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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 샌님 '딸깍발이'
남산골 한옥마을 안에 일석 이희승 선생 학덕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남산국악당 위쪽 청학천이 흘러내리는 곳에 있다. 이 추모비는 一石 선생의 수필 '딸깍발이'에 나오는 남산골 샌님의 정신을 되새기며 선생의 고결한 삶을 본받고자 하는 후학의 뜻이 깃들어 있다.
가난하지만 청렴결백하고 학문과 지조를 간직했던 남산골 옛 선비의 모습은 박지원의 한문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을 통하여 읽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성화(成火)에 글읽기를 그만두고 경제적 성공을 위해 집을 떠난다.
"허생은 묵적골(墨積洞)에 살았다. 곧장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우물 위에 오래 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은행나무를 향하여 사립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과거(科擧)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합니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장인바치 일이라도 못 하시나요?”
“장인바치 일은 본래 배우지 않았는 걸 어떻게 하겠소?”
“그럼 장사는 못 하시나요?”
“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글을 읽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장인바치 일도 못 한다, 장사도 못 한다면, 도둑질이라도 못 하시나요?”
허생은 읽던 책을 덮어놓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글 읽기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인제 칠 년인걸…….”
하고 휙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허생전> 번역문 서두
조선의 근대화와 실학정신의 결합으로 태어난 소설 속 허생은 현실개혁에 좌절하여 사라진다. 허생은 남산골 샌님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좌절은 결국 강화도조약(1876),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전쟁(1894),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 러일전쟁(1904)으로 이어져 경술국치(1910)에 이른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조선은 일본에 병합되어 국권을 잃었다.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달콤한 환각의 근대화에 도취하는 무리들 속에서도 남산골 샌님의 절조와 기백은 살아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정신이 있었기에 조선의 맥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그 꼬장꼬장한 정신이 조국의 산업화에 방해가 되었을까? 一石 선생은 남산골 샌님의 정신으로 한결같이 학문에 진력하였고 잘못된 정치적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지나치게 약삭빠른 극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대인에게 남산골 샌님의 정신은 케케묵은 시대착오적 생각일까? 그래서 후세들이 결코 본받을 만한 것이 없을까. 一石 선생은 <딸깍발이>에서 남산골 샌님의 정신을 배우자고 이렇게 부탁한다. "첫째 그 의기(義氣)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剛直)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을 하여 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
딸깍발이란 옛날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이 말은 淸廉과 潔白 그리고 節操를 생명으로 한 우리 선비들 모습을 가리키기도 한다. 一石 선생의 수필 「딸깍발이」로 하여 널리 알려진 이 말은 선생의 별명으로도 불린다. 여기에 後學들이 이 빗돌을 세우는 뜻은 옛날 딸깍발이 정신을 새삼 마음에 새기고 선생의 高潔한 일생을 본받고자 함이다.
심오한 學問 아름다운 藝術을 남긴 이들은 많으나 온 민족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분은 과연 몇이나 되리오. 나라를 잃기도 하고 나라가 갈라지기도 한 어려운 歷史 속에서도 一石 李熙昇 先生은 오직 지조의 외길만을 걸으셨으니 가히 굵은 대나무는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고 서리를 이긴 그 菊花는 학문과 예술의 마당을 채우는 향기가 되셨도다.
밀려오는 외래 문화와 혼탁한 社會 속에서도 지금 우리의 말과 글의 심지가 꺾이지 않은 것은 그리고 민족 문화의 샘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까닭은 오로지 선생 같은 스승이 우리 앞에 계셨기 때문이다. 선생이 겪으신 朝鮮語學會事件의 고초를 모르고 누가 우리말의 역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남기신 수많은 시나 글을 읽지 아니하고 누가 우리말의 유현한 맛 진솔한 정감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1896년 廣州고을에서 태어나 1989년 서울에서 삶을 마치실 때까지 梨花女專敎授 서울大學校 國語國文學科敎授 大韓民國學術院會員 東亞日報社長 등을 역임하면서 선생이 보여주신 고결한 성품과 곧은 행적을 어찌 다 이 작은 돌조각에 새길 수 있으리오. 다만 선생의 德을 기리고 功을 흠모하는 정성을 모아 이곳에 작은 碑를 세우니 뒤에 오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옷깃을 여미고 남기고 가신 그 발자국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1994년 10월 31일
李御寧 짓고 金忠烈 앞면 글씨 쓰다
딸깍발이 - 이희승(李熙昇, 1896~1989)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南山)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別號)가 생겼느냐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못 구경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 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다니던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날 나막신 소리를 내는 것은 그다지 얘깃거리가 될 것도 없다.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궁상(窮狀)이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변변치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고(그 시대에는 소위 양반으로서 벼슬 하나 얻어 하는 것이 유일한 욕망이요, 영광이요, 사업이요, 목적이었던 것이다.)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각조차 아니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삼순구식(三旬九食)의 비참한 생활을 해 가는 것이다. 그 꼬락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이야 여간 장관이 아니다.
