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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지 않겠니 아무도 가지않는 겨울바다로
함께있지 않겠니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속에
파도소리 바람소리 노을빛 타는소리
꿈을 찾아 맴돌다간 발자국들이
뜨겁던 그날의 사랑을 아프게 하리
거기 오면 만나리 찬바람 모래밭에
외로운 바다 언제든지 와주게
그리운 내 사람아 겨울 바다로
-배종옥 나레이션-
같이 가지 않겠니 아무도 가지않는 겨울바다로
함께 있지 않겠니 하얗게 하얗게 부서진 물거품속에
파도소리 바람소리 노을빛 타는소리
꿈을 찾아 맴돌다간 발자국들이
뜨겁던 그날의 사랑을 아프게 하리
거기 오면 만나리 찬바람 모래밭에
외로운 바다 언제든지 와주게
그리운 내 사람아 겨울 바다로
그대 그리고 나-나훈아
그 여름의 장마-김명숙 시인
어제 내린 장맛비로
숲은 말끔하고
속속들이 젖어있다
여름숲은 아프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계곡의 바위를 핧고 흐르는 물
소리에 기대어 몸을 씻는다
길이 상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위의
바람이 불어와 발끝까지
저리고 얼룩진 몸을 포갠다
층층나무꽃이 싸락눈처럼 내린다
물은 물을 만나면 반갑고 힘이 생긴다
산길을 흐르던 물이 출렁이며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길을 간다
그것이 자연의 눈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
꿀풀도 망초꽃도 까치수염도
끼리끼리 어울려 반갑고
신명나던 날을 안다
순간 멧새 한 마리 날아간다
아직 찍지 않은 점 하나
내 안에 살아있다
책갈피속의 잠-김명숙 시집 -p71-
제1부
총 설
한말 영·호남 지역 의병 전쟁과 의병장
1. 영남 지역의 의병전쟁
2. 호남 지역의 의병전쟁
3. 영·호남 의병의 특성과 의의
20
에 주둔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3월 26일에 제1차 공격을 하였고, 29일(음력
2) 중·후기 의병
① 산남의진
산남의진은 을사늑약(乙巳勒約)에 항거하여 경북 영천·영덕·청송·포항 등 경북
남동부 지역에서 활동한 영남 지역 대표적인 의진이다. 산남의진은 중추원 의관으로 고종을
보필하던 정환직의 지시에 따라 그의 아들인 정용기(鄭鏞基, 1862~1907)는 이한구·정순기 등
과 함께 거의하였다. 정환직은 고종으로부터 밀명을 받고 의병 봉기에 착수한 것으로 알
려진다.
정용기는 통문과 격문을 돌려 의병을 소모하였다. 통문에는 일제의 침략으로 5백년 ‘문명
국’이 없어지고 2천만 ‘생령(生靈)’이 멸절될 위기에 닥쳤다면서 ‘국세를 만회’하고 백성을 구
하고자 의병을 일으켰음을 밝혔다.26)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의진을 편성하고 정용기가 의
병장에 추대되었다. 이때 편성된 지휘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27)
<산남의진 편제> 1
(1906. 3. 현재)
의병장 : 정용기 선봉장 : 홍구섭 좌익장 : 정치우
중군장 : 이한구 후봉장 : 서종락 우익장 : 장래의
참모장 : 손영각 좌영장 : 이경구 좌포장 : 이세기
소모장 : 정순기 우영장 : 김태언 우포장 : 정완성
도총장 : 이종곤 연습장: 이규필 장영집사 : 최기보
도 포장 : 백남신 군문집사 : 이두규
산남의진의 규모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많을 때는 1,000여 명에 달했다. 산남의진은 결성
직후 신돌석 의병의 패전 소식을 듣고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청하읍으로 행군하였다. 그러
나 4월 28일에 경주에서 경주진위대장 참령 신석호의 간계에 속아 체포되어 대구 경무청에
압송되었다. 산남의진은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도 전에 대장이 체포되고 만 것이다. 산남의
26)
27)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948~949쪽.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351~353쪽.
진은 중군장 이한구 체제로 항일전을 펼쳤다. 6월 1일에는 영덕의 강구항을 공격하여 일본인
어부를 처단하였다. 그러나 1906년 6월경부터 일본군 수비대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산남의진은 정용기 의병장이 석방된 후에 재기할 것을 기약하며 1906년 7월 하순 활동을 일
시 중지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정용기는 1906년 9월에 부친 정환직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정환직은 이때부터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영천으로 내려가 정용기와 이한구, 정순기 등을 만나 이듬해 5월까지 의병
을 조직하여 강릉으로 북상하여 서울로 입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정환직은 강릉에 본진을 설
치하고 무기와 군량 준비에 진력하였다. 정용기는 옥고 중에 얻은 병을 치료한 후 1906년 4
월에 산남의진을 재기하였다. 이때 조직한 의진의 지휘부 편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28)
<산남의진 편제> 2
(1906. 4. 현재)
의병장 : 정용기 좌영장 : 권규섭 좌포장 : 장대익
중군장 : 이한구 우영장 : 이규필 우포장 : 김일언
참모장 : 손영각 연습장 : 조선유·우재룡 유격장 : 임중호
소모장 : 정순기 도포장 : 백남신 척후장 : 정성욱
도총장 : 박태종 좌익장 : 정래의 장영서장 : 김진영
선봉장 : 홍구섭 우익장 : 김성일 군문집사 : 이두규
후봉장 : 이세기 점 군 검찰 : 안수원
정용기는 의병을 재기한 후 고종에게 창의의 정당성을 밝히는 상소를 올리고 격문을 발표
하여 의병 참여와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중기의병기인 1907년 9월 이
후부터 시작되었다. 산남의진은 9월 27일(음력 8.20) 무렵에 포항을 점령하였다. 그 후 영
천으로 들어가 일본 상인 야마우치(山內銀三郞)를 사살하였다. 이어서 정환직의 지시에 의
해 의병을 모집하면서 군복을 준비하는 등 북상을 준비하였다. 정용기는 북상을 위하여 의
진 100여 명을 이끌고 경주 매현리(현, 포항시 죽장면)에 유진하였다. 1907년 10월 6일(음력
8.29)의 일이었다. 새벽 4시경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정
28) 『산남창의지』 하, 42쪽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용기는 일본군이 입암에 유숙할 것을 예측하고 의병대를 매복시켰다. 그런데 매복해 있던 이
세기부대가 성급하게 공격함으로 일본군 영천 수비대의 역습을 받았다. 이 입암 전투에서 대
장 정용기와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수십 명이 전사하였다. 입암
전투의 참패로 의진은 무너지고 활동은 중단되었다.
정환직은 1907년 10월에 아들의 뒤를 이어 의병장에 올라 의진을 재기하였다. 정환직은
영일의 북동대산으로 의진의 근거지를 옮긴 뒤 새로이 다음의 의진을 짰다.
