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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필 】
‘도투마리 잘라 넉가래 만들기’처럼 쉬운 일은 없다.
김 명 녕*
정규과정이든, 비정규과정이든, 해마다 수강할만한 프로그램을 골라 즐겁게 배우면서 새로 만나는 사람과 깊이 사귈수록 배우는 재미와 살아가는 재미가 쏠쏠하게 보태지기 마련이다. 내가 오랫동안 배우는 성악, 문학, 마라톤 분야는 배운 내용도 많고, 훌륭한 전문가도 많이 알고, 각종 대회에 선수나 심사위원으로 참여함으로써 해가 갈수록 삶에 신선한 변화와 생기를 더 많이 보태준다.
금년에는 한밭대학교 평생교육원 ‘즐거운 사진교실’ 야간과정에 새로 발을 들여놓아 재미가 가득한 사진예술의 이론과 기술을 배우면서 즐겁게 지낸다. 현재 평생교육원장과 교육연수원장의 직무를 겸하고 있으므로 이따금 야간에 참여할 행사도 있지만 웬만하면 제쳐놓고 강의실에서 수강함으로써 양질의 삶을 추구한다.
주간과정은 강의하는 요일에 사진촬영을 실습하지만 직장인이 대부분인 야간과정은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실습을 한다. 오늘(2009. 11. 29. 일요일)은 순천에 있는 ‘드라마촬영장’과 순천만의 갯벌이 실습장이다. 대전에서 순천까지는 버스로 3시간 넘게 걸리므로 아침 7시에 떠난다. 집을 나선 시간이 6시 45분이므로 여름이라면 중천에 뜬 해가 뜨거운 햇살을 마구 퍼부을 시간이다. 그러나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서릿발이 솟아오르고, 눈이 많이 내리고, 물이 꽁꽁 얼어붙는 대설이 코앞인데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에서 철 늦은 술 비1)가 주룩주룩 내리는지라 한밤중처럼 깜깜하다. 궂은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날 예정이던 수강생이 출발예정시간보다 일찌감치 집결장소에 모두 모였으므로 순조롭게 순천으로 떠난다.
순천으로 가는 내내 금년에 사진과정에서 배운 학습내용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봄 학기에는 노출, 조리개, 셔터스피드, 감도(ISO), 초점거리와 화각, 심도를 위주로 DSLR(Digital Single Lens Reflex)의 기초이론을 배웠고, 가을학기에는 현장에서 촬영기법을 익히고 있다.
최초 출사일(9. 20/일요일)의 촬영장은 전북지역이었다.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에서 망원렌즈의 아웃포커스 효과를 이용하여 꽃무릇을 촬영하였고,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원에서 광각렌즈의 팬포커스효과로 곡선의 아름다움을 살려 언덕에 핀 메밀꽃 풍경을 찍었다. 그리고 부안군 진서면 곰소염전에서는 반영을 이용한 예술적 표현기법을 배웠다. 대전 엑스포다리(9. 30)의 조명을 이용하여 야간촬영기법도 배우고, 주밍(zooming)으로 환상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기법도 배웠다.
10월 10일 토요일 새벽 5시에는 대청호수에서 목표했던 새벽풍경과 해돋이의 환상적인 장면을 촬영하고도 성에 차지 않아 온종일 호숫가를 누비면서 가을풍경과 인물촬영기법을 배웠다. 이번 학기 야외촬영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경북 청송군 부동면의 주산지와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의 회룡포 출사(10. 23. 토요일 24시)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극성스럽게 일요일 밤 자정에 대전에서 버스로 떠나 예정대로 새벽 3시 50분에 주산지에 도착하여 촬영하였고. 오후 1시에는 ‘육지 속의 섬마을’인 회룡포에 들러 아름다운 풍경을 찍었다. 신들린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자정에 모여서 떠나고, 꼭두새벽 짙은 어둠도 마다하지 않고 가을 산 호숫가에 이르러 콧노래를 부르며 삼각대를 세우고 사진기를 설치하겠는가!
11월 14일 토요일 오후에는 가창오리 떼가 저녁 만찬장으로 갈 때 뉘엿뉘엿 지는 해를 등에 지고 날아오르는 광경을 촬영하려고 동료들과 금강하구언으로 떠났다. 현장에 도착하니 듣던 대로 가창오리 떼가 놀이터에서 헤엄치며 쉬고 있었다. 그런데 구름이 잔뜩 낀데다 거센 바람에 이따금 빗방울도 흩날리고 몹시 추워서 손가락마저 곱았다. 좋은 사진을 찍도록 날씨가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벼르던 아기 눈이 먼다’2)는 말처럼 난생 처음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펼쳐지는 가창오리의 군무를 찍으러 왔지만 비구름 때문에 분위기를 살린 실루엣(silhouette)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날이 무척 어두워서 셔터속도를 늦추면 오리 떼가 파리 떼처럼 뭉그러지고, 셔터속도를 빠르게 하면 오리의 모습은 뚜렷한데 노출량이 적어서 오리 떼와 구름 떼가 오십보백보로 나타났다.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찍으려면 사진이론에 밝고, 기능이 많은 사진기 다루는 솜씨가 능수능란하고, 남다른 예술적 감각을 갖고, 부지런하고, 튼튼한 것 외에 날씨 복까지 타고나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출사였다. ‘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3)는 말처럼 겪어봐야 어려움을 알게 된다. 좋은 작품을 찍는 것이 ‘도투마리 잘라 넉가래 만들기’4)처럼 호락호락한 일이 아님을 실감하였다.
손바닥에 들어갈 만큼 작은 땅덩어리임을 말하듯 대전에서 순천까지 하늘빛과 빗방울 굵기가 똑같다. 비는 줄기차게 내리지만 버스는 예정대로 10시 40분에 옛 군부대 자리에 꾸며 놓은 드라마촬영장인 순천시 조례동에 도착한다. 입구에 걸어 놓은 그림이 비를 흠뻑 맞으며 이곳이 아부지(2009), 블러디쉐이크(Bloody Shake: 2009), 에덴의 동쪽(2009), 님은 먼 곳에(2008), 그 해 여름(2007), 사랑과 야망(2006)의 촬영지임을 알려준다. 촬영장에 들어서자 교수님이 기본적 촬영선택을 주문한다. 비가 내리므로 사진기 렌즈에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도록 유의, 날씨가 궂으므로 조리개 수치는 5.6이나 8을 선택, 흔들림을 방지하도록 셔터속도는 1/30초 이내로 유지, 노출모드는 조리개우선자동 또는 셔터우선자동모드를 선택, 화이트밸런스는 흐린 날을 선택, ISO감도는 100∼200을 선택, 노출보정은 -0.3으로 조정할 것 등이다.
시커먼 석탄열차, 석유와 얼음을 신속히 배달하던 태백상회, 연초소매소 가게를 내세운 태백풍경과 우체국, 자전거상회, 상회 등의 간판 앞에 황지를 거느린 거리가 가장 먼저 보인다. 빛바랜 간판과 우중충한 점포와 손가락으로 밀어도 금세 쓰러질 비좁은 건물이 즐비하다. 영락없이 1960년대까지의 모습이다. 곧바로 약국, 흥신소, 이발관, 소방소, 중앙극장, 제일양조장 등의 거리를 재현한 순천읍내에 들어선다. 오곡상회, 장터국밥, 양지세탁소, 기계국수집, 동명문구, 풍년 왕대포, 회생철물, 작명철학원 등의 건물과 세간5)을 세세히 들여다보니 모두 예나 다름없다.
