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Ⅱ. 성령의 사역 Ⅲ. 그리스도와의 연합 Ⅳ. 구원의 서정 Ⅴ. 칭의와 성화의 관계; 종교개혁의 논쟁 Ⅵ. 개혁주의 칭의론 Ⅶ. 근본적인 성화 Ⅷ. 점진적인 성화 Ⅸ. 믿음과 회개 Ⅹ. 신자 안의 죄성과 내적 갈등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2001년 (typed by 임정훈)
<8월 24일>
Ⅰ. 서론
1. 구원론의 중요성
개혁주의 교의학에서는 구원론이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원론에 이르러서 기독교 신학은 절정에 이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 은혜, 경륜이 구원의 사역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구원론에 와서 계시의 결정체를 다룬다.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계시하셨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 속성은 구원을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계시된다.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다. 목사의 메시지의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가 구원론에서 다루는 문제이다. 구원을 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 것인가, 칭의, 믿음, 회개, 중생, 성령 안에서의 교제 등... 그래서 목회적 차원에서의 실용적 가치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중요하게 여기는 과목이다. 특히 개혁교회는 구원론을 중요시 해 왔다. 16세기 종교개혁의 핵심 논쟁도 구원론이다. 개혁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구원관을 개혁하며 출범했다. 따라서 개혁교회의 가장 특징은 바른 구원론이다. 이단의 척도도 그것이다. 바른 구원론이 적립되지 않고는 바른 개혁교회 목사가 될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개혁주의 교단에 속했다면서도 개혁주의와 거리가 먼 구원관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개혁이 500년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로마 가톨릭에 가까운 메시지를 전하는 목사들이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얼마나 새로운 율법주의, 윤리주의로 치우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칭의론을 바르게 부각시키지 못한 메시지, 얄팍한 지식을 전파되고 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개혁교회의 강단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구원론이 바로 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사역자들이 신학이 없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교회의 개혁뿐만 아니라, 개인의 신앙 부흥을 위해서도 구원론이 바로 되어야 한다.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 공부하라.
2. 구원론의 교의학에서의 위치
신론 / 기독론 / 성령론 기독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 무슨 일을 이루셨는가.. 그런 구속의 효력들이 성령의 사역으로 ‘개인과 교회와 세상’ 안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 실현되는가를 성령론에서 다룬다. 이 중 ‘개인’의 부분은 구원론. ‘교회’는 교회론, ‘세상’은 선교론, 종말론. 이 모든 것이 성령론의 범주에 속한다. 이번 학기는 성령의 사역 중 특히 개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는 부분을 다룬다. 그래서 ‘성령론, 구원론’이라고 국한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주로 개인 안에 성령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그리고 전통적인 문제들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20세기의 오순절 운동으로 말미암아 제기된 문제들, 현대 신학으로 제기된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다루지 못한다. 그래서 내년에 ‘성령의 사역’ 과목에서 성령론에서 다 다루지 못한 문제들을 다룬다. 기독론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객관적으로 무엇을 이루셨나? 구원론에서는 성령의 사역으로 예수님이 이루신 객관적인 일이 어떻게 우리 안에 주관적으로 체험되는가를 다룬다. 우리는 이제 주관적인 측면을 다루는 쪽으로 전환한다.
기독론구원론①objectivesubjective ②Christ for us Christ in us③past eventpresent ④historicalexistential(실존적인 면)
그래서 구원론 서두에 항상 성령론을 다룬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구조적인 특색이다. 기독교 강요 3권의 구조도 이런 특색. “어떻게 예수 과거의 은혜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가? 나에게 효력이 있게 되는가? 우리가 주님과 분리된 채 주님이 우리 밖에 계시는 한... 그것은 효력이 없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해야 한다. 우리를 연합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칼빈 이후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다 교의학에서 구원론 앞에 성령론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 시작하는 개혁주의 구원론의 구조의 장점을 기억하라 - 구원의 전 과정에서 인간의 전적 무능력,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구원가능을 새롭게 부각할 장점을 안고 있다. 구원의 선물이 내 것이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구원에도 조금도 기여하지 못했고, 이미 완성된 객관적 구원의 선물이 우리 안에 체험되게 하는 것도 우리가 기여할 수 없다. 물론 믿고 회개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내적인 선함과 종교성, 영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자율성을 회복하시는 은밀한 성령의 사역이 선재해야 한다. 그래서 만약 객관적 구원이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체험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우선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오류에 빠진다(구원의 적용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이 앞서는 것으로 생각하는 알미니안주의). 여기에 성령의 사역을 먼저 강조하고 구원론을 시작하는 개혁주의 구원론의 구조적 장점이 있다. 구원의 주관적인 적용에도 'Divine grace prior to human responsibility'가 강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은혜 + 성령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회개를 성령론적 맥락에서 이해할 때, 믿음과 회개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은혜와 책임의 바른 관계성을 이해하게 된다. * 구원론을 공부하면서 아직 확실하지 않는 구원의 확실성과 구원의 은혜를 깊이 깨닫도록 준비하는 자세로 임하자. 어떤 학생들은 이 강의를 듣고서 성경적인 근거로 확신을 새롭게 얻는 체험을 한다.
