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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필】
꽃의 말
김 혜 경*
내 어린 시절을 더듬어 보면 마당이 넓던 우리 집 화단엔 엄동의 한 계절만 빼곤 철철이 꽃들이 피고 지기를 쉼이 없었다. 이른 초봄의 수선화부터 작약, 붓꽃들, 키 순서대로 길다란 칸나와 담 벽에 나란히 선 해바라기며, 백합, 나팔꽃과 가을 과꽃, 색색의 백일홍, 빠알간 사루비아는 물론이고 맨 앞줄에 앉은뱅이 채송화와 맨드라미들까지, 은은한 색깔로 계절 속 안뜰을 물들이곤 했다. 분꽃 씨를 받던 어머니 모습, 늦은 가을 잘 익은 해바라기를 베어 대청 끝에 걸어 말리시던 모습들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찬이슬이 내릴 무렵엔 산국화를 옮겨 심었던 화단에서 진한 향기가 집안에 퍼졌고, 까슬해지는 마음 속 가을을 서리꽃이 피기 전까지 채워주었다. 지나던 사람들이 종종 사진 한 장만 찍겠노라 청을 할 정도로 꽃밭을 가꾸시는 어머니의 바지런한 손길 덕에 우리 집은 늘 향기의 숨결에 그윽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닌 그 화단이 있던 마당 넓은 집을 긴 한숨과 더불어 남에게 내주시고 아들네가 권하는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이삿짐들 가운데는 당신이 키우시던 다년생 화초들도 당당히 딸려와 베란다를 차지했다. 이사 후 한동안 마당 없는 아파트 생활에 적응을 못하시더니, 계절이 바뀌면서 어머니가 제일 반가워하신 건 다름 아닌 사계절 쉬지 않고 꽃을 피울 수 있는 베란다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베란다 화단은 예전의 마당꽃이 아니라 귀한 온실용 서양 화초들의 점령지가 되었다. 키다리 바키라와 고무나무, 양란이라 불리는 온시디움과 호접란들, 게발 선인장, 에케베리아, 일원금, 키 작은 색색의 바이올렛 등등 이름을 다 나열할 수 없는 다양한 식물들이 발디딜 작은 공간만 빼고는 겹겹으로 화원을 이루었다. 어머니의 손이 닿은 식물들은 유난히 싱싱하고, 탄력 있으며, 그 푸르름이 서로 견주어 노래하듯 진하게 번져갔다.
화초를 대하는 어머니를 보며 주변사람들은 정성이 대단하다 혀를 내두르거나, 탐스러운 식물을 나눠달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어머니처럼 길러내지는 못하여서 도리어 어머니를 서운케 하였다. 그런 외할머니를 보며 작은 딸아이는 동화에 나오는 꽃요정 같다고 했다.
어머니와 달리 나는 식물을 키우는데 재주가 없다. 남들은 보면서도 잘 배운다는데 도무지 내가 기르는 식물들은 어떤 종류를 막론하고 시들거나 병에 걸리거나 뿌리가 썩어 죽어갔다. 몇 번이나 어머니의 화초를 나눠다 심어보고, 시키시는 대로 정성을 보여봤지만 그 생명이 길어야 서너 달뿐이었다. 형님네서 집들이 선물로 보내신 관음죽도 그랬고, 벤자민 고무나무도 그랬고, 남편 승진 때 여기저기서 받았던 난초들도 하나 같이 길게 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누가 화분을 보내오거나 선물로 받게 되면 기쁨보다는 부담이 먼저 생겨났다.
그러던 재작년 겨울 밤, 자동차에 둔 책을 꺼내려 주차장으로 내려왔다가 현관 앞에 있는 화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초저녁 무렵 학교에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무심히 보았던 내 키만한 행운목이었다. 추운 겨울 몇 시간을 떨고 섰을 열대나무가 마음에 쓰여 경비실에 물었더니, 누군가 버리려고 내어놓은 모양이라고만 했다. 혹시 찾는 사람 있으면 연락하라 남기고는 끙끙거리며 화분을 올려왔다. 밤새 얼어죽는 것보다 차라리 내 집에서 죽더라도 따뜻한 곳이 낫겠다 싶었다.
며칠이 지나자 얼었던 잎들이 누렇게 변해 보기 싫어졌다. 가위로 모두 잘라내었더니 네 개의 주가지 끝에 겨우 매달린 대여섯 장의 잎사귀들이 큰 키에 비해 깡초롱해서 우습기까지 했다. 그렇게 거실 구석에서 행운목이 겨울을 났다. 틈틈이 물을 주고, 들여다보고, 새잎이 나오는 걸 아이들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초봄이 되자 좁은 거실이 답답해 보인다며 식구들이 베란다에 내어놓자 했지만 선뜻 그러지 못했다. 그저 바라보면 안쓰러웠다.
그리고 5월 어느 날, 서울에서 오랜만에 어머니가 내려오셨다. 거실 귀퉁이에 벌쭘히 서있는 행운목을 보시더니 점점 눈이 커지셨다.
“어머 얘, 얘, 너 저거 못 봤니? 행운목에 꽃이 피는구나. 십 년만에 한 번 핀다는데, 행운목 꽃을 다 보는구나!”
실하지도 않은 몸 끝에서 꽃가지가 솟아 있었다. 사력을 다해 꽃대를 뻗어 올리며 눈물같은 진액을 흘리고 있었다. 자라는 게 보일 듯 말 듯 그렇게 며칠 후, 흰 눈꽃 같이 작은 꽃송이들을 열며 행운목이 말하고 있었다. 수줍고 진한 잊을 수 없는 향기로, 하얀 혼의 빛깔로, 청초한 자연의 언어로 내 가슴에 울림이 되어 그 말들이 젖어들었다. 정작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머니가 화초들과 나누던 진실한 사랑의 말들을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집 거실에 아직도 그 나무가 서있다.