그러나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개울에는 그 시대의 흔적이 조금도 서려있지 않다. 넓은 벌판에 젖을 물리며 제멋대로 구불구불 느릿느릿 흐르던 옛 개울에는 징검다리나 섶나무 다리가 놓여 있고, 밤낮 조잘거리는 깨끗한 물에는 새우를 비롯하여 붕어, 피라미, 소금쟁이, 게아재비 따위가 득시글거렸다. 이곳을 찾은 어린이들은 옛날의 실체를 본 적이 없으므로 옛 개울에도 오늘날처럼 잔뜩 오염된 물이 흐르고, 생명체라고는 잡초만 무성하고, 둑은 시멘트 옹벽으로 잘 정비된 것으로 여길 것이다. 수많은 관광객에게 그 시대를 올바르게 조명해서 감동을 주려면 거미줄처럼 둘러쳐진 전깃줄, 왕대포 주막집, 장터 국밥집, 양복점, 미장원, 문방구, 사진관, 옷 수선 따위의 상점을 그럴듯하게 늘어놓아 옛날의 어둠만 드러낼 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풍부한 자연도 제대로 복원해서 오늘날과 옛날의 명암을 대조할 수 있도록 만든다면 훨씬 더 교육적으로 가치가 있을 것으로 여겨져서 못내 아쉽다.
1980년대의 서울변두리 번화가를 재현한 중앙전당포, 떡 방앗간, 등용문 학원, 목욕탕, 문구점, 전화수리판매점인 정온사, 병원 등의 2층 건물은 그 이후세대에 태어나서 자란 세대에게는 흥미롭겠지만 우리 세대에게는 엊그제처럼 여겨져서 그저 그렇다. 20∼30년 전 거리를 지나 언덕에 오르니 1970년대의 서울 봉천동 달동네가 나지막한 동산에 다랑논6)처럼 펼쳐져 있다.
맨 앞에 있는 길성상회에 들어가니까 왕 눈깔사탕이 들어있는 큰 병이 진열대에서 옛 추억을 노래한다. 옆 가게에는 달동네 골목집에 연탄을 배달하던 지게가 놓여 있고, 멀리 높은 곳에 세운 라디오 안테나와 텔레비전 안테나도 보인다. 골목을 올라가면서 미장원과 만물상회도 보이고, 왕대포집과 연탄·석유·얼음 배달집도 보인다. 1957년 12월에 준공하였다고 글자를 새긴 마을 공동우물에 물지게와 물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서 그 시대의 애환을 들려준다. 마을 곳곳에 아무데나 휘갈겨 쓰던 낙서문화와 좀도둑을 쫓던 개조심 대문문화도 빠뜨리지 않고 드러냈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조리7)와 주전자, 벽에 걸린 광주리와 시래기8) 등의 옛 살림살이에서 헐벗고 굶주렸지만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들이 보이고, 마을 꼭대기에 세운 교회에서는 신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목사님의 설교가 밖까지 새어나온다.
드라마촬영지 어디에도 초가지붕을 얹은 가옥이 한 채도 없는 것으로 보아 1960년대 새마을사업이 끝난 뒤의 풍경으로 여겨진다. 새마을사업으로 덕지덕지 낀 묵은 때를 한 꺼풀 벗겨낸 뒤의 서울과 순천 시내의 풍경이 이다지도 꾀죄죄하고 초라할진대 10년을 앞당겨서 1950년대 중반의 산촌과 농어촌을 재현한다면 얼마나 비참할까? 문득 초등학교 시절에 벌떼처럼 새까맣게 날아드는 파리들과 감자·강조밥·강보리밥을 나눠먹던 소백산맥의 깊은 산촌풍경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밤낮 끊임없이 돌멩이와 부딪치며 흐르는 여울물 풍경이 아름답듯 거센 세파를 헤치며 힘겹게 지내던 시절도 세월에 고생은 몽땅 떠내려가고 아름다운 모습만 아롱다롱 수놓아져서 살아 숨 쉰다.
밑반찬이 풍성한 순천시내 식당에서 돌솥 밥으로 점심을 먹고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으로 옮겨간다. 밀물에 밀려온 물고기와 조개 따위가 썰물에 쓸려가다가 걸리도록 둘러친 그물이 갯벌 멀리 보인다. 갯벌이 닿은 육지 쪽에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하는 노랫말이 실감나도록 외딴 초가집이 보인다. 그 집과 갯벌에서 잡은 물고기와 조개그릇을 끌고 온 작은 배가 만든 S자로 구부러진 자욱길을 포인트로 바닷가 풍경을 찍는다. 집 언저리에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과 먹음직스럽게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과 탐스러운 모과열매의 풍경은 덤으로 찍는 작품이다.
서둘러서 와온해변으로 옮겨간다. 비가 그치고 해넘이 무렵에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 때문이다. 붉은 해넘이 빛깔·S글자의 갯벌물길·멀리 떨어진 섬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장면을 찍느라 작가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와온해변 갯벌에서 밀물이 들 때를 기다리며 한가롭게 쉬고 있는 몇 척의 고깃배를 카메라에 주섬주섬 주워 담고 대전으로 떠날 버스에 오르는 동료들의 흐뭇한 마음을 따듯이 느끼며 스러지는9) 노을빛을 바라본다.
1) 술 비 : 겨울비. 농한기라 술을 마시면서 놀기 좋다는 뜻으로 쓰는 말.
2) 벼르던 아기 눈이 먼다 :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따를 수 있음을 이르는 말.
3) 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 : 사람은 위급하거나 어려운 때를 당해 보아야 비로소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
4) 도투마리 잘라 넉가래 만들기 : ‘아주 만들기 쉬운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5) 세간 : 집안 살림에 쓰는 온갖 물건. 살림살이.
6) 다랑논 : (비탈진 산골짜기 같은 곳에 층층으로 된) 좁고 작은 논배미로 된 논.
7) 조리(笊籬) : 쌀을 이는데 쓰는 기구.
8) 시래기 : 말린 무청.
9) 스러지다 : 모양이나 자취가 없어지다.
* 충주 출생, 공학박사, 한밭대 교수, 수필집 달리면서 만나는 세상, 달릴수록 넓어지는 세상, 인터넷 문학상(문학사랑),
한국농촌문학상 대상(농림부장관) 수상, mnkim@hanbat.ac.kr
서리
손 중 하*
“따르릉~ 따르릉~” “한 밤중에 무슨 전화람, 아! 여보세요.” “거기 손 중하 씨 댁인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가요?” “여기 00파출소 00인데요. 확인할 것이 있어서요.” 한밤중에 걸려오는 전화는 거의가 반가운 전화가 아닌데다 파출소라고 하는데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경찰 때문에 피해 본 일이 없는데 오히려 경찰 때문에 이렇게 안전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인데 왠지 경찰제복 입은 사람만 보면 눈이 그 제복으로 꽂이여 잠시 두려움을 일게 하는지.
얼마 전에도 그랬다. 아내와 같이 나들이를 하는데 아내가 갑자기 “여보, 저기 경찰!” 안전벨트 다 메고 지정속도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리는데 아내가 “저기 경찰!” 하는 바람에 속도를 더 낮추어 시속 50킬로미터로 달리는데 결국 수신호로 차를 옆으로 빼라는 경찰지시로 차를 옆으로 빼니 거수경례를 하더니 운전면허증을 요구한다. 들고 있던 폰으로 주민등번호인지 차량번호인지는 모르지만 어디엔가 확인을 하더니 가라고 한다. “여보, 내가 범죄자처럼 생겼나?” 아내에게 물으니 픽 웃고 만다. 하기야 범죄자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자란 곳은 첩첩산중의 시골이다. 그곳은 비록 가난은 하지만 병아리 떼를 몰고 내 집에 말질 하러온 암탉에게까지 먹을 것을 주어 보내는 인심이 후덕한 마을이었다. 그 마을 뿐 아니라 이웃마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때 그 시골에서 익힌 서리가 대학시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면 그 누적된 범죄가 이만 저만이 아닐 터이다.