Ⅱ. 성령의 사역
1. 구원의 주관적인 실현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
?objective ground of salvation (예수+성령+성부) ?subjective ground of salvation (성령+예수+성부)
편의상 이런 구분과 구별성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주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이 메시야의 사역을 수행하신 것도 성령의 능력으로 하셨다. 그런 면에서 그 사역의 주역은 예수님이고 예수님 단독이지만, 성령의 도움으로 사역을 완성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다. 구원의 전적인 실현에서 그 주체는 성령님이지만, 구원을 주관적으로 실현시키는 면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함께 하셔서 당신이 이루신 구속의 열매들을 성령 안에서, 통해서, 함께 전달, 체험, 적용케 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주관적으로 실현시키는데도 성령님과 부활하신 주님이 동역하신다. 그래서 편의상 구별하지만, 두 분의 사역은 긴밀하게 연결된다고 이해해야. 그러면 성부 하나님은 어디 가셨나? 모두 다 성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사역이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실현이다. 그래서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 구원의 그 큰 은혜를 생각할 때, 어찌 찬양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랴?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가장 멋진 노래를... 35장 찬양.
2. 부활하신 예수의 성령 안에서의 임재
성령께서 구원을 어떻게 실현하시는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시고, 세상 안에 내주하신다. 주님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에 성령의 보내심의 약속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심. 바르트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성령으로 오신 주님의 다시 오심을 1.5림이라고... interim parousia라고 했다. 적절하지는 않다. 초림과 재림과 견줄만한 차원에서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은밀한 것이다. 구속을 받은 백성에게만 임하는 강림이다. 세상이 알지 못한다.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알 때, 초림의 사건이 확실해진다. 초림으로 오신 역사적 사건을 누가 확신케 하나? 모든 역사적 사건은 그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불확실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증거해 줄 사건의 주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그 사건의 주인공이 부활하고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서 내적으로 증거해 주신다. 또 그 분 뿐만 아니라 그분과 함께 있던 제자들을 통해서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셨다. 그래서 그 역사적 기록들이 확실한 것임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계신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은 성경의 내증과 성경이 나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신 주님이 성령 안에서 내주하심으로 확신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모시고 살 때 재림에 대한 그리움이 더 사무친다. 성령 충만으로 산 초대교인들의 삶의 특징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망이 있어야 세상에서 자유한 삶을 산다. 온전히 하나님만 의식하는 코람데오의 삶. 소망은 1.5림의 주님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이다. 항상 교인들을 보면 초림과 재림의 예수님은 잘 믿는다고 한다. lip service는 잘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와 있는 주님은 근심시키고, 마음 밖으로 밀어내어 버린다. 항상 그것이 부패한 인간의 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도 그랬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과거의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믿는다고 했지만,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자기 앞에 있는데도 그것을 배척한다. 우리의 삶, 마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홀대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 성령의 강림은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이다. 성령이 오심으로 말마임아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주님과 성령이 공재하신다. 함께 역사하신다. 성령이 오심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짱짱하다. 두 분의 supporter가 계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in Spirit, in Christ를 교차적으로 사용했다. 예수님이 초림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구원을 위한 모든 지상사역을 완료하셨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으로 오셔서 지상의 고난 사역의 열매를 우리에게 종말까지 적용하시는 new mission을 진행하신다. 이런 면에서 기독론을 성령론의 관점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론이 우주론적으로 확대되었다.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보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더욱 유익한 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이 “떠남이 유익하다”고 하셨다.
