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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7년 8월 22일 저녁, 민협(부산민주시민협의회) 사무실로부터 대우조선 이석규 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숨졌다는 말을 듣고 다음날 아침 8시 배편으로 거제로 갔다가 26일 18시30분 옥포발 배로 부산으로 돌아왔다.
내가 거제 있는 동안 우리가 한 일에 관하여는 우리가 그곳에 있을 때부터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내가 부산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에도 계속 정부나 언론의 공격을 받아왔다.
마침내 이상수 변호사는 먼저 구속되었고, 나는 9월 2일 23시경 장례식 방해,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등의 죄명으로 구속되었고 지금 해운대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앉아 있다.
나는 이후에도 이 문제에 관하여 수사 과정에서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반역적 독재집단의 잔재들로 이루어진 정부의 탄압이 있고, 그 장단에 춤추는 검찰과 법원이 있을 뿐 진실을 밝히려는 정의를 세우려는 검찰도 법원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였던 선량한 우리 대중들마저 언론의 거짓말 보도 아래 판단이 흐려져 있는 듯하여 진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이하의 기록은 기억이 허용하는 한 내 양심을 건 진실임을 밝힌다.
87년 8월 22일 저녁(정확한 시간은 기억 안 남). 이호철[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 사무국 부장]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대우조선 농성근로자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병원에 옮기던 중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아울러 부산에서도 누군가가 가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누가, 왜, 무엇 하러 가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전혀 대화가 없었으나 지금껏 있어왔던 사체 탈취와 화장, 사건은폐, 보도통제 등의 선례로 보아, 되도록 빨리 진상을 조사해 둘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저녁에 내 차로 거제로 가볼 양으로 옷을 갈아입고 민협 사무실로 나왔다. 가는 길에 생각해 보니 밤중에 가봤자 제대로 할 일도 없을 것 같아서 다음날 아침에 가자고 약속을 하였다.
이석규 사망은 공권력의 국민 적대 만행
8월 23일 아침 8시. 나와 이호철, 홍OO, 조OO(익명 처리)가 함께 연안여객 부두에서 배를 탔다. 도중에 배의 고장으로 거제 장승포항에 도착한 것은 9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장승포항에서 우리는 대우조선 해고근로자 한 사람의 안내를 받아 그들로부터 사건 경위를 들으려 하였으나 그들도 사망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본 것은 아니라 하므로 우리들은 일단 대우병원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우병원에 들어간 것이 오전 10시경이었다.
대우병원에 도착해 보니 밤을 새운 듯한 노동자 400~500명이 여기저기 웅성웅성 앉아 있기도 하였고 소수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경비는 삼엄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체계가 없고 어지러운 분위기였다. 그곳에서는 전날 저녁에 노조 집행부 간부 일부와 민주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지역주민들이 공동으로 ‘진상규명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두고 있었다.
우선 그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안내로 분향을 마친 다음, 대강의 얘기를 듣고는 그들의 소개로 노조 집행부와 인사를 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마산운동본부(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마산본부)의 김영식 신부와 같이 온 한 사람을 만나서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노조위원장 양동생은 멀리까지 와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장례 등은 자기들이 맡아서 할 수밖에 없으나 여러 가지로 잘 모르는 점이 많을 것 같으니 조언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였다.
노조 집행부는 너무 분주하여 누구를 붙잡고 사건 진상을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김영식 신부나 나나 장례에 관하여 뭘 아는 것도 없고, 막막한 심정이 되어 걱정만 하고 있는데, 양권식 신부가 왔다. 그때가 11시경이나 되었을까? 그는 16일경부터 그곳에 와서 노조 집행부와 대화를 하고 있었고 협상에도 깊숙이 개입하여 있었다.
그리고 이제 장례위원회 구성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어제저녁에 그 대강을 노조 집행부에게 조언해 주었다고 했다. 이어서 현지 민주인사, 부산운동본부(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 마산운동본부 사람들과 양권식 신부와 함께 대책회의 비슷한 회합을 가졌다.
양 신부가 지금까지의 분규 경과, 사망 경과, 그리고 장례위원회 구성에 관한 복안 등을 죽 설명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자연히 회의를 그가 주관하는 셈이었다. 그는 장의를 전국노동자 장으로 하고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은 전국 노동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모시고 장례위원은 300명 정도로 하되 거제 현지 노동자와 유지 100여 명을 모시고 나머지는 재야인사들을 모시기로 하고, 저명인사 몇 분을 고문으로 위촉하여 실제로 업무를 추진하는 집행위원장은 노조위원장이 되고 그 아래 여러 개의 실무부서를 두되 각 실무부서에 운동본부 실무자와 현지 인사들이 한두 사람씩 들어가서 협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논리는 정연하고 인상은 성실해 보였다. 그 뒤에 우리는 아무 준비도 없던 상황에서 매우 정비된 제안을 받은 셈이니 어떤 이의도 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우리 쪽도 여러 사람이 모였으니 이곳에서 계속 할 일이 있다면 전체를 통제하고 노조나 기타 대외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입장과 의사를 대변하는 지도부 같은 것이 있어야 할 사정이고, 그 일에는 양 신부가 노조와는 이미 얼굴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사정에도 밝고 더욱이 연세대 이한열 군 장례에 시종 관여했던 경험도 있다 하니 딱 적임인데, 그는 굳이 그날 저녁 안으로 서울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라 하여 우리는 김영식 신부를 대표자로 내정하였다.
점심은 굶은 채 오후에는 양 신부, 김 신부 등과 노조 집행부 함께 연석회의를 하였다. 그 자리에서 ‘전국노동자 장’이 결정되었고, 장례위원회의 구성도 양 신부의 안대로 결정이 되었다. 이 자리에서 노조 집행부 누군가의 입에서 가족이 광주 망월동 묘지를 원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 문제는 최종적으로는 가족을 만나 협의하기로 하고 산회했다.
그 논의 얼마 후 대우조선 해고 노동자를 장례위원회 실무부서에 편입하는 문제도 논란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해고 노동자 쪽을 설득하여 실무부서에 들어가지 않도록 결정을 지어주었다. 이 논의과정에서 노조위원장 양동생이 해고 노동자들은 의식화 교육을 받은 불순분자라는 취지의 말을 하여 김 신부와 운동본부 사람들은 마음이 좀 상했다. 그 직후 김 신부가 볼일이 있다며 가버린 것이 그 때문이었는가는 잘 알 수 없다. 다음날 천주교단 자체에 무슨 행사가 있다는 말을 미리부터 하고 있었다. 어떻든 김 신부는 25일경 돌아왔으나 매사에 별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 87년 8월 23일 옥포대우병원 앞마당에서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순국 진상보고 대회사’를 하고 있는 노무현 변호사 |
오후에는 양 신부의 권유로 장승포 성당에 가서 점심을 얻어먹고 좀 쉬었다. 그날 14시경 연다던 ‘사망경위보고대회’는 준비가 늦어 뒤로 밀리다가 17시경에 열렸다. 처음 무슨 말을 한마디 해달라고 하였으나 여기저기 나서는 것이 마치 얼굴 팔러 다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거절했다. 그런데 17시가 가까워오자 다시 성당으로 연락이 와서 할 수 없이 나왔더니 대회사를 해달라 하여 대회사를 하였다.