초등학교 시절 오가는 학교 길에 봄이면 보리서리, 여름방학이면 참외서리, 가을이면 콩서리, 그렇게 해서 들키면 “이 고연 놈들!” 하고 현장에서 쫓아버리면 그 뿐인 마을이었다. 누구 집 자식이라고 기억해 두셨다가 재차 혼내는 일도 없으셨다. 때로 인심 좋은 후한 아저씨는 아직 설익을 것을 따는 걸 보고는 익은 것을 따 주기도 하고 덜 익힌 것을 먹는 걸 보고는 익혀 먹여 보내기도 하셨다. 때때로 주인한테 들키지 않고 하는 이 서리는 두근거림, 짜릿함, 승리감 등 아무튼 여러 감정들이 뒤얽힌 묘한 감정을 일으키고 때로는 행복감마저 주었다. 고등학교 때이던가 싶다. 그 때는 1년에 한 두 차례 닭서리를 하게 되었는데 제법 서리에 대한 일가견이 생겨 ‘서리 5계’를 만들기도 하였다. 서리 오계는
첫째, 닭서리를 할 때에는 열 마리 이상 기르는 집을 택한다. 주인의 속상함을 덜하기 위하여.
둘째, 암탉을 잡지 않는다. 번식을 위하여.
셋째, 한집에서 한 마리만 잡는다. 중과세는 민생에 폐가 되니까.
넷째, 애사가 있는 집은 가지 않는다. 슬픔이 겹치면 안 되니까.
다섯째, 사람의 흔적을 나타내지 않는다. 서로 이웃을 의심하게 되니까.
그럴 듯한 우리들만의 서리 오계를 만들어 놓고 서리를 하게 되었는데 특히 우리는 오계 중 다섯 번째의 사람의 흔적을 나타내지 말라. 비록 서리는 하되 동네 사람들끼리 또는 이웃마을끼리 불신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서리의 행위를 족제비나 살쾡이에게 떠넘기는 작전이었다. 그 방법은 이러 했다. 일단 닭장에서 닭을 소리 나지 않게 꺼내면(다른 닭들이 놀래면 꼬꼬댁 거리며 소란을 피워 서리를 실패로 만드니까) 목을 날갯죽지 밑으로 넣어 소리 지르지 못하게 하고 털을 뽑아 닭장 문에서부터 뒷동산 명과나무 덤불까지 이어놓고 마지막으로 닭 목과 다리를 그곳에 흔적으로 남겨 놓아 족제비나 살쾡이 짓으로 위장하면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난 주인은 없어진 닭의 털의 흔적을 쫓아 가 보지만 뒷동산의 명과나무 밑의 흔적으로 그 놈의 족제비나 살쾡이 욕만 하고 뒤돌아 온다. 그렇게 명과나무 밑을 확인하고 온 것은 그 집 아저씨뿐이 아니었다. 때때로 같이 서리를 한 친구 아버지도 그러셨고 때로는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다. 그 후 괜스레 집집마다 족제비 덫이나 살쾡이 덫을 닭장 근처에 놓게 되었고 우리는 서리를 할 때마다 그 덫에 걸리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서리를 하게 된 것은 알고도 모른 척 눈감아준 마을 사람들의 후한 인심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리 머지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언젠가 아이들이 시골 동네에서 참외서리를 하다가 들켜서 참외밭 전체를 변상했다는 얘기를 듣고 세상인심도 변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리라는 귀여운 두근거림의 단어가 절도라는 단어 속에 파 묻혀 그 언어로서의 생명력을 다 한 것 같아서, 그것이 너무 아쉬워서, 그 단어가 너무 아까워서 고향 언덕너머 산전에 수박을 이백 여 평 심었었다. 수박이 익게 되면 옛날에 내가 했던 것처럼 달빛이 있는 밤에 친구들끼리 서리 한번 해 보라고 심어 놓았던 것이다. 수박이 제법 열어 그 크기가 아이들 머리통만 해지고 그 열매가 어찌나 소담스러운지 퇴근 후에는 수박이 잘 자리 잡도록 받침도 해주고 정성들여 키웠는데 어느 날 가보니 수박밭 전체가 말이 아니었다. 익은 것 안 익은 것 할 것 없이 어떤 것은 뿌리 채 뽑혀나가 버렸다. 어떤 것은 깨어져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고……. “고얀 놈들, 익은 것만 따 갈일이지.”
하기야 들킬까봐 어디 정신이 있었겠나? 서리하는 방법을 미리 알려나 줄 걸. 다시 파출소에서 경찰아저씨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여보세요. 삼년 전에 혹시 수박 절도 당한 적이 있나요?”
삼년 전의 수박 절도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리하라고 가꾼 수박이 생각이 났다. “아! 네, 절도 당한 적은 없지만 없어진 적은 있었어요.” “오셔서 확인 좀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파출소에 가보니 초등학교 오학년 때 가르쳤던 제자가 아닌가! 그 녀석 남이 훔쳐간 복숭아밭에서 복숭아 하나 따먹다가 주인의 고발로 과거 범죄까지 추궁당하다보니 선생님 댁 밭에 서리용 수박 딴것까지 다 불어버렸으니 순진하기가 짝이 없다. 제자를 데리고 나오는 발걸음이 왠지 가볍지 않았다. 지금도 경찰만 보면 떨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 놈의 닭서리 때문 일 것 같았다. 행여 오늘 저녁이라도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손중하씨 댁이지요. 손중하씨 맞나요. 사십 여 년 전에 닭서리 한적 있지요? 경찰서로 좀 나와 주셔야겠어요. 확인할게 있어서…….”라고 전화가 올 지도 모를 일이다. 서리문화는 끝났으나 과거사 규명차원에서 오랄까 겁이 난다. 오금이 저려온다. 하지만 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 옛날의 포근하고 아름다웠던 시골의 후덕함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하나 만들어 줄 순 없을까하는 아쉬움이 맴돈다. 봄이 오면 시골 농장의 한 구석에 참외나 수박을 또 심어 보려 한다. 이제는 경찰서에서 밤중에 전화 걸려오는 일이 없도록 서리를 대신하여 꿈을 가꿀 수 있는 또 다른 아이들의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개발하고 익은 것 안 익은 것 구별하여 설익은 것 따지 않고 익은 것만 가려내는 요령도 가르쳐주고 이들을 지키는 허수아비도 만들어 놓으려 한다. 이제 옛날의 서리방식은 서리로써 그 시대적 소명을 다 했으니 내 사전에서 서리라는 단어는 폐기하고 농촌과 도시의 맥을 이어주는 또 다른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어 내 보고 싶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의 옛날 우리 어른들의 지혜로움을 터득하고 농촌을 영원히 가슴에 고향으로 삼고 살기를 소망 해 본다.
* 충남 금산 출생, (전) 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 ‘한울문학’(2005) 등단, ‘한국농촌문학상’(2006) 수상,
jhson1971@hanmail.net
작은 연못 속에도 하늘의 뜻이
김 기 태*
대둔산 정기를 받고 내려오다 멈춰 선 곳. 그 곳에는 조그만 옹달샘이 있다. 바람 난 바람이 나무 가지를 유혹해도 옹달샘은 언제나 여유롭다. 그 곳에는 금붕어가 물 속에 잠긴 태산과 함께 노닐고 있다. 옹달샘 위 두덩에는 50년의 세월을 버틴 벗꽃나무가 지키고 있는데 눈을 들어보니 옆에 “지소유천(池小有天)”이라 쓰여 있다. “연못이 작을지라도 하늘의 뜻이 있다.”는 의미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범상치 않은 옹달샘이다.
