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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필 】
커피숍 연가
김현주
무더위가 가시더니 이내 서늘한 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계절의 변화를 느낄 겨를도 없이 시간은 뭔가에 쫒기 듯 바쁜 종종 걸음으로 겨울을 재촉한다. 어느새 한해도 저물어 가고 있다. 창밖 가로수의 은행잎이 우수수 눈발처럼 휘날리고 행인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고갤 숙인 채 무표정한 얼굴로 목적지를 향한다. 얼어붙은 경기만큼이나 썰렁하고 을씨년스런 거리엔 황량한 바람만이 낙엽을 이끌고 미아처럼 헤매인다.언제부터인가 봄가을은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있는 것 같다.
요즘은 그저 하루하루 사는 게 고단하고 한숨뿐인 사람들이 늘어만 가니 새삼 석가모니의 인생은 고해란 말이 실감난다. 꿈과 희망을 노래하기보다는 온통 위기와 불황으로 도배된 국내 및 세계의 뉴스를 매일 접하며 살얼음을 딛는 듯한 불안감으로 살아야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갑갑하기만 하다. 인생살이가 호락호락 만만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성실히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면 안정과 행복이 보장되는 유토피아는 이제 지구상에서 실종되려는 것만 같다. 다들 힘들어 못살겠다는 아우성으로 가득하니 말이다.
정말 세상물정 모르고 장사라는 걸 시작했다. 왜 그렇게 커피숍이 하고 싶었던 걸까? 참으로 오래전부터 내 가슴속엔 꼭 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분위기 좋은 커피숍을 운영하며 책 읽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중년의 여유로움과 느긋함을 만끽하며 향기로운 커피와 차 한 잔을 누군가에게 대접하며 살아온 생을 반추하고 서로의 삶의 향취를 교감하며 담소할 수 있는 공간을 갖는다는 게 내겐 너무도 멋진 꿈이었다.
하고 싶은 일은 기어코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였기에 작년 가을 꼭 이맘때 가슴 속의 꿈을 현실로 옮기는 작업으로 행복했었다. 사실 이런 꿈은 그냥 가슴 속에 아름다운 꿈으로 영원히 간직한 채 동경했어야 할 일이었지 용감하게 실행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세상 경험이 없고 장사란게 무언지 기본도 모르는 나로서는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것이었는지 그땐 정말 몰랐다. 주변의 만류도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내가 하고자 하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내 주장을 관철하는 다소 무모하면서도 고집스런 성격 탓에 그들의 조언을 기우쯤으로 가볍게 여겼다. 다들 불황에 괜찮겠느냐는 우려와 걱정을 했지만 난 그들의 걱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새겨볼 겨를도 없었고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설레임 하나만으로 인테리어를 했고 하나 둘 가게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며 들떴었다.
멋진 커피숍에서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바리스타 공부를 했고 바리스타 자격증은 물론 칵테일 조주사 자격증까지 갖추어 가게를 열었다.
그 후로 일년....
지금 난 꿈의 궁전에 갇힌 초라한 한 마리 새가 되고 말았다. 날기 위해, 더 멋진 비상을 위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었던 공간은 내게 더없이 부담스럽고 나를 힘들게 하는 새장이 되어 버렸다. 장사는 지지 부진한 채 되지 않았고 임대료와 관리비 전기세 등 지출해야 할 비용이 다달이 늘어 부채로 쌓여만 갔다.
처음 가졌던 꿈들은 산산히 허공에 흩어졌고 현실은 내게 많은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다가왔다. 달아나고 싶지만 마음대로 달아날 수조차 없다. 하루하루가 긴장과 고통과 슬픔의 나날이지만 어디다 마음 놓고 하소연할 수조차 없다. 주변의 모두가 우려섞인 목소리로 만류했을 때 난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린 채 내 멋대로 일을 벌였으니 누굴 탓하고 원망하겠는가.
힘들다 말조차 못하고 혼자 가슴앓이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비로소 내가 얼마나 세상물정 모르고 어린아이처럼 굴었는지 많이 반성하며 깨닫는다. 한편으론 그간 몰랐던 세상에 대한 면면과 자영업자들의 애환이 무언지 어렴풋 하게나마 알 것 같아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배웠노라 자위하기도 한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누구든 그 일을 할 수야 있겠지만 다 잘 할 수는 없는거란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냥 겉보기엔 쉬워 보이는 일조차 그 일에 대한 오랜 경험과 인내, 노력 없이는 결코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별로 일이 없을 거라 쉽게 생각하며 시작한 커피숍조차도 하나의 가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보이지 않는 수고와 노력이 뒤따라야 하고 서비스업이라는 일이 생각처럼 호락호락 쉬운 일이 아님을 피부로 실감한다.
설거지감은 왜 그렇게 많은 지 커피 한잔으로도 뒷일이 이런데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의 노고가 새삼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이일을 시작하고 일년여 난 정말 느즈막히 인생에 대한 참된 공부를 했노라 생각한다. 이런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죽을 때 까지도 잘 몰랐을 삶의 무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는 그 절실함이 무언지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난 남편의 직장이 있어 고정적인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가지만 가장이 이런 자영업을 하며 수입이 일정하지 않을 경우 그에 따른 가족들의 불안정한 생활과 그로 인한 가장의 심적 부담이 어떨까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이나 정부의 관료들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앉아서 전혀 국민의 속사정을 모르는 엉뚱한 정책이나 법률을 만들어 서민의 발목을 붙잡고 오히려 삶을 더 어렵게 만드는 우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경험이 없으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가 바로 이런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조차도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면서도 안정된 직장에서 매월 꼬박 꼬박 월급을 받을 때는 경제의 어려움이 무언지 잘 실감 나지 않았다. 그저 매스컴이나 지상에서 반복되는 기사들이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으니까.
요즘 실물경기 및 체감경기가 최악의 상황을 치닫고 있다 한다.
미국발 경제위기는 버터플라이 효과를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전 세계적으로 번지며 연일 보도되는 뉴스는 우리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경기가 나빠지면 가장 치명적인 직격탄을 맞는 것이 일선의 소자본 자영업자들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서민을 대상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들의 수입이 줄고 지갑이 얇아지고 주머니가 메말라 가니 당연히 매출이 없을 수밖에.
