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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계서원-소백당 원문보기 글쓴이: 박맹제
산청의 북쪽을 지키는 葛田山과 생초의 숨결
2005.5.21
1. 늘비 식당
5.21일 13:00 생초 「늘비식당」에 여섯 명이 모였다. 이천규 회원은 갈전산 산행 기점인 향양 저수지 옆에서 14:00경 만나기로 했다. ‘늘비’는 생초면 소재지가 ‘뱃설이라고도 하며 늘비라고도 하였다.’는 ‘늘비’에서 식당 이름으로 작명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국어사전에 ‘늘비’는 ‘늘비하다.’ 뿐이어서 연결이 쉽지 않았다.
늘비식당의 대표적인 메뉴는 어탕국수였다.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고 어탕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어탕국과 밥과 몇 가지 반찬이 함께 나왔는데 든든하게 먹을 만했다.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저녁으로 어탕국수까지 두 끼를 늘비식당 밥을 먹었으니 큰 인연을 맺은 셈이다.
2. 재미있는 마을 이름들
생초면 어서리를 빠져나와 향양리 쪽 지방도를 따라 골짜기를 오르니 30년 전 딱 한번 가보았던 골짜기의 이미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개울을 따라 양쪽으로 형성된 마을들과 논밭들이 낯선 곳의 신선함과 아름다움과 반가움을 더해 주었다.
길과 마을 입구에는 마을 이름을 새긴 표석들이 있었다. 휴암(鵂岩), 중암, 老隱, 旺垈, 모덕(모디기, 德坪洞), 邱坪, 院基, 向陽, 高村, 漁隱(於云洞) 등이다. 鵂岩은 ‘부엉이 덤’에서 따오고, 老隱은 裵老隱 선생의 入山淸 始居地란다. 왕성한 움직임으로 부자 마을을 바라는 旺垈, 옛날 원집이 있던 院基, 高氏들이 많이 살았다는 高村, 벼슬 버리고 隱居하며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았다는 전설과 관련이 있는 漁隱洞, 驛이 있었던 역골, 서원 또는 서재가 있었다는 書堂골 등 재미있는 이름이 많았다.
이렇게 마을이름 속에는 전설이 있고, 역사가 있으며, 사는 사람들의 소망과 기원이 깃들어 있음을 떠올린다. 그 이야기 하나하나를 아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조상들의 숨결을 전해들을 수 있을 것 같다.
3. 무덤은 인연을
어은동 입구에는 향양저수지라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다. 둑 밑에는 버섯농장이 있고 저수지 오른편 위쪽은 어은동이고 못 미쳐 위에는 사과밭이 새로이 조성되고 있었다. 임도 입구에는 무슨 찌꺼기를 톱밥과 왕겨와 섞어 썩힌 거름이 쌓여 있었다. 2시 30분. 차를 세워두고 임도를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조금 걸으니 차가 임도에 다니지 못하게 막아둔 철책이 있고 열쇠가 채워져 있었다. 왼쪽 산기슭에는 조성한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무덤 한 기가 있었다.
쌍사자상, 두꺼비 상, 여러 가지 꽃들이 심겨져 있고 잔디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상석만은 테이프를 붙여 놓아두고 있었다. 무덤의 주인이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곧 가게 될 저승 집이라고 생각했다. 자식들이 안 만들어 줄까봐 스스로 만든 것이요 아니면 자식들의 일을 덜어주려는 부모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위해 준비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왜 무덤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데 올적에는 흔적이 없더니만 갈 때에는 흔적을 만드는 것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때문인데 죽은 자를 위해 만드는 것처럼 야단들이다. 난 얼마 전에 樹木葬 이야기를 듣고 나의 수목장을 위해 나무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팝나무와 노린재나무를 생각했다. 오늘 산행 길에 꽃이 맺혀있는 노린재나무를 보았다. 꽃봉오리만 맺혀있는 노린재나무는 아름다웠으나 꽃이 지는 모습은 볼품이 없었다.
4. 갈전산
임도는 잘 닦여 있었다. 토질이 마사여서 그런지 느낌이 좋았다. 갈전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칡덩굴이 보였고 곳곳에 칡뿌리를 캐낸 흔적들이 많이 보였다. 마사토여서 뿌리가 잘 내리기도 하겠고 또 뿌리를 캐내기도 쉬울 것 같았다. 아쉬운 것은 길가에 있는 것을 파내고도 흙을 메우지 않아 산사태 원인이 될 염려가 있었다.
한 곳에 이르니 큰 산사태와 복구공사가 있었던 것 같다. 문외한인 우리 눈에는 그 공사가 제대로 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흘러내린 흙더미를 거의 직각에 가깝게 수십 미터 쌓아 올리고 윗 부분만 돌과 시멘트로 마무리했는데 심은 나무는 싹이 틀 것 같지도 않으니 걱정
<산사태 복구공사> <갈전산 큰 골짜기>
스러웠다.