조그만 평전(平田)이 이어지고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농막은 찾는 이의 눈길을 멈추게 하는데 처마 밑에 달아놓은 “자하루(自下樓)”란 현판이 주인의 삶을 말해 주는 것 같아 옷깃을 여미게 한다. 자하루(自下樓). 나를 낮춘다는 뜻인가 보다. 그런데 루(樓)자를 붙인 속내가 궁금해진다. 원래 정자에는 여러 가지 등급의 호칭이 있는 것으로 안다. 정(亭). 각(閣). 헌(軒), 루(樓)가 있는데 왜 정자 중에서 제일 큰 루(樓)를 사용하였을까? 옹달샘 때문일까?
자하루(自下樓)에서 바라보는 산의 능선이 아름답다. 부처님이 누어 계신 모습과도 흡사하고 팔선녀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능선을 즈려밟고 올 것 같은 부드러움이 눈에 다가온다. 물론 먼발치로 보이는 농가의 모습도 한가롭고 누구와 함께 가는지 모르지만 대둔산으로 달려가는 차량 행렬도 호기심을 자아낸다. 구름이라도 산자락을 휘감으면 시 한 수가 나올 법도 하고 달 밝은 밤이면 대금이라도 불어야 격에 어울릴 것 같다.
40여 년을 교직에서 어린 아이들과 함께 자라다. 어른이 되었다고 그 직에서 물러나 비탈진 자갈밭을 일구어 이모작을 시작한 지인의 삶의 터전이다.
남자는 나이가 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고, 여인은 시골로 내려가기를 원하지 않아 노후에 이모작을 준비하는 남자들에게 가슴앓이를 안겨 주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여자들은 의료시설과 복지시설 그리고 문화시설이 미흡한 시골생활이 두렵기도 하고 그동안 도시생활에 익숙하여 일할 줄도 모르는 자신이 농촌생활에 적응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시골로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것 같다.
지인은 퇴직 5년 전부터 4,500여 평의 땅을 구입하고 그곳에 밭을 일구고 농막을 지었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이제는 작물도 많이 심고 산 속에는 장뇌삼도 자라고 있다. 풀숲에서는 오골계가 알을 낳아 병아리를 부화해서 데리고 나오지만 그동안 많은 마음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참외를 심어 놓고 순을 잘라주고 꽃이 피어 열매가 맺히는 것을 15일 동안 바라보며 정성 들여 키워 왔는데 손자가 내려오기 하루 전날 어느 염치없는 손님이 들어와 참외를 따가서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옛날에는 오이의 끝물이 지나서 하는 것이 서리였는데 지금은 예의도 없이 주인도 맛보기 전에 따 가는 몰염치한 행동으로 변했다.
밭가에 심어 놓은 복분자 열매를 차를 세우고 따 가는데 주인이 싫은 소리 좀 했다고 시골 인심 참 야박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분했다고 한다. 봄이면 장뇌삼 열매가 사랑의 열매처럼 열려 식별하기 쉬우니 도둑맞는 일이 다반사이고 힘들여 가꿔 놓으니 불청객들이 수시로 넘나들며 손을 데서 마음이 아파오는 것은 농부의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주인도 먹도록 한번 드실 것만 가져가세요?” 라고 푯말을 세웠다고 한다.
사실 옛날 농촌은 돈을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 겨우 쌀, 보리. 콩. 깨. 그리고 달걀 정도가 돈이 되던 시절에는 모든 것을 나눠 먹었다. 제일 좋은 것을 골라 웃어른에게 드렸지만 이제는 농촌에도 일손을 돈을 주고 구하고 농약도 사서 뿌리고 이 모든 것이 돈이 수반되는 일이 되었다. 이제는 좋은 것은 모두 시장으로 내 보내고 못 생긴 것만 농부들의 식탁에 오른다. 그런데 어릴 적 마음이 변하지 않고 인심을 탓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철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깊은 가는 가을 부부로 보이는 사람이 농장에 들어와 밤을 줍고 있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니
“예. 주인을 잘 아는데 지나는 길이 있으면 밤을 좀 주어가라 해서 들렸습니다.”
“혹시 그 주인의 이름이…”
“대전에서 교직에 계시다 퇴임하신 S선생님이라구.”
아니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아 그러십니까. 저도 그 분 말씀을 듣고 온 건데 함께 밤을 주우십시다.”
한참 밤을 줍다가
“이제 주인 몫도 있어야죠. 그만 줍고 가십시다.”하고 내려와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날 밭에 가보니 자신도 모르는 비료 두 포가 놓여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살펴보는데 포대 사이에 하얀 봉투가 끼워 있다.
아무래도 어제 함께 밤을 줍던 분이 주인 같은데 죄송합니다. 소문에 퇴직 후 농장을 하신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는 사이는 아니고 저도 교직에 있는데 그 상황에서 제 아내가 보는데 도둑놈으로 몰지 않아 정말 고마웠습니다. 어제 같은 상황에서 그런 처신을 하기가 참 어려운데 선생님은 참 존경스러운 선생님이십니다. 미안하게 생각하며 비료 두 포를 놓고 가니 밤나무에 거름으로 사용해 주십시오.
이런 내용의 편지가 있어
“호랑이는 아무 곳에서나 성질을 부리지 않는다.”는데 어제 참았던 자신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밭에는 사과나무, 감나무 그리고 매실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런데 풀이 나무보다 더 크다. 동네 사람들이 보면 참 한심한 분이 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자연과 함께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분이다. 밀이나 콩을 수확할 때도 일부러 밭에 일부를 남겨둔다. 겨울이 되면 짐승들이 찾아와 허기진 배를 채우라고 남기는 배려다.
옹달샘 이야기를 계속해야 될 것 같다. 그렇게 농사를 시작하고 농막을 지었는데 눈이 오는 날 농장에 들렸다. 눈이 살짝 내린 초겨울이었는데 눈 위에 토끼 발자국이 있어서 혹시 배가 고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 날 시래기 몇 다발을 가지고 가서 농막 마루 밑에 놓고 왔다. 그 후 시래기 상태를 파악하는데 뭔가 조금씩 없어지는 것을 보고 이제 산 짐승들이 이곳에 들러 시래기를 먹고 가는가 보다 생각이 드니 혹시 물이 없어 고생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습기가 있던 곳을 파니 물이 고이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 겨울을 보냈다. 땅이 풀려 본격적으로 삽과 괭이로 연못을 팠는데 놀랍게도 봄이 오니 도룡용이 알을 낳고 소금장수 같은 것도 옹달샘에 몰려드는 것을 보고 여기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되었다.
준비를 하고 기다리면 손님은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지소유천(池小有天)이라 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겹살과 소주만 가지고 가면 10여 명이 언제든지 산상(山上)파티를 열 준비가 되어 있다. 점심에 시작하여 고기가 남으면 밭에 나가 고추를 따다 저녁까지 해결하고 돌아오니 그곳이 바로 삶의 꽃방석이 된 것이다.
꼬리를 흔들며 따라 다니던 개가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목에 줄이 고정되어 개집을 지키고 있었다. 진도 개 후손인 사랑이는 영리하여 차를 몰고 농장에 들리면 주인의 차 소리를 알아듣고 내려와서 꼬리를 친다고 한다. 사람은 일 년을 보살펴 주면 하루 정도 기억하는데 개는 하루를 잘해 주면 1년은 기억하고 있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에 정이 가는데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사랑이를 위해 러시아산 허스키를 구해 함께 지내도록 하였다.
