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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정과 한산모시관 나들이
김 명 녕*
여러 사람과 낯선 곳으로 여행할 때마다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 새로운 일을 겪거나 옛날 일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나고, 호기심도 넉넉히 채우고, 낯선 사람도 사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2011. 4. 13.) 한밭대학교 평생교육원 문학창작과정 글벗들과 서천군 동백정과 한산모시관으로 떠나는 여행도 그래서 설렌다. 마침 동백정은 ‘동백꽃주꾸미축제기간(4. 2.~4. 15.)’이라 버스에서 내리니까 잔치 흥을 돋우려는 대중가요 멜로디가 쩌렁쩌렁 울린다. 아직 잔치벌일 시간이 아니라서 특설무대 언저리에도, ‘주꾸미잡기 체험장’에도, 사람은 물론 주꾸미조차 없어서 을씨년스럽다. 손님은 가물에 콩 나듯 드물고, 오순도순 늘어선 고만고만한 크기의 부스에서 먹을거리 파는 사람들만 괜스레 부산하다.
바다냄새가 나는 바람을 쐬며 ‘동백나무숲 종합안내도’를 쳐다본다. 동백나무숲길로 올라가서 동백정을 돌아 소나무숲길로 내려오므로 코스가 매우 단조롭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는 어메니티 서천’이라는 슬로건이 눈에 번쩍 띈다. 안내도에서 이 글을 읽고 어메니티1)를 선뜻 알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영어낱말의 뜻을 모르는 이가 더 많을 테고, 외국 사람은 한글을 못 읽거나 설령 읽더라도 어메니티에는 그들의 발음과 악센트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서 한글낱말로 여길 것이다. 우리말로 굳은 낱말이 아니므로 뒷말은 ‘살기 좋은 서천(Amenity Seocheon)’이라고 한글과 영어를 함께 쓰면 더 많은 사람이 슬로건의 뜻을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옛날에는 관청에서 멀쩡한 사람을 한문(漢文)문맹자로 숱하게 만들었는데 오늘날은 공연히 영어문맹자로 만드는 것 같아서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평탄한 포장길을 걸어간다. 오른 쪽은 소나무 숲이고 왼쪽은 서해화력발전소 철제(鐵製)담장이다. 담장에 서천의 옛날과 오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여러 장 걸려 있다. 그 중에서 동백정과 갯벌 사이에 한복을 입은 많은 사람과 짚(jeep) 4대가 보이는 사진과 발전소가 들어서기 전의 동백정 해수욕장을 동백나무숲에서 찍은 사진이 가장 눈길을 끈다. 오늘날은 발전소 터를 잡을 때 환경훼손, 공해 또는 핵 위험 등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작든 크든, 수력발전은 수몰지발생으로 환경파괴, 조력(潮力)발전은 갯벌파괴, 태양광발전은 집광패널(集光 panel)설치로 숲 파괴, 풍력발전은 소음공해, 원자력발전은 핵재앙(核災殃) 등의 문제가 대두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발전소를 세워 전력공급원을 확충하려는 정부정책과 이를 반대하는 주민과 환경단체의 주장이 흔히 맞선다. 서해화력발전소를 세울 때 ‘개발하자니 갯벌파괴에다 대기오염 문제가 뒤따르고, 그만 두자니 제자리걸음’의 틈에서 번민하였을 마량리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계단을 밟고 천천히 동백나무숲길을 올라간다. 이 숲의 서쪽은 바람이 강하여 몇 그루밖에 없고, 동쪽은 동산이 바람을 막아 70여 그루가 400년 이상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한다. 겨울바람이 매워서인지 남쪽지방에서 본 동백나무보다 키가 더 작고 펑퍼짐해서 넉넉하게 보인다. 꽃이 좋아 계단 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가니까 위를 보아도 꽃이요, 옆을 보아도 꽃이다. 입을 꼭 다문 꽃봉오리도 많고 활짝 핀 꽃도 많다. 잎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꽃이 붉고 고와서 소담하다2). 젊은 시절에 어려운 고비를 잘 견딘 사람이 훌륭하게 성공하듯 이곳은 동백의 북쪽한계선이라 매서운 겨울바람에 시달리며 꽃눈과 잎눈을 빚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잔디에 앉아 둘레둘레 곱게 핀 동백꽃에 파묻히니 별천지가 바로 여기다.
숨도 차기 전에 금세 외딴 동산의 꼭대기다. 돌계단길이 끊어진 위에 1965년에 한산군 관아의 목재로 지었다는 동백정(冬柏亭)이 있다. 누각에 오르니까 ‘옛날에 장수가 바다를 건너다가 빠뜨린 신발 한 짝이 섬이 되었다’는 오력도(烏力島)가 바로 눈앞이다. 오롯이 떠 있는 섬과 일렁거리는 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재주 좋은 그 장수가 어차피 신지 못할 나머지 한 짝도 물에 넣어 짝을 맺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하고 얼토당토않게 생각한다. 당집에 들른 뒤, 오솔길을 발밤발밤3) 내려간다. 여년묵은 소나무가 많이 들어선 숲길에 남실바람이 간들간들 불어서 솔잎이 살랑살랑 나부낀다. 새파랗게 물든 바람이 동백꽃에 볼그무레하게 물든 가슴으로 파고든다. 지팡이도 꽂으면 싹이 돋을 만큼 바람이 보드라워서 가슴패기에서 금세 동백이 움터 무럭무럭 자랄 기분이다.
춘장대에서 점심을 먹고, 한산면으로 간다. 한산모시관의 첫인상은 산뜻하고 깔끔하다. 초가집인 농기구전시장, 매기공방 및 토속관과 기와집인 시연공방, 전수교육관, 길쌈놀이 전수관 및 모시각 등이 한눈에 보인다. 탐스러운 개나리꽃과 눈인사하고, 일행과 한 바퀴를 빙 둘러본다. ‘나성덕 시연공방’ 뒤뜰 꽃밭에서 뜻밖에도 해맑게 웃는 수선화를 만난다. 가곡으로 이따금 부르던 수선화를 오랜만에 보니까 무척 반갑다. 하얀 꽃은 들깻잎처럼 생긴 모시풀로 모시 짜는 고고(孤高)한 아가씨처럼, 노란 꽃은 아가씨를 흠모하는 말쑥한 사나이처럼 느껴진다. 잔디밭에 그럴싸하게 놓인 ‘베 짜는 여인상’을 보니 옛날 시골아낙네의 힘겨운 삶이 떠오른다. 우리는 메마른 땅에서 마디게 자란 오래 된 나무의 처절한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괴한 모습만 천하일품으로 여기기 쉽다. 젊은이들이 ‘베 짜는 여인상’을 보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하던 옛 아낙의 실상은 모르고 자칫 ‘깨끗한 흰 고무신을 신고 베틀에 학처럼 다소곳이 앉아 고운 세모시를 짜는 단아한 여인’만 떠올릴까 걱정스럽다.
농기구전시장에서 풍구, 화로, 망태기, 가마니틀, 지게, 도리깨, 탈곡기, 쟁기, 써레, 길마, 멍에, 워낭, 달구지 등의 생활용품, 농기구 및 소를 부리려고 쓴 온갖 도구를 본다.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자주 보던 물건이라 정다운 소꿉동무를 만난 듯 반갑다. 모시 짤 때는 습기가 많아야 실이 보들보들하고 잘 끊어지지 않는다. 가습기가 없던 옛날에는 적정습도를 유지하려고 작업장을 반 지하실로 만들었고, 습기 많은 바깥바람을 막으려고 한여름에도 문을 닫고 짰다. 토속관에서 전통베틀에 앉아 왼손으로 북4)을 잡고 모시를 짜는 여인을 반 지하실에 재현해 놓은 모습을 들여다본다. 토속관에 머무는 내내 힘겨운 농사일 짬짬이 투박한 맨발로 베틀에 앉아 초여름에는 누에고치로 명주를, 한여름에는 삼으로 베 또는 모시풀로 모시를, 겨울에는 목화로 무명을 짜며 부지런히 길쌈5)하시던 큰어머님의 애잔한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서해화력발전소는 까만 몽돌과 하얀 모래가 깔린 아름다운 해수욕장에 세워졌다. 옛 모습의 사진을 보면서, 발전소건립을 두고 환경파괴, 핵 위험 등의 문제로 곳곳에서 티격태격하는 오늘의 현실과 갯벌파괴와 대기오염을 무릅쓰고 발전소를 받아들인 마량리 사람들의 너그러움을 견주어본다. 모시는 우수한 품질을 지닌 우리나라의 빼어난 여름옷감이다. 모시에는 조상의 옷감제작과 취급기술을 발전시킨 슬기와 열악한 시골환경에서도 부지런히 일한 얼이 배어 있다. 후손들이 모시에 깃들인 슬기와 길쌈의 근면정신을 올바르게 이어받기를 바라면서 모시관의 전경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1) 어메니티 : amenity[əménəti, əmí:nəti] - (장소・기후의) 기분 좋음, 쾌적함.