<산남의진 편제> 3 29)
(1907. 10. 현재)
의병장 : 정환직 선봉장 : 우재룡 연습장 : 김성일
참모장 : 정순기 후봉장 : 박광 도 포 장 : 고찬
중군장 : 이순기 좌영장 : 이규필 좌포장 : 김성극
도총장 : 구한서 우영장 : 김치현 우포장 : 이규환
소모장 : 김태환 좌익장 : 정래의 장영집사 : 이규상
우 익장 : 백남신 군 문집사 : 정성우
산남의진은 1907년 10월 20일(음력 9.3)에 청하분파소를 습격하여 순검 1명을 사살하고
분파소를 소각하였다. 이후 청송의 보현산 일대와 영일의 동대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항일
투쟁을 펼쳤다. 1907년 11월 26일(음력 10.11)에 흥해를 공격하여 순검을 사살하고 가옥과
건물을 소각하였다. 그 후 영덕으로 이동하던 중 12월 17일(음력 11.2) 새벽에 유암에서 일본
군의 기습을 받아 영장 남경숙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의진은 무기와 탄약의 결핍으
로 전력이 약화되어 갔다. 정환직은 북상을 위하여 의진을 해산하고 휘하 의병들에게 개별적
으로 관동에 집결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북상을 하던 도중 청하의 각전에서 잠시 병을 치
료하던 중이던 1908년 1월 14일(음력 12.11)에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영천의 남교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산남의진의 정순기 등 의병들은 정환직의 후임으로 1908년 3월 18일(음력 2.5)에 최세윤
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최세윤은 북상을 중단하고 경상도 일대에서 지구전을 펴기로 결
29) 『산남창의지』 하, 42쪽.
정하고 진용을 다음과 같이 새로이 편성하였다.
<산남의진 편제> 4 30)
(1908. 3. 18 현재)
의병장 : 최세윤 도포장 : 이종곤 군문집사 : 허서기
중군장 : 권대진 후봉장 : 최치환 유격장 : 이세기(보산현)·
참모장 : 정래의 좌포장 : 최기보 우 재 룡(팔공산)·
소모장 : 박완식 우포장 : 이규필 서 종 락(주왕산)·
선봉장 : 백남신 연습장 : 김성일 남 석 구(철령)·
장 영집사 : 이규상 임 중호(주사산)
최세윤은 본진을 남동대산에 두고, 부대를 소규모로 분산시켜서 보현산과 팔공산·주왕
산·철령·주사산 등지에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때
로는 연합 전선을 형성하면서 일제 군경에 항쟁하였다. 그러나 최세윤도 1908년 8월에 장기
용동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어서 이세기를 비롯하여 서종락과 김사곡 등이 전사 또는 체포
되면서 산남의진은 구심력을 잃고 와해되고 말았다. 잔여 의병들이 유격전으로 항쟁을 계속
하였으나 1910년의 고와실 전투를 마지막으로 산남의진은 해체되었다.31)
산남의진은 3대 의병장으로 계승하면서 경북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하
였다. 초기에는 유생 중심이라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차츰 무장투쟁 세력으로 전
환하여 일제 군경에 큰 손실을 주는 등 투쟁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또한 의진이 해체된
뒤에도 생존 의병들은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성극·이규환·홍구
섭·남정철·남규철·김남준 등은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② 영릉의병
영릉의병은 신돌석이 1906년 4월 6일(음력 3.13)에 영덕에서 일으킨 의진을 말한다. 신돌
30)
31)
배용일, 「최세윤의병장고」, 『사총』 31, 1987, 60쪽.
권영배, 「산남의진의 조직과 활동」, 『역사교육논총』 16, 1991, 171~174쪽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석은 영해 출신으로 전기 의병기에도 김하락 의진의 영덕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신돌석은 고향인 영해의 복평(현, 영덕군 축산면 부곡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진의 이름
을 ‘영릉진’이라 하고 자신이 의병장이 되었다. 그의 휘하에는 중군장·선봉장·좌익장·우
익장·포대장·소모장·참모장 등의 편제를 두었다. 박수찬을 비롯하여 이창영·한영육·
이하현·신태종·백남수·김치헌 등이 중요 직책을 맡아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신돌석은 거의 직후 군사 소모와 자금 모집에 힘썼다. 그 결과 1906년 4월부터 5월 초에
걸쳐 1,656냥을 확보하였다. 영릉의병은 4월 30일에 영양읍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
기도 하였다. 1906년 5월 14일자 『황성신문』에 따르면 총 22자루와 다수의 탄환, 그리고 화
승총 35자루와 화약 등을 확보하였다.32)
영릉의병은 울진의 일본인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일제는 울진을 어업 침략의 교두
보로 삼았으니, 이미 1890년대 후반부터 일본인 어부와 수산업자들이 잠수기 어선을 동원하
여 해산물을 쓸어갔다. 한인 어부들은 이와 같은 일제의 어업 침탈에 분개하고 있었다. 신돌
석 의병은 여러 차례 울진 지역으로 들어가 일본인 가옥을 파괴하고 일본인을 처단하였으며,
자금을 탈취하는 등 일제의 어업 침탈 세력을 응징하였다.
1906년 5월 8일에 울진에 도착한 영릉의병은 일본인을 사살하고 그들이 살던 가옥을 파괴
하였다. 그해 6월 상순에 울진 관아를 재차 공격하였다. 1906년 6월 하순에는 영해읍을 공격,
점령하고 영해군수의 죄상을 성토하였다. 7월에는 영덕으로 들어가 관아를 공격하였다. 군
수를 체포하여 단죄하고 건물을 파괴하였으며 무기와 군수 물자를 확보하였다. 1907년 1월
에는 울진에 다시 들어가 군수 윤우영을 포박하고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우편물을 압수하
여 소각했다. 1907년 9월에는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장호동에서 전복잡이를 하던 일본인을
습격하여 사살하고 노획품을 확보하기도 하였다.33)
한편 일본군 수비대는 영릉의병에 대한 대탄압 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의 작전은 혹한기인
1907년 11월부터 펼쳐졌다. 일본군 제14연대에서는 제1대대장 아카시의 지휘아래 일월산을
중심으로 영릉의병의 활동지에 대한 ‘토벌’ 작전을 감행했다. 영릉의병은 태백산맥의 오지
로 이진하면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하반기 이후 일본군의 공격이
32)
33)
김희곤, 「신돌석의진의 활동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9, 2001.
김희곤, 앞의 논문.
강화되면서 의진의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의진의 규모와 범위도 축소되었다. 더욱이
일본군의 ‘귀순법’이 발표됨에 따라 귀순하는 의병이 생겨났다. 신돌석 의병장의 활동도 위
축되었으며, 그에 따라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1908년 12월 12
일에 이동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김상렬 형제에 의해 타살되
고 말았다. 그 결과 영릉의병의 만주 이동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3) 의병장의 활동
① 전기 의병기 의병장
권세연(1836~1899)은 경북 봉화(奉化)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성대(星臺)이다.