며칠 전 농장에 들리니 농막의 마루 위에 꿩 두 마리가 올려 놓여 있는 것이다. 개 두 마리가 산 속을 돌아다니다 꿩을 잡아 마루에 놓고 주인을 기다린 것이다.
그래서 두 마리의 개를 불러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어” 하고 칭찬을 해 줬단다.
그런데 이틀 후 농장에 가보니 이번에는 오골계 병아리 12마리를 잡아 마루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칭찬을 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는데 꿩 두 마리 잡은 것에 너무 칭찬을 한 것인가 자신을 탓하며 고민을 하게 되었다. 생각 끝에 잘못을 뉘우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목줄을 사다가 메 단 것이다. 라는 설명에 웃음보가 터져 내린다.
“아 그래서 벌을 받고 있군요.”
닭과 잘 지내도록 개한테 교육을 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꿩을 잡았을 때는 칭찬을 하더니 왜 병아리를 잡으니 목줄을 달았는지 얄팍한 주인의 계산에 어리둥절할 것 같아 또 고민이란다.
오늘도 산밭을 돌아다니며 서툰 솜씨로 농사를 짓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은 마음이 제일 편하다고 한다. 집하고는 거리가 있어 매일 오지 못하지만 잡다한 도시보다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작물들과 대화를 하며 호미로 밭에 시를 쓰는 그 분은 진정 행복해 보인다.
“낼쯤 풀어주세요.” 부탁을 하며 산을 내려왔다.
나는 언제 조상의 숨소리가 배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나…
추석에는 아내와 함께 고향을 다녀와야겠다. 하늘을 담을 작은 옹달샘을 생각하며…
알 수 없는 처용가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러라
둘은 내해였고 둘은 누구핸고?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 『삼국유사』 권2, 처용량. 망해사 -
위 시는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 국어 시간에 배웠던 향가 14수 가운데 하나다.
처용이 달 밝은 밤에 밖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처용의 아내와 역신(疫神)이 함께 이부자리 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이 모습을 보고 처용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곳을 피해 주었다는 내용의 노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마디로 처용은 참 이상한 사람이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내 집 이부자리 속에서 노니는 것을 보고 좋은 시간 보내라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돌아섰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남자인가 궁금해진다. 최소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상식으로 유추해보면 남자 중에서 그것도 한국의 남자 중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당시의 생활 방식은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게 산 것은 아니었을까?
지구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형태도 기후와 환경 그리고 종교에 따라 여러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모, 형제자매가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는 경우가 있다. 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런 환경에서 잘 적응하며 산다. 지구상에서 예수님과 부처님 탄생일이 법정 공휴일인 나라는 우리나라와 베트남 밖에 없으니 모두가 생각하는 것이 편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열대 지방에서는 특히 중동에 사는 사람들은 종교의 힘을 빌어 4명의 여자와 결혼할 수가 있다고 한다. 또한 추운 지방에서는 한 여자가 남자 형제의 공동 아내가 되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의 삶 속에는 그동안 살아오며 지켜온 일정한 규율이 있기 때문에 생활에 아무런 문제점이 없다.
일부다처(一夫多妻)나 일처다부(一妻多夫)의 결혼 문화는 열대지방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적고 한대 지방에서는 남자보다 여자의 생존율이 적기 때문에 성의 불균형에서 온 자구책이었다. 우리는 생활비가 많이 들어 문제지만 사계절이 있어 철마다 나오는 먹거리와 자연의 풍성한 변화를 보며 성 균형이 잘 이루어진 환경에서 일부일처(一夫一妻)제의 결혼방식으로 살아가니 마음 편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처용이 살고 있던 시대의 결혼 풍습은 어떠했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일부일처제였을까?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그 때는 모계사회였다고 한다. 더 나아가 군혼 사회였다는 말도 들린다. 두 가지 결혼 제도에서 공통점은 여자가 남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모든 결정과 힘은 여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주장하는 미국의 사회학자인 모건(Lewis Henry Morgan)이 인디언 사회에서 발견한 씨족사회에서의 기본적 조직 즉 공동의 남편과 공동의 아내라는 군혼(群婚)의 가족형태의 혼거상태인 푸날루아(Punalua)의 가족형태가 있다는 논문을 접하면서 다소 의문이 풀리게 된 것이다.
처음 아메리카의 인디언 사회에서 그 존재를 보고 하와이 인디언 사회에서 군혼의 실행을 보고 이를 증명하였다. 즉 나의 멀고 가까운 나의 자매는 어머니의 형제(외삼촌)를 제외한 다른 모든 남자의 공동의 아내이고, 내 멀고 가까운 모든 형제는 내 어머니의 자매(이모)를 제외한 다른 모든 여자의 공동의 남편이다. 이들 공동의 남편들은 서로 ‘푸날루아’라 부르고 공동의 아내들도 또한 서로 ‘푸날루아’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신라의 처용가는 바로 그 ‘푸날루아’ 사회의 풍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학설 외에는 처용가에서 처용의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노래한 것이지만 현대인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그렇다면 푸날루아와 가장 가까운 우리말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시의 생활습관에서 나온 언어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수 천 년 전에 있었던 원시사회에서의 결혼제도인 군혼의 잔재 속에서 발생한 것 같은 단어가 우리 말 중에도 있다.
자매의 남편이나 아들의 부인들이 부르는 동서(同壻)라는 말과 남편의 형님을 아주버니라 부르고 동생인 시동생을 서방님이라 부르는 것도 모계사회에서 사용했던 말이 전해 온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런 사실에 처용가를 접목해보면 오해가 다서 풀리기는 하지만 그것도 정확한 답이라고 할 수가 없으니 많은 학자들에게는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처용처럼 살아야 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어느 방송국의 ‘사랑과 전쟁’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지만 우리 사회도 모계사회로 돌아가 군혼이 유행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하다. 처용을 다시 접하면서 첫사랑으로 만나 마지막 사랑으로 이어져 사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것 같다.
인간의 오만함인가!
아시아 대륙이 몸살을 앓고 있다. 동아시아를 강타한 모라꽃 태풍에 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하였다는 소식이다. 대만에서는 하루에 3,000mm의 비가 내렸다는 뉴스도 전해온다. 우리나라 일 년 강우량 1,200mm의 2,4배가 되는 양이며 2002년에 강릉에 내린 870,5mm 루사 태풍의 4배에 가까운 수량인데 그렇다면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경험으로 보면 한 시간에 30mm가 내리는 강우에도 몸이 아파 맨살에 비를 맞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태풍과 강우에 겹쳐 땅 속에서도 지진이 요동을 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진도 6,6의 강진이 발생하여 파도가 40cm 높아졌다고 한다. 비바람을 몰고 온 태풍과 함께 너울이 일어나서 안전을 생활화 하는 일본에서도 많은 피해가 발생하는 것 같다.
같은 시기에 인도양에서는 진도 7.6의 강진이 발생하여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태국, 방글라데시에 비상경계령이 내렸고 이러한 태풍과 강진 그리고 지진해일이 일본과 인도양에서 동시에 발생하여 아시아 전 지역이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감에 빠져 들었다. 5년 전 12월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진도 9,1의 강진으로 23만 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니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사실, 히말라야 산맥도 인도양의 지각판이 충돌하며 바다였던 곳이 용암이 지층을 밀어 올려 제일 높은 산맥을 이루고 있으니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치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체격도 크지 않고 IQ120 정도의 머리로 마치 자기들이 지구의 주인인양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살아오며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겸손하게 산 것이 아니고 많이 가진 것이 성공한 삶으로 생각하고 오만의 극치를 범했던 것이다.