카페에서 창밖에 죽 늘어선 상가들을 보며 그 안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가장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왜 그런지 거리마져 스산하고 한산해 보인다.
행인들의 표정도 어둡고 발걸음도 무거워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이 힘들어서일까. 그래도 난 인생을 포기해야 할 만큼 숨 막히거나 절박한건 아니니까 위안을 삼으며 버티는 수밖에 없다. 사업을 하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수십억 사채 빚을 안고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연예인이나 이혼과 악플 등 가슴의 상처 땜에 사랑하는 아이들과 가족을 남겨둔 채 자살한 여배우의 죽음을 보며 산다는게 무얼까.
허망한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죽는 날까지 나로 인해 세상과 내 주변이 좀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야하지 않을까 마음을다잡아 본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산다는 건 확실히 고통이다. 지금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미래에 대한 꿈이 있고 그 꿈이 실현되리란 가능성에 확신이 있다면 우린 오늘의 고단함을 기꺼이 감수하며 견딜 것이다. 그러한 꿈과 희망, 비전을 주는 것이 국가가 국민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 생각한다. 요즘 세계적 경기침체 여파로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부디 위정자들은 국민 하나하나가 미래에 대한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이 나라를 잘 이끌어줬음 하는 바람이다.
저물어 가는 한해.
썰렁한 카페에서 어느 팝가수의 애절한 노래 소리를 벗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커피숍의 환상이 무참히 깨어진 폐허 같은 공간에서 그래도 난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았다는 작은 위안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구청인데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비몽사몽 잠이 덜 깨 목이 잠긴 채 전화기를 들었더니 구청이라며 민원으로 전화를 했다 한다. 무슨 일 때문이냐 했더니 차번호를 대며 주차를 어디에 했는지 묻기에 유치원 담벼락에 잘했노라 했다. 아무튼 내차 때문에 차를 빼낼 수가 없어 차를 견인해 달라는 항의 전화가 와서 확인 차 전화를 했다며 빨리 나가보라 한다. 그럴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일까 하며 핸드폰을 열어보니 부재중 전화가 7통이나 와 있었다. 전화기를 든 채 창문을 여는데 또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으며 창문을 여는데 어머나 이게 웬일인가.
내 차가 조그만 골목길을 가로 막은 채 놓여 있었고 차 주변엔 대여섯 사람이 몰려서서 이 몰상식한 주차의 장본인에게 계속 전화를 한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이 난감한 상황을 어찌해야하나 머릿속이 아찔했다.
모르는 척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빨리 나가 차를 빼야 하는데 이제 막 일어나 부스스한 얼굴에 그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나설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전화기 속의 여자는 화가 날대로 나 차를 이따위로 대 놓는 게 어딨냐며 악다구니를 쓴다.
“ 죄송합니다,제가 밤늦게 들어와 주차를 하며 실수를 했네요. 바로 나갈께요.”
어떡한다. 누가 있음 대신 나가라 할 텐데 집엔 나 혼자뿐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나가 수습하는 수 밖에. 추리닝을 입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나갔다. 고갤 들지도 못한 채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몸이 아파 약을 먹고 잠이 들어 전화를 못받았단
구차한 변명을 하며 차에 탔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차를 열고 키를 문에 꽂은 채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하니 차키가 없어 두리번거리며 찾는데 한 남자가 문에서 키를 빼어 건네준다. 얼른 시동을 걸어 차를 옮기고는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 들어왔다.
남자들은 별 말없이 지켜보는데 두 명의 여자는 나 때문에 출근도 못한 채 삼십분이 넘게 길에서 실랑이를 했다며 온갖 쓴소리를 퍼붓는다. 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정말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이럴 수도 있구나.
도저히 나로서도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집 주변은 평소 주차 공간이 많은 곳이라서 별 애로 없이 쉽게 주차를 했다. 어젯밤 마트에서 시장을 봐 늦게 귀가하며 짐을 혼자 못 들어 올릴 것 같아 집에 연락해 누굴 나오라 할 생각으로 차를 제대로 주차하는 걸 깜빡 한 것이다. 앞으로 빼서 후진주차를 한다는 것이 앞으로 멈춘 채 집에 전화를 하고는 그대로 짐만 내려 들어갔던 것이다. 생각 할수록 민망하고 어이없고 출근시간에 방해를 한 것이 한없이 미안했다. 우리도 어딜 갔다가 주차를 잘못한 사람 때문에 차를 바로 빼지 못할 때 화가 나고 불쾌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주차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무 엉뚱하게 큰 피해를 준 셈이 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아침을 먹고 카페로 나와서도 그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마침 여러 번 핸드폰에 전화를 해 차주의 전화번호가 있기에 문자로 오늘일은 정말 죄송하다며 마음 풀고 좋은 하루 되시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는 카페에서 일을 하는데 핸드폰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았더니 구청이라며 민원 때문에 나왔다며 잠깐 내려 오랜다. 난 아 그 일은 내가 주차를 잘못한 때문에 일어난 거였고 죄송하다 사과하구 차를 옮겨 잘 해결했노라 했다. 그리고 난 지금 집에 없노라는 말까지 했다. 상대방은 무슨 얘기냐며 내가 민원을 내서 그일 때문에 나온 거라고 했다.
내가 무슨 민원을 낸 거지? 아 그랬구나. 내가 운영하는 2층의 카페에 가로수의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 창을 가리고 창문에 까지 닿아 간판도 보이지 않고 하니 조치해달란 민원을 접수 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창밖으로 내려다보니 구청 직원과 인부들이 아래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난 곧장 내려가 상황을 설명했고 그들은 큰 가위를 장대에 묶어 창쪽으로 난 가지를 쳐주었다. 전체를 자르는 건 일반인들이 항의해 할 수 없다며 최소한으로 전지를 하고는 돌아갔다. 장사가 안되니 애꿎은 가로수만 탓하는 건 아닌지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쩜 하루에 공교롭게 두 곳의 구청에서 전화를 해 헷갈렸을까.
올라와 생각하니 오늘 하루 해프닝이 우스웠다. 아침엔 유성구청이었고 상대가 민원을 제기해 걸려온 전화였고 오후엔 서구청에서 내가 신청한 민원 때문에 걸려온 전화였다. 나중에 가로수 때문에 전화를 한 구청 직원의 황당해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살다보면 이렇게 전혀 예측치 못한 엉뚱한 일을 겪게 되는가 보다.