2) 소담하다 : 생김새가 탐스럽다.
3) 발밤발밤 : 발길이 가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는 모양.
4) 북 : 씨올의 실꾸리를 넣는 베틀에 딸린 부속품의 한 가지.
5) 길쌈 : [민간에서 수공업적으로] 자연섬유를 원료로 하여 피륙을 짜는 일.
* 충주 출생, 공학박사, 한밭대 교수, 수필집 달리면서 만나는 세상, 달릴수록 넓어지는 세상,
인터넷 문학상(문학사랑), 한국농촌문학상 대상(농림부장관) 수상, mnkim@hanbat.ac.kr
L교수를 그리며
손 중 하*
햇살 가득한 따뜻한 봄이 오면 여행을 떠나자던 당신은 2011년 4월 4일 이른 새벽 서둘러 혼자 떠나고 말았다. 섬진강 올래 길을 달려보자던 당신은 강둑을 걷는 게 아니라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
여행 중 밥때가 오면 나는 밥을 짓고 당신은 설거지를 하자던 약속은 져버리고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고 갔다. 처, 자식, 손자 손녀들이 애타게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 모진 사람 그렇게 매몰찬 줄 알았다면 인연의 끈 맺지나 말걸.
당신을 만난 것은 1962년 3월 월낙산 기슭에 자리 잡은 공주 교육대학 교정이었지. 200여 명이 같은 날짜에 교정에 발을 디뎌 놓고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내게 살며시 다가와
“우리 동거 할까?”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 되었고 같은 밥솥의 밥을 먹게 되었지
그리곤 몇 개월 되지 않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 때 부터 당신은 늘 나 보다 한 발 한 발 앞서 갔었지.
어느 날엔가 당신을 보니 도저히 발걸음을 같이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멀리 간 당신이 타인처럼 느껴지기도 했었지. 그럴 만도 한 것이 당신은 하루를 24시간으로 산 것이 아니라 30시간쯤으로 만들어 살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늘 한발, 아니 보이지 않을 만큼 앞서 갔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
자네 그 때 생각나나? 대학 졸업하던 날!
자네가 수석 졸업식에 받은 꽃다발을 내게 건네주며 하던 말
“이 꽃다발 사실은 네 거다. 너 때문에 받은 거니까”
늘 나는 걸었고 당신은 뛰었지.
당신의 삶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었고 마음먹은 일라면 어떻게든 성취하고야마는 의지가 남다른 사람이었지.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한 자네는 어느 날엔가는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가 싶더니 고등학교로 대학교수로…
그런가하면 대한민국 국전에 입선하는 화가로, 건축가로, 성악가로, 사진작가로, 문인으로 끝없는 당신의 도전은 세상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였지.
칠십이 되면 보디빌더가 되겠다던 당신의 꿈을 빼고는 마음먹은 일은 다 이루었지. 그러고 보면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은 게야.
여보게! 생각나나? 햇살 좋은 가을날 우리 집 처마 밑 새끼줄에 매달아 놓은 곶감 빼 먹던 일.
우리 집 식구들은 그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고 아껴두었던 곶감을 자네는 잘도 빼먹었지.
그 때 동생들 눈치 보여 민망해 하던 내 얼굴도 기억하겠지? 이제는 농장에 감나무도 많이 심어 그 눈치 안보며 자네에게 곶감도 많이 만들어 줄 수 있는데…….
2009년 2월 23일 당신은 폐암 4기의 진단이 내려졌고, 3월 1일 서울대 병원을 찾아갔을 때 당신은 전신으로 암세포가 퍼졌다며 목과 무릎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가족들은 슬픔에 젖어있었지.
그러나 당신의 모습은 평온한 모습이었고 오히려 누가 누구의 위로를 받는 것인지 착각할 정도로 당신은 당신이 즐겨 부르던 가곡 금강산을 불러주었지.
그 후 항암주사로 치료를 받고 투병 중에 있으면서도 가끔은 사랑의 음악회가 당신의 자택에서 있었지.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사랑의 음악회라기보다는 당신의 쾌유를 비는 절실한 기도였지.
이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성공의 모델은 권력과 부와 명예를 손에 쥐는 것이겠지만 인생의 진정한 성공은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는 일이 아닌가 싶네. 그런 면에서 당신 음악회에 참여한 모든 분들 그리고 이 교수 당신과 당신 가족이 아름다운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네.
당신은 폐암진단이 내려지던 2월 23일을 총에 맞은 날이라 표현했었지. 그러나 나는 그 총이 장난감 총이라고 우겨댔었지. 누군가가 당신이 너무 앞만 보며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에 휴식을 취하라고 장난감 총을 쏜 것이고 당신은 놀라 있지만 장난감 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곧바로 일어나 옛날의 평온의 일상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음악을 통한 기도 소리, 손주의 바이올린소리, 그리고 온동 촌장의 색소폰 소리는 장난감 총으로 놀란 그의 영혼을 흔들어 깨울 것이라고 믿었지.
그러나 당신이 맞은 총은 당신의 말대로 장난감 총이 아니었나보구려. 죽음을 앞두고 당신은 나를 불렀지.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지
대학 시절 그 젊디젊었던 시절 다 어디가고 머리를 보니 절반은 빈 머리요 남은 머리 백발이라.
“세월아 가려거든
너 혼자 갈 것이지
어이해 검은 머리 백발로 만들더니
그것도 다 못하여 목숨까지 함께 가자하느뇨”
당신 죽음 뒤의 사후 처리를 의논할 때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
“한 갑자 넘게 살았으니 천수 이미 누렸거늘 세속에 연연함은 부질없는 욕심이라 덤으로 얹힌 삶이니 하루하루가 고통일지라도 축복으로 맞이하자”
그 말이 당신 떠난 지금 후회가 가슴에 비수처럼 꽂쳐온다네.
당신 떠나기 전 당신 내손 꼭 잡던 날, 내가 당신에게 해 주었던 말이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구려.
“친구야!
아직은 날숨 토해내지 마라.
들숨으로 우리 더 조금만 같이 살다 가자”
그 때 당신은 내 잡은 손을 꼭 쥐며 무어라고 말을 해 주었는데 나는 당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환자인 당신은 내말을 알아듣는데, 멀쩡한 나는 당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딱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내가 더 딱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지.
손 뻗으면 닿았던 거리
이제는
시속을 높여 몇날 며칠을 달려도
닿을 수 없는 거리
당신과 내가 있는 거리
당신은 가고
나는 남고
친구가 부른다고 다시 올 사람도
그 누가 부른다고 뒤돌아볼 사람도 아닌데
그래도 불러본다
이교수!
누구보다도 단단하고 야무졌던 당신은, 당신은 참으로 열심이 살다 떠났다. 폐암진단을 받고도 단 한 번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모습. 생명이 꺼진 마지막 몸뚱이마저도 또 다른 생명을 위하여 시신까지 기증한 당신. 죽음이 당신을 쉬게 할 줄 알았는데 투병하던 그 시간만큼 또 병원에서 더 모진 여정을 감내해야하는 당신!
얼마만큼의 사랑의 끈을 모아야 당신 영혼에 닿을 수 있는 길이가 되는지. 얼마만큼의 사랑의 두께가 쌓여야 당신의 영혼과 어께를 같이 할 수 있는지. 얼마만큼의 사랑의 조각들을 모아야 당신 영혼을 감쌀 수 있는 넓이가 되는지……
삼가 아픈 마음 여미고 명복을 빈다.
* 충남 금산 출생, (전)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한울문학』(2005) 등단, ‘한국농촌문학상’(2006) 수상,
알을 품은 닭
류 양 숙*
얼마 전, 영동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시인의 댁을 방문했다. 그분을 통해, 암탉 품에 넣어 준 유정란이 병아리가 되어 알을 깨고 나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새 생명의 탄생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먼 옛날로 돌아가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조잘대는 병아리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이른 봄, 안방에는 암탉이 알을 품고 있었다. 추위를 피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안방마님이 된 것이다. 그 때는 닭 뿐만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이 사람과 같이 귀한 대접을 받던 호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졸린 듯한 눈을 껌벅이며 요지부동하던 암탉은 날개 밖으로 굴러 나온 알을 가끔씩 주둥이로 밀어 넣곤 했다. 암탉은 주변에 대한 경계심으로 꼼짝 하지 않고 있다가 이따금 밖에 나와 물을 마시는 것이 행위의 전부인 듯싶었다. 그러한 행동이 영원히 반복될 것 같던 세 주째 되던 날, 어미 품속에서 “삐약삐약”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부화가 시작된 것이다.
