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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인연(因緣)
오 광 록*
인생사에 인연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귀하고 천함이 인연에서 생겨난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의 인연을 맺느냐가 일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사랑과 미움의 단초(端初)이고 열쇠이다.
평생을 내살같이 아끼고 사랑하며 한쌍의 원앙처럼 곱게 늙은 부부의 인연이 그렇고, 칠흙같은 어둠을 밝히는 등대와 같이 존경과 믿음으로 평생을 따르고 가르치는 사제지간의 인연이 그러하며, 명분과 대의를 쫓아 목숨을 내걸고 새로운 역사를 도모한 군신의 인연이 그러하다. 인연에 따라 평생의 명운이 결정되는 격이니 인연이 곧 운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잊고 싶은 질곡의 역사도 화려했던 영광의 역사도 모두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여러 등장인물들과의 기막힌 인연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새로운 인연의 시작과 함께 새역사가 잉태되고 그 인연의 끝남과 함께 그 역사는 조용히 막을 내린다.
삶과 죽음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인연의 시작과 끝의 차이다. 살아 있는 것은 누군가와의 질긴 인연의 끈을 잡고 있는 것이며 죽는다는 것은 바로 그 끈을 놓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런저런 관계로 맺어진 평생의 인연들이 하나로 엮이어진 것이 한 인간의 생애이다.
천당과 지옥을 넘나드는 것도 배신과 증오, 감사와 은혜를 낳는 것도 모두가 인연의 문제다.
상생과 호혜의 아름다운 인연이 있는가 하면 공멸과 상처뿐인 추잡한 인연도 있다. 이처럼 인연은 누구에게나 생애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인연에는 부모형제와 같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맺어진 자연적 인연이 있는가 하면 친구나 배우자처럼 당사자의 자율적 의지에 따라 선택적으로 맺어진 자의적 인연이 있다.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구조 속에서는 유행가 가사처럼 우연을 핑계로 만난 애매한 인연도 많다.
그 많은 인연 중에 동일한 학풍을 매개로 맺어진 동문회가 대표적인 학연이나 출생과 생활의 공통적 근거지로 결집된 향우회라고 말하는 지연, 숭조목종(崇祖睦宗)을 강조하는 종친회와 같은 혈연은 유난히 우리사회에서 현실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대표적 인연들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처음으로 만나면 우선은 통성명을 하고나서 태생이 어디인지 고향을 묻게되고 출신학교까지 밝히게 된다. 이는 생면부지 낯선 사람끼리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한가닥 인연의 끈을 찾고자하는 심정의 발로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동문회와 향우회 종친회가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찮은 동질성이란 인연을 퍽이나 중요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방법과 과정이야 어찌됐던 기왕에 맺어진 인연이기에 모두에게 소중한 인연 이어야겠지만 불행하게도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악연이 있음은 지극히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보랏빛 인연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할망정 원망과 저주의 대상으로 전생의 업이라고 까지 개탄하는 불행한 인연은 없어야 한다.
그래서 인연은 시작보다도 끝이 더 좋아야 하는 법이다.
언제나 감사와 축복을 찬양하는 종교적 인연처럼 한점의 부끄러움이나 후회가 끝까지 없어야 한다.
모든 인연이 다 마음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나 서로 간에 최소한의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극히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도덕적 가치와 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아름다운 인연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비록 모든 인연이 순전히 자의적 선택에 의할 수는 없겠으나 일생에 운명적인 것으로 피할 수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연도 진솔한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결코 방치해서도 안되며 방치할 수도 없는 것이 인연이다. 인연에는 신성한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 인연 앞에 겸손과 진지함이 좋겠다. 요구하기 전에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는 베품과 나눔의 자세가 중요하다.
인연이야말로 하기 나름인 것이다. 거짓 없이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 인연이다.
인연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진솔한 마음으로 다스리고 가꾼 만큼 자라는 정직한 생물이다.
* 충남 공주 출생, (전) 대전광역시교육감, 경영학 박사, http://okedu.pe.kr
704명의 사마리아인
신 강 남*
세상에는 수많은 종족이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풍속과 언어,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고, 사는 곳도 얼음에 덮인 북극에서부터 아마존 밀림 속과 척박한 사막에 걸쳐 살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참으로 경이롭다.
사마리아인들은 중동의 팔레스타인 사마리아지역에서 둥지를 틀고 3천 년 이상 살고 있는 종족으로 원래는 이스라엘인(유대인)이었으나 기원전 8세기경 고대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혈통이 섞이면서 천대를 받기 시작하여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적에는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 또는 “개”로 까지 천대받으며 살았던 종족이다. 이렇게 천대받았던 민족이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범부까지 알게 된 것은 순전히 내가 믿는 종교에 의함인데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약술하면 이렇다 (누가복음 10;30-37)
- 어떤 사람이 산중의 험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얻어맞아서 거의 죽음 지경이 되어 길거리에 버려졌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최고의 종교지도자 대제사장도 그를 보고 피해 지나쳤고 이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로서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를 감독하는 레위인도 피해버렸으나
- 그들이 이방인, 개라고 천시하였던 사마리아인만은 나귀에서 내려 강도 만난 사람을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치료한 후 주막에 까지 데려가서 주인에게 일체의 경비를 지불하고 치료를 당부하였다는 내용으로써 예수님이 진정한 이웃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시며 드신 예화이다.
그 내용이 너무나 가슴에 닿는 내용이어서 종교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러나 아마도 내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무지하여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모든 종교가 사랑을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사한 예화는 종교마다 수없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사마리아인하면 접두사로 “선(善)”이라는 단어를 부치게 되고 사마리아인의 뜻을 의역하면 의인(義人)으로 자동 연상케 되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는 선을 좋아하고 추구하려는 착한 품성이 있는가 보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글을 남겼고 성직자들은 설교 때마다 예화로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찬양하였으며 좀처럼 인물화를 그리지 않는 ‘반 고흐’도 그림으로 그려 사마리아인의 사랑실천을 예찬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선행예화를 드시면서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은 사마리아인의 행동보다는 최고의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가증스러운 위선을 질책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다행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 주변에는 사마리아인 못지않은 의인들이 참 많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 일본에서는 한국유학생이 지하철에 떨어진 승객을 구하려고 뛰어 들었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온 일본열도가 의로운 죽음에 감동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시민대표들이 한국의 부모에게까지 찾아와 위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에 오래 살고 있는 친지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금기시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의 위기나 불행에는 좀처럼 나서지 않는단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희생된 한국 유학생을 의인으로 추앙하여 그들의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을 계획이라는데 너무나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나라에 그 정도(?)의 의인들은 주변에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 신문에도 “또 한명의 ‘지하철 영웅’ 50대 취객 구한 뒤 성(姓)만 밝히고 사라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독자들을 감동케 하였다. 사람을 살린 선행을 하고도 신분을 밝히지 않고 사라지는 의인들…
참으로 대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복 받을 사람들이다.
