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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반도 남동부에 위치한다. 북으로는 태국과 라오스, 동과 남으로는 베트남, 남과 서로는 시엠만과 태국이 국경을 이루고 있다. 캄보디아의 중앙부에는 티베트에서 발원하는 메콩강이 남북으로 가르고 있고 메콩강 유역에는 약 2만㎢나 되는 평야가 펼쳐져 있다.
메콩강은 하류 프놈펜 부근에서 톤레사프강과 합류되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베트남으로 들어간다. 캄보디아 경제의 중심은 톤레사프강과 메콩강 합류점인 <4개의 팔>이라는 K자형 지역과 메콩강 하류의 참카르라는 대자연 제방이 발달되어 있는 지역이다.
기후는 1년 2기로 나누어진다. 5월 중순부터 10월 초순까지 남서계절풍의 영향으로 우기가 되고 11월부터 4월까지 북동계절풍이 부는 건기가 된다. 열대성기후이기 때문에 기온 연교차가 작으나 4월이 가장 더우며 프놈펜은 최고 40.9℃까지 올라간다. 12월부터 1월까지는 평균 25.5℃로 비교적 서늘해진다.
인구는 약 1300만 명으로 85%가 크메르어를 사용하는 크메르인이며 종교는 대부분이 불교, 소수의 이슬람교도가 있다.
1993년 이후 시하누크를 국왕으로 입헌군주제를 채택, 정치적 불안과 내전을 불식시킨 캄보디아는 현재 유럽, 일본과 대만에서 많은 관광객과 투자자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캄보디아의 역사
캄보디아에서 최초로 시작된 문명은 A.D. 1세기 경, 인도 남부에서 온 이주민인 크메르족이 세운 푸난 왕조이다. 캄보디아의 조상인 크메르 왕국은 메콩 삼각주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국으로 번영하였고, 인도문화를 받아들여 크메르 문자를 만드는 등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켰다. 특히 자야바르만 2세가 신권정치(神權政治)를 펼친 9세기 경부터 1432년까지 앙코르 시대라 부르는데, 크메르 미술의 황금기로 왕도인 앙코르를 기점으로 장기간의 조형활동을 한 시대이다. 앙코르와트도 이때 축조되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인이 진출하였고, 87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방의 일원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 동안 군주제도는 그대로 계속되었으나 1941년 왕위에 오른 N. 시아누크가 왕국헌법을 발표함으로서 입헌군주국을 발족시켰다. 53년에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독립한 뒤 4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첫 번째는 시아누크의 캄보디아왕국으로서 1970년까지 이어졌다. 뒤이어 론놀(Lon Nol)이 쿠데타를 일으켜 1200년 간이나 지속되었던 군주제도를 쓰러뜨리고 캄보디아공화국을 세웠다(1970~75). 망명한 시아누크는 캄보디아민족통일전선을 조직하여 크메르 공산당(Khmer Rouge)과 공조체제를 유지하면서 게릴라를 조직, 활동하였다. 베트남과 전쟁 중 중국이 캄보디아민족통일전선을, 미국이 론놀 정권을 도와 캄보디아는 두 세력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원조를 중단하자 통일전선측이 우세하게 되었고 75년 4월 드디어 론놀 정권이 붕괴되었다.
1976년 4월 캄보디아공산당 서기장 폴포트의 민주캄보디아정부(폴포트 정권)가 발족되었다. 그러나 폴포트 정권은 농업을 기본으로 한 원시공산주의에 바탕을 두는 경제정책의 실패, 반대자에 대한 대량 숙청, 베트남과의 국경분쟁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며 약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캄보디아인을 학살이나 가혹한 노동으로 죽이는 <킬링필드>사태를 일으켰다.
그 때문에 베트남의 도움을 받아 캄보디아 구국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어 수도 프놈펜을 장악하였고, 1979년 10월 헹삼린 의장을 수반으로 하는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한편 폴포트 정권은 국내 각지에 분산하여 게릴라활동으로 들어갔다.
1991년 국제적인 압력으로 베트남이 완전 철수하자, 13년 간 끌어온 내전이 부분적으로 종결되었다.
1993년 9월 신 헌법이 발포되고 시아누크 국왕이 즉위, 입헌군주제가 부활하였다. 1996년 8월 크메르루주의 제2인자 이엥 사리의 투항과 1999년 3월 지도자 타목 등의 체포로 크메르 루주는 사실상 궤멸하였다. <킬링필드>의 주역인 크메르 루주 지도자 폴포트는 1998년 벤 부근 산악지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998년에 출범한 훈센 총리는 2000년 2월 시아누크 국왕 사후에도 입헌군주제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며 캄보디아왕국의 입헌군주제 확립을 다짐했다.
캄보디아는 취업인구 가운데 농민 비율이 90%에 이르는 농업국가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로서 80만 호나 되는 농가 가운데 67만이 쌀 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요 생산지는 중앙저지대 칸달. 타케오. 프레이벵. 그리고 북서부 쪽에 있는 바탐방 등이다.
그러나 메콩강의 범람에 의존하는 조방적(粗放的) 1모작이기 때문에 생산성은 낮고 산출량은 1~15톤/1만m²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낮은 산출이다. 그러므로 취업인구는 많지만 농업생산액은 국민총생산의 1/3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폴포트 정권이 1975~76년에 관개망(灌漑網) 정비와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토지 사유를 폐지하고 2~3모작을 할 수 있게 계획하였으나 뒤이은 혼란 때문에 무산되었다.
어업은 톤레사프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기에 주위의 토지가 물 속으로 잠기는 특이한 자연조건 때문에 플랑크톤이 대량으로 발생하여 알맞은 어장이 되고 있다. 담수호에서 1㎢당 어획량은 세계 제1위로 1년에 11~13만 톤이나 된다. 우기가 끝나는 11월부터 조업이 시작되며 농어과의 물고기류, 잉어, 어폐류 등이 주로 잡힌다.
공업은 시아누크 시대에 약간의 경공업이 발전되었다. 외국원조로 국영공장이 세워져, 콤퐁참과 바탐방에 방적공장이, 프놈펜에는 유리공장이, 캄포트에는 인산비료공장이, 콤퐁솜에서는 석유정제공장이 설립되었다. 소규모 사기업도 늘어났는데, 그 반 이상이 종업원 수 50명 이하의 중소기업으로 주로 정미.도자기.수산가공 등에 종사하였다. 69년 말 공장수가 3670개에 달했으나 폴포트 정권이 농업에만 의존하는 원시공산주의를 표방함으로써 공업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
무역은 쌀.고무.옥수수 등을 아시아 여러 나라에 수출하고, 프랑스, 일본 등지로부터 각종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형태였다.
프랑스 지배 하에 내륙지방의 미곡을 실어서 출하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로가 정비되었다. 호치민~프놈펜~바탐방 사이와 콤퐁솜~프놈펜 사이 등에 간선도로가 있으며 국도의 총길이는 5100㎞나 된다.
