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로(初老)
홍 건 표*
잘 가소
방황하던 내 젊음이여
계절은 옷을 갈아입고
매화는 길 떠날 채비를 하는데
사철 머물지 못하는 바람 따라
종점도 모르고 달려온
인생의 파노라마
지난 생애의 길 위에
주소 없는 편지만 띄웠구려.
이젠 긴 여로에서 돌아와
재가된 시간을 여미는
밤의 가슴으로
별의 온기를 모아
잠들 듯 쉬시구려
나팔꽃
땡볕
양기 감아 올려
그려 꿈꾼 사랑의 잎새
삼복
여명이 몰려오면
친정 나들이 되집어 가는 길에
나․팔․꽃
* 충남 서천 출생, 시인, 2003년 ≪해동문학≫으로 등단, kunpye@hanmail.net
볕 좋은 날
홍 성 찬*
장맛비 멈추고
앞산 너머로 요술처럼
먹장구름 사라진 날
뼛속 깊이 박혀있던 슬픔과 욕망을 꺼내
볕 좋은 툇마루에
가지런히 펼쳐 놓을까보다
참새 한 마리 앞마당에 앉아
튀어 오르는 햇빛 알갱이를 쪼아대는
볕 좋은 날엔
이제껏 한번도 환하게 웃어보지 못한
희망도 꺼내
봉당에 널어 말릴까보다
들창문 열고 갓난아기 볼때기 같은 햇빛 들어와
주인처럼 아랫목 차지하고 덩달아
한줄기 바람도 설렁설렁 장난치는 날
오래도록 가슴 속에 묵혀 두었던
곰팡내 나는 그리움도 꺼내
에둘러 햇볕 한 움큼 쬐일까보다
모 래
모래라고 불리기 전에도 모래였을까
서로 부대낄 만큼만 인연을 허락하는 알갱이들
그 자유로운 구속이 정겹고
서로 떨어질 만큼만 간격을 유지하는 알맹이들
그 구속된 자유가 아름답다
한 톨로 남아도 언제나 모래일 수 있는
그 당당함이 진지하고
한 알갱이 모여 거대한 언덕일 수 있는
그 진솔함이 고귀하며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모래로써 시계도 되고 빌딩도 될 수 있는
그 작은 영원함이 위대하다
하얀 조가비 하나
푸른 사금파리 한 조각 포용하듯
낯선 나를 조용히 끌어안고 있는
그 세심한 관용이 여유롭고
노랑 부리 갈매기
쉬지 않고 싱싱한 삶을 건져 올리듯
상큼한 바닷물로 목 축이는 희망가가 우렁차다
모래라고 불리던 이후에도 모래일 수 있을까
바그다드의 안개
바다 건넌 사막의 폭풍
모래바람 뽀얀 얼굴로 달려와
승냥이 게걸스러움에 겨워
살육의 습성
야만의 역사되어
거기 모래 알갱이
속속들이 미쳐가고
죽음으로 가는 외마디 비명
목숨 대신 찢겨 나간 살점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의 예감도 없이
횡사한 어린 병사의 영혼
살아서 원통한 늙은 어미의 절규
구천을 떠도는 핏빛 노을 되고
죽음을 부르는 나팔소리
인육에 길들여진 새하얀 이빨
입맛 다시며 목청 돋우는 진군가
살인의 마당축제 밝히는 불꽃놀이
서양배우 속살 같은 화약 연기
바다 건넌 사막의 폭풍
피범벅 찬란한 안개 되어
기만의 바그다드
싸늘한 모래벌 위에 눕는다
* 경기도 가평 출생, 시인, 서일고 교사, toet02@hanmail.net
묵비권
박 종 빈*
“죄 짓는 것 같아서···”하며
그 중에서 제일 뚱뚱한 사내가
남은 음식을 모두 먹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보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사실 음식을 남기는 것이 미덕인 때가 있었다
침묵은 배고픈 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남은 죄를 모두 거두는
배부른 남자
“꼭 죄 짓는 것 같아!”
여자의 속삭임에
로또판매점 형광등 불빛이
눈 부신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서두르는 사내
묵비권은 억울한 자의 절규라고 생각하며
숫자로 나열된 욕망들을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은 그 여자의 손을 꼭 쥐고
죄를 나눈다
배 만큼이나 나온 죄
사실 침묵이 미덕인 때가 있었다
청 춘
흰 블라우스와 곤색 치마
여고생들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생머리카락 휘날리며
지나가는 여고생들을 보면서
나는 어느덧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된다
등하교 길에서 마주치면
앞에서는 눈길도 주지 못하다가
지나치며 잠시 옆모습, 찔끔
뒷모습의 여학생을 훔쳐보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날 밤은
쉽게 잠들 수 없었고,
그런 옆 동네 여학생은
지금쯤 중년의 부인이 되었겠지만
나는 여전히 검은 교복, 검은 모자의
고등학생
내 앞을 지나가는
여고생들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언제부턴가 밤마다
시를 쓰던 버릇이 생겼다
시 인
예수에서부터 막달라 마리아에게까지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말을 하는 것까지*
그 중간에서 왔다 갔다 수고하는 시인
* 대전 출생,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시 등단(1993), park-dalma@hanmail.net
그리움은 소금꽃이다
최 광 임*
프라이팬에 그물을 친다
식용유 두르는 것만으로는 멸치 떼를 잡을 수 없다
물엿을 더 부으면
그때서야 바다를 향한 몸짓에 체념이 걸릴까
코끝에서 볶이는 실 같은 기억의 갯내음
자근거리는 뼈마디에 소금꽃 돋는다
물고기라 할 수 없는 작은 몸의
뼈마디 마디에서 바다가 쏟아진다
출렁이는 파도 위 마지막 떼 울음 치다
바늘귀 같은 눈에 피어나는 하얀 꽃
그렇지, 그리움이란 꽃이 되기도 하지
생의 문 하나를 닫으며 말아 올리던 머리
열기구 안에서 뒤틀리던 머리카락 모양처럼
나의 울타리에선 짜디짠 서러움 여물고 있었던가
프라이팬에서 잊혀지는 바다가 꽃이 되고 있다
봄밤에
달이 기우는 곳 산골로 따라가
그만그만한 언덕배기 너와 나
맞배지붕으로 앉아 한 계절만 살았으면 해
마당에는 산벚꽃나무를 옮겨 심고
복사꽃 꺾어 나비 한 마리 잠재워 두고
처마 밑 풍경에 달을 매달아 놓는 거야
밤새도록 기울지 않는 달이 뎅그렁뎅그렁 울고
비가 와도 지지 않는 꽃잎 등불 삼아
고즈넉한 눈으로 너를 읽었으면 해
도란도란 사르트르와 보바리를 이야기하다가
돌돌 흐르는 도랑물에 귀를 담그고
정갈한 언어로 붉은 버찌 수태시켜
잠에서 깨어나는 나비를 타고
주름지지 않는 세월 유영했으면 해
* 전북 부안 출생, 2002년 ≪시문학≫ 등단, 시집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창신대 문창과 겸임교수, cmjk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