거울 속의 그녀
어느 날, 무심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보았다. 중년의 여인이 말없이 그 속에서 나를 마주하였다. 건조한 피부와 쾡한 두 눈, 힘을 잃은 시선과 무기력한 표정으로 오래도록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이들과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살아 온 삶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그녀들의 세월 속에 녹아 있었다. 밝아오던 생의 기대와 희망들은 더 이상 두 여인의 몫이 아닌 것처럼 지난 시간이 푸석거리는 서로의 얼굴 속에 새겨 있었다.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들을 되짚으며 가슴 깊은 내면에서 울려오는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른 바람 같은 수척한 목소리, 가을 빈 가지의 앙상한 쓸쓸함을 듣고 있었다. 거울 속의 그녀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결혼을 결심할 무렵, 나는 넘치는 행복으로 새로운 삶을 향해 꿈을 키웠다.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다는 충만한 가능성에 싱그러웠다. 결혼이 그 연장선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꿈만 꾸던 연두빛 신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첫 애를 임신했다. 심한 입덧으로 ‘어머니의 길’을 고행하듯 보낸 일 년, 큰애를 낳고 키우며 투박하고 서툴게만 보낸 두 해, 다시 둘째를 얻었으나 죽음을 넘나드는 아기의 투병과 수술을 지켜보며 속속들이 찢기는 어미의 가슴을 겪어야 했던 시린 두 해, ‘이젠 정말 평안하려나?’ 상심과 허약한 정신을 이겨보려 애쓰는 잠깐을 지나 시부모님의 병환과 우려 속에 삭막한 나를 보아야 했던 다시 삼 년, 그리고 내 고단한 삶의 지주이며, 기둥이 되어주셨던 사랑하는 친정아버지의 별세.... 크고 작은 세월의 고개 너머로, 돌아보니 어느덧 지금이었다.
거울 속의 그녀는 말이 없었다. 앉은자리에 그대로 정지된 듯 불편한 기억들만 미간에 모았다. 그녀의 옆구리 한 켠으로 스쳐 부는 허허로운 바람 자락에서 지친 숨소리가 섞여 나왔다.
▥ 불가(佛家)에 ‘업’이라는 말이 있다. 중생이 몸으로 행하거나 입으로 행하거나 또는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모든 소행을 말함이며.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도 ‘업’이라 한다. 고여 오르는 생각들 사이에서 나는 내 지난 삶들이 그 ‘업보’라고 여겼다. 전생에 지은 소행들을 현세에서 받는 것이라고, 아니면 어린 시절 또래에 비해 유달리 아늑하고 넉넉한 복을 누렸던 댓가였으리라 여기고 싶었다. 그도 아니면 세상이 호락하고 만만치 않으니 단단하고 굳세어지라는 단련의 시기쯤으로 여기고도 싶었다.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들에 누군가를 무심코 상처 주었거나, 고통받게 하였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아픈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삶의 무게는 너나없이 비슷하다. 어떤 이는 병들거나 못난 자식 때문에, 어떤 이는 빗나가거나 인간다움의 중심에서 비껴 선 배우자로부터, 또 어떤 이는 세상이 금 그어 준 궁핍함 때문으로 다들 그렇게 힘겨운 짐들을 하나씩 둘씩 지고 간다. 그런데 그 짐스러움들이 누구나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정해진 무게라고 하니 삶은 누구든 살아낼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격정의 혼돈과 고통 속에 절망하다가도 잠시잠시 행복한 미소를 짓기도 하고, 등에 짊어진 무거움을 벗는 가뿐함의 시간을 얻기도 한다. 그것도 불가(佛家)로 말하면 ‘업’일 게다.
나는 내 삶의 반생 즈음을 살았다. 살아 온 생 중의 또 그 절반은 매우 편안했고, 포근했고, 아침 햇살처럼 여유로웠다. 나머지 절반은 내 속뜰의 꽃을 피우기 위한 단비였으며, 바람이었으며, 뜨거운 여름 볕이었다. 시시로 어떤 ‘업’을 쌓으며 사는지 깨닫지는 못하여도 베풀며 나누며 선을 행하였다면 나머지 삶은 두려움에서 거두어질 것이다. 이제 아무것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은 어떤 ‘업’을 쌓아야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기 때문이다.
▥ 그녀는 다시 거울 속에 앉는다. 거울 밖의 나를 가을 햇살처럼 바라본다. 은은한 부드러움이 두 여인 사이에 맴돈다. 지나온 날들은 최선을 다했던 소중한 삶이었으며, 벅찬 의미였으며, 고통스럽던 만큼 값진 기쁨의 시간이었다. 그 때문에 돌아볼 가치가 있는, 생을 밝혀 줄 추억거리가 되었다.
긴 여름이 지나고 거두어들일 추수거리가 널려있는 들판의 풍요로움처럼 내 생이 그렇게 익어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가을이 오기까지 지난 날들은 몇 번의 성난 태풍과 서러운 폭우, 폭염의 무더위와 씨름하며 보낸 시간이었음을 이제는 느끼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나를 찾는 일, 행복이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투명한 가슴으로 세월을 읽어 내는 것, 지나 온 날들이 오히려 감사함으로 다가오는 것, 그래서 내 삶을 다시 시작하려는 홍조의 얼굴로 마주하는 것, 거울 속의 그녀가 오늘 나를 향해 웃는다.
* 서울 출생 / 2003년 <문학공간>으로 등단 / 한밭대학교 강의전담 교수 / lucia0359@hanmail.net
딸 이름, 손녀 이름
신 강 남*
내 딸의 이름은 신아미(申雅美)이고, 1980년생으로 금년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이렇게 내 딸의 인적사항을 과감하게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은 혼기가 찬 딸아이의 배필을 구하기 위함이 절대 아니요, 단지 내가 심사숙고하여 지은 상표(?)가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아니하고 동사무소에만 등록하였다는 경미한 실수로 인하여 오래 전부터 무단 도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전혀 구제 받거나 타인의 도용을 막을 길이 없어 이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차에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함이다(쓰고 보니 독립선언문 같다).