캄보디아는 교량이 많이 건설되어 있다. 가장 긴 것은 톤레사프강에 있었던 약 700m의 다리였는데, 1975년에 파괴되었다. 철도는 서부의 미곡을 반출하기 위하여 부설된 프놈펜~푸르사트~바탐방~포이페트 사이의 385㎞, 수도와 해안을 연결할 목적으로 제2차세계대전 후에 부설된 프놈펜~콤퐁솜 사이의 270㎞ 등이 있다. 메콩강 톤레사프수계를 중심으로 1932㎞의 내륙 수로가 있으며, 메콩강 어귀에서 350㎞ 상류의 프놈펜까지는 2000톤급 선박이 드나들 수 있으며, 소형선박은 상류인 크라체까지 운행할 수 있다. 이것은 1960년 프랑스의 원조로 콤퐁솜 항구가 만들어졌으며 1만 5000톤급 선박이 4척 이상 접안할 수 있다.
캄보디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종은 크메르인이다. 1975년 이전에는 중국인(화교) 35만, 베트남인 20만, 참인 9만, 말레이계 소수민족 9만, 유럽인(주로 프랑스인) 5000명 등이 있었다.
화교의 대부분은 18~19세기에 이주하여 금융.경제의 실권을 쥐고, 특히 미곡에 대한 중개운수업에서 활동하였으나, 캄보디아인으로 동화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폴포트 정권이 없애버렸다.
크메르인은 고(古)몽골로이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언어계통으로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에 속하는데, BC 200년 무렵부터 코라트고원 방면에서 이주하여 왔다. 그 뒤 인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도 하였다. 참파왕국의 먼 후손인 참족은 말레이계로서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톤레사프 호반에 거주하면서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크메르루라는 종족도 있는데, 그들은 과거에는 미개인으로 취급되어 업신여김을 받으며 살았다. 북동부의 삼림 속에 거주하며 수렵이나 화전농업 등에 종사하고 있는데1975~78년 폴포트 정권의 게릴라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형적인 농업국가로서 국민의 대부분이 농촌에 거주한다. 일찍이 농촌의 공동체를 품이라고 불렀고, 30호 정도를 1단위로 하고 있었으나, 식민지시대에 쿰이라는 새로운 촌락으로 재편성되었다. 쿰 가운데에는 1~2개의 사찰, 화교가 경영하는 상점, 초보적인 학교시설 등이 있었다. 원래 농지의 규모는 각 농가가 거의 비슷하여 지주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시아누크 시대에 지주가 늘기 시작하였고, 관료나 화교 등의 세력이 커졌다.
프놈펜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의 인구는 10%에 지나지 않았으나 전쟁의 참화를 피하여 도시로 들어오는 사람이 늘어났고, 수도 프놈펜은 1970년 무렵 50만으로 늘어났다가, 그 뒤 200만 명의 대도시로 불어났다. 그러나 폴포트 정권 이후 농촌으로 강제이주정책을 취하였고,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은 옛 도시 주민을 다시 도시로 돌려보내는 정책을 내놓았지만 1982년 당시 프놈펜 인구는 약 50만까지 줄었다. 북서부에 있는 제2의 도시 바탐방은 4만, 콤퐁참.시엠레아프. 캄포트 등은 각각 2만을 넘지 않는다.
캄보디아문화의 과거 영광은 놀랄 만한 것이었으나, 15세기 타이에게 멸망된 뒤로는 극도로 쇠퇴하여, 주민도 숲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953년 독립 후 정부는 교육에 역점을 두는 동시에 전통예술을 부활시키는 데 힘썼다. 한때 폴포트 시대에 교육이 불필요하다고 폐지시키기도 하였으나 헹삼린 정권에서 다시 부활하였다.
음악. 무용. 연극은 앙코르나 타이 지배시대 생성된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여, 고대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를 기본 주제로 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캄보디아 축제일에는 이러한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가를 양성하는 음악학교. 예술대학. 극장 등이 많이 건설되었다. 문학은 타이문학. 유럽문학 등의 영향을 받았다.
캄보디아의 삶은 인도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농경문화가 토대를 이루고 있다. 주식은 쌀이며, 부식물은 프라호크라는 소금에 절인 생선과 채소 및 축산물 등이다.
매년 범람하는 홍수 때문에 마을은 자연제방 등 약간 높은 곳에 마련된다. 주거지는 보통 200-400명 규모의 집단을 이뤄 혈연, 지연에 의한 공동주거지를 형성하며 항상가옥(杭上家屋)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옷은 사롱(sarong ; 허리에 감는 천)에 블라우스(여성)로 간단하지만 제례 때에는 산포트(사롱을 양다리 사이로부터 걷어올려 뒤에서 동여맨 차림)라는 전통민족 의상을 입는다. 오늘날 프놈펜 등과 같은 도시에서는 유럽식 복장을 많이 한다. 옛날에는 힌두교를 믿었으나, 타이족이 침입한 이후로는 소승불교권으로 들어갔다. 대다수의 주민은 대중적 불교의 일파인 모하카이파에 속하고 있으나, 1975년 이전에는 귀족적 타마유트파도 많았다. 절은 농민의 제례나 민회(民會)의 터전으로서 마을생활의 중심적 역할을 하며, 남자는 20세까지 한 번은 승려 생활을 하도록 정해져 있어서, 시아누크 시대에는 승려인구가 약 6만 8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뿌리내린 토착 정령신앙 네아쿠타도 종교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1975~78년 사이에 불상 파괴가 단행되고 승려는 논밭의 강제노동으로 쫓겨났으며, 사찰은 곡물창고나 병사(兵舍)로 이용되는 등 수난을 겪었었다. 11만 명이나 되는 참인은 브라만교도들이었으나, 15세기 개종하여 현재는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중국인들은 도교대승불교, 베트남인들은 카오다이교가톨릭을 믿고 있었다. 그 밖의 소수민족은 자연숭배를 하고 있다.
장례식은 근친자가 삭발을 하고 승려가 독경한 뒤 다비(茶毘)를 한다. 1975년부터 민주캄보디아 정권 때 이런 전통적 사회가 급진적 대 개혁으로 파괴되었으나 79년부터 캄보디아인민공화국 아래에서 재생되었다.
앙코르와트
시대적 배경-1855년 프랑스의 탐험가이며 생물학자인 앙리 무어 박사가 우연히 옛날 책 한 권을 손에 넣었다. '진랍 풍토기'라는 제목으로 중국 사람이 쓴 인도차이나반도의 역사책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캄보디아는 2천년 전 세워진 나라로서 899년에 나라가 크게 부흥했었다. 그때의 나라 이름은 ‘진랍’이었고, 크메르족이 나라를 다스렸다. 진랍 왕국은 타일랜드. 미얀마.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반도 거의 모두를 다스린 큰 나라였다. 도읍을 왕국의 한가운데 언덕인 앙코르에 세우고 그 도시의 뒤편에 어마어마한 절을 지었으니 그 이름을 앙코르(城) 와트(절)라고 한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신과 같아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왕들은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다. 앙코르와트도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한 수리아바르만 2세가 힌두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든 거대한 힌두교 사원이다.
