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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학적부
류 양 숙*
어제는 온종일 비가 내렸다. 어디론가 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할 만한 시간들이었다. 남편은 내일도 이렇게 비가 오면 못 갈거라며 조급한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모교 교문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하고, 교정을 수백리나 걷고 나서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밖에는 오십여 년 전의 아침 햇살이 자욱한 안개를 자꾸 밀어 올리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던 고향의 모교를 이제야 찾아 나선다. 이름만 들어도 마음 설레게 하는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찾아 가는 여정에 하늘도 소녀의 꿈처럼 해맑은 형상이다.
교사의 꿈을 꾸며 동경하던 공주 여자사범학교에 입학하던 날, 나의 마음은 저 금강의 은빛 여울처럼 파닥이었으리라. 그러나 학과 선생님들의 얼굴을 채 익히지도 못한 채, 6.25사변이 터져 우리는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제는 강산이 다섯 차례나 바뀐 저편의 세월 속에 갈무리된 시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시간의 여울목에서 늘 못 이룬 꿈에 대한 미련을 끈끈하게 간직했었다. 교사에 대한 꿈보다 더 값지고 보람 있는 큰 꿈이 있음을 알고서야 나는 그 여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른 해 동안 전도사의 사역을 마무리 지으면서, 교직에 대한 미련을 온전히 버릴 수 있었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 보다, 한 영혼을 보살피며 구원하는 일이 더 보람이 있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공주여자 사범학교의 교명도 공주 교육대학교로 바뀌었다. 내가 다니던 시절의 학교와는 전혀 디른 모습이다. 운동장 한 편에 주차를 한 후, 학적과를 찾았다. 1950년도의 학적부를 찾아달라는 내 부탁에 여직원은 한참 만에 돌아와 내 이름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버젓이 입학했는데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얼마 후에, 여직원이 낡고 빛바랜 서류를 꺼내온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서류를 직접 받아들고 한 장씩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류정숙! 내 이름이 있었다. “1937년 5월 8일생, 부 : 류경석”. 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름은 류정숙(柳貞淑),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었다. 아마 한자를 잘못 기재한 것일 지도 모른다. 다른 내용은 없었다. 하긴 한 달밖에 안다녔으니 기재할 내용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서운하고 아쉬웠지만, 하는 수없이 그것을 복사해 갖고 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남편은 이왕 온 김에 공주여고에 가 보자고 한다. 다행이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교대 부설초등학교 후문을 따라가니 공주여고 정문이었다. 금학동에 지은 이 학교는 내가 다니던 기숙사 자리에 있던 모양새와는 전혀 달랐다. 반듯하고 산뜻하게 지은 오층 건물교실에서 나오는 학생들은 막 피어나는 장미꽃 봉우리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신선함과 싱그러움에 내 시선이 머문다.
“나도 한 때는 저런 때가 있었지!. 이젠 먼 옛 날의 추억으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다. 교장실로 찾아갔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교장 선생님은 이 학교 졸업생인데 학적부를 복사해 달라는 내 부탁에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차를 내 놓는다. 사범대학 교수로 은퇴한 큰오빠 이야기를 꺼냈더니, 많이 들었다며 조카가 몇 년 후배란다. 교장 선생님은 정년이 삼 년 남았다며 부여에서 전근 온 지 석 달 밖에 안됐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서류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교장선생님은 친절하게 앞서서 안내한다. 여기서도 나는 누렇게 낡고 빛바랜 서류를 만나야 했다. 그 서류에서 나는 내 연륜의 일면을 보는 듯하다. 한 장씩 서류를 넘겨가며 나는 시간의 흔적을 더듬어 나갔다. 거기에 내 이름 석 자가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인적사항도 자세하였다.
“신체 건강하고 출석 양호함. 성격 온순하고 영리함. 협동심과 책임감 강함. 언어 명쾌하고 통솔력 우수함. 상벌 : 개근상, 우등상, 도지사상, 학급대의원. 1956년 2월 27일, 3년 전 과정 졸업한 것을 증명함.”