목욕이라도 한 듯 촉촉이 젖은 털과 게슴츠레하게 반쯤 잠긴 눈, 일어섰다가 다시 쓰러지는 병아리의 행태는 언제 한 생명으로 일어설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기우라고 했던가? 어느새 한 생명체는 보송보송한 노랑색의 솜털 옷으로 갈아입어 귀여운 모습을 연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낮에, 어미닭과 병아리들을 양지 바른 마당으로 옮겨 놓았다. 모이를 뿌려 병아리들이 한 곳에 모이게 한 후, 싸릿대로 엮은 가리개를 덮어둔다. 부리로 싸릿대를 쪼며 밖으로 나오려는 병아리들의 몸짓이 안쓰러워 나는 이따금 문을 열어 주곤 했다. 그러면 어설픈 몸짓으로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후 쏜살같이 출구로 빠져나온다. 그리고 이내 멀리서 기다리는 어미닭을 쫓아 아장아장 달려가는 모양새가 앙증스럽다. 물을 먹을 때, 고개 숙여 한 모금 마시고는 하늘을 쳐다보고, 또 한 모금 마신 후 하늘 한번 쳐다본다. 동요의 가사와 똑 같은 행동들이다. 제 각기 흩어져 한창 봄빛을 즐기려는데, 갑자기 어미닭이 “구구구구” 하며 제 새끼들을 불러 모은다. 하늘에 소리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병아리들은 어미품속으로 숨는다. 평소보다 길게 늘어트린 날개 밑으로 새끼들의 다리만 보인다. 하는 수 없이 소리개는 하늘 높이 날아가고, 병아리들은 어미 품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다시금 평화로운 정경이 봄의 하루를 열어 간다.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의 본능이 만물이 생존하는 근원임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시인의 닭장에는 수탉이 두 마리나 있었다. 한 마리는 암탉들을 대 여섯씩이나 거느린 채 당당한 것이 개선장군 같았다. 다른 한 마리는 웬일인지 홰에 올라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만 있었다. 이유인 즉, 내려오면 우두머리에게 찍힌단다. 닭의 세계에서도 생존경쟁은 치열한가보다.
알을 품고 앉아 있는 어미닭은 꼼짝 않고 요지부동이다. 새끼 병아리가 껍질 속에서 나올 때까지 참아 낸다. 종족번식을 위해 어미의 본능이 그렇게 인내하는 힘을 길러 낸 것일까. 노란 병아리를 보려던 내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다른 닭장에는 누런 색깔의 옷을 입은 병아리들이 알에서 깨어 나온 지 한 달쯤이나 됨직하다. 그러니까 알을 까는 대로 층층이 기르는가보다.
동행 한 문우 중 한 분이 당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암탉이 새끼를 품고 있을 때, 족제비가 와서 병아리를 해치려는 기미를 눈치 챘는지 꼼짝하지 않았단다. 암탉은 드디어 짐승한테 쪼여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죽은 어미의 날개 속에서 병아리들이 나왔단다. 어미닭은 제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보호해 준 것이다. 우리는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한 마디씩 건넸다.
“사람 못 된 것은 짐승만도 못하다. 자식 떼어놓고 달아나는 여인은, 저 닭에게서 배워야한다”
우리는 마당에 지천으로 널린 쑥을 뜯었다. 요즈음 잘 못하면 농약을 친 것을 뜯는다는데, 이곳은 안전하다는 시인의 말에 세 여인은 마음 놓고 한 봉지씩 가득 담아왔다. 쑥이 항암제가 된다는 오 시인의 말에 나는 더욱 열심히 뜯었다. 장조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건강하던 조카가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조카를 생각하며 뜯는 내 손끝이 빠르게 움직였다. 노랑 병아리 구경은 못했지만, 조카가 이 쑥으로 빚은 떡을 먹고 건강해 질 것을 생각하니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 충남 공주 출생, 협성신학교 졸, 3·1 여성동지회 부회장, 시온 중앙교회 전도사, ≪창조문학≫에 수필「형님은 평강공
주」로 등단, 부부 수필집 사랑의 메아리, 목원대 신앙수기 공모에「우리 가정에 베푸신 하나님 은혜」당선,
1120lys@hanmail.net
숫눈길을 걸어 갈 아들에게
김 기 태*
가을 하늘(旻)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鐘)를 듣고 서(西)쪽에서 아름다운(美) 여인이 나타났단다.
“보는 순간 머리에 스치는 충격이 진한 감동으로 이어져 콩당거리는 가슴을 안고 사귀게 되었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소통이 잘 되고 마음이 편해져 이 사람이면 평생 함께할 반려자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께 말씀드립니다.”
서른을 넘긴 아들이 설 연휴 대전에 내려와서 하는 이야기다.
나이도 있으니 충동적으로 하는 말은 아닌 듯싶고, 그동안 아들의 생각과 행동을 믿었기에 그 선택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하면서 “데이트 자금이 부족하면 전화 해”라고 답했는데 설 선물치고는 귀한 선물이었다.
부모님을 따라 영어권 서반어권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고등학교까지는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고, 한국에 와서 서반어와 국제 통상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자칫 외국풍물에 젖어 한국인의 자질에 모자람이 있을까 걱정도 했지만, 만날수록 사고가 합리적이고 진취적이며, 검소하고 책임감이 강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때로는 한국에서 자란 사람보다 더 한국적인 면도 보여 주어 좋아하게 되었는데, 서로 같은 직장에서 눈높이를 맞춰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어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이라 하니 마음이 놓인다.
이성과의 만남은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보는 순간 머리에서 섬광을 느끼며 운명적으로 다가 오는 만남이고, 또 하나는 조건에 의한 만남일 것이다.
조건에 의한 만남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나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지만, 처음 만나서 순간에 넘어간 사람에게는 조건도 있을 수 없으며 그저 좋다는 이유가 전부일 수밖에 없다.
설령 그 뒤에 어려움이 다가온다 해도 초지일관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아들의 만남이 그런 만남이라니 먼저 경험한 나로서는 안심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속마음은 개략적인 설명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기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혼하면 험한 세상 서로 힘을 모야 이겨내며 잘 살 수 있을까? 걱정도 된다.
가정이 편안하고 가문이 바로 서려면, 가장의 역할도 중요하고, 현명한 여자의 역할도 중요하기 때문에 갖는 생각이다.
그것은 먼저 살아온 선배들의 발자취에서 얻는 교훈이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나보다 나은 자식의 삶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아!
지금은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겠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 일상적인 삶에 젖어 그렇게 설레던 만남도 차츰 맹물 같은 삶으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항상 좋은 모습만 내 눈앞에 다가와 감동을 주었던 일들이 차츰 단점도 눈에 들어오고 서로 부딪치는 일들이 생기거든. 이런 삶의 단조로움과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통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소통하는데 결정적인 것은 성장기를 지나면서 겪었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성립한 가치관이었다.
여기서는 지식보다 지혜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또 수시로 발생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본질과 현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안목이 결정적이었다.
본질(本質)은 문제점을 도출시킨 근본적인 사안이며, 현상(現狀)은 그 본질에서 발생되어 우리들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인데, 현상 중에는 순수한 본질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각자 해석에 의해 변질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합리적인 판단은 본질에 접근하여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 해결방법을 찾으면 결과에 무리수가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에 현혹되어 다수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세(勢)에 편승하고, 혹시 그것에 시기를 놓쳐 함께하지 못하면 인생의 패배자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허상에 붕 떠 사는 우를 범하게 되고 한평생 흔들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증조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발바닥에 종기가 나면 장단지에 가릿대가 서는데 사람들은 장단지에 약만 바른다. 종기만 제거하면 장단지는 저절로 낫는데 장단지에 약을 바르니 가릿대가 낫지를 않는다.’ 라고 말씀 하신 것처럼 본질에 접근하여 문제점을 해결하는 습관을 가져야 매사 뒤틀림이 없이 순탄한 삶이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네 잎 크로버가 행운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세 잎 클로버가 행복이라는 꽃말도 알고 있겠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행운인 네 잎 크로버를 찾기 위해 행복이라는 새 잎 클로버를 밟고 다닌다는 점이다.
어느 것이 두 사람의 동행에서 가치 있는 삶인지 정하고 그 행복에 저해되는 원인이 발생된다면 잘 조정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노력도 필요하단다. 그리고 자유와 권한과 책임도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라.
이점을 소홀히 하면 내 가족이 주변 사람들에게서 홀대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점도 일찍 깨달았으면 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고 살아가며 쉬운 일은 결코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영원한 것도 없으니 눈앞에 나타나는 희노애락은 모두 세월 따라 지나간다고 어느 선배가 말하지 안 했던가? 기억된다.
또 하나는 사람에게는 꿈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국운의 흐름은 증조할아버지 세대는 군 단위에서 활동하셨으면 훌륭한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도 단위에서 그리고 아버지세대는 전국구로 뛰어야 했는데 이제 아들 세대는 지구를 밟고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시대적 분위기에서 얻은 직장은 두 사람이 좀 더 큰 꿈을 펼치기에 충분한 조건이 갖추었다고 생각되는데 지구의 외진 곳을 찾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너희들의 역량을 펼쳐보렴.
