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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을 가꾸며
신 강 남*
며칠 전 신문을 뒤적이다가 낮이 익다싶은 사진을 발견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60년대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렸던 영국의 비틀즈 멤버 중의 하나였던 폴 메카트니었다. 거기에는 그가 열다섯 살 때 지었다는 “예순 네 살이 되었을 때"(When I'm Sixty Four)라는 노래가사 전문이 게재되어 있었다.
“예순 네 살이 되었을 때”
(When I'm Sixty Four)
“내가 퓨즈를 갈면 당신은 스웨터를 짜고
일요일 아침이면 드라이브를 하고
정원을 가꾸며 잡초도 뽑고
더 이상 뭘 더 바라겠어요
내가 예순 네 살이 되었다해도
당신은 여전히 나를 원할 건가요”
메카트니, 그는 전성기 시절 영국왕실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을 정도의 인기와 1조 5천억 원의 재산을 축적할 만큼 부귀를 누리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노년(老年)에 이상형(理想型)으로 꿈꾸었던 생활은 “퓨즈를 갈고 스웨터를 짜고 정원을 가꾸며 잡초를 뽑는” 일상이었고 그 이상 뭘 더 바라겠느냐고 말했다.
마침 금년이 위의 가사를 직접 쓴 폴 메카트니가 예순네 살이 되는 해여서 기자들이 그의 근황을 추적, 소개 하였다. 그러나 그의 소박한 꿈은 모두 사라지고 조강지처의 사망으로 재혼한 26세 연하의 부인이 청구한 이혼위자료 3600백억 원을 지불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 사람이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기도 무척 어려운 것 같다. 내가 외국의 흘러간 팝가수를 들먹이는 것은 그들의 노래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 가수를 전성기 시절이나 지금이나 좋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그가 지었다는 노래가사 중 “정원을 가꾸며 잡초도 뽑고 더 이상 뭘 바라겠어요”라는 구절이 좋았고 그 가수와 나이가 비슷하여지는 내가
그가 이상향으로 삼았던 잡초도 뽑고 정원을 가꾸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비록 필부(匹夫)의 삶이로되 별로 욕될 것 없는 생활인 것 같아 크게 자족하며 살고 있다.
나는 현재 도시의 교외에 사는데 약 1백여 평의 텃밭이 있어 요즈음에는 처와 같이 많은 시간을 텃밭에서 지내고 있다. 지금은 하지가 지난 6월 하순이라 텃밭에 가꾸어 놓은 토마토, 오이, 고추, 부추, 열무, 상추, 고구마, 옥수수, 참외, 호박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어 내가 보기에도 참 좋아 보인다. 흔한 말로 호박꽃도 꽃이냐며 호박꽃을 비하하는데 통통한 씨방을 아래에 달고 노랗게 피어있는 호박꽃이나 호박꽃 속에 머리를 처박고 꿀을 실컷 빨아 먹은 후 노오란 꽃가루를 뒤집어쓰고 나오는 호박벌의 우수꽝스런 모습을 본다면 호박꽃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서리가 내릴 무렵, 밭에 심겨진 청록색의 무대가리, 하이얀 몸통은 봄날의 어느 꽃보다 못지않은 아름다운 모습들이고, 초여름 아침 일찍 밭이랑 사이를 조심스레 걷다보면 이제 막 어미로부터 분가하여 첫나들이 하는 듯한 두더지새끼도 보게 되고, 땅강아지의 분주함과 이슬을 달고 있는 거미줄, 풀 섶에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는 사마귀, 아침햇살에 날개를 말리고 있는 풀잠자리들을 보게 되면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옥수수 씨앗을 땅에 넣을 때 욕심을 부려 너무 간격을 좁게 하면 공기의 소통이 원활치 못하여 오히려 수확량이 적어진다는 사실은 평소 우리들의 삶에 욕심을 자제하라는 교훈으로 여겨지고, 옥수수자루를 떼어낸 몸통은 그 순간부터 급속히 노쇠하여 죽어버리는데 마치 연어가 산란을 마친 후 곧바로 숨을 거두는 것과 같아 종족번식의 위대한 임무를 무사히 마친 자만이 누리는 특권과 같이 그 모습이 장엄하기까지 하다.
또한 텃밭을 가꾸는 가장 큰 재미는 친인척이나 벗들을 직접 불러서 수확물들을 나누어 줄때다. 가급적이면 농사에 전혀 경험이 없는 친구라도 토마토, 상추, 고추 등을 따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밭에 들어가 직접 따보게 해주면 대부분의 초보자들이 무척 즐거워하고 고마워하여 평소에 소원하였던 관계가 더욱 돈독하여 지는 것 같다. 나도 5년 전 이곳으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농사에 전혀 문외한이었다. 텃밭을 가꾼 지 3년이 지난 요즈음에도 가끔 텃밭 옆을 지나시던 왕년의 프로 농사꾼들께서 내가 서투르게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하도 딱해 보였는지 혀를 끌끌 차시며 농사법을 가르쳐 주시거나 직접 밭에 까지 들어오셔서 호미로 시범을 보여 주시는데 그분들이 시키는 대로 해보면 훨씬 수월하고 능률적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어 역시 농사는 경험이 제일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닿는다.
그러나 농사법도 시대에 따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많이 달라졌다. 콩이나 옥수수의 씨앗을 넣을 때 대략 세 알씩을 땅에 넣는데 한 알은 농사꾼이 먹고, 한 알은 땅주인이, 나머지 한 알은 새의 먹이로 생각했단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생태계의 변화로 산비들기와 까치의 개체수가 엄청나게 불어나 콩, 옥수수씨앗은 물론이고 새싹까지도 먹어치워 우리 마누라를 화나게 하는데 그 화풀이가 가끔은 나에게도 미친다. 우선 우리 집에서 텃밭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찌그러진 냄비와 나무주걱을 비치하고 망을 보다가 까치와 비둘기가 접근하면 주걱으로 냄비바닥을 두드리며 소리소리 질러 쫒아버리라는 말씀인데, 나이깨나 먹은 사람이 주걱으로 냄비를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쉽지도 않거니와 어쩐지 내가 장바닥에서 빈 깡통을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동냥질을 하던 품바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시도해 보고는 냄비와 나무주걱을 냅다 밖으로 집어던져버리니 마누라의 원성만 더욱 드높아진다.
그러나 한번 비둘기, 까치한테 당했다고 포기할 우리 마누라가 아니다. 유성 장날이 되자마자 온 장바닥을 뒤져 콩 모종을 사다가 다시 심어놓고는 새들의 공습이 걱정되는지 퇴치법을 강구하는데, 콩밭 여기저기에 허수아비 같지도 않은 허깨비를 만들어 세우더니만 폐비닐로 마치 초등학교 가을운동회의 만국기 펄럭이듯이 설치해 놓고는 약간의 효과가 있자 몹시 흐믓해 하고 있다. 이런 마누라의 조류퇴치 노력에 미력이나마 도움을 주기도 하고 우리 텃밭을 지나며 지저분하게 펄럭이는 폐비닐을 보아주셔야만 하는 주민들께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보상하는 의미에서 허깨비 곁에 아래와 같은 안내문을 세웠더니 오가는 주민들께서 웃으시며 즐거워하신다.