아마도 금년 장마나 태풍이 몇 번 지나가면 새로운 의인들이 도처에 많이 나타날 것이다. 헌데 예나 지금이나 의인들은 대부분 아니 전부가 대제상이나 레위인 같은 선택된 자들이 아니라 사마리아인 같은 평범하고도 질긴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물론 귀하신 분들이야 사는 곳도 생활하는 방식도 필부들 하고는 달라서 의로운 행동을 보여줄 기회가 없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으나 매년 자발적으로 내고 있는 적십자회비의 모금액이 우리나라 제일 부촌인 서초구와 강남구가 꼴찌라는데 대하여는 어떤 변명을 하실려는지…
안타까운 것은 사마리아인의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단다. 한때는 150만 명에 달했던 인구가 현재는 704명밖에 남지 않았다한다. 이유야 어떠하든 “선한 사람들”로 각인된 사마리아인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 마치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 한다”는 것과 같이 들려 마음을 어눌케 하는데 이런 추세라면 다음세기에는 사라진 종족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 사마리아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2007. 6. 22. 養賢齋에서
* 대전 출생, 수필가, 양현재학사 대표, kangnam1945@hanmail.net
천사의 나팔
며칠 전 이웃에서 원예를 전문으로 하시는 분이 화분을 하나 주시며 키워보라기에 꽃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천사의 나팔’이란다.
나무의 생김새나 잎사귀의 모양이 별로 탐탁치는 않았으나 주는 사람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고 꽃이름이 너무 과장된 듯싶어 호기심으로 거실에 들여 놓고 며칠간 정성을 보였더니 오늘 아침 꽃이 활짝 피었는데 정말 생김새가 천사의 나팔같이 생겼다. 세상의 누구도 천사를 본 사람이 없지만 천사는 흰옷을 걸쳐야 되고 하이얀 날개가 펄럭여야 되며 생김새는 하얀 피부에 자루가 기다란 나팔을 불면서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대부분의 사람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마치 도깨비라면 머리에 뿔이 솟아 있고 손에는 순전히 폼으로 들고 다니는 듯싶은 방망이가 들여져 있어야 하듯이…
그런데 나는 작년에 흰옷을 입고 피부가 하이얀 진짜 천사 두 분을 보았는데 그들의 모습과 언행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나를 비롯한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널리 알려졌었던 이야기지만 삭막하고 썰렁한 요즘 같은 세상살이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자꾸 들어도 좋을 듯싶어 다시 한번 감동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작년 2월,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는 43년 동안 그곳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펴오던 외국인 수녀 두 분이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몰래 섬을 떠나버린 작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소록도주민들은 이별을 슬퍼하며 일손도 놓은 채 성당에 모여 열흘 넘게 감사의 미사를 올렸단다. 그들이 남긴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라는 제하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고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말하며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에 대하여 이 편지로 용서를 빈다.”고 했다. 이들은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2), 마가레트(71)수녀로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그녀들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슬픈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외진 섬 소록도에 들어와서 장갑도 끼지 않은 채 환자들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그들의 벗이 되고 “할매”가 되었다. 그리고 오직 숨어서 어루만지는 손의 기적과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는 베품이 참베품임을 믿었던 두 사람은 상(賞)이나 인터뷰도 일체 거절하였단다.
10여 년 전 본국 오스트리아정부에서 이들의 선행을 알아내고 정부훈장을 수여하였으나 본인들이 받기를 한사코 거절하여 할 수 없이 주한 오스트리아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 줄 수 있었고 병원에서 마련해 준 회갑잔치도 ‘기도하러 간다.’고 피해버렸으며, 월 10만원씩 나오는 장기봉사자 식비도 거절하여 ‘식비를 안받으면 봉사자 자격을 잃는다.’고 설득해 줄 수 있었다는데, 이들은 이 돈은 물론 본국 수녀회에서 보내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의 간식비와 완쾌되어 소록도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여비로 모두 주어버리고…
그래서 소록도주민들은 두 수녀님들을 살아 있는 성모마리아로 여기고 지금도 성당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단다. 그래서 이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들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헌신과 봉사의 삶을 보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며 자성도 하여 본다. 나도 오래전 소록도를 두 번이나 가보았지만 그들의 상처를 맨손으로 어루만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쇼에 능한 정치인들이라 해도 그곳 방문을 꺼려하고 설령 방문한다하여도 손을 잡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머나먼 타국의 외로운 섬에서 43년간의 헌신적 봉사는 그 마음 속에 천사의 성품이 서려있지 않는 한 보통사람이 흉내 낼 수 없다고 여겨진다.
40 여 년의 세월은 그녀들의 고았던 얼굴에 굵은 주름을 새겨 넣었고 발랄하고 경쾌하던 걸음걸이는 ‘느림’이 느껴졌으며 손가락과 손목의 억세었던 힘줄들은 느슨하여져서 무엇을 집어도 쉽게 떨어트리는 ‘늙음의 징후’들을 감지하면서 떠나야할 때를 가늠하셨을 터이고 정든 사람들과의 힘든 이별행사도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아 새벽 첫배를 타고 몰래 섬을 빠져 나갔는데 그들의 손에는 43년 전 섬에 들어 올 때 지녔던 낡은 가방 한 개씩만이 들려져 있었다. 오스트리아로 귀국한 마가렛 수녀는 3평 남짓한 그녀의 방에 살면서 지금도 날마다 소록도의 꿈을 꾼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방문 앞에는 그분이 평생 마음에 담아 두고 살았던 말이 한국말로 쓰여 있단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그래서 나는 화분에서 하이얀 꽃을 보게 해주고 떠나버린 천사들을 생각나게 하여주는 “천사의 나팔”을 정성껏 키워볼 작정이다.
2007. 6. 30. 養賢齋에서
졸(卒)
詩人 마종기는 그의 시에서 아버지의 신세를 멸치에 비유하였습니다.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시인은 정말 근자의 아버지 모습을 정확히 표현한 것 같습니다. 남성성(性)과 부성(性)이 위축되어 가고 있는 시대에 위치한 아버지는 혼(魂)도 진(盡)도 다 빠진 돈버는 기계일 뿐이었는데 그나마 20~30년 동안 아내와 아이들로부터 존재가치를 인정받게 하였던 직장에서 마저 퇴출당하는 순간 그야말로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물 우려 낸 며루치는 강아지도 먹지 않습니다. 하물며 입맛 까다로운 인간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는 (우리나라도 일부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 사회(직장)에서 은퇴한 남편들을 “젖은 낙엽족”이라고 부른답니다. 무슨 말 이냐구요? 으스스한 늦가을 비에 젖어 물기가 흠뻑 머금은 낙엽이 구두밑바닥에 붙으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듯이 사회에서 퇴출당한 남편들이 자기를 버린 사회를 두려워하고 마누라 치맛자락만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불쌍한 모습의 남자들을 “젖은 낙엽”에 비유한답니다.
자식들도 비슷하지요. 자식들이 아버지의 보호막을 벗고 제힘으로 서는 순간, 아버지는 그나마 존재이유마저 잃게 되지요.
조금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조선시대에 최우선 시 되었던 복지정책은 사궁민(四窮民), 즉 “궁핍한 네 부류의 백성”에 대한 특별 배려였는데 사궁민이란 환과고독(鰥寡孤獨), 다시 말해서 늙고 아내가 없는 홀아비(鰥), 젊어서 남편을 잃은 홀어머니(寡), 어린 고아(孤), 자식 없는 늙은 노인(獨)들인데 태조대왕은 즉위교서에서 “환과고독은 왕정(王政)으로써 먼저 할 바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해야 될 것”이라고 밝히고 그들을 돌보는 것을 조선개국이념의 하나로 삼았답니다.