대회사에서 나는 “이 사망은 공권력이 국민을 적으로 보는 전투적 행위에서 빚어진 살육인 동시에 그동안 노사 분쟁에서 사용자 측의 서류탈취 등 불법이나 구사대의 폭력에 대하여는 수수방관하던 공권력이 노동자의 폭력에 대하여는 구속으로 나서는 편파적 개입의 연장선상에서 저질러진 노동자에 대한 적대행위이므로 우리 전 국민과 노동자가 함께 이 같은 만행을 규탄하여야 하고, 그것만이 이 같은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막는 길”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
그 집회가 끝난 후 노조 집행부가 폐회를 선언하자 흥분한 노동자들은 갑자기 ‘나가자’ 라는 함성과 함께 가두시위로 나섰고 집행부는 뒤늦게야 이를 만류하는 방송을 하였으나 항의만 빗발칠 뿐 전혀 효과가 없었고, 조금 후에는 경찰이 병원 앞마당까지 최루탄을 쏘는 바람에 분위기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 얼마 전부터 검찰이 부검을 하러 오겠다고 양 신부와 의논이 되었으나 분위기가 악화되어 부검은 다음날로 미뤘다.
집회가 열리기 얼마 전 서울 노동단체의 대표들이 왔었고, 집회시간쯤 서울운동본부(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서울본부)의 김도현 씨와 이상수 변호사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김봉조 의원(민주당)은 오전부터 왔던 것 같다. 이미 김 신부가 나가버림으로써 사실상 우리 쪽 지도부가 부재한 상태에서 서울 쪽 사람들이 대거 내려오고 보니 부산, 경남, 거제 사람들로만 엉성하게 만들어 놓았던 협의체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고, 이후 25일 저녁까지 운동본부 임원들은 임원들대로 청년운동가들은 그들대로 적당히 이미 하고 있는 일에 끼어들어 자연스럽게 일이 돌아갔다. 그러나 체계가 없으니 일이 무질서 하였던 것은 사실이고 일부는 일을 돕는다기보다 진행상황을 기록 정리하여 각 소속단체로 전달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날 저녁 이 변호사와 나는 노조 집행부와 함께 고 이석규 씨의 가족을 만나보았다. 양 신부도 동행하였던 것으로 기억하나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어머니와 형, 그리고 백부, 외삼촌 등 여럿이었는데, 그들은 보상에 제일 깊은 관심을 보였다.
처음 그들은 부모 먼저 죽은 자식을 고향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으니 화장을 하겠다고 했는데, 노동자들이 대우조선 안에 묻겠다고 하므로 이곳은 너무 머니 그러면 옛날에 최루탄으로 죽은 한열이가 묻힌 곳에 묻었으면 좋겠다고 하였고, 노조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하였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이미 노조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노조가 보상 문제에 관하여는 전혀 아무 대책도 생각함이 없이 장례를 서두르는 데 반하여 가족들은 보상을 받기 전에는 시신을 한 발짝도 옮길 수 없다고 했고 오히려 노조 간부가 보상은 여기 변호사들이 잘해 줄 거라고 말했고, 가족들도 그렇다면 노조에서 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이어서 누군가가 광주 5·18묘역에는 자리가 없을지도 모르고, 시영이라서 광주시의 허가를 얻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였다. 그 걱정 끝에 전태열이 묻혀 있는 서울 모란공원 묘역도 좋다는 의견이 나왔다. 가족들도 흔쾌히 응했다. 광주를 원칙으로 하되 광주에 장지를 얻기 어려우면 서울로 하자는 합의에 어느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오히려 난감하게 된 것은 변호사 둘이 터무니없이 보상 문제에 대한 약속을 한 셈이 된 일이었다.
김우중에게 법률적 책임이 없음은 명백하고,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정부가 진실을 은폐하려 할 텐데 우리가 국가의 과실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분명 가족들의 입장은 보상 없이는 장례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법적으로 보상을 받으면 된다는 말을 듣고 장례절차는 노조에 일임한 것인데 우리가 과연 그런 책임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가족과 만나기 전부터 바로 이 보상 문제 때문에 장례를 무기한 연기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었다. 자신의 책임이 이같이 분명하게 된 후에는 장례의 무기 연기를 계속 주장하게 된다.
23일의 일은 이 정도로 끝이 나고 이 변호사는 호텔로 갔고 양 신부와 나는 청년들과 함께 밤늦게야 여관에 들었다. 그곳에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지적되었다.
첫째,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매우 흥분하여 있으나 집행부에서 부여받은 일로 뛰어다니는 사람들 이외에는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앉거나 서서 잡담을 할 뿐이고, 서성거리고 있는 동안 지리멸렬한 오합지졸로 변하여 노조 집행부에서 조직적으로 통제를 할 수도 없고 반면에 조그만 자극에도 무분별한 가두 진출과 폭력이라는 행동으로 나아갈 우려가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대중에 대한 신속하고도 체계적인 정보전달의 체계, 흥미를 끌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 등의 수단을 통하여 대중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을 가능케 하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대중을 질서 있는 집단으로 유도하는 한편, 그와 같은 작업을 노조 집행부가 주도함으로써 노조 집행부의 지도력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지금은 노동자들이 고 이석규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슬픔으로 오로지 장례의 의제를 전체 노동자와 전 국민이 함께 분노하도록 확산시켜 나가는 것만이 동지의 도리라고 생각하여 오로지 장례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태도에는 고 이석규의 죽음을 노사협상과 연계하는 것이 남의 불행을 자기들의 이익으로 이용하는 것 같이 생각될 것을 우려하는 심리도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노사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장례를 치를 경우 자칫 장례식 때에는 또 한 번의 예상 못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장례식이 광주나 서울로 될 경우 경찰이 장례행렬을 저지하려 할 것은 명백하므로 이러한 우려는 매우 가능성 높은 것이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장례 전에 임금협상이 타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떻든 서울로 가야겠다던 양 신부가 그럭저럭 발이 잡혀 결국 25일 저녁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 나도 사실은 하루 만에 돌아오려고 했는데, 다음날 부검 참여, 장의 절차 논의, 노조집행부와의 논의 창구 역할 등의 문제로 계속 눌러앉았다.