안동에서 살았으며,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1895년의 민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유지호(柳止浩)·김흥락(金興洛) 등 안동 지역의 유림들은 의병을 일으켜 음력으로 12월 초
3일에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권세연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권세연은 격문을 각지에 보
내어 각지의 의병 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민심을 크게 격려, 고무시켰다. 이 격문에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자에 대한 증오심이 설득력 있게 표현되
어, 의병 규합에 큰 몫을 하였다. 그러나 1월 28일에 안동으로부터 도망쳤던 관찰사 김석중
(金奭中)이 많은 관군을 끌고 공격하여 의병들이 패배하였다. 그 후 권세연은 주변의 의진들
과 연합하여 반격을 준비하던 중 이강년 의진이 김석중을 붙잡아 처형하자 의병장에서 물러
났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도화(1825~1912)는 안동 출신의 유학자이다. 그는 1895년의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김흥
락(金興洛) 등과 함께 거의하여 1896년 1월에 안동부를 점령하고 권세연을 창의대장에 추대
하였다. 안동의병은 도주했던 관찰사 김석중이 관군을 이끌고 다시 안동부를 점령하자 사방
으로 흩어졌다. 안동에서 흩어진 의진의 중심 인물들은 다시 각처에서 병력을 수습하고 점차
전력을 회복하여 2월 중순경부터 다시 안동부에 집결하였다. 의병들은 권세연의 후임으로
김도화를 의병 대장에 추대하였다. 안동의병은 일본의 편에 섰다고 인정되는 예천군수 유인
형·의성군수 이관영·영덕군수 정재관 등을 참형에 처하였다. 이어서 인근의 의진들이 군
사적으로 연합하여 상주(尙州)에 있는 적의 병참(兵站)을 공격하였다. 3월 그믐에 함창 태봉
에 주둔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3월 26일에 제1차 공격을 하였고, 29일(음력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2.16)에 연합 의진의 의병들이 모두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태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4월 2일에 적군 50여 명이 안동부로 들어가 시가
에 불을 질렀다. 이때 안동읍 1,000여 호의 민가가 불탔다. 태봉 전투에서 실패한 후 안동부
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의병장들은 다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이
때 안동의진은 대장 김도화를 중심으로 하여 부장 유난영·도총 김하휴·선봉장 유시연·소
모장 이충언 등이 병력을 보충하여 안동읍을 중심으로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후 그는 고령
(高齡)으로 직접 활동은 못하였으나 상소를 올리는 등 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
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응규(1861~1907)는 경남 안의 출신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광주(光州)로 경남 안의에서
노이선(盧以善)의 2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학 공부에 힘썼다. 당시 영남 유림의 권
위로 알려진 성재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면암 최익현을 찾아 사사하고,
연재 송병선, 입재 송근수에게도 나아가 학문을 연마하고, 국가사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
때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어 단발령을 내렸다. 이에 대항하여 1895년 10월에 임최
수·이도철·김재풍 등이 친일정부의 대신들을 처단하려는 사건이 있었다. 노응규도 그들
과 약속하고 12일 새벽을 기하여 경복궁의 건춘문을 열고 들어가서 궁중 수정전에 머물던 대
신들을 죽일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친위대의 공격으로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1896
년 1월 7일에 노응규는 승려 서재기 등과 안의에서 거의하였다. 이들 진주의병은 진주성으로
들어가 관리들을 살해하였다. 의병장 노응규는 국왕에게 창의소를 올려서, 창의의 불가피함
을 강조하고 앞으로 국왕을 위해 몸 바칠 결의를 피력하였다. 또한 사방에 격문을 돌려 민중
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하였다. 진주 일대를 장악한 진주의병은 3월 28일에 일제의 침략
교두보인 부산항을 공략하기 위해 의병 부대의 별군을 진주에서 김해로 이동시켰다. 이때 수
천 명의 김해 민중들이 적극 호응하였지만, 일본군측은 정보를 수집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
고 있었다. 의병부대를 먼저 공격해 온 일본군과 4월 11~12일(양력) 양일간에 걸쳐 김해 평
야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많은 손해를 입혔으나 부산항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이 때
정한용이 관군과 결탁하여 노응규를 배반함으로써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또한 아버지
와 형 응교(應交)가 살해되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1897년 10월에 상경하여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를 올리고, 1902년에 동궁시종(東宮侍
리고 1906년 6월에 최익현 부하로 들어가 활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순창 일대에서 거의
수일 만에 최익현 등 12인이 자진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되는 바람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는
충청북도 황간으로 들어가 서은구·엄해윤·노공일 등과 의병을 봉기하였다. 1906년 가을
에 매곡면 일대를 사병 훈련소로 삼아 인근의 이장춘·문태수 의진의 의병들과 함께 합동 훈
련도 실시하였다. 경부철도 파괴, 열차 전복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한성경
무서 감옥에서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옥사하였다. 1977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② 중·후기 의병기 의병장
1906년 이후 영남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는 신돌석과 정환직, 유시연 등 대표적이
다. 그러나 신돌석은 상금에 눈이 먼 지역민들에게 살해당했으며, 정환직은 체포되어 재판
도 없이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영천에서 살해되었다. 안동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체
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한 유시연도 있다. 이들의 활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신돌석(申乭石, 1878~1908)은 경북 영해군 남면 복평리에서 신석주(申錫柱)의 아들로 출
생하였다. 본은 평산으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예이지만, 영해(寧海)에서 그
의 문중은 서리(胥吏) 즉 중인 집안이었다. 그는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평해(平海)에서 기병한 것으로 알려진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신돌석은
1906년 3월 13일(음력)에 아우 우경(友慶)과 함께 영덕(盈德) 복평리(福坪里) 축산(丑山)에서
기병하였다. 그는 대장기를 세우고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 되었다. 신돌석은 먼저 군율
을 정하여 군사들의 기강을 엄숙히 한 다음, 이웃 고을인 진보의 이하현(李夏鉉), 영덕의 정
용기(鄭鏞基) 그리고 이한구(李韓久) 등의 의진과도 연락하여 유기적인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는 영해읍을 거쳐 평해읍, 울진읍을 행군하며 병력을 점차 증강시켜 갔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태백산맥의 산악 지대를 이용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고, 혹은 해안선을 따라 활동
하였다. 1906년 11월 이후에는 일월산 일대에서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7년 봄에 중
군장인 백남수(白南壽)와 김치헌(金致憲) 등과 함께 영덕 일대 지방민들의 협력을 얻어 가면
서 진용을 보강하고, 친일파들을 처단하여 의진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높아갔다. 같은 해 9
월 15일에는 영양의 주곡에서 일본군 1중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어서 경주의 동북 대산성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이르러 일본군과 수일 간 격전하였다. 10월에 영해로 들어가 경무서를 격파하고 일경을 추
방한 후 수동으로 들어가 군량을 모으고 군졸들을 휴식시켰다. 이때 이인영(李麟榮)의 의진
을 중심으로 연합 의진이 형성되어 갔으며,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양주에서 합진하자는 이
인영의 격문이 신돌석에게 전달되었다. 신돌석은 대오를 정비하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양주로 향하였다. 이때 신돌석은 교남의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박정빈으로 교체되었다.
1908년 정월에 신돌석은 의진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평해로 들어가 독곡의
일본군을 섬멸시키고 2월에 영양읍에 주둔하였다. 1908년 여름에는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7
월에 의병 활동을 재개하여 평해 한곡에서, 9월에는 영해 희암에서 적과 격전을 벌였다. 10
월에 의진을 거느리고 안동 재산면을 거쳐 영양 금정여점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과 맞부딪쳤
으나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11월에 엄동을 맞이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지 못
하게 되자, 다음해 봄에 재개할 것을 기약하고 일단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의병을
해산한 후, 가족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영덕 눌곡(訥谷)에 이르렀을
때 길에서 우연히 옛 부하였던 김상렬(金相列)을 만났다. 그의 간청으로 그의 집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날 밤 김상렬 형제의 음모에 빠져 독주를 마셨다. 신돌석이 쓰러지자 김상렬의 3
형제가 합세하여 도끼로 쳤다. 1908년 11월 18일의 일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
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34)
정환직(鄭煥直, 1843~1907.11.16)은 경북 영천(永川) 출신이다.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
은 치우(致右),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엄(東嚴)이다. 용모가 준수하고 재기가 과인하여 이
미 12살 때 지방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887년에 북부도사(北府都事)에 제
수되었다가 이듬해인 1888년에 의금부의 금부도사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에 동학농민운
동이 발발하자 그 해 겨울 토포사를 제수 받고 황해도의 구월산에 모여 있던 동학군을 권유
하여 평정한 뒤 이듬해 봄에 상경하여 그 공로가 인정됨에 태의원 시종관의 직을 제수받았다.