앙코르와트는 중앙에 수미산(메루산)을 의미하는 탑, 주위에 성벽, 그 주위에 해자가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수미산은 세계의 중심으로 신들의 자리를 뜻하고, 성벽은 히말라야산맥을, 해자는 깊고 무한한 대양을 상징하며 이곳이 신들의 세계를 그대로 재현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사원의 주신은 비슈누신이며 이곳에는 왕과 비슈누신을 합체한 특별한 신상인 비슈누신왕이 신들의 세계에 잠들어 있다.
3만여 명의 장인과 백성들이 30년에 걸쳐 완성시킨 이 사원은 대대로 계승되어 온 앙코르 건축과 예술의 집대성인 동시에 당시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규모의 석조 건축물이다. 이런 사실을 자랑하듯 현재 캄보디아의 화폐, 국기 등에 앙코르와트가 새겨져 있고, 30년 전 생산하기 시작한 맥주의 상표에도 앙코르 비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앙코르와트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거대한 규모와 돌마다 새겨진 정교한 조각 솜씨 때문이다. 그 유명세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었고 많이 훼손되기도 했지만 수 천년을 이어온 그 장엄함과 위용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건축미와 조형미-이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것 역시 사각형의 해자인데, 해자의 폭은 200m, 그 길이는 505㎞나 된다. 이 사원으로 들어가려면 누구나 예외 없이 강처럼 넓은 해자를 건너기 위해 200m 길이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건축의 정연한 기하학적 평면과 탑당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조화와 원숙미를 보여주는 웅대한 가람이다.
서쪽 진입로에는 포석이 깔려 있고 양쪽에 나가(큰 뱀)의 난간이 있다. 이 난간을 따라 참배로에 들어서면 중앙사원의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원은 웅대한 방추형의 중앙탑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어 있는 행랑, 그것을 둘러싼 삼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대한 석재(회색사암)는 북동쪽 약 40㎞ 떨어진 푸논쿠렌구릉의 채석장에서 채취한 것이다. 또한 사원의 건축에는 수십만 명의 인부와 포로가 동원되었고, 또한 수천 명의 석공과 불사(佛師).대경사(大經師) 등 기능인들이 동원되어 구성, 균형, 설계, 조각과 부조의 완벽함을 과시하고 있다.
건축구성은 입체적이며 중앙이 약간 높게 되어 있다. 3층으로 쌓은 흙 위에 제 1회랑이 있고 십자형 중회랑(프리아포앙)의 계단을 올라가면 약간 높아진 제 2회랑이 나타난다. 안뜰을 빠져나가면 급경사의 큰 계단이 나오는데 높이 솟은 5기의 탑당과 제 3회랑으로 연결된다. 이 양식은 인도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약 10차례에 걸친 건축양식의 변화를 겪어 오면서 건축기술을 개량하고 경험을 축적하여 탄생한 앙코르 특유의 미술 양식이다. 이 건물 벽의 공간을 메운 아름다운 모습의 네바타(여신)상 및 문미.합각(合閣) 등의 아름다운 조각, 줄지어 늘어선 기둥과 네모기둥에 새긴 정교한 장식무늬, 원주창(圓柱窓)과 포탄형(砲彈形)의 탑당 역시 크메르 문화의 독창적인 조형과 뛰어난 미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앙코르 예술의 중심은 3개의 회랑 벽에 묘사된 부조 세공에 있다. 홍토를 쌓은 위에 사암을 두껍게 붙인 뒤 그 표면에 조각을 새겼는데 인도적인 것과 비인도적인 것이 서로 교차하고 있다.
제 1회랑(200m×180m)에는 띠모양 내벽에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입체적인 두루마리 그림과 같다. 힌두교를 대표하는 비슈누와 그의 화신 크리슈나, 라마왕자, 신과 합체한 수르야바르만 2세 등이 소재로 돼 있다.
부조의 화면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취재한 대전쟁 그림(서면 남측), 크리슈나가 폭풍우에서 목자와 가축을 지키는 장면(南西隅塔), 수르야바르만 2세의 위업을 칭송한 역사이야기(남면 서측), 천국과 지옥의 장면과 죽음과 재판을 다루는 신 염마천(閻魔天, 남면 동측), 천지창조에 관한 유해교반(乳海攪拌)의 그림(동면 남측), 가루다(독수리신)의 어깨에 타고 적을 공격하는 비슈누신(동면 북측), 크리슈나와 괴물 바나의 전투(북면 동측), 라마야나에서 채화(採話)한 라마군과 악마 라바나군의 치열한 전투장면(서면 북측) 등이 묘사돼 있다. 이 회랑 부조는 구도.묘사.도상 등에서 솜씨의 차이는 있지만 역동적인 묘사와 파도치는 표현으로 서면과 남면의 회랑이 미술적으로 특히 우수하다. 먼 곳을 화면 상부에 겹치는 방법을 썼고, 2중.3중으로 그려서 입체감을 주는 기법 등으로 수 ㎞에 달하는 회랑의 벽에 조금의 빈틈도 없이 새겼으며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절묘하다.
제 2회랑에는 불상이 곳곳에 놓여 있는데 이 사원 안의 불상은 모두 16세기에 발견된 이후 들여온 것이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다섯 개의 테바다 여신상이 회랑 안쪽에 놓여있다.
제 2회랑 안뜰을 빠져나가면 급경사의 큰 계단이 나오는데 높이 솟은 5기의 탑당과 제 3회랑으로 연결된다. 중앙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5개의 탑이 이 3회랑에 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탑은 65m나 된다. 앙코르와트를 최초로 서방에 소개한 무어가 처음 본 것이 바로 이것이다. 중앙부에는 사방으로 입불상이 모셔져 있고 북쪽에만 작은 열반 불상이 놓여 있다. 이 중심에는 깊이 22m의 커다란 동굴이 있고, 그 안에는 왕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세기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캄보디아 앙코르지역의 유적을 보고 깊이 감동하여 "이곳에서 이 경이로운 유적과 더불어 남은 생을 살고 싶다"고 하였다.
캄보디아는 우리의 기억 속에 가깝게는 영화 '킬링필드'의 망령에서부터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내전으로 점철돼 악명이 높았던 나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세기의 걸작 중 하나인 앙코르 유적지가 존재하고 있다. 예술성과 웅장미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 신전과 로마의 콜로세움을 능가하는 이 유적지는 연간 50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 앙코르 유적지는 캄보디아의 커다란 수입원이 되고 있으며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조상들이 누렸던 찬란한 영화처럼 자신들도 언젠가는 잘 살 수 있다는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는 등대의 역할이 되고 있다.
앙코르와트
평지 위에 짙은 색의 웅장한 건물이 솟아 있는 사원인 앙코르와트. 그 모습을 본 이들은 장엄하고 신비로움에 말문이 막힌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지 중 가장 큰 사원이며 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크메르 건축 예술의 극치를 이루는 역사적인 예술품이다. 이 사원의 구성, 균형, 설계 기술, 조각과 부조 등의 완벽함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앙코르와트는 석조 건축물로 만들어진 우주의 축소판으로 지상에 있는 우주 모형이다.