* 어떤 면에서 과거의 주님이 성령으로 함께 하심이 영광스럽게 축복되는가? ① 시공간의 한계성을 초월하셨다. 나에게 전 인격적으로 관계하시면서도 다른 성도들 안에도 전 인격적으로 관계하신다. 그럼으로써 참된 영적 예배를 가능케 하셨다. 항상 주님을 모시고 살 가장 고차원적인 종교적 삶. 코람데오, 영적 예배가 가능한 삶을 허락하셨다. ② 육체와 함께 하심으로써 구현할 수 없는, 더 긴밀하고 내면적인 영적 유익을 부여해 주실 수 있다. 육신으로는 우리 옆에는 가능하지만, 우리 안에는 함께 하실 수 없다. 인간의 문제는 속이 골아있다. 내적 빈곤, 무지, 부패, 무능력이 문제다. 육신의 약함 때문에 성령을 따라서 살 수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성령으로 내재하심으로써 우리의 중심에서부터 변화를 주시고 강건케 하신다.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고...” 성령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는 helper로서, counselor로서 함께 하신다. 내적인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분이다. 다른 인간은 내가 안고 있는 은밀한 고통에 누구도 참여할 수 없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네가 안고 있는 고통의 한 부분이라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참 행복한 사람이다... 세상에서 상처를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로 전해서 위로를 하자... ③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Christ in us”의 축복이 가능케 하신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그리스도화 하게 하신다.
? 기독론과의 연결 기독론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 구원론① 하나님의 형상 ① 하나님의 형상 ② 의인 ② 의인 ③ 하나님 나라 ③ 하나님 나라
생명,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죽으심과 부활만 가지고 안 된다. 성령으로 관계를 하셔야 한다. 많은 사람 안에 성령으로 거하셔서 다시 사심으로, 그의 삶을 재현하심으로 그가 누렸던 3가지를 우리 안에서 재생산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사신 분이 부활을 통해 많은 사람 안에 사심으로써 그 사람 안에 당신의 생명을 재창조하신다. 구원론에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다루는데, 중생과 성화 / 칭의 / 연합, 화평, 성령 안의 삶
(질문) 요 3:23의 참된 예배하는 때... ‘신령과 진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답) 진리와 성령 가운데 예배를... 무형의 실재가 말씀을 통해 구체화된다.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시고 변화를 주신다. 말씀과 늘 함께 한다. 내적 관계가 있다.
3. 성령의 부활하신 주님의 공동 사역
예수와 성령의 공재, 공동 사역과 바탕 안에서 우리의 구원론, 성화론, 교회론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과 성령은 사역적인 면에서 그분들의 경륜적인 면에서 일치하는 점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신학자들은 이런 동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예수님과 성령을 양태론적으로 일치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요즘 신학계의 화두이다. Ingor Hermann, James Dunn 등 고후 3:17 “주는 곧 성령이다” 롬 1:4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 고전 15:45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는 말씀에 근거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성령님의 사역적인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다. 너무 긴밀하게 연합해서 역사하기에 사역적, 기능적으로 동일하다고 한다. 특히 고후 3:17가 신학계의 화두이다. 이 말은,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과의 거의 동일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의 두 사역자들은.. 바울이 말하는 것은 본질론적인 ontological identity가 아니고, 그들의 사역적, 기능적, 경륜적인 면에서의 동일성을 말한다. economical, functional, dynamic identity이라고 주장. 내 생각에는, 어떻든 ‘동일성’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다. 사역적 면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지만, 성령과 부활하신 주님과의 사역에서 차이점, 구별성이 있다고 본다. 동일성만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차별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박영돈 견해는, 기능적 동일성은 있지만 구별성이 있음을 신학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 구별성을 바로 이해하고 강조해야 한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데, 우리 안에서의 체험의 차이점이 있는가? 체험적인 측면에서 그 차이를 느끼는 것은 힘든다. 그러나 사역의 구별성을 인지해야 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발란스를 유지하고, 체험에 있어서도 삼위일체적 삶의 부요와 풍성을 유지한다. Dunn은 신앙과 경험은 성령과 부활의 주님 체험은 전혀 구별이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근거로 구별할 면이 있다.
? 동일성(‘분’이라고 할 때 편의상 그렇게 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효력과 은혜와 열매를 전달하고 체험케 하신다. ② 두 분 모두 우리 안에 내재하시지만, 우리 영혼과 두 분다 구별된다. 초월하신다. ③ 두 분 모두 우리를 주관하신다. ④ 두 분 모두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신다.