내 지난날의 흔적이었다. 삼년간 결석하지 않고 개근상을 탄 것이 감사하다. 성격도 온순 영리하다는 좋은 평이다. 순하면 환영받지만 무시당할 수도 있었을텐데, 다행이다. 나를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보는 순간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휴대폰을 받았다. 막내딸이다. 어디냐는 물음에 아빠와 같이 공주여고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더니, 엄마는 아빠와 인생을 즐겁고 참 멋있게 지낸다며 기뻐한다. 자식이 잘되면 부모가 기뻐하듯 부모가 정답게 지내면 자식이 기뻐해 준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물이 오늘따라 한결 아름답게 보인다. 금강을 끼고 산성공원을 뒤로 한 채 대전으로 돌아오는데, 운전대를 잡은 남편도 참 잘 다녀왔다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졸업 후, 강산이 다섯 번 하고도 세 해가 지나 처음으로 찾은 모교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에 부끄럽지 않다. 교장선생님을 통해 학교에 내 수필집 『사랑의 메아리』를 기증했다. 남편이 추석에는 자식들한테, 엄마는 이렇게 공부했다고 보여주란다. 연어가 알을 깔 때는 본자리로 회귀한다는데, 나도 꿈 많던 소녀시절로 회귀하는 것 같은 감상에 젖어 들었다. 오늘 따라 금강의 물빛이 유독 맑고 투명해 보인다.
새벽을 깨운다
좀 더 자고 싶은데,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예배를 보기 위해 미리 조작해 놓은 시계가 정확하게 새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밖에는 새벽잠을 설치고 온 분이 나를 태우려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나는 거듭 고마운 감정을 전하며 승용차에 올랐다. 새벽은 오늘도 신선했다.
먼지투성이의 삶을 등진 채 나는 교회 십자가 앞에 앉았다. 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눈을 지긋 감고 묵상을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내 모습을 이대로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라고 찬양을 한다. 목사님을 통해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세상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고요한 새벽, 영혼의 양식을 얻는 첫 시간은 행복한 순간이다. 내 가족뿐만 아니라, 약하고 눌린 자와 암 병으로 고생하는 자매를 위해 힘주시라는 기도를 한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배재대학 쪽으로 향해 걷는 내 발걸음이 가볍다. 아직 채 어둠이 가시기 전인데, 어느새 운동장에는 걷고 있는 이들로 활기가 넘친다. 가슴을 쫙 펴고 늘어진 어께도 벌려본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열심히 걷고 있는데, 내 옆을 걸어가던 분이 내 굽은 등이 많이 펴졌다고 한다. 오랫동안 굳어버린 등이 쉽게 펴질 리야 없겠지만 기분은 좋다. 꾸준히 운동한 보람일 것이다. 유모차에 의지해서 걷는 할머니는 그냥 걸을 때보다 허리가 덜 아파서 좋단다.
양팔을 힘차게 저으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젊은이가 부럽다. 역시 젊다는 것은 힘이 있고 활기차서 좋다. 한 세 바퀴쯤 걷는 동안 동녘에서 해가 솟는다. 파란 하늘이 높아졌다. 하얀 구름이 바람 따라 흐른다.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 내 마음도 시골공기를 마시던 때처럼 상쾌해 진다. 우거진 소나무 숲 아래를 걸어가며 두 팔을 벌려 깊은 숨을 몰아쉰다. 숨만 제대로 잘 쉬어도 건강해 진단다. 우리 인체는 조물주가 참 신기하고 오묘하게 만들었다. 폐를 통해서 불순물은 다 내어보내고, 몸에 좋은 산소는 심호흡으로 들어 마신다.
오랜 세월 엎드려 기도하던 습관이 나의 허리를 굽혀놓은 것이다. 더 늙기 전에 허리를 펴는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
첫날은 겨우 세 바퀴만 돌았다. 지금은 일곱 바퀴나 돈다. 맨 나중에는 뒤로 걷기도 한다. 허벅지가 몹시 아프다. 의자에 걸터앉아 한손으로 발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좌우로 돌려준다. 운동을 한 후에는 수축된 근육을 적당히 풀어줘야 한다던가. 때로는 긴장이 필요하지만, 스트레스를 적당히 풀어주는 것이 자식들 걱정을 덜어 주는 것이란 생각에서 열심히 운동을 한다.
소나무 아래에서 솔 냄새를 맡아가며 깊은 숨을 쉰다. 솔 냄새는 피로를 풀어주는 약효가 있는 듯하다. 목 운동도 한다. 목을 좌우로 돌려주는데, 약간 어지럽다. 교회에서 영혼의 새 힘을 얻고, 운동장에서 몸의 건강을 얻으니, 영육이 모두 상쾌해져서 감사하다. 교회의 문이 항상 열려있듯, 대학운동장도 항상 열려있다. 아무나 운동장에 나와 열심히 걷는다. 참으로 보기 좋다.