그러면 최근 사회에서 퇴출당하고 가정에서 버림받는 현대의 불쌍한 남자들은 어떻게 대하여야 하겠습니까. 이들도 나라의 구성원임에는 틀림없고 젊은 시절에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국가에 기여한 바도 무시할 수 없으니 이들을 구휼대상에 포함시켜 오궁민(五窮民)으로 편입시켜(?) 나라에서 돌보아 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들에 대한 호칭입니다. 사궁민(四窮民)은 환과고독(鰥寡孤獨)이라는 멋진 호칭을 한문으로 한자(一字)씩 가지고 있는데 떨어진 갓끈 신세인 남자들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 하고 깊은 시름에 잠겨 고민하던 중 떠오른 기막힌 한자가 있었으니 “장기판의 졸(卒)”, 어떻습니까, 적절한 선택이지요? 그래서 조선시대의 사궁민은 환과고독이었으나 대한민국 참여정부에서는 “버림받은 남자(卒)”가 추가되어 복지정책의 대상이 오궁민(五窮民), 즉 환과고독졸(鰥寡孤獨卒)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데 여러분의 의향은 어떠하신지. 물론 현 정권의 보건복지부장관님이나 청와대의 높으신 어른들께서도 저의 제안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것으로 확신합니다. 왜냐구요, 뻔하잖아요 저들도 1년 후면 卒신세가 될 것이 뻔하니… 좋은 자리 있을 때 노후대책 세워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나 세상의 卒들이시여! 용기를 가지고 희망을 이야기합시다. 장기판에서 卒들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장기판에서 卒들에겐 후퇴란 없습니다. 오직 전진과 우회만 있을 뿐. 한발, 한걸음씩 전진 우회하여 결국 적들의 대장을 쓰러뜨리는 것이 졸들이 아닙니까.
몇 년 전 들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서울의 달리는 지하철 속에서 40대 후반의 남자가 물건을 팔고 있었는데 열차의 진동으로 그는 제 몸 조차도 가누지를 못하고, 물건을 소개하는 그의 목소리는 몹시 더듬거렸고, 얼굴과 목덜미에서는 진땀이 흘러내려 누가 보아도 오늘 처음 나온 장사꾼임에 틀림없었답니다. 이를 지켜보는 승객들이 오히려 안쓰럽게 여기고 있는데 승객 중 연세가 지극하신 점잖은 노인 한 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행상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큰 목소리로 “이봐, 젊은이, 오늘 첫 장사 같은데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가, 용기를 내어 다시 크게 외쳐보게. 나도 젊어서 자네같이 여러 번 실패하였으나 다시 일어났다네” 하고 격려하며 물건을 팔아주자 이에 고무되어 용기를 되찾은 행상이 큰 목소리로 다시 물건을 소개하였고 차내의 승객들은 큰 박수로 환호하면서 물건을 팔아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내년부터 베이비 붐시대(1955년 이후 출생)가 직장에서 대거 퇴출 될 것이라는 어두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여러분 가정의 아버지가 또는 아들이 “卒”이 되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러분도 그들을 “며루치”로 취급하시렵니까?
아니면 “젖은 낙엽”으로 대하시렵니까, 그도 저도 아니면 장기판의 卒로 생각하시렵니까. 그런 경우에 처하면 제일 당황하는 것은 본인 자신들입니다. 아무도 그들의 아픈 속내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줍시다. 그들의 눈가에 어리는 이슬 같은 물기를 닦아 줍시다. 그리고 그의 귀에다 가장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줍시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이제 우리 다시 시작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거예요.”
2007. 1. 26. 養賢齋에서
신발 두 켤레
최 일 순*
우리 엄마는 지금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참으로 힘든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고 계시다. 여기서 저기서 황망히 달려온 자식들을 눈으로 확인하곤 무슨 말인가를 하시느라 입을 뻐끔대건만, 한 마디 말도 들을 수가 없다. 온 몸에 줄줄이 매단 관이 입안에도 꽂혀있어 음절이 되어 나오지를 않는 때문이다. 일생을 마감하며 온 기운 쥐어짜 쏟아놓는 엄마의 마지막 말은 침통한 주변 공기가 흡수해 버린다.
이내 혼수상태에 빠지는 우리 엄마, 얼굴이 퉁퉁 부어 알아 볼 수조차 없다.
그 날 밤 병원에서 돌아온 나는 엄마가 계시던 방문을 열어보았다. 텅 빈 방안엔 초라한 가방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가슴이 참 아팠다. 때 묻고 허름한 엄마 가방을 뒤져보았다. 그 속엔 후줄근한 손수건, 죽어도 손에서 못 놓는다는 담배 두 갑, 라이터, 아파트 현관 열쇠. 힘없는 손으로 삐뚤빼뚤 눌러 쓴 어느 분의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 전부였다. 그 물건들조차 왜 그리도 초라한지.
아파트 열쇠를 손에 쥐니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엄마의 족쇄며 아픔이며 한숨이었을 열쇠였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온 종일 공원으로, 찜질방으로, 손수 일군 하천의 밭으로 헤매고 다니다 어두워져서야 억지로 들어간다던 아파트였다. “이 시상이서 집 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이써어?”라고 하시던 분이 눈만 뜨면 집을 나가, 어두워져서 들어오는 일상이 어찌 편안했으랴.
내 살림 일구다 3년 전 엄마는 오빠네로 오셨다. 하지만 얹혀사는 듯, 내 있을 곳이 아닌 듯 해 마음은 늘 먼 허공을 헤매던 우리 엄마였다. 당당한 가족이 못 되고 뒷방의 숨죽인 노인네로, 한숨으로 살았을 우리 엄마. 조심스러워 오줌도 마음 놓고 못 눈다했다. 냉장고 문은 열어볼 엄두조차 못 내는 듯 했다.
“입맛 웁어서어 아침 안 머꾸 노인정이 가믄 즘심 때가 되기 전 배가 고퍼 야아. 그럴 때 막걸리 한 사발 벌컥벌컥 들이키믄 어질거리지만 한결 든든햐야아.”
언젠가 이 말을 하는 엄마는 웃고 있었지만 눈 속엔 눈물이 글썽대었다. 마음이 짠했다.
“달라구 해서 먹찌이, 왜 배고프게 사러어?”
속상하기도 하고 화가 나서 나는 막 소리쳤다. 엄마는 야단맞은 아이처럼 이내 찌르두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무슨 힘이 이까디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엄마의 고독과 소외감이 비로소 감지되었다. 주는 것만 먹고살면 마음도 허하고, 자주 배가 고픔을 오랜 하숙생활을 통해 나는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어버이날엔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와 토종닭을 삶아드렸다. 이조차 없었지만 엄마는 땀까지 흘리며 참으로 맛있게 드셨다. 갖가지 과일을 앞에 두고는 눈물까지 펑펑 쏟으셨다. 그 덥던 지난여름에도 수박 한 쪽 못 먹어봤다며. 살뜰한 정에 엄마는 너무도 목말라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아프던지.