작 품 설 명
․ 쟝 르 : 설치미술
․ 작품명: 새들을 웃기는 허수아비
․ 작가명: 김씨 아줌마(국적: 떼~ 한민국)
․ 수상경력: 대전 비엔날레 똥상 (2006) 외 다수
나는 요즈음 사회적으로 명성과 비난을 함께 받고 있는 환경론자도 아니며 생명존중 사상에 심취한 박애론자도 아니다. 다만 성격상 소심하여 모기, 파리와 같이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 한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살상을 삼가는 편이다. 그래서 먹거리 채소를 괴롭히는 진딧물을 퇴치하기 위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진딧물을 멸절시키는 고농도 농약을 살포하기 보다는 소주나 막걸리를 농약대신 뿌려준다. 소주를 1:1로 물에 타서 분무기로 뿌려주면 진딧물이라는 놈들이 술에 취해서 땅에 떨어져서는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니 남을 즐겁게 하여 주고 목적을 이루니 얼마나 인간적이며 실리적이냐?
최근 몇 년 전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꽃들이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사랑은커녕 천덕꾸러기로 취급되어 잡초로 불려졌었던 야생화들이었는데 근자에 와서야 들꽃의 아름다움이 재조명되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현상 같다.
사람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분류하여 품계(品階)를 정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매, 란, 국, 죽(梅蘭菊竹)은 사군자(四君子)로 분류되어 귀히 여김을 받고 추사 김정희가 그렸다는 세한도(歲寒圖)의 엉성한 소나무, 잣나무는 겨울에도 푸르다는 이유로 국보(國寶)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맛있는 곳감을 제공하는 감나무는 별 볼 일 없는 유실수로, 맛있는 꿀을 먹여 주는 아카시아는 생장력이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수종갱신(樹種更新) 대상목으로 지정되는 비운을 맞고 있다.
또한 산야에 흩어져 자생하고 있는 이름 없는 나무들과 들꽃들은 잡목, 잡초로, 거기에 기대어 땅을 파고 씨앗을 뿌려 곡식을 거두어 드리신 이름 없는 민초(民草)들은 잡놈취급밖에 받지 못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창조주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만드실 때 잡놈, 잡목, 잡초는 없었다. 텃밭에서 인간들로부터 퇴치 대상인 진딧물도 개미들에게는 맛있는 식량창고이듯이 아무리 미천하게 보이는 미물들에게도 주어진 역할과 인간들과 똑같이 살아갈 권리를 주셨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걷히는 것 같다. 어제 비가 촉촉이 내렸으니 오늘일랑 오이를 따다가 시원한 냉국을 만들어 먹어야지.
- 養賢齋에서
진실의 거울 앞에서
하 창 순*
아침, 저녁, 여름문턱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속에 묻어오는 숲의 향기를 맡으며 나는 잔잔한 기쁨에 잠긴다. 높고 낮은 산등선마다 봄의 생기를 내뿜고 화려한 꽃 잔치를 이루더니, 어느새 연초록의 나무와 풀들이 짙은 색깔을 더해가고 있다. 아무도 심거나 거두지도 않건만, 문득 깨닫고 보면 어느새 변해가고 있는 자연의 모습은 마치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묵묵히 살아온 초로의 순박한 노인을 보듯 편안함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어느 듯, 나도 초로까지는 아니지만 중년이라는 나이를 지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언제부터인지 생각이 많아지고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왠지 마음 한 켠이 무겁고 어두워진다. 지난 젊은 시절, 나는 오로지 사회의 그늘진 부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야말로 패기만만하고 열성을 다하여 살았었던 때다. 범죄와 폭력의 대가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나의 삶은 행복했었고 자랑스러웠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매일의 삶 속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고, 타인을 향하여 나의 온 마음과 몸의 에너지를 쏟아 부었었다. 그러면서 “나는 참 훌륭하게 살고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이렇게까지 마음을 다하면서 살고 있어”라고 기뻐했었다. 그리고 그때는 나의 삶이 몹시도 가치 있다고 우쭐하였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왜 마음이 무겁고 힘겨운가. 그들을 위하여 정성과 사랑을 쏟았지만, 결국에는 나의 자만심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아온 세월은 아니었는지를 되돌아본다. 혹시 마음 한 켠에서는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고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치 내가 신이라도 되듯 그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골몰한 것은 아닐까?” 자신에게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지난시간을 회상하면서 인생의 경이로움을 또한 추구한다.
인생의 경이로움을 생각하면서 아주 아주 옛날에 만났던 한 스님의 말씀에 생각을 잠시 멈추었다. 그때 나는 어린 나이에 나의 꿈을 실현시키고 타인을 위하여 일 할 수 있는 보장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나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힘차게 푸른 꿈을 안고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로 상경했었다. 지금은 KTX로 2시간 반이면 넉넉하게 도착하지만, 옛 시절 그때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8시간이 족히 걸리던 때다. 그 여행에서 나는 한 스님과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동행을 하였다. 나는 종교가 가톨릭이었지만 종교가 다른 그 스님은 그때도 인생의 참 모습을 지니고 계셨다라는 생각이 지금도 잊혀 지지가 않는다. 그 스님은 또 다른 암자를 찾아 길을 가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힘이 있었다.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하는 마음이 설레였기도 하지만 지루했던 상황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던 그 스님이 좋은 여행의 동반자였다. 스님은 나에게 궁금한 것이 많으셨는지, 아니면 말동무를 삼으려고 했는지 이것저것 많이 물으셨다. 그리고 나는 나의 생각에 대하여 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스님과 나눈 대화는 희미하게 빛을 잃었는데 단 한마디 “인간은 수 천 번을 다시 태어난다. 그러니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사람을 고정화시키지 말라”라는 말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 시절, 나의 가치관은 인생이란 다른 사람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하는 데서 그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이라 생각하여 언제나 “나의 돌 같은 마음을 없이하고 예수님 마음 같은 살 같은 마음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살아왔다.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마음을 열고 타인의 고통이 마치 나의 고통인 듯, 함께 하는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굳게 지켜 가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참으로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편협 된 나의 생각이 걱정스러워 그 스님은 그러한 말씀을 하셨을까?
나이가 들면서 이러한 나의 믿음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공유하는 것, 그보다 더 아름답고 소중한 마음은 ‘타인의 기쁨을 공유하는 것이고, 그 마음이 더 큰 마음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난시간 나의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이유는 그동안 타인의 불행을 함께하면서 나는 나 자신의 불행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하여 때로는 위안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위치와 힘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는 본능적으로 나는 고통 받는 자들 보다 힘이 있다는 우매함이 작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행복을 공유한다는 것이 더더욱 소중한 마음이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성공과 행복이 가득한 사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비교의식으로 스스로를 평가절하 하여 위축되거나, 현실의 자신의 위치에 불만을 갖게 되고, 진정으로 타인의 기쁨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어려웠었다. 이것이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 스님의 말씀은 이제와 돌이켜 보니 심리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인간은 순수한 인간 그 자체로서 평가되어야한다”라고 하는 이론과 맥을 같이 하는 말인 것 같다. 또한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할 존엄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론과도 같다. 그 스님께서는 이미 그러한 삶의 깨달음에 도달하여 계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내가 그 스님의 연배에 서 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인생의 여정에 대하여 갈등하고 아파하는 이 현상이 생각으로 끝나지 말고 변화를 향한 인생의 여행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의 인생의 여행은 항상 원칙을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이었고 그 여정마다 생각과 마음은 항상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과의 싸움과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고 싶다. 비록 흔들리는 세파 속에 그저 몸을 맡기면서, 비난과 우월감으로 나타난 세월의 흔적이 존재하지만 그것 또한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또 하나의 다른 사고 속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속단보다는 원인과 사유를 찾으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싶다. 그리고 소유를 해방으로 변화시키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사람들의 몸짓에 같이 동참하여 그저 울고 웃는 단순한 나이고 싶다. 그리하여 가슴깊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자연을 닮은 초로의 노인의 길을 가고 싶다.