1900년에 도찰사에 임명되었다. 1906년에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
강릉으로 북상하도록 명하였다. 자신은 서울로 올라가 관직을 물러난 동지들과 협력하여 흩
어진 병사들을 모아 오대산으로 보내서 의진에 합세하게 한 후 일제의 감시 하에 있던 황제
를 모시고 탈출한 후 재차 서울로 진공하여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아들
34)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68~72쪽 ;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푸른역사, 2001
이 이끄는 의병진의 북상 계획이 늦어지므로 1907년 9월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해
10월 7일에 아들 용기가 입암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맞아 격렬히 싸우다 일본군에게 피
격되어 전사하니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진을 이끌게 되었다. 그리하여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고 진영을 정비하여 4개 소대로 재편성하였다. 제1소장에 조재술(曺在述), 제2소장에
남경숙(南敬叔), 제3소장에 안흥천(安興千), 제4소장에 김경문(金敬文)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 해 10월 29일 제1소장 조재술에게 의병 80여 명을 이끌고 흥해를 습격케 하여 우편국 분
파소 등을 불태우고 취급소장 등 3명을 사살하였다. 11월에는 신녕을 기습하여 분파소에 보
관된 총기 60여 점을 탈취하였다. 또한 의흥을 습격하여 분파소를 방화하고 총기 49정을 탈
취하기도 하였다. 그 해 11월 8일에는 청송군 유전(楡田)에서 청송 일본군 사카이(酒井)가 이
끄는 부대와 접전하던 중 조재술이 관통상을 입었다. 16일에 흥해군 신광(神光)에서 정완생
(鄭完生)을 수장에, 우재룡(禹在龍)을 부장으로 각각 명하여 다시 흥해를 습격케 하여 분파소
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와 한국인 순검 1명씩을 사살하였다. 그 뒤 12월 5일에 영덕 부근에서
일헌병 영덕분견대의 야간기습을 받아 남경숙이 전사하자, 이에 분개하여 7일에 부하 83명
을 이끌고 영덕을 역습하여 적병 20여 명을 목 베어 죽였다. 경주로 이동하고자 하였으나 영
덕군 소택(小澤)에 주둔하던 일본군에게 포위당하자 이튿날 청하군 각전에서 부하들에게 해
산하도록 명령하고 눈물을 흘리며 동대산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일본군에 항
쟁하려다 12월 11일 새벽에 고천에서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본 헌병은 대구로 호송하
면서 여러 방법으로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음에 다시 영천으로 호송하여
영천 남쪽 교외에서 총살형에 처하여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
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35)
유시연(柳時淵,1873 ~ 1914)은 안동 임동 고천 출신이다. 자는 박여(璞汝), 호는 성남(星
南),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향리의 대평학숙(大坪學塾)에서 유연각(柳淵覺)으로부터 한문
을 수학하였다. 1896년에 안동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의 막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적
에게 큰 타격을 주어, ‘유선봉(柳先鋒)’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안동의진이 해산한 뒤, 영남 지
방으로 남하한 김하락(金河洛) 의진에 가담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유시연은
35)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350∼353쪽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375∼406쪽 ; 배용일, 「산남의진고-정환직, 정용
기 부자 의병장 활동을 중심으로」, 『논문집』 6, 포항실업전문대학, 1982
3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다시 일어나 소모장이 되어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6년 봄에 경주 분황사에서 열읍(列邑)의
의병장들과 회맹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어 진보·영덕·평해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
렸다. 1907년의 군대 해산 후 호서와 영남 중간에서 활약하던 이강년이 격서를 보내어 서로
손을 잡고 일하자고 요청해 왔다. 그는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삼척 방면으로 가서 이강년
을 만났다. 이 때 친일파 박두일(朴斗日)의 계략에 빠져 군졸들이 흩어지자, 격분하여 울진
십이령에서 박두일을 사살하였다. 이어 영양·청송·안동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전과를
올렸다. 1911년 8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룡·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과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만주 지역이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기에 최적지임을 깨닫고 군자
금을 조달하기 위해 1913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5월 영주 반
구왜경소(盤邱倭警所)에 붙잡혔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14년 1월에 교수형
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36)
③ 「판결문」 속의 의병활동
영남의병장 중에서 이들 외에도 신돌석과 정환직 의진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거나 옥중 순국한 이들이 있다. 이들 중에 이 책에 판결문을 소개한 인물로는 조준용·
이창영·박기운·최경연·김술이·오경명·김완수·이학이·노병대·김반석·배선한·윤
학이·신낙선·강근이·신태용·최산두·구성집·정흥대·권석규·김문오·장학이·김재
수·권계홍·강준학·강운학·금달연·이규성·박성도·윤흥곤·김일원·김수곡·최세윤
등이 있다. 이들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준용(趙俊容, 1886~1907)과 이창영(李昌英, 1883~1907)은 경북 영양 출신이다. 1906
년 음력 3월 20일에 신돌석 의진에 참가하여 영양 석포(石浦)에서 신돌석 휘하의 의병과 함
께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3월 27일에는 의병의 ‘집
사’가 되어 신돌석이 거느리는 75명과 함께 영양의 장파에서 임(林) 초시로부터 80냥을, 다
음 날인 28일에는 영해로 들어가 90냥을 모집하였다. 29일에는 소모관이 되어 영양에서 군
자금을 확보하였다. 4월 13일에는 울산으로 들어가 군의 병정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울산군 청송군 청운역(靑雲驛)의 손부이(孫富而)로부터 군자금 100냥, 영양군 진보읍
36)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0 ; 유규원, 「유의사전」, 『독립운동사자료집』
이방(吏房)의 집에서 군자금 200냥, 청송군 이전평에서 군자금 350냥 등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다가 영양군 순교한테 체포되어 1907년 2월 5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
하였다.37)
박기운(朴基運, 1844~미상)은 흥해 출신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경주·청
송·영덕 일대에서 군수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용기는 부친인 고종 황제의 시
종관 정환직(鄭煥直)의 지시에 따라 고향인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을
규합하여 창의하였다. 박기운은 1907년 음력 3월에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경주·청송·영덕
일대에서 군수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정용기 의진은 1906년 4월 28일에 일본
군 토벌대에 패한 신돌석 의진을 돕기 위해 영해로 진군하다가 경주 우각(牛角)에서 경주진
위대에 체포되었다. 이리하여 산남의진은 중군장 이한구가 이끌어 가다가 7월 하순 무렵에
해산하고 말았다. 박기운은 1906년에 귀향하여 농사일을 하던 중 음력 5월 26일에 일본 경
찰에 체포되었다. 1907년 9월 4일에 경상북도재판소에서 유배형 15년을 받았다.38)
최경연(崔敬淵, 1859~1909)과 김술이(金述伊, 1874~미상), 오경명(吳敬明, 1852~미상)
은 경북 지례 사람이다. 1908년 음력 2월 30일에 경북 지례군 증산면에서 박계장(朴啓長) 의
진에 입진하여 총기로 무장하고 활동하였다. 같은 해 음력 3월 3일에 경북 지례군 증산면 거
물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8월 29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배형
[流刑] 7년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9월 15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고초를 겪었다.