앞에서 밝혔듯이 내 딸은 1980년생인대 내가 딸 아이 이름을 지은 것은 그보다 10여 년 전인 1971년 대학 4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혹자는 장가도 가지 않은 놈이 딸 이름부터 지었다니 미친놈으로 치부하고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으나 사실이 그러한 것을 어떻게 하나.
사연인즉슨 이렇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대학 4학년 때인 1971년 2학기 개강 직후, 재미없고 취업시험과는 무관한 과목의 오후 강의시간으로 기억된다. 새벽까지 늦도록 취업시험공부를 하던 계절이어서 점심식사 직후의 강의시간은 아무리 명강의라도 졸음이 아니올 수 없는 터에, 들으나 마나 한 과목이지만 결석은 용납되지 않는 엄한 학칙에 어쩔 수 없이 출석하였다. 교수님의 강의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졸음을 쫓기에 여념이 없던 시간에 잠을 쫓기 위해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필기구였던 모나미볼펜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딴 짓을 하던 중 볼펜에 새겨진 모나미(Mon Ami)라는 글자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불어인 Mon Ami가 영어로는 내 친구(My friend)라는 뜻이고, 불어 발음은 “몽 아미”로 읽힌다는 것을 짧은 불어실력으로 알고 있는 터라 “아미, 아미, 아미”를 몇 번 되뇌어 보면서 여자아이들의 한글이름으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글이름으로는 어울리는데 한문으로는 적당한 글자가 없을까 궁리를 거듭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급우 중에 국민학교 졸업식 때 개근상으로 면장님으로부터 부상으로 받은 옥편을 신주단지같이 지니고 다니는 못된 놈이 있어, 누런 옥편종이를 뒤져 “아”자를 살펴보았다. “우아할 아(雅)”자가 눈에 집혔고 여자아이가 우아하다면 볼 것 없겠다 싶어 “미”자는 옥편도 찾지도 않고 “아름다울 미(美)”자를 부쳐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 신아미(申雅美)”라는 상표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흐믓한 마음에 내가 장가를 들어 딸을 낳으면 이름으로 주어야겠다고 내 마음 속에 꿍쳐 두고 때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아! 그러나 어찌하랴
장가를 들어 첫아이를 낳았는데 사내아이였고, 둘째도 바라지 않던 머슴아이가 연이어 출생하였다. 내가 공들여 지어 놓은 이름은 써먹을 수가 없어 포기하고 말아야할 처지가 되고 있었다. 둘째 아이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새벽에 진통을 시작하자 내 딴에는 딸이기를 기대하면서 복통에 괴로워하는 마누라를 택시에 태워 산부인과로 직행하였다. 분만실에 들어서자마자 고고성을 울렸으며 새벽잠을 설치고 분만을 도운 간호사는 첫개시가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아이 아버지로부터 두둑한 촌지를 기대하여(당시에는 아들을 낳으면 딸의 몇곱절 수고비가 통례였음) “아들이에요, 아들”을 외치며 분만실을 뛰처 나와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젊은 애비라는 놈이 소 닭 쳐다보듯 하며 머리를 외로 꼬아버리니, 이상하다싶은지 슬그머니 분만실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다.
사실 “아들이에요, 아들”이라는 고함을 듣자마자 기쁘기는커녕 “또 아들”이라는 신음소리가 목에 걸렸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표어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며 산아제한을 국가시책으로 강력 추진하던 시절이라 셋째는 생각지도 못하고 “아미”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영영 써먹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폐기처분하고 말았다.
그러나 누가 알랴! 창조주의 오묘한 섭리를....
당시 나는 전남 여수에서 공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늦게 퇴근하여 집에와 보니 마누라가 집에 없었고 기다리다 지친 나는 입에 욕을 가득 머금고 “들어오기만 해봐라”를 읆조리고 있었다. 그런데 밤늦게 들어오는 마누라의 표정이 예전에 전혀 보지 못하던 환히 웃는 모습이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하여 웃는 얼굴에 침 못밷는다고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궁금하여 “왜 그래, 무슨 좋은 일 있어”를 연발하며 마누라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나 평소에도 자물통인 마누라 입에서는 종내 답을 듣지 못한 채, 세월만 흘려 보내고 말았다. 그러다가 어찌 어찌하여 마누라가 또 임신을 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사실에 경악한 시어머니를 비롯한 친인척들이 곱지 않은 눈총을 주었으나 우리 마누라는 마냥 싱글 벙글이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산월이 가까이 오자 마누라의 신체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다. 팔,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지 않는가. 일명 임신중독이라나 뭐나, 좌우간 잘못하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주위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놀란 시어머니를 비롯한 주변사람들이 백가쟁명으로 명약을 추천하였는데 그 중에 선택된 것이 “잘 익은 늙은 호박”이었다.
하여, 철지나 늙은 호박을 아주 비싼 값(당시에는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다)에 구입하여 시어머니께서 정성 드려 호박죽을 쑤어 며느리를 공괘하였다. 곁에서 몇 공기 얻어먹은 나는 강한 이뇨 효과로 연신 오줌만 질금거리며 화장실 출입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중 출산 일이 가까울 무렵 서울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밤늦게 대전역에 도착하자마자 은근히 출산여부가 궁금하여 집에 전화를 걸어보니 이웃집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고서는 “빨리 ○○병원으로 가라, 산모가 위험하다”는 것이 아닌가.