* 경남 남해 출생. 현재 건양대 심리상담치료학과 교수, changh@konyang.ac.kr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엄마
심 혜 원*
남편과 나의 직장문제로 태어나고 자라고 삶을 엮어온 서울을 떠나 대전에 터를 잡은 지도 어언 넉 달째, 그리고 그 시간의 길이만큼 자라고 있는 뱃속 둘째. 계획된 일이 아니었기에 임신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당혹스럽기까지 했으나 첫 아이가 주었던 생명의 신비와 존재의 소중함이 곧 둘째에 대한 기대와 기쁨을 회복시켜주었다. 첫 아이가 이제 17개월에 접어들기에 그리 먼일도 아니건만 출산과 첫 한 두 달의 기억이 어찌 이리 아련하지… 그 때 적어두었던 일기책을 가만가만 펼쳐본다. 곧 다시 맞을 시간이기도 하기에.
진통 그리고 출산
출산 예정일을 일주일 넘겨 유도분만을 하기로 한 날 새벽, 감사히도 이슬이 비치고 경미한 진통이 시작되었다. 버터와 달걀에 밥을 볶아 남편과 나눠먹고 사뭇 비장한 마음으로 병원을 향한다.
입원 수속을 하고 분만대기실에 들어가는데, 그곳은 보호자가 들어갈 수 없다 하여 남편은 다음 면회시간에 오기로 하고 혼자 덩그라니 침대에 누워 있다. 촉진제를 맞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서 진통이 시작된다. 처음엔 복식 호흡으로 견딜만하더니 차츰 눈앞에 별이 보이기 시작하고 진통이 올 때마다 신음을 한다. 그러나 진통과 진통 사이는 거짓말처럼 아픔이 사라져 꾸벅 꾸벅 졸기까지 한다.
다행히 자궁 문이 빨리 열리고 태아가 내려오기 시작하여 4시 경 가족분만실로 옮긴다. 그때부터는 온몸을 휘감는 진통을 남편 손을 꼭 잡고 견뎌 내기를 두어 시간, 간호사가 자궁 문이 거의 열려 이제는 힘주기 단계로 들어가야 한단다. 침대를 분만 태세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힘주기에 돌입한다. 진통이 올 때마다 양쪽 무릎 뒤쪽에 손을 집어넣고 최대한 다리를 벌리며 힘을 주란다. “윽~ 윽~” 오른쪽에서 친정엄마가 왼쪽에서 남편이 힘주기를 돕는다. 그렇게 씨름한 지 얼마가 지났을까, 간호사가 아기 머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했고, 주치의가 들어와 회음절개를 한 뒤 온 힘을 쏟아 마지막 한번의 힘을 준다. 뜨끈한 것이 몸을 쑥 빠져나가는 느낌! 아가가… 아가가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응애~ 응애~” 그 녀석 울음소리 한번 우렁차네. 하나님 감사합니다.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남편이 탯줄을 자르고, 아가에게 나의 젖을 빨린다. 나의 아가… 고맙다. 사랑한다.
눈물
저녁 7시 경에 아가를 낳고 회음 봉합 수술 후 한 시간 정도 침대에서 회복시간을 갖는다. 병실로 옮겨와 미역국과 밥을 먹고 나니 밤 10시 경 아가가 병실로 올라온다. 간호사가 “오늘밤에 데리고 계실 거예요?” 하는데 어떨 결에 그러겠노라 하니 울 때마다 젖 물리고, 태변과 소변을 체크하라 한다. “당신, 기저귀 갈 줄 알아?” 남편에게 묻는다. 갑자기 당황스럽다. 아직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에서 밤새 자주 깨어 우는 아가를 돌보느라 남편과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유두가 헤져 젖을 물릴 때마다 아프다. 그래도 아직 돌지도 않은 젖을 열심히 빨아대는 아가의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셋째 날이 되어 산후병동 1인실로 옮기고 아가를 보기 위해 온 가족들이 다녀가는 길, 가족들을 배웅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남편이 장난처럼 “나도 안녕~”하는데 돌아서 굵은 눈물이 쏟아진다. 내일 출근을 위해 오늘밤엔 남편이 집에 가고 대신 친정엄마가 오시기로 했는데도 남편이 곁에 없다고 생각하니 서운함과 막막함과 두려움이 엄습한다. 친정엄마가 오시고 남편을 배웅하는 길, 결국 남편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젖이 돌기 시작하면서 울혈이 생겨 젖 마사지를 받았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출산 때도 견딘 울음을 엉엉 쏟아낸다. 그날따라 출산 후 처음으로 혼자 자게 되었는데, 친정엄마도 항암치료 후 기력이 약해져 계시고, 시어머니도 올 초부터 당뇨와 싸우시느라 기운이 없으시고, 남편도 회사일로 바쁘고… 도대체 맘 것 의지할 사람 하나 없고, 나 혼자 이 아이를 책임져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서러움이 복받쳐 밤 새 눈물진다. 다음날 아침 팅팅 부은 눈으로 아가를 보기 위해 신생아실에 갔는데, 밤 새 배꼽이 떨어졌단다. 원래 보관해 주지 않는데 방금 떨어졌다며 전해 주는 아가의 배꼽이 신기함과 대견함과 고마움으로 나를 위로한다. 또한 아프신 친정 엄마 대신해 젖 잘 돌라고 돼지 족을 고아 오신 교회순장님으로 큰 위로를 받는다.
여전히 아니 점 점 더 아픈 유두로 젖 물리는 일이 고통스러움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헤진 내 젖꼭지를 보더니 장난스레 “징그럽다 치워라”하는 남편 말에 상처 받고 또 펑펑 운다. 남편은 당황스러워하며 안타까워 한 소리라고 진땀 빼며 변명한다. 나도 왜 이리 마음이 약해졌나 모르겠다. 호르몬의 변화로 누구나 산후우울증을 경험한다지만 나도 나의 변화에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남편이 한약을 지어준다 하여 꽁꽁 싸매고 한의원에 진맥을 다녀온다. 기력이 많이 약해져 있고, 유두도 그래서 허는 거란다. 그 날 오후 수간호사가 나의 유두를 보더니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도록 내뒀냐며 당분간 분유 수유 하고 울혈 생기지 않을 정도로만 손으로 짜주라 한다. 속상해 또 울고, 젖 짜서 컵 수유 하는데 연신 젖꼭지 찾으며 보채는 아가를 보니 마음 아파 또 운다.
아가 태어난 지 이 주 째 되는 날, 출생신고를 한다. 믿음의 집이 되라는 시아버지의 기도가 담긴 이름을 갖게 되고, ‘3’으로 시작하는 주민등록 번호도 부여받는다.