나이가 어려도 현실에 안주하며 생계형으로 살아가면 그 사람은 노인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나이가 들어도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꿈을 찾아 계획하고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그는 나이에 관계없이 항상 청년이 될 것이다.
기왕이면 인생길의 긴 여정에서 앞으로 살아갈 계획도 세우고 때로는 수정도 하면서 두 사람이 생각을 모아 짜임새 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가고 그 선택이 평생을 통해 제일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면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마음을 모아 가치 있는 동행이 되기를 기대한다.
하나 더 부탁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아들이 군에 가기 전에 함께 만들었던 “삶의 시방서 1,111조”는 아버지가 너에게 전하고 싶은 것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그런데 아들이 살아가며 또 니 자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두 사람이 삶의 지혜를 모아 내가 만든 삶의 시방서 중에서 절반만 수정하여 전해 주렴. 그리고 그 자식이 그 아버지가 한 것처럼 또 절반을 수정하여 자식에게 전해 주는 것이 전통이 된다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가족사에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생의 출발점에 서 있을 때는 세상에 태어나 뭔가 큰 것을 이룰 것이라는 희망이 삶을 지배하지만, 살아가며 할 일과 안할 일을 구분하며 살아도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보면, 성공한 삶도 중요하지만 성숙된 삶도 가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살아보니 한마디로 삶이 뭐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양심을 앞세운 생각과 소신으로 목적을 향해 전력투구한다면 의미 있는 삶도 되겠다는 생각이다.
아들아!
난 놈보다는 된 놈이 되도록 살아라. 된 놈이 되고 난 놈이 되면 더 좋구. 민종(旻鐘)과 서미(西美)의 운명적 만남을 축하한다.
그동안 아들의 보호자로써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는데 이제부터는 서미에게 보호자의 자리를 인계할 날이 오기를 기다려본다.
*숫눈: 아무도 건드리지 아니하고 쌓인 그대로 있는 눈
*숫눈길: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아 숫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 길
꿈이 남았어
미국 대통령이 주최하는 만찬회에 발명왕 에디슨과 자동차왕인 헨리 포드가 초청을 받았다. 만찬이 진행 중인데도 그들은 얼굴을 가까이 하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를 궁금히 여긴 기자가 만찬이 끝난 후 두 사람에게 다가가 질문을 하였다.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하셨습니까?” 하니까
“아녀. 아무것도 아니야”
“오래 동안 이야기를 나누시던데 내용이 궁금해서요.”
16살이 많은 에디슨이
“별 거 아녀. 요새 약은 뭘 먹는지. 혈압에 몇 알을 먹는지. 화장실은 자주 가는지. 밤잠은 설치지 않는지 뭐, 그런 이야기였어.”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24시간이 모자랐던 그들이지만 나이가 들어 찾아오는 몸에 대한 변화는 어쩔 수가 없었는지 만찬에는 관심이 없고 두 사람은 약 먹는 이야기로 담소를 한 것이다.
요즘 TV에 출연하여 개그맨들이 하는 개그를 보고 웃음이 바로 터져 나오시는지……
그렇다면 당신의 정신적 연령은 젊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듣고 나서 한참을 생각하고 왜? 웃지. 한다든가 아니면 씨-익 하고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했다면, 당신의 생각은 고령화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대중가요도 어느 가수까지 따라 불렀는지 궁금하다.
내 경우는 직장에 다닐 때 “두만강....”만 부르니 회식을 하고나서 “이제 들어가시죠. 저희끼리 노래방에 들렸다 조금만 놀고 들어가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배우면 끼워 줄까 봐 “쿨의 운명”까지 따라 갔는데, 그 이후로는 손을 들었다.
이 나이에 그래도 많이 따라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벌써 10 여년전인가 보다.
친구들과 만나 나누는 이야기가 건강 혹은 노후문제로 이어진다면 이미 나이가 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앞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공통된 것은 세상을 바꿀 능력도 없으면서 목소리만 점점 커져간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오래 살았으면 ‘예’, ‘아니오’. 의 범주를 넘나들며 어느 곳에 편중되지 않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르게 설명해 줘야 되는데 그동안 눈에 보이는 현상만 쫒다 편견과 아집의 식견으로 말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미 세상의 진리를 통달한 것처럼 열변을 토하지만 그 내용은 이미 다른 사람도 아는 문제이고 아주 상식적인 것들인데 자신의 주장인양 톤을 높여 외상값 장부 지울 때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 모습이다. 설령 자신이 경험한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가 좀 있을 수 있으나 그것도 아주 좁은 곳에서 놀다온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을 가지고 열변을 토하며 세상을 이야기 하니 들으면서도 경솔하고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또한 과거 경력에 미련이 남아 뭔가 한자리 감투 써 보려고 자존심 버리고 다니는 모습은 더욱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일에 시간을 소비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모습이 한결 좋아 보이는데. 용기가 안 나는 것이 사실이다.
동장님이 민원서류 잘 처리하는 것이 아니듯 그동안 자신이 헛기침과 직책으로 뒷짐 찌고 살았으니 직접 해 보려고 하면 두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옛날 양식 있는 어른들은 벼슬을 하다 남자 나이 64세가 지나면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며 마무리 하는 것이 희망 사항이었다. 어느 것이 참살이인지 우리도 이제는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사람 만나 목소리 높여 말하는 것으로 시간 보내지 마시고, 입은 다물고 몸은 고단하게 보내야 한다.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을 선택하여 내 몸에 맞는 일에 도전해야 한다.
그동안 먹고 사는 일에만 매달려 살아 온 삶인데,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빈자리에 더 소중한 꿈을 담아 자식도 따르고 싶어 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유등천에 나와 보니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어린시절과 비교하면 비슷한 날씨인데 매스컴은 온난화 때문이라고 야단법석이다. 그러나 동장군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이제는 날씨도 포근해졌고 하천가에는 제법 파릇파릇한 새 싹들이 돋아나고 있다.
웅크렸던 몸을 피면서 아내와 유등천에 나가 걷기 운동을 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 같은 마음인가 보다 제법 사람들이 많이 걷는다. 그런데 곳곳에서 작업 중이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인가 보다.
4대강은 국토해양부 산하 국토관리청에서 시행을 하고 강으로 유입되는 하천공사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산을 위임받아 시공하는데 대전에도 대전천과 유등천 그리고 갑천에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현 정부가 들어서고 난 후 4대강 정비에 따른 여론이 두 갈래로 갈라져 오래 동안 논쟁이 이어지고, 지금까지도 그 여운은 잔존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정부에서 하고자 하는 대단위 공사가 진행 중에 중단된 일은 드물다. 경부고속도로나 월남파병과 그리고 포니 국산자동차공장 생산 승인을 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는지 똑똑히 기억을 한다. 결과론이지만 그때 그런 정책을 펴지 못했다면 지금 어찌 됐을까 소름이 끼친다. 그때 반대했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나라 성장의 주역이었던 중동에 건설근로자가 진출할 때 일화는 지금도 우리를 감동케 한다.
오일 머니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건설 붐이 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후 정부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보내 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하게 하였으나 대답은 일관적으로 부정적인 보고였다.
마지막 카드로 현대의 정주영 명예회장을 불러 중동으로 보내면서 그 분마저 반대 한다면 자신이 의견을 접으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은 정반대의 의견이었다.
날씨가 더우니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되고, 골재는 지천에 깔려 있으니 자재비를 다운 시킬 수가 있으며, 물이 문제인데 그것은 기름을 팔아 가져 오면 되는 일이니, 이런 조건의 일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 말에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임자. 현대건설에서 중동에 나가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줘”라고 지시했다는 일화가 지금 우리가 의식주를 해결하고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일에 동참하며 나는 한반도에 태어나서 살다간 그 많은 조상님보다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로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큰 행운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 대열에서 비켜서서 어부지리로 동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한다. 새만금 사업도 그리했고 도로공사나 크고 작은 일에 잦은 태클을 걸었다. 시간이 길어지고 경비가 발생했지만 중단한 예는 없었는데 그 후로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물론 정부에서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 홍보가 부족했고 정부에서 관리하는 산하기관에 지시하여 공사의 타당성을 연구 발표해서 설득해야 되는 의무를 소홀히 한 점이다. 그리고 서둘렀다.
4대강 정비사업도 그런 점이 많아 보인다. 뜻이야 어떻든 밀어 붙이기만 하니 불안하고 불만이 있는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면 4대강 정비 사업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옛날 고속도로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좀 있다. 너무 급속히 이루어지고 서두른다는 점이다. 해마다 20%정도의 토목 예산이 줄어들고 있어 고민하는 사람이 많은데 작은 예산 중에서 4대강에 집중하여 투자하니 다른 곳에서 일이 없어 원망이 많다.
나는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지지를 하지만 정비 사업으로 인한 부작용을 겪어보지 않고 공사를 진행시킨다는 점에서는 많은 염려를 하고 싶다.