최경연은 옥중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39)
김완수(金完水, 1899~미상)는 경북 영양 사람이다. 성익현(成益鉉)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일
대에서 활약하였다. 성익현은 1907년 음력 7월 무렵 정경태(鄭敬泰)를 도총장(都總將), 변학
기(邊學基)를 도총독(都總督), 이상렬(李相烈)을 부장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1907
년 음력 7월 25일에 경북 평해(平海) 읍내에 설치된 경무고문분파소를 습격하여 병기와 군
수품을 노획하였고, 이어 경북 울진군 읍내를 공격하여 군청 무기고에 있던 화승총 25자루,
활과 화살 등 병기를 노획하는 등 활동하였다. 김완수는 1908년 4월부터 성익현 의진이 이
37)
38)
39)
판결문(1907. 2. 5. 대구지방재판소) ; 『황성신문』(1907. 2. 21)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419~420쪽.
판결문(1907. 9. 4. 대구지방재판소).
판결문(1908. 8. 29, 대구지방재판소, 1908. 9. 15,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433·456쪽.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강년 의진과 연합하여 1,000여 명의 대규모 연합의진을 형성한 뒤, 활동 근거지로 삼기 위
해 경북 봉화군 내성(乃城)을 포위 공격할 때 참전하는 등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러다가 체포되어 1908년 9월 7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배형 10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학이(李學伊,
1874~미상)는 영양군 북초면 출신으로 역시 성익현 의진에 참전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08년 9월 7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배형 3년을 받았다.40)
노병대(盧炳大, 1856~1913)는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성재(性齋) 허전(許傳)에게 한
학을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에 창릉참봉(昌陵參 奉)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
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반대 상소를 올린 바 있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
결되자 일본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어 비서원의 비서승(煉書丞) 벼슬
을 받았다. 그는 고종 황제의 뜻에 따라 1907년 8월 경기도 광주에 사는 임용헌(林容憲)과
충남 연산의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과 함께 속리산에 들어가 거의하니 응모하는
사람이 200명에 이르렀다. 때마침 군대해산이 강행되매 해산병들이 의병 투쟁에 합세함
으로써 1,000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노병대는 대장에 김운로를 추대
하고 보은군을 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사로잡고, 상주 청계사로 진을 옮겼다. 그때 일본군
의 급습을 받고 청주 미원으로 패주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적 5명을 사로잡았다. 노병대는
성주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노병대는 충북 보은·청주, 경북 상주, 경
남 거창·안의, 전북 무주 등지에서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08년 6월 15일(음력)
에 보은의 관주점(冠酒店)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군은 그의 한쪽 눈까지
빼버리는 악형을 가하였고, 공주지방법원에서 유배 10년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옥고 끝에
1911년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풀려나왔으나 다시 의병을 모으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
던 중, 1913년 3월에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자결을 결
심하고 28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41)
김반석(金盤石, 1879~미상)은 경북 의성 사람으로 박연백(朴淵伯)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청송·안동·의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박연백은 경북 의성 출신으로 각 지역에 격문을 보
40)
41)
판결문(1908. 9. 7.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435~436쪽.
판결문(1908. 9. 14.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3.
내 의병을 모아 공산에서 기병(起兵)한 뒤, 1906년 7월 1일 일본군 수비대와 최초로 교전하
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이후 경북 의성·의흥·영천·청송 등지로 옮겨다니며
야간 기습 공격으로 일본군을 토벌하여 갔다. 김반석은 박연백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1907년
8월 무렵 동료 의병들과 함께 경북 안동군 송제동 재곡(齋谷)에 있는 김파총 집에서 군량미
를 징발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영천의 정용기 의진과 합세하여 경북 경주군 죽지면 입암
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그 해 11월 25일에 박연백 의병장의 지휘 아래 100
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경북 의성군사무소와 일본군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고, 12월
23일에는 경북 청송군 월매동에서, 그리고 12월 25일에는 의성군 삼산면 진목동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맹렬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강진수(姜鎭秀)와 서
주일(徐周一) 의진으로 들어가 1908년 음력 7월에 경북 의성군 옥산면 광전동에서 군자금을
징발하는 등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8년 9월 21일에 대구지방재판
소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오히려 1908년 10월 13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징역 15
년형을 선고받았다. 대심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되어 15년형의 옥고를 치렀다.42)
배선한(裵善翰, 1883~1961)은 경상북도 진보군 동면 출신이다. 그는 같은 동면 출신의 윤
학이(尹學伊)·신낙선(申洛先), 영덕 출신의 강근이(姜根伊), 봉화 출신의 신태용(申泰用) 등
과 함께 신돌석 의진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배선한은 1906년 음력 3월에 신돌석 의병에
참가하여 50명의 의병들과 함께 영양읍을 공격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다수의 무기를 빼앗
았다. 4월에는 130명의 병력으로 청송읍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패하
여 귀가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에 신돌석 의진에 다시 들어가 5월에 흥해, 영해, 진보 일대
에서 일본수비대와 싸웠다. 영양, 평해, 청송 일대에서 일군과 싸우다가 1908년 6월에 체포
되었다. 배선한은 1908년 9월 28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15년의 징역형, 윤학이와 신낙선
은 10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근이와 신태용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43)
최산두(崔山斗)는 경북 흥해 출신으로 의병장 최세윤의 아들이다. 그는 흥해군 일대에서
군수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08년 3월부터 오두안·오문석·김학림 등과 함께
흥해군의 이호동과 우각동, 강호곡, 그리고 청하군 죽장면 감곡동 일대에서 군수품을 모집
42)
43)
판결문(1908. 9. 21. 대구지방재판소, 1908. 10. 13. 대구공소원 판결문).
판결문(1908. 9. 28.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1908년 9월 30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종신 징역형을 받았다. 44)
구성집(具聖執, 1876~1909.2)은 경북 의성 사람이다. 1906년 9월 12일 무렵 김동산(金東
山) 의병장 휘하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경북 봉화군·강원도 삼척군 등지에서 의병 활동
을 하다가 같은 달 25일 무렵에는 삼척군 개산동 윤천총(尹千總)과 이학서(李學瑞)로부터 각
각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7월 무렵에는 성익현(成益賢) 의병장 휘하
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동지 200여 명과 함께 경북 울진군 내에서 활동하였고, 또 삼척
군 죽변동 해안에 있는 일본 어선을 공격하여 일인 하야노(早野菊松) 외 2인을 총살하고 군
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8월 5일부터 10월 10일 사이에는 울진군 석호
리 박명칠(朴明七)과 삼척군의 김자율(金子律)·이도장(李都長)·김자현(金子賢)의 집에서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1908년 10월 7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살인 및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09년 2월 2일에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되어 순국하였다.45)
김윤황(金允璜, 1886~1908.12)은 경북 상주 사람이다. 1903년 9월 경북 청도군 팔조령에서
김문진(金問辰)·김곤이(金坤伊)·김향군(金香君)·소춘화(蘇春和) 등과 함께 일본인 이노
우에(井上俊太郞)를 살해하였고, 1904년 6월에서 1905년 10월 사이에는 탁영조(卓永祚)·
이 아무개(李某)·천생이(千生伊) 등과 함께 자인군에서, 그리고 1906년 5월에는 여두명(呂
斗明)·이도신(李道信)과 함께 경주군에서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 후 1908년 3월 13
일에서 5월 18일 사이에도 이봉상(李鳳祥)·남방우(南方祐)·이봉우(李鳳祐)·이남산(李南
山)·이해문(李海文) 외 여러 명과 함께 경주군·신녕군·경산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
며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1908년 10월 9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1908년 10월 31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자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12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46)
정흥대(鄭興大, 1860~1909.2)는 경북 문경 사람이다. 1907년 음력 7월 29일에 이인영(李
麟榮) 의병장의 휘하로 들어가 부하 80여 명과 함께 경북 상주·문경 등지에서 활약하였고
같은 해 음력 8월 1일 무렵에는 의병 30여 명과 함께 문경 읍내에 돌입하여 친일순검 박시영
44)
45)
46)
판결문(1908. 9. 30. 대구지방재판소).