나도 그들 중에 들어 있다는 것이 행복하기만 하다. 새벽을 깨우는 이 시간은 하루를 건강하게 깨워 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 충남 공주 출생, 수필가, 수필집『사랑의 메아리』등
다도해의 선경
김 명 녕*
올해 4월에는 1973년 이래 기온이 가장 낮고, 폭설이 가장 늦은 날짜에 내리는 등 기상이변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햇빛양도 적어서 농사를 짓거나 바닷가에서 물고기 · 김 · 굴 등을 양식하는 사람들이 짓는 한숨에 땅이 꺼질 지경이다.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흑산도와 목포에서 2010년도 한국국공립대학 평생교육원 원장연수회를 연다는 공문을 달포 남짓 전에 받고 참가할 뜻을 밝혔다. 그렇지만 4월 내내 전국적으로 비도 잦고, 바람도 거세고, 기온도 매우 낮은 등 하도 귀살쩍은 봄 날씨가 계속되고 있으므로 날짜가 다가올수록 참가할지 말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다행히 4월 마지막쯤에 날이 들어서 목포행 KTX열차를 타고 내다보는 바깥풍경은 완연한 봄이다. 연수에 참가하는 평생교육원 원장들이 목포연안여객선 터미널에 모여서 흑산도행 파라다이스 쾌속선을 타고 오후 4시에 떠난다. 1시간 후쯤, 해발 255미터의 선왕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비금도에 기항한다. 목포로 소풍갔다가 선착장에서 내리는 비금중학교 학생들에게 비금도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목포에서 45㎞쯤 떨어져 있고, 면적은 45.25㎢이고, 5천명 안팎의 사람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진하게 배어 있는 섬 소년소녀들에게 정감이 간다.
흑산도로 가기 위해 오후 5시에 비금도를 떠난다. 바람은 약한데 갑자기 쾌속선이 출렁거리면서 골이 아프고, 속이 메슥거린다. 얼굴빛이 노래지면서 구토하는 승객도 보인다. 먼 바다에서 인 너울이 밀려오기 때문이라고 옆 사람이 알려준다. “혹시 모르니 목포항에서 배 멀미약을 잡숫고 승선하세요.”하고 귀띔하던 아내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멀쩡하던 몸 상태도 나빠지고 기분도 언짢아지니까 미처 흑산도에 닿기도 전에 여행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힘든 몸 상태를 잊으려고 살포시 눈을 감는다. 스르르 스며든 선잠 덕분에 험한 꼴을 당하지 않고 비금도를 떠난 50분 뒤에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97.2㎞ 떨어져 있고, 면적이 19.7㎢이고, 약 2천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흑산도에 도착한다.
바닷물의 빛깔이 푸르다 못해 검은데다 빼곡하게 들어찬 동백나무 ․ 후박나무 ‧ 너도밤나무 ‧ 소나무 따위 때문에 섬이 검게 보여서 흑산도라 일컫는다는 섬에 닿자마자 관광버스를 탄다. 1984년도에 공사를 시작해서 27년만인 금년 3월 31일에 완공된 25.4㎞길이의 흑산도 일주도로를 달리면서 넘어가는 해의 꼬리를 붙잡고 빼어난 자연경치를 하나라도 더 감상하기 위해서다.
바닷가에 있는 청촌마을을 지나가서 구문여를 만난다. 파도가 거셀 때 바위 가운데에 난 구멍으로 물줄기를 내뿜는 모습이 신비롭다고 한다. 구멍을 드나드는 바닷물보다 조그만 바위산 위에 뿌리를 내린 여러 그루의 소나무가 더 신비롭다. 바위산으로 스며드는 물은 민물이 아닌 소금물일진대 그것을 어찌 견디어내고 더 푸른빛을 내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앙증맞게 생긴 샛개해수욕장과 최익현 유적지를 거쳐 7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어촌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사리(일명 모래미) 전망대에 이른다. 풍경을 감상할 짬도 없이 훌쩍 떠나 꼬부랑고개를 넘어가니 다릿발이 없어서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을 준다는 하늘도로다. 하늘도로 벽에 그린 신안의 명물과 문화유산도 볼 틈 없이 달리던 버스가 잠시 멈춘다. 대장도와 소장도 사이에서 해가 마지막으로 붉은 빛을 내뿜는 모습이 장관이다. 섬, 여, 붉게 물든 노을과 바닷물, 옅은 해무가 엮어내는 풍경이 황홀하다.
땅거미가 질 즈음 비리(比里)와 마리(馬里) 사이에서 버스가 선다. 재빨리 내려서 바닷물에 뜬 바위를 바라보니, 꼭대기에 난 구멍의 모양이 영락없는 한반도 지도다. 버스에서나마 잠시 눈을 붙이고 출렁거리는 배에 시달린 몸을 달래고 싶지만 독특한 풍경이 수없이 널려 있어서 그럴 짬을 내지 못한다. 날이 저뭇할 무렵에 상라봉에 이른다. 상라봉에서 예리항으로 내려가는 ‘12구비도로’가 밤길을 비추는 가로등에 알몸을 드러내고 곡선미를 뽐낸다. 펄쩍 뛰면 발이 닿을 반월모양의 산성도 가고 싶고, 어둠이 깔린 흑산항의 밤풍경도 감상하고 싶지만, 저녁 8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이뤄지는 평생교육 정책발표에 참석하기 위해 곧바로 내려온다.