첫째로 4대강에는 많은 인공 보가 생긴다. 토목에 상식이 없는 분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면 강을 가로질러 콘크리트로 둑을 만들어 물을 가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인근에서 유입하는 물이 홍수 시에는 인공적으로 퍼 넘겨야 하는데 이때 관리가 안 되어 잘못되면 대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국민은 개인이나 국가나 선천적으로 관리가 미숙하다. 잘못되면 핑게만 늘어놓는 것이 우리들의 주특기이다. 그동안 많은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둘째는 자연은 오래 동안 재해에 적응하며 견디어 왔다. 그것을 사람의 눈 잣대로 개발을 한다. 자연의 섭리와 역행하는 경우도 생길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못 만드는 것이 모래다. 자갈은 석산에서 생산할 수도 있지만 화약을 사용하니 옛날 강자갈을 쓸 때보다 발파 시 균열로 인해 자갈의 강도가 떨어진다.
지금도 국내에서 사용되는 모래는 절반 밖에 하천에서 생산되지 못하는데 일시에 다 걷어내면 앞으로 모래는 어찌해야 되는 건지 말하는 사람이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재개발이라는 미명아래 건물을 다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 사례로써 이로 인한 자원 낭비는 극심하다. 이런 모습이 우리만의 문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셋째는 지류하천에는 자연하천 생태하천 더 나아가 녹색운동이라는 정부 시책에 의해 하천을 정비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시공된다는 점이다.
하천바닥은 논 갈고 써래로 평탄 작업을 하듯 평평하다. 물고기가 수영을 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리고 법면 즉 하천 경사지에는 돌로 쌓고 있다.
어딘가에서 자연이 파괴되어 가져오는 일이다. 시골에 가면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재래식 보가 있었는데 이 보를 뜯어내고 콘크리트로 보를 만들어 물이 넘어가게 하였다.
지금 시골의 하천에는 피라미 한마리가 살 수가 없다.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설계를 하고 공사를 한 사람은 자연파괴범이라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없다. 그들을 용서할 수 없는 미결수라고 말하고 싶은데 유등천 개수공사를 보면서 똑 같은 재현이라고 생각이 든다.
유등천으로 유입되는 하천의 물은 무방비이다. 아파트나 대단위 주택 단지는 오 배수 처리가 잘 되었지만 옛 주택에서는 바로 하천으로 생활 오수가 유입된다. 이런 생활 오수를 침전시키는 간이시설도 병행 했으면 좋으련만 현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곳만 신경을 쓰고 공사를 한다.
하천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고기도 함께 놀아야 한다. 물살에 의해서 팽기는 부분도 있고 쌓이는 부분도 있어야 한다. 돌 밑에는 웅덩이가 생겨야 고기집이 생기고 그곳에서 고기가 생활할 수 있는데 시행자나 설계자, 감리, 시공자는 고기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공짜로 주는 정부 예산으로 사람의 입맛에 맞게 공사만 하고 있었다. 이런 공사는 하나의 정부에서 끝내는 공사가 아니다. 계속해서 유지 관리를 해야 한다. 서두를 일도 아니며 반대할 일도 아니다. 관리되지 않는 성장은 부실을 초래하기 때문에 천천히 점검하며 검토하며 시공해야 된다. 이런 점을 헤아려 내실 있게 예산을 아끼며 내 집 공사하듯 4대강 정비를 관리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문에는 정비사업 중인 대전의 3대 하천에서 새들이 자취를 감춘다고 전한다. 먹이 사슬이 끊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대전시 건설 담당자는 공사를 잘하면 자연의 성형외과 의사이지만 잘못하게 되면 환경 파괴범이란 점을 알았으면 한다.
* 溫洞, 대전 둔산 3동 거주, 글지이, 부름새, 달림이. 刻장이, 토장이, 온동마을 촌장, 수필집 소똥 위의 홍시,
살아보니 어뗘, blog.daum.net/ondong.
원숭이와의 타협
김 현 주*
오랜만의 여행이다. 환상의 섬, 신들의 섬이라 불리는 발리 섬!
기대 반 설렘 반으로 8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웅우라라이 공항은 아름다운 휴양지 발리를 연상케 하기에는 다소 협소하고 초라했다. 현지 비자를 발급 받은 후, 입국수속을 거쳐 짐을 찾아 로비로 나가자 현지 가이드가 이름이 적힌 쪽지를 들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한 향이 확 풍기는 인도네시아 국화꽃으로 만든 꽃목걸이를 걸어 맞이해준다. 우리나라의 국화꽃인 무궁화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데 이 나라의 상징인 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자신의 나라를 방문하는 관광객을 환영하는 작은이벤트가 인상적이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의 도착이라 바로 호텔로 이동해 여장을 풀고 쉬었다.
아침에 눈을 떠 바라본 창문 밖의 파란 하늘과 열대 야자수가 남국의 정취를 실감나게 했다. 결혼 30주년이면서 마침 일본인 며느리 아야코 오빠의 결혼식이 있어 찾게 된 발리 섬!. 첫날은 발리에서의 이색 결혼식에 참석하여 한국의 결혼식 풍경과는 너무도 다른 차분하고 소박한 결혼식을 보았다. 직계가족과 친한 친구만을 초대하여 진심으로 둘의 결혼을 축하하고 밤늦도록 함께하며 축제의 분위기를 즐기는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다음날 돌아본 울루와뚜 절벽사원은 힌두교 사원으로 신성한 지역으로 여겨져 종아리가 보이는 차림으론 출입할 수가 없다한다. 반바지 차림이거나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입구에서 무료로 대여해주는 ‘샤롱’이라는 전통치마를 두르고 모두 노란 허리띠를 매고 들어갔다. 멀리 사원이 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바다를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난다. 난간도 없이 위험한 암벽에 하얀 파도가 밀려와 머릴 부딪히는 형상이다.
아스라한 수평선까지 탁 트인 푸른 바다의 싱그러움이 삶에 지친 마음을 달래 준다. 근심걱정 다 날려 버리고 마음껏 쉬면서 즐기라고. 자연은 모든 것을 나에게 선사한다. 여행은 이래서 필요한 것이라고 나직이 속삭인다.
헌데 사원으로 가는 길목은 야생 원숭이들의 천국이었다. 사원을 구경하러 들어가기 전에 가이드가 모자며 선글라스, 액세서리 등을 원숭이들에게 빼앗길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사원의 난폭한 무법자 원숭이들! 전혀 사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없다. 오히려 관광객들의 모자, 안경, 목걸이, 심지어 신고 있는 슬리퍼까지 순식간에 강탈(?)해 간다한다. 정말 내 눈앞에서 한 여자가 샌들을 신고 계단을 오르는데 원숭이가 잽싸게 날아가 신을 가로채 달아난다. 여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계단에서 넘어지며 굴러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광경에 우린 어이가 없어 쳐다보는데 열 살 남짓 소년이 원숭이 앞으로 가 뭔가를 내주며 얼르니까 빼앗아 간 샌들을 내주고 먹잇감을 받아 달아난다. 그런데 꼬마는 그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며 손을 벌렸다. 결국 아이는 빼앗긴 물건을 찾아주며 Give me money! 돈을 받는 것이다.
위쪽에선 더 기막히게 원숭이가 모자를 빼앗아 가지고는 먹잇감을 흥정하고 있었다. 처음 옥수수를 주니까 반응이 없고 또 무언가를 내주어도 꼭 쥔 채 놓지 않다가 바나나를 주니까 손에 든 것을 놓고 바나나를 가로채 달아났다. 어떤 관광객은 메고 있는 가방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원숭이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한다. 이곳의 원숭이들조차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에 길들여 진 것 같아 씁쓸했다. 원하는 것을 위해 약탈과 타협을 하는 영악한 원숭이들의 공포에 나는 모자를 쥔 채 연신 비명을 질렀다.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에는 원숭이들이 너무 무서웠다
사원을 돌아 나오며 탯줄이 붙은 막 태어난 신생원숭이를 한손에 안고 있는 어미원숭이도 보았고 가족을 형성해 무리지어 다니며 서로 챙겨 주는 모습도 보았다. 우리네 삶과 다를 바 없는 야생 원숭이들의 생활상을 보며 왠지 치부를 들킨 듯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나쁜 짓도 서슴지 않는 도덕이 땅에 떨어진 인간사회의 현실에 오염된 것은 아닐까 해서 말이다.
점심식사 후 파당파당 해변과 짐바란 비치에 들렀다. 파당파당에는 서핑과 태닝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원한 바다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파도타기를 즐기는 서핑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난다. 오일을 몸에 바르고 태양 아래 누워 몸을 굽는 금발의 아가씨들, 젖먹이까지 데려온 성급한 마니아(?)도 눈에 띈다. 이곳은 호주가 가까워 호주에서 서핑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단다.