앙코르톰
'백인 한 사람과 캄보디아인 네 사람이 캄보디아 톤레사프 호수 북쪽 밀림 속을 헤매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언덕 꼭대기에 올라서서 눈 아래 펼쳐진 엄청난 광경에 경악했다. 부처님 얼굴을 새긴 탑이 수없이 늘어서 있고, 거대한 왕궁과 나무에 뒤덮인 도시가 저녁놀 아래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1850년 6월, 프랑스의 한 신부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인 거대한 도시 앙코르 톰이 발견되었다.
9세기 초 수리야바르만 2세가 크메르를 통일하면서 앙코르 톰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그 뒤를 이은 왕들은 이웃 나라의 세력에 밀려 국가의 안정마저 위협을 지킬 수 없었다. 급기야 1177년에는 라오스 참파군의 침공을 받아 결국 왕도는 함락되고 참족의 지배를 받았다. 얼마후 새롭게 등장한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군을 격퇴하고 성곽을 한층 굳건히 한 새로운 도성을 건설했다. 이렇게 해서 착수한지 300년 만에 완성된 도시가 앙코르 톰이다. 앙코르와트가 힌두 문화를 나타내는 사원이라고 한다면 앙코르 톰은 성불을 믿고 깨달음을 구하는 자는 모두 구제 받을 수 있다는 불교 문화가 배어있는 도시이다.
앙코르 톰은 쿨렌 고원과 톤레사프 호수 사이 120㎢의 기름진 평야에 세워진 곳이다. 이 도시는 한 변이 3km인 사각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심에는 왕도의 수호 사원인 바이욘 사원이 있으며, 이 사원에서 동서와 남북으로 뻗은 두 개의 도로가 도시를 넷으로 나눈다.
그러나 이웃 세력을 막기 위해 축조된 거대한 도시, 위대한 도시로 탄생했던 앙코르 톰은 1431년 타일랜드 아유타족이 저수지를 파괴하자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게 되었고 1434년 크메르족은 끝내 도읍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화려한 도시 앙코르 톰은 빈 도시로 버려진 채 밀림에 묻혔고 신비를 간직한 잃어버린 도시가 되었다.
바이욘
앙코르 톰 중앙에 지름 25m, 높이 45m 되는 거대한 중앙탑이 솟아 있고 그 주위는 4면 불상의 탑 54개가 사방에서 자비로운 미소를 발산하고 있어 '크메르의 미소'라고 불리기도 한다. 숫자 54개의 의미는 그 당시 왕국 안에 있었던 주(州)의 개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사원에 쓰인 돌만 해도 60만개. 1개가 1톤 이상이 되는 거대한 돌들은 거의 태국, 베트남에서 코끼리나 배로 실어 왔다.
거대한 바위산 모양을 한 이 사원에는 관세음 보살의 모습을 한 자야바르만 2세의 웃는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부처와 동일시 된 왕의 위력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제 1 회랑에는 신화나 용맹스런 전투 모습 뿐 아니라 당시 서민 생활의 모습이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다. 제 2 회랑의 벽화는 힌두교 신화나 전설을 주제로 하고 동면 북쪽에는 유명한 '라이 왕의 전설' 신화가 한쪽 면에 전개돼 있다.
창건 당시의 화랑에는 불상이 빼곡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자야바르만 7세 왕이 죽은 뒤 힌두교 사원으로 개종되면서 불상을 제거한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바푸온
11세기 중엽 앙코르 톰 이전의 도성에 지어진 힌두교 사원이다. 중앙 사당으로 이어진 참배 도로는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무지개 다리를 재현한 것으로 하늘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기법은 후에 앙코르와트의 참배 도로나 앙코르 톰의 해자에 걸쳐 있는 다리 등에 계승되었다고 한다.
사원의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샴의 왕과 크메르 왕은 형제였다. 샴의 왕이 자신의 왕자를 크메르의 왕에게 맡기자 크메르 신하들은 이것을 모략으로 여기고 왕자를 살해한다. 화가 난 샴의 왕은 크메르 정벌에 나서는데, 이때 크메르의 왕비가 이 사원에 그들의 왕자를 숨겼다고 하여 '숨긴 아이'라는 뜻의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태국, 앙코르 와트(시공사) 중에서-
코끼리테라스와 라이왕 테라스
코끼리 테라스는 12세기 후반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 것으로 광장과 접한 동쪽 정면에 만들어져 열병식이나 행사를 관람하는데 이용했다. 350미터 길이의 웅장한 규모로 옹벽에는 코끼리 부조가 연달아 새겨져 있고, 곳곳에 머리가 세 개 달린 코끼리 신인 에라완이 긴 코로 연꽃을 들어올리는 모습도 조각되어 있다. 코끼리 테라스의 바로 옆에 라이 왕의 조각상이 있는 테라스가 있다. 라이 왕은 크메르 신화인 '라이 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왕으로 옛날 왕이 밀림에서 독사와 싸우게 되었는데 그 뱀을 죽일 때 피가 튀어 나병(라이)에 걸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 2 회랑의 동면 북쪽에 이 전설을 주제로 한 부조가 전개돼 있다. 현재 이곳에 머리가 깨진 상태로 전시돼 조각상은 모조품이다. 진짜는 머리통이 온전한 모습으로 프놈펜의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타 프롬 사원
앙코르 톰 동쪽에 위치한 타 프롬은 12세기 중반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봉헌하기 위해 지은 사원이다. 그 당시에는 약 8만 명의 사람들이 3천여 개의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었으며 18명의 고승과 740명의 관리들, 그리고 많은 무희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삼군의 침략과 내분 등으로 수 백년 동안 방치되었고 지금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무너진 돌 더미가 통로를 막고 있고 거대한 무화과나무 뿌리는 허물어져 가는 담벼락을 완강히 붙잡고 있다.
거대한 사원을 거대한 자연이 뒤덮고 있는 이곳은 신비감과 놀라움 그 자체이며 고색 창연한 기운마저 띄고 있다. 얼마전 영화 툼레이더의 촬영 무대가 되기도 했으며 많은 관광객이 찾는 사원 중의 하나이다.
반테이 스레이
10세기 후반,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 제사를 담당했던 브라만 고승이 세운 힌두교 사원으로 파괴의 신인 시바를 위해 만들어졌다. 사원의 이름은 '여자의 성채'를 뜻하며 붉은 색 사암을 많이 사용해 석양이 질 때면 사원 전체가 장밋빛으로 불타오르듯 찬란한 광채를 발한다. 규모가 작지만, 힌두교의 신화를 형상화시킨 부조들이 매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앙코르 예술의 최고 작품, 앙코르의 보물이라고도 불린다.