평소 참 규범적이고 준법정신이 강한 나인데도 생각지 않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실수도 하게 되니 말이다.
이것도 나이를 먹은 탓일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라지만 눈이 침침해지고 예리함과 순발력이 떨어지는 걸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정신이 늙지 않기 위해 늘 새로움으로 충전하고 미래에 대해 부단한 꿈을 꾸며 살아가려 애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늙는다는 건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꿈을 잃어 가는 것이란 말을 깊이 공감하고 가슴에 새기며.
어느새 한해가 저물고 있다. 국내외적으로나 나 개인적으로나 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하고 마음고생이 많았던 한해였던 거 같다.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순 없으니 잘 보내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희망을 실어본다. 다들 어렵고 힘들다지만 그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꿈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불굴의 의지와 노력,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나 또한 신기루 같이 잡히지 않는 꿈만 꾸지 말고 내 주변에서 소박하게 이루며 행복할 수 있는 꿈을 찾아 눈을 반짝여야겠다.
운명아 내가 간다. 길을 비켜라!
박형순
“참 씨부랄것 세상 살기 힘드네”
비가 부술부술 내리는 어느날 70노친 할머니가 그냥 툭 던진 말이다.
“젊은이 이 인쇄거리의 대장들 많이 아슈?”
“왜 할머니?”
“글쎄 이 늙은이가 젊은이한테 떼기장 좀 쓰려고 그러지 뭐”
“할머니가 저에게 떼기장 쓸 것이 뭐가 있을까요?”
“아 글쎄 아이엠에픈가 뭣인가 그 전에는 내 자식 놈이 큰 사업을 해서 호강도 많이 하고 살았는데 차차 기울어지기 시작하더니 부도가 나고 술에 미쳐서 지금은 어디서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게 행방불명인 상태여. 그리고 그놈 마누라는 자식새끼 가르치겠다고 식당도 나가다가 노래방인가 뭣인가 전전긍긍하다가 그년도 어떤 새끼 만나서 도망가버렸다우. 그런데 불쌍한 내 손자 김세돌이가 거시기 대학 법대생이여. 죄진것 없는 내 손자놈은 가르쳐야 할 것 아녀? 그래서 몇일전 그냥 굴러가는 리어카 하나 샀수그려. 약간은 관절염이 있으나 인쇄거리에서 나오는 폐휴지라도 주워다 팔아서 내 손자 월사금이라도 보태야 하지 않겠어? 그 손자놈이 무슨 죄가 있어 그려. 참 불쌍한 놈! 그러니 젊은이가 이 동네 사람들한테 말 좀해서 이 할미한테 폐휴지좀 주라고 좀 하시면 안될까? 그것이 식당에 늙은이가 절룩거리며 껌 팔러 다니는 것 보다, 여기저기 더럽게 동냥하러 다니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이 길을 택한거여. 나좀 도와줘.”
“할머니 관절염도 있다면서 어떻게 무거운 종이를 다루고 리어카���를 끄신데요?”
“내가 나이는 처먹었지만 젊었을 때는 안해본 것 없었어. 우리 그 큰 동네에서 대학생 몇 명 안되던 그 옛날에도 남편네 없이 홀로 아들놈 대학까지 가르쳐서 한참 호강하고 살았더니만 세상이 더러워 그놈도 행방불명되고 또 손자녀석 대학을 졸업시키라는 팔자가 됐수다. 참 팔자도 대학생 만드는 팔자인가봐. 아 젊은이 어떡할겨? 나 당신하고 얘기만 하고 있을 시간도 없단 말여.”
“할머니 그러면 우리 공장에서 나오는 폐휴지는 할머니께 드릴께요. 폐휴지가 많이 나와서 하루에 한번씩은 치워야 되니 매일 매일 가지러 오실 수 있으세요?”
“아 그럼 말두마 내가 비가 오나 눈이오나 맨날 와서 깔끔하게 해줄께. 참 고맙수이다. 해주는 김에 몇사람들 좀 더 소개시켜서 나 좀 살려달라니까 그려”
“할머니가 이쁘고 젊은 사람이라면 많이 소개시켜 주겠는데 늙은 할머니인데 뭐 볼 것이 있다고 자꾸 소개시켜드린데요?”
“그러지마 나도 예전에는 젊은 놈팽이들이 환장했던 미인이었어. 내가 뽀뽀 한번 해 주면 10년은 젊어지고 사업도 잘 될것이니 걱정하지마슈 그려.”
“예 할머니. 이 젊은이가 노력할테니 몸이나 건강하게 하시구, 지금 시작이니 너무 욕심내지 말고 천천히 조금씩 늘려가 보세요. 식사 거르지 마시고요. 그런데 할머니 저를 어떻게 아시고 우리 사무실에 들리셨어요?”
“가랑비도 내리고 해서 그냥 지나가다 들린겨. 내가 잘 들렸네. 젊은이하고 얘기하다보니까 젊은이 키가 짤달막하고 귓밥이 크고 코가 커서 복덩이라 도와줄 것 같아서 엉겨붙는 거여.”
“그럼 오늘도 마침 오셨으니 종이를 실어드릴까요?”
“아녀 내가 실어야지 왜 젊은이가 실어유? 걱정하지 말고 젊은이는 일 보셔.”
그렇게 할머니께 폐휴지를 드리겠다는 나의 구두약속을 받고나서는 리어카���에 종이를 싣고 할머니는 다른 인쇄소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 할머니를 처음 본 순간 연세가 드셨지만 말씀하실 때 그 할머니의 눈가에 맴도는 눈시울 속에서도 희망의 반딧불이 비치는 것을 보고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할수 있는 만큼은 도와드리겠다고 마음먹고 우리 직원들에게도 할머니가 오시면 꼭 실어드리고, 출발 할 때는 힘드시지 않게 꼬오옥 밀어드리라고 부탁을 해놓았다.
그 할머니는 약속대로 비가 오면 우비를 입으시고 리어카���는 비닐로 덮고, 눈이 올 때면 신발에 끈을 묶고 거의 매일 인쇄거리의 연중 개근상 할머니로써 우리 동네의 정신적 지주의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계셨다.