다음 날 오전 10시에 남해 퀸 쾌속선을 타고 기암괴석과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 흑산도를 떠나 30분 후에 면적 6.47㎢, 인구 500여 명인 홍도 선착장에 닿는다. 홍도는 섬 전체가 붉은 빛깔을 띠고, 섬 둘레의 바위에 철분이 많아 바위표면이 붉게 보이므로 홍도라 일컫는다고 한다. 선착장에서 가까운 깃대봉(전망대)에 올라 홍도해수욕장, 홍도 1구 마을, 양산봉, 홍도항 건설현장을 한눈에 바라본다.
오후 1시에 유람선을 타고 2시간 30분에 걸쳐 20.8㎞의 홍도관광 뱃길에 오른다. 홍도에는 절경만 서른여섯 곳이 있는데 이 중에서 홍도의 관문이자 제1경인 남문바위, 실금리동굴, 석화동굴, 탑섬, 만물상, 7남매의 슬픈 전설이 깃든 슬픈여, 부부가 쌓아올린 전설이 깃든 탑바위, 옛날에 중국으로 가는 배들이 드나든 독립문바위, 거북바위, 공작새바위 등 빼어난 기암괴석 열 곳을 ‘홍도 10경’ 명물로 손꼽는단다.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비경인 바위와 동굴이 수두룩하다. 기묘한 모습에 어울리게 이름을 붙이고 전설을 그럴듯하게 지어낸 사람들의 슬기가 놀랍다. 홍도 10경을 비롯하여 바닷물에서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식히는 낙타바위와 합장하는 승려의 모습을 그대로 빼박은 도승바위도 그럴싸하고, 산들바람만 불어도 금세 바다로 굴러 떨어질 아차바위는 보기만 해도 가슴에서 찬바람이 인다.
구들장을 켜켜이 쌓은 듯이 보이는 시루떡바위, 커다란 곰 모습의 곰 바위, 굴의 모양이 콜라병처럼 생긴 콜라병 동굴, 움푹 파인 바위에 물결이 부딪치면 종소리가 난다는 종 바위, 용왕이 신하들을 위해 사용한 주전자바위 등도 생김새가 독특하고 신비롭다. 보석동굴, 형제바위, 물개바위, ET바위, 칼바위, 병풍바위 등 이름을 붙인 36곳 모두 선경이지만 이름 없는 바위와 동굴일지라도 천하일품이다.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답게 매우 아름답고, 해외의 유명한 관광 섬과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오후 3시 40분에 홍도를 떠나는 동양골드 쾌속선을 타고 목포로 돌아간다. 어제와 아주 딴판으로 바닷물이 매우 잔잔하다. 바다가 이처럼 조용한 날은 1년에 고작 보름도 채 안 된다고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날마다 사람 틈바구니에서 제자리걸음만 바쁘게 옮기다가 모처럼 외딴 섬마을에서 연수하니까 깊은 산골짜기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그 시절처럼 섬은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곳 사람들은 옛날 산골 사람처럼 소박한 꿈을 지니고, 이웃과 넉넉하게 인심을 나누면서 포근하게 지낸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가르며 보금자리를 찾아 시원스레 날아가는 갈매기도 내가 어린 시절에 서산 넘어 둥지를 찾아 훨훨 날아가던 해질녘 어치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
* 충주 출생, 공학박사, 한밭대 교수, 수필집 달리면서 만나는 세상, 달릴수록 넓어지는 세상, 인터넷 문학상(문학사랑),
한국농촌문학상 대상(농림부장관) 수상, mnkim@hanbat.ac.kr
살아보니 어뗘
김 기 태*
옛말에 40세가 되면 불혹(不惑)이라 하여 부질없는 행동을 하거나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고 사람답게 사는 나이란 뜻이 있었다. 또 나이 50세가 되면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타고난 운명을 알고 바르게 살아간다는 지천명(知天命)이요. 60세가 되면 아무리 귀에 거슬리는 격한 말을 들었다 해도 순리대로 이해하여 부드럽게 들을 수 있다 해서 이순(耳順)이라 했다지만 이것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전해오는 뜻에는 배려하는 능력과 자기 수양을 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되고 대다수 사람들은 애들로 돌아가는 것이 보편적인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사소한 일에도 토라진다. 작아지는 자신의 위상을 느끼면서 허풍과 허욕을 부리기도 한다. 산전수전을 겪었다는 명분으로 이미 다른 사람도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아집으로 일관할 때도 있다. 세상일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불만도 많아지고 매사에 부정적일 때도 있다.