특히 중앙 서당에 묘사된 테바다 상은 유럽에서 동양의 모나리자로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 여신상에 반해 본국으로 갖고 돌아가려다 붙잡혔고 나중에 그가 발표한 소설 <왕도>에서 그 때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곳은 내전으로 인해 크메르루즈가 출몰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오토바이 기사에게 100달러를 집어주고도, 보디가드를 해줄 경찰을 한 명 동반해야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자의 최고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프레이칸 사원
바이욘 사원 북쪽 3 Km 지점에 위치,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가 타 프롬에 이어 부왕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불교 사원이다. 사원 안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프레아칸(황금보검)을 모신 무구관(武具館)이 있는데, 앙코르 유적에서 보기 드문 2층 구조의 석조 건축이다. 사원을 둘러싼 벽 가운데 탑문에는 새의 신 가루다가 숙적인 뱀신 나가를 포획하는 용맹스런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복원되지는 않았지만 열대림의 나무뿌리 밑에서도 비교적 보존이 잘 된 듯하다. 이렇듯 이 사원은 처음에는 불상을 조각한 불교 사원 이였지만 힌두교의 설화와 신성함을 나타내는 조각과 함께 융화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국립박물관
국립박물관은 왕궁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캄보디아 전통 양식의 적갈색 건물로 외관이 매우 아름답다. 1917-1920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크메르 루즈군에 의해 파괴된 이후 다시 개축된 것이다. 현재는 쿤 사멘 관장이 맡고 있으며 80여명의 직원이 있다.
이곳에는 석기 시대 유물부터 앙코르 이전의 푸난(Funan), 첸라(Chenla) 그리고 앙코르 시대, 앙코르 이후 시대로 구분되어 크메르 미술과 고고학에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주로 종교적인 유물이 많으나 목조가옥, 바느질방, 나뭇조각, 석제사자상, 비석 등도 전시되어 있어 1만5000여 점의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소장품이 파괴된 채로 전시되어 캄보디아의 험난한 역사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정문은 앙코르 유적 중 10세기 반 스레이 사원의 문을 본떠서 만들었는데, 나무문 자체의 무게가 1톤이 넘는다. 정원도 아주 아담하면서도 정갈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중앙에는 일명 '문둥병왕'이라고 불리는 레퍼왕(Leper King)의 조각상이 있다.
박물관의 앞에는 커다란 마당이 있는데 이는 5월 초의 춘경제(Chat Preah Nengkal)때 왕가의 경작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이다. 춘경제란 왕이 소를 이끌고 밭을 갈면 왕비가 그 뒤를 따라가며 씨를 뿌리는 행사로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 건물에는 박쥐들이 많이 사는데 지붕을 수리할 때에 불교적 생명관과 동물보호차원에서 190만마리 이상의 박쥐들이 그냥 살 수 있게 특별한 설계와 자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캄보디아 국립박물관은 수도 프놈펜에 2개, 지방에 4개 등 모두 6개가 있다. 주로 앙코르 유적지 현지에서 제대로 관리가 안 되어 국립박물관에 옮겨다 놓은 것이 많다.
주 소 : 왕궁 북쪽의 178번 거리와 184번 거리 사이에 위치
입 장 료 : 2달러 (USD)
입장시간 : (오전) 8:00~12:00, (오후) 2:00~5:00
캄보디아 왕립무용단
수 천년 이상 왕궁과 함께 했던 무용은 군주제의 힘과 영광(대관식, 결혼식, 장례식, 캄보디아의 국경일)을 위하여 다양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 전통 예술은 1970년대 부분적으로 폐지될 위기에 처했으나 캄보디아 사람들의 문화적 상징으로서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왕립 무용은 크메르 공산당에 의해 단절되었으나 1979년 폴포트 정권 이후 고전 레퍼토리로 다시 시작되었다. 캄보디아의 왕, 종교와 관련된 고전 무용은 공식적으로 캄보디아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최근에 무용단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고 있으나 재정과 공간부족으로, 또한 현대의 다양한 예술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어 전통 무용의 존립 위기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유네스코 발췌-
압사라 무용
압사라 무용은 신화를 묘사하고 있다. 무용은 라마야나(Ramayana)의 단편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신화 속의 유명한 전투 장면이나 앙코르 사원의 벽에 새겨진 신화 이야기이다. 또한 선신들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성한 묘약을 가지고 있는 악신 사이의 전투이다. 무용의 몸 동작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어찌보면 한편의 무언극을 보는 듯 하다.
프놈펜
캄보디아의 수도이다. 베트남 호치민에서 약45분 항공기로 가면 된다. 국제공항의 이름은 프놈펜 국제공항으로 2004년 신관이 세워졌고, 프놈펜 시내와 약 차량으로 10분거리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캄보디아가 점점 정치적인 안정을 찾고 있기 때문에 프놈펜시도 건설 건축의 붐이 일고 있다. 프놈펜시에서 가 볼 만한 곳으로는 왕궁, 실버 파고다, 국립박물관, 투오슬랭 박물관, 중앙시장, 킬링필드 등이 있다.
왕궁
현재 시아누크 국왕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프놈펜 시내 한복판에 있으며 메콩강과 톤레사프강을 바로 보고 있다. 국왕이 머물고 있을 경우는 국왕가문의 문장기가 푸른 청색을 띄고 왕궁 깃봉에 걸려 있다. 방콕의 로얄 팰리스에 대응하여 프랑스가 1866-1870년에 건립한 이 왕궁은 캄보디아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살아있다. 중앙의 즉위전(Thron Hall)은 높이가 59m에 달하는 것으로 그 중 황금 탑이 인상적이다. 이 건물은 1892년 나무로 지어진 것으로 국왕의 즉위식, 국왕탄신일, 외교 사절의 영접 등에 활용되고 있다.
특히 왕궁과는 그 외관이 동떨어진 철제 구조물인 유럽풍 색채를 띠는 나폴레옹 기념관은 나폴레옹 2세의 유진느 황후가 선물로 보내온 것으로 프랑스에서 먼저 만들어진 후 배로 운반해 와 이 곳에서 다시 조립한 것이다.
실버파고다
왕궁 내의 전용 사원으로 1892년에 지어졌다가 1962년 재건축했다. 태국의 왓 프라깨우(Wat Phra Keo)를 모방했다고 한다.
사찰 중앙에 황금부처상이 있는데 9,584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으며 제일 큰 것은 25캐럿이나 된다. 그 뒤에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에메랄드 부처님이 모셔져 있어 에머랄드 파고다라고도 한다.
사찰 바닥은 5329개의 은(silver)타일로 덮여 있는데, 이 은 타일은 한 장에 약 2kg에 해당하며 사찰 모든 바닥을 전부 덮고 있기 때문에 실버 파고다라고 불린다.
중앙시장
중앙시장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곳으로 캄보디아어로 '새로운 시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중앙의 돔을 중심으로 네 방향으로 길게 복도가 뻗어 있으며 지붕이 매우 높아 일년 내내 시원하다.