장지, 광주 망월동이냐 서울 모란공원이냐
8월 24일 오전에는 부검이 있었다. 참혹한 죽음이었다. 부검 도중에 사인이 확인되는 부분을 보고 먼저 나와 버렸다. 이날 오전부터는 노동청년들이 대자보, 유인물 등으로 노동자들의 관심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있었으나 아직 집회 프로그램 등은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재야사람들은 각 지역에서 모였고, 서로 운동 분야가 다른 점 등으로 우리들 상호 간의 의견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하여 오후 2시경 장승포 성당에서 모였다. 이때 이 변호사와 나, 장승포 성당 강 신부가 함께한 것으로 명확히 기억이 되나 양 신부가 그곳에 함께 하였는지는 기억이 확실하지 않으나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기에서 노동자 장을 국민장으로 하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장지는 광주와 서울 두 군데로 의견이 갈리다가 결국 서울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마지막 장례일자에 관하여도 7일장, 9일장 등의 의견이 있었으나 나는 무기 연기를 주장했다. 결국 피해자 보상, 사과, 가해자 처벌 등의 원칙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7일장이나 9일장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선행조건이 타결된 후에야 장례를 할 수 있다는 조건부의 것이었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조건부 7일장이냐, 무기 연기냐는 노조와 의논 과정에서 기술적으로 선택할 문제로 남겨두자고 의견을 모았다.
다만 우리는 이 논의에서 우리들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노조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정도일 뿐이고 최종 결정은 노조가 할 사항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와 같은 결정의 이유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기보다 그런 원칙의 확인 없이 노조와 대화를 할 경우 자연히 이쪽의 주장이 집요하게 되고 그럴 경우 노조에게 지나친 간섭이라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위에 거론된 문제들은 유족들과도 협의가 있어야 할 문제이나 그 문제는 전날 저녁에 이미 유족과 합의가 명백히 되어 있었던 것이라 별문제로 보지 않았다.
15시에 노조 집행부와 연석회의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사무실로 갔더니 노조 위원장이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위원장 양동생이 김우중을 원망하면서 ‘기본급 10,000원, 현장수당 20,000원, 주택수당 10,000원’이나 ‘기본급 20,000원, 현장수당 10,000원, 주택수당 10,000원’이나 무슨 큰 차이가 있느냐 라는 말을 하는 것을 얼핏 들었다. 알고 보니 낯선 사람은 노동부 부산지청장이었다. 그 대화내용에 따르면 결국 위원장 양동생은 기본급 20,000원, 현장수당 10,000원 주택수당 10,000원이면 합의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낯선 사람이 가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 변호사, 양 신부, 강 신부, 거제 황 선생, 내가 함께하였다. 노조 측에서도 대부분의 임원들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가족을 모셨다. 가족을 모셔야 한다는 것은 이 변호사가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족들이 장례는 5일장으로 하고 장지를 남원으로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뒤에 알고 보니 뒤늦게 부검할 때 도착한 삼촌이라는 사람이 오고부터 갑자기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곳에서는 삼촌이라는 사람이 현역 소령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고, 신문에는 교사라고 나왔다. 지금도 보상 문제로 그렇게 애를 태우던 가족들의 입장이 어떻게 하여 순간 그렇게 바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너무나 뜻밖이었으나 가족들 간에도 다시 한 번 의논을 해보아 달라고 하고 우선 논의를 시작하였다. 처음 장례 명칭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장례 명칭 문제의 논의가 시작될 무렵 노조간부 한 사람이 구속자 석방 교섭에 나서 달라고 하여 김봉조 의원을 따라 옥포호텔을 다녀오는 바람에 회의에서 빠지게 되었다.
갔다 와 보니 명칭 문제는 국민장으로 결정되었고, 장지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노조 임원은 본시 10명이 넘었던 사람들이 각기 맡은 일을 하러 나가고 4명만 남아 있었고 양 신부, 강 신부 두 사람과 이 변호사, 현지 황 선생으로 입장이 나뉘어져 서로 설득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신부 두 분은 광주 망월동 묘지가 좋다는 입장이고 이 변호사와 황 선생은 서울이 좋다는 입장이었다. 형식적 논리로는 최루탄으로 사망한 사람이니 이한열 군 묘역이 좋다고 할 수도 있고, 노동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이니 전태일이 묻혀 있는 서울 모란공원이 고인의 죽임의 의미를 오래 기리는 것이라는 의견 대립일 수도 있었으나 근본적으로는 이 사건의 의제를 어느 정도 국민에게 크게 부각시킬 것인가의 입장 차이와 대우조선소의 노사분규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 어느 쪽이 유리할 것인가에 관한 근본적 입장의 차이에서부터 연유하는 의견 대립이었다.
어떻든 문제는 노조 집행부 임원은 4명 정도만 앉아 있는 상황에서 원칙적으로 그들에게 조언하고 조력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장황하게 논의를 계속하는 것이 자칫 주객이 전도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그동안 충분한 표의는 되었으니 결정을 노조에 맡기기로 하고 산회하자고 제의하여 산회가 되었다. 나머지 장례일자에 관한 문제는 저녁 먹고 다시 논의를 하기로 하였다.
(중략)
이날 저녁(24일 10시경) 노조위원장은 기자들 앞에서 6개항 요구조건, 장례 무기 연기 선언을 했다. 이 선언이 노사분규 자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 점에 관하여는 이제야 수습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입장과 점점 수습이 어렵게 되어 버렸다고 보는 입장이 나뉘었다. 그러나 이 선언이야말로 노사분규가 수습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언론의 어떤 왜곡보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실이다.
24일에는 부검을 마치고 부검 결과 보고 집회가 있었으나 집회 후 별다른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25일부터는 노동자들의 수가 현저히 늘어났고, 대자보 유인물 집회 등을 통하여 차츰 질서가 잡혀갔다.
유족들의 태도 돌변, 노사협상은 교착
8월 25일 오전. 민주당 조사단이 왔다. 얼마 후에 그들은 노조 간부 몇 사람과 양권식 신부와 함께 병원 회의실에서 회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 변호사와 함께 갔다. 가 보았더니 회합은 거의 끝난 상태였다. 끝난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가서 판을 깨었는가? 진상조사를 하러 온 민주당원들이 굳이 우리를 빼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노조에 영향을 주어 요구조건을 내걸고 장례를 무기 연기하게 한 것이 분규의 수습에는 관심이 없고 문제를 파국으로 몰아가려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다.
우리가 가서 앉자 최형우 부총재가 어떻게든 문제를 수습해야 한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그런 오해는 분명했다. 그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밝혔다. 우리도 분규의 원만한 수습을 원한다. 다만, 우리는 장례의 무기 연기라는 이쪽의 분명한 결의가 결국 빠른 수습의 실마리가 된다는 점, 그리고 수습을 위한 협상도 항상 그 결론이 대의와 원칙에 최대한 접근된 것이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후에는 규탄대회가 있었다. 이소선 여사의 발언 등에 이어 옥포호텔에서 전경으로부터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한 아주머니의 진상보고, 픽업으로 전경을 치었다 하여 구속된 사람의 가족의 호소, 최루탄을 가지고 놀다가 폭발하는 바람에 배를 다친 9세 어린이의 어머니의 호소 등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나온 처절한 참상을 그 뒤 누구도 보도하지 않았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장지를 서울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집회를 마치고 나서 다시 분위기를 이어갈 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던지 서울에서 온 노동운동가들이 나서서 노래를 가르쳤다. 혹시나 거부감을 보일까 싶어 불러내고 노동자 자신들에게 맡기라고 권유했다. 조금 있으니 대우 노동자 사이에서 누군가가 나와서 노래 등을 재미있게 끌고나갔다. 그동안 경인지역 노동운동가들의 활동이 매우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는데, 그들은 잘해나갔다. 그들은 과격시위를 선동하지도, 과격 주장을 한 일도 없다. 장례위원회 실무부서에서 열심히 맡은 일을 하거나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대화를 하는 등으로 대우조선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는 것 같았다. 덕분인지 우리도 다니다 보면 노동자들에게 ‘고맙다, 수고한다’는 인사를 자주 받았다.