뜬금없는 생각인지 모르지만 IQ120 정도의 인간이 50에 가까운 동물을 먹잇감으로 생각하듯이 어느 날 IQ300이 넘는 외계인이 지구로 와서 인간의 고기 맛에 군침이 돌아 매일 우리가 삼겹살을 먹듯 그들이 우리를 탐한다면 그것도 가족이 보는 앞에서 불판에서 사라진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
내가 소유한 건물의 옥상에 조그만 농장이 하나 있다. 아마 4평은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곳은 건축허가를 받을 때 준공검사를 받기 위해 옥상에 화단을 설치해야 되는 조건이었는데 막상 건물을 관리하다보니 옥상에 올라갈 일도 없고 화단에 꽃을 가꿀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작년부터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상추와 쑥갓, 그리고 파, 고추, 시금치 등 밥상에 올라오는 채소 10여 종을 재배하게 되었다. 먼저 그곳에서 나오는 채소가 우리 부부가 먹고 사는데 충분하다. 간혹 서울로 시집간 딸들에게 보내주기도 하고 주변의 지인과 나눠 먹을 기회를 주어 우리를 기쁘게 해 준다. 그곳에서 자란 상추 맛이 일품이다. 시장에서 사서 먹는 상추하고는 맛이 다르다. 물론 거름도 농약도 치지 않았으니 안심하고 먹는 재미도 있지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더구나 상추는 일 년에 서너 번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니 일 년 내내 내가 가꾼 믿을 수 있는 채소를 밥상에 올려놓을 수 있어 고맙게 생각하는데 상추가 다 자라고 나서 다시 씨앗을 뿌리면 발아율이 좋지 않은 것이 불만이다. 혹시 채소 기르는 농사기술이 부족하여 일어나는 현상인가 생각도 해 보았다.
씨앗을 파는 종묘상에 가서 상추 씨앗을 구입하다가
“씨앗을 뿌리면 싹이 잘 나오지 않아요.”하고 주인에게 질문을 하니
“씨앗을 냉동실에 3~4일 넣었다 심으면 발아율이 좋아진다.”고 한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왜 씨앗을 냉동실에 넣어야 합니까?” 하니
“아 그 놈들이 냉동실에 넣어야 추워서 겨울인가 보다 생각하고 지내다 밖의 날씨에 적응하며 이제 봄이 왔구나 하고 활동을 왕성하게 하여 발아율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아니 식물에게도 그런 자각 증세가 있습니까?” 질문하니
“가뭄이 들면 소나무에 솔방울이 많이 열리는 것도 봄이 되면 과일 나무를 정지하는 것도 나무가 위기 의식을 느껴 종족 보존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여 일어나는 현상이며.”
“식물도 같은 나무에서 열린 씨앗을 함께 심으면 뿌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뿌리를 내리는 배려를 하고”
“음악을 틀어주면 식물도 좋아해서 성장이 빠르고 열매도 튼튼해진다.”는 것이다.
글지이의 호기심이 발동하여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니
강낭콩이 자라면서 영양분을 충분이 흡수하면 모두에게 튼튼하도록 영양을 공급하지만 환경이 좋지 못할 경우에는 여러 콩깍지 중에 하나의 콩깍지에 영양을 공급하고 그것도 모자라면 콩깍지 안에 하나의 알에게 영양분을 집중 공급하여 튼튼한 강낭콩이 되어 충분한 유전인자를 가지고 나가서 번식하도록 자율적으로 키운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말 못하는 식물이지만 이것이 자연의 섭리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식물은 제 철에 싹을 틔워 자연에서 성장해야 되는데 사람은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온도를 마음대로 조절하여 계절과 관계없이 재배하고 있다. 식물도 밤에는 잠을 자야 되는데 불을 켜 정신없게 만들고 때로는 독한 약으로 지켜 주지만 무차별 뿌리다보니 내성이 생겨 몸 속에 독성만 키우고 있다. 풍수해도 오래 동안 하늘과 싸우며 질서를 잡았는데 인간들이 무차별로 파 헤쳐 물길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고, 산의 몸통을 뚫어 도로를 내다보니 수맥은 끊겨 물이 갈 길을 잃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연을 인간은 인간의 생각대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으로 개발하고 활용하는데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개발이 아니고 오랜 시간 적응하며 살아 온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분수에 맞게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이용하는 겸손한 생활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좀 별난 생각이지만 아침부터 물 폭탄으로 분풀이하는 자연의 노한 모습을 보며 느끼는 단상이다.
* 충남 서천 출생, 溫洞, 온동마을 촌장, 수필집 『소똥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등, blog.daum.net/ondong.
메밀꽃 피는 봉평장에서
강 명 수*
효석 문학제가 매년 봉평에서 초가을에 열린다. 봉평은 그의 고향으로 벌써 몇 회째인데 메밀꽃 피는 시기에 아주 짧게 열리기에 자칫하면 놓치기가 십상이다.
차창 가에 보이는 강원도의 초목이 초가을 하늘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지난여름 뜨거웠던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이제 결실을 잉태하는 식물들은 가을의 위대한 자연을 만들고 있다.
영월 재천고개를 넘어 강원도의 땅 봉평으로 가는 길이 바로 그의 문학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향토적이며 소박하다.
효석 생가와 기념관을 올라가 돌아보니 전국적으로 지역마다 건립되는 문학관의 시조답게 그 안에 한국 단편문학 작가들의 친필 원고와 그들의 허허로운 사진들이 알뜰하게 전시되어있다.
일제 시대 고난의 시대에서 문학을 하는 글쟁이들은 체격이 비교적 왜소하고 노타이의 자유스러운 복장이지만 사진 속에서 안경너머 형형한 눈빛으로 사진 속에서 세상을 예지스럽게 보고 있다.
문학관이 있는 동산에서 내려와 장터 앞뜰에 있는 물레방아간에 들르니 물길이 어여차 하며 물을 끌어올리고 작은 폭포처럼 내리치며 제법 물레방아 구실을 하고 있다.
이곳이 허생원이 처음 만난 성서방네 처녀와 사랑을 나눈 은밀한 곳이라면 그들의 관계를 갖는 그 사연이 단순하면서 복잡하다.
서방네 처녀와 사랑을 하던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곳에서 막국수를 한 그릇 말아먹었다.
허생원이 스스로 생각하듯 계집과 연분이 멀고 얼금뱅이 상판을 쳐들고 대어 설 숫기도 없는 작자가 이 처녀와의 관계가 맺어진 것일까?
시장기로 식사를 해서 피곤해서인지 몸이 나른해져 주막집 빈 공간에서 항상 여자에게 뒷전인 그를 생각하며 잠시 눈을 부쳤다.
여느 시골 놀이처럼 야전판을 갗춘 노점상들이즐비하고 봉평사람들 같지 않은 처녀들이 다니는 것이 눈에 띈다.
인물들이 어쩐지 세련되고 야스러운 느낌이 들어 물어보니 서울에서 온 연극하는 처자들이라 한다. 저녁에 이곳 폐교에서 연극을 하는 배우들인데 티켓을 봉평장에 다니며 세일하는중인 것이다.
티켓 한 장을 사고 대관령 양떼 목장이 옛 영동고속도 주변 지척에 있길래 다녀왔다. 그 목장은 주인이 근 20년을 큰 고생을 하고도 거의 실패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원풍경의 아련함이 그리웠는지 요즘에 이 부드러운 구릉지를 찾는 도시사람들이 갑자기 줄을 선단다.