외관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내부는 이동하기에 그리 편리한 구조는 아니다. 내부 중앙에는 시계, 귀금속등 보석상이 자리잡고 있으며 각 복도에는 생활잡화, 기념품, 전자제품, 음반, 식료품, 육류, 의류상, 과일가게 등이 즐비하다. 외부에는 각종 노점상, 의류상, 과일가게 등이 있어 캄보디아 일상생활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독립기념탑
독립 기념탑은 프랑스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앙코르와트의 중앙 탑을 본떠서 1958년 세워진 것이다. 갈색빛이 나는 이 기념탑은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곳으로 매년 독립 기념일이 되면 이곳에서 기념 행사가 개최된다. 또한 기념탑 주위에는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어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있다.
툴슬렝박물관
이 박물관은 캄보디아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이다.
일단 찾아가는 길부터 음산한데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와 허름한 골목을 지나면 박물관이라고 하기에 초라한 건물이 보인다. 원래 이 건물은 고등학교였는데 크메르 루즈군이 프놈펜에 입성한 후 폴포트 지시에 의해 보안대 건물로 개조된 곳이다. 이 곳에서 관리, 지식인, 정적들이 수용되고 고문당했다.
건물은 총 4개 동으로 되어 있다. 제 1건물로 들어서면 14개의 무덤이 보이는데 이는 크메르 루즈군이 해방군에 의해 도망가면서 사살한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제 1건물은 수감된 사람을 조사하고 고문했던 곳이다. 각 교실마다 고문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걸어놓고 있다. 제 2건물은 수감자들의 사진 촬영, 신체 측정 등을 했던 장소이다. 제 3건물은 사람을 수감했던 감방으로 건물 주위에 철조망이 둘러싸여 있다. 그 당시에는 전기가 흘렀다고 한다. 내부는 벽돌로 쌓아 올린 87개의 독방이 만들어져 있고, 또 족쇄로 묶어두기 위한 쇠고리도 달려 있다. 제 4건물은 그 당시 각종 고문 기구들과 고문, 살해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들은 그 당시 수용되었던 화가가 나중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희생된 사람들의 두개골로 모자이크한 캄보디아 지도는 현재 국립 박물관으로 이전했다.
킬링필드
크메르 루즈군이 수용소에 가두어 두었던 사람들을 처형하여 묻어둔 곳으로 프놈펜 남서쪽 청아익(Choeung Ek)에 위치한다.
남녀노소 유아를 가리지 않고 희생되었으며 총알이 아깝다는 이유로 주로 곤봉을 사용하여 처형했다고 한다. 1980년 8,985구의 시신이 집단 매장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어 폴포트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88년에 캄보디아 전통양식의 추모탑이 세워졌고, 그 안에 발굴된 유골을 모아 전시되고 있으나 아직도 미발굴된 무덤집단이 이곳에 산재되어있다 한다.
콤폼솜 혹은 시아누크빌
프놈펜에서는 차량으로 약 3시간 걸리는 남쪽 해변에 위치해 있다.
1950년대 후반 항구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시아누크빌은 시아누크 국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1960년대부터는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 론놀(Lon Nol) 수상의 쿠데타로 쫓겨나게 되자 사아누크빌의 이름은 꼼퐁쏨(Kompong Som)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1993년에 다시 시아누크빌이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다. 지금은 시아누크빌, 꼼퐁쏨 둘 다 혼용되어 불리고 있다. 이 곳은 캄보디아 제일의 항구도시이며 해변 도시로 상아색 아름다운 해변이 에메랄드 블루색의 바닷물과 잘 조화되어 관광객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주말에는 프놈펜 등에서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붐빈다. 이곳의 해변은 고운 규사모래로 덮여있다. 현재까지 개발은 덜 돼 천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북쪽의 시아누크빌항에서부터 남쪽 방향으로 빅토리 해변, 꼬뽀스 해변, 인디펜던스 해변, 소카 해변 그리고 오쯔디알 해변이 늘어서 있다. 오쯔디알 해변의 아래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는 오르테스 해변이 있다.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탐사 보고 자료집
하늘에서 바라본 앙코르 유적지
정말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앙코르 유적지를 한눈에 파악하려면 이런 방법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앙코르란 도시를 뜻하는데 현재 310 제곱 킬로미터 속에 약 1500개의 사원이 발굴되었다고한다. 하지만 한창 전성기 때에는 전체 유적지가 1,000 제곱 킬로미터 정도에 해당되었다고 하니 어마어마 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걸 다 가 볼 필요는 없다. 여행객들이 가는곳은 작게는 대여섯개, 많게는 20개 정도인데 이 유적지 각각의 설명은 따로 하기로 하고 우선 시대별로 나누어 보겠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우선 현재 관광객이 가장 많이 가고 있는 앙코르 와트, 바이욘 사원에서 남동쪽으로 20킬로 미터 떨어진 곳(시엠리엡에서는 약 13킬로미터 떨어졌음)에 롤루오스 그룹(Roluos Group)이라는 유적지가 보인다. 별로 커 보이지는 않는데, 이것은 앙코르 유적의 초기 유적지로 인드라바르만 1세(9세기 후반) 때 도시였던 곳이다. 이때부터 서서히 건축물다운 모습을 띤 사원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롤레이 유적, 프레코, 바콩사원 등이 있다. 특히 바콩 사원은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수미산)을 형상화 한 것으로 이때부터 그런 상징이 형상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형성된 앙코르 초기의 사원들이 점점 발전하면서 현재의 앙코르 유적지로 옮겨 오는데 그중에서도 앙코르 와트에서 앙코르 톰의 남문으로 오는 중간에 왼쪽, 즉 서쪽의 낮은 산에 있는 프놈바켕은 초기 유적지다.(산은 해발 65미터로 일명 인드라의 산이라고도 한다. 인드라는 힌두교의 천둥과 번개의 신으로 한국에서는 제석천을 말한다.) 이곳은 야소바르만 (9세기후반에서 10세기 초반까지)이 도읍한 야소다라푸라라는 도시의 중심 신전으로 역시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콩 사원부터 나타난 이런 상징은 12세기 초에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서 세워진 그 유명한 앙코르 와트도 마찬가지다.
앙코르 와트가 출현하면서부터 앙코르 문명은 전성기로 들어서게 된다.
앙코르 와트에서 얼마 안 떨어진의 북쪽에는 앙코르 톰이라 이름붙여진 성벽 안의 도시가 있다.이안에는 바이욘 사원, 바푸온, 피메아나카스 사원등이 있는데 이는 모두 한 시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바푸온, 피메아나카스는 10세기에 세워졌고 앙코르 톰의 성벽과, 그 중심에 있는 바욘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12세기 말에 세워진 것이다.
자야바르만 7세 때가 가장 전성기로 그가 세운 사원들이 앙코르 톰 바깥의 정글 구석구석에 산재해 있다. 앙코르 톰 북쪽의 프레아칸, 그 동쪽의 프레닉펀, 그 남쪽의 타 프롬 등 현재 관광객에게 인기있는 사원들이 모두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 때 세워진 사원들이다.
자, 이쯤하자. 자세한 사원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그 시간적, 공간적 흐름만 파악한 것으로 끝내자.
앙코르 와트의 저주 ?