길 곳곳에 송이 관리 또는 입산금지 등의 팻말이 보였다. 소나무와 마사토질이 맞아 송이 가 많은 곳으로 이야기되었다.
지그재그자 모양의 임도를 50여분 오르니 산에서 가장 큰 골짜기로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계곡에 꽤 넓은 바위가 있고 적지만 물이 조금 흐르고 있었다. 이 곳을 지나 임도를 따라가니 내려가는 길로 보였다. 그래서 되돌아서 다시 길을 찾으니 바로 조금 전 계곡 오른쪽에 ‘국제신문 근교 산 취재팀’이란 리본이 걸려 있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이 길은 무덤 가는 길이었다. 사실상 갈전산 등산로는 만든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세 개의 산소를 지나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람들이 다녔어도 길이 만들어지지 않을 바위가 버티고 있었다.
어렵게 바위 길을 다 오르니 눈앞이 탁 트인다. 멀리 함양의 황석산과 깃대봉으로 보이는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발 아래에는 향양 저수지가 환히 내려다보인다. 곧이어 오른쪽과 왼쪽이 가파른 절벽인 곳에 또 한기의 무덤이 나타났다. 현풍 곽씨 묘였는데 꽤 오래되어 보이는 비석도 있었고, 산소 앞의 바위도 모양이 좋았다. 곧 이어 능선을 만났고 왼쪽 길을 택해 잠시 후에 또 하나의 무덤을 만나니 바로 그곳이 갈전산 정상으로 보였다.
이천규 회원이 큰 도라지 한 뿌리를 캐어 껍질을 벗겨서 막걸리 안주로 하여 정상에 오른 기쁨을 같이 나누었다. 천천히 여유를 두고 걸었던 탓인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5. 돼지 산실과 다섯 개의 산새 알
정상에 오르기 직전 길이 없는 바위를 타고 오르니 앞을 조망할 수 있는 작은 바위군이 있고 바로 그 뒤에 낙엽들이 많이 모여져 있으며 그 위에 철쭉 나뭇가지가 꺾여져 쌓여 있었다. 꺾여진 나뭇가지를 살피던 박상준 회원이 아무래도 이건 사람이 꺾은 것이 아니라 짐승이 끊은 것 같은데 큰 짐승(호랑이)이 아니면 산돼지일 것이라는데 일행 모두가 동의했다. 나뭇가지에는 짐승의 이빨자국이 보이는 듯 했고 그 곳은 바로 돼지의 産室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옆의 흙만 드러난 곳은 산돼지의 목욕 터로 추측하기도 했다.
일행은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목격해서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람의 흔적과 냄새를 남겨 산 짐승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아닌가 하고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하산 길에 작은 산새 한 마리가 날아간 자리에 앙증맞게 놓여져 있는 산새 알 다섯 개를 발견했다. 모두 그 예쁜 알을 한번씩 쳐다보았다.
산 속 짐승들의 생활을 엿보는 기쁨을 누리긴 했으나 산새를 놀라게 한 미안함은 앞의 경우와 다를 바 없었다.
6. 지역간의 교류 길
지금도 산청과 거창은 문화의 차이가 느껴질 만큼 약간 다른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일행이 하산하는 길은 거창군 신원면 사람들이 산청군 늘비장(생초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던 길이라고 추측되었다. 이 길을 넘나들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고 지고 땀으로 얼룩진 애환이 서려있는 길이요. 문화교류의 길이었을 것이다.
하산하는 숲길은 그야말로 포근했다. 길에 깔려있는 푹신한 갈비가 그랬고 산허리를 돌아 다니기 쉽게 낸 길이 그러했다. 모두는 평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걸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임도를 앞두고 길은 끊어졌다. 이십여 미터의 높은 언덕이 되어있어 임도로 내려서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만든 임도 때문이었다. 끊어진 길은 다른 방법으로 다시 이어지겠지만 스스로 저지른 일 때문에 자신이 힘든 경우가 많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7. 다시 찾고 싶은 곳
출발 기점으로 돌아왔을 때는 여섯시 20분이었다. 차를 타고 어은동 마을을 둘러보았다. 포장된 막다른 길까지 갔다. 포장이 끝난 곳에서 비포장도로로 달리면 거창군 신원면 정수리로 이어지는 길인 것 같았다.
마을에는 색다른 집들이 두어 채 보였다. 이런 곳이면 사람들이 숨어살거나 퇴임 후에 살 만 하다는 이야기였다. 기회가 되면 다시 와봐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어서리 조각공원으로 갔다.
8. 조각공원
조각공원에 도착하니 18:40분이었다. 조각공원이 조성된 것은 1년 정도 지났다. 조각공원은 향토 문화 예술인인 박찬수 (목조각 연구, 여주 목아 박물관장, 중요무형문화재 목조각 108호, 부여전통문화대학 교수)와 박찬갑(돌조각 국제조각심포지엄 초대작가) 형제분의 힘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군에서는 관광자원 개발 차원에서 향토문화 예술인이 고향발전에 이바지 할 길을 열어준 셈이라고 하면 어떨는지 모르겠다.