어느 8월의 폭염 속에서도 할머니는 우리 공장을 찾으셨다. 노친네이시라 더위에 넘어지시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내심 걱정도 되었다.
“덥지요 할머니?”
“나는 않더워 젊은이 덕분에 재미있어”
“할머니 저 슈퍼에 가셔서 시원한 것 하나 사드릴테니 같이 가시죠.”
“아녀 이 종이 안가져가면 다른 사람이 가져가. 그러니 젊은이 일보셔.”
“아니 제가 실어 드릴께요. 그럼 같이 실고서 슈퍼로 가세요”
그날따라 폐지가 많아 우리공장의 종이만 해도 한 리어카���가 꽉 되었다.
“이거 오늘 땡잡았네. 내가 깨끼 사줄게. 하여튼 고맙수이다 젊은이”
“아니에요. 제가 사가지고 올테니 그늘 밑에서 좀 쉬고 계세요. 바로 올께요.”
시원한 냉수 한 병, 음료수 두 개를 사가지고 할머니께 하나드리고 내가 하나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노라니 할머니께서는 손자 자랑의 보따리를 끌러 놓으셨다.
“아 글쎄 내 손자녀석은 참 크게 될겨그랴. 요즘 젊은놈들이 변또 싸가지고 다니는 학생들이 어디있어, 그런데 내 손자놈은 맛대가리도 없는 셔빠진 김치랑 변또 두 개씩 싸가지고 다녀. 점심값도 아낀다고 그런다나. 그러니 이 할미가 힘이 펄펄 솟지 않컸어? 그 뿐여 낮에 이 할미가 피곤하고 늙은이고 하니까 초저녁에 일찍 잠들지. 저녁 늦게 핵교에서 오면 할미 잠깰까봐서 살살 들어와 변또 두 개를 깨끗이 닦아서 찬장에 잘 업어놓고는 또 공부를 하지. 어떻게 생각하면 불쌍하고 안쓰러워 죽겠어.”
“할머니 나중에 손자 잘되면 할머니 호강시켜 드릴거예요. 그러니 그때까지 정정하게 계셔야 해요. 아니 그런데 아직도 아들, 며느리한테는 연락 없나요?”
“소식없어. 내가 손자놈은 책임지고 가르치고 있으니까 죽지 않고 살아만이라도 있다가 털끝만치도 끄떡없이 손자가 잘되면 나타나기만 해도 고맙겠수다. 이것이 다 모든 부모 맘 이라우.”
“할머니 신호등이 파란불일 때 건너시는 거 잘 아시죠? 신호 잘 지키시고 다녀야 해요. 할머니 안녕 빠빠이!”
그렇게 몇 년을 계속 인쇄거리를 다니시다 보니 애인처럼 정도 들고 안 나타나시면 궁금도 하고 보고 싶은 연민의 정도 살포시 느끼곤 했다.
어제 저녁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만 드디어 우리 동네에서 왁자지껄한 싸움이 벌어졌다. 젊은 놈이 도로를 지나가는데 할머니가 힘이 없어 리어카���를 느리게 끌고 가니 답답했던 모양 이였다.
“여봐 씨팔 빨리 꺼지란 말이어.... 아 바빠 빨리”
일단 겁도 나고 비켜주어야 하니까 있는 힘을 다 보태다가 허리가 삐끗하여 잠시 정신을 잃어나 보았다.
또 젊은 놈은 고함을 쳐댔다.
“꺼지라고...”
그저 할머니는 놀라고 답답하여 말을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꽤나 기운도 있어 보였건만 찌들린 노동에 근력도 부치니 참으로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지였다. 그 광경을 보던 그래도 동네에서는 한주먹 한다는 폭행 전과 5범인 정팔개가 다가갔다.
“넌 마 이리 나와 봐...”
운전석에서 젊은 놈을 끌어 내리더니 숨쉴 틈도 없이 녀석의 낭심을 발로 걷어 찬 것이었다.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푹 쓰러진 것을 또 밟아 버린 것이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는 할머니도 없니 씨발놈아.”
온통 거리는 서커스장으로 변했다. 하도 시끄러워 사무실 밖을 나가보니 욕쟁이 할머니가 길바닥에 앉아서 신세 한탄을 하고 계셨다.
“아니 할머니 이게 왠 일이라우?”
할머니는 하염없이 우시기만 했다.
싸이렌이 울린다. 도로를 정리하고 난 경찰관은 첫마디가 “또 정팔개 너냐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람을 쳐”
일단 할머니의 리어카���를 옆으로 치워놓고는 사무실로 모셔 찬수건으로 머리를 식혀드리고 청심환 한병과 진정제 하나를 드시고 나니 정신이 들었나 보다.
“젊은이 고맙소. 오래 살다보니 참 별일도 많소.”
“아프신데는 없으세요?”
“없어 괜찮어.”
오늘 일하지 마시고 들어가 쉬세요
“안댜. 열흘 있으면 우리 세돌이 손자 월사금 날인데 죽어도 해야댜.”
그러고는 또 리어카���를 천천히 움직이며 손자 세돌이의 월사금을 보태러 다음 행선지로 향하셨다.
그런데 또 일이 생겼다. 의리파 폭행 전과 5범의 정팔개였다.
“정팔개 여기에 타.”
“알았어. 살기도 힘든데 거기가면 때되면 밥줘, 때되면 고기줘 참 더러운 세상”
그를 쳐다보던 빨주리 담배를 문 할아버지가 입을 떼었다.
“여보 경찰아저씨 때린 것은 잘못이지만 그 젊은 놈 옛날에 내가 한가닥 할 때만 같았으면 폭행이 아니고 죽여버렸어. 저 정팔개는 아무런 죄가 없소. 내가 대신 가겠소. 정팔개 저 놈 요새 먹고 살려고 새벽에 노가대도 다니며 살려고 하니 얼마나 이쁜 지 모르겠어. 그러니 할 일 없는 내가 들어가지 뭐.”
난장판 된 거리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막함에 휩싸였다.
“정팔개... 젊은 놈 저 자식 더 조져”
정신을 차린 젊은 놈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모자를 눌러 쓴채로 쏜살처럼 사라져 버렸다.