"사막을 헤매다 녹색의 풀들이 가득 찬 신선한 오아시스를 본 느낌이라고 할까 ? 마술에 걸린 것처럼, 앙코르 와트를 보는 순간, 여행객은 야만에서 문명,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본 것은 대지가 내뱉은 악마의 사원 아닐까 ?........사원의 어디에나 미소 짓는 지옥의 여신들이 폐허 위에서 캉캉 춤을 추고 있었다....... 저주받은 사원의 꼭대기에서 혼자 보낸 오후를 생각하면 지금도 절망감과 혐오감 속으로 빠져든다.......사이공에서 죽은 저널리스트인 튀데는 이런 애기를 남겼다. 그는 4년전 코마유, 모리스롱, 노스클리프 경과 앙코르의 사원에 들어갔는데 그때 사원지기가 경고하기를 앞으로 4년 안에 그들 모두 죽을 것이라고 저주했다고 한다......사원지기의 말은 맞았다. 그들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앙코르는 저주받은 사악한 곳이다."
앙코르 와트를 신비하게 묘사한 이는 흔히 앙코르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는 앙리 무오고 악마의 사원이라 혹평한 이는 폴 클로델이라는 여행자다.
어찌 된 것일까 ? 앙리 무오가 앙코르를 방문한 때는 1860년 경, 폴 클로델이 방문한 때는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1925년이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 그 신비했던 앙코르 와트 사원이 저주받은 사원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 하긴 폴 클로델이 방문하기 몇년 전에 그곳을 방문한 튀데, 코마유, 모리스롱, 노스클리프가 모두 4년 안에 죽어버렸다. ? 앙리 무오조차 앙코르 유적을 방문한 후 1년뒤 열병으로 라오스의 밀림 어딘가에서 죽었으니 그런 말이 나옴직도 하리라.
이런 류의 애기는 바로 이집트의 룩소르에 있는 투탄카멘왕의 무덤에서도 나타난다. 그 무덤 발굴에 참여했던 이는 모두 병으로, 사고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다 죽었다 한다.
정말 저주라도 내린 것일까 ? 앙코르 와트를 극찬한 앙리 무오 방문 시점과 폴 클로델이 방문할 때까지의 65년 사이의 변화라면 단지 하나, 많이 발굴되고 복원되어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쉬워졌다는 것일뿐, 더 기괴하지도, 음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앙리 무오는 극찬하고 폴 클로델은 저주받은 곳이라 했다.
글쎄 그곳을 방문하는 당신도 어떤 저주를 받을까 ?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을 짜릿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 (참고로 앙코르 와트는 이제 수많은 관광객이 드나드는 곳이고, 그 이전부터 방문한 사람들 수를 생각하면 수백만이 넘을 것이다. 그 수백만명이 모두 저주를 받았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 너무 걱정말기 바란다. 그런 이야기는 대개 발굴자들에게 따라 다니는 이야기다.)
앙코르 와트의 첫 인상
"비가 오던 밤이었습니다. 난, 그때 캄캄한 앙코르 와트 사원의 지성소 부근에 누워 있었습니다. 천둥은 하늘을 가르고 세상은 번개에 의해 암흑과 빛으로 갈라지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웬지 무섭지가 않았어요. 어떤 희열을 느꼈지요.......그건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때 난, 이것이 꿈이다라고 생각했지요. 맞아요. 난 첫날 앙코르 와트와 바이욘 사원을 본 후 심한 충격과 감동에 젖어 잠을 자다 꿈을 꾼 것이지요. 밖에는 물론 비가 오고 있었구요......그러나 꿈이란 걸 알며서도 깨고 싶지 않았어요. 또 아, 이것이 정말 현실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구요......정말 묘한 체험이었어요. 이승이 아닌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 들었어요.....많은 여행을 해 보았지만 그런 느낌을 가진 곳은 바로 앙코르 와트 뿐이었어요."
앙코르 유적을 여행했던 어떤 한국 여인의 말이다. 이 여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의 여행자들은 그런 충격을 받게 된다. 그 유적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도 이런 충격을 받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별로 없을 것이다.(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밋 정도 ?) 내 경우는 처음 갔을 때, 너무도 충격을 받아서 그저 아무 말도 못한 채 가슴을 두근거리며 취한 듯 걸어다녔었다. 여행 중 매일 일기를 쓰던 나였지만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기괴한 모습들과 정교한 부조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만난 고고학을 전공한 어떤 일본인 친구도 일기를 쓸 수가 없었다 했다. 우리 모두들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잃고 돌위에 걸터 앉아 사원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 이러니 97년 8월 처음 갔을 때의 내 일기장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다. 그저 느낌표만 몇개 있을 뿐.
그리고 1년 후인 98년 7월 다시 갔을 떄야 비로소 나는 무언가를 적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첫번째의 감동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그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약간 소개한다.
솔방울 같은 다섯개의 탑이 보이는 가 싶더니 어느새 세개의 탑으로 변해 있었다. 나머지 두개의 탑은 정면으로 다가올수록 앞의 탑에 가리워져 하나로 보이는 것이었다. 새벽 여명을 받은 하늘은 푸른 기운을 띠고 있었다.
나는 앙코르 와트를 향해 걸어 갔다. 긴 다리가 호수를 가로 질러 있었다. 나는 다리를 건너려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리 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끝에 앙코르 와트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고 그 너머에 솔방울같은 탑이 보이고 있었다. 그림 속에서 숱하게 보아 왔던 그 모습이었다.
평지에 솟아 오른 장엄한 사원과 그 정상에 솟아 오른 솔방울 같은 탑. 호수 건너 아스라하게 솟아 오른 그 사원을 바라보며 나는 신비함 속으로 빠져 들 수 밖에 없었다.
만약 호수가 없었다면 그 신비함은 덜 했을 것이다. 저 푸른 호수 건너의 세상은 다른 세상 같았고 그곳에 우뚝 선 앙코르 와트는 신비한 세계처럼 느껴져 왔다.
나는 심호흡을 깊게 한 후 힘차게 다리를 건넜다. 중간쯤 와서 뒤를 돌아보니 나를 태우고 온 모토 바이크 운전수가 나무 밑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느낌이 들었고 그와 영원히 이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알아왔던 세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신비한 저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두려움이 온몸을 덮쳐왔고 뒤이어 정체를 알 수없는 짜릿한 기쁨이 저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쳐 올랐다.
글쎄, 그곳을 방문하는 당신이 어떤 감동을 받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저 커다란 돌무더기를 올라다니느라 피곤했다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어떤 생각을 하고 느낌을 갖게 될지 그건 당신의 몫이다. 앙코르 와트는 그저 아무 말없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다.
앙코르 와트는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을까 ?
