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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리를 위한 죽음
히2: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히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종종 묻습니다 왜 그렇게 낡은 복음에 대한 고찰을 듣는 겁니까?" 히브리서 첫 네 구절에 그 대답이 나오는데, 그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복음에서 떠내려가지 않고 복음을 등한시하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이 메시지의 권위와 원천 - 하나님 자신에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고 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통해 하신 일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입으로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우리는 권위에 신경을 쓰는데, 이보다 더 큰 권위는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친히 이 어지러운 세상에 주신 메시지요 연약함과 부끄러움과 무력함에 빠져 있는 각 개인에게 주신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를 고찰해야 하는 두 번째 큰 이유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 2:3)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며 우리는 영혼을 가지고 세상에서 한 일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시종일관 전하는 중대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책임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동물이나 기계가 아닙니다. 이 나님의 영상에 따라 지어진 아주 존엄하고 책임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자기 인생으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화목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 그를 거슬러 죄를 짓고 세상에서 인생을 남용한 무서운 결과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등한시한다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복음을 고찰해야 하는 세 번째 중대한 이유는 그 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통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찬송시인 아이작 와츠가 좋아하는 단어를 사용하면 이 큰 구원을 두루 살펴야 합니다 급히 살피거나 슬쩍 살피면 안 됩니다 주시하고 응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려는 목적, 즉 죄의 타락과 파멸에서 건져내 친히 예비하신 일광으로 이끄시려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장차올 세상 죄와 악이 완전히 추방된 세상에 대해 알려 줍니다.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광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계획과 목적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 세상에서 다스릴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한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할 것이요 놀라운 영광의 지위에 오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자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 크고 신성한 목적의 창시자요 지휘관이요 주창자요 창안자로 세우신 성자 안에서, 성자를 통해 주시는 죄사합입니다
10절을 기억하십시오.
히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여기에서 말하
는 모든 일이 일어나야 했던 것은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일치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물을 것입니다. "왜 아들을 보내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게 하는 방법으로만 구원하시는 겁니까?" 그 대답은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시는 이 방법만 하나님께 "합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도덕적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부합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의 공평하심과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올바로 나타내는 방법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차마 보지 못하시는 정결하신 분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올바로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의 죽음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죄 사함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사탄을 정복해 줄 분이 필요하고 새로운 본성이 필요합니다. 동정하고 이해하며 도와줄 대제사장이 필요하며, 마지막 때 하나님 앞에 데려가 줄 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필요를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의 성육신과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이라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다면 그 필요는 채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완전한 구원이요 이 얼마나 완전한 구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나타내는 방법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이제 저와 함께 이같이 큰 구원에 치르신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이 구원의 크기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사람은 가격에 관심이 많습니다. 가격은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흔한 기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증거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격이 비싸야 많은 사람이 가치를 인정해 줍니다. 내면의 가치나 진가를 모르다가 나중에야 발견하고 새롭게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치가 아닌 가격으로 대상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가격은 대체 얼마나 되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특정한 자들을 붙들어 죄의 타락에서 건져 내시고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어 가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치르신 비용과 가격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실제로 그 일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본문인 히브리서 2장이 다루는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 사실상 성경 전체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구약성경 첫 부분의 진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린 이유. 성막과 온갖 예복을 만든 이유, 다양한 종류의 제물에 대해 많은 규례를 지킨 이유. 피로 제물을 성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언들도 보십시오 형태와 강조점은 달라도 메시지는 동일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죽 읽어 보십시오. 진부한 인물과 사건을 가리킴을 알게 됩니다. 구약성경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또 어떻습니까? 신약성경이 주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실들에 상대적으로 그토록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을 읽어 보십시오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설교할 때 강조한 바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 예수야말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감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갈보리의 죽음을 부끄러워하며 그의 삶과 가르침과 본을 대신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신약 서신서 곳곳에 그 예가 나옵니다. 십자가 죽음은 복음 전체가 걸린 핵심 교리로서, 십자가 죽음을 떠나서는 복음의 주장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성경의 큰 주제이자 찬송집의 큰 주제입니다. 가장 위로가 되는 복된 찬송들이 십자가 죽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참으로 전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죽음에 항상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유념해야 할 것은 기적적인 인도나 삶에 물밀듯 찾아오는 행복이나 육신의 치료가 아니라 우리가 들은 것 곧 복음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이들은 것을 전해 준자들은 일개 철학을 설파하거나 행복의 비결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사자로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신 예수 나무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계속 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이끌어 낸 추론이요 도출해 낸 교리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고 작정한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이 죽음에 주의하지 않는 자들, 이 죽음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긴요한 중심 사건으로 보지 않는 자들은 사실상 이같이 큰 구원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 구원을 위해 주님이 고통스럽게 치르신 비용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기독교 신앙고백의 잣대는 십자가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는 시금석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긴요하고 핵심적인 중심 사건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토대부터 다시 점검해 보는 편이 좋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다시 묻겠습니다. 그가 이런 큰 값을 치르셨는데도 십자가 죽음이 나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비용의 크기를 보면 십자가가 왜 중심 사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십자가 죽음, 우리를 위한 예수의 죽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십자가를 긴요한 중심 사건으로 여기지 않는 자, 자기 신분 전체의 토대로 보지 않는 자는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다른 많은 주장들도 십자가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거룩하라는 신약성경의 중대한 호소도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첫 번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이 편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것입니다. 그런데 왜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합니까?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7-18).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대속을 위해 이처럼 엄청난 값을 치르신 것을 아는 자는 당연히 거룩해지려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지 못한 것은 주님이 치르신 값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논증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것은 단지 죄사함만 위해서가 아니라고 바울은 디도에게 말합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으로 구별하고자 자신을 주셨다고 말합니다(딜 2:14).