짐바 비치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씨푸드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두 얼굴을 가진 해변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아래선 백사장이 펼쳐진 해수욕장이지만 저녁이 되자 운치 있는 야외 레스토랑으로 변신했다. 테이블이 세팅되고 각국의 여행객들이 각종 해산물 요리가 풍성한 씨푸드를 먹기 위해 모여들었고 아름다운 석양을 배경으로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우아한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현지 싱어들이 기타를 메고 테이블을 돌며 컨츄리송을 불러 분위기를 더욱 농익게 해준다. 국적과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환상의 섬 발리다.
자유와 여유로움을 만끽 할 수 있는 곳 발리! 한번쯤 찾아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만한 곳이다. 무엇보다 선량하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현지인들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끌리는 아름다운 섬 발리! 짧았지만 길게 느껴졌던 여행이었다.
* 대전 출생, 수필가, hl3evs@hanmir.com
어떤 해후
이 경 숙*
“귀신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에게 나타나는 법입니다”
지관의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꿈속에서 밥상을 차려오라고 호통 치시는 할아버지, 신발을 사 달라고 하시는 아버지, 간간히 보이는 엄마모습들……. 다른 형제들은 보고 싶어도 꿈에 한 번 안 나타난다고 아쉬워하는데 출가외인인 내 꿈에는 교대로 나타나 요구하는 것들도 다양하시니 무슨 조화인지. 그러다 우연히 만난 지관의 말은 그동안 찜찜했던 묏자리 이야기를 진지하게 의논하게 만들었다. 여러 번 다시 심었지만 잔디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 할아버지 산소, 개울을 끼고 있어 흙이 깎여 나가는 엄마산소, 비탈진 곳의 할머니 산소…….문제가 있었지만 한꺼번에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고 다들 바쁘게 살다보니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왜 하필 유독 내 꿈에 친정 조상님들은 나타나는지, 그게 내가 가장 그 분들의 바람을 들어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총대를 매야할 사람은 나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문화가 많이 변해서 이젠 화장이 보편화되었다지만 유언 없이 부모님을 화장한다는 것이 마음 편한 일 만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세대에는 아직도 한식날이다, 벌초다, 조상님 산소를 찾아가지만 우리 다음세대에 과연 조상의 묘소를 돌 볼 자식들이 얼마나 될까. 친정 형제들의 의견이 모아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부모님의 묘소를 한곳에 모으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제일 시간이 여유로운 내가 지관을 모시고 자리를 보고 비석도 맞추고 하는 것을 보고 출가외인인데 친정 일에 마음 쓰는 것이 예쁘다고 일 하시는 분들이 잘 해주시겠노라하시니 마음이 좋다. 한 곳에 다 모아 화장을 하여 유골함에 모시기로 하였다.
좋은 날을 받아 한 분 한 분 파묘 되어질 때마다 그토록 내 꿈에 나타나셨던 이유들이 풀리는 순간이다. 나무뿌리가 칭칭 감고 있는 할아버지의 유골, 8년이 지났지만 썩지 않고 그대로 있는 어머니의 시신은 우리들이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돌아가셔서도 편치 않았음을 꿈에라도 알리고 싶어 하셨던 이유를 알고 나니 죄송스런 마음 한편 서둘러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을 맡아 해주는 지관까지도 남의 집 일이지만 마음이 개운하다고 한다.
화장식을 하기 전 비록 유골이지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한다.
사남매의 막내인 남동생은 유복자이다.
서른여섯 해 밖에 못사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 만에 태어났다. 추운 겨울에 동생을 낳은 엄마의 하얀 소복이 여덟 살 어린 기억에 남아있다. 그 때는 어려서 아버지의 부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어머니의 아픔이랄까 그런 것은 더욱 알 수도 없었다.
나이가 들고 내 자신이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야 어머니의 아픔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헤아리게 되었다.
그 막내가 어느새 마흔의 중반을 넘어서 처음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이다. 비록 유골만의 만남이지만.......
“나보다 키가 더 크신 것 같아”
돌아내려와 하는 말은 그 한 마디 뿐이다.
살아서 백발도 아니고 사십칠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유골과 마주한 부자간의 첫 만남은 그 한 마디에 아쉬움의 회한과 그리움이 다 담겨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어린 사 남매와 노부모님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떠났던 아버지도 햇빛에 나오신 오늘의 해후에 얼마나 사무친 그리움을 풀고 계실까! 당신의 부재에도 잘 자라 준 자식들에게 무언이나마 고맙다고 하실 것이다.
작은 공원으로 다시 만들어진 묘지를 마무리하고 차례를 올린다.
서른여섯이란 젊은 나이에 가신 사진 속의 아버지보다 이제 그 자식들이 더 나이가 많다.
유난히 아버지 모습을 많이 닮은 동생이 음복 한잔에 농을 한다.
“아버진 이제 나보다 나이가 어려……”
‘그래,…’
동생의 어린 막내아들이 엉덩이를 하늘 높이 들고 절을 한다. 뭐가 그리 급하셔서 그리 일찍 가셨을까 이렇게 잘 큰 아들도 손자도 못 안아보시고……
긴 이별 후에 온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우리의 짧은 해후는 그렇게 끝이 났다.
여러 형제들 중에서 유독 내 꿈을 빌어 나타나셨던 부모님들이 이제 편히 쉬시길 빌어 본다. 작은 힘이나마 살아생전 다 하지 못한 효도를 조금은 한 것 같아 내 마음도 한결 가볍다. 이제 다시 꾸는 꿈은 그리움의 긴 포옹이었으면 좋겠다.
가 면
고양시에 있는 중남미 문화원엘 다녀왔다. 중남미에서 30년간 외교관 생활을 하며 모은 한 개인의 소장품을 전시한 곳으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이 많이 전시 되어 있다
토기, 석기, 그리고 목기와 각종 민속 공예품들을 둘러보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잉카제국과 마야족들의 생활이 살아나와 내 앞에서 숨 쉬고 있는 듯하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한 벽면을 모두 장식하고 있는 가면 전시실이었다. 나무와 가죽, 천, 철기 ,석기, 토기 등 다양한 재료와 모양으로 만들어진 가면들은 어찌나 색채도 다양하고 강렬한지 나 자신이 그 박재된 표정에 압도 당할듯하다.
동물 가면, 마귀 가면, 그리고 아주 화려한 나비가면의 앞에서는 나 자신이 무도회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충동이 일게 한다. 특히 검은 빛으로 온통 칠해진 죽음의 가면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뜻에서 입이 없다고 하니 그들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읽을 수 있었다. 갖가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일상생활에서 잠시 자신의 정체로부터 해방되어 또 다른 자신의 표정을 만들었을 그들의 슬기가 부러웠다.
돌아오는 길 내내 아까 보았던 가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그들처럼 삶이 힘들고 무료할 때 나 자신이 잠시 떠나고 싶은 자유로움을 가면을 빌어 찾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놓고 살 수 있을까?
때와 장소에 따라, 때로는 만나는 사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얇거나 두꺼운 가면을 써야 할 때가 있다.
간혹 주위 사람들에게서 “너 답지 않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 말은 어떤 희생을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리한 용기도 필요로 하며, 마지못한 칭찬의 뉘앙스를 풍기면서 내게 나다우라고 부추긴다. 그러면 또 다시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그들이 내게 가지고 있는 선입견의 잣대에 나를 맞추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야 한다. 그 순간, 나는 또 나를 버리고, 나다움을 위해서 새로운 가면을 쓰는 것은 아닐지…….
그럴 때마다 의문은, 자신도 알 수 없는 가장 나다운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상대방에게 모두 보여주고 싶어도 뜻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 난 체념이라는 굴레 속에서 내 의지와는 달리 또 다른 가면을 써야만 한다.
차라리 가면을 씀으로써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양반들의 모순을 하회탈 속에서 맘껏 조롱하며 신분의 비애를 달랬을 민초들처럼 나도 적당히 가면을 바꿔 쓰면서 차라리 자유롭게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이 어쩌면 더 인간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는 건 또 어떤 생각의 가면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지만 결국 나다움의 가면을 준비하고 마는 순간 가면 전시실 중앙에 쓰여 있는 글귀가 내게 위안을 준다.
“인간은 생존하는 한
각자의 이름과 가면으로 부터
숨어 지낼 수는 없다.
이들은 우리의 형태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데
가면은 곧 우리의 모습이다”
- octavia paz -
*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상상의 힘≫ 작품상(2009) 수상,
전단지 요지경
송 경 숙*
둔산동에 자리한 백화점 근처엔 늘 사람들이 붐빈다.