“아! 이제 내가 홀아비가 되는가 보다”는 생각이 들며 양어깨가 힘이 빠져서(남들은 변호곁에서 미소를 지었다지만 나는 정녕코 아니다) 택시를 잡어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산부인과병동에 확인한 결과 산모도 아이도 무사하였다. 한달음에 병실에 들어가 퉁퉁 부은 마누라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밉기도 하고 안쓰러웠으나 “애기는?”하고 내 딴에는 아기의 무사여부를 근심스레 물었는데 “딸”이라는 한마디만 하고는 싱긋이 웃어 주지 않는가. 지금 생각하면 나도 꽤나 싱거운 놈이었던 것 같다. “딸”이라는 단음절을 듣고 나니까 웬지 입이 옆으로 벌어지는 느낌이었고 산모의 건강보다는 슬며시 아이가 먼저 보고 싶은 것이 아닌가. 계집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머슴애하고 얼굴이 다른가? 등등이 궁금하여 내일 아침 보여주겠다는 간호사의 만류를 간절히 굴복시키고 기어히 유리창너머로 아이를 보았는데 사내와 똑같이 생겼고 얼굴은 오빠들 보다 더 검지않은가? (임신 중 늙은 호박을 먹으면 피부가 검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음)
이렇게 힘들게 나는 사랑하는 딸을 얻었고 신아미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사용케 되었다. 후일담이지만 내가 퇴근 후 마누라가 집에 없어 화가 잔뜩 났을 때 늦게 집에 돌아온 마누라가 싱글벙글한 것은 임신한 것을 인지한 마누라가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하여 여수에서 왕복 4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광주의 유명한 한의원에 가서 진맥한 결과 딸이라는 판정을 받고는 기뻐서 줄곧 웃었으나 천기가 누설되면 아니될까봐 나한테까지 숨겼다고 고백하였다. 단언컨에 70~80년대까지는 “아미”라는 상표도 상호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우아미 가구”가 나타나면서 “아미 미용실”, “아미 부띠끄”, “아미 ○○○”등이 연달아 생겨나더니 최근에는 서울에서 대형 호텔의 이름으로까지 등재되어 나를 화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내세운 법치국가인데 상표등록을 하지 않았으니 혼자 화를 내며 종주먹을 허공에 흔들어 보아야 나만 피곤하지 소용없는 일이어서 공존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 어린아이들이 성년이 되었다. 나도 오십이 훌쩍 넘어 친구들이 사위, 며느리를 보기 시작하더니 근자에는 손자, 손녀의 귀여운 모습을 자랑하기 시작하면서 평소 어린아이들을 별로 예뻐하지 않던 내가 주변의 어린아이들을 보면 귀엽게 느껴진다. 길거리에서 처녀, 총각들을 볼라치면 “내 마음속의 며느리, 사위 상”에 대비하면서 “저 처녀는 키가 너무 커”, “저 애는 얼굴은 예쁜데 게을러 보여, 틀림없어”, “맏며느리는 살집이 좀 있어야 하는데 저 애는 너무 말랐어”, “저 녀석은 몸은 튼튼한데 산적같이 생겼어”, “저 친구는 머리는 좋다는데 마마보이같애, 마마보이는 징그러워” 등등 나름대로 며느리감, 사위감으로만 보이기 시작한다.
또한 책이나 잡지, 신문 등을 읽으면서 괜찮은 이름이나 단어 등등을 접하게 되면, 손자, 손녀의 이름으로 적당하지 않나 살펴보는 버릇까지 생겼다. 최근에서야 “이거다” 탄성을 울리며 작명을 완료하고 흐믓한 마음으로 신○○, 신○○을 손자, 손녀의 이름으로 지어놓고 흥겹게 되뇌이고 있다.(미안하지만 이번만은 상표도용을 사전 차단함과 동시에 상표등록 후 완전한 권리행사를 위하여 사전발설을 절대하지 않기로 작심한 연유로 ○○으로만 표기하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람)
그런데 문제는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지 않겠나. 요즈음에는 생활이 편리해져서 남녀 각각 혼자 살아도 불편이 없다. 경제적으로도 서로 독립생활이 가능하여서인지 혼인을 기피하는 풍조이다. 결혼하여도 3-4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니 부모입장에서는 “보내도 걱정, 가지 않아도 걱정”이다.
그러나 내 딴에는 “우리 가문에는 이혼한 사람이 없다”는 화려한 경력을 믿고 지난 추석연휴 때 삼 형제 모두를 앉혀 놓고서는 각자의 의중을 타진하였다. 제일 먼저 금년에 대학을 졸업한 딸아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한적이 있고, 얼굴은 보지 못하였으나 딸아이의 말을 종합분석컨대 가정형편이나 내력도 괜찮고 성품도 좋은데 나이터울이 조금난다 싶은 약점이 있단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내 딴에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남자친구 계속 만나니”하고 묻자, 대뜸 나오는 대답이 “졸업하고 몇 번 만났는데 결혼하자는 말이 나와서 안만나기로 했어”, “아니, 너 그 청년집에 가서 어머니도 만났다며”하고 실망스럽게 되묻자 “나는 친구집에 놀러갔지 그 이상 의미는 없었어” 하는 것이 아닌가. 실망에 겨운 나는 “아빠는 외손자 이름까지 지어 놓았는데” 하며 절망 어린 신음을 토하자 “아빠, 미안하지만 외손자 보시기는 힘드실 거예요” 하며 빨리 이야기를 끝내자는 표정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둘째 녀석인데 대화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화살이 자기에게 날아올 것이라는 것을 사전 인지하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아버지, 저는 35세 이전에는 죽어도 장가안가요. 손자는 장남인 형이 있으니까 형님한테서 보셔서 할아버지되세요” 하며 도망갈 태세이다. 나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로 “왜 35세 이전에는 안 간다는 것이냐”고 다그쳐 묻자 “아버지, 어떻게 한 여자와 30~40년을 같이 살아요. 저는 지루해서 못살 것 같아 아예 늦게 장가들어 이혼하지 않고 살려고 그래요”라는 대답이다. 이런 제기럴...
하두 기가 막혀 더 묻지도 않고 곱지 않은 시선을 큰놈에게 돌리자 애비의 심사가 많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29살인 큰놈 왈 “가긴 가야죠, 그렇지만 좀더 준비를 한 후에 가야지 잘못하면 여자한테 무시당하고 최악의 경우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불효자식되어요”하며 거절인지, 안간다는 이야기인지, 공갈인지, 좌우간 아리송한 대답으로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가.
이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로마의 씨이저가 양아들 부루터스의 칼에 찔려 살해될 때 뱉은 말 “너 마저”였으니, 나의 심사를 여러분, 특히 혼기를 앞둔 자녀를 두신 분들은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다.