큰 잘못을 저질렀다. 엄마가 제일 편안해 하는 우리 집에서 내가 모실 걸 그랬다. 이제는 후회해도 다시는,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어버이날이 와도 누구한테 꽃을 달아드릴까? 내 얼굴만 봐도 방안이 환해지도록 웃으며 전신으로 누가 날 반길까? 귀가 먹었어도, 전신에 검버섯이 피었어도 엄마만 곁에 있으면 마음이 참으로 충족되었었는데.
엄마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 또 김치 담아 준다고 했었는데. 열세 살에 집 떠나와 이리저리 떠돌고 사느라 따뜻한 엄마 손길 못 받고 자라 어느 땐 내가 고아 같았었다. 가까이 사는 요즘에야 우리 집에 오면 냉장고 청소도 해 주고, 빨래도 예쁘게 개어 놓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오만난장 늘어놓고 사는 나는 그런 엄마가 얼마나 좋았던가.
엄마가 김치 담가 주실 때면 나는 참으로 좋았다. 그 때마다 “다음에 또 담가 줘.” 하면 엄마는 “그러엄.” 하며 무척 흐뭇해하셨다. 80이 다 된 나이에도 아직도 자식에게 줄 그 무엇이 남아 있음이 그리도 달가우셨던 모양이다.
오늘 아버지한테 엄마 빨리 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품위 있는 죽음까지는 기대 못해도 고통으로 시달리다, 시달리다 가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엄마 모습 지켜보자면 가슴 또한 미어졌다.
“돌언 장날 나랑 유성장이 즘 가자.”
“왜애, 엄마?”
“신발 즘 사게.”
오빠 가족이 여름휴가를 떠나 우리 집에 오신 첫날, 나랑 나눈 대화이다. 엄마가 쓰러지기 전 날이었다. 아무래도 신고 오신 굽 높은 샌들이 팔십에 가까운 노인에겐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나는 신발장 문을 열고 오래 전에 사두었던 굽 낮고 편안해 뵈는 랜드로바 한 켤레를 꺼냈다. 약간 쨍기는 듯 해 하룬가 신었다 방치해 둔 신이었다. 그 신은 엄마 발에 쏙 들어갔다. 약간 헐렁하긴 하지만, 양말을 신으면 꼭 맞을 거라며 엄마는 여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내친 김에 다른 신 한 켤레도 꺼내 보였다. 착용감이 좋으면서도 아주 가벼운 단화였다. 엄마는 그 신도 마음에 꼭 든다 했다.
랜드로바는 구두약을 새로 칠하고 가스 불에 달구어 반짝반짝 광까지 내었다. 단화는 뒤꿈치가 약간 헐어 그 부분만 손보아 드릴 참이었다.
“어젯밤 꿈에 황금 잉어 두 마리가 구움실구움실 노니는 걸 봔 넌디, 이르키 좋은 신을 으들라고 꿈이 그렇게 좋았네 벼여.”
엄마는 그 날 여간 기뻐하는 게 아니었다. 두 켤레의 신발을 가슴에 꼭 껴안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오후 갑자기 숨을 못 쉬고 배를 싸안고 헉헉대던 엄마는 화장실에 갈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토하셨다. 점심 먹은 게 체했나 보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일 아침이면 거뜬히 일어나실 거라 믿으며. 며칠 전 나 또한 속이 매슥거리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더니, 토했다. 그 후, 지독한 감기 몸살로 꼼짝을 못하던 참이었다.
그 날 저녁 내 몸에 겨우 의지해 동네 병원에 가신 엄마는 응급처치만을 받고 오셨다. 밤새 엄마의 숨소리는 가빠졌고, 방을 기어 다닐 만큼 고통스러워했다. 내 숨소리마저 가빠졌다. 이빨을 옹동그려 문 엄마의 모습으로 고통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1, 2분 간격으로 기다시피 엄마는 밤새 화장실을 들락대었다. 날이라도 밝거든 병원에 가자며 엄마한테 더 큰 인내만을 요구했었다. 나조차 옴짝달싹 못할 만큼 널브러져 있던 때라 나라도 기운을 비축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새벽녘 엄마는 완전히 탈진해 있었다. 눈빛마저 풀린 듯 했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엄마는 밤새 오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목욕이라도 하고 병원에 갈까?”
엄마는 흐릿한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끌다시피 목욕탕 바닥에 엄마를 눕히곤 머리를 감기고, 온 몸에 비누질을 했다. 그 사이 엄마는 정신마저 놓으셨다.
허겁지겁 119 구급대의 도움으로 병원에 가니, 온 가족을 불러 모으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었다. 이유는 모르는데 온 몸이 산성화 되어있다 했다. 산사람의 몸이 아니라 했다.
우리 엄마는 어깨 쭉 펴고 걸음도 가잔가잔 잘 걸으셨는데….
어제 아침에도 집 근처 공원에 나가 산책도 하다 들어오셨는데….
엄마는 내가 그렇게도 좋았던 것일까. 이승에서의 마지막 목욕도 내게 맡기고, 내 손에 의지해 병원에 가시구.
이틀 후 엄마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엄마를 속박했던 온갖 기구들도 서서히 떼어졌다. 서서히 식어 가는 엄마 다리를 싸안고 오열했다.
나는 엄마가 찜 해둔 뒤꿈치 닳은 구두를 손질하다 눈물을 닦는다. 엄마는 내 체온 스민 이 신을 신고, 아버지가 기다리는 하늘나라에 가잔가잔 가실 것 같아.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축제 현장은 이미 아름다운 빛에 파묻혀 있었다. 번쩍대는 빛 따라 마음도 들썩거려졌다. 가슴까지 두근대었다. 휘황찬란한 빛 터널, 대형나무, 아치 모형의 다리 등 갖가지 빛 조형물은 환상적이었다. 들인 정성이 읽혀졌다.
캄캄한 어둠 때문에 빛은 더욱 찬란했다. 빛 때문에 어둠은 더욱 어둠다웠다. 텔레비전에서 본 대전엑스포장의 ‘루미나르에 빛 축제’ 현장이 마음을 끌어 모처럼 가족과 외식을 하고 축제 현장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온 몸으로 달려드는 추위가 혹독했다. 곁에 있는 사람의 팔을 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가까우니 마음까지 바싹 당겨졌다. 새록새록 정이 솟았다. 삶이 한결 풍성하게 느껴졌다.
무대 중앙 전면에 설치한 대형 난로 위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활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발길은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이미 불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 따라, 퍼지는 열기 따라 마음도 상승되었다. 주변의 공기까지 뜨겁게 달구어졌다. 따뜻하게 덥혀진 가슴, 따끈따끈한 손, 오리털 점퍼까지 오그라지기 직전이었다. 그 열기가 한없이 좋았다.
갖가지 빛으로 장식한 조형물 사이로 걸으면 누구나 주인공이 되었다. 귀한 존재가 되었다. 여기서 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어린 자녀를, 연인을, 친구를, 부모님을 가장 멋진 장소에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먼 훗날 삶이 쓸쓸할 때, 지리멸렬하게 느껴질 때 섬광처럼 떠올라 미소 짓게 할 순간 속의 영원으로 각인될 장면일 것이다.
