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초등학교의 수난사
1908년 홍명사립학교로 개교한 합천초등학교는 개교당시의 교실이 비좁아 수업에 애로를 크게 겪어 오던 중 1922년9월15일 합천면 사무소에서 한영렬(韓榮烈) 합천군수와 학교장 및 학부모· 지역 유지 등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면민 대회를 개최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토의를 벌였다.
이 대회에서 군수는 당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주민들의 적극 협조를 당부했다.
설명에 의하면 신축하는데 소요되는 사업비 2만원(논8만평가격) 중 주민부담액이 7천원(논2만8천 평 가격)이라 말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대회에서 세워 주기를 부탁했다.
이 날 대회에서는 합천공립보통학교 신 교사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장에 이남식(李南植)선생, 위원에 박창순(朴昌純) 강세현(姜世鉉) 진규환(陳圭奐) 이민희(李民僖) 정민종(鄭旻鍾) 이상순(李尙淳) 이종연(李鍾淵) 이경상(李景祥) 김한장(金漢章) 선생 등을 선정하고 활동에 착수했다.
이에 용주면 고품리에 거주하는 부호 문재규(文載奎)선생이 1천원(논4천평 가격 )을 선뜻 희사한 것을 위시하여 집행위원과 면민들의 참여로 신건축 교사는 일을 시작한지 6년만인 1928년 에야 어렵게 준공을 하고 희망찬 활로를 내닫기 시작했다.
좋은 일에 마가 따른다더니 이로부터 2년 뒤인 1930년3월30일 새벽2시 학교는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학교전체가 불타 없어지는 참화를 당했다.
화재로 인해 학적부와 서류일체까지 불타므로 써 합천공립보통학교는 18회까지의 졸업생명부도 영원히 없어지는 상태가 되어버렸고.
밤사이 교실을 잃은 4백 여 학생들은 눈물을 뿌리며 갈 곳이 없어 거리를 방황하게 된 처지가 되었고, 지역주민들의 허탈과 안타까움 또한 비할 데가 있으랴.
이 화재사고에 대해 경남도의 피해조사 결과, 복구에는 최소한 3만5천원(논14만평 가격)이 필요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지역에서는 4월9일 합천청년동맹에서 2차 면민대회를 열어 복구기성회를 결성하고 경남도를 방문하여 사태해결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복구기성회는 대표에 이동길(李東吉)선생, 위원에 이창홍(李昌弘) 김상규(金詳圭) 정순종(鄭淳鍾) 박운표(朴運杓) 이경상(李景祥) 강세현(姜世鉉) 이정기(李廷器) 이성환(李聖煥) 이종연(李鍾淵)선생 등이었다.
학생들은 수업할 장소문제로 어려움이 많았다. 근처의 심상소학교 일부를 빌려서 사용하고 인근의 종중재실과 공간이 넓은 개인주택 등에 편의를 구하는 등 형편의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교사의 복구공사는 경남도 학무국에서 1만원을 마련하여 이내 사업에 착수하였으며 주민부담금으로 배당된 5천원(논2만평 가격)을 마련하기 위해서 복구기성회에서도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으나, 지은 지 2년 만에 또, 모금이라니 어렵기만 했다.
학교에서 7천원을 부담하고 모자라는 사업비 1만3천원은 금융기관에서 빌려서 대체를 하기로 하는데, 상환은 학생들의 수업료를 10전씩을 더 올려서 30전으로 하여 10년 동안 분할하여 상환하는 조건으로 비교적 빠른 복구공정이 진행되어 1931년 10월에 교사가 낙성되었다.
어려운 고비를 넘긴 학교는 1945년 8월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어 학교이름을 합천국민학교로 바꾸고 학생수도 8백 명을 넘어섰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8월13일 폭격으로 학교는 본관5교실 가교사3교실 신축교사 2교실과 별관(사쓰미야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지고 파괴된 1교실만 달랑 남고 폐허로 변한 상태에서 10월25일 수업을 재개 하였다.
뿔뿔이 흩어졌던 학생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고 피난민들이 편입학 하므로 학생수는 늘어났으나 수업할 공간이 없을 뿐 아니라 교과서나 학용품도 조달이 어려웠다.
종중재실이나, 반파된 빈집과 산등성이 등을 수업장소로 사용 하면서2.3년을 보내야 했든 어려웠던 시절들이 100년의 역사 속에 오롯하다.
(합천대야신문 "합천 그때 그 시절" 연재 전 합천군수 강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