좌우간 지금 분위기로 보아선 힘겹게 지어 놓은 손자, 손녀의 이름이 사용될 가능성이 당분간 희박해 보여 이 가을에 나를 슬프게 한다.
조수미씨가 정선 아리랑을 부른다면
사람은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는가 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지 알 수 없으나 나의 경우 조금은 도가 지나치지 않나 싶을 때가 있어 시간이 지나 온전한 생각으로 정신이 정렬되었을 때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지”하며 혼자 실소를 하곤 한다.
며칠 전 대전에서는 아주 규모도 크고 멋진 문예회관이 준공되었는데 개관기념공연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높이고 있는 우리나라의 보배로운 성악가 조수미씨가 초청되어 시민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나는 그 날의 개관기념공연에서는 가보지 못하였지만, TV로 그녀가 초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지고 있던 조수미 CD를 걸어 놓고 오랫동안 감상하면서 어떻게 저런 명주실 같은 가녀린 고음을 낼 수 있을까 전율하면서 감상을 하였다. CD를 걷어내면서 문득 “조수미씨가 정선아리랑을 부른다면”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고는 스스로를 그 정경 속으로 생각을 계속 침잠시켜 보았다.
내 개인적인 판단이나 감상법으로는 조수미씨는 고음 소프라노로 노래를 부를 때 가장 듣기도 좋거니와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정선아리랑은 강원도지방의 비탈진 감자밭을 호미질하며, 쟁기질하는 이름 모를 논투성이들이 애환을 실어 불러 주어야만 가장 듣기가 좋지 않은가 여겨진다.
또 다른 엉뚱한 생각 하나로 자장가를 생각해 본다.
아기를 재울 때 정이 듬뿍 실어진 투박한 할머니의 손으로 가슴에 안겨진 손자, 손녀의 몸을 다정스럽게 두드리며 불러주는 할머니의 웅얼거리는 듯한 자장가가 아기를 빨리 재울까? 아니면 아름다운 목소리 테너, 바리톤, 소프라노를 멋지게 불러주는 자장가가 아기를 빨리 재울까? 아마도 단연코 할머니의 웅얼거리는 듯한 자장가일 것이다.
물론 조수미씨와 같은 유명한 성악가들은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많은 팬들이 있어 그들에게 감동을 주겠지만 정선아리랑과 같이 작사, 작곡,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민초들의 가락도 조용히 들어 보면 우리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욕심을 절제케 하며, 다가오는 생을 관조하여 볼 수 있는 한가로운 상념에 젖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몇 년 전부터 TV시청자들로부터 인기가 있는 “열린 음악회”는 유명한 성악가, 대중가수들을 출연시켜 유명세만큼의 즐거움을 시청자들에게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송해”라는 연세 드신 MC가 너스레를 떨며 진행하는 “전국 노래자랑”을 보면 그들 또한 “열린 음악회” 못지 않은 즐거움과 사랑을 보는 이에게 주고 있지 아니한가. 혹자는 외국의 유명한 오페라나 가곡을 감상하거나 열린 음악회에 참석하여 즐기는 사람은 상류사회에 속한 부류이고 정선아리랑이나 흥얼거리고 전국 노래자랑에 출연하여 즐거움을 만끽하는 자들은 하류인생으로 분류하는 사람이 혹여 계실지 모르나 과연 외국의 오페라를 정확히 이해하고 감상하시는 분이 몇 분이나 계실지 솔직히 자문자답하여 본다.
창조주께서는 세상 만물들을 너무나 공평하게 지으셨다. 조수미씨 같은 분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우리들을 즐겁게 하여 주고 있지만 텁텁한 목소리로 “두만강 푸른 물” 한 곡으로만 거의 50년 이상을 우리들을 즐겁게 하여 주시던 고 김정구씨도 세상에 살게 하셨다. 또한 조물주께서는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각자의 지문이 다르듯 각자 특유의 재능을 우리에게 주셨다. 매년 수해를 당하면서도 농토만을 고집하시는 농부가 계시고,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바다에서 고기를 건져 올리시는 분들이 계시다. 사기나 절도, 대가성 없는 정치자금으로 교도소에 수감되는 사람이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선하고 바르게 살라고 교훈을 주시는 재수 없는 피조물이 계시는가 하면, 일생동안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온갖 못된 짓을 하고도 건재하시는 재수 좋은 놈들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모든 것들을 감싸안고도 여전히 세월을 회전시켜 이 가을에도 푸르른 하늘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조석으로는 상쾌한 공기맛을 볼 수 있게 하지 않은가. 마치 오케스트라의 수많은 종류의 악기들이 조화를 이루어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내고 합창단의 테너, 소프라노, 앨토, 베이스 등의 각 음이 혼합하여 장엄한 합창을 이루어 내듯, 세상의 온갖 피조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각의 재능을 발휘하여 조화를 이루어 낼 때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살만하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 서로 사랑하자. 조수미씨도 사랑하고 음치인 신강남도 사랑하여 주자.
사람뿐 아니라 식물과 곤충,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쉬거나 숨을 정지하고 때를 기다리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자.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지 않은가.
또 괜시리 엉뚱한 생각을 하였나 보다.
* 대전 출생 / 수필가 / 양현재학사 대표 / kangnam1945@hanmail.net
아이를 통해 느낀 가을
김 현 주*
잠든 작은아이 방의 불을 켜주러 갔다가 우연히 눈이 간 아이의 책상 유리 밑에 곱게 물든 단풍잎 네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치 거실 액자 속의 우리 가족사진처럼 넷이서 나란히....
“어머 사내 녀석이 제법이네. 이런걸 주워다 넣을 줄도 알고....”
너무도 뜻밖의 발견에 난 가슴이 뭉클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사느라 가을이 깊어 단풍이 이토록 곱게 물든 줄도 모르고 지났는데...
아이를 통해 새삼 가을을 느껴본다.
어디서 주었을까? 빨간 이 예쁜 단풍잎들을.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며 이걸 주워다 책상 밑에 넣어 두었을까.