드디어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짐 대충 정리한 뒤 남편이 주일 예배를 가고, 일주일 만에 아가에게 직접 젖을 물리나 계속 보채는 아가와 몇 시간동안 씨름을 하고 나니 젖도 아리고 온몸에 오한이 돌면서 몸살이 엄습한다. 다행히 친정엄마와 언니가 와주어 아가 맡기고 끙끙 앓아눕는다. 새벽까지 오한과 식은땀과 두통이 반복된다. 감사해야 함을 알지만 마음이 따라가지 못한다. 힘겹고 암울하다.
엄마
우족 사다 우려서 나의 미역국을 끓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아가 돌보고… 친정엄마는 쉬지 않고 일하신다. 항암 치료 후 급격히 저하된 체력으로 어려움이 많으시건만 어디서 저런 힘이 솟나 싶다. 걱정이 되면서도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엄마가 곁에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으리라. 연 이틀 밤만 되면 아가가 몹시 울며 보챈다. 간호사실에 전화해보니 배앓이란다. 남편과 쩔쩔맬 때 엄마가 우리 대신 아가를 보듬으며 밤을 하얗게 밝히신다. 엄마 발병하고 수술과 치료 받으시는 동안 임신 핑계로 단 하루도 당신 곁에서 밤을 지새운 적 없었는데… 가슴 깊이 후회가 밀려온다. “엄마, 그동안 많이 힘들고 외로웠을 텐데… 미안해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속으로 운다.
아가에게 젖을 손으로 짜서 먹이다보니 울혈이 생긴다. 2시간에 결친 젖마사지를 이 악물며 견뎌내고 다시 아가에게 젖을 물려 보나 여전히 아프다. 보다 못해 엄마는 젖 말리란다. 손자에게 모유를 먹이는 것도 중하지만 딸의 아픔이 우선하는 거다. 그게 엄마인거다. 결국 한달 간의 눈물의 모유 먹이기를 끝으로 젖 말리기를 한다. 젖 모두 짜내고, 압박붕대로 꽁꽁 감고, 약 먹기 시작한다. 젖이 차오르며 화끈거리고 저리다. 쉬운 일이 없다.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나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엄마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다음달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씩만 와주시기로 한다. 나도 엄마의 뒷모습에 또 한번 눈물을 쏟아낸다. 이제는 정말 내 몫이다.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수 없다. 이제는 내가 엄마가 되어야 한다. 헌신하고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아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엄마, 고마워요. 사랑해요.
나의 아가
주일 예배 다녀오는 길, 아가 출생 50일을 기념해 “호야”라는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산다. 밝은 햇살과 맑은 물 받고 우리 아가와 함께 쑥쑥 자라렴. 아가는 출생 때 몸무게의 두 배가 돼버려 이제는 안기도 힘들지만 목도 가누어 엎어놓으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눈도 밝아져 아빠 엄마랑 눈 맞추며 웃기도 하고 달아 놓은 모빌을 열심히 보고, 밤 잠 시간이 길어져 엄마를 덜 힘들게 한다. 첫 한 달 간 거의 매일 눈물로 보내던 시간들이 아득히 여겨질 정도다. 물론 아직도 잠투정이 심해 밤이면 엄마 기운 쪽 빼고, 아빠 심통 나게 하기도 하지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잘 놀며 나날이 커가는 아가를 바라보며 더 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를 경험 한다.
이제 곧 온 집안을 기어 다닐 테고, 첫 발을 떼고 아장 아장 걸을 테고, 그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엄마” 소리를 할 테고, 자전거를 탈 테고, 친구를 사귈 테고, 학교에 들어갈 테고, 사춘기를 겪을 테고, 청년이 되어 군대에 갈 테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날 테고, 꿈꾸던 일을 이뤄가겠지…
너의 평생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사랑하심이 함께하길 축복한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 요셉과 같은 형통한 사람, 다윗과 같은 용맹한 사람, 솔로몬과 같은 지혜의 사람, 다니엘과 같은 신실한 사람, 바울과 같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길 기도한다. 사랑한다.
2005년 3월 엄마가
일기책을 덮으며, 이제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온 집안을 뛰어다니고 아래위로 이가 많이 나와 된밥도 잘 받아먹는 첫 아이를 바라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간 소소히 아프기는 했으나 큰 탈 없이 건강히, 씩씩하고 밝게 자라 준 첫 아이가 고맙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뱃속 둘째에 대한 감사도 깊어진다. 나도 이렇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가고 있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인, 엄마.
* 건양대학교 심리상담치료학과 교수, hwshim@konyang.ac.kr
리마인드 웨딩
김 현 주*
그때 왜 그렇게 성급하게 결혼을 했을까?
만일 내가 결혼 하지 않고 이제까지 혼자 살았더라면?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는데 그래도 해보고 후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가롭게 책장을 넘기다 생뚱맞은 생각을 해 보았다.
사람은 가지 않은 길에 아쉬움과 미련을 느낀다지만 난 독신으로 살아온 것 보다는 힘들었지만 결혼을 한 것은 잘 했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통해 비로소 반쪽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완성 되어감을 느꼈고,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자식을 나아 기르는 부모의 마음도 체득했다.
만일 혼자 살았다면 경험하지 못할 많은 일들을 결혼 생활을 통한 다양한 관계 속에서 깨우치고 배우며 삶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폭이 넓어졌다. 결국 우리의 행, 불행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때문에 잘 가꾸어진 가정, 반듯하게 자란 자녀가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어 주는 가정,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는 평화로운 가정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성공보다도 값진 성공을 이룬 셈이다.
강철왕 카네기의 은퇴식장에서,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 줄 것을 권하자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성공은 가정을 잘 지켜온 것’이라 말하여 참석한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는 일화처럼 건실한 가정이 있을 때 그의 사회적 성공도 빛나고 보장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이혼율이 높고, 깨어지는 가정이 많은 때에 새겨 볼 말이다.
결혼 25주년이다. 짧지 않은 긴 세월 속에 어찌 행복하고 좋았던 일만 있었으랴만 인생의 중턱을 넘어서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그 신산한 세월 속에 의연한 모습의 내가 있다. 병 뚜껑하나도 제대로 열지 못해 끙끙대고 모든 것이 서툴기만 하던 신혼시절, 그저 헤어지기 싫어 둘이 함께 있고 싶은 마음 하나로 결혼을 선택했는데 결혼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요즘 신혼의 유효기간은 삼 개월이라 했던가. 그때의 나는 일년쯤 지나니 다툼도 잦아지고 사는 재미도 점점 없어져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가사일과 직장 생활, 늘 함께 있어줄 줄 알았던 남편의 늦은 귀가 등으로 힘들고 외로웠다.
달콤한 행복과 결혼생활에 대한 호기심은 무참히 깨어지고 나는 갈등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가 생겼고 육아까지 덧붙여진 나의 일과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의식 할 겨를도 없이 바쁘고 정신없이 살았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어언 25년, 나는 직장을 은퇴했고 아이들은 자라 우리의 품에서 벗어나 이제 집에는 남편과 나 둘만이 남게 되었다. 젊은 날에야 서로의 치기와 괜한 자존심으로 사소한 일로도 다투고 토라져 며칠씩 말도 안하고 상처도 주고 했었다. 그러나 오십을 앞둔 나와 오십을 넘긴 남편은 어느새 귀밑머리가 하얗고 돋보기를 걸치지 않으면 잔글씨를 볼 수 없는 중년이 되었다.