판결문(1908. 10. 7.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520~521쪽.
35
(朴時永)·박세진(朴世鎭) 집에 방화하여 모두 불태우고 체포되었다. 그 후 1908년 10월 19
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방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검사의 공소(公訴)
로 1909년 2월 9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47)
고윤한(高閏韓, 1870~미상)은 경북 용궁 사람이다. 고윤한은 1907년 7월 이인숙(李寅肅)
등 의병 60여 명과 함께 의병 자금 확보를 위해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서 엽전 200냥을, 9월
에는 이인숙과 함께 강원도 강릉군 중계면에서 엽전 100냥을 군자금으로 징수하였다. 1908
년 6∼7월에는 봉화군에서 의병 자금을 징수하는 등 지속적으로 의병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8년 10월 16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을 받아 옥고
를 치렀다.48)
권석규(權錫奎, 1884~미상)은 경북 순흥 사람이다. 김성운(金成雲) 의진에 가담하여 경
북 영양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권석규는 1907년 10월에 김성운 의병장의 명령에 따라 금
전·곡식 및 기타 물품 징발 명령서를 가지고 경북 영양군 일대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 수
합 활동을 벌였다. 그는 2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영양군 수비동에서 군수품을 징발
하였고, 같은 군 계동에서는 군량미를 징발하였으며, 같은 군 문암동에서도 미곡 및 군자
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8년 11월 30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종신 징역
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49)
김문오(金文五, 1874~미상)는 경북 영해 사람이다. 유시연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안동 일
대에서 활약하였다. 유시연 의병장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을미의병에 참여하여 권세연(權世
淵)의 부하로서 활동하였고, 1905년 이후 다수의 의병을 모집하여 일월산을 중심으로 한 영
남의 동북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일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 의병장이었다. 김문오는 유시
연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1907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908년 1월 말까지 동료 의병 33명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경북 안동군 임동면 마령, 같은 면 노곡과 임북면 잔루동 등 3개 처에
서 3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특히 이 때 척후 정찰병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8년 12월 25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09년
47)
48)
49)
판결문(1908. 10. 19.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455·483~484·504쪽.
판결문(1908. 10. 16.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342~343쪽.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2월 13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50)
장학이(張鶴伊, 1881~1909.3)는 경북 상주 사람이다. 1907년 음력 9월 30일 박연백(朴淵
伯)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의성군(義城郡) 일대에서 수십 명의 동료와 함께 총기 20여 정을
휴대하고 군자금 모집과 밀정 김명준(金明俊)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 음
력 6월 이토옥(李土玉) 의진에 가담한 후 부하 8명 등과 함께 총기 7정을 휴대하고 의성군
사곡면과 채동면 등지에서 마포(麻布) 3필·목면 1필·돈 3관 등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체되었다. 1909년 1월 18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살인 및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
고받아 항고하였으나 3월 6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고 3월 23일 대심원에서 형이 확정
되어 순국하였다.51)
김재수(金在水, 1877~1909.3)는 경북 청송 사람이다. 1907년 10월 15일부터 12월 5일 사
이에 박연백(朴淵伯) 의병장 휘하에서 소모장으로 활동하고 박연백 의진 30여명과 함께 경
북 신녕군·안동군·청송군 일대에서 정진사(鄭進士)·권대방(權大房)·김명원(金明元)·김
연전(金延前)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1909년 1월 19일에 대구지
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종신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그해 3월 4일에 대구공소원
에서 교수형으로 형이 변경되어서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같은 해 4월 8일에 기각, 형이 확
정되어 순국하였다.52)
권계홍(權桂洪, 1871~1945)은 경북 안동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이후 박인화(朴
仁和) 의병진에 가담하여 안동·영양·봉화 등지에서 3년 동안 일군경과 항전을 벌였다. 그
는 동료들과 함께 총검으로 무장하고 안동 및 영양 관내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
을 벌였으나 1908년에 체포되었다. 그는 1909년 1월 27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내란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3월 27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옥
고를 치렀다.53)
강운학(康雲鶴, 1881~1964)과 강준학(康俊鶴, 1887~1964)은 경북 봉화 출신으로 형제간
이다. 강운학은 동생 강준학과 함께 이강년(李康秊) 의병 부대가 경북 지역을 거점으로 일
50)
51)
52)
53)
판결문(1908.12. 25.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483쪽.
판결문(1909. 1. 18. 대구지방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485∼487쪽.
판결문(1909. 1. 19.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488~489쪽.
판결문(1909. 1. 27.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467~470·479쪽.
본군과 전투를 벌일 때, 1909년 음력 3월에 봉화의병장 정경태(鄭景泰)의 휘하에 들어가 봉
화·영월·울진 등지에서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중과부적으
로 후퇴, 피신하던 중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들은 1909년 8월 30일에 대구지방재판
소에서 소위 폭동죄로 각각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54)
금달연(琴達淵, 1874~1914)은 순흥에서 살았으며 본적은 봉화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
래 국운이 날로 기울고 일본인의 횡포가 심해지자 1905년에 영주에서 김낙임(金樂任)과 함
께 의병을 조직하여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1907년에 순흥의 일 헌병분견소(日憲兵分遣
所)를 비롯하여 인근의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그 때 문경 사람 이강년(李康秊)이 의병을 일으
켜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1907년 음력 8월에 휘하의 포군 수십 명을 거
느리고 이강년의 중군장 김상태(金尙台)의 진중으로 찾아갔다. 금달연은 이강년을 만나 “달
연이 김백우(金白愚) 선생께 몸을 바친 지 해가 넘었사온대, 지금 백우 선생의 명으로 감히
뵈오니 죽이건 살리건 처분대로 하옵소서” 하였다. 이강년은 도독장(都督將) 이만원(李萬源)
을 불러 별초종사(別抄從事)로 임명케 하였다. 1908년에 이강년의 종사부에서 활약하다가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는 김상태와 함께 의병을 수습하고 그 선봉장이 되어 영주·단양 일대
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7월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구지방
재판소에서 종신징역을 선고받아 복역 중 1914년 10월 21일에 옥사 순국하였다. 55)
이규성(李圭成, 1870~1949)은 경북 흥해군 기계면 출신이다. 1907년 음력 10월에 정환직
(鄭煥直)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에 들어가 경북 흥해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12년에 체포되어 1912년 3월 4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56)
박성도(朴成道, 1874~1910)는 경북 청송군 현내면 출신이다. 그는 1907년 9월 정용기 의
진에 들어가 청하군 분파소 공격에 가담하였다. 1908년 7월에 청하군 사령을 죽인 일로 체
포되어 1910년 4월 29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57)
54)
55)
56)
57)
판결문(1909. 8. 30.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502쪽.
판결문(1908. 10. 29. 대구지방재판소) ; 『대한매일신보』 1907. 5. 12.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536쪽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
사자료집』 1, 244~245·299쪽.
판결문(1910. 8. 22.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548~549쪽.