아이의 눈에 띄어 주워 들게 한 이 가을의 명함들.
아이한테도 계절이 오고 가는 길목의 소리가 도란도란 들린 걸까?
아님 떠나가는 가을의 스산함이 와 닿았던 걸까.
곤히 잠든 아이의 침대 맡에 앉아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한없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꿈나라를 여행할 그 녀석을 따라 나 또한 눈을 감은 채 앞으로 자라면서 변화할 내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내겐 연년생의 남매가 있다.
직장을 다니느라 내 친정 할머니가 함께 계시며 아이들을 키워주고 있다.
칠순이 넘은 연세이심에도 불구하고 연년의 아이들을 힘들단 말 한마디 않으시고 사랑과 정성을 다해 돌봐 주시기에 나는 마음 놓고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내가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애정 어린 보호를 받고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행복하리라.
그럼에도 늘 엄마의 정, 손길, 엄마와의 시간이 아쉬운 아이들.
그래서인지 우리 아이들은 무엇이든 엄마하고 함께 이길 원한다.
노는 것, 먹는 것, 심지어 잠자는 것까지.
어느 해 방학이었던가, 아들 녀석이 일 학년 때인가 보다.
저희들은 집에 있는데 내가 출근하려 하니까 아들 녀석이 불쑥 내 앞을 가로막고 서더니
“엄마 회사 끊어. 엄마회사 꼴았어. 방학도 없구.” 해서 출근길 내내 서글펐던 적이 있었다.
하나를 얻으려다 더 많은걸 잃고 사는 건 아닐까 종일 우울했다.
아이들이 자라면 엄마의 손길도 덜 필요하려니와 나 또한 아이들의 자라는 예쁜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지금 이 순간 그대들은 엄마가 필요하고 엄마 품이 그리운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을 생각하면 어른의 작은 욕심으로 어린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감상도 잠시 뿐이리라.
아이들도 자라 저희들만의 세계가 있고 시간을 가지게 된다면 그땐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퇴색될 것이다.
비록 지금 조금 힘들고 아쉽더라도 참고 지내다 보면 좋은날이 오겠지 위안을 한다.
그래도 말을 알아들을 만큼 자라 훨씬 수월했는데 이제 보니 제법 다 자란 듯해 대견하기도 하고 뿌듯하다.
내 상상 속의 딸아인 예쁘고 총명한 숙녀로 자라 발랄하고 싱그럽게 자신의 꿈을 펼치며 아름답게 살아가리라.
아들 녀석은 과묵하고 듬직하면서도 다감하고 사려 깊은 청년이 되어 모두에게 호감을 주며 신뢰를 받으며 멋진 삶을 꾸려 가리라 확신하다.
난 아이들을 부모의 전유물이나 부속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여기며 그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수 있도록 도와주고플 따름이다.
내 아이들은 진정한 행복이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과 이웃을 도우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기 바란다.
또한 가치 있는 일이란 자신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일이란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항상 내게 건강하고 착한 두 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꿋꿋하고 바르게 자라 주길 기도한다.
그들이 있기에 나의 삶이 더욱 빛나고 그 아이들을 통해 내 인생이 완숙되어 감을 느낀다.
또 나와 너가 아닌 우리라는 가족의 의미도....
살아가며 힘들고 어려울 때 내게 희망이 되어주고 용기를 갖게 해주며 살아가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하는 나의 사랑하는 꿈나무.
두 그루가 잘 자라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나 또한 성실한 농부의 마음으로 그들을 양육하리라.
우린 가족을 통해 참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우게 되며 인내와 희생의 고결함을 체험하게 해 준다.
결혼은 어찌 보면 삶의 완성을 위한 관문인 것 같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 부족한 사람끼리 만나 결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결정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 이것이 결혼이리라.
서로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기대며 잘해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상대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베풀며 그 사람의 성장과 성숙을 도와준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조화로운 삶일까
그 사랑의 결정체인 아이들, 신이 준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선물, 그들을 통해 우린 진정한 삶의 의미를 맛보며 많은걸 배우고 깨닫게 된다.
아이를 통해 가슴 가득 느껴본 가을, 이 아름다운 계절, 모두에게 따스한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다. 서로에게 온기를 전해 줄 수 있는 마음으로.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불을 끄고 나왔다. 거실 공기에 가을 냄새가 가득한 것 같다. 커피 향을 닮은 낙엽 태우는 냄새가... 그 순간만큼은 내 마음속에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행복감이 충만하게 차오른다.
* 대전 출생 / 논술학원 원장 / 수필가 / hl3evs@hanmir.com
가 시
양 원 준*
나는 시간이 나면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이다. 평일에도 학교 도서관 건물 뒤편으로 조성되어 있는 등산로를 자주 오르곤 한다. 잘 가꾸어진 등산로를 따라 거닐 때가 어쩌면 내가 가장 아름다운 생각을 하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그 동안 너무나 세상에 찌들어 있었던 탓일까? 어딘가에 매여 있다 잠시 틈을 내 산길을 걷기라도 하면 ‘내가 그래도 자연의 일부였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감마저 인다. 등산로에는 계산도, 질시도 없다. 그 길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교만했기에 고단한 길을 걷고 있는 사회도 아니다. 억지로 만들어지는 세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이용하고, 있는 그대로 어우러져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그리 길지 않은 등산로라지만 그곳에는 나를 반기는 아름다운 자연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까치도, 청설모도 반기고, 새벽 이슬 머금은 풀잎, 그리고 그곳에 줄을 치고 잠이 든 거미도 있다. 이름 모를 버섯도 쓰러진 나무 밑 둥에서 자라고 있다. 이곳의 주인은 그들, 살아있는 자연이고 여기서 나는 이방인일 뿐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자 찾아 온 나그네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나그네로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그들은 일깨워주고 있다. 또한 우리 곁에 있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자연스러움의 아름다움을 잊고 지냈다는 것을 느끼게도 한다. 회색 건물 안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었던 그들, 그들은 억지로 보아서는 결코 자신들을 바라볼 수 없다고 그렇게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자취를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나 대전에서 밥하고, 빨래하며 공부했다. 중학교 때는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겨울철에 찬물로 손빨래라도 할 때면 어린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질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왔다. 그 기간동안 의식주 중 가장 힘든 것을 꼽으라면 그래도 역시 먹는(食) 것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다. 어렸을 때는 그래도 부모님께서 반찬도, 용돈도 보내주셔서 그리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부터는 거의 혼자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생각은 중요한 일상사로 남기에 충분했다. 그런데도 내 요리 솜씨는 10 여 년이 넘게 자취생활을 한 사람치고는 너무나 형편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을 보기라도 하면 가장 흔한 고등어 두 손, 즉 4마리 정도를 사오는 것이 전부다.