? 구별성 ① 예수님은 성경에서 객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물론 성령님도 믿음의 대상이지만... 성경은 분명히 구별성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향할 목표요, 닮아야 할 형상이다. “예수를 본받으라” ② 성령님의 역할은 우리 신앙의 객관적인 대상인 예수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응답, 반응과 책임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분이다. 우리 안에 선한 것, 영성, 자율성이 부재하다. 성령께서 내 안에 주관적으로 은밀하게 역사하셔서 내 안에 영성을 창조하셔서 공급해 주신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 신자의 책임과 의무를 온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나를 사용, 자유케, 강건케 하신다. 성령님의 역사는 타율적이 아니다. 우리가 자원해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본받아 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주체자로 살 수 있도록 spirit을 회복시키신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할 새로운 존재의 영적 영역을 구축해 주신다. 그 안에서 행동할 때 우리를 억압하는 사단의 권세가 억압되고, 하늘의 영역에서 살게 된다. 존재의 영역을 바꾸어 주셨다. 성령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셨다. 자유할 수 있는 존재의 영역에 살게 하시고, 속사람을 변화시키셔서 자유의 축복과 능력을 바로 활용하도록 도우신다. 새로운 영역 이 속에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이 믿음이 커 갈수록 자유함을 만끽하게 된다. 문제는 이 자유를 남용할 수 있다. 우리의 문제는, 이 자유를 잘 사용할 수 있는 속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을 경험적인 면에서 구별할 필요성 ① 우리 신앙의 자율성의 출처를 밝히는데 필요하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내적인 종교성과 성령으로 비롯된 영성을 혼돈하지 않게 된다. 육적인 열심을 성령의 열심으로 착각하는 무지와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교만에 빠지지 않는다. 아무리 주님을 본받아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성령의 은혜이다. 영성의 출처가 강조 ② 우리의 책임과 은혜의 관계를 바로 파악한다.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의 은혜와 분리된 이원적 관점에서 보면 안 된다. 성령의 선재적은 은밀한 은혜로 가능하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의 책임을 대체하는 능력은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들의 열심과 노력과 선택과 의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상관없이 타율적으로 대신해 주시는 파워가 아니다. 오히려 의지와 노력을 새롭게 하셔서 자율적으로 하게 하신다. 폭군적인 세력이 아니라, 온유한 영으로 자유로운 인격자로 대우하신다. ③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의 사역의 구별을 인정할 때만,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 속에서 삼위일체적인 삶과 경험의 부요와 풍성을 온전히 인식하고 누린다. 삼위일체는 우리 경험 밖에서만 아니고, 우리 안에서도 역사하시기에 그분들과 교제할 수 있다. 체험 속에서도 삼위일체적인 사역의 특성을 맛볼 수 있다.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삶 속에서도 축복의 부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8월 30일>
우리 안에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이 공재하신다. 이 두 분의 사역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많은 신학자들이 “주는 곧 영이시다”는 것으로 사역적인 동일성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 지적처럼, 우리 안에 주님과 성령은 사역적인 면에서 동일한 점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본질적이든 사역적이든 ‘동일성’이라는 말은 적절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두 분 사이의 구별성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분 사역의 차이는, “예수님은 우리의 객관적 신앙의 대상이며 목표다. 성령님은 우리 주관에 역사해서 순종케 하는 분이다” 이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왜 이런 구별성을 바로 이해해야 하나? ① 두 가지로 우리 신앙의 주관적인 측면을 잘 밝혀줄 수 있기 때문이다(영성의 출처가 어디 있는가). 우리의 성령은 in Spirit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임재하신다.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object)으로 임재하게 하신다. 그와 동시에 성령님은(in Spirit) 예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주관자(subject)가 되게 하신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을 우리가 이 두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령님을 우리 주관 안에서 경험하게 된다. 우리들의 문제는 이 subject의 역할을 잘 못한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으면 그것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하는데, 우리의 약함과 빈곤, 무능력, 자율성과 영성이 없어서 주관자로서의 우리의 역할을 잘 못한다. 이런 문제를 위해 우리 주관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로 자유로운 주체자로 예수님께 나아가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하신다. 인격적인 교제가 오가는 fellowship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subject가 가능해야 한다. 성령은 in Christ(자유하는 영역, 분위기)를 우리에게 창출해 주신다. 태아가 모태 안에 존재하듯이,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온전히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우리 속사람을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셔서 이 자유의 능력과 은혜를 바로 사용하게 하신다. 자유가 주어진 우리의 또 하나의 문제는 육신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인데... 이 두 가지 방향으로 역사하신다. 그래서 이런 성령님과 부활하신 주님의 역할을 구별해야 한다. ② 신앙 체험의 삼위일체적인 특성과 부요함을 온전히 밝혀줄 수 있다. 제임스 던은 “우리 경험 안에서는 두 분의 차이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경험에서는 2위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바르트와 그의 후계자들도 이런 오류에 빠졌다. 사역적인 양태론에 빠졌다. 동일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두 분의 사역상의 양태론에 빠졌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도 밖에서만 아니나, 삼위 하나님으로 경험한다. 라너 등이 주장하듯, “우리의 삶과 내용적인 면에서 1위, 2위만 섬기는 것 같다” 우리 신앙 체험에서 삼위일체적인 독특성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현대 신학자들은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여러 오류에 빠졌다.