25일, 노동자들은 수가 많아지고, 질서가 잡혀가고 노조 집행부도 자신감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리드하는 모습이 뚜렷이 드러났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24일 오전 고인의 삼촌이 들어온 후부터 유족들이 종전 입장을 바꾸어 24일 오후부터 장지 등 절차에 이의를 제기할 때만 해도 노조나 노동자들의 바람이 모두 광주나 서울로 모여 있어서 노조에서 쉬 설득할 수 있으리라 보았는데, 의외로 25일이 되니 태도가 더욱 완강해졌다는 것이고, 더욱 난감해진 것은 24일 오후 노조의 강경 선언이 나오자 그 다음 날부터 각 신문사 데스크에서 취재기자들에게 취재방향을 지시하였다는 소문이 나돌고, 실제는 취재방향도 현저히 달라진 것이 눈에 보였다. (가족과 노조, 재야 3자 간의 갈등의 증폭, 노조가 재야 손에 끌려가는 듯한 인상의 확대)
드디어 오후 5시에 유족들이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다. 자기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모든 것은 장례위원회에 맡기기로 하고 보상이나 꼭 좀 받게 해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또 장례를 크게 한다는 말에 공감을 표시하던 사람들이 왜 그렇게 달라졌는가. 어떻든 그 결정이 가족 자신들에게나 노동자들에게나 우리 국민에게나 어느 모로 보나 잘못된 결정이라는 사실은 머지않아 밝혀질 일이나 당장 답답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변호사와 나는 유족들이 기자회견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설득해 보기로 하였다. 공교롭게도 이때도 나는 우물쭈물하다 보니 이 변호사 혼자 가서 설득을 하게 되었고, 내가 갔을 때는 이 변호사가 일어서 나오는 참이었는데 한마디 거들었다. “한 개인의 죽음으로 묻어 버리지 말고 잘 생각해 보아 주십시오”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 권유가 뒤에 장[례]식 방해라는 범죄사실이 되니 어처구니없다.
그날 저녁. 이 변호사와 나는 양 신부와의 사전 회합을 그쳐 노조 집행부 회의에 참여하였다. 그 회합은 양 신부의 요청으로 열린 것이고 사실상 양 신부가 주재한 것이었다. 양 신부는 우선 우리를 만나서 김우중이 옥포호텔에 와서 협상을 포기하고 가려고 하는 것을 겨우 빌어서 1시간 정도 말미를 받았으니 이제 최종적으로 노조와 한 번 더 절충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도 노조를 설득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함께 참석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노조에서 내건 임금요구 조건은 기본급 20,000원, 현장수당 20,000원, 주택수당 10,000원이었으나 전날 노조위원장이 부산노동지청장을 만났을 때 나눈 대화로 보나 일반노동자들의 분위기로 보아 실제요구는 기본급 20,000원, 현장수당 10,000원, 주택수당 10,000원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회사 측의 기본급 10,000원, 현장수당 20,000, 주택수당 10,000원이라는 조건 사이에서 총액은 같고 단지 돈 10,000원이 기본급여로 가느냐 현장수당으로 가느냐의 차이로만 생각하고, 기본급과 현장수당 간에 15,000원 : 15,000원이라는 방식도 권해보면 어떻겠느냐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고 회의에 참석한 것이었다.
회의가 열리자 양 신부는 이제 김우중이 협상을 포기하고 서울로 가려는 최후의 순간임을 말하고 노조의 마지막 카드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노조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협상금액을 말하기 전에 김우중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고, 대우조선이 적자라는 것이 대우계열기업과의 거래에서 흘러나가는 부분, 경영부실 관리부실 등에 기인한 것이라거나 저임금이 노동생산성 저하, 자재낭비로 이어지는 요인이라는 등의 얘기가 계속된 다음, 10원 한 장도 후퇴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날 저녁 노조가 재야에 끌려간다거나 재야가 불순단체라거나 하는 등의 KBS 방송 내용이 이들의 감정을 건드린 결과인가도 생각해 보았다. 어떻든 우리는 한 마디 양보를 권해 볼 엄두도 못 내고 물러나왔다.
장례 무기 연기가 협상 타결에 주효
그날 밤 아니 8월 26일 새벽 2시. 김우중은 기자회견에서 협상 포기, 장례 후 협상을 선언했다. 이에 대한 노조 간부들의 반응은 김우중이 노동자 하나 죽어 갖고는 끄떡도 없는 모양이다, 여럿 죽어야 될 모양이다거나 대우조선 그만두라 해라, 우리도 김우중이 대우조선 그만두는 꼴을 봐야겠다는 등의 말로 표현되었다.
그날 저녁 늦게는 우리 재야운동가들 전원이 병원 인근 잔디밭에서 회합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청년운동가들은 직접 모든 일을 도와주려고 하지 말고 그들 손으로 직접 일을 해보도록 해야 한다는 반성들이 나왔다. 그와 같은 반성의 요지는 바로 건전한 노조의 육성을 위하여는 그들에게 일을 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장기적이고 온전한 노조운동을 전제로 한 것이지 결코 이 판단은 폭력시위나 소요의 판으로 끌고 가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 반성뿐만 아니라 일 전체에서 건전한 노조의 경험을 최대한 이전해 주고자 하는 노력들이 역력하였다. 그밖에 우리는 우리들의 활동이 너무 의욕이 넘친 나머지 산만해지고 무질서해질 우려가 있다 하여 체제를 정비해 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날 밤 늦게 조선일보 기자 한 사람에게 저녁에 노조 회합에서 노조 간부들이 발언했던 요지를 정리하여 전해 주었다. 그때까지 기자들의 취재방향이 너무 피상적이고 사용자적 시각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시도해 보았던 것이었으나 역시 보도는 없었다.
26일 아침부터 별 할 일이 없었다. 노조에서는 어제저녁 KBS의 보도에 대하여 반박성명을 발표하였으나 보도가 된 것은 보지 못하였다. 그날 KBS 기자는 쫓겨났다. 11시경 김봉조 의원이 노조 집행부와 협상을 하고 있었다. 이 변호사가 노조의 설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돕겠다는 내용의 쪽지를 김 의원에게 전한 후 김 의원과 병원장 부속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이 변호사는 또 기본급과 현장수당 간에 15,000원 : 15,000원 방식도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잊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면서 이 변호사와 나는 협상이 원만히 타결될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김우중이 협상 테이블에 다시 나오도록 한 것은 결국 장례 무기 연기라는 카드가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자평하였다.