좋은 사람 만나 사랑하고 자식을 잘 키워 행복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는 정신없이 돈을 모으며 집안일에 빠져 나라는 존재를 느껴보지 못하고 살아 왔지만 애들을 키우고 보니 이미 시간은 흘러가서 머리에는 잔서리가 내리고 직장에서는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하늘을 쳐다보며 울분을 삼키고 집으로 돌아와야 되는 시기가 온다. 다시 일을 벌이기는 늦은 나이고 놀기는 이른 나이라서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지만 그것으로 가라앉은 마음을 다스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부부간에 나누는 말도 많아지고 서로 간섭하는 일도 생기면서 충돌이 생긴다.
생각해보면 별로 싸울 일도 아닌데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충(衝)을 만나 파(破)를 일으키니 화해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래서는 안 되지 생각하며
“여보 미안해”
“우리 아까운 시간 다투지 말고 삽시다.”
자주 해보지 않던 말로 용기를 가지고 이해를 구해보지만 얼마 안가서 또 다투는 일이 생긴다. 끝까지 나를 지켜줄 가장 소중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다보면 아내와 다시 와서 먹고 싶은 생각도 들고 좋은 곳에 가게 되면 시간을 내서 함께 보고픈 마음이 생겨 이제 철이 드는 것도 같은데 행동은 영 딴판이다. 항상 즐거운 시간으로 살아도 아까운 시간들인데 왜 자주 화풀이를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모임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면 잘 나가던 시절에 이야기로 목청을 돋우고 자랑하는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니 듣는 이가 괴로워한다. 또는 이룬 자와 가진 자를 미워하며 자기관리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것이 세상을 잘못 만난 탓으로 생각하고 술잔 위에 불만을 올려놓는다.
평생을 한 우물만 팠다고 자신은 산전수전을 겪은 백전노장이라 자부하지만 하던 일에서 손을 떼고 돌아보면 그 정도는 누구나 아는 상식에 가까운 일들이며 별로 한 것 없이 세월만 소비한 것 같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산전수전이 백전노장으로 생각되어 세상일 모두 통달한 것으로 생각이 들던 시대도 있었지만 그것은 산에서 싸운 것과 물에서 싸운 아주 원초적인 옛날에 하던 싸움이란 걸 알게 되면 허전해오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현대전에 비교하여 자랑할 만한 전술도 전략도 아닌 그런 경험으로 어찌 방에 앉아 전자게임 하듯 벌이는 현대전에 대항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
나이 들며 목청을 돋아봐야 객기 부리는 백수로 취급 받는다. 아직은 젊다고 생각하지만 여행사에 신청하는 젊은이 중에는 60세가 넘은 사람하고는 한 팀으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말이 많고 목소리가 크고 굼뜨고 항상 행동이 느리니 여행에 맛을 감소시킨다는 이유다.
나이가 들었다고 어른으로 큰소리 치고 자기만의 시간에 도취하여 세월을 소비한다면 즐거운 삶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도 항상 끊임없는 자기개발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것이 삶의 활력소도 되고 젊은이와 어울릴 수 있는 여건들을 갖추는 일이다. 수지침도 좋고 발마사지도 좋고 해보고 싶은 것이나 자기 적성에 맞는 개발도 좋다. 모두가 건강을 지키며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라면 나이가 들어도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나이가 들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취미가 비슷한 동호인끼리 살기를 원한다. 고향으로 돌아가 그 곳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자식들과는 멀리 떨어져 살기에 노후보장을 받기는 더욱 어려운 현실이다. 더구나 국민연금이나 정부의 노후복지 혜택도 오래 동안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모두가 자신이 해결해야 되는 일들이다. 장수하는 것만 환영할 일도 아니며 준비되지 않은 노후는 인생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되기도 한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준비해야 한다. 남을 탓할 일이 아니며 모두가 자기관리 잘못해서 일어나는 자업자득이다. 그것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업보다.
노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뒷모습이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한가하게 술이나 먹고 목적 없이 산이나 다니는, 그리고 헛기침으로 군기를 잡으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노년이 청춘인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왁스가 부른 “황혼에 문턱”이란 노래 말처럼
‘우린 아직 꿈이 있으니까?’
또 다른 일에 도전하여 2모작을 활기차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행복은?
고 김수환 추기경이 신도들을 모아 놓고 지방의 성당에서 미사를 올릴 때 일이다.