우리가 초대한 딸 친구 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좋은 것을 함께 나눌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축제가 더욱 축제다웠다. 딸아이와 친구는 팔짱을 끼고 소곤대기도 하고 먹을거리를 사서 먹으며 하하거렸다. 특별 할 것 없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볼거리가 다양했다. 야외의 포장마차 생음악 감상실, 물 건너서 온 인형극, 각 나라 사람들이 나와 민속의상을 입고 벌이는 화려한 퍼레이드, 마음을 들뜨게 하는 악대와 춤 등.
정작 내 관심을 끈 것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불을 피워 올린 장작불 난로였다. 캄캄한 야외 이곳저곳에 작은 난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반가웠다. 불을 지필 나무토막과 판자들까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횡재라도 만난 양 신이 났다.
나는 부지깽이 될만한 나무 막대를 골라들고는 자청해서 화부가 되었다. 타다가 흩어진 채 꺼져가는 나무 조각들을 모아 세웠다. 이내 꺼져가던 불길이 되살아났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살아서 춤추며 하늘로 오르는 무희 같았다.
장작이 타오르며 피어오르는 불기둥,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작은 불 부스러기들은 공중으로 높이, 높이 떠올라갔다. 캄캄한 밤하늘의 작은 별 빛이었다. 빛은 이내 사그라지며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아쉬웠다. 찰나적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불꽃이었다.
타오르는 불길 위에 연신 새 장작을 올려놓았다. 밑에서 받쳐주고, 현재에 타오르고, 위에서 새롭게 이어주는 불길. 계속되는 불길의 순환 속에 일관된 흐름이 있었다. 삶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이어졌겠거니 싶었다.
등은 시린데 버얼겋게 달구어진 얼굴은 견디기 힘들만큼 뜨거웠다. 시린 등을 돌려 불 가까이 두면 서서히 따스해졌다. 어둠을 응시한 채 등을 달구는 맛도 좋았다.
불을 오래 쬐고 있으면 따뜻하고 아늑했다.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꽃이 피어났다.
불길이 자즈러질만 하면 나무토막을 수시로 집어넣었다. 뜨거운 열기를 오래, 오래 내 몸 안에 담아두고 싶었다. 뜨거워진 열기가 행복의 강도 같았다. 기쁨의 강도 같았다. 밤새도록 불을 지피고 있어도 좋을 듯 했다. 불을 오래 쬐고 있으면 무엇 보다 몸이 개운하고 마음이 개운해서 좋았다.
타오르는 불길 앞에 서 있자니, 어린 시절 사랑 부엌에서 소죽을 끓이던 일이 떠올랐다. 불이 활활 타오르면 다리를 아궁이 양 벽에 걸쳐놓곤 철푸덕이 주저앉아 불을 쬐었다. 이내 가랑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워졌다.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쐬는 열기가 한없이 좋았다. 아무리 뜨거워도 그대로의 자세를 허무러트리고 싶지가 않았다.
불을 때며 부지깽이로 아궁이나 부엌 바닥을, 벽을 땅땅 두드렸다. 무엇 쌓인 게 있어서가 아니었다. 새카맣게 그을린 벽이나 아궁이 주둥이에 게발세발 글씨를 쓰기도 했다. 몸에서 나오는 자연 발생적인 행위였다.
불을 때면 아무런 잡념이 일어나지 않았다. 불 때는 그 자체를 그냥 즐길 수 있어 좋았다.
불길이 사그라지면 아쉬웠다. 뽀글거리며 피어오르던 행복의 입자들이 자지러드는 느낌이었다. 이내 열기가 그리웠다. 다시 불을 지폈다. 그러면 꺼진 기쁨의 입자들이 다시금 뽀글대며 피어올랐다.
아궁이의 잉검불이 벌건할 때면 아버지는 동치미에 동동 뜬 지고추를 큰 언니한테 쫑쫑 썰어 달랬다. 아버지는 아궁이 불을 끄집어내어 지고추에 들기름 듬뿍 붓고 달달 볶았다. 새카맣게 그을리고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서 지글지글 피어오르던 기름 내. 매콤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집안 가득 퍼졌다. 입안 가득 군침이 고였다. 소박하나 단란했던 행복이 기름내 보다 고소하던 시절이었다.
원시시대에도 사람들은 불 주위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사냥한 고기를 익혔을 것이다. 함께 음식을 나누면 마음이 따뜻해졌을 것이며 한 울타리의 결속력 또한 다져졌을 것이다.
20여 년 전, 처음으로 아파트가 아닌 주택에서 몇 개월 짧게 살던 때의 기억도 되살아났다. 길 위에서 암초를 만나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해 마음에 암흑이 깔리던 시절이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친 후면 생활 쓰레기를 들고 집 앞 공터로 나갔다. 주변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쓰레기에 불을 지피면 일시에 주변이 화안해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꽃 보다 아름다웠다.
불을 쬐고 있으면 고달픈 현실도, 암담한 내일도 다 잊을 수 있었다. 가슴까지 따뜻하게 달구어졌다. 불길이 사그라드는 게 아쉬웠다. 밤마다 더 태울 것이 있었으면 싶었다.
문득 밤새 불을 지피며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는 비운의 왕세자인, 장헌 세자가 생각났다. 그는 빈의 저고리 건 자신의 옷이건 닥치는 대로 걷어다 불을 지폈다. 그리고는 미친 듯 좋아했다. 마음 후련해 했다.
세자의 광증을 사사건건 못마땅해 하는 부친의 질책과 분노는 날마다 하늘을 찔렀다. 부왕(영조)을 친견하고 온 날이면 세자는 더욱 괴로워했다. 아버지는 높고도 높은 산이었다. 뛰어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세자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마음의 응어리를, 분노를, 울분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태웠을 것이다. 세자빈은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더 태울 것이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세자를 바라보기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자신이 입고 있는 옷가지까지 벗어 주었다 한다.
밤도 이슥해져 있었다.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나는 과거로의 먼 시간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심신이 말끔했다. 사느라 쌓아두었던 이런저런 삶의 찌꺼기까지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다 태운 듯 했다. 고단함이 전신에 휘감겼지만 모든 게 흡족했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어느 먼 나라 여행에서 돌아온 양 모든 게 아득했다. 꿈결인 양 피로조차 감미로웠다.
* 충남 공주 출생, ≪현대문학≫(1990)에 수필 천료, 농촌농민문학상, 대전문학상 수상, 수필집 『지워질 발자국이라도』 ,
『시인의 눈』 , 『폐달을 밟으며』 , 『마음에 뜰 하나 들여 놓으며』 등, illsoonchio@hanmail.net
믿고 산다는 것
김 현 주*
며칠 전 난 또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연립주택을 가지고 있는 터라 임대를 위해 부동산에 방을 내놓았다. 그런데 방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언제 오는 지를 예측할 수 없고 시시때때로 전화가 와 열쇠를 전달해 주는 일이 여간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아니다. 마침 수업을 하고 있는데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집 앞에 방을 보러 왔댄다. 금방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집 현관의 번호를 알려 주었다. 별다른 의심 없이 집안에 열쇠가 있으니 방을 보고 가져다 놓으라고 하고는 수업을 계속했다.