그리고 다만 노조에서 유족 보상의 문제, 구속자 석방 문제 등을 모두 놓쳐 버리지 않을까 걱정되었으나 그 문제는 더 끼어들지 말자고 의논하였다. 이제 어려운 문제는 거의 매듭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점심 먹고 여관에서 한숨 자고는 저녁 18시 30분 배로 부산으로 왔다. 물론 부산운동본부에서 급히 돌아오라는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내가 거제에서 겪은 일의 전부이다.
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
87년 8월 22일, 거제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가 죽었다. 노사분규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이 가슴에 박혔다. 선각소조립부에 근무하던 스물한 살의 청년 노동자였다. 故 이석규 열사. 그의 죽음은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저지른 타살이었다. 불과 한 달 반 전 6·29선언을 불러온 연세대생 이한열과 같은 죽임이었다. 그해 여름, 민주화 열풍을 타고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노동자들의 생존권 및 노조 결성 투쟁 와중에서 이석규 열사 사건으로 전국은 다시 한 번 들끓었다. 당시 대우조선은 세계 조선업계의 불황과 경영부실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임원 감축에 따른 대량 해고가 단행됐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기능직과 사무직 간 차별이 문제가 되었다. 연초부터 일어난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움직임은 회사 측의 방해로 번번이 좌절된 가운데 6월항쟁을 거치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8월 8일 대우조선 노조 결성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간단치가 않았다. 노조 활동 경험도 없었고, 첫 선출한 노조위원장의 어용시비로 내홍을 겪었다. 그리고 11일 새 노조(양동생 노조위원장)가 결성됐다. 이후 회사와 노조 간 임금인상 등 협상이 재개됐고, 기본급과 수당 인상 폭 등을 놓고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하지만 회사 측의 불성실한 교섭이 반복되면서 21일 회사는 노조와 협상을 거부한 채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노동자와 현지 주민이 합세한 2천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가두로 진출하여 관리직 사원들의 임시사무소가 있던 옥포관광호텔로 몰려갔다. 그리고 이를 막는 경찰과 옥포사거리에서 대치하며 연좌 농성이 시작됐다. 22일. 노조가 최종안을 제시했으나 회사가 또다시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자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이에 노동자들의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들의 무차별 최루탄 난사와 백골단(경찰 사복조)의 폭력이 자행됐다. 이날 오후 2시40분 이석규 씨가 쓰러졌다.
22일 밤늦게 연락을 받은 노무현 변호사는 23일 아침 배편으로 거제로 건너간다. 대우 노동자들이 사체 부검 입회와 진상조사를 요청했던 것이다. 당시 노 변호사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서울, 마산 등지에서 양권식 신부, 김영식 신부 등 사제들과 재야단체 관계자들을 비롯하여 이소선 어머니 등 노동단체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노무현 변호사는 서울에서 내려온 이상수 변호사(참여정부 노동부 장관)와 함께 노조 집행부 등 대책위원회와 유가족을 만나 장례와 보상 등을 논의한다. 이어 오후에는 시신이 안치된 옥포대우병원 앞에서 열린 ‘진상보고 국민대회’(제1차)에 참석한다. 24일 오전, 부검이 실시됐다. 대책위는 장례를 ‘민주국민장’으로 치르고, 장지는 광주 망월동 5·18묘역과 전태열 열사가 묻혀 있는 서울 모란공원 중 택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노무현·이상수 변호사에게 보상 문제를 힘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례절차 일체를 노조 집행부에 일임했던 유가족들이 태도를 바꿔 장례를 고향인 남원에서 개인장으로 치르겠다고 주장한다. 그 배경엔 뒤늦게 현지에 도착한 고인의 삼촌(육군 소령)이 유족 대표를 맡으면서 회사와 경찰의 회유 아래 결정한 것이었다. 유가족의 돌연 태도 변화에 노조 집행부와 대책위는 장지가 어디냐 보다는 고인 사망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책임자 처벌△당국의 공개사과 △피해자 보상 △노조요구 수용 등 6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장례식 무기 연기를 선언한다. 이 결정이 발표되자 정부와 언론은 ‘사체를 볼모로 한 노사쟁의’라며 사태 수습에 나섰던 재야인사 등을 ‘불순세력’으로 몰아간다. 25일 병원 앞마당에서는 제2차 국민대회가 열렸고, 한편에선 양 신부와 민주당 조사단의 중재 아래 노사 협상이 진행됐다. 마침내 27일 임금협상이 타결됐고, 28일 장례식이 결정됐다. 하지만 장례 관련해선 유족 측의 결정에도, 농성 노동자들은 장지를 광주 망월동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28일 오전 10시 30분. 병원 안팎으로 2만 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이 거행됐다. 오후 3시50분경 운구차가 옥포를 떠났고, 광주로 가는 도중 경찰의 시신 탈취 작전(?)이 벌어졌다. 경찰에 의해 운구차는 강제로 멈춰 섰고, 사람들은 경찰차에 태워져 연행됐다. 그리고 이석규 열사의 운구는 유가족들과 경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향 선산에 쓸쓸히 묻혔다.
노무현 변호사는 임금협상 타결 직전인 26일 밤 부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9월 2일 밤, ‘장례식 방해’와 ‘노동쟁의조정법상 3자개입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부산구치소에 수감된다. 노무현 변호사를 비롯 이상수 변호사, 신철영 당시 산업선교회 간사 등 모두 50여 명이 장례식 방해, 노동쟁의조정법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87년 9월 23일. 노무현 변호사의 구속적부심 재판이 열렸다. 법정에는 부산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 99명이 출석했다. 구속적부심 재판에 99명의 변호사가 출석한 것도 드문 사례였다. 결국 구속적부심이 받아들여져 피의자 노무현은 23일 만에 석방됐다. 재판결과, 노 변호사에게는 87년 11월 변호사 업무 정지처분이, 이듬해인 88년 2월 22일 벌금 1백만 원이 선고된다. 물론 불복해 노무현 변호사와 검찰 모두 항소하지만, 기각당한다. |
“분규타결 노력이 어찌 죄가 되는가”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 관련 당시 검찰이 제기한 ‘장례식 방해’와 지금은 폐지된 악법인 ‘노동쟁의조정법 제3자 개입 금지 위반’ 혐의에 대한 노무현 변호사의 반박 글이다. 이 글에서 노 변호사는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한 활동이 장례식 방해가 된다는 것은 억지”라고 강변하며, “분규타결과 사태수습 노력이 어찌 죄가 되는지”를 따진다. (편집자주)
영장에 기재된 소위 범죄 사실에 대한 나의 항변 ---변호사 노무현
- 장례식을 방해하거나 노동투쟁을 조종 선동한 사실이 있는가.
o 전혀 그런 사실 없다. 영장 기재 범죄 사실은 전부 날조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사 분규과정, 사망의 경위, 장례위원회의 구성과정 등 제반 배경이나 부수적인 상황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왜곡 날조되어 있다.