연단에 올라오신 김수환 추기경이 신자들에게
"삶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추기경이 연단에 올라와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실 걸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삶이 무엇입니까?' 라고 화두를 꺼내니 아무도 답하는 이가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잘 몰랐는데 오늘 열차를 타고 오면서 차 안에서 삶은 달걀 하는 소리에"
"맞아. 삶은 달걀이야!"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는 말씀에 신자들은 크게 웃어 넘겼지만 지금까지도 '삶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 같다.
"삶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그것은 먹고 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먹는 일과 사는 일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이 두 가지 문제를 잘 해결하며 살아 갈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먼저 먹는 문제다.
먹는 문제는 크게 나누어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첫째는 어려서 부모의 혜택으로 살아가는 문제이며 둘째는 내가 가장이 되었을 때 가족들을 책임져야 하는 문제이고 그리고 세 번째가 노후에 내 삶을 보살펴 줄 수 있는 후견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아이들이 태어나면 여섯 사람의 후견인을 대동하고 세상에 나온다.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외조부모다. 후견인이 많으니 모두가 왕자와 공주로 군림하며 산다.
성장하면서 학교에 들어가고 직장을 구하면서 녹녹치 않은 경쟁의 쓴 맛도 경험한다. 후견인의 후원으로 쉽게 학교를 다녔으나 사회는 내가 뭘 할 수 있느냐를 가지고 평가하려 든다. 부모 세대까지는 몸으로 부딪치면 자리를 보존하는데 가능했지만 지금은 해낸 결과물이 없으면 아무리 근면 성실해도 직장을 잃게 된다. 살아가며 여러 번 직장을 옮겨 다녀야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평생직장이나 더 나아가 영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졌다. 나이 40세가 되기 이전에도 명퇴 아니면 강퇴의 쓴 맛을 봐야 한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가장이 되었을 때 그들은 어려서 여섯 명의 후견인을 거느리고 살았지만 그들 어깨 위에는 여섯 명을 부양하는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의 모든 힘을 모아 자식에게 투자하다 준비 안 된 노후를 맞게 되면 아무 대책이 없는 것이다. 살아가는데 가장 기초적인 먹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내 여력의 절반만 투자하고 절반은 노후 생활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데 실천에 옮기기까지는 고민을 많이 해야 될 것 같다.
다음이 사는 문제이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다.
운이 좋아야 60세에 정년을 하게 되는데 그 후로도 30년을 더 살아야 한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숙제다. 먹는 문제가 해결 되었다 해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노인복지시설이나 대학교에서는 평생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나이 드신 분들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곳에 가서 노후를 개발하고 자기 삶을 개척하려는 사람은 전체 노인 중에서 아주 극소수에 해당이 된다.
목적 없이 술과 무료한 시간으로 세월을 보내니 삶이 즐거울 수가 없다.
더구나 한국의 남자 중에는 권위의식에 사로 잡혀 주변과 어울리지를 못한다.
통계에 의하면 이태리는 남녀가 100세를 넘게 살 수 있는 확률이 1;1이라 한다.
미국과 중국이 4;1일인데 우리나라는 12;1이라 한다. 100세 이상 사시는 여자 12명에 남자가 한 명이라는 통계다. 원인은 남자는 주변과 소통을 하지 못하고 외톨로 사는데 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노인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즐겁게 보내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것을 개발해야 한다.
"행복지수는 내가 가진 것과 내가 가지고 싶은 것" 의 함수 관계다.
여기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나 직위가 높은 사람이 다 행복을 느끼고 사는 것이 아니다. 행복지수처럼 그들은 가지고 싶은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가진 것이 적은 사람도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마디로 내가 바라는 것이 적으면 가진 것이 적어도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 방법을 찾아 실천하는 문제이다.
행복을 지켜 주는 것은 돈과 명예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슴과 머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내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허울이라는 놈이었다. 그 허울이란 놈을 몰아내면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無所有)와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를 넘나들며 사는 길을 터득하는 일이다.
살아가며 내 가정의 행복을 찾는 일이 먼저 해야 되는 일이며 하루 24시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관리능력을 터득하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비우고 웃고 살면 그것이 행복일 것 같다.
서각 전시회를 열어보니
단풍이 세월의 흔적을 담고 물들어가는 계절이다. 여름 내내 푸르름이 젊음을 표현했다면 뒹구는 낙엽은 왠지 외로움을 타게 한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니 따뜻한 커피가 생각이 나고 잔잔한 음악에 맞춰 촉촉한 목소리로 읊는 시 낭송도 마음에 와 닿는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이런 생각에 사람들은 사색의 길로 빨려든다.
