 회화,작문,저술 활동 모두 했던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뛰어난 어학 실력을 가졌던 이유가...
그가 열심히 어학 공부를 해서가 아니고...
한번 읽은 책은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며,두번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
노이만은 수위사진기억력(picture memory) 이라고 부르는,
한번 보면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이 머리속에 외워버리는 대단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추정 IQ는 300,
만일 도쿄대학의 의학부를 목표로 하면 1주간에 넣는 수준,
천재라고 하는 학자중에서도 꽤 이질이다
한 번 본 것은 결코 잊지 않는,
계산은 컴퓨터보다 빠르다,
그에게는 어떤 노력도 필요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노력형으로서 주말에도 연구에 몰두했으나
존 폰노이만은 파티족,호색가,미식가,명품족으로 매주일 주말에 친구들과 파티를 했으며,
명품 시계,정장을 좋아하고,
지나가는 여자 몸매를 보고 히히 웃을정도로 여색을 밝히고
음담패설을 많이 했다고한다,
성희롱마로 유명하여
비서의 스커트안을 들여다 봤다고한다,
고등수학이 약한 아인슈타인은 존 폰노이만으로부터 수학을 배웠다고한다,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멍청이같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 소장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지만,
이휘소의 능력은 이미 그 위에 있었다.
벤자민 리(이휘소)는 까다롭고 지루한 계산을 끝까지 파고드는 유일한 학자이다,
그는 물리학자이며 수학자이며,핵과학자로서
20세기의 아인슈타인이나 페르미보다 이미 앞서 있는 창조적 지도자이다,"
1934년부터 1955년까지 오펜하이머박사와 아인슈타인은 약 21년동안 같이 지냈다,
오펜하이머박사와 이휘소는 6~7년을 같이지냈고,
오펜하이머박사와 아인슈타인은 21년동안 같은곳에서 재직했다,
역대 미국 물리학 박사시험과정에서 93점(한문제도 틀리지않은경우)을 받은 이휘소.
이휘소의 박사학위 시험지를 특별히 펜실베니아 대학원으로부터 부탁하여 가져와 살펴보고
오펜하이머 박사가 직접 이휘소를 적극채용했다.
폰 노이만이 사망할 때 연구하던 분야가 인공생명학이었다,
DNA RNA 유전 이론을 처음으로 제창하였으며
RNA의 존재를 처음으로 예언하였음
1957년 골수암으로 사망함으로써 이론 발표를 하지 못하고
클리크, 왓슨 DNA 공동 발견으로 빛을 보지 못함
Cynbernetics와 같은 분야
DNA, RNA 생명모델, 인간의 뇌...
이런 분야에 대해 연구결과를 발표하려고 하였는데
맨하탄 프로젝트(원자탄 개발)에 참여
오펜하이머 등과 함께 원자탄 개발 작업...
Edward Teller와 수소폭탄 개발에 공동 참여
원자탄,수소탄 개발에 참여하면서
피폭을 많이 당하여,발표 직전에 골수암으로 54세에 사망.
골수암 판정 받은 이후 6개월 이후,
1957년 2월 8일 사망,
폰노이만이 만든 컴퓨터 구조는 한마디로 프로그래머 중심의 머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래머는 자신이 디자인한 가상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하드웨어는 이에 맞추어 동작하게 됩니다.
이를 쉽게 이해하려면 비 노이만머신을 이해하는 것이 쉽습니다.
비 노이만 머신의 대표적인 모델은 알란 튜링의 ACE머신을 들 수 있습니다.
ACE머신은 속도에 최적화된 하드웨어로서
응답시간이 다른 여러개의 메모리를 만들고
프로그래머는 각 메모리의 응답시간에 따라
정확한 위치에 데이터가 도달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각 메모리에 분산시켜 저장해야 합니다.
당시 메모리는 지금처럼 반도체 칩이 아닌 소리를 전달하는 긴 파이프형태였습니다.
따라서 이 소리가 전달되는 길이에 따라 응답시간이 달라지게 되고
프로그래머는 이 시간을 계산하여 프로그램을 작성해야 하므로
상당히 고난도의 작업을 필요로 했습니다.
반면 노이만 머신의 경우 응답시간이 일정한 메모리를 가지고 있으며
프로그램이 필요로 하는 데이터가 도착할때까지 프로그램은 대기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따라서 속도는 비 노이만 머신에 비해 느려지지만
프로그램 작성이 보다 간편해졌기 때문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등장하게 됩니다.
초기 노이만 머신은 주로 탄도 계산등 무기설계에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컴퓨터의 속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ACE머신의 경우 암호해독등 시각을 다투는 작업에 사용되었기에
각각 필요에 따라 개발된 형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쪽이 우월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컴퓨터를 보면 CPU는 메모리에서 데이터가 도착할때 까지
아무런 작업도 하지 않는 대기상태가 됩니다.
즉 노이만 머신을 이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컴퓨터가 고속화 되면서
대기시간이 처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 대기시간은 컴퓨터의 성능향상에 장애요인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INTEL은 하이퍼 스레딩 기술을 내놓았고,
AMD는 CPU에 메모리 컨트롤러를 내장함으로서 이를 완화시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