이제 뜨거운 열정과 사랑보다는 서로에 대한 연민과 안스러움이 더 크다. 미우니 고우니 토닥거리며 살아온 세월들이 추억이 되어 둘을 엮어 주고 이제 다 자라 오히려 부모 걱정을 해주는 자식이 있어 그래도 든든하다. 빛바랜 결혼사진 속의 조금은 촌스럽고 수줍음이 묻어나는 내 모습을 보며 리마인드 웨딩을 생각했다.
“그래. 다시 한번 결혼하는 거야. 이번엔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중후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웨딩드레스를 입는 거야. 남편과 내가 온갖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예까지 함께 살아온데 대한 자축과 앞으로 더욱 이해하고 배려하며 서로를 위해 살고자하는 다짐의 의미로.”
25년 전의 결혼식이 양가친지와 지인들 앞에서의 약속이었다면 지금 다시 하는 결혼은 둘만의 사랑과 신뢰를 확인하는 그런 의식이 되리라. 또한 그간 함께 살아준 배우자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까지 전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우리 삶 속의 멋진 이벤트가 아닐까?
사실, 한 사람과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서로의 인내와 노력이 없이는 가정이란 성을 굳건히 지키기 힘들다. 젊은 날엔 사랑과 정열로서 모든 걸 극복하고 견딜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애정도 소원해지고 서로에 대한 애틋함도 사라져 삶이 삭막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우리 한국 남자들의 정서는 아내를 위해 헌신하고 배려하는 마음 보다는 무조건 받기만 하려하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경향이 있어 결혼생활은 대부분 여성의 희생과 봉사가 묵시적으로 강요되는 셈이다. 그러기에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일수록 서로 각자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만이 아닌 배우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여유를 지녔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리마인드 웨딩은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다짐하며 부부로서 진정한 역할이 무엇이며 받기 보다는 베풀며 사는 즐거움을 깨닫는 기회로서도 꼭 필요한 것 같다.
평생 아내에게 꽃 한 다발 선물한 적이 없는 무뚝뚝한 남편도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 아내를 위해 꽃집에 들를 수 있는 용기와 아량을 갖는다면 남은 여생이 훨씬 아름답고 풍요롭지 않을까 생각한다. 변화는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제까지의 생각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나 중심의 사고에서 상대방 중심의 사고로 바꾸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예쁜 여자를 만나면 삼 년이 행복하고, 착한 여자를 만나면 삼십 년이 행복하고 지혜로운 여자를 만나면 삼 대가 행복하다 한다. 잘 생긴 남자를 만나면 결혼식 세 시간 동안 행복하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통장 세계의 행복이 보장되고, 가슴이 따뜻한 남자를 만나면 평생의 행복이 보장된단다. 어차피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산다. 그러나 그 행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결혼 생활은 서로 좋은 점을 발견하고 칭찬하고 격려해주며 살려는 마음이라면 얼마든지 행복한 스위트 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상대의 단점과 약점을 바라보며 비난하고 헐뜯기 시작하면 그들 부부는 평생을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려야 한다.
누가 불행하게 살고 싶겠는가?
그렇다면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너그럽고 넉넉한 인품을 지니면 상대방에게 관대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기에 자기를 탓하기보다 모든 불행과 잘못을 상대방 탓으로 돌리고 원망한다. 부부로 산다는 것은 억겁의 인연으로 맺어진 특별한 관계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모두 부족하고 결점 투성이고 실수를 한다. 그럴 때, 남들은 비난하고 무시해도 아내나 남편만은 자신의 배우자를 이해하고 인정해 줄 때 얼마나 고맙고 힘이 되겠는가. 부부 사이에 절대로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운전연수이다. 열이면 아홉 쌍이 운전연습을 하다가 부부 싸움을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 또한 그랬다. 너그러움이 없어서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아량이 부족한 때문이다.
요즘은 고학력 시대로 개개인의 지적 수준은 어느 때 보다도 높다. 허나 정작 필요한 가정을 꾸려가는 기본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이 배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 자질을 갖추는 게 우선이다. 가정교육 부재와 모두가 똑똑하고 잘난 아이로 키워지는 현재의 교육 방식이 아이들의 불행한 미래를 예고한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 한다. 부부가 모범적이고 건실한 가정을 이끌어 갈 때 그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갈 것이다.
가장 큰 성공이 자신의 가정을 잘 지키는 일이라 했다.
나 또한 내 인생을 통해 결혼 생활 중간 중간의 위기를 지혜롭게 잘 극복하고 참아온 것에 자부심을 가진다. 그래서 아픈 만큼 성숙했고 세상을 보는 넉넉한 시선을 가지게도 되었다.
이젠 나를 힘들게 했던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그런 그가 내 곁에 있었기에 오늘의 성숙한 내가 있노라 말하고 싶다. 그도 나처럼 지난날의 회한을 승화시켜 더 멋진 미래를 꿈꾸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먼 훗날 노년에 이르면 한 생을 곁에서 지켜준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덕분에 잘 살았노라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결혼 25주년! 다시 찍을 웨딩 사진을 떠올리며 잠시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비록 얼굴엔 잔주름이 생겼고 몸엔 군살이 붙어 젊은 날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은 예쁘지 않을까 기대 해본다. 그 곁에 듬직한 모습으로 우뚝 서 나를 지켜 줄 남편에게 함께 살아 주어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조금 쑥스럽긴 하겠지만 귓속말로 ‘사랑한다는 말’도 하고 싶다.
아, 캄보디아!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가끔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평소와 전혀 다른 내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거침없는 사랑도 하고 싶다. 삶에 지치고 사람에 부대끼는 게 힘들고 복잡한 세상이 싫어질 때면 가식의 너울을 훌훌 벗어 버리고 한 마리 새가 되어 훨훨 날고 싶어진다. 그럴 땐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가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처절한 고독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진 채 바닥까지 곤두박질 쳐 보고 싶다. 막막하고 아득한 벼랑 끝에 선 느낌일 때 떠오른 곳 중의 하나가 캄보디아였다. 그곳에 가면 내 허망한 삶에 뭔가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날 충동질했다. 그런 내게 기회가 왔다.
원하는 혼자만의 여행은 아니었지만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에 설레었다. 서구인들이 지상낙원이라 극찬할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에 쌓인 숨겨진 세계이면서 이웃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걷잡을 수 없는 비운의 역사와 질곡 속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나라 캄보디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앙코르왓트를 비롯해 많은 사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 천의 자원을 가지고도 가난을 해결하지 못한 채 아직도 수용소에는 전쟁 난민들이 들끓는 나라.
한 나라의 화려했던 전성시대와 몰락이 공존하는 그 곳을 여행 보다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순례하는 엄숙하고도 진지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아직도 공산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나라답게 공항의 분위기도 살벌했다. 직항 노선이 없어 베트남의 호치민에서 씨엠립으로 들어갔다. 입국비자 발급 시 급행료를 주지 않으면 한 시간이 넘도록 비자 발급이 안 된다는 사전 정보를 알고 온 터라 서류 제출 시 아예 급행료를 얹어 디밀었다. 다행히 비자는 바로 나왔고 입국신고서에 비자 발급 번호를 옮겨 적은 후 입국심사를 받으면 되었다. 그런데 일행 중 먼저 심사대에 서류를 제출한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나를 찾기에 가 보았더니 무언가를 잘못 적었다는 것이다. 헌데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무얼 잘못 적었는지 알 수가 없어 한국인 가이드가 있는지 두리번거리는데 다른 심사대의 한 공안이 손짓을 했다. 갔더니 손가락 두개를 펴 보이며 미화 20불을 내면 통과시켜 주겠다고 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으므로 난 20불을 꺼내 주었다. 그러자 순간 어떤 싸인이 돌았는지 나머지 일행의 입국 관련 서류는 검사 절차도 없이 그냥 통과가 되었다. 정말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었지만 무사히 통과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짐을 찾았다. 우리가 마지막 비행기였는지 심사대의 사람들이 거의 빠져 나가자 그들은 모여서 주머니 속에서 오늘 받은 달러를 꺼내 분배하고 있었다. 공공연한 부조리와 질서 부재의 현장을 목격하니 씁쓸했다.