이날도 관광버스가 몇 대가 왔는데 양 몇 마리 놓고 입장료도 2,500원이나 받고 해서 큰 볼거리가 없었던 평범한 목장이 그야말로 잘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허생원은 저녁녘에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빡거릴 무렵을 가슴이 뛰놀 정도로 좋아했는데…
나도 그와 같이 노을 진 저녁 한때의 목장풍경을 보려했지만 어찌 인근에 유명한 허브농장의 향기를 놓치고 돌아갈 수 있겠는가…
입장료는 혹독히 비싸기도 하다만 농장 운영하는데 돈도 만만치 않게 들 것 같았다.
허브로 만든 각종 상품을 전시해놓고 판매를 하는데 그렇게 잘 팔리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 혹독한 강원도의 겨울에 허브 재배가 영 쉬워보이지는 않았다.
허브나라에서 진한 로즈마리향기에 후각을 즐겨보았다면 이제 가슴에 와 닿는 무엇이 있다는 연극장을 찾아갔다.
덕거 폐교 교정에 도착하니 학교 교실에 라이브 카페도 만들어 놓았다. 52년에 분교로 설립된 연혁을 보았는데 이 폐교를 유시어터의 유인촌 씨가 제안해서 만든 곳으로 ‘달빛극장’이라는 이 연극장소가 이제는 명물이 되었다. 무엇보다 야외무대에 4개의 대형 조명탑 시설이 투자가 상당히 많이 된 것 같고 자작나무 숲과 어우러져 대단한 빛을 발하였다.
섹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이라는 작품을 화려한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나와 숲속의 요정을 연기하였다. 그 옷 색과 숲속에 따로 설치한 색색갈의 작은 조명의 불빛이 현란하다.
어느새 마지막에는 불을 다 끄고 반딧불 조명만 들고 배우들이 인사할 때 나는 비로소 봉평의 밤하늘은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달이 떠있는 봉평의 하늘… 효석의 표현대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리며 주위 전나무의 가지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달이 뜨는 밤이면 허생원은 친구 조선달에게 또 그녀의 만남을 끄집어낸다.
“꼭 이런 날이었지”
달밤에 개울가에서 그 처녀와의 만남 이후로 반생을 누구에게 정을 보낸 적도 없는 쓸쓸하고 뒤틀리게 보낸 장돌뱅이로 살아온 그였다. 그렇게 젊은 시절에 투전도 하며 털어버리고 나귀만은 이를 물고 지키며 살아오며 거꾸러질 때 까지 긴 산허리에 걸려 있는 산길을 걷고 달을 보며 살겠다며 달빛에 감동한다.
그가 그날 밤 넘어가야 하는 개울 건너 대화리 까지 가는 팔십 리 길, 산허리길 밭에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불 꺼진 연극무대의 틈에서 학교 운동장에는 온통 피어있는 메밀꽃에 적격인 달밤에서 한 장돌이 인생이 보인다. 그러나 그 장돌뱅이 인생이 그런대로 서글프게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가 개울에 빠져 허비적 거린 뒤 물에 젖은 참혹한 꼴이었다지만 그를 업은 아들의 등짝이 뼈에 사무치도록 따뜻함을 느꼈을 것이기에…
잠시 후, 연극 무대에 불이 들어오고 배우들이 인사를 한다. 그때는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진 후다.
* 대전 출생, <충청신문> 논설위원, 기행수필집 『고마코의 설국에서 블랑세의 뉴올리언즈까지』(2009),
아야코
김 현 주*
아야코가 우리 집에 와 가족이 되어 함께 생활한지도 어느덧 10여 개월이 지났다.
이제는 이방인이기보다는 너무도 한국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그녀는 나와 함께 외출하면 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만큼 적응을 잘하고 있다.
싸락눈이 차갑게 흩날리던 어설픈 겨울날, 커다란 여행가방 하나를 끌고 난생 처음 낯선 나라 한국 땅을 밟은 아야코. 군에 입대하는 한 남자를 따라 자신의 모든 걸 접고 오직 사랑 하나만을 위하여 용기 있는 결단으로 따라 나선 일본 아가씨. 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 선택하였을 것이고 두려움과 불안 또한 컷으리라 짐작된다.
마치 소설이나 영화 속의 한 스토리와 같은 그 일이 우리가정에서 일어났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는 아들 녀석이 군 입대를 앞두고 귀국을 준비하던 어느 날, 뜬금없이 결혼할 일본 아가씨와 함께 오겠다는 것이다. 느닷없는 소리에 너무 당혹스런 나는 “왠 일본 여자야?” 라며 잘라 말했다. 아들은 엄마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의외라는 듯 평소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나를 책망했다. 친구처럼 지내는 일본아가씨가 있노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애와 결혼까지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2년 여의 군 입대기간이 있으니까 지금 당장 함께 한국에 오는 것보다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내다가 군제대후까지 둘 사이의 마음이 변함없다면 그때 결혼을 허락하겠노라 했다.
아들은 나와 남편을 설득했다. 누구보다 자신을 위하고 내조를 잘할 것이며 앞으로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데 꼭 필요한 좋은 사람이고 엄마도 만나보면 좋아하게 될 것이 라며 자기의 선택을 믿어 달랜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막상 내 자식이 국제결혼을 한다는 게 선뜻 내키지 않았다. 글로벌 시대니 세계화니 외쳐대지만 내 안에는 아직도 보수적인 피가 흐르고 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뒤범벅이 된 채 갈등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데 둘은 이미 함께 한국으로 올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만류한다 해서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우리부부는 오기 전에 그쪽의 부모라도 만나보고 집에 들여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서둘러 상견례를 위해 일본으로 갔다.
나는 전에 한번 일본에 들렀을 때 아야코를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땐 아들이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곳의 여직원 정도로만 소개를 받고 스치듯 인사를 해 전혀 기억이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길에 만난 아야코는 너무도 소박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한 아가씨였다. 내심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시부모가 될지도 모를 우리들 앞에 정장도 아닌 청바지 차림의 그녀가 조금은 무례하고 불쾌하게 느껴졌다.
함께 저녁을 먹고 주점에 들러 술 한 잔을 마시며 통하지 않는 대화를 아들의 통역에 의지해 이어갔다. 눈이 크고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우리와의 만남이 무척이나 부담스럽고 걱정이 되었던 듯하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으며 술잔을 주고 받다보니 남편은 취기가 돌았고 너희 둘이 진정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결혼을 허락하겠노라 했다. 그 말에 아야코는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 아들의 말이 너무 감격해서란다. 부모들이 반대할까봐 많이 가슴조이고 노심초사했던가 보다.
이튿날 식당에서 아야코의 부모와 오빠, 그의 여자 친구 그리고 우리 내외와 아들, 아야코가 만나 상견례의 자리를 가졌다. 대화가 통하지 않아 조금 갑갑했지만 국경을 초월해 사람의 감정은 비슷한지라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를 하며 담소했다.
아들 녀석의 통역으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운 동안에는 대화가 끊긴 채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야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부모님은 인자하고 소박한 성품을 지닌 분들 같아 보였다.
비록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반듯한 가정교육으로 자녀들을 키우고 화목하고 안정된 가정인 듯한 분위기여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어차피 아들이 졸업 후 일본에서 직장을 잡아 생활할 거라면 일본인 아내와 처가가 있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여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사람을 외양이나 조건만으로 선택하기보다는 내면의 깊이와 됨됨이를 보고 신중하게 결정한 것임을 믿고 싶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라 하였다. 인생의 성패가 좌우되는 중대한 선택임에도 너무나 쉽게 감정에 현혹되어 결혼하고 또 헤어지는 현실을 볼 때 아들은 그런 감정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두고 진지한 결정을 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아야코는 우리 집에 오게 되었고 아들의 2년간의 군복무기간 동안 한국에서 생활하며 우리말을 배우고 문화와 전통을 익히며 한국인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에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이방인하고 함께 생활하는 것이 나로서도 부담스럽고 불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지만 별 어려움 없이 서로 쉽게 적응해 갔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군에 보내고 친숙하지도 않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게 결코 쉽지 않을 텐데도 아야코는 의연하게 잘 견디며 일상에 충실했다.