판결문(1910. 4. 29. 대구지방재판소).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윤흥곤(尹興坤, 미상~1910)은 경북 청하군 소천면 출신이다. 1907년 정환직 의진에 가담
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정환직의 명령에 따라 동지 백 수십 명과 함께 총과 칼
을 휴대하고 1907년 10월 29일에 경북 흥해군 읍내에 들어가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소장 이치하라(市原爲太郞) 가족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보관한 300여 원을 군자금으
로 노획하고 근처에 있는 경무분파소 및 기타 13동의 집을 방화 소각시켰다. 같은 해 11월 3
일에도 신령군 읍내에 들어가 군청에서 총 백 수십 자루를 탈취하고 경무분파소 및 친일 순
검의 집을 소각하였고, 같은 달 4일 무렵에는 의흥군 읍내에 들어가 경무분파소에서 총 수백
자루를 탈취하고 분파소 및 순검 주택 3동을 소각시켰다. 1909년 12월 28일에도 그는 김수
곡(金水谷)·김일원(金日元) 등과 함께 총칼을 휴대하고 의성군 점곡면 서변동에서 군수품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1910년 8월 22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불온조
직활동 강도방화파괴’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9월 20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되어 동지 김수곡·김일원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58)
최세윤(崔世允, 1867~1916)은 경상북도 흥해 출신이다. 자는 성집(成執·聖執), 호는 농
고(農膏)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특히 병서를 즐겨 읽어 정통하였고,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절의를 숭상하였다. 흥해군의 형방서기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
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896년 전기 의병시 안동의병장 김도화(金道和) 의진에 입진하여
아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후 고향에서 후학을 교육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이후 정용기
(鄭鏞基)가 의병을 봉기하고 이한구(李韓久)를 파견하여 거의할 것을 요청하므로 자신이 병
중에 있었고 부인도 임신 7개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국의 결단으로 산남의진에 참여하였
다. 그는 의병장 정용기와 정환직이 연이어 순국하자 1908년 2월에 부장 이세기(李世紀)·
정순기(鄭純基) 등에 의해 보현산 속에서 제3대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의병장이 된 그는 중
군장에 권대진(權大震), 참모장에 정내의(鄭來義), 소모장에 박완식(朴完植) 등을 임명하고,
전군을 인솔하여 흥해·청하·청송·영해·영천·의성 등지에서 활동하며 적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의성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고립되어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고
재기를 준비하였다. 일본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다액의 현상금을 걸고 수사망을 펼쳤다. 결
58) 판결문(1912. 3. 4. 대구지방재판소) ; 배용일, 「산남의진고-정환직, 정용기 부자 의병장 활동을 중심으로」, 『논문집』 6, 포항실업전
문대학, 1982.
국 1908년 7월에 영일군 장기면 용동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1911년 11
월 15일에 대구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10년의 징역형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2월 12일에 대
구공소원 형사부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경성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수감된 뒤 그곳에
서 제공하는 음식은 일체 거절하고 부인이 넣어 주는 사식만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희
망이 없음을 깨닫고 그 사식마저 거절하고 단식 항쟁하다가 1916년 8월 옥중에서 순국하였다59).
이상으로 이 책에 판결문을 수록한 의병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표로 살펴보면
다음 【표1】과 같다.
【표 1】 중·후기 의병기 영남의병장 현황
59) 판결문(1911. 11. 15. 대구지방재판소) ; 『산남창의지』 하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2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3, 1970·1971 ; 배용일, 앞의 논문, 1982.
번호 이름 출신지 형량 판결일 의병장 활동지역 관리번호 포 상
1 조준용 영양 교수형
1907.02.05 신돌석 영양, 진보 1147
애국장
2 이창영 영양 교수형 -
3 박기운 흥해 유15년 1907.09.04 정용기 영천, 경주 1147 애국장
4 최경연 지례
유7년 1908.08.29 박계장 지례 1151
애국장
5 김술이 지례 -
6 오경명 지례 -
7 김완수 영양 유10년
1908.09.07 성익현 안동, 영양 1151
애국장
8 이학이 영양 유3년 -
9 노병대 상주 유10년 1908.09.14 노병대 보은, 상주 940 독립장
10 김반석 의성
징10년 1908.09.21
박연백 청송, 의성, 안동 1151 애국장
징15년
1908.10.13
1908.10.29
11 배선한 진보 징15년
1908.09.28 신돌석 영해, 영양, 울진 1151
애국장
12 윤학이 진보
징10년
-
13 신낙선 진보 -
14 최산두 흥해 종신 1908.09.30 최세윤 (포항)흥해 1151 애국장
15 구성집 의성 교수형
1908.10.07
성익현 봉화, 삼척, 울진 1155 애국장
1908.11.07
1908.12.01
1909.02.02
1909.02.17
40
번호 이름 출신지 형량 판결일 의병장 활동지역 관리번호 포 상
16 김윤황 상주 교수형
1908.10.09
1908.10.31 하양, 경주, 경산 1152 애국장
1908.11.28
17 정흥대 문경 교수형
1908.10.19
이인영 문경, 상주 1155 애국장
1909.02.09
18 고윤한 용궁 징15년 1908.10.26 봉화 1152 애국장
19 권석규 순흥 종신 1908.11.30 김성운 영양 1152 애국장
20 김문오 영해 징7년
1908.12.25
유시영 안동 1155 애국장
1909.02.13
21 장학이 성주 교수형
1909.01.18
1909.03.06 박연백 의성, 의성 1156
1909.03.23
22 김재수 청송
종신 1909.01.18
박연백 의성, 청송 1156 애국장
교수형
1909.03.04
1909.04.08
23 권계홍 안동 징3년 1909.03.27 박처사 안동, 영양 692 애족장
24 강준학 봉화
징5년 1909.08.30 정경태 봉화 1159
애국장
25 강운학 봉화 애국장
26 금달연 순흥 종신형 1909.10.29 이강년 영주, 문경 1161 독립장
27 박신촌
(박성도)
청송 교수형
1910.04.29
1910.05.24 정용기 (포항)청하 1165 -
1910.06.09
28 윤흥곤 청하
교수형
1910.08.22
정환직
(군위)의흥
영덕, 의성
1541
독립장
29 김일원 영덕 1910.09.20 독립장
30 김수곡 신녕 1910.10.07 독립장
31 최세윤 흥해 징10년
1911.11.15
최세윤 흥해, 청송 1173 독립장
1911.12.12
32 이규성 흥해 징2년6월 1912.03.04 정환직 (포항)흥해 1176 애족장
이들 외에도 「판결문」은 있지만 이 책에 편철하지는 못하였음에도 활동상이 두드러진 의병
장의 활동상을 소개하기로 한다.
김대규(金大圭, 1878~1907.11.21)는 경상북도 예안 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격
분함을 금치 못하고 11월 17일에 청송의 주치와 울산의 불영사에서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의
지사들과 회합하여 의거를 결의하였다. 이들은 동지 규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살포하여
의병 500명을 모병하였다. 1906년 2월에 영양 입암 교동(橋洞)의 자택에서 의진의 부서를
확정하고, 김대규는 도포장(都砲將)에 피선되었다. 그 후 진보 오누지 작전에 참전하였다.