- 옥포에 간 이유는 무엇인가
o 첫째로 대우조선 노동조합에서 사인규명, 장례절차 등에 관하여 국민운동본부의 도움을 청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o 둘째, 과거 노동자나 민주열사의 분신 사건에서 경찰이 사체를 탈취한 선례가 여러 번 있음은 물론이고, 공권력에 의하여 국민이 사망한 경우 진상을 은폐 조작 발표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민권단체에서 진상조사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o 셋째, 조사결과 과잉진압에 의한 피해이거나 거의 고의에 가까운 살인행위라 할 경우 이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장례와 추모행사를 통하여 강력히 규탄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효과를 거두자면 장례의 규모나 방식 등이 진상의 폭로와 범국민적 규탄의 뜻을 모으기에 적합한 것이어야 하므로 조사결과에 따라서는 장례절차에 관하여 유족과 노동조합에게 그러한 뜻을 함께하도록 권유 조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왜 그러한 일을 국민운동본부에서 해야 하는가
o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22일 저녁 거제 현지에서는 현지 민주인사(장상훈, 황 선생 등)와 노조 집행부가 합동으로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 첫째 작업으로 국민운동 부산본부에 진상조사, 부검 참여 등 대책 협조 요청을 하였다. 부검 참여는 가급적 변호사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본인은 변호사이자 부산운동본부 상집위원장으로 현지에 간 것이다.
- 장례위원회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기존 장례위원회라는 것이 있었는가
o (이 변호사는 23일 오후 늦게 도착. 장례위원회 구성 문제에는 관여할 수도 없었다) 8월 23일 10시. 대우병원에 도착하여 보니 주민 대표 수 명과 노조 집행부 임원 몇 사람이 ‘진상규명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협조 요청을 한 것도 그 위원회의 활동의 일환이었던 듯하다.
o 대강의 사태를 파악하고 11시경 양권식 신부를 만났다(그는 그 일주일 전부터 노사 간의 협상에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미 전날 저녁 장례위원회의 구성에 관한 대강의 구상을 노동조합에 조언해 주고 있었고 우리를 만났을 때에도 그 구상을 말하였다. 그 구상에 따라 12시경 확정한 것이 ‘전국노동자 장’의 장례위원회 조직이고, 그 이후 24일 오후 명칭이 ‘국민장’으로 바뀐 후에도 장례위원회 구성은 변하지 않았다. 이 장례위원회의 구성은 노동조합과의 완전한 합의(12시 회의)로 된 것이고, 그 이전에 무슨 위원회가 있었던 일도, 누구의 반발도 없었다.
o 이후 일반 노동자들은 재야인사의 활동에 감사하고, 지지하였다.
장례 관련 협의, “한국노동운동사에 죽음의 뜻 기려야”
- 장지 문제에 관한 마찰은 어떻게 된 것인가.
o 이 변호사와 내가 유족을 처음 만난 것은 23일 저녁이다. 그 이전에 이미 가족들은 부모보다 먼저 미혼으로 죽은 자식은 고향으로 갈 수도 없고, 묘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하여 화장할 의사를 표시하였는데, 노동자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대우조선 뜰에 묻겠다고 하자, 그러면 전에 최루탄 맞고 죽은 학생 묻힌 그곳이 어떤가 하는 말을 하였다고 했다.
o 그에 따라 23일 12시. 노조 집행부와 양 신부, 김 신부, 본인 등의 연석회의에서 묘지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면 광주 망월동 묘지로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장례일자를 5일장으로 하고, 그동안 쟁의는 보류한다는 원칙도 여기에서다). 이 변호사는 그 뒤에 도착하였다.
o 이러한 상태에서 유족을 만났더니 유족은 장지 문제보다 오히려 유족 보상을 받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유족들이 그렇게 나오자 오히려 노조 측에서 장례는 장례대로 치르고 유족 보상은 여기 두 분 변호사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하여 유족을 설득하자 유족이 좋을 대로 하라고 응낙하였고, 장지는 광주 망월동으로 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어서 혹시 광주에 장지를 얻기가 어려우면 서울 모란공원 묘원으로 해도 좋다는 승낙도 하였다. 가족은 매우 분개하여 국민적 규탄과 죽음의 뜻을 기리는 일에는 호의적이었고 아울러 보상 문제에 매우 초조한 입장이었다.
o 그런데 24일 오전 부검 시에 삼촌이라는 사람이 도착하더니 오후 3시 반경 노조와 재야의 연석회의에 나와서 갑자기 가족장으로 하고 화장을 하여 재를 바다에 뿌리겠다고 하더니 노조가 반발하자 장례절차 문제는 모두 노조의 결정에 따르되 장지만은 남원 서산으로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뜻밖의 일이라 노조와 재야는 시간을 두고 가족을 설득해 보기로 하고 우선 노조와 재야 간의 의견이라도 통일해 보자고 논의를 계속하다가 결론을 못 내고 오후 6시경 결정을 노조에게 맡기고 산회하였고, 곧이어 노조는 장지를 광주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o 24일 오후 이 연석회의에서는 재야와 노조와의 의견이 맞서서 논의가 길어진 것이 아니다. 양 신부, 강 신부는 광주 쪽, 이 변호사와 현지 유지 황 선생은 서울 쪽으로 의견이 갈리어 시간이 더 길어지는 바람에 마치 재야가 노조를 집요하게 설득한 것처럼 보도를 할 수 있는 빌미를 준 셈이었다.
o 그 후 유족들은 노조 쪽에서 설득해 보기로 하여 우리는 관여하지 않았으나 25일 오후 5시 가족들이 기자회견을 한다는 말이 나돌자 이 변호사와 이소선 어머니 등이 마지막으로 가족을 설득하러 나섰고, 내가 유족 대기실로 갈 때는 막 이야기를 끝내고 나오는 참이었다. 나도 선 자리에서 이석규는 우리 국민 모두의 아들일 수도 있으니 전 국민과 전체 노동자의 가슴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선처를 바란다는 부탁을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이 변호사는 분명히 최종적인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유족에게 있다는 말을 거듭하였다.
o 결국 장지 문제가 문제 된 것은 유족들이 이미 합의를 한 사항을 뒤에 번복하였기 때문에 재야와 노조가 아쉬움을 가지고 유족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계속한 것을 언론이 재야 개입의 방향으로 몰아붙였기 때문이지 결코 재야가 지나치게 개입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재야가 집요하게 설득하려 하였다 하여 그것이 장[례]식 방해가 된다는 것은 억지도 너무 억지다.
o 그 후 실제 장례일인 28일의 사건은 현지에 있지 않아서 잘 알 수 없으나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분위기가 재야에서 그들을 진정시키려 한다 하여 진정이 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리라 짐작된다.