“정팔개 만세!”
“참 더러운 세상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있네.”
“정팔개의 주먹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청소하는 정화기로 변했구려. 정팔개 너 집에 가서 술 처먹지 말고 내일 새벽 일나갈 준비해.”
그리하여 한편의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보고픈 우리 욕쟁이 할머니는 감기는 안걸리셨나 허리는 안아프신가 손자 월사금 걱정은 해결되었나 푼수스런 걱정도 나의 일과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매일 매일의 일수꾼처럼 리어카���가 무거울 때는 콧노래를 부르고 칠갑산을 불러가며 이 거리 저 거리의 불청객이 아닌 피곤함을 달래주는 재롱둥이 할머니로 굳게 말뚝을 박아가고 있었다.
그 후로 한참동안 보이지 않으셨다.
손자가 졸업하여 취직이 됐으니까 할머니 고생에 동반졸업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내 마음의 위안도 가져봤다.
‘아니 잘되시고 건강히 계실거야 그렇지’
몇 년뒤 역시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구름이 옅게 드리운 오후. 사무실에 옷을 갸름하게 입고 점잖은 넥타이를 맨 안정된 공무원 스타일의 젊은이 한 사람이 찾아와서 기다린다는 전화가 여직원한테 왔다.
내가 지방 출장중이니 누구냐고 물어보고 연락처를 남겨두면 연락드리고 찾아 뵙겠노라고 하니 꼭 만나야 한다면서 오실때까지 기다리면 되니까 천천히 일 보시고 오시라고하면서 인적사항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통보였다.
내가 평소 크게 잘하고 산 것도 없지만, 뭐 죄짓고 산 것도 없는데 무슨일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괜한 겁도 조금 났다. 지방에서 급히 일을 마치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세 시간이 넉넉히 지나서 그 청년과 만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누구시고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명함을 내미는 것을 보니까 경도지방법원 판사 김세돌이라고 쓰여있는 명함이었다. 궁금증은 더 증폭되어갔다. 앉으시라는 말도 못하고 어떤 이유로 저를 찾아오셨냐고 다그치는 투로 얘기를 하니 빙그래 웃으면서 하는 첫 얘기가 “사장님이 저의 은인입니다”라고 하면서 사무실 맨 바닥에서 업드려 큰절을 하였다.
“이러지 말고 일단 일어나세요.”하니 고요한 적막 속에서 다른 직원들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제가 폐휴지 주워가셨던 할머니 손자입니다. 할머니께서 지금 병환이 깊어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데 이 인쇄거리를 지목하시고 위치를 말씀하시면서 이름도, 전화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시곤 키가 작고 안경을 썼으며 얼굴은 까마잡잡한 사람이라고 소개를 받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한동안 정도 들고 궁굼하던 차에 참 반갑기도 했지만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눈물이 앞을 가려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손수건을 꺼내어 닦으면서 젊은 판사의 손을 꼭 잡고 의자에 같이 앉자는 권유와 차가운 냉수 한 잔으로 숨을 돌렸다.
“판사님의 칭찬을 그리 많이 하셨던 할머니였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다가도 눈물이 앞을 가려 떨어지는 뜨거운 감동을 참지 못하고 같이 울먹이곤 하였다.
“할머니가 떠나시기 전 꼭 한번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제가 모시고 갈테니 귀한 시간 좀 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럽시다.”
그렇게 사무실 문을 나섰다.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약간 드리운 오후시간 인지라 라이트를 켠차도 있고 켜지 않은 차도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사장님 저기좀 보세요. 우리 할머니 아니세요?”
김세돌 판사는 옛날 어른들 말씀대로 헛것이 보였던 모양이다.
“아이구 판사님의 할머니는 병원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시는데...”
허리가 구부정한 노친네 할머니가 리어카���에 폐휴지를 싣고 간신히 간신히 몸을 가누면서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참 어이가 없기도 하여 할머니 곁으로 가서 확인을 하고 있노라니 김판사는 멍하니 쳐다만 보고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차리더니 얼마인지 몰라도 뒷주머니에서 푸른색 지폐를 꺼내고는 “할머니 이것 노자돈하세요.”
“죄송합니다 아저씨”
“이제 가시지요” 그리고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바로 이 거리가 김판사의 할머니께서 몇 년을 다니시던 정이 들고 다져진 길입니다. 그래서 김판사는 할머니를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인쇄거리 리어카��� 할머니의 사랑이 잔영으로 변했나봅니다. 그래서 사랑은 남는 것인가 봅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아픈 가슴을 찌르는 것 같기도 하여 물어보지 않으려고 했다가 그래도 궁금해서 용기를 내어 “아버지, 어머니는요?”하고 물어보니 그의 대답은 “아직요.”라고 하는 즉답의 냉랭한 한마디였다.
병원에 도착하니 몇 년의 종이할머니가 땀으로, 정성으로, 오기로 남겨준 선물은 곧게 키운 판사 손자와, 깊은 노동으로 인한 관절염 악화로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병환이었다. 그때 할머니를 맨처음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는 눈에서 반딧불이 보였지만 판사 손자 앞에서는 두눈이 커다란 횃불처럼 느껴졌다.
걷지 못하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 앞 식당에서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된장찌개를 같이 하면서 여러 얘기를 하고 또 찾아뵙겠노라는 약속을 하고 무겁지만 천하의 가벼운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 후 몇 달 뒤 따르릉하고 전화가 울렸다.
“저 김세돌입니다. 할머니가 얼마 못사실 것 같은데 꼭 한번 보고 할말이 있다고 하시니 시간 좀 내주실수 있으세요? 죄송합니다.”
“그러지요” 하고 나는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
“젊은이한테 내가 받은 은공으로 내 손자가 이렇게 잘 돼서 고맙소. 이것은 내 마음의 선물이니 받으시오” 하면서 은수저 한 벌을 주면서 “부인과 녹나지 않는 세월을 행복하게 알콩달콩 사슈” 하시며 힘들게 손자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두 손을 더듬으며 내 손에 들려 주셨다.
“고맙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보배선물로 알고 녹슬지 않는 행복으로 간직하고 사용하겠습니다.”