다른 많은 주장들이 가리키는 방향도 동일합니다. 성경이 자주 제공하는 큰 위로와 위안의 전적인 토대 또한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고난당하고 견디신 일들에 있습니다. 이 중대한 주제를 살펴볼 이유는 차고도 넘칩니다. 과거 성도들의 전기를 읽어 보면, 주님이 대속을 위해 치르신우리를 위한 죽음 비용을 깨달은 것이 삶의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존웨슬리 를 비롯한 여러 인물에게 큰 영향을 끼친 모라비아 형제단의 지도자 친첸도르프 백작'( Comint Zoneulint) 의 청년 시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그린 명화와 거기 쓰인 글귀 - 나는 널 위해 이 일을 했는데,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 를 본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깨달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집과 안락한 삶을 버리게 했고 대양을 건너게 했으며, 고통과 고난을 견디게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자신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자신을 대속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 삶에서 실패하는 것은 바로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신구약성경이 아주 명확하게 제시하는 사신들이요 히브리서 2장이 아주 놀랍게 상기시키는 사신들입니다.
주님이 이 큰 구원을 위해 치르신 값과 비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살펴보며 그가 고난당하신 이유와 이 큰 구원을 위해 치르신 값을 알아봅시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을 것은 그가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일입니다. 히브리서 2장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을 이야기하며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말합니다(14절). 이에 대해 상고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나라를 떠나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습니까? 결국 십자가와 무덤으로 끝나게 된 여정을 시작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알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라는 말로 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줍니다 (빌 2:6-7).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주님은 지고한 신의 권리를 가지고 계셨지만 그것을 고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어 땅으로 내려오셨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대로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제한하여 인간 육신의 한계에 가둠으로 써 고통과 필멸을 겪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습니다. 죽으시려면 인간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살펴보고자 애쓰는 중입니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약 메시지의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무력한 아기가 되어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고통과 필멸과 죽음을 겪기 위해 여기까지 자신을 낮추시며 한계에 갇히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대속하고자 이렇게 하셨습니다. 성육신 한 가지만으로도 그가 치르신 비용은 정도를 넘어서며 우리 이해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는 어린 아기로 오신 것도 모자라 더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육신의 부모와 그들의 가르침에 순종하셨습니다. 온 세상의 창조자가 이렇게 하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면서 먹고 살기에도 부족한 벌이를 위해 목수로서 육체노동을 하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지치고 피곤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않연약함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온 세상과 우주의 주인께서 이런 한계 안에 스스로 갇히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추시고 굴욕을 자청하시는 과정만 거치신 것이 아닙니다.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시며 스스로 시험받지도 않으신다고 말합니다(약 1.13)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본체 중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복음서에는 그가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뿐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요 모든 천사 위에 계신 하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는 비용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 점에 주목하며 복음서를 읽어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을 동정하시는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우리를 대속하시고 장차 올 영광을 예비해 주시기 위해 이 모든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죄인들이 그에게 "거역한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 합니다(히 12:3).
히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영광의 주, 창조의 주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보십시오 그들이 질문을 퍼부으며 주님의 말을 트집 잡으려 했던 것. 비웃고 조롱하며 함정을 팠던 것을 보십시오 돌을 던지고 혐오하며 죽일 방법을 모색했던 것을 보십시오. 심지어 제자들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조차 한때 그를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광의 나라에서 찾아오신 하나님이 이런 일을 당하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우리의 대속을 위해 치르신 비용의 일부입니다.