폐교인 고읍초등학교에「예술창작스튜디오」를 만들고 연구실, 자료실, 전시실을 만들어 300여점의 저명작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산청국제조각 심포지엄 활동으로 국내외 유명작가들의 조각품을 확보하여 테마가 있는 생초국제조각공원을 만든 것이다. 2005년 산청한방축제에 맞추어 세 번째 국제조각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조각공원은 갓 조성했을 때와는 달리 돌 의자, 안내 간판, 꽃길 등 보다 많이 보완되어있었다. 늘어선 작품을 보고 있노라니 예술인들의 훌륭함과 작품의 신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쉽다면 더 큰 나무들이 군데군데 더 들어섰으면 했다.
이 조각 공원은 위쪽의 가야고분군과 함께 있어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즉 생초국제조각공원에 들어서서 귀 기울이면 선사시대의 신비로운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 하고 그 모습들이 조각공원의 작품들로 환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 조각 공원조성에 힘써주신 박찬수, 박찬갑 두 분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9. 胎峰山과 가야고분군
생초국제조각공원 바로 위 태봉산 자락에는 크고 작은 수십 기의 고분이 산재하여 경남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어있다.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대부분이 도굴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지난 2월인가 제일 큰 고분 발굴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고 유물들은 모두 가야시대 고분에서 보여지는 유물이었으며 평민이 아닌 귀족들의 묘로 추정되었다고 한다.
이 고분군이 있는 산이 태봉산이다. 대 고분군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은 이름이다. 아니 고분군이 만들어지고 나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겉으로 대 고분으로 짐작되는 무덤들이 여러 개 눈에 띄었다. 몇 곳을 둘러보니 모두 도굴 흔적을 안고 있었다.
태봉산 등산로가 최근에 만들어졌다. 한 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400m도 모자라는 높이이지만 산청의 주요 산들이 거의 조망된다고 한다. 특히 경호강의 넉넉함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너무 늦어 산행은 포기했다. 내려오는 길에 흐드러지게 피어 향을 뿜어내는 하얀 찔레꽃 무더기들을 만났다. 향기가 왈칵 안겨온다. 이 시기 시골의 산길에서 느낄 수 있는 봄의 향기요 행복감이다.
오른쪽 저쪽에는 어외산성의 성터였다는 돌 더미가 보였다. 이성은 고읍 들판을 건너다보는 강변 벼랑 위에 쌓은 석성으로 본통재를 넘어야 함양, 서울로 갈 수 있는 옛날의 교통요지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었다. 7세기경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 공방전이 잦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생초는 수해복구와 진주 함양간 국도 4차선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생초 강변에 섰던「鏡湖亭」은 이제 새로 쌓은 둑으로 강물을 내려다 볼 수 없는 뭍으로 변해버렸고 건너편에 있던 퇴적 삼각지였던 숲과 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숲 속에 있던 복숭아밭에서 복숭아를 사 먹었던 때가 1969년 여름이었다. 강산이 변할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그 모습도 변하는 게 당연한 것인가?
태봉산 등산로와 생초국제조각공원, 생초예술창작스튜디오와 전시장, 앞으로 건립될 박물관 등이 완공되고 나면 산청의 새로운 관광코스가 되고 농촌주민의 문화혜택,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리라고 보아 산청군의 비젼21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하니 기대를 걸어본다.
10. 바램과 아쉬움
태봉산을 내려오니 19:30분이었다. 늦고 시장한 터라 배를 좀 채우기로 하고 점심을 먹었던 늘비식당으로 갔다. 방이 두개뿐인 이 식당에는 여전히 손님이 많았다. 점심때는 겨우 홀에서 점심을 먹었으니 이 집이 좀 알려진 모양이었다.
어탕국수를 기다리며 오늘 일정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산청 북쪽에 있는 갈전산을 ‘산청의 명산’으로 소개를 한 이상 등산로를 다듬고 안내표지판도 설치하고, 생초 향양리에서 거창 신원면으로 이어지는 도로도 개설 포장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산청군이 가야시대부터 문화의 꽃을 피울만한 요충지이기도 했던 생초 일대를 역사문화의 향기가 가득하도록 가꾸어서 산청의 자랑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리고 지리산에서 발원해 흐르는 임천의 물과 덕유산에서 발원해 흐르는 위천이 합수되는 지점인 강정을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도 토로했다.
오늘은 큰 거죽만 돌아보았으니 자세히 살피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기로 했다.
식당 주인의 소박하고 넉넉한 인심을 느끼며 어탕국수를 맛있게 먹고 오늘 일정을 즐겁게 동행해준 일행에게 감사 드리며 다음 탐방지인 단성면 백운리 화장산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일정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