밖에는 국가적 재앙으로 신종 플루가 겁을 주고 있지만 곳곳에는 많은 이들이 여름 내내 땀 흘리며 만든 작품들을 가지고 전시회를 연다.
손발이 안 맞아 때를 놓치면 작품을 전시할 장소 구하기도 힘이 들지만 심혈을 기울여 전시회를 열어도 작품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
산으로, 들로 구경은 다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전시회장을 찾는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끼를 발견하여 꿈을 가지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기회인데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나 보다. 그래서 사람들을 찾아 길로 나섰다.
시설도 좋고 보안도 생각하면서 유동인구는 많지 않지만 아담한 대전 지하철 중구청역을 택했다.
그런데 전시회에 오라는 초대장을 보내려니 부담이 된다. 또한 오는 사람도 부담이 되는가 보다. 나로서는 찾아와 보고 격려 해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가까운 사이라면 장미 한 송이 들고 와서 작품에 걸어주면 되는 일인데. 우리는 그릇이 큰지 꽃 한 송이로는 마음이 차지 않는 모양이다. 작품보다 꽃이 더 예뻐 보이면 안 되는데 말이다.
이번 전시회를 열면서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있었다.
첫째가 대전지하철 중구청역 직원들의 도난에 관한 걱정이었다. 작품을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된 것 같고 수준도 대단한데 도난을 당했을 경우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세요. 소품일 경우에 가능하겠지만 작품을 보고 갖고 싶다면, 가져가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면, 가져가야지요,” 라고 안심을 시켰다.
두 번째는 나이 드신 할머니가 전시장을 돌면서 한 작품을 보고 돌아와서 그 작품을 보고 또 보고 하는 것이다.
한동안 망설이다 주최 측에 다가오더니
“선생님. 저 작품을 파실 수 있나요? 손자에게 선물하고 싶은데.”
“할머니. 작품은 판매할 목적으로 전시하는 것은 아닌데요.”하니
할머니는 서운한 표정으로 다시 그 작품 앞에 다가가서 쳐다보는 것이다.
작품을 출품한 작가가. 할머니에게
“얼마면 사실려구요”
“글쎄요 비싸면 좀.”
“작품 만드는데 일주일은 걸리거든요. 자재비도 있고 대충 150만원 받아야 되는데.”
“어! 그렇게 많은 돈이.” 놀라는 눈치다
“알았습니다.”
돌아서려는 할머니에게
“가격을 정한다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할머니가 그리도 좋아하시니 할머니가 주인이신 것 같네요.”
“전시회가 끝나면 드릴테니 그 때 오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연신 고마움을 표한다.
“그런데 공짜는 없어요. 액자 값 5만원은 주셔야 하는데?”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에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돌아가셨다.
이런 분위기로 시민 속에 들어가 관심을 갖게 하고 호기심을 일으킨다면 바람직한 전시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작품을 만들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출품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많은 시간 땀을 흘리며 만들었기에 애착도 가니 돈으로 평가하기는 쉬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그 돈으로 시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구입할 수도 있는 일이다. 또 공짜로 선물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만든 공을 생각하면 서로가 부담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이제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곳간을 채우려고 욕심에 흔들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살아 온 시간도 있었으리라. 마음을 비우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여 시간을 보내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세월의 한 바퀴를 돌아 온 지금. 오늘도 남아있는 힘을 완전히 소진하고 더 이상 어떤 기력도 없이 쓰러질 때까지 나뭇결에 세월을 파서 내 마음을 새기고 싶다.
앞으로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 있는 일들을 찾아 영원한 현역으로 살고 싶다.
* 溫洞, 대전 둔산 3동 거주, 글지이, 부름새, 달림이. 刻장이, 토장이, 온동마을 촌장,
수필집 『소똥위의 홍시』, 『살아보니 어뗘』, 『그려』등, blog.daum.net/ondong.
정글의 법칙
김 현 주*
진홍빛 연산홍이 5월의 설레임을 더욱 숨가쁘게 하더니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다.
어김없이 오가는 계절이 예사롭지 않게 살갑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이 때문일까? 문득 고갤 들어 눈을 맞춘 세상은 온통 꽃 잔치다.
한동안 무엇엔가 미쳐 주변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전혀 나답지 않게 살아온 시간들을 깨끗이 포기하고자 며칠 밤을 가슴앓이 하며 불면으로 뒤척여야 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아직도 이 사회에 그런 그늘이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아 내가 나를 설득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산다는 게 무언지,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했고 내가 마냥 분노하고 적개심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까를 수없이 반문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실망감과 환멸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3년 여의 시간을 고스란히 허송했다.
