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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
흑룡산
변 재 열
수통골
골짜기 따라
금수, 도덕, 옥녀
봉봉 모여
끼고 도는
산
흑룡산
골골마다 풀벌레소리
등성이엔 산새소리
바람 찾아 나선 나무들
골짜기마다 맨발로 서있다.
계곡물에 발목 담그고
휘파람 불고 있다.
푸른 하늘
푸른 하늘은
별들 세상
꽃이 없고
벌 나비가 없어도 좋다
F-22 랩터 스텔스가
날고 있는
푸른 하늘
태양이 있고 달이 있다.
보이저는
태양계를 벗어나
멀고 먼 헬리오시스
30년을 숨차게 달리고 있다.
거기서
또 무슨 별을 만날까?
지구에는
식지 않는 작은 언어
사람이
쉬지 않고
비행하고 있다.
솟대
권 예 자
어지러워요
높이 있다고 다 출세한건 아니지요
오리나 까마귀가 가졌던 날개도
내겐 없어요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할까요
동료는 존경할까요
사람들은 쉽게 말하지요
차별대우 정리해고 직장폐쇄에 반발한
배부른 크레인 철탑 농성이라고
이젠 수직의 등뼈도 휘어
버티기 어려워요
과거에 급제한 가문의 과시
하늘과 땅의 중계자로
장대 끝에 앉아있던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요
나 좀 내려가게 도와주세요
태풍이 불어오기 전에
제발,
이끼와 돌담
어깨가 기울어진
돌담의 빛깔은 파랗다
돌담은 퍼렇다
시퍼렇다
돌담에 사는 이끼는 파랗다
아니 퍼렇다
시퍼렇다
차가운 별이 지듯 네가 떠난 자리
전하지 못할 말들 차분차분 쌓인
저 돌담의 낯빛은
파랗다가 퍼렇다가 시퍼렇다가
푸르죽죽하다가
종래에는 검어지고야 말 것이다
얼마나 오래 저곳에 있었을까
돌담과 이끼가
서로 몸을 섞고 있다.
오일장에서
백 경 화
시골 오일장
새우등 닮아가는 어머니들
봉고차 타기 위해
등이 산처럼 솟아 뛴다
고단한 삶 등에 잔뜩 지고
뼈가 으서져도
내려놓을 줄 모르는
이 세상 어머니들
저 쭈글쭈글한 얼굴
저 굽은 등에서
박사, 변호사, 장관도 나온
위대한 산실이다
뜬금없이 가슴이 뭉클한 오후.
궁남지 출사 1.
얼굴이 홍당무 같은 홍연
피부가 깨끗하니 청순한 백연
온몸이 노란 황연
어리고 앳된 어리어연
물속에만 박혀 있는 수련
밤에만 살짝 드러내는 야한 연
빅토리아 왕관에 도도한 연
보면 볼수록 매력 덩어리인 연
속까지 꽉 찬 알토란 같은 연.
그 연이 그 연이지 싶다가도홀딱 빠져 겨우 겨우 돌아섰네.
궁남지 출사 2.
어제는 회포를 다 풀지 못한 아쉬움
빗길에 다시 찾아갔네.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은은한 듯
요염하게 당기던 미소는 어디 가고
벗겨진 옷자락
부러진 날개에 축 쳐진 어깨
푹 숙인 고개에 눈물범벅
그래도 사람들은 꼴깍 침을 삼키며
흐뭇한 미소로 더 바짝 다가선다.
날마다 이 연들 보러 다니다가
홀리고 미쳐
쫓겨나는 것은 아닌지..........
풀
박 헌 영
풀을 벤다.
풀내음 향긋하다.
짐승은 다쳐 피비린내 나고
풀은 다쳐 향이 난다.
상처에서
목숨에서
향을 내
낫질하는 손목을 감싸 안는
풀이다.
향기다.
재두루미
때 묻은 날개가 아니면
하늘을 날아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대마도 연가
김 근 수
남해 섬 언덕 너머
서성이는 첫 눈들
그리고 고요히 다가서는 당신
향긋한 마음 눈꽃으로 피어나
내 몸 구석구석으로 스미던 당신
눈 녹고
성정으로 남아
마주하고 있는 그대의 풍정
이를
어찌 씻을까.
그리움
원고지에
어리는 당신의 얼굴
채운다는 것이
한 줄기 꿈일까
묶어도 묶어도
버릴 수 없는 언어들
슬프게 기다리는 여백들
아마도, 그리움일까.