“내가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르니 젊은이에게 염치가 없지만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으니 들어주시오. 내 손자가 지금 판사가 되었지만 아직 어리고 남에게 베풀 수 있고 세상을 따뜻하게 해주는 고운 마음을 당신이 가르쳐주시오. 그리고 친동생처럼 새아버지처럼 내 손자를 부탁할께요. 내 평생 고마웠고 꼭 성공하세요.”
이 말씀을 끝으로 할머니는 눈을 감았지만 온전한 눈을 감지 못하고 진한 눈물을 흘리면서 고요히 잠이 드셨다.
할머니의 손자는 오른손을 잡고 오른쪽 눈을 감겨드리고, 나는 왼쪽 손을 잡고 왼쪽 눈을 감겨드리면서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천사요 애국자이십니다. 당신의 가슴에 가장 큰 훈장인 하늘만큼 땅만큼의 사랑장을 선물하오.”라고 하면서 연민의 눈시울 속에서도 가슴 잔잔한 마음으로 할머니! 저 세상에서는 더 안정되시고 관절염이 없고 보배로웠던 리어카���가 모든 곳을 여행할 수 있는 아주 편한 비행기가 되어달라고 기도할께요. 이제는 훨훨 날아 다니세요.
끝까지 눈을 감지 못한 것은 항시 가슴에 맺힌 할머니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던 생사를 모르는 아들과, 험한 세파에 힘든 생활을 전전긍긍하고 고생했던 같은 여자 며느리가 보고파서 그랬나보다. 지난날의 할머니 리어카���의 스크린이 장막을 드리운다.
천관산 억새밭에서
최일순
천관산天冠山 억새밭 군락지에 올라서니 “히야아!” 하는 탄성이 절로 새어나왔다. 하얗게 핀 억새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바람에 흩날렸다. 따끈한 가을볕이 드넓은 억새 밭 위로 쏟아져 내렸다. 눈이 부셨다. 파아란 바다를 앞에 두고 하얗게 핀 억새가 바람에 흩날리는 광경은 현란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마음이 후련했다. 오르느라 힘들었는데 일시에 땀을 식혀주는 해풍이었다.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바다에서 쉬임없이 바람은 불어오고 억새는 잠시도 멈추어 있지 않고 온 몸이 흔들렸다. 온 세상이 흔들렸다.
점, 점, 점, 점. 바다 위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 마치 넓은 대야 속에 수많은 돌들을 퐁당퐁당 빠트린 것 같았다. ‘多島海’라는 말이 실감났다.
햇살 따끈한 가을날, 산에서 내려다 본 들녘은 황금벌판이었다. 누렇게 익은 벌판 한가운데로 흐르는 파란 물줄기가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민가들과 어우러져 한적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마음까지 풍요로워졌다.
허나 저 골짝, 골짝 해안가의 삶 또한 슬픔을, 애환을, 실 날 같은 희망을 끌어안고 내일은? 내일은! 하며 오늘을 힘겹게 인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희한하게도 등성이에만 바위들이 치솟아있었다. 등성이마다 일렬로 박혀있는 흰 바위들이 마치 수많은 관을 쓴 것 같았다. 천관산天冠山, 천 개의 관을 쓴 산이라? 불현듯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천관산에 얽힌 김유신 장군의 설화가 생각났다.
청년 시절, 김유신은 기녀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한창 뜻을 세워 꿈을 펼칠 나이였다. 이를 눈치 챈 어머니가 심하게 꾸짖었다. 큰 뜻을 품은 사내대장부가 하찮은 여인의 치마폭에 싸여 뜻을 펼치지 못하는 못난 사나이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그 날 밖으로 나오니 말은 어느 새 기녀 집 앞에 멈추어 섰다든가. 어머니의 말에 수긍하던 참이었던지라 유신은 심하게 화가 났다. 유신은 말의 목을 댕강 베었다. 그녀와의 인연을 끊기가 쉽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후,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한다.
성골 출신이 아닌 김유신이 남보다 몇 십 배 노력하지 않으면 정치 세력의 중심에 서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중심 세력의 눈 밖에 나는 일을 하는 것은 그의 정치적 생명에도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먼 훗날,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시대의 중심축에 서 있게 되었다. 그 때, 우연히 그녀가 중이 되어 머문다는 산사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그가 찾아가니 그녀는 다소곳이 앉아 김유신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푸르고 젊었던 날, 관冠을 위해 한 여인의 사랑을 무참히 짓밟았던 유신. 하지만 억새처럼 머리칼 허옇게 흩날리는 장년의 언덕에서도 첫 맹세를 지키며 쓸쓸히 늙어가는 그녀를 본 순간, 어찌 감회가 밀려들지 않을 수 있었으랴.
유신은 조심스레 다가가 관을 벗어 그녀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깜짝 놀라 뒤돌아 본 그녀는 관을 쓴 채 서라벌에서 멀리 멀리 날아가 어느 산에 내려앉았다던가.
며칠 동안 음산한 기운에 싸여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날들이었다. 도무지 이 세상 살아감이 헛된 꿈같았다. 걸음을 걸어도 허방에 발 디딘 듯 허뚱거려졌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질주하던 삶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급정거 했다. 나이도 한참 어린 후배 여교사가 돌연사 했다. 월요일 종례까지 마치고 “내일 만나!” 하고 헤어졌는데, 함께 나눌 내일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저녁 식탁 차려놓고 풀썩 쓰러졌다 했다. 며칠 후, 그녀는 삶의 끈을 영영 놓고 말았다. 웃음 띤 얼굴, 고운 몸매가 조신하던 후배였다.
어떤 징후도, 예고도 없었다. 생의 열매를 부지런히 익혀야 할 짙푸른 여름날이었다. 중학생 어린 아들이 있다 했다.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그대로 멈춘 듯 황망한 날들이 흘러갔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반 쯤 넋 나간 상태로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영안실로 달려갔다. 어찌 허둥대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는 같은 객실의 탑승객들이었거늘.
‘사는 게 한바탕 꿈’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특정인의 얘기가 아닌, 네게 일어날 일이고 내게 일어날 일이었다.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함이 축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황망했다.
떠나는 혼조차 도무지, 도무지 믿기지 않아 이승을 냉큼 떠나지 못 할 것 같았다.