시장에서 빛깔 좋은 고등어를 고른다. 금방이라도 헤엄치고 팔딱팔딱 뛸 것만 같은 고등어가 눈에 띄면 소금에 절여서 손에 쥐어진다. 그리고 집에 와 적당히 다듬은 다음 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요리’라고 하기에도 어설픈 ‘요리’를 한다.
맑은 식용유가 검게 변해버리고 방안이 탄 냄새로 가득하면 요리는 끝난다. 그리고 적당한 그릇에 담아 역시 대충 상을 차리고 밥을 먹는다. 식성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환경을 전공한다는 핑계로 습관화된 지독한 구두쇠 기질이 있는 것인지 고등어는 내 젓가락질을 피해 갈만한 곳이 남지를 않는다. 어두일미(魚頭一味)라고 했던가? 지느러미 부분이며, 생선의 꼬리까지도 발라먹는다. 하지만 등지느러미 부분의 잔가시를 발라내기 귀찮아서 혀의 감각만을 믿던 것이 큰 잘못이었다. 그만 가시가 목에 걸리고 만 것이다. 찔끔 눈물이 난다. 물을 마시고 밥을 먹어도, 그리고 기침을 해도 가시는 끄덕하지 않고 오히려 내 신경을 더욱 모질게 자극할 뿐이다. 말을 할 때도, 침을 삼킬 때도 가시는 자신의 존재를 내게 어김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나도 지쳐갔고 자포자기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가시가 계속되는 음식물의 섭취를 이기지 못하고 식도를 통해 그냥 내려간 것인지, 아니면 통증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목의 근육들이 가시를 이물질로 받아들이길 거부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역시 고등어로 늦은 점심을 먹을 때 라디오에서는 정부의 농정(農政)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지금도 어디서 무엇인가를 하시다 도시로 공부하러 간 자식 생각에 마음을 다잡을지도 모르고, 쌀값 불안정으로 인해 깊은 시름은 더해만 가지만 그러면서도 오로지 자식 걱정만을 하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났다.
어머니도 식사시간에는 항상 그랬다. 갈치나 명태를 드시더라도 어머니 앞으로는 살이 얄팍한 꼬리 부분과 등지느러미 부분만이 남았고 그것을 다 발라 드시고야 상을 물리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런 어머니께 내가 보여드린 것이라곤 한없는 불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쩔 수 없는 현실 수긍에 대한 미련을 난 항상 어머니께 불평으로 쏟아내곤 했었다.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아 남들 앞에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 하나 없는 것도 못내 아쉬웠고, 대전으로 전학 온 뒤로는 남들 다 다니는 학원에도 못가는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처럼 분식집에라도 가서 어울리고도 싶었지만 선약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다고 둘러대며 돌아설 때, 한겨울 연탄보일러가 고장 나 추위에 떨려서 성탄절 등 연말을 보낼 때면 자취집 주인아저씨보다는 부모님이 더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난 어머니께 항상 어린 아이요, 철없는 자식일 뿐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그 모든 원망을 혼자 감내하시면서 오로지 미안하다며 등을 돌리기만 하셨고 내가 어머니께 드린 말씀들은 결국에는 어머니 가슴에 생채기로 남을 ‘가시’가 되고 만 것이다.
내가 쏟아낸 무수한 원망과 아쉬운 소리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가시가 되어 어머니 가슴을 도려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모든 투정을 사랑으로 승화해 내셨다. 나는 내 목에 걸린 조그만 가시 앞에서도 눈물이 날 정도로 괴로워했다. 교수님이나 친구들이 던진 의미 없는 말도 곱씹고 내쉬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머니, 당신의 능력으로는 절대 감내할 수 없는 나의 투정을 모두 받아내셨다. 아무런 변명도 대지 않으셨고 오로지 내게 ‘절대믿음’만을 보내주셨다. 그 믿음으로 날 여기까지 인도해주셨고, 쓰러질 정도로 괴로움에 떨던 날 일으켜 세우셨다. 어머니께서는 언제부터인가 시장 바구니에서 고기를 멀리 하시고 그 자리를 콩나물로 대신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언제서야 느낄 수 있었을까? 어머니께서는 내 어깨를, 내 가슴을 더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었을 텐데 나는 그것을 더 부담스럽게, 아니 부끄럽게 여기지나 않을까? 어머니께서는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셨지만 나는 그 사랑을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마음등(燈)을 켜고 지켜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계산을 한 뒤 취사선택하지나 않았을까? 어머니께서는 인내와 쓰라림, 허탈감 그리고 사랑에 대한 굶주림을 모두 받아내셨고 그 대신 용기 없는 못난 자식을 위해 당신의 모습을 점점 낮추는데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 속에서 어머니, 당신의 인생이 베어있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즐기면서 승화해나갔을 것이다.