그 일이 있은 이틀 후 난 핸드백 속에 돈 봉투가 있었음을 뒤늦게 생각하고 열어 보았다. 그런데 분명 지퍼 안에 넣어두었던 두 개의 현금 봉투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너무 황당했다.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한 봉투가 없고 보니 불현듯 이틀 전 생각 없이 현관 출입문 번호를 알려준 것이 실수였음을 알았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했지만,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고 보니 전화를 해 돈을 가져갔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문제였다.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사람이기에 직업인으로서의 기본 자질을 믿었고 수없이 남의 집을 드나들며 그런 허튼 생각을 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사람을 무턱대고 믿은 건 잘못이었다. 허나 금방 들통 날 뻔한 짓을 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혹여 내가 다른 곳에 잘못 두고 찾는 것은 아닐까 하여 무거운 김치 냉장고까지 옮겨가며 확인했지만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돈은 학원비 받은 것과 신권을 조금씩 모아 비상금처럼 넣어둔 돈이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부동산에 전화를 했다. 그날 우리 집에 손님을 데리고 왔던 그녀와 통화를 했다. 내가 뭔가를 잃어 버렸다는데도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이 그녀는 너무도 태연했다. 통화를 하는 동안 왠지 모르게 상대방에 대한 의혹이 커졌고 그녀가 확실하다는 확신이 생기기까지 했다. 그녀는 뻔뻔하게도 나한테 경찰에 신고하라는 얘기까지 했다. 결국 신고해도 자기는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있다는 말투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세상 참 무섭고 험하구나 하는 두려움과 믿음에 대한 배신으로 멀미가 나듯 어지러웠다. 분명 그날 다녀간 사람이 자신뿐인데 이쪽에서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한 행동 같아 너무 괘씸하고 분했다.
사람을 믿은 내가 더없이 어리석고 바보가 되어버린 이 나라 이 사회가 너무 싫고 실망스러웠다. 안그래도 남편은 내가 의심 없이 아무나 믿는 것을 경고한터라 뭐라 말도 할 수 없이 혼자만 고심을 해야 했다. 돈을 잃은 것도 억울했지만 그보다는 그 파렴치한 중개인을 응징해야 하는데 뾰죽한 묘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평소 나에게 대책 없이 사람을 믿는 건 현실에 맞지 않다고 충고해주는 친구가 있다. 믿을 수 없는 게 사람이고 세상이라고 그토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을 했던 친구는 내 어이없는 얘기를 듣고는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너무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였는지 나 같은 바보와는 친구도 하지 않겠노라며 다시는 안볼 듯한 기세로 책망을 했다. 믿고 사는 네가 옳은데 이 사회는 그런 네가 살아 갈 수 있도록 맑고 깨끗한 곳이 아니라며 감시카메라를 달아서라도 잡겠노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고맙고도 미안했다. 나의 어리석음을 질책해주는 그 마음이 유난히도 가슴에 와 닿았다. 맞아 난 혼나야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번번이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난 따끔하게 매운 맛을 보아야 했다. 하필 밥 먹으러간 자리에서 속상한 마음에 생각 없이 말을 꺼내 밥을 먹는 내내 언짢은 기분이었다. 둘 다 체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음식점을 나왔지만 그 친구의 태도는 여전히 완강했다. 날 아예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다. 나 같은 바보와는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강경하고도 냉혹한 태도가 날 아프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 친구의 따끔한 질책이 정말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내 스스로 이 아픈 기억이 가슴깊이 새겨져 다시는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길 바랐다. 내게는 어떤 상황에서 상대를 의심하거나 경계할 줄 모르는 대책 없음이 있다. 그 친구의 말대로 언제 봤다고 무얼 보고 믿느냐고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고 산다는 게 나로선 쉽지가 않다. 번번이 당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내 자신이 바뀌지 않은 걸 보면 내 뇌구조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갑갑할 때도 있다.
겨우 화를 풀고 돌아오며 나를 되짚어 본다. 나이 오십이 된 내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저 난 세상이 내 맘 같은 줄 믿고 살 뿐인데 늘 큰 죄를 지은 양 되어 버리는 이 사회구조에 갑자기 환멸이 느껴졌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욕심보다는 나누고 베풀며 사는 아름다운 세상일 순 없는 걸까? 내가 꿈꾸는 그런 세상이 나만의 욕심이고 현실에선 불가능한 환상인 걸까? 몹시 착잡하고 우울한 저녁이다. 사람이 무섭고 싫다. 세상이 이토록 살벌하고 내 마음 같지 않으니 그런 세상 속에 나를 내놓기가 두렵다. 조그마한 방심 속에도 항상 뭔가 범죄적 요소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산다는 게 무섭다. 도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허긴 내 맘 같은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잣대, 내 기준으로 세상을 본 내가 바보였다. 이제부터 나는 사람을 일단 의심하고 경계하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참으로 서글프고 살 맛 안 나는 이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순수함을 버리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 봐야한다. 믿고 사는 세상, 경계 없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세상은 요원한 걸까.
참으로 씁쓸하고 안타까운 심정이다.
명품인생
사람은 누구나 건강하고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갈망한다. 그러나 살다보면 우리의 바람처럼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고, 누리며 살만큼 세상사가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다. 능력 있는 부모나 조상의 덕으로 별 노력 않고도 고생 없이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빠듯한 생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여유를 모르고 살아간다. 물론 물질적 풍요가 꼭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질 때 여유도 행복도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만족스럽고 행복한 명품인생이란 어떤 걸까?
사람마다 행복의 가치 기준은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경제적 안정과 안락한 삶을 배
제 할 순 없으리라. 아무리 정신적 만족과 이상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삶의 가장 기본적
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고통이 따르고 비참 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건강이 나빠졌거나 회복 할 수 없는 깊은 병에 걸렸다면 아무리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 하더라도 결코 만족한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건 역시 건강이고 정신적 육체적 건강함과 더불어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지 않고 구성원의 일부로 활력 있게 살아 갈 때 우린 행복을 떠올린다. 인간은 끝없는 욕망의 동물이다. 모든 화와 불행의 근원은 욕심과 집착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한 첫째 조건은 마음을 깨끗하고 가볍게 비우는 일이다. 세상의 무엇을 얻어도 욕심에 미치지 못한다면 결코 행복 할 수 없다.
둘째는 혼자만 잘 되고 잘 살려 하기보다는 주변과 이웃을 돌아보고 나누고 베풀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며 선행은 곧 자신을 위한 것이다.