교복 입은 중학생 제자들이 수시로 찾아와 눈물을 쏟았다. 지난 해 고인이 담임했던 반 아이들이었다. 식사를 내다주며 가시는 분이 마지막으로 대접하는 식사니까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일렀다. 슬픈 마음 여미고 어린 학생들은 밥그릇을 싹싹 비웠다. 하교 후 한바탕 눈물까지 쏟은 참이라 시장 끼는 극에 달해 있었을 것이다.
급작스런 소식에 여기서 저기서 달려온 지인들도 황망함을 수습하지 못했다. ‘죽음’의 휘장 밑으로 모여든 사람들 모두 꼼짝 달싹 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살아생전, 고인을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한꺼번에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죽어서 비로소 고인과 관계했던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이도록 하는 죽음. 죽음이야말로 생을 완결시키기 위한 축제여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허나 완성된 삶이, 완결된 생애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어찌 살아도 삶은 미완이거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일거리가 산적해 있었다. ‘부속학교’업무가 끝나자, ‘시 지정 연구학교’로 배정을 받고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 개인은 없고 조직 속의 톱니바퀴가 되어 너, 나 없이 바쁘게, 바쁘게 떠밀려 가고 있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내일에 저당 잡혀 오늘을 너무도 혹사하며 달려오던 중이었다.
교사 내의 건물도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해가 지면 교내에 머무는 것조차 꺼림칙했다. 퇴근 후면 어김없이 영안실로 달려가 밤늦게까지 고인의 가는 길을 지켰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병원문을 나서면 도무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 걸음이 헛디뎌졌다. 삶이 허깨비 같았다. 주변 공기까지 허적거리는 듯 했다.
일요일인 오늘, 선산으로 간다했다. 초가을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한결 마음이 놓였다. 한참이나 선배인 나는 이제 놓여나도 괜찮지 싶었다. 그리하여 달려간 장흥의 천관산이었다.
해풍에 드넓은 등성이의 억새가 마구 마구 흔들리자, 어느 새 내 안에 산재해 있던 칙칙한 상념들도 몽땅 털려나가고 있었다.
부장의 업무를 지니고 있던 고인은 몇 년의 시간만 흐르면 승진할 수 있다 했다. 그 관冠을 차질 없이 쓰기 위해 받은 압력이 힘에 부쳤던가 보다. 그녀를 압박했던 외부 여건 또한 너 ․ 나 할 것 없이 밥을 얻기 위한 힘겨운 행군이었다. 관冠을 지키기 위한 험난한 투쟁이었다.
“선배님, 내가 왜 그렇게 버둥대며 저 산을 오르려 했는지 몰라요. 푸른 하늘 한 번 마음 놓고 바라보지 못하고 달려왔는데….”
그녀의 고운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눈부신 햇살 받으며 억새처럼 아름답게 흩날리고 싶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고 싶어서 달리고 또 달리던 너의 삶과 나의 생을 뒤돌아본다. 그리고 그 과정에 놓인 생의 길목을 새김질한다.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
아랫배가 방방하게 부풀어 올랐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배출의 욕구로 어쩔 줄을 모르겠다. 하 졸려 두꺼운 눈꺼풀이 좀체로 열리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기도 귀찮다.
반쯤 감긴 눈으로 더듬더듬 화장실을 찾아 소변을 보았다. ‘쏴아’하고 힘차게 쏟아지는 소변 줄기, 먹은 양 보다 소변으로 배출되는 양이 훨씬 많은 것 같다. 그럴 일이 있을까마는 밤중에 소변보는 일이 그만큼 귀찮은 것이다.
이내 시원해진다. 소변 량이 생각 보다 상당히 많다. 평온해진 나는 깊은 잠 속으로 이내 빠져든다. 저녁 식사 후 과일을 많이 먹는 내가 밤마다 겪는 일이다.
만약 저 많은 양의 소변이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고 몸속에 쌓인다면 하루 저녁에 10kg 느는 것은 문제도 아닐 것이다. 어찌 몸무게뿐이랴. 피 속의 노폐물로 인해 며칠에 한 번씩 혈액 투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한다고 어찌 정상적인 일상이 가능하랴.
배설의 쾌감으로 시원해질 때마다 마음 놓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고 굉장히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곤 한다.
밤에 소변을 볼 때마다 얄개 만화를 그렸던 작가가 생각난다. 그는 40대 중반에 신장에 이상이 생겨 병원 신세를 졌다. 소변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그는 밤마다 몸무게가 10-15kg씩 늘어났다.
퉁퉁 부은 몸으로 병마와 싸우던 그의 힘겹던 말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내마저 떠나고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병실에서 그는 무서운 병마와 홀로 싸웠다. 자유혼을 구가하던 그에게 병실은 다름 아닌 감옥이었다.
방송국 PD가 그에게 물었다. 소원이 무엇이냐고.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눈치 채고 물은 물음이었다.
그는 바다가 보고 싶다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쓸쓸해 보였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살아서 마지막으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바다를 보는 일이었을까.
그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자니 안타까웠다. 보통 사람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달려가 볼 수 있는 것이 바다 아닌가.
결국은 혈액 투석으로도 생명을 부지하지 못해 한참 일 할 나이에 그는 눈을 감았다. 바다도 보지 못한 채였다.
너무나 애석했다. 누구한테나 목숨의 질량은 같을 것이다. 하지만 전도양양한 중년의 작가가 그것도 한참 물이 올라 정말로 많은 작품을 양산할 즈음에 눈을 감았기에 안타까움이 더했는지도 모른다.
정채봉 선생님의 ‘그 때는 왜 몰랐을까? 란 시에 이런 시구가 나온다.
오줌발 시원하게 내갈길 수 있는 게
행복인 것을
왜 그 때는 몰랐을까
암과 씨름하던 말기의 작품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던 평범한 일상도 돌이켜 보면 모두가 감사한 일 아닌 게 없다.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 푸른 하늘을 우러를 수 있는 것, 폭풍우 뒤 유난히 빛나는 햇살을 볼 수 있는 것, 땀 흘려 일한 후에 맛있게 식사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소중한 축복이다.
참 행복은 소소한 일상 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 단지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 할 뿐이다. 더 큰 것, 더 빛나는 것을 바라느라 우리의 심안이 어두워진 탓에.