고등어를 발라먹으면서 내 ‘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등산로 주변의 자연은 보잘것없게 여겨졌지만 그곳은 나무와 풀, 뿐만 아니라 많은 이름 모를 생명체들의 안식처였듯 내 곁에 있는 이 또한 내 삶에 있어 눈에 뛰지는 않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될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처럼 억지로 보아서는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외면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학교 뒷산의 등산로에는 억지로 보아서는 결코 바라볼 수 없는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이 땅의 소중함을 다시금 내게 일깨워주고 있다. 이름 모르는 풀들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를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나 자신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표를 제시해주는 것이 아닐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디를 향해 줄달음질쳤는지 모르는 나 자신의 길이 너무나 안타까웠음을, 질투와 시기에 쌓여 정말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았음을 일깨워주고 있듯 또한 어머니의 존재가 그런 모습이 아닐까 “바보같이 어리기만 한 못난 자식을 위해 가시가 주는 고통마저 즐기셨을 어머니. 때늦은 식사를 하면서 나 역시 그 누군가를 위해 또 다른 ‘가시’가 주는 의미를 키워야함을 깨닫는다. 억지로 보아서는 느낄 수 없는 어머니, 당신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가을이 깊어갈 때면
지난 2000년 가을이 깊어갈 즈음, 거북이는 죽었다. 그리고 대학 교수님 연구실 앞 화단에 묻혔다. 아침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새벽에 거북이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난 96년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교수님 연구실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2001년 7월말까지 함께 했다. 군 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2년 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또 잊지 못할 추억도 많이 안겨 준 시간이었다.
연구실에서의 생활은 힘든 가운데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시간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퍽 단순한 하루 하루가 주어졌을 때 ‘혼자’라는 외로움을 털어 낼 자아를 찾는 일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수님과 며칠 밤을 지새우며 프로젝트 보고서에 매달리는 일도 많았지만 그 외 시간을 얼마나 알차게 보내느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연구실에 있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그로 인해 차츰 내성적으로 변한 자신을 찾기 위한 방법도 터득해 나가야 했다.
그 때 가진 취미가 거북이를 키우는 일이었다. 서울에 살고 있던 형이 준 거북이를 연구실 창가 모퉁이에 마련된 작은 어항에서 길렀다. 연구실 식구들과 상견례도 시켜주었고 그들 역시 처음 대하는 거북이에 대해서 모두 호감을 갖고 대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거북이 역시 처음에는 먹이도 먹지 않고 낯선 환경에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머지 않아 자연스럽게 자라주었다.
거북이에 대한 애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갔다. 시간이 나면 인근 금수봉 자락 수통골에 가서 민물고기도 잡아 주었고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운 날 새벽이면 호주머니에 거북이를 넣고 안개 낀 학교 뒷산 등산로를 거닐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기도 했다. 때로는 다른 연구실 선배들이 와서 거북이를 발로 차는 등 짓궂은 장난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거북이는 내 마음을 아는지 잘 견디고 하루 하루를 함께 해주었다. 이곳에서는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박사님의 말씀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런 거북이에게 이상한 징후가 있었던 것이 이 맘 때였다. 보령지역으로 샘플링을 갔다 온 뒤 프로젝트 보고서 작성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니 한동안 거북이에게 멀어졌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모처럼 대한 거북이 눈이 잠겨 있었다. 자연스레 먹이도 먹지 못했고 그렇게 혼자 작은 사각 어항에 쌓아 둔 모래언덕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직은 물이 깨끗하다 싶었지만 전보다도 더 자주 물을 갈아주었고 먹이도 다시 주었지만 그래도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시내 수족관에 가서 문의해보니 ‘비타민A 결핍증’이라는 병에 걸렸고 안타깝게도 치료할 시기를 놓쳤으며 곧 있으면 죽을 것이라는 말만을 들을 수 있었다.
“거북이가 아직도 살아있니?”
“!….”
너무나도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그러나 날씨와는 반대로 정말 잔인한 그 말을 듣고 온 날, 손안에 있는 거북이를 보여주며 학과 친구에게 거북이 소식을 전해주니 그 친구가 한 말이었다. 참으로 무심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거북이가 내게는 참 좋은 벗이었건만 그렇게 무정하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손안에 있는 거북이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환경을 전공하고 더 나아가 환경운동을 하고 싶다는 친구의 입에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떠나 그렇게 쉽게 말이 나올 수 있을까? 나의 확대해석이 지나친 감도 없진 않았겠지만 참 슬픈 날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수족관 아저씨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거북이는 끝내 죽었고 신문지에 쌓여 내 곁을 떠났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우주 속 이슬만이 내려앉은 새벽에 그 거북이가 묻혔을 때 ‘괜히 박사님 말씀을 멀리 했구나.’ 하는 후회도 일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이상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 다짐도 했다. 그것은 박사님이나 내 친구도 내가 거북이에게 마음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나 역시 뒤늦게나마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민물고기를 잡아주고 함께 해주었다고 전부는 아니었다. 일광욕이 필요한 것도 몰랐고,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더구나 수온에는 관심 한 번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거북이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환경에만 신경 쓴 결과 거북이는 내 곁을 떠났고 그 생각은 거북이에게 맞는 환경을 모르고 한가지 잣대에 묶여 있던 나 역시 ‘외눈박이’에 불과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카피라이터로 근무하고 있지만 환경을 전공한 후로 많은 것을 깨닫곤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무관심했던 우리 사회를 여유를 가지고 돌아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는 것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흔히 ‘자연형 하천’은 우리 주변의 하천을 있는 그대로만 보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변해 가는 주위 환경에 견딜 수 있게 적당히 사람의 손길이 더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혹 소외되고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분들도 한민족의 피를 받고 태어난 이 땅의 형제, 자매요 아들, 딸들이라는 것과 그 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삶의 가치도 더욱 빛난다는 것도 말이다.
지난 2000년에 죽은 거북이는 내 곁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죽음이 주는 교훈은 시간이 훌쩍 뛰어넘은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있다. 더 이상 민물고기를 잡아줄 일도 없고, 함께 산길을 거닐 일도 사라졌지만 그 때 느낀 짧은 생각과 흔적은 텅 빈 사각 어항에 그대로 남아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제 삶의 외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언젠가 안도현님의 ‘연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초록강이 은빛연어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삶의 의미란 다른 사람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단풍이 들고 낙엽마저 떨어지는 가을이 깊어갈 때면 거북이가 내게 던진 그 ‘삶의 의미’와 ‘배경’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 충남 서천 출생 / 카피라이터 / dasomwj@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