다음날 일찍 그 유명한 앙코르유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차창 밖의 풍경은 우리나라 60년대의 시골을 연상케 했다. 문명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어쩌면 그래서 오염되지 않은 신비의 자연을 간직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앙코르왓 사원은 1860년 프랑스의 동물학자 앙리 무어에 의해 발견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사원의 주변은 인공호수로 둘러싸여 그 신비감을 더해 주었고 대부분의 사원은 동쪽을 향해 있는 반면 서쪽을 향해 있어“죽음의 사원”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한다. 12세기 초반 수리야 바르만 2세가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만든 사원이라 한다. 내부를 둘러보니 그 규모와 위용이 어마 어마해 몇 백 년을 거쳐 이루었다 해도 믿어지지 않을 텐데 하룻밤 만에 만들어 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니 그 신비의 수수께끼는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다.
건축물 중간 중간에는 구조물을 뚫고 내려온 수백 년은 되었을 듯한 나무의 뿌리들이 구조물과 엉키어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나무가 죽지 않고 산 것도 신기하고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붕괴되지 않고 견디어 내는 것도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사원의 마지막 중앙탑을 오르는 계단은 좁고 가파르게 건축되어 신들이 이용하였음을 나타냈고 인간의 접근을 어렵게 하여 계단을 오르면서 신성한 분위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엄숙해 질 수 있도록 기어서 올라 갈 수 있게 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함과 섬세하게 새겨진 벽면의 조각들이 수백 년을을 지나오면서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게 정말 놀랍기만 하다.
앙코르왓 외에도 앙코르 톰, 바이욘 사원, 티프롬 사원 등 많은 사원들이 있다. 앙코르 제국 때의 찬란했던 힌두교 문화를 엿 볼 수 있었고 이후 불교의 전성시대를 누린 이 나라가 어찌 지금은 부처님의 자비로부터 외면당한 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처참한 형국이 되었는지 흥망성쇠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유럽의 전성기보다도 화려한 문화를 가졌던 캄보디아는 전쟁에 휘말리며 크메르 루즈군들이 수도를 장악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골로 추방하거나 학살하고, 아내와 남편을 따로 떼어 수용소로 보내 가족 제도를 해체시키고 무리한 강제 노동에 시달리게 했다. 또한 사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지식인들을 모조리 살해하여 집단 매장한 킬링필드에는 200여만 명이 희생되어 매장된 참혹한 대학살이 있었다 한다.
아직도 태국 근처의 난민 수용소에는 킬링필드의 어린이들로 넘쳐나고 있다. 전쟁은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 될 수 없는 죄악이요 비극이다. 유적지 부근에는 이 나라의 어린이들이 ‘원 달러’를 외치며 구걸하는 모습이 너무도 흔하다. 게다가 아직도 다 제거되지 않은 지뢰 때문에 손목이나 발목 이 잘린 아이들도 많다 한다.
교육 시설이 열악하여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거의 짐승이나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는 그 아이들을 보며 측은함이나 연민에 앞서 부처님의 가호가 미치지 않음이 야속했다. 태양은 이곳에도 어김없이 작열하는데 신의 손길은 예까지 미칠 수 없나보다. 톤레삽 호수로 가는 길은 포장도 되지 않은 예전 우리나라의 시골길 같았다. 길 양옆에는 집이라 할 수도 없이 초라하고 허름하기 그지없는 야자껍질로 엮어 만든 가옥들이 늘어서 있다. 열대지방이니 난방 걱정이야 없겠지만 문도 없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그나마 낡아 여기 저기 구멍이 뚫린 원두막 만도 못한 그런 곳에 온 가족이 모여 살았다. 대낮인데도 남자는 하릴없이 풀린 눈으로 밖을 내다보고 앉아 있고 어린 아이는 천진하게 해먹에 몸을 누인 채 흔들거린다. 한 가정의 가장 일 텐데 일자리가 없어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걸까?
생계는 무엇으로 이어가는지 유적지의 아이들이 구걸해온 돈으로 온 가족이 먹고 사는 것은 아닌지 내 마음은 몹시도 착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들의 삶을 보며 이 나라의 정부와 위정자들이 국민의 생활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대학살로 지식인이 말라버린 이 나라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을 통한 국민의 계몽이 우선이라 한다. 교육도 선교사들에 의해 겨우 이루어지는 실정이니 무지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요원하기만 하다.
톤레삽 호수는 15,000여 수상가옥이 있는 곳이다. 학교도 가게도 물위에 있고 어린아이들의 놀이터 또한 호수의 물이다. 탁류로 뿌연 물속에는 어린 아이와 물고기들이 함께 뒤엉겨 펄떡인다. 유람선이 지나가면 아이들은 쏜살같이 물속을 헤엄쳐와 배 난간에 올라 타고 손을 벌린다. 먹을 것을 주면 얼른 입에 넣고는 원 달라를 달라고 애원한다. 그 눈망울이 너무나 천진하고 간절해 차마 외면할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지갑을 열어 다 나누어 주고 싶지만 그게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란다. 그들이 쉽게 돈을 얻어 가면 집에 돌아가 부모를 존중하지 않게 된단다. 또 다른 비극이 생기는 셈이다. 프놈바켕의 일몰을 감상하기 위해 야트막한 산에 올랐다. 그 오르막길 양쪽에는 손이며 다리가 잘린 열 살 안팎의 어린 아이들이 수도 없이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울어 버릴 것 같아 애써 외면하며 오르려니 목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분노가 나를 힘들게 했다. 어렵게 올라갔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 일몰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내려오는데 이미 해가 져 어둑해졌는데도 아까의 아이들은 그 자리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고 후들거리는지 내 자신이 미웠다. 21세기의 첨단 문명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지구촌 한쪽에서는 보호받고 사랑 받아야 할 어린이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구걸을 하거나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지구상의 60억 인구 중에서 12억 인구가 하루 1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들 대부분이 가뭄과 전쟁과 빈곤의 희생자들이다. 그런데도 강대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모한 전쟁을 벌이고 살상을 하고 수많은 난민을 만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자들의 비애, 힘없이 당해야하는 설움, 무슨 전생의 죄가 있기에 이런 열악한 나라에 태어나 저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신이 있다면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며 홀가분함보다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나를 짓눌렀다. 내가 너무 호사를 누리고 사는 것 같아 마치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전기 하나도 아껴 써야 다음 생에 전기가 부족하지 않은 곳에 태어난다며 절약을 강조하신 노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린 얼마나 풍요로움 속에 흥청망청 사는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돌아오면 뭔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 함께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구호가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모든 나라가, 전 세계인이, 세계는 하나라는 사해동포주의를 가지고 더불어 잘 살아가는 길을 모색 할 때 지구 한 켠에서 밥 한 끼 의료 혜택 한번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적어 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삶이 권태롭고 사는 게 힘들어 헉헉대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이번 여행은 내게 정신 차리고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주었다. 아직도 원 달러를 외치며 우리를 졸졸 따라 다니던 천진한 눈망울들을 잊을 수가 없다.