셋째는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업의 대부분은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것이기 보다는 가족의 생계와 생활을 위한 호구지책일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일의 능률도 만족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장기와 재능을 살려 그 일을 통해 자기성취와 경제적 안정을 가져 올 수 있다면 더없이 바람직한 일이며 이를 성공이라 말할 수 있겠다.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만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는가에 달려 있다 했다. 자신만의 안일한 편안함과 호의호식을 떠나 주변을 돌아보고 더불어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참되고 가치 있는 삶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들이 존경하고 본받으려 하는 많은 성인들의 삶 역시 이타적이고 모두를 위하려는 넓은 마음 씀과 배려임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성공을 꿈꾸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사회적 성공과 부와 명성을 이루기에 앞서 인간이 지녀야할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덕목이 인격이요 품성임을 알아야 한다.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지 않고 이룬 성공과 부와 명성은 오래 가지 못하며 그것이 널리 이롭게 쓰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공을 갈망하는 사람일수록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일수록 먼저 인간다운 감성과 품격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한 재벌의 추태를 보며 가진 자와 누리는 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그 어느 때 보다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명품인생의 조건은 거창한 사회적 성공이나 부를 이루는 것보다는 작고 소박한 꿈을 가지고 살면서도 자신의 삶에 뚜렷한 주관과 신념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밖의 현란한 유혹에 빠져 진정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조차 모르며 부평초처럼 떠다니고 있는지 모른다.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의 세상에서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자기만의 분명한 가치 판단과 소신을 가지고 의존적이기보다는 독립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이 사회 속에서도 개성 있고 당당한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성형왕국이니 불륜 공화국이니 하는 오명으로 얼룩져 있다. 이 모든 게 중심을 잃고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욕망은 소금과 같아서 채울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한다. 세상은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더불어 공존하는 것이다. 모두가 잘나야 하고 모두가 성공하고 부자일 필요는 없다. 다만 주어진 현실에 자신을 어떻게 맞추어 가며 행복을 발견하고 주변을 돌아보며 함께 살아 갈 길을 고민해야 한다. 갈수록 세상이 살맛나기 보다는 재미없고 힘들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진정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작은 것을 통해 느끼는 일상의 행복이 사라진지 오래다. 모든 것은 물질과 비례해 평가되는 이 시대에 인간의 순수한 온정과 사랑은 설 곳이 없이 빛바랜 사진첩 속의 추억이 되어 버린 듯하다. 한 생을 살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 주저함이 없고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솔선하는 일에 적극적이며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 한다면 그의 삶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고결할 것이다. 생의 마지막에 당도해서 정말 후회 없는 삶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두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
세상은 빵만으론 살수 없지만 돈으로도 안 되는 것이 많다.
전(錢전)과의 전쟁 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황금만능, 배금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오롯한 인성을 지니고 청빈하게 사는 것을 꿈꾼다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수도 있겠다. 허나 우리의 삶에선 무언가 집착하며 얻으려 하다보면 그보다 더 소중한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돈을 쫒는 것이 가장 무의미한 생의 낭비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부와 성공은 쫒아서 되는 게 아니라 사심을 버리고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며 모두를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일할 때 축복처럼 찾아오는 것이라 믿는다. 이처럼 욕심을 버리고 자신만의 이기적인 삶보다는 주변과 더불어 함께 나누고 베푸는 삶을 몸소 실천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이룰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명품인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여우와 신포도
차창 밖의 햇살이 금실을 늘여 놓은 듯 반짝이고 한결 따스해졌다. 며칠 사이 성큼 자란 목련의 꽃망울에도 봄의 생명력은 가득 차 있다. 어느새 봄은 우리 곁에 다가와 속삭인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활짝 켜고 두꺼운 외투를 벗어 던진 채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채근한다.
계절의 수레바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한 맞물림으로 돌아가고 있다. 헌데, 빠른 세월의 순환에 왠지 뒤뚱거리는 오리걸음으로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삶에 대한 패기를 잃은 때문일까? 아님 나이 탓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게 좋았던 적도 있었다. 무조건 빨리 어른이 되어 내 마음대로 뭐든 하고 싶었던 그때는 나이 먹는 게 훈장처럼 뿌듯했었다. 막상 어른이 되었고,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쉽게 살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면서 나이를 먹는 것도, 사는 것도 다 부담스러워졌다. 갈수록 사람답게,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 보면서 나는 작아져 갔다.
주변을 돌아보면 해야 할 일,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내 작은 삶에 갇혀 그 무엇도 하진 못한 채 전전긍긍하며 살아온 것 같다. 생의 한 획을 긋고 또 다른 세대의 시작을 앞둔 시점에서 나 자신을 돌아본다.
지금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 앞으로의 내 삶은? 종착역에서의 내 모습은?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질문들이어서 늘 눈 맞추기를 거부한 채 외면했었다. 돌아보니 어느새 난 삶의 반환점을 돌아 골인지점을 향하고 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으며 이제까지의 삶이 그렇게 만족스럽지도, 내세울 만하지도 않음을 안다. 그런데 앞으로도 지금처럼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정말 의미 없고 지루한 나날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동안이야 핑계거리라도 있었다. 직장을 다녔고 아이들을 키워야 했으며 가정을 꾸려야 했으니 개인적인 시간이 많지 않았노라고. 그러나 이제는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직장도 다니지 않으며, 아이들도 다 자랐고 가사일도 예전처럼 많지가 않다. 결국 시간은 많은데 예전과 같이 산다면 난 내 삶을 방치하고 유기하는 셈이 되고 만다. 안일하게 생각한다면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쉬면서 편하게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평균 수명은 늘어 가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팔십에서 구십까지 살려면 그 지루함과 따분함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일이 아니더라도 자원봉사든 사회사업이든 찾아 나서서 적당히 일을 하고 참여의식을 가질 때 몸도 마음도 건강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무엇을 할까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찾아보지만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난 어릴 적부터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그 일도 자꾸 미루어지기만 하고 선뜻 손이 닿지 않는다. 갑갑한 현실로부터의 돌파구를 원하면서도 나 자신은 늘 덫에 걸린 들짐승처럼 발버둥 칠 뿐이다.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포도 생각이 난다.
배고픈 여우가 포도밭을 지나다보니 탐스런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더욱 시장기가 느껴진 여우는 그 포도를 따 먹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담장 안의 포도는 여우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결국 여우는 체념하고 돌아서며 저 포도는 시고 맛이 없을 거라고 말한다. 내가 그렇게 살아 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 무엇도 열정을 다해 제대로 해보지 않고 그건 나와 맞지 않는 일이라고 단정해 버리거나 쉽게 포기하진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 탓에 이런 저런 일을 시작했지만 끝까지 제대로 해낸 일이 없는 걸 보면 오만하고 무책임한 태도 탓인 것 같다.
무슨 일이든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을 벼랑 끝에 세우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 내게는 헝그리 정신도 바닥까지 체험한 절실함도 없이 그저 무료함과 권태로움에서 탈출하기 위한 시도였거나 재미로 시작한 일이 대부분이다 보니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공병호의 『10년의 법칙』을 읽노라니 난 내 삶을 너무 소홀히 살지 않았나 하는 자책을 피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직업인으로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정교한 연습과 노력으로 10년을 투자해야 한다는데 난 내 꿈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부끄럽다.