흔히 앙코르 문명은 신비한 문명이라고 한다. 인도 힌두교, 불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인도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이고, 그 정글 한 가운데 그렇게 큰 돌들로 어마어마한 사원을 지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앙코르 와트는 이집트의 피라밋처럼 우주인이 지었다느니, 그 당시 사람들이 초능력을 써서 지었다느니 말이 많다. 물론 그런 말이 나올만한 분위기를 가진 거대한 유적이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그건 12세기 전반, 그러니까 우리의 고려시대 중기에 해당할 무렵, 수리야바르만 2세의 명령에 의해 앙코르 왕국의 백성들이 지은 것으로 약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수리야 바르만 2세는 그 당시 베트남 남부의 참파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힌두교를 국교로 해서 국력이 한창 뻗어나갈 때 이 앙코르 와트 사원을 만든 것이다.
그러면 왜 만들었을까 ? 앙코르 와트는 신전이다. 힌두교의 매우 인기있는 신 비슈누 신을 모신 곳이다.
그런데 앙코르 유적의 모든 사원의 정문이 모두 동쪽인데 반하여 이 앙코르 와트의 사원만 정문이 서쪽인 것이 특징이다. 동쪽은 생명을 뜻하고 서쪽은 죽음을 뜻하는바, 혹자는 이 죽음과 관련 시켜 왕의 유골을 모셔 놓는 기능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천문대였으리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실제로 여름 하지 때 서쪽 정문에서 바라보면 정확히 이 사원의 중앙탑 위로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만든 왕, 수리야바르만 2세의 이름, 수리야바르만이란 태양신의 보호자로 수리야 신은 인도의 힌두교에서 태양의 신을 말한다. 어딘지 연관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
현재 지성소에는 비슈누 신이 아닌 불상이 놓여진 바, 이는 힌두교의 세력이 많이 약화된 15세기 때, 불교 신도들이 갖다 놓은 것이다.
그런데 가장 의문시 되는 점이 바로 어떻게 만들었을까다.
너무 어마어마한 작업이라 여러 추측이 있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앙코르 유적지에서 수십킬로 미터 떨어진 쿨렌 산이란 곳에서 돌을 캐었다. 그돌을 강과 뗏목을 이용해 나르고 다시 앙코르 유적지 근처에서 코끼리가 날라 만들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더딘 작업이었을까 ? 그러니 30년이 걸린 것이었다. 고대 유적지가 다 그렇지만 이렇듯 긴 안목과 끈기를 갖고 작업을 했기에 현대인을 감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우주의 중심 앙코르 와트
앙코르 와트는 우주의 중심 메루산(이것은 후일 한국 불교로 건너오면서 수미산으로 변형된다.) 처음에 초기 유적지인 바콩 사원에서부터 나타난 이런 양식은 자연적인 산을 이용한 프놈 바켕 사원으로 이어지다 앙코르 와트란 사원으로 꽃피게 된다.
힌두교 신화에 의하면 이 우주에는 중심 산이 있는데 이는 히말라야 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 산에는 절대자가 살고 있는데 힌두교의 비슈누파에서는 비슈누 신이 살고 있는 메루 산이라 하고, 시바파에서는 시바신이 살고 있는 카일라사 산이라고 한다.(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계신 수미산) 어쨌든 절대자가 살고 있다는 것인데 앙코르 와트는 비슈누파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메루산을 형상화한 것이다.(비슈누파, 시바파에 대해 알려면 앙코르의 종교 중 힌두교를 참고하기 바란다.) 그 산은 절대자와 함께 많은 신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인간의 세계가 아니다. 메루산을 주변에는 우주의 대양이 둘러싸고 있는데 우리 인간세계는 그 밖에 있다.
그러니 앙코르 와트로 들어간다 함은 이런 신들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하며, 꼭대기에 오른다 함은 절대자가 살고 있는 곳에 다다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앙코르 와트 사원의 수치의 비밀
앙코르 와트는 동서로 약 1,500미터, 남북으로 약 1,300미터의 거대한 사원이다. 이런 평면적인 구조와 수치만 놓고 본다면 별 의미가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앙코르 와트의 구조에는 많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수치에도 또한 비밀과 상징이 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힌두교를 잠시 상기하자.
우리는 이미 힌두교의 비슈누 신에서 살펴 보았듯이 1칼파(겁)는 2천 마하유가이고 이것은 인간의 시간으로 86억 4천만년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1 마하유가는 432만년인데, 그 1마하 유가는 크리타 유가(172만 8천년), 트레타 유가(129만 6천년), 드바파라 유가(86만 4천년), 칼리 유가(43만 2천년)으로 나뉘어지며 크리타 유가 때는 정법의 시대로 인간은 병이 없고 수명은 4천살이며 트레타 유가는 정법의 4분의 1이 없어진 시대로 3천살을 살며 드바파라 유가에서는 2천살을 살고, 말세의 시대는 칼리 유가에서는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고 체력, 지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캄보디아를 아십니까(삶과 꿈. 양기식 지음)'라는 책에서 소개한 것을 인용한다면엘리노브 모론이라는 여성학자가 조사했는데 서쪽 입구와 중앙탑까지의 거리는 1,728 해트이며 이 축선에 연계되는 다른 3가지 거리 수치는 각각 1,296, 867, 439 해트로 나타났다고 한다.
해트(hat)는 앙코르 시대에 사용되었던 거리 단위로서 1해트는 0.4 미터인데 해트로 표현된 이 수치들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힌두교의 크리타, 트레타, 드바파라, 칼리 유가의 비율과 같다는 것이다. (사실 비율이 정확하게 똑같지는 않다.)
자, 수치를 비교해보자.1,728해트는 크리타 유가의 172만 8천년의 1000분의 1이다. 그리고 이 축선과 연계되는 다른 세가지 거리 수치인 1,296 해트는 트레타 유가인 129만 6천년의 1000분의 1이다.
이와같이 각 축선의 길이는 각 유가의 길이의 1000분의 1의 비율로 일치한다.
여기까지는 그런데 다음의 867해트는 드바파라 유가인 86만 4천년과 비교했을 때 그 1천분의 1인 864 해트보다 3해트가 더 길다. 또한 다른 수치인 439 해트는 칼리 유가인 43만 2천년과 일치하지 않고 7해트가 더 길다.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면 864해트, 432해트가 되어야 하는데 그보다 3해트 더긴 867, 그보다 7해트 더 긴 439해트란 얘기다.
(세 축선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지 이 책에서는 나와 있지 않다. 앙코르 와트 중앙에서 동쪽까지, 그리고 중앙에서 남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정확한 표현이 없다. 다음번에 앙코르 와트에 가면 직접 재 보아야겠다.) 이 사원이 비슈누 신을 모신 사원이기에 인도 힌두교의 비슈누파에서 말하는 칼파(겁)와 유가의 시간 단위 비교는 그럴 듯하다. 분명 이런 종교적 건축물을 만들 때는 깊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3해트와 7해트가 더 긴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실수였을까 ? 아니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 그도 아니면 엘리노브 모론이란 여성학자의 실수였을까 ? 아니면 출판 과정에서 잘못된 실수였을까 ? 나는 이것이 여전히 의문이다. 다음번에 가면 이것을 직접 재 볼 생각이다. 혹시 이글을 읽고 가시는 분 중 관심이 있다면 줄자를 갖고 가서 재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