한국어를 배우는 것도 열심이어서 한 학기를 마칠 때 장학생으로 장학금을 타오기도 했다.
아들이 훈련소에 가 있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매일 편지를 보내 부대 내에서도 아야코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자대 배치 후에도 편지 보내는 일은 계속해서 얼마 전 200통이 되었다. 그 정성과 배려가 우리를 감동 시켰다.
휴가를 나오거나 면회를 다녀오면 사진을 모아 테마 앨범을 만들어 보관한다. 작은 것 하나도 소중히 여기며 하나하나의 체험을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거나 기록으로 남기며 한국에서의 생활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이어간다.
일본인 특유의 조심성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태도는 본받을 만하다. 요즘 여자답지 않게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면이 강한 것이 일본인의 특성인지 아야코 개인의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결혼생활에서 내조는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제법 한국말을 배워서 가족들끼리의 의사소통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한국의 음식도 거부감 없이 잘 먹고 틈나는 대로 영화나 공연 등을 함께 보며 우리나라의 문화 체험에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한다.
딸아이가 결혼으로 집을 떠난 빈자리에 아야코는 우리 가정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하여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멋진 꿈을 조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푸른 그늘을 그리며
스산한 바람에 낙엽이 뒹군다. 아무런 저항없이 흩날리는 저 나뭇잎들도 한때는 찬란한 빛을 발하며 작열하는 태양 아래 건강한 이파리로 푸른 그늘을 만들어 더위에 지친 행인들에게 시원함을 선물했으리라.
문득 고갤 들어 나무를 올려다 본다. 앙상한 빈가지만이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채 구원의 기도를 하는 듯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그렇게 모든 걸 다 내어 주고도 행복해 하는 성자의 모습으로. 나무는 자신을 위해 그늘을 만들지 않는다 했다. 자연 또한 무한히 베풀어준다.
그런데 그 혜택을 누리고 사는 우리들은 고마움을 모른다.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이 자연과 우주를 지배하며 마치 제 것인 양 훼손하며 자연의 소중함을 망각하고 온갖 파괴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전성기를 지나 흥망성쇠를 반복하며 진화하기도 하고 조용히 쇠퇴하여 사라지기도 한다.
이런 자연의 순환과 질서가 무너지고 환경오염으로 커다란 재앙을 예고하지만 우리는 환경 불감증에 사로잡혀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책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첨단과학과 문화를 꽃 피우고 전대미문의 전성기를 누리며 살지만 우리는 머지않아 자연으로부터 커다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요즘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에서 녹색성장과 푸른도시를 구호로 내걸며 환경보호를 외치지만 국민 개개인의 사고와 생활습관이 바뀌지 않고는 요원한 일이다.
딸아이가 결혼하여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두어 달 쯤 지났는데 평소 알러지성 비염이 있어 기후 변화나 환경에 예민한 터라 서울의 탁하고 오염된 공기로 인해 증세가 심하게 악화된 듯하다. 갑자기 수술을 해야 한다는 전화에 적잖이 놀랐다. 집에 있을 땐 아침으로 재채기 콧물에 불편하기는 했어도 그렇게 심하게 고통스러워하진 않았는데 서울 살이에 고생이 심한 듯하다. 무엇보다 코가 막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라 하니 우리나라의 대기오염 수준이 얼마나 심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매스컴이나 지상에서 환경오염의 심각성에 대해 전문가들의 우려를 접할 때에는 나와는 무관한 먼 나라 이야기처럼 무심히 들었는데 막상 현실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딸애를 보니 그냥 간과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기관지 천식이나 아토피가 심한 아이들은 정말 견디기 힘들어 시골의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한다는 이야기가 괜한 것이 아님을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그 처지가 되어보기 전에는 내일처럼 생각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우리가 흔히 장애우들의 고충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다가 다리라도 다쳐 기브스라도 할라치면 신체적 장애가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지, 이 사회구조가 장애우들이 살아가기에 너무도 열악하고 배려 없는 곳임을 알게 되듯 말이다.
나 또한 그런대로 불편 없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 환경오염이나 지구 온난화의 문제가 얼마만큼 심각하고 절박한지 깊이 깨닫지는 못했다.
가끔 일회용 용기를 쓰거나 가정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보며 한집에서 이 정도로 많은 쓰레기를 버린다면 이 지구와 우주가 얼마나 혼탁해지고 오염될까 막연하게 걱정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요즘 4대강 개발 사업을 놓고 찬반 여론이 뜨겁다.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그것이 환경을 보호하는 일인지 파괴하는 일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이 나라의 위정자라면 나와 내 후손이 대대손손 물려가며 살아야할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위해 무모한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가끔 의구심이 생길 때가 있다. 하나의 정책이 나오면 반드시 거기에는 반대가 따른다. 그 반대가 진정 나라와 국민을 위한 반대인지 자신들 정당의 사리사욕을 위한 반대인지 알 수 없다.
다른 건 몰라도 환경에 관한 문제는 이 나라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이 한마음이 되어 함께 해결해야 할 지상과업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때 건강하고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하나 쯤이야가 아니라 나 하나 부터 실천하고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환경을 아끼고 환경을 보호하고 환경을 살리기 위해 내가 작은 하나부터 실천하려 할 때 세상은 맑고 밝고 깨끗해 질 것이다.
어쩌다 서울에 올라가면 자동차들로 붐비는 거리를 보며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지하철이나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승용차로 움직이는 것보다 빠른 시대, 너 날 할 것 없이 차를 끌고 거리로 나서는 우리의 문화는 언제부터 생긴 풍속일까?
언젠가 읽은 칼럼 속의 한 대학 총장은 자신이 총장으로 부임하며 관용차를 소형 마티스로 바꿨더니 주변의 다른 대학장들의 비난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호텔이나 관공서의 모임이나 공식 석상에 갈 때 소형차를 몰고 가면 출입문에서부터 홀대할 때도 있었다 한다. 하지만 그분은 환경 보호를 위해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한다는 신념으로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글을 보며 역시 깨어있는 진정한 자유인이며 미래지향적인 선각자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인격은 없어도 차격은 있다는 말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차가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나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얼마나 허황되고 부질없는 일인가. 경제적으로 부유한 것과 문화 선진국으로서 국민 개개인의 의식수준이 향상되는 것인 별개인 듯하다. 이 나라가 진정 멋지고 풍요로운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문화 선진 국민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환경의식을 높이고 개개인이 문화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아직도 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운전자가 있고 남이 보지 않으면 쓰레기를 불법 투기하는 사람이 있다. 진정한 문화인은 누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연과 질서를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다.
내 집 앞만 깨끗하면 된다는 님비현상은 이기주의와 불협화음을 양산한다. 다함께 가꾸고 이루어 가야할 아름다운 우리나라가 정치적 이해와 지역적 이기주의로 이용 된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서글픈 일인지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
나 또한 자연의 일부인 인간으로 살아가며 얼마나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고마움을 가지고 있는지 반성해 본다. 우리는 모두가 유기적인 연관 속에 살고 있다.
내가 버린 오물과 폐수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내가 숨 쉬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마시는 물이 되어 내게로 돌아온다는 걸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쉽고 소홀하게 생각 할 수 없다.
딸애가 입원하여 수술을 한다하니 심난하기도 하고 환경오염의 심각성에 대해 자각할 계기가 되었다. 나부터 ‘환경지키미’가 되도록 솔선해야 할 것이다.
* 대전 출생, 수필가, hl3ev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