경험 없는 일을 시작해 몸고생, 마음고생은 물론이거니와 정리하고 싶었을 때 마음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작했던 카페, 일 년 여를 운영하다 포기하면서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는 것은 고사하고 보증금까지 돌려받지 못해 재판을 해야 했다.
재판을 하면서 나는 삶의 순수한 목적을 상실한 채 나락의 수렁을 헤매고 있었다.
결국 재판에서조차 너무도 당연한(내가 생각하기에) 보증금 반환이 화해조서가 작성되었다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끝나 버리고 말았다.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던 나이기에 누굴 탓 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이 오직 자신의 경솔함과 무모함을 자책하며 괴로워해야 했다.
비열한 인간들에 대하여 어떻게 응징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다보니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 졌다.
그래, 그깟 돈 몇 푼에 목숨을 거는 인간들, 어디 잘 먹고 잘살아 보아라고 비웃어주고
한바탕웃음으로 떨쳐 보내고 싶다.
허나 나도 사람인지라 당했다는 억울함과 부당한 판결에 어디라도 목놓아 하소연하고 싶었고 구원을 청하고 싶었지만, 우리 같은 소시민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곳은 어느 곳도 없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야만인들이 사는 곳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의 세상,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소시민들은 언제까지나 약자로서 보호받지 못하고 당하는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 이 나라가 과연 복지 국가일까?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나는 속으로 나라를 원망하고 있었다.
요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의 표심잡기 노력이 .뜨겁다.
너나 할 것 없이 지역주민을 위하고 국민을 위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과연 그들은 진정으로 우리의 삶의 면면을 피부로 느끼며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나 묻고 싶어진다.
정치인은 자기가 필요할 땐 무엇이든 다 할 것처럼 하다가 자기의 욕구가 채워지면 돌아보지 않는다. 언제 자신들이 표를 구걸하며 고개를 숙였는지를 망각한 채.
그래서 나는 정치인들의 공약이나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정책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이 내세우는 공약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진정, 국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요즘 또 믿을 수 없는 한 부류를 새삼 알게 되었다.
법조인들의 양심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과연 그들이 제대로 된 사리 분별 능력과 판단력이 있는지를 묻고 싶어진다.
아니면 너무 어려운 공부를 하느라 감성이 메말라 인간성이 결여된 것일까?
이번 재판을 하면서 그네들의 기판력이란 것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법리적 해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를 들이대면 유리한 판결을 해주고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그건 단지 댁의 사정일 뿐 그들은 정해진 잣대만을 가지고 냉정하게 재단해 버리고 만다.
드라마 속의 양심 있고 공정한 판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이상향일 뿐이다. 가끔 매스컴에 오르는 지각 있는 법조인이 그래서 특별해 보이나 보다.
역지사지란 말이 있지만 당해보지 않고는 결코 그 심정을 헤아리기 힘들다.
당한 자의 억울함이란 당하지 않고 느낌으로만 이해하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천안함 사건이 그랬다.
혈기방장한 한창 나이의 자식과 든든한 한가정의 가장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그 많은 가족의 아픔과 슬픔을 지켜보는 우리가 얼마만큼 헤아리고 같이 아파할 수 있을까.
나도 남의 일 같지 않게 마음이 아프고 울화가 치밀고 그런 만행을 저지른 한심한 존재들에게 분노했지만 그 이상 어쩌지는 못했다.
46명의 숭고한 희생자들의 영결식을 지켜보며 너무 목이 메고 처연해 현충원에 들러 진심어린 영면을 기원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남은 가족들의 슬픔, 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대해 우리는 그 무엇도 해 줄 수 가 없다.
오직 당한 자의 몫일뿐.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고 안타깝겠는가.
살면서 억울한 일이란 참 어처구니없이 우리를 할퀴고 지나간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 날 수밖에 없는 건지 발을 동동 구르며 하늘을 원망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체념하고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운명이라 여길 수밖에.
나 또한 이번 일을 통해 많은 반성을 하며 지나온 삶을 돌아본다.
너무 겁 없이 살아 온 것은 아닐까. 무식하면 용감하단 말이 이런 나를 두고 하는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하고야 마는 그 무모함이 나를 결국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후회하진 않으려 한다.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분명 지금의 실패는 다음의 도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잠시 쉬면서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가다듬어 진정 나 자신이 잘 할 수 있고 나에게 어울리는 일을 찾아 다시 시작 할 것이다.
그 날이 올 때 까지 자숙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며 기다릴 것이다.
이 세상이 아무리 무법천지의 정글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정글에서 꼭 살아남아 웃으며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었노라 말하고 싶다.
* 대전 출생, 수필가, <상상의 힘>으로 작품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