오늘,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 지금 누리는 이 시간 보다 더 소중한 순간 없음을, 더 빛나는 사람 없음을 매 순간 인식하며 산다면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 때는 왜 몰랐을까?’ 하지 않고 ‘이만하면 족하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만큼의 삶을 허락한 신께 감사하며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밤중에 깨어나 시원하게 소변을 본 후 자리에 쓰러질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내가 나는 기특하고도 기특하다.
아, 나는 오늘도 마음 놓고 소변을 볼 수 있어 행복하다. 감사하고도 감사하다.
엄마가 학교에 오신 날
오늘은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엄마가 학교에 오시는 날, 아이들 가슴은 콩닥콩닥 뛸 것이다. 긴장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교실 구석구석을 말끔히 정돈해 놓았다. 환경판도 손보았고 아이들 그리기 작품도 새로 붙였다. 작품 밑에 아이들 이름도 큼직하게 써 붙였다. 교실 분위기가 한결 밝고 산뜻했다.
교실 곳곳에 알맞게 배치해 놓은 국화가 그윽한 향을 피워 올리고 있다. 흥겨운 잔칫날 마냥 주변 공기마저 상승되었다. 그러면서도 묘한 긴장 또한 흐르고 있다. 오늘은 초등학교 1학년인 학부모 초청 공개 수업일인 것이다.
예쁘게 단장한 엄마들이 하나, 둘 교실로 들어섰다. 삽시간에 교실은 젊고 예쁜 엄마들로 꽉 들어찼다.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는 아이들. 엄마와 눈 맞춘 아이의 얼굴은 해처럼 환하다. 마음에도 화사한 꽃이 피어날 것이다. 응답하는 엄마들 눈길에도 따뜻한 정이 넘쳐나고 있다. 만사 제치고 학교로 달려온 엄마들이다.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들의 눈길에도 사랑이 흐르고 있다. 정이 담기어 있다. 모두가 소중한 내 아이 같을 것이기에.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와서 자기 그림을 가리킨다. 엄마는 잘 그렸다 칭찬한다. 아이의 눈은 자긍심으로 반짝인다. 환하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엄마. 아이는 한껏 용기를 얻고 있다. 인정의 극치를 맛보고 있다. 세상 무엇이 부러우랴.
엄마한테 달려가 포옥 안기는 녀석들. 엄마를 끌어안고 살풋 눈감은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평화스러워 보인다. 아이 있어 엄마가 빛나고, 엄마 있어 아이 또한 귀해 보이는 순간이다. 바라보는 사람조차 행복해진다.
딸의 풀어진 외투를 꼭꼭 여며주고, 흐트러진 아들의 옷매무새를, 헝클어진 머릿결을 매만져주는 정 담긴 저 손길, 눈길. 교실 가득 아름다운 사랑이 넘실거린다. 평화로운 훈풍이 인다.
어둠이 있어 태양이 빛나듯 세상살이 또한 양과 음이 교차한다. 아이는 눈이 빠지게 기다리건만,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엄마도 있다. 마음이 오죽 허전하랴. 얼굴에 스쳐 가는 외로움의 짙은 그늘. 일만 중하고 아들은 팽개친 것 같은 섭섭함에 마음으론 흐느끼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끌어안고 펄쩍대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우랴. 자신이 불쌍해지기도,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기도 할 것이다.
그러던 차 엄마가 마악 교실로 들어서, 일시에 마음에 햇살이 드는 아이도 있다. 웃음이 번지는 저 환한 얼굴. 캄캄한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된 듯 벅찬 행복감에 잠겨있다. 씽긋 웃는 엄마 얼굴과 눈 마주치면 그 무엇이라도 해낼 듯한 자신감이 솟구칠 것이다. 기쁨이 샘솟을 것이다.
이런저런 마음 묻어두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평소와 달리 팽팽한 긴장이, 후끈 단 열기가 아이들의 전신에 얹혀있다. 항시 꿈틀대며 몸을 비비꼬던 녀석도 오늘만은 바르게 앉아 손을 번쩍번쩍 들고 큰 소리로 똑똑하게 발표를 한다. 참으로 멀쩡한 녀석이다. 가르치는 나 또한 흥이 난다.
쑥스러워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녀석도 있다. 엄마도, 친구들도, 선생님까지도 무한정 기다려주며 응원의 눈길을 보낸다. 한참 후 모기 소리 만하게 대답하곤 자리에 앉는다. 보는 사람들도 그제야 “휴-” 안심을 한다.
엄마가 안 와 어깨가 쳐진 녀석을 의도적으로 발표시키곤 잘 했다 추켜세웠다. 다소 기운을 추스르나 풀죽은 마음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눈치이다. 마음이 짠하다.
공개 수업이 끝난 후 부리나케 달려가 엄마를 꼭 껴안는 아이, 엄마 얼굴에 뽀뽀를 쪼옥 하는 아이. 엄마한테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는 아이도 있다. 엄마가, 우리 엄마가 제일 좋다고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나는 엄마가 안 온 아이들을 하나, 하나 챙기며 꼬옥 안아주었다.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이다. 그들이 안스러워 내 마음에도 그늘이 진다.
엄마들과 면담하기 위해 아이들을 놀이터로 내보냈다. 잘 키워주었다며 엄마들은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 고맙고도 고맙다. 오히려 내가 아이들한테 더 많은 것을 배운 한 해였는데.
엄마들이 사온 빵과 음료수를 나누어 먹었다. 어둡던 아이들의 얼굴도 한결 밝아졌다. 위축되었던 아이의 마음도 어느 만큼 평정을 되찾은 듯 했다. 이제야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고된 일에 시달리는 핼쓱한 엄마 얼굴을 떠올릴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엄마의 고달픔을 이해하며 마음 아파할 저 어린 효심. 엄마의 부재 앞에서 자신을 다스려 가는 법을 익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려운 환경일수록 일찍 터득하는 슬픈 삶의 지혜다.
장사가 잘 되어, 집안 형편이 잘 풀려 내년에는 오늘 못 오신 아이 엄마 모두 학교에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먼 훗날 아이 가슴에 해 뜨는 날로 오래 오래 기억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