남자는 남자
김 택 중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오늘 가셔야겠다는 것이다. 어제 모시고 갔다 왔는데 오늘 또 가신다고요. 팔순이 넘으신 분들이 무슨 젊은 애들도 아니고 했지만 나름 이유가 있다.
어제 아버지에게 갔었는데 병실을 나올 때 아버지가 무슨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귀를 기울이며 들어봤는데 그것을 잘못 들어서 확인하러 가야겠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말로 잘한다고 한 간병인이 혹시 쥐박고 꼬집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음모라도 꾸며서 몇 푼 안 되는 재산을 떨어 먹는 것은 아닌지, 팔십을 먹은 노인네도 남자는 남자라면서 어머니의 걱정은 미어진다.
애초에 어머니가 간병을 하겠다는 것을 두 분이 나란히 입원하려고 그러느냐고 말린 것이 문제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 못하고 아들인 나에게만 한다고 하면서 궁금해서 가봐야 한다고 하니 모시고 갈 수 밖에 없다.
병실에 도착해서 간병인에게 피곤할 텐데 좀 쉬었다 오라고 이렀다.
어디 불편하냐는 둥 먹는 것은 잘 먹느냐 폐가 안 좋으니 가래침을 뱉어야한다는 둥 잔소리를 하고 나서 나는 슬그머니 병실을 나왔다.
두 분만의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 자리를 피해 휴게실에 있는 간병인에게 갔다. 어제도 물어본 이야기지만 식사와 대소변에 대해 물어보니 여전히 친절하다.
확인 후 병실에 다시 들어가서 직접 아버지 간병인 어때요. 음 잘해 아주 잘해 하고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퇴원 후 우리 집으로 가자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하신다. 아버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어머니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밭으로 나가신다. 둘러보니 묘목 밭에 낫으로 풀을 치며 땀을 흘리고 계신다. 내일도 병원에 가실 것 같다.
촌놈의 하루
장마가 유난히 긴데 틈틈이 햇볕이 든다. 아침인데 새소리가 크다. 아침을 먹으러 산에서 내려 온 것이 분명하다.
새들의 먹이를 잘도 키워놨기 때문에 촉각을 세워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어치와 콩새가 먹는 양도 제법이거니와 쪼아 놓기만 해도 그것으로 복숭아나 배는 끝장난다.
대충 옷을 집어 들어 입고 나가보니 쌍쌍이 좋아라. 난리가 났다. 몇 그루되지 않지만 초크베리 열매가 단 맛이 밴 모양이다. 놈들이 날다가 덮치고 뒹굴고 쪼으고 콩알만한 열매가 놈들이 먹기에 딱 좋은 크기다.
새벽부터 소리를 칠 수는 없고 돌로 팔매를 치려하니 돌이 없다. 담배를 태우려고 가져온 라이터로 쇠 난간을 치니 그제서야 감나무 위로 날아오른다. 요놈들이 멀리가지도 안고 바로 근처에서 또 좋다고 지랄 지랄 거린다.
얼마나 먹었나. 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이라 풀이 젖어서 발목아지가 칙칙하게 벌써 져졌다. 바닥에 떨어진 열매를 보니 올해 첫 시식은 요놈들이 먼저 한 것이다. 열매가 검은 것도 있지만 아직 채 익지 않아서 주홍색을 띠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어떻게 지켜야 할까.
우선 익은 것부터 땄다.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하게 익을 텐데 이 우주에는 완전한 것은 없는 모양이다.
새 순 돋다
김 남 규
4월 가로수를 보아라 뭉턱뭉턱 잘려나가 서 있는 저기 어디서 목숨줄 하나 찾을 수 있더냐 어디 제 몸 하나나 건사할 듯 싶더냐 하지만 보아라 지금 저 몸뚱이에도 바람 일어푸른 새순 하나 돋아나고 있나니 거칠기로 한다면이야 우리 삶이 저 가로수만 못하랴 어디 뼈 시림 없는 기쁨 있을 수 있으랴
그러니 보아라 겨우내 어두운 땅속 뿌리 내리고거친 수맥질 계속하더니 마침내 새순 피워내나니 다시 무성할 여름 꿈꾸나니 우리 또한그렇게 눈 나고 푸르러져야 하나니
깜짝 놀라다
무심코 앞차를 따랐다가
사거리 교차로에서
갇히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순간
이렇게 살아 왔던가
한눈팔다 몰리고
머뭇거리다 묶인 적
또 얼마였던가
멍하니
점멸등으로 바뀐 신호등
바라보다가
오후로 넘어가는 햇살에
찔려
깜짝 놀라다.