아, 캄보디아여! 길고 어두운 잠에서 깨어나라. 다시는 저 어린아이들이 고사리 손을 벌려 1달러를 구걸하지 않아도 되도록 잠자는 천의자원을 일구어 개척하라. 세상을 향해서도 외치고 싶다.
“혼자만 잘 살믄 뭐 하능겨, 함께 더불어 잘 살아야지”
북경 자전거
조 주 행*
북경 방문은 이번이 네 번째이다. 3년 전 처음 북경을 방문했을 때, 유독 눈에 들어 온 것이 자전거의 물결이었다. ‘북경자전거’란 영화 때문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계 동력인 자동차에 밀리지 않고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남아 있는 자전거에 남다른 애정을 느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올림픽을 2년 앞둔 2006년 5월의 북경의 자전거는 기계동력에 한 수 밀리는 것 같다. 여전히 두발 자전거가 많지만 자전거도 현대화 되어 전기자전거가 심심찮게 보였다.
흔히 베이징은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기 좋은 도시라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돌다 보면 골목 깊숙한 곳의 전통가옥과 중국인들의 행동철학까지 들여다 볼 수 있어 그렇다는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후통(우물이라는 뜻)투어가 인기이다. 후통투어는 자전거 인력거를 타고서 베이징의 옛 골목 속의 전통주택인 쓰허위안(四合院)을 돌아보는 관광이다.
이처럼 북경 자전거는 레저용이 아니다. 생필품이거나 자기 목숨을 유지하는 생활 도구인 북경자전거는 낡고 녹슨 자전거의 모습임에도 숭고하게 보인다. 짐을 실어 나르기 위해 개조한 세발자전거에 길게 늘어진 체인은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그 페달을 구르는 종아리를 보면 그 삶이 얼마나 팽팽한지를 알 것도 같다.
북경자전거가 생활수단으로 활용되는 생생한 현장은 인력거용으로 활용될 때이다. 보기에도 연약해 보이는 인력거꾼이 자기 몸무게의 5배는 훨씬 넘을 것 같은 두 사람을 태우고 이마에 힘줄을 세우며 골목길을 누빌 때, 탄 사람의 양심만큼 땀이 흐른다. 북경 옛 거리 투어가 끝나고 이방인이 건네는 손길에 침을 뱉고 싶을 정도로 인력거 운전자의 삶은 힘들다. 한 바퀴 돌고 나면 말 할 힘도 없어 “짜이지엔”이고 뭐고 간에 눈앞에 안개가 피어난다. 팁으로 주는 10위엔화의 기쁨은 한 참 숨을 고른 후에 찾아온다. 북경 자전거는 이제 거리이동을 위한 본래의 목적 외에 한 사내가 책임져야 할 생계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한 사내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늘어나는 자동차와 그 사이를 누비고 다닐 때의 아슬함이다. 자전거가 노후화되어 브레이크를 밟아도 멈추지 않고 차 속으로 빨려갈 때의 그 황당함을 느끼곤 하는 것이 중국 소시민의 삶이다.
자동차가 자본주의의 정점에 핀 부의 꽃이라면, 자전거는 사회주의가 한 없이 믿었던 인간주의의 한 상징물이다. 순수하게 사람의 힘만으로 가는 자전거, 석유자원의 고갈이 온다 해도 살아남을 교통수단인 자전거. 이것이 바로 중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자동차와 자전거가 공존하는 도시 북경. 그 북경은 중국 정치의 중심도시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자동차가 자전거를 몰아 낼 때, 자동차에서 나오는 자본주의의 매연은 누가 마실까? 바로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때 어디 가서 숨을 쉴까?
자전거가 점점 줄어드는 북경 시가지의 풍경을 보면서 중국 경제의 발전 속도에 놀란다. 그 이면에 풍겨오는 자본주의의 상처가 구걸하는 어린아이의 부끄러운 손으로 다가오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여행자의 기우일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합일되었을 때 피어난 잡종 꽃은 탄성과 동시에 비웃음을 함께 받는다. 주변국 관광객의 눈에 비친 북경자전거는 마냥 남의 나라의 도로에서 보는 이색풍경만은 아니었다. 그 잡종 꽃의 탐욕과 탐욕이 피면서 풍기는 살 비린내에 나는 코를 남모르게 눌러봐야 했다.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한 중국사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자전거는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외국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4박 5일의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위 소감도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으리라.
혁신을 역(易) ‘풍수환’에서 배우다
요즈음 혁신, 혁신하는 말을 들으면서 역경의 풍수환(風水渙)의 괘를 생각하게 한다. 역경은 사서삼경의 하나로 점서이면서 공자가 십익(十翼)을 덧붙임으로서 철학서가 되었다고 한다. 공자가 이 책을 얼마나 연구하였는지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온 책이기도 하다. 이 역경에는 변혁의 괘가 택화혁(澤火革)과 풍수환(風水渙) 두 괘가 있다. 택화혁의 괘가 급진적 변혁을 상징하는 괘라면, 풍수환 괘는 점진적인 변혁을 상징하는 괘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풍수환 괘를 가지고 혁신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괘의 괘사에 보면 “환은 흩어진다는 뜻이다. 왕이 종묘에 이르다. 아무리 큰 내라도 건널 수 있으나 바르게 해야 이롭다” 라 하고 있다. 괘사를 보면 무슨 뜻인지 모른다. 이를 현재의 입장에서 “혁신”이라는 주제에 맞게 새롭게 해석해 보는 것이다.
풍수환 괘는 혁신을 위해서는 첫째로 흩어진다고 하였다. 흩어진다는 것은 변화를 위해서는 익숙한 것과 결별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결별이란 고통스런 것이다. 지금까지 해 온 것들로부터 얻어지는 안정과 관성이나 타성을 버리자는 것이다.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하라는 것이다.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은 과거의 편안함을 버리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혁신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과 같다. 풍수환의 괘에 갑자기 “왕이 종묘에 이르다”라는 구절을 만나면 망연해진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내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해 본다.
혁신은 과거의 단절이 아니라 종묘(즉, 자기뿌리)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이 과거를 보듬어 안을 것을 제시한다. 혁신에 성공하려면 종묘를 버리고서는 성공할 수 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과거를 버리라고 해놓고 이제는 과거를 버리지 말라. 이것은 앞과 뒤가 맞지 않다. 역경의 풍수환 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리라. 혁신하든 변화를 하든 개혁을 하든 여하간 근본을 잃지는 말아라. 근본이란 무엇을 위한 혁신인가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현재의 혁신은 대체로 과거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종묘를 버리고 있다. 지금 현재가 어디서 왔는가? 바로 과거에서 온 것이다. 과거는 악의 집합처가 아니라 현재를 생성시킨 현재의 뿌리인 것이다. 스스로 혁신에 대한 관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청산이 자기합리화 내지 자기기만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혁신이 강조되면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인물들이 고려의 신돈, 조선의 허균, 조광조, 허목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 사람들은 ‘혁신’을 생각한 사람들이지 혁신에 성공한 사람들은 아니다. 왜 혁신에 좌절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자기기만에 빠지지 말고 비전을 가지고 자기뿌리를 확실하게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액세서리의 가치가 의복을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의복을 바꾸고 나아가서는 혁신의 옷을 입기 위한 체형까지도 바꾸는 것이 혁신이다.