진작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미래에 대한 견고한 꿈을 가졌더라면 지금의 나는 훨씬 더 발전한 모습의 자화상을 만날 수 있었으리란 아쉬움도 없지 않다. 하지만 생의 반환점을 돌긴 했지만 그래도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 있다. 10년의 법칙을 적용한다 해도 몇 번의 기회는 가질 수 있다. 꿈을 이루고 도전하는데 나이가 장애가 될 수는 없다.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의지만 있다면 나이는 오히려 경험과 신중함이란 혜택을 부가서비스로 제공할 것이다. 어쩌면 역발상의 기회가 내 삶의 전환점이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치열하게 앞만 보고 달려갈 때 난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며 여유를 즐겼다. 이제 다른 사람들은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을 반추하며 여유를 찾을 것이다. 허나 그들은 달려온 탄성 때문에 쉽게 멈추어 여유를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쉬고 싶어도 계속 일에 매달리거나 무언가에 쫒기 듯 또 다른 할 일을 찾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충분한 휴식과 여유로 무장된 나는 여력을 모아 마지막 피치를 올린다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여우처럼 포도 따먹기를 포기한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포도의 맛을 탓하는 무능함을 보이지 말고 뭔가 목표를 세웠으면 치밀한 계획과 행동으로 원하는 성과를 얻어 내는 저력을 확인하고 싶다. 대기만성은 아니더라도 반짝이는 섬광처럼 멋진 불꽃을 사른다면 내 생의 작은 기쁨과 보람이 되리라 믿는다.
인생에 왕도는 없다. 누구의 삶이 잘 살고 못 살았는지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다만 스스로가 돌아보며 아쉬움과 회한이 적도록 매순간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 할 뿐이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천상병 시인처럼 이승의 삶이 아름다운 소풍이었음을 회상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봄의 문턱에서 게으른 삶의 템포에 채찍을 가하는 느낌으로 잠시 백일몽을 꾸었다. 허나 이 꿈이 꿈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현실 속에 꽃피우는 아름다운 생의 결실이 되도록 오늘 하루에 충실할 것이다.
* 대전 출생, 점핑스쿨 공주교육원장, 수필가, hl3evs@hanmir.com
교육의 즐거움
임 정 란*
“오늘 방과 후에 남아서 선생님 좀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합창을 한다.
“학원가야 해서 안 되는데요”
“학원 안 가는 사람 없어?”
또 다시 이어지는 합창소리에 나는 요즘의 아이들에게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예전과 지금을 같이 비교하면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해도 학교공부를 마치고 또 곧 바로 학원으로 향해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아이들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맹자는 진심편(盡心篇)에서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
혹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즐거움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세 번째 즐거움인 교육하는 것이 어떻게 즐거운 일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요즘같이 교권이 바닥까지 추락한 때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또 우리나라와 같이 유난스러운 교육열을 자랑하는 곳에서 교사라는 직업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5월 나는 교생선생님의 자격으로 천안의 한 중학교에서 실습을 하게 되었다. 교사가 되기 전 실제 학교생활을 체험해 보는 기회였기 때문에, 담임의 역할로 학급경영도 해 보고, 교과 담당교사의 역할로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는 등 전반적인 학교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다. 실습 초반 나는 과거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요즘 아이들의 모습이 낯설어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했었다. 내가 그리던 학교의 모습, 아이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서두에 비친 글에서처럼, 아이들은 공부말고는 다른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일 그렇게 하루하루를 생활하고 있었다. 나 같아도 정말 학교생활이 재미없을 것 같았다. 물론 학교마다의 분위기와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학교라는 곳은 전인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로서는 지식교육에만 치우쳐 있는 학교의 모습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현실을 다른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모두들 정말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하셨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의 높은 교육열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학교 현실을 파악할 때 쯤, 나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나는 평소에 교육은 가르치는 사람이건 배우는 사람이건 양자가 모두 즐거워야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현실을 바꾸어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학교로 만들어 보아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루 종일 공부에 찌든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수업으로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 나는 밤으로 고민하고 연구하여 수업을 준비하였는데 아이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었는지 반응이 너무나 좋았다. 아이들이 나의 수업을 재미있게 듣고 또 열심히 참여하니 내 마음도 흡족했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즐거워하는 가운데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이러한 것을 실제 느끼고서 나는 교육의 주체인 교사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사라는 직업이 비교적 정년이 보장되고, 방학이 있다는 이유로 요즘 최고의 직업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긴 하지만 교사로서의 사명감은 이것들보다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교육의 주체가 교사인 만큼 학교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은 너무나 크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시대의 변화에 앞장서야 할 사람도 교사이고, 그 변화된 것들을 잘 학생들의 구미에 맞게 가르쳐야 할 사람도 교사이다. 교사가 과거 30년 전의 수업방식을 현재의 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치려고 해서는 학생들이 학업에 흥미를 잃을 수 있고, 또 예전과는 다른 현실 속에서 자라온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과거 학생들이 했던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될 것이다. 가장 훌륭한 교사는 학생들의 눈높이를 잘 맞추는 사람이라고 한다. 시대의 변화를 잘 읽고, 그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사의 교육방법도 변해야 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교사는 학생들의 눈높이를 잘 읽고 수준에 맞게 가르쳐야 가르치는 사람도 즐거움이 있을 것이고, 배우는 사람도 즐겁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의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예부터 부존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우리나라가 큰 목소리로 내세운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인적자원’이다. 우리나라는 다른 자원은 없어도 인적자원이 풍부한 국가여서 이를 국가의 경쟁력으로 내세워왔다. 우리나라가 비교적 빨리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이룩한 것도 이렇게 풍부한 인적자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렇게 국가의 사활을 인적자원에 걸었던 만큼 우리나라는 예부터 교육을 굉장히 중요시하게 생각해왔다. 일제치하에서도 조선인의 우민화를 위해 배움을 가로막았던 일제의 눈을 피하여 야간으로 지하나 간이 천막을 치고 배움의 끈을 이어왔었고,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교육만큼은 꼭 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가르치고 배우려는 열정이 뜨거웠다. 그때, 교사들에게 요즘같이 충분한 보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박봉 속에서도 교사들은 이 사회를 위해 필요한 일꾼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인재를 길러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교육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사명감이 있을 때 교사가 행하는 교육도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화,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누가 우리나라의 국가 경쟁력이 무엇이냐고 물음을 던진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교육’이라고 답을 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시대가 급변하여 이제 세계라는 무대에서 경쟁을 해야 하는 지금의 현실에서도 교육은 국가의 경쟁력으로서 중요한 국가발전의 원천이다. 기업은 세계의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기술혁신, 기술개발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있지만, 이러한 기술개발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이러한 인재는 학교교육을 통해 배출되어 사회의 일꾼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교육이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이렇듯 국가의 경쟁력 나아가 국가의 운명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교육을 어떻게 괴로움 속에서 행한단 말인가? 같은 일도 즐거움 속에서 하면 그 효과가 배가 되듯이 교육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하나가 될 때 그 배가 더할 것임은 당연할 것이다. 같은 논리라면 당연히 즐거운 교육이 이루어지면 우리나라의 국가 경쟁력도 배가 되어 세계 속의 한국의 위상이 지금보다 훨씬 더 클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교사와 학생은 있어도 스승과 제자는 없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 요즘, 교사와 학생이 즐겁게 행하는 교육이 실현되어 교육이 바로 서는 이 나라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물론 이것은 나를 포함한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들이 해결해야 할 몫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육당국의 노력이 다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한 일임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대전 출생, 충남대 경제학 석사, 수필가, Jungran@hanba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