부전여전
발톱을 깎던 딸애가 투정을 한다.
살을 파고드는 어지발톱이며
겨우 행색만 유지하는 새끼발톱
전체적으로 뭉툭한 발등에 이르기까지
생김새가 영락없는 내 것이다.
그것이 불만인 모양이지만
나는 번지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다.
그러다가 잠시
한 30년 후쯤
저애 발도 내 발처럼
검어지고 얄팍해지고
거칠게 핏줄 선 발등으로
변하리란 생각에
아득해짐을 느꼈다.
닮은 걸 안 닮았다고 할 수 없고
가야할 길 또한 별다를 수 없겠지만,
그때는
딸애의 투정
듣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
내내 꼬리를 물고 있다.
뜬 모 작업
누가
이처럼 꾹꾹 눌러준다면
나도
뿌리 내릴 수 있을까?
마사지
아버지에게서는
안티프라민 냄새가 떠나질 않았다.
하루의 노동이 끝나고
돌아와 누운 눅눅한 방
내내 끙끙 앓다가 뒤척이다가
어머니 재촉하여 바르던
그 싸하고 아리던 냄새
어쩌다 한번
어깨를 주무르거나 허리를 밟을라치면
훅 다가와 눈물나게 하던 앙칼졌던 냄새
징그럽도록 싫었는데
오늘은 내가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와
아로마 오일을 뒤집어쓰고
마사지를 받고 있다.
서서히 풀어지는 세상
향기로움은 넘쳐나는데
그 끝에 불현 듯
무덤에서나 편안할 아버지의 근육과 뼈
그것으로 버텨온 생이 떠올랐다.
순간,
일어나는 경련
마사지사 깜짝 놀라
‘아파요’라고 묻고
나는 ‘응’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 시집『하지만, 그래도』에서
산행
강 인 구
가쁜 숨 골라 쉬며
가까스로 오른 산언덕
푸른 숲속 지나
파란하늘 펼쳐지는 산 고새
이어폰에서는 울부짖는 듯한
마지아(Magia)의 애절한 소리
젊은 시절엔 트로메라이(Traumerei)의
낭만적인 선율에 푹 빠졌었는데
“내 생애 단 한 번만이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오
내 생애 단 한 번만이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오“
오르락내리락 하다
드디어 오른 정상
새롭게 펼쳐지는 녹색 세상
가슴이 뻥 뚫리듯 시원하다
아! 나의 봄
마지아를 멋지게 연주하는 날
3월의 봄
봄은 멀리서부터
가늘게 온다고 했지
우수 땐 살얼음 밑에서
살짝 노래 부르곤 했어
경칩 땐
비오는 소리에 놀라
겨울잠에서 깼지
창문을 여니 앞집 목련이
하얗게 부풀은 가슴을 보이고 있네
아! 깜짝이야
담장 밑엔 벌써
노란 민들레꽃이 활짝 웃고 있어
별꽃 재스민
오, 멀리, 높이, 있는 것
‘별을 만들어야지, 별이 되어야지’
지금껏 우리는
별이 되는 꿈을 꾸고 살았다
애지중지 길러온 별꽃 덩굴나무,
싱그럽고 반짝이는 잎은
사자별자리의 영웅 헤라클레스처럼
젊은 청년의 당찬 모습이다.
흰 소복을 입은 꽃송이들은
큰 곰 별자리 칼리스토 공주처럼
하얀 별꽃 세계를 만들었다.
깊은 꿈에 어리어
온 세계를 안고 있는 별꽃
그윽한 향기를 연신 내 뿜는다.
몹시 깊고도 감미로운 향기에 취해
나직이 읊조린다.
“팔만대장 부처님께 비나이다. 나와 임을 다시 보게 하오소서”
웅천역(驛雄川)에서
산 돌고 내를 건너
첫 발령 받아 내리게 된 웅천역
선생님이 된다는 기쁨 반, 모든 것이 새로운 설렘 반
헐렁한 신사복이 어색했지만
은진미륵같이 의젓해 보이도록 깜냥 애썼지.
새내기 길손은
늙은 할아버지에게 용담의 전설을 들으며
은어가 산다는 웅천의 내를 바지를 걷어 올린 채 건넜지.
고향집을 왕래할 때면
거쳐야만 되는 웅천역과 돌 징검다리
방학 때면 고향에 찾아오던 서울 소녀도 이곳을 거쳐 갔었지.