결국 혁신의 주체이자 수혜자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모든 것 즉,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든 것을 사랑할 때 혁신은 가능하다. 과거도 사랑하여야 미래를 사랑할 수 있다. 혁신은 현재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때 자연스럽게 버릴 것이 자연스럽게 버려지는 것이다. 혁신이란 스스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풍수환 속에 내재된 혁신의 비법, 즉 흩어지는 것이다. 환(渙)은 환(幻=망상)이 아니고 환(換=변혁)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 풍수환 괘 단사(彖辭)에 ‘큰 내를 건너기 위해서는 나무배를 타야 공이 있다“고 하였다. 나무배는 무엇인가. 전문적인 카운셀링이다. 전문가의 도움을 무시하고 우리는 무턱대고 달려 나간다. 이럴 때 혁신은 병이 되고 폐가 된다.
혁신은 소리 없는 혁명이다. 요란하지 말아야 한다. 역은 말한다. 제사는 이웃의 피해 없이 조용하게 불 밝히고 정성을 다하여 지내는 것이다. 자기의 후회스런 과거 내지 단점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고마운 우연
임 정 란*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친구 한 명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 이야기를 가끔씩 들려주곤 한다. 학교생활에 관한 것, 지도교수와의 관계, 대학원의 분위기 등과 같이 내용은 뻔한 이야기이지만, 난 늘 그 친구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는다. 대학원을 먼저 졸업한 나로서는 그 친구의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이 공감이 될 듯도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학교마다 또 학문마다 나름대로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번은 수업을 같이 듣다 우연히 알게 된 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후 사이가 가까워졌던지, 가끔씩 듣는 이야기 중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 친구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칭찬으로 가득하다. 외모도 멋지고, 인간성도 좋고,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멋진 친구라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사람이기에 이렇게 칭찬을 아끼지 않을까. 그 친구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의 신상명세를 물어보았다. 하나하나 나의 물음에 답을 해 주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구는 바로 나의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던 것이다. 친구와 나는 함께, 외쳤다. 정말 세상 좁다!
친구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들고는 전화를 걸어 나의 안부를 동창생에게 전해주었다. 동창생인 친구 역시 너무나 신기하다며 오랜만의 만남을 반가워했다. 친구는 바로 약속을 잡았다. 15년 이상 만나지 못했던 나와 동창생을 당장 만나게 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 그 친구의 기억은 멋진 외모와 좋은 성격 때문에 인기가 많았던 친구였고, 운동을 아주 좋아했던 친구였다. 15년 이라는 세월동안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또 보고 싶은 마음에 약속한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 때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에서 보고 싶은 사람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주인공의 심정이 지금의 나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약속의 날, 나는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단장을 하고는, 친구와 함께 약속장소로 향했다. 친구가 동행한 덕분인지 심장의 두근거림을 진정시켜 주는 듯 했다. 너무나 오랜만의 만남이어서 얼굴을 혹시 찾지 못할까 하는 걱정과, 동성이 아닌 상대가 이성이라는 사실이 선뜻 혼자만의 발걸음을 내딛기에 부담이 되었었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낯익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란아~”
내 이름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건장한 청년이 된 초등학교 친구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렸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친구의 모습은 너무나 신기할 정도로 변한 곳이 없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이야기며, 다른 동창생의 근황들, 그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동행한 친구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초등학교 때 전학을 많이 다녀서 어렸을 때 친구가 없다며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왜 이 친구에게 그렇게 많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친구는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장애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경험했던 봉사활동이 계기가 되어 전공까지 하게 되었다는 친구였다. 사실, 누구나 장애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 관심을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 직접 친구처럼 전공을 하고 있더라도, 특별한 사명감 없이 단지 직업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현실에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친구의 생각은 달랐다. 현재까지도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친구의 모습, 바로 이런 친구의 아름다운 마음이 칭찬을 받기에 충분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어렸을 때는 몰랐던 친구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된 후 이 친구가 내 동창생이라는 사실이 더욱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함께 동행한 친구는 자신이 좋은 동창생을 만나는 데 다리역할을 했으니, 한 턱을 내야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 한 턱뿐이겠는가. 돈으로 살 수 없는 좋은 친구를 다시 만나게 해 주었는데 말이다.
널 위해 준비 했어
수업을 마치고 막 나오려는 데,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가방을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우산을 찾을 수 없다. 아침에 비가 온다고 해서 가방에 넣은 줄 알았는데, 깜박 한 모양이다. 이를 어쩌지?
사실 운전을 하면서부터 나는 우산을 챙기는 일을 등한시 하게 되었다. 차가 있으니까 우산은 별로 필요하지 않겠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이었지만, 차를 가져오지 않은 날 갑자기 비가 내리면 늘 당혹스럽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이런 낭패를 겪은 일이 있었다. 그날도 갑자기 비가 내렸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야 하는 상황에서 내리는 얄궂은 비는 어린아이의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우산을 가지고 아이를 데리러 오는 엄마를 보면,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학교로 우산을 가지고 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나로서는 그 모습이 여간 부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 일기예보에 따라 우산을 챙기는 일은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성이 뛰어나더라도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우산을 챙겨가지 않은 날 갑자기 비가 내리면 내리는 비를 무작정 맞으며 집으로 왔다. 나와 처지가 비슷한 다른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으려고 뛰어갔지만 나는 뛰지 않았다. 뛰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이유겠지만 어차피 맞을 거 뛰어도 똑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온몸을 비로 샤워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서러운 눈물을 흘린다. 그러고는 이내 다짐을 하곤 하였다. 매일 우산을 챙겨가서 다시는 비를 맞지 않겠노라고.
그 후 얼마간은 매일 우산을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커다란 우산을 매일 가지고 다니는 것도 어린아이한테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비 맞으며 했던 다짐은 까맣게 잊은 채 우산을 또 놓고 가서는 비를 맞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여러 번 접을 수 있게 만든 작은 우산이 있었더라면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성인이 된 후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비는 거의 왠수처럼 느껴질 정도로 싫어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비가 갑작스럽게 내리는 상황이 발생하면 비를 맞지 않으려고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우산을 구하게 된다. 나는 우선 핸드폰을 꺼내들고, 제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은 다음 우산을 가지고 와 줄 사람을 선정하여 순서대로 전화를 한다. 운이 좋으면 한 번에, 아니면 여러 사람을 거친 후 가까스로 우산을 구한다. 또 다른 방법은, 마냥 기다리면서 아는 사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덤으로 같이 쓰고 가려는 판단에서인데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면 제법 괜찮은 방법이다. 이 방법을 이용하여 나는 비를 맞지 않고 목적지에 가는데 꽤 높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도 안 된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우산을 구입한다. 집에 우산이 많아 우산을 구입하는데 소비하는 돈을 제일 아까워하면서도, 비를 맞기 싫어하는 이유로 결국 우산을 구입해 쓰고 간다. 이때 우산을 구입하면서 제일 고려하는 것은 나에게 없는 디자인의 우산이거나 없는 색상의 우산이어야 한다.
오늘도 갑자기 비가 내렸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핸드폰을 연 순간, “널 위해 준비 했어”라는 글과 함께 우산을 보내준 친구의 문자 메시지가 참 고마우면서도 미운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