즐비한 상가들과 붐비는 사람들 때문에 길거리에는 업소 홍보용 전단지를 돌리는 사람들이 도로 곳곳에 흔하다. 처음에는 ‘더운 여름에 전단지 돌리느라고 얼마나 힘드실까? 먹고살려니 저렇게 힘들게라도 벌어야 되나보다’하며 전단지를 받아주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받아든 광고지는 어느새 애물단지가 되기 일쑤다. 상가 주위나 도로에는 쓰레기통이 없기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방에 넣어 집에 가져가기도 곤란하고, 들고 다니자니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 몇 백 미터 걷다보면 서너 장의 전단지는 기본으로 받게 되고, 몇 번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이젠 전단지를 받지 않는 여러 가지 방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전단지를 받지 않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전단지 돌리는 사람과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 가능하면 고개를 숙이고 걷거나 전화를 받으면서 바쁜 척 걸어야 한다. 만약 눈이 마주치면 쌀쌀맞고 굳은 얼굴로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젓거나, 아예 멍하니 먼 산 바라보듯 다른 곳을 응시하며 지나가면 된다.
또 전단지 받는 앞사람의 뒤를 바짝 따라가서 미쳐 나에게까지 건네줄 시간이 없게 하거나 아예 양손에 짐을 나누어 들고 걸어가게 되면 전단지가 손에 쥐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다.
전단지 나누어 주는 것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셈치고 받아들면 어떠냐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매일같이 필요 없는 정보를 넘치게 받아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다.
예전에는 전단지를 돌리는 사람들 주변에 빈 상자 같은 것이 있어 그곳에 받은 전단지를 구겨 버리곤 했었는데, 지금은 빈 상자나 봉투에 전단지가 버려져 있으면 돌린 사람이 그것을 주워서 다시 나누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아예 박스나 봉투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전단지를 돌리는 사람들에게도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우선 60-70대 여자노인들은 길거리 한 장소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광고지를 쥐어준다. ‘연민파’라고 나름 이름을 붙여 보는데, 이들은 체력이 부족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한곳에 오랫동안 서서 전단지를 나누어 준다. 대부분이 여자 노인들인 이들은 가끔 막무가내로 전단지를 쥐어주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전단지 안 받는 법을 잘 터득해야 지나가기 쉽다.
둘째로 동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주로 광고지를 문 앞에 붙이거나 우체통 안에 넣는 이들이 있다. 대개 중년의 남자나 여자들인 이들은 간편한 운동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아파트나 빌라의 우체통, 복도, 문 앞에 재빠르게 광고지를 넣거나 붙이고는 사라진다. 주인이나 주민들 눈에 띄면 지나가는 사람처럼 행동하며 자연스럽게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이들을 운동 겸, 돈도 버는 ‘일석이조파’라고 이름 붙여 본다.
셋째는 밤에 유흥업소나 사행성 오락, 대리 운전 등에 관한 광고지를 자동차에 꽂아 놓거나 길바닥에 마구 뿌리고 다니는 젊은 남자들이 있다. 이들은 ‘막가파’로 주로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들이며 말쑥하게 차려입거나 유행하는 옷을 입고 두세 명이 함께 다니며 작업을 한다. 언제 왔다 갔는지도 모르게 자동차에 명함 전단지를 꽂는 사람들도 있고 유흥업소의 광고지를 아예 길거리에 삐라 뿌리듯 뿌리고 다니기도 한다. 그런 모습들이 당연하고 태연한 듯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 모습조차 화려한 밤거리의 당연한 문화처럼 생각될 때도 있다.
마지막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명함 전단지를 문 앞에 정확하게 던져 넣는 ‘고수파’다. 이들은 대개 대출업 광고지를 돌리는데 그 정확도가 기가 막힌다. 얼마나 정확한지 그 진기한 기술이 텔레비전에 소개되었던 적도 있다.
불야성 같은 금요일 밤이 찾아오면 둔산동의 유흥가 도로 바닥에는 온통 돌려진 광고 전단지로 경기가 끝난 야구경기장을 방불케 한다. 전단지를 붙였던 파란색 테이프들은 밀물에 드러나는 게 구멍만큼이나 덕지덕지 하다. 그런 금요일 밤의 폭풍우가 지나고 나면 토요일 아침의 도로는 밤새 토해놓은 토사물처럼 흉물스럽다.
전단지의 침해는 집이라고 피해갈 수 없다. 우편함에는 우편물보다 광고지들이 더 많이 들어 있다. 책자 광고지가 아파트 현관문에 두세 개씩 달려있는 것은 기본이고 우편물인양 편지봉투에 곱게 들어가 있는 광고지들도 수두룩하다. 들여다보면 공짜 영화관람권을 동봉한 광고지들이다.
지금까지 제일 황당했던 일은 포스트잇 광고지였다. 여자가 자필로 쓴 “어제는 즐거웠어요. 오빠. 아무개 전화번호 0000”하며 이름하고 핸드폰 번호가 적혀있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남편 차 옆 유리에 붙어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부부싸움 할 뻔 했던 매춘 광고지였다. 아이디어 참 기발하다 하고 웃어넘겼지만 출근하는 아침부터 줄줄이 붙어 있는 반쯤 벗은 여자들 사진에 매춘광고까지, 아이를 태워 함께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참으로 민망할 일이었다.
광고전단지 돌리는 데도 광고주들의 기본적인 원칙이 있었으면 좋겠다.
바닥에 광고지를 뿌린 업소는 아침마다 종업원들이 나와서 도로를 청소한다든지, 집집마다 소책자 광고지를 돌리는 업소는 쓰레기봉투에 광고지를 넣어 돌린다든지, 비오는 저녁엔 절대로 자동차 앞 유리나 와이어에는 광고지 끼우지 않고 정 돌리려면 비닐에 싸서 돌린다든지, ‘아이가 타고 있어요’ 푯말이 있는 차에는 유흥업소나 술집 광고지는 꽂지 않는다든지…….
우편함에 광고지를 넣을 때는 돌돌 말아 넣어 다른 우편물과 구분되게 하는 센스를 가진 업소라면 아마 대박날 것이라고 실소를 해보는 것도 다 그런 의미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이 뭐냐구?
최근에 빵 만드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텔레비전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며 막을 내렸다. 그 드라마 내용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을 만들라는 과제를 받아든 주인공이 빵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감동 있게 보았는데 나에게도 가장 배부른 빵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친정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술빵’이다. 막걸리를 넣고 발효시켜서 시큼한 술 냄새가 나던 그 빵을 우리 형제들은 ‘술빵’이라고 불렀다. 국도를 지나다 보면 흔히 마주치게 되는 ‘옥수수빵’과 모양이나 맛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내 또래들이면 모두 공감하는 것이지만 시골에서는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었다. 한겨울 내 먹었던 고구마가 떨어지고 보릿고개가 다가오면 고만고만한 나이의 8남매들의 고픈 입을 해결하시려면 애 깨나 쓰셨을 어머니셨다.
중학교 때쯤부터 밀가루가 많이 유통되어 값이 쌌었나보다. 시골집에 큰 부대의 밀가루가 사들여지기 시작하고 나서는 밀가루 음식만은 배불리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수제비며 칼국수, 부침개, 찐빵 등 밀가루로 음식들을 잘 만들어 주셨고 꽈배기며 타래과 등 처음 보는 과자들도 만들어 내셨다. 요즘처럼 온도를 맞춰주는 오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계량컵이나 레시피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머니는 어떻게 빵이나 과자 같은 것을 그렇게 잘 만드실 수 있었을까?
온 가족이 집에 있어 먹을 입이 많은 주말에는 막걸리 냄새와 달콤한 건포도가 들어간 술빵을 자주 만들어 주셨다. 막걸리와 이스트, 건포도, 계란을 넣어 적당히 반죽을 한 다음 햇살 좋은 안마당에 젖은 수건을 덮어 몇 십 분을 발효시키셨다. 안마당에 커다란 밥통에 젖은 베수건이 쌓여 있는 날이면 들락달락 건포도가 얼마나 들어있나, 빵이 얼마나 부풀었나 수건을 열어보다가 혼이 나곤 했는데 그 사이 부푼 반죽을 가마솥에 불을 지펴 쪄내셨다.
한사람 앞에 한 덩어리씩 술빵을 받아든 날이면 하루 내내 입이 즐거웠었다. 빵을 조금씩 떼어 오래오래 입안에 넣은 다음 건포도 한 알과 함께 씹으면 달콤하고 구수하고 술 취한 듯 그 맛에 몇 시간이고 빵 한 덩이가 손에서 놀았다.
술빵의 맨 위에는 번들거리고 찐득거리는 껍질 같은 부분이 있었는데 마치 광어 생선회의 뒷지느러미 살처럼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맛이 있어 남겨놓은 언니빵을 위에만 뜯어내 먹다가 엄마한테 꾸중들은 기억마저도 달콤하다.
오늘 따라 집들이 하고 남겨진 건포도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술빵을 만들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이사하고 새로 장만한 오븐을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고 빵을 한 번도 만들어 본적이 없는 내가 갑자기 빵에 대한 강한 이끌림을 받은 건 아마도 드라마에 심취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드라마에서처럼 멋진 요리용 장갑을 끼고 오븐에서 갓 구워낸 고소한 빵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먹일 수 있다는 건 황홀한 경험일 것 같았다. 밀가루도 있겠다, 건도도, 계란, 우유, 막걸리, 오븐까지 있으니 빵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처럼 보였다.