시골에 갇혀있던 나는 호수에 찾아온 백조 같은 그와
학교 뒷산에 만발한 하얀 찔레꽃 향기를 즐겼지.
방학이 끝날 무렵 소녀를 실은 서울행 장항선 기차는
기적소리를 남기며 떠나고
돌아서는 내 마음은 서운함과 허전함으로 고동을 쳤지.
어느덧 나이든 망부석이 된 나는
찔레꽃 향기 그윽한 산속을 달려
이슬비 같은 하얀 꽃들을 만나곤 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솔베지의 노래(Solvejgs Lied)
대합실 밖 벤치에 몸을 실은 채
노천리 강둑 황금빛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는 돌 하나 있다.
그 역
김창유
오늘도 시그널 음악이 빗속에 아롱지고
작은 사랑의 편린들이 퍼즐을 이어갑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고……”
낮 익은 목소리가 플랫폼을 적시고 있습니다.
손에 쥐어준 차표가 <여원> 잡지의 갈피에 매달려 있었지요.
아직 안아보지도 못한 가슴 잿불로 남아
바람 불 때마다 지펴 오르기를 수 십 년
세월을 뒤돌려 내게 돌아온 그녀는
몇 해 전, 먼 나라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푸른 제복의 시절
당신이 보내 준 핑크빛 글씨들은 내무반을 돌고 돌아
나는 동기들의 성화에 못 이겨 PX에서 한 턱을 내야 했지요.
갈급한 애정으로 흠뻑 취했던 당신과의 사랑.
처음으로 ‘당신’이라고 쓴 편지는
지금도 내 방 어느 구석에 살아 있겠지요.
목포의 눈물이 역사를 울리면
아린 가슴으로 옷깃을 여미고
당신을 살포시 포옹해 봅니다.
기다리는 마음
지금쯤 카자흐스탄 창공을 날아오겠지
물 빛, 잿빛, 주황빛 하늘을 이고
어쩌면 벅찬 바람과 정경을 가슴에 담고
구름 위를 둥둥 떠 달려오겠지
아니 마음은 벌써 이곳에 와 있을거다
끼니 세끼는 어렵지 않다
빈자리가 힘든 것이지……
불던 플루트에서 보이지 않는 소리가 들리고
여기 저기 화장품에선 당신의 체취가 피어나고
서로 떨어져 있음으로
사랑의 촉수는 더 따뜻했다.
오랜만에 찰진 밥해놓고
옷도 정갈하게 준비해 놓을게
성하디 성한 몸으로
기쁨을 듬뿍 안고
환하게 돌아와 주길……
내 사랑하는 아내여
마중 나갈께
당신이 좋아하는 바바리코트 입고.
나무처럼
조 영 숙
나무는 스스로 제 한 가지 죽이고
새 가지를 뻗을 줄 안다
나무는 스스로 제가 맺은 열매를 떨고
남은 열매를 키울 줄 안다
나무는 환경이 어려울수록
줄기는 해를 향해
뿌리는 물을 찾아
생명을 살릴 줄 안다
나무처럼
나를 죽이고
내가 살아날 수 있기를
나무처럼
사소한 열매 버릴 줄 알아
달린 열매 풍성하기를
자갈밭일지라도
해를 찾아 물을 찾아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하리
나무처럼
나이테
나이테는 나무의 자서전
살아 있을 때 씌어 지지만
죽은 후에 읽혀진다.
가뭄, 홍수, 산불, 벼락, 병충해
견디기 힘들었던 상흔이
나이테 속에 담겨 있다.
글로 쓰지 못한 사람의 자서전
우리 몸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을거야
가난, 질병, 고난, 상한 감정
기억 속에 은밀히 감춰진 상처
폐결핵을 앓고 난 후 치료 받은 것을
엑스레이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아픔이 치유된 흔적
우리 몸 어딘가에 있을 거야 나이테처럼
나이테는 나무의 자서전
얼굴은 사람의 나이테
살아가면서 기록되고, 살아가면서 읽혀진다.
단속 현수막
엑스포코아 앞 사거리에
‘노점상 특별 단속구역’
’불법차량 집중 단속’
현수막이 두 개나 걸려 있다.
바로 아래 차량에 과일을 싣고
버젓이 판매를 하는 과일 장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어서인가.
그곳을 지나는 차량과 사람이 얼마인데
단속 현수막은 ‘우리나라는 불법을 해도
아무렇지 않은 좋은 나라‘ 광고판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