- 장지가 서울 모란공원 묘지가 좋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o 첫째, 장지 자체의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누구나 국립묘지에 묻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설혹 국립묘지에 묻힐 만한 사람을 유족이 잘 모르고 거절할 경우 유족을 설득하려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모란공원 묘원은 전태일 열사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그가 분신으로 목숨을 끊을 당시만 해도 그가 노동운동의 역사에 남을 인물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고 이석규 열사의 죽음 또한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길 것이다. 아니 남겨야 할 일이다. 그런 그를 서울 모란공원 묘지에 묻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서울을 권한 것이다.
o 둘째, 그의 죽음은 이 독재권력이 그 권력 유지를 위하여 경찰을 이성적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폭력 살인집단으로 만들어 놓은 데서 비롯된 대국민 살육행위의 결과로 빚어진 억울한 희생이다. 그럼에도 살육의 진상을 은폐하고 노동자의 격렬한 투쟁과정 속에서 빚어진 불가피한 사태 또는 자업자득의 결과로 몰아붙이려는 정부의 태도였다. 따라서 우리는 전 국민의 관심을 이 장례로 모으고 진상을 폭로하여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이 이 같은 불행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그렇게 하는 데는 장지가 서울로 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장지가 서울로 되면 이를 이용한 폭력 소요사태를 일으켜 현 정권을 붕괴시키자는 의도는 없었는가.
o 국민운동본부 하반기 목표는 선거 혁명이다. 이한열 군 장례식에 그같이 많은 사람이 모였으나 정권을 위협할 만한 소요는 없었다. 그 같은 방법으로 정권을 전복하고 내가 얻으려는 것이 있겠는가. 오로지 정당한 비판마저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자기들의 권력을 연장해 보려는 정권의 모함일 뿐이다.
- 전 국민에게 폭로하고 규탄하려 한 정부의 비리는 무엇이었는가. (이석규 사망의 진상)
o 22일 오후 2시경 600~7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옥포관광호텔로 가려고 했다. 사장 이하 임원진의 직접 면담을 요구하기 위해서이다. 경찰은 네거리에서 노동자들이 네거리로 진입하는 도로를 제외한 3방향의 도로를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네거리에 이르자 노동자들은 평화적 행진과 평화적 연좌를 할 테니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다. 경찰은 길에 있는 돌멩이와 각목 등을 모두 청소하고 오리걸음으로 걸어가면 길을 열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노동자들은 그 약속을 믿고 길을 치우고 어깨동무를 하고 열을 지어 오리걸음으로 나아갔다. 경찰은 진입로를 열어주었다. 진입로를 열면서 체포조들은 길 양쪽가로 늘어섰다. 노동자들이 전진하여 후미가 네거리를 지나 호텔 쪽 진입로에 완전히 들어섰을 무렵에는 앞쪽과 길 양쪽으로 경찰이 포위한 꼴이 되었다. 더욱이 진입로 양쪽은 네 발로 기지 않으면 기어오를 수 없는 높이 5m 정도의 언덕이었고 그 위에는 높이 2m 정도의 철망 울타리가 처져 있어 도망갈 곳이 없는 상태였다.
o 이 상태에서 경찰은 수류탄과 총류탄을 마구 터뜨렸다. 네거리 양쪽을 차단하고 있던 경찰들도 총류탄을 발사하였다. 양 사방에서 포위 공격한 것이었다. 다급해진 노동자 일부는 언덕을 기어올라 철망을 뛰어넘어 도망간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네거리 뒤로 도망가면서 경찰에게 붙들려 무수히 맞았다고 한다. 고 이석규는 앞에서 세 번째 대열에 있었다.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맞았는지를 정확히 본 사람은 만나보지 못하였으나 신문 보도에 의하면 경찰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한 후 도망을 가다가 쓰러지면서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이다.
o 이와 같이 당시 경찰은 진압이나 해산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퇴로가 없는 곳으로 유인한 다음 무차별 폭행과 최루탄 공격을 감행하였다. 최루탄 파편이 사람의 두개골을 뚫고 나갈 정도의 위력이 있는 살상무기임은 이미 밝혀져 있었다. 이 같은 살상무기를 부득이 하지도 않은 상황, 아니 오히려 고의로 유인하여 사용하였음은 고의의 살상이 아닐 수 없었다.
o 24일 오전 부검 결과 파편 4개가 오른쪽 가슴을 뚫고 들어가 2개는 폐에 박히고 2개는 폐를 관통하여 등에 박혀 있었다. 가슴에는 900cc의 피가 고여 있었다. 어찌 온 국민이 분노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노사분규 수습, “장례 무기 연기 선언이 협상 타결 계기”
- 6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장례를 무기 연기하게 된 과정은 어떤 것이었는가?
o 이 변호사와 본인 등 소위 재야 쪽 사람들은 24일 14시경 이 문제를 장지문제와 함께 의논하였다. 요구조건의 주장은 일치된 의견이었으나 이들 장례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자는 주장을 내가 강력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유로는,
o 첫째, 유족 보상의 문제가 장례 후에는 해결이 어렵다. 책임소재를 밝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소송을 해본 사람이면 쉽게 알 것이다. 그럼에도 23일 저녁 유족과의 회의 시에 유족에게는 변호사들이 쉽게 해결해 줄 것인 양 어물쩍 넘어가 버렸는데, 그 이후 어느 쪽에서도 피해 보상에 관하여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o 둘째, 당연히 있어야 할 정부의 해명이나 사과의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당장 해결은 안 된다 할지라도 일단 문제의 제기는 있어야 한다. 책임자 문책, 가해자 구속 등은 약속으로도 가능한 문제이므로 장례를 무기한 교착시킬 우려는 없는 조건이다.
o 셋째, 대우조선 분규는 신속히 타결되어야 하고 그것은 장례와 연계 짓는 것이 가장 신속한 타결방법이라 믿었다. 또 분규가 타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장례식이 어떤 사태로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o 그러나 셋째 번 문제는 내심 고려된 문제일 뿐 우리끼리의 논의과정에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노조에 맡기자는 뜻이었다.
o 우리는 이 뜻을 노조에 권유하기로 하였고 24일 저녁 노조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 장례의 무기 연기는 노사분규를 결국 악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는가.
o 결국 상황을 분석하는 시각의 차이다. 우리는 분규의 수습을 원했다. 노사문제에 대한 입장 자체가 그렇거니와 그 입장이 어떻든 간에 대우사태 그 자체는 수습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입장이 매우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결국 수습이 되고도 이 꼴이 되고 말았지만).
o 원만한 수습을 위해서는 결국 어느 일방이 양보하거나 쌍방이 양보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가 양보하려면 노동자들 내부의 논의구조가 통일되어 있고 질서가 잡혀 있어야 한다. 그런데 24일까지 대우조선 노동자의 상태는 그것이 아니었다. 당초 8월 8일 농성이 시작된 이래 본시 노조가 없던 상태에서 노조를 설립하는 데 4일을 소비했다. 그동안 노조설립신고서를 회사에 갖다 내는 등 무지에서부터 어용 시비와 내분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그 이후 현재 집행부가 들어섰으나 그들의 협상결과는 이미 한 번 거부당한 경험이 있을 만큼 지도력이 취약하였다.
o 이러한 상태에서 이석규의 사망으로 노동자들은 격앙되어 있었다. 잘못 양보를 말하다가는 지도부 또한 어용으로 몰려 또 한 번의 폭력사태가 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25일 이후 질서가 잡히고 집행부의 지도력도 확립되어 갔는데, 나는 우리와 청년활동가들의 영향이 컸다고 믿는다). 이러한 상태에서 양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우중뿐이라 믿었다. 김우중을 양보하게 하는 강한 포석, 그것이 사태를 신속히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이 점에 관하여 양 신부나 민주당 현지 의원 및 조사단과 상황판단을 달리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대우 분규의 극적 타결은 장례 무기 연기 선언에서 그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o 본시 내가 생각한 순서는 보상금 조건 무기 연기 → 김우중의 선심 → 노동자들의 감정완화 → 노사타결로 이어질 것으로 구상했는데, 김우중의 선심이 유족들과 비밀채널로 연결되면서 장지 문제의 갈등으로 전환된 것은 아닌지.