친구 나사로의 무덤가에 서 계시는 모습도 보고 그 심령에서 흘러나오는 탄식 소리도 들어 보십시오."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5). 저는 이 두 마디야말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엄청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 이처럼 신음하시고 괴로움에 떨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적 나약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대속하여 영광의 상속자로 삼으시기 위한 고난의 일부입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때문에 올며 신음하시는 모습도 보고, 저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세상의 삶을 마치기 전 고독하게 기도하시는 모습도 보기 바랍니다. 주님은 제자 셋을 데리고 동산으로 가셨고, 자신이 씨름하는 동안 깨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들이 잠들어 버린 내내 핏방울처럼 뚝뚝 흘리신 땀은 그가 겪으신 고통의 표출이었습니다. 진땀 흐르는 고통이 무엇인지는 여러분도 안 것입니다. 그런데 피땀 흐르는 고통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공포를 느끼셨기에 그토록 땀을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고통 앞에 위축되셨기에 그토록 땀을 흘리신 것 또한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일어날 일을 아셨습니다. 자신이 속죄제물로 바쳐질 것을 아셨습니다. 그 일이 임박한 것을 아셨기에 면해 주시길 구하셨습니다. 그가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신 것은 이처럼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미리 아신 탓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셨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깨닫는다면, 굳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라고 호소하거나 압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간증을 동원하거나 감성을 조작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주님이 이 모든 일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 모든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역사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에게 부인당하신 것 또한 고난의 일부 있습니다 성경과 모든 문헌을 통틀어 가장 안타까운 말 중 하나는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하는 순간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는 것입니다(눅 22:61),
눅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베드로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리오셨습니다. 베드로를 대속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일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주님과 함께 지내며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변화산에도 함께 있었고, 겟세마네 동산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남들은 몰라도 자신은 주님을 따르겠노라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맹세하고 저주하며 부인한 것입니다. 그의 배신이 예수께 무엇을 의미했는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놀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그는 구원하기 위해 오셨는데. 그가 자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를 위해 죽으려 하시는데, 그가 자신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를 위해 치르신 값의 일부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 보십시오 주님은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섰고 거룩한 등에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온 세상의 창조주가 중죄인으로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거룩한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정죄에 따르는 온갖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십자가 죽음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행하신 어떤 일보다 의도적인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만류하는데도 한사코 올라가셨습니다. 천사 열두 군단에 명하여 자신을 보호하실수 있었음에도 굳이 죽음을 지칭하셨습니다. 그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음의 고난을 받기 위해서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유. 성육신하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음이 주님의 목적이었습니다. "때"라는 표현 때가 왔다는 그의 때가 왔다는 식의 표현에 주목하며 요한복음을 읽어 보십시오 그 모든 표현이 십자가 죽음을 가리 킴을 알수 있습니다.
'죽음의 고난은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이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수치입니다. '나무에 달린 죽은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갈 3:13). 십자가 죽음은 중죄인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람이 당할 수 있는 죽음 중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따르는 모든 수치와 굴욕을 지고 못 박히셨습니다. 오, 그것은 중죄인의 죽음. 오욕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물론 그 죽음에는 육신의 고통도 따랐습니다. 그는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 셨는데,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가 이처럼 만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 죽음을 맛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죽음의 고난을 받기 위해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으셨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절정에 이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좌로 삼으셨습니다(고후 5:21) 이사야의 표현대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사 53:6) 그는 무죄했습니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단 한 번의 거역도 없이 땅의 부모를 공경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불순종과 죄책을 전부 그에게 지우셨습니다.죄로- 죄인이 아니라 죄 자체로 -삼으셨습니다. 이 모든 말에 담긴 실제 의미는 이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와 그 온전한 무게에 그대로 노출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든 사람의 죄로 보시고 그 죄를 향한 전능자의 거룩한 진노를 모조리 쏟아 부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죽음에 담긴 의미입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고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그가 진노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셨기에 우리는 그런 죽음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처럼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죽음이 아들에게 의미한 바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그와 똑같이 영원하신 분, 영원토록 아버시 품속에 계신 분, 한 시도 아버지와 멀어진 적이 없는 분. 아버지와 교제하는 것을 영원한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볼 수 없는 끔찍한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을 느끼고 소리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이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정말 이길밖에 없나이까? 이 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이며, 그것도 세 번씩이나 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고 결국 그는 복종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죄를 그에게 지우시고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가 어떻게 죽으셨는지 압니까? 십자가는 서서히 죽이는 사형 방식이었음에도 사람들이 놀랄 만큼 일찍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가 죽으신 것은 단순히 나무에 달린 탓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 버림받은 형언할 길 없는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말 그대로 그의 심장을 깨뜨렸습니다. 그를 창으로 찔렀을 때 핏덩어리와 물이 흘러나온 것은 심장이 말 그대로 파열된 탓이라는 의학적 근거가 있는 주장에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신체적 고통보다 훨씬 격렬한 영적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고통 속죄제물이 되는 고통, 추방과 진노와 두려움이 그의 심장을 깨뜨려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저와 여러분을 이같이 큰 구원의 상속자로 삼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그는 이 모든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내려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무덤에 장사되시고 그 입구가 돌로 봉인된 것.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말씀하신 '낙원"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 계셨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비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같이 큰 구원"의 크기를 깨닫지 못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를 가리켜 온 세상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요 1:30)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설교할 때 이 섬을 얼마나 놀랍게 표현했는지도 보십시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 행3:14)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살인자를 택하고 생명의 주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과 12장에도 같은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신분, 생명을 지으신분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과 고통의 분량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주님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제자들에게 때때로 함께 모여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자신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친히 하신 일과 치르신 값을 교회가 결코 잊지 않길 바라셨습니다. "너희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간이 없어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의 아들이 이 모든 일을 견디고 당하심으로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 것과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예비된 영광의 상속자로 삼으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가 이토록 여러분을 사랑하여 이 모든 일을 대신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사해 주신 것. 새롭게 태어나 새롭게 살게 해주신 것, 세상에서 사는 내내 여러분의 손을 잡고 인도하시며 마침내 하나님 앞에 흠 없이 큰 기쁨으로 서게 해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