두 볼이 야윌대로 야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은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지(理智)만이 내 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그래도 두 눈은 개가 풀리지 않고 영채가 돌아서 무력(無力)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 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은 그 의지력(意志力)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수염이 뾰족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뻗쳤으며, 이마는 대개 툭 소스라져 나오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이러한 화상이 꿰맬 대로 꿰맨 헌 망건(網巾)을 도토리같이 눌러 쓰고, 대우(갓모자)가 조글조글한 헌 갓을 좀 뒤로 젖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베중이 적삼이거나 복(伏)이 들도록 솜바지 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름살이를 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락이 모지라지고 때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道袍)나 중치막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 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망정 행전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이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일인(日人)들 모양으로 경망(輕妄)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지(之) 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거리기는 새레 곁눈질 하나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샌님들은 그다지 출입하는 일이 없다. 사랑이 있든지 없든지 방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폐포파립(弊袍破笠)이나마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대개는 꿇어앉아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 전적(儒敎典籍)을 얼음에 박 밀듯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 외는 것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가다가 굴뚝에 연기를 내는 것도, 안으로서 그 부인이 전당을 잡히든지 빚을 내든지 이웃에게 꾸어 오든지 하여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노라니 쇠털같이 하고한 날 그 실내(室內)의 고심이야 형용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샌님의 생각으로는 청렴 개결(淸廉介潔)을 생명으로 삼는 선비로서 재물을 알아서는 안 된다. 어찌 감히 이해(利害)를 따지고 가릴 것이냐. 오직 예의(禮儀), 염치(廉恥)가 있을 뿐이다. 인(仁)과 의(義) 속에 살다가 인과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떳떳하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배울 것이요, 악비(岳飛)와 문천상(文天祥)을 본받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에 음사(淫邪)를 생각하지 않고, 입으로 재물을 말하지 않는다. 어디 가서 취대(取貸)하여 올 주변도 못 되지마는, 애초에 그럴 생각을 염두에 두는 일이 없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 년 봄에 두고 보자.”
하고 벼르더란 이야기가 전하지마는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端的)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사실로 졌지마는 마음으로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안 쬔다는 지조(志操),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활 신조였다.
실상 그들은 가명인(假明人)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를 소중화(小中華)로 만든 것은 어쭙지않은 관료들의 죄요, 그들의 허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강직하였다.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氣槪), 사육신(死六臣)도 이 샌님의 부류요, 삼학사(三學士)도 ‘딸깍발이'의 전형(典型)인 것이다. 올라가서는 포은(圃隱) 선생도 그요, 근세로는 민충정공(閔忠正公)도 그다. 국호(國號)와 왕위 계승에 있어서 명(明)·청(淸)의 승낙을 얻어야 했고, 역서(曆書)의 연호를 그들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마는, 역대 임금의 시호(諡號)를 제대로 올리고 행정면에 있어서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 샌님 혼(魂)의 덕택일 것이다. 국사(國事)에 통탄할 사태가 벌어졌을 적에 직언(直言)으로써 지존(至尊)에게 직소(直訴)한 것도 이 샌님의 족속(族屬)인 유림(儒林)에서가 아니고 무엇인가. 임란(壬亂) 당년에 국가의 운명이 단석(旦夕)에 박도(迫到)되었을 때,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두목들도 다 이 ‘딸깍발이' 기백(氣魄)의 구현(具現)인 것은 의심 없다. 구한국 말엽(末葉)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렸을 적에 각지의 유림(儒林)들이 맹렬하게 반대의 상서(上書)를 올리어서, ‘이 목은 잘릴지언정 이 머리는 깎을 수 없다(此頭可斷 此髮不可斷).'고 부르짖고 일어선 일이 있었으니, 그 일 자체는 미혹(迷惑)하기 짝이 없었지마는 죽음도 개의하지 않고 덤비는 그 의기야말로 본받음 직하지 않은 바도 아니다.
이와 같이, ‘딸깍발이'는 온통 못생긴 짓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점도 적지 않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쾨쾨한 샌님이라고 넘보고 깔보기만 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일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인은 너무 약다. 전체를 위하여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 자기 본위로만 약다.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하여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일, 코앞의 일에만 아름아름하는 고식지계(姑息之計)에 현명하다. 염결(廉潔)에 밝은 것이 아니라 극단의 이기주의(利己主義)에 밝다. 이것은 실상은 현명한 것이 아니요 우매(愚昧)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현명이라고나 할까.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의기(義氣)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剛直)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을 하여 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