이 때 의병 탄압의 책임자인 일본 헌병 무토(武藤)을 비롯한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하는 전과
를 올렸다. 1906년 5월에 울진 죽변 왜관 전투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크게 물리쳤다. 8월에
는 잔류 병력을 정비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장이 된 김대규는 휘하의 병사들을
훈련시켜 전력을 보강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 10월에 이르러 병왕동(屛王洞)에서 출동한 일
본군을 맞아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적에게 사면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야음을 틈타 물속으로 뛰어들어 수영으로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후 안동 임동면 대곡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하였다. 의진의 치열한 방어전에 견디지 못
한 일본군은 산악지대에 불을 놓는 방화 작전으로 대처하였다. 결국 김대규는 불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1907년 11월 21일에 순국하였다.60)
김병일(金炳一, 1886~1914.2)은 경북 봉화 사람이다. 일제가 조국을 강점하자 경북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군경에 손해를 입히며 활동하다가 1911년 음력 6월 20일에서 9월 11일 사이
에 김영수(金永壽)·사문성(史文成) 외 여러 명과 함께 강원도 삼척군과 경북 소천면 일대
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12년 5월 30일에서 7월 18일에도 성병태(成炳台) 외
여러 명과 함께 경북 안동군과 봉화군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그 사이 7월 10일에는 일
본인에게 협조한 봉화군의 여일구(余一九)·안봉순(安鳳順)·김유백(金有伯) 등 3인의 집
에 방화하여 그들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13년 3월 28일에서 5월 6일에도 역시 성
병태 등과 함께 강원도 삼척군·봉화군·울진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
포되었다. 1913년 12월 13일에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방화·강도 상해 및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14년 2월 18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
60)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1975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61)
김종철(金鍾鐵, 1880~1917)은 경북 봉화 사람이다. 1907년 8월경 강원도 인제에서 박화
암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관포수 등 1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
다. 그는 1908년 2월 무렵 일본군 양양수비대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는 강릉으로 압송 도
중 탈출하여 위기를 벗어났고, 이후 강원도 정선·삼척, 경북 봉화 등지에서 은둔 생활을 하
면서 재차 거병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일제의 무자비한 의병 탄압, 특히 1909년 9월부
터 10월까지 전개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목격하고는 분개하여 재차 거의를 단행하였
다. 그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 부대를 조직한 후, 친일 관리 및 밀정 등 부일배(附日輩)를
처단하여 민족 정기를 선양하는 한편 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군자금품 수합 활동을 벌
였다. 1910년 음력 3월 10일에 김문도(金文道)와 김중삼(金仲三) 등 부하 의병들과 함께 강원
도 인제군 내면 소한리에 살던 친일 면장 김시원(金時元)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출타 중이므로
그의 집을 소각하였다. 같은 해 음력 5월 30일에는 김국서(金國瑞) 등 부하 의병 4명과 함께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서리에 살던 일진회 회원 엄윤문(嚴允文)을 총살, 처단하였다. 그리고
1913년 음력 11월 15일에는 이종서(李鍾西) 등 부하 의병 3명과 함께 강원도 강릉군 연곡면
퇴곡리에서 군자금과 군수용품을 징발하였다. 또 1915년 5월 8일에는 김종근(金鍾根)·장명
수(張命壽)·김원실(金元實)·정대성(鄭大成)과 함께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에서 군자금을 징
수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 6월 6일에도 위의 의병들과 함께 연곡면 장천리에서 의병 활동을
밀고한 박군팔(朴君八)을 총살, 처단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해 8월 11일에도 김용원(金熔
源) 및 위의 의병들과 함께 연곡면 송천리 이치령에서 군자금을 거출하는 등 의병 활동을 계
속하였으나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16년 11월 29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됨
에 따라 1917년 4월 19일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하였다.62)
남석인(南錫仁, 1878~1907)은 경상북도 청송의 농민이다. 1906년 정용기 의진에 들어가
서종락(徐鍾洛)·남석구(南錫球)·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과 함께 청송 지역에
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남석인은 영천으로 정용기를 방문하였는데, 이미 정용기는 기밀이
61)
62)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555∼562쪽.
『조선총독부관보』(1917. 4. 24) ; 편찬위원회, 앞의 책, 290∼300쪽
누설되어 체포된 후였다. 다만 정용기의 사촌인 정사홍(鄭士弘)이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있
을 뿐이었다. 남석인은 정사홍과 경주 사람 이운경(李雲景)·흥해 사람 정천여(鄭千汝) 그리
고 남석인의 6촌 되는 남석문(南錫文) 등과 함께 1906년 음력 4월에 거의하고 4월 13일에 영
덕 청련사(靑蓮寺)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이미 경주 사람 이한주(李漢主)가 의병 30명을 거
느리고 와서 절에 머물러 있었다. 본래 이한주는 정용기 의진의 중군이었으므로 합진할 것을
결정하고 부서를 다시 정하였다. 이때 남석인은 포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의진을 정비한 후 4
월 26일에 의병 80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향하였다. 그날 정오에 영덕 적암지(赤巖地)에 이르
렀을 때 경주 진위대 병정 30명이 총을 쏘며 내습해 왔다. 역부족으로 의진을 해산하고 옥동
(玉洞)으로 돌아와서 나머지 병사들을 타일러 해산시키고 다음날을 기약하였다. 그는 정용기
가 재기한 후에 군사 30명을 모집하여 영천 거동사(巨洞寺)에 머물면서 독자적으로 청송·
흥해 등지의 민가를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07년 6월에 청하의 하옥계에서 일본
군의 공격을 받고 은신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6월 20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 결과
종신 징역에 처해졌으나, 끝내 옥중 순국하고 말았다.63)
박수길(朴水吉, 1880~1908)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경남 삼가군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
동하였다. 박수길은 1908년 6월에 경남 삼가군 일대에서 김팔용(金八龍) 등 30여 명의 의병
을 이끌고 삼가군 중촌면 덕지면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1908년
8월 1일에 진주의 성내2동에서 김팔용 등과 함께 숙박하던 중 일본 순사 3명과 한인 순사 4
명에 의해 체포되었다. 박수길은 진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그 해 10월 10일에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순국하였다.64)
조운식(趙雲植, 1873~1910)은 경북 상주 사람이다. 1909년 음력 7월에 경북 풍기에서 기
의하여 부하 수백 명의 총대장이 된 후 한봉서(韓奉西)·박황성(朴璜成)·이인만(李仁萬)·
김용태(金龍泰) 등을 부장(部將)으로 하여 고유문을 작성, 각처에 배포한 뒤 의병을 모집하였
다. 같은 해 7월 중에는 충북 보은군·청주군 등지에서 면장 이상락(李相洛) 외 3명으로부터
각각 군자금을 모집 하였다. 1909년 음력 8월에는 의병 30여 명을 인솔하고 경북 상주군 화
북면에서 밀정 정화춘(鄭化春)·김경모(金京模) 등을 처단하였으며 같은 달 영천군 주막에서
63)
64)
편찬위원회, 앞의 책, 427쪽.
판결문(1908. 10. 10. 대구공소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부하 500여 명을 인솔하고 머무르던 중 일군의 포위 습격을 받고 교전하다 부하 5명이 전사
하기도 하였다. 1909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는 회덕·풍기·청산·청주·보은 지역에서 활
약하였다. 같은 해 10월 13일에 러시아에 있는 이범진(李範晋)으로부터 국내의 모든 의병
이 러시아로 모여 무기를 정리한 후 다음해 3월을 기하여 일시에 항거하자는 제의를 받았
다. 그는 한봉서 등 부장 4명 및 부하 350여 명에게 무기를 휴대케 하여 이범진 소재지에
보낸 후 의병을 더 모집하여 합진하고자 국내에 머무르던 중 같은 달 15일에 충북 영동경
찰서 순사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 후 1910년 2월 14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3월 12일에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
정되어 순국하였다.65)
65) 판결문(1910. 2. 14. 공주지방재판소 : 1910.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