엄마가 만들던 것을 기억하며 계란을 넣고 막걸리를 넣고 건포도를 넣고 밀가루 반죽을 한 다음 젖은 수건을 덮어 방의 전기장판에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주면 빵이 부풀어 오르겠지... 하고 기다리기를 한 시간.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반죽이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내가 잘못 알았나? 조금 부풀어 오른 것 같기도 하고... 빵을 찌면 부풀어 오르는 건가?’ 의구심이 들었지만 일단 오븐 설명서에 있는 빵 만드는 시간대로 타이머를 맞춰놓고 익혀 보기로 했다.
제대로 된 빵은 아니더라도 빵처럼 생긴 것은 나오겠지 하는 심정으로 오븐에 넣고 타이머를 설명서에 써 있는 대로 맞추고 기다리기를 몇 십분.
드디어 오븐에서 ‘띵’ 하는 소리가 나며 무엇인가가 다 되었다는 신호가 들렸다. 오븐 뚜껑을 열고 그릇에 담긴 무엇인가를 꺼내었는데 이게 무엇인가? 빵도 아니고 과자도 아니고 떡도 아닌 것이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애물단지. 반죽한 크기 그대로 건포도만 가득 머금은 딱딱한 무엇인가가 만들어졌다. 그릇에서 잘 떼어지지도 않는 밀가루 덩어리를 뜯어내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보고 딸은 내내 나를 놀리느라 재미를 붙인다.
“엄마 이게 떡도 아니고 빵도 아니고 젓가락도 안 들어가네”
결국 한입도 먹어보지 못하고 음식쓰레기통으로 들어간 나의 술빵! 빵에 일가견이 있는 남편이 퇴근 후 집에 들어왔길래 내가 열심히 빵 만든 과정을 설명하고 왜 빵이 딱딱하게 굳어 먹을 수 없게 나왔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남편이 하는 말 “빵 만드는 밀가루는 따로 있어. 냉장고에 보관했던 밀가루는 빵 만드는 게 아니야. 그리고 이스트도 함께 넣어야지” 한다.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중학교 때 강력분, 박력분 하며 밀가루 종류를 외웠던 것이 그제야 기억이 났다. 칼국수 해먹는 밀가루로 빵을 만든다고 반죽을 한데다 술만 넣으면 되는지 알았더니 이스트를 넣어야 부풀어 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친정어머니께서는 어떻게 아셨고 가마솥에다 빵을 구울 생각을 하셨을까 존경스러웠다.
기억만 믿고 빵을 만들어 본다고 했으나 원래 기억이라는 것이 완벽하지 않아서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데 친정어머니는 그 흔한 빵 만드는 법 하나 없이도 맛있는 빵을 만들어 우리를 먹이셨다. 어머니는 역시 우리에겐 최고의 요리사이며 제빵사이셨다.
‘그래도 나는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 니들 배 안 곯고, 먹는 거만 쳐다봐도 내 배가 다 부르더라. 내가 그래도 자식들 굶기지는 않는 것 같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하시며 힘든 내색은 절대 안하신다.
새벽부터 일어나 8남매 도시락을 싸시고, 점심이면 일군들 새참을 만들어 내시고, 저녁이면 학교에서 돌아와 배고플 우리들을 위해 간식을 준비해 주시고 저녁밥을 지으시던 어머니!
바쁘신 농사일 틈을 내어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술빵’을 만드시던 당신이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주신 이스트입니다.
홍 할아버지
“아유 할아버지 또 푸짐하게 싸 놓으셨네. 어쩐지 냄새가 나더라. 안 싼 척 해도 소용없어요. 바지 좀 벗길게요. 옷 갈아입어요”
나이 지긋한 간병사님의 말에 홍 할아버지는 바지를 옴팡지게 움켜쥐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십니다. 삼일 전부터 식사를 못하고 설사와 미열로 요양원에서 병원으로 오신 88세의 홍 할아버지는 40kg 남짓 가녀린 몸에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퀭한 눈에 산소 호흡기를 달고 가쁘게 숨을 내쉬는 것을 보니 저러다가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걱정 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며칠이 지나 열도 내리고 숨쉬기도 수월해지셨지만 할아버지는 입원하신 날부터 더러워진 옷을 절대 벗지 않으려 해서 간호사들의 애를 많이 먹이십니다. 남의 손을 빌어 옷을 벗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인지, 옷을 갈아입으면 이상한 곳으로 데려갈까 봐 두려우신 건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더러워진 환자복을 사수해야할 사명을 타고난 분처럼 행동하십니다.
똥냄새 오줌냄새가 진동해도 천연덕스럽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누워계시다가도 바지만 벗기려 하면 식사도 제대로 못하신 분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움켜진 손을 펴서 바지를 벗길 장사가 없습니다. 세 명 이상이 달려들어 이리저리 씨름해서야 겨우 할아버지의 똥 싼 환자복바지를 갈아입힙니다.
홍 할아버지와 한판 씨름을 하고 나서 둘 다 벌개진 얼굴로 씩씩 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픽 하니 헛웃음이 나옵니다. 다른 귀한 것도 아니고 똥 싼 바지가 뭐라고 보물단지 지키듯 저러실까 싶어서입니다.
여섯 명이 한방을 쓰는 103호 병실에서는 홍 할아버지만 손이 많이 가는 것은 아닙니다.
81세인 김 할아버지도 꼭 누가 먹여줘야 식사를 하고 소변도 소변통에 보시면 좋으련만 꼭 기저귀에다 싸버리십니다. 김 할아버지는 모든 일을 “못해, 해줘” 두 마디로 해결합니다. 노인들이 치매가 들면 다시 아기가 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세수부터, 식사, 대소변까지, 모두 침대에서 먹여주고 씻겨주고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하니 영락없는 한 돌도 안 된 아기입니다.
밤마다 엉뚱한 소리를 하며 병원 밖으로 나가려는 정할아버지까지 301호는 매일이 다사다난 합니다.
“의정부 가는 기차 몇 시 차야? 거기 데려다줘.”
“돈 여기 있어. 이거 받고 나 좀 집에 가게 해줘”
낮에 따님이 주고 간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손에 쥐어주며 당장 집에 가자고 성화입니다.
세 할아버지가 계신 이곳은 요양 재활 병동입니다.
홍 할아버지는 열이 나서 들어오셨고, 김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서, 그리고 정 할아버지는 다리를 다쳐 수술한 후 재활을 위해 병원에 들어오셨습니다. 아프기도 하지만 치매까지 있으신 분들이라 도와드릴 것이 참 많습니다.
재활이 끝날 때쯤이면 세 할아버지는 노인요양원으로 들어가실 것입니다. 세분 모두 할머니들은 돌아가시고 아들내외와 살다가 병약해 지셔서 병원에 들어오셨지만 이젠 자녀들이 모시기에 무리수가 많아 요양원에 모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런 할아버지들을 보고 있으니 시골에 계신 친정 부모님이 참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의지하면서 늙어가고 계시니 어느 한분을 요양원으로 모셔야 하나 집으로 모셔야 하나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시고 고지식하신 친정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늘 걱정이 많으십니다.
“나는 당신이 먼저 죽으면 양로원에 갈거야. 당신은 내가 먼저 죽으면 자식들하고 살 생각하지 말고 금방 나 따라 오슈. 누가 당신 비위를 맞출까나. 나나 하니까 당신하고 살지. 당신은 요양원에도 못 들어갈 사람이야” 하며 아버지께 진심을 이야기 하십니다.
술을 드시면 주사가 심하시고 남을 살갑게 대하지 못하시는 아버지를 선뜻 집으로 모시겠다고 이야기 할 형제가 없을 것을 어머니는 아시기 때문일 겁니다.
고약하신 아버지는 “너 죽으면 나는 다른 여자랑 결혼할거다. 아이구 좋아라”하고 호기 있게 말씀 하시지만 아버지는 어머니 없으면 비 맞은 닭처럼 가여워 지실텐데 아직도 아버지는 어머니께 살뜰히 대하지 못하십니다.
몇 해 전부터 형제들이 모이면 부모님 중 한분이 혼자되시면 어떻게 할까 조금씩 속내들을 털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경치 놓고 시설 좋은 양로원이나 요양원 같은 곳이 많다더라’
오고가는 이야기 속에 홍 할아버지, 김 할아버지, 정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들의 살아온 시간은 잊혀지고 똥 싼바지도 안 벗고, 혼자 숟가락질도 안하고 집에 간다고 종일 배회하는 할아버지들만 남아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옵니다.
친정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짜증내지 말고 웃는 낯으로 대하고 살아오신 날들을 하나라도 더 여쭤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생각해봅니다.
* 충남 당진 출생, 공주대 간호과 졸, 침례신학대학교 상담대학원 졸, 전 을지대병원 수간호사,
현 한가족재활병원 재직, ≪상상의 힘≫ 신인상 수상(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