- 이 변호사와 노 변호사의 행동은 시종 일치하였는가.
o 나는 23일 10시경 도착하였고, 이 변호사는 23일 17시경 도착하였다. 그동안 장례위원회의 구성은 이미 논의가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이 변호사는 장례위원회 구성에 관하여는 관여하지 않았다.
o 그 이후에는 계속 의논하고 함께했다. 다만 나는 26일 오전에 병원에서 나온 후 이 변호사와 점심을 같이 먹고 낮잠을 조금 잔 후 16시경 이 변호사는 병원으로 도로 가고 나는 조금 더 있다가 부산에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18시30분 배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 이후 일은 모른다.
o 내가 있는 동안 모든 논의는 그와 함께했다. 그래서 그에게 책임질 일이 내게 책임이 없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한 일은 모두 옳았기 때문에 함께 끼이고 싶다. 다만, 24일 15시30분 이후 노조와 장지문제 논의 시 나는 김봉조 의원의 구속자 석방 교섭에 따라 갔다 왔고 그날 저녁 20시경 장례 무기 연기 논의에는 노조 사무장의 태도가 못마땅하여 논의에 불참했다.
o 25일 16시경 이 변호사가 유족을 만나 장지 문제를 설득할 때는 나는 뒤늦게 가보니 얘기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라 선걸음에 한 마디 보태고 나왔다. 이 부분은 왜곡된 사실을 밝히려는 것일 뿐이고, 오히려 결정적인 시간에 내가 빠진 것, 특히 24일 저녁의 장례 무기 연기 결정 시 내가 일찍 포기한 것은 두고두고 나를 부끄럽게 했던 일이다. 결국 분규 타결의 계기는 이 변호사가 만든 것이다. 하루하루 서로 오늘은 돌아가야 된다고 말하면서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성실히 대처했다. 그때 내가 그에 대하여 느끼던 심정, 그런 것을 동지애라 하는 것 아닌가?
- 이 변호사나 노 변호사가 분규 수습을 원하였다는 말을 믿을 만한 보다 설득력 있는 근거는(언론과 정부가 하도 몰아붙이니까).
o 내 개인적 인식은 6·29 이후 처음 부산에서 노사분규가 터져 나왔을 때 나는 우리 젊은이들을 만날 때마다 작은 요구조건으로 작은 승리를 만들고 그에 터 잡아 노조 설립 확대, 노조 민주화의 작업으로 장기적으로 노조 활성화로 노동자 권익 신장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야지 어떤 이유로든 수습이 잘되지 않는 극한 대립이나 장기적 분규는 결국 노동자들에게 또 한 번의 참패를 안겨다 줄 것이라 우려하는 뜻을 밝혀왔다. 심지어 내가 나서서 노동자들을 한 번 설득해 보면 어떨까 하고 의견을 개진한 바도 있다(국가기관 쪽에게).
o 우리가 가있는 동안 분규의 확대, 악화가 가져다줄 우리에 대한 비난이나 법적 결과에 대하여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수습되고 난 후에도 생사람 잡는 판국에.
o 부검 참여는 노동자들의 요청이기도 하지만 부검결과 발표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것이다. 악화를 원하는 사람이 이런 일에는 왜 끼겠는가?
o 25일 저녁 양 신부가 최종적으로 노동자들과 담판할 때 이 변호사와 나도 함께 노동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합석하였다. 그 직전 이 변호사는 양 신부에게 기본급과 현장수당을 15,000원 : 15,000원 방식도 권해보자는 등 구체적으로 성의를 보였다. 다음날 김봉조 의원이 협상을 하고 있을 때도 김 의원을 찾아가 같은 취지의 제언을 하기도 했다.
언론의 왜곡보도 “억울한 죽음에 안타까움도 없었다”
- 언론의 보도에 관하여.
o 언론보도에 관하여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자질의 문제요, 둘째는 왜곡의 문제이다.
o 자질 문제를 먼저 보자. 노사분규 현장에는 그 분규의 원인이 제일 첫째의 문제이다. 그다음은 분규 장기화의 원인, 과격화의 원인, 사망의 원인 등이 심층분석 되어야 하고, 장차 원만한 수습을 위하여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언론은 어느 것을 했는가?
o 분규의 원인은 임금, 노동조건, 기타 불만이다. 저임금, 대량해고, 인사 감시, 엄한 처벌, 관리 부실, 비인간적 대우 등 심각한 문제들이 얼마나 소상히 보도되었는가.
o 분규의 장기화, 과격화의 원인이 어디 있었는가에 관하여 성의 있는 취재도 보도도 보지 못하였다.
o 원만한 수습을 위하여 누가 얼마만 한 양보를 해야 합리적일 것인가. 이 점에 관하여는 잘 분석해 보면 양보를 할 수 있는 쪽, 양보를 해야 할 쪽을 잘 선별하여 언론이 압력을 행사하고, 정부와 국민의 압력을 적절히 동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나친 시도라면 적어도 공정한 보도라도 했어야 한다. 예컨대 조선소 적자의 원인을 분석해 보면 상당 부분 대우실업 내부로 유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위장적자 문제, 적자 전체가 모두 금융비용인 점, 경영과 관리의 불합리에서 오는 낭비 등이 있는데, 적자 상태를 보도할 때는 이러한 요인도 함께 취재 보도해야 할 것인데, 취재도 보도도 못 보았다. 자질을 의심 않을 수 없다. 어떤 경우는 그런 것을 노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정리하여 주어도 보도하지 않았다. 그것도 밤 3시에 잠을 깨워가며 받아가 놓고는.
o 왜곡보도. 구체적으로 어느 사실의 문제도 그렇거니와 자구 하나씩만 슬쩍슬쩍 끼워 넣어서 전체 분위기의 흐름을 왜곡된 방향으로 몰아가는 데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o 24일 저녁. 장례 무기 연기 발표가 있자 25일부터 각 신문사 데스크에서 취재방향에 관한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심지어는 그 문제로 기자가 전화통으로 데스크와 싸우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o 25일 저녁. KBS의 보도는 왜곡의 극치였다. 대우사건 보도에 갑자기 민민투의 주장까지 갖다 붙였다. 억울하게 사람 죽은 데 대한 안타까움도, 분노도 전혀 표시하지 않고.
2011년 11월 20일
노무현재단 사료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