4. 성령 사역의 4가지 특색
1) Christocentric - Trinitarian(예수 중심적이면서 삼위일체적) 2) Ecclesianstical - Soteriological(교회론적이면서 구원론적) 3) Missiological - Cosmological 4) Escatological
1) Christocentric - Trinitarian(예수 중심적이면서 삼위일체적)
현대신학에 나타나는 성령론의 특색은 예수 중심적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적(Theocentric)이다. 대표적으로 John Hick, “여태까지의 전통적 신학은 예수 중심적이었는데, 하나님 중심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했다. 그것이 신학계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다“ 왜 이들이 이것을 선호할까? 성령이 꼭 예수를 통해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적인 매체를 통해서도 역사할 수 있고, 다른 종교에도 있다, 창조의 영으로서 창조의 모든 영역,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역사할 수 있다. 우주론적으로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이것의 문제는, 예수와 성령의 불가분의 연결고리를 와해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수의 구속 사역의 바탕 위에서 성령의 사역이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백안시 하고 있다. 현대 신학에 나타나는 또 다른 특색 중 하나는, Pneumatocentric(성령중심)이다. Tillich의 신학에서, 생태신학, 여성신학 등이 다 이것을 개발하려 하고 있다. John Hick도 최근에 이쪽으로 선회했다. 따라서 최근의 이론들이다. 그러나 성령중심적 성령론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우리가 필요한 성령론은 ‘예수중심적이며 삼위일체적’인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린다. 예수를 증거하신다. 예수의 임재를 전달, 중재하신다. 예수의 구속사역의 효력과 열매를 전달해 주신다. 따라서 예수가 바로 전파되고, 영광이 돌아가는 곳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신다. 성령의 능력을 아무리 외쳐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의 도가 바로 선포되지 않으면 성령이 실재로 부재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성령님을 ‘Hidden God, transparent' 그러므로 성령 체험의 내용적인 특색은 예수 중심적이다. 성령을 체험하면 예수를 잘 믿고, 그를 알고, 사모하고, 사랑하고 닮아간다. 아무리 굉장한 영적 체험을 해도 예수 중심적 신앙과 삶의 열매가 없으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영적 체험이 참된 성령의 체험인가를 가늠하는 척도는 ’Christlikeness'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바탕에서 출발한다.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를 두 단계를 따라서 발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① The Bearer of the Spirit - 예수님은 지상 사역에서 성령을 자신 안에 소유하신, 성령의 담지자, 소유자로 사셨다. ② The Sender of the Spirit - 성령의 소유자,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완수하신 후, 이제는 수여하시는, 보내시는 자가 되셨다. ②‘ or ③ co-dweller, companion 성령의 보유자로서의 사역을 완료하실 때까지는 성령의 수여자의 역할을 하실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예수가 메시야의 사역, 구속의 사역을 마치기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성령을 소유하실 수 없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성령이 누구에게 주어졌다는 기록이 없다. 복음서 기자는 각별히 이에 주의하고 있다. 오직 예수님께만 국한해서, 제한해서 사용하고 있다. 물론 눅 1장에 세례요한, 스가랴, 마리아에게 임했지만, 이것은 예수님 탄생 이전의 것은 구시대에 속한 성령의 사역으로 보아야 한다. 오실 메시야를 증거하는 구약의 예언의 영이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예가 없다. 복음서 기자는 주님의 제자들의 행적을 기록할 때,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그 행적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복음서 저자들은 그 당시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풍성한 역사를 기술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오직 예수님만 성령충만한 사람이다. 복음서는 One Spirit-filled man, 사도행전은 Many Spirit-filled men
복음서사도행전The Bearer of the GodThe Sender of the GodOne Spirit-filled man Many Spirit-filled men
요 7:39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한복음 14-16장은 당신이 아버지께 가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고 하셔서, 성령이 아직 저들에게 임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증거하고 계신다. 물론 오순절 전, 구약에도 계셨고 역사하셨다. 그러나 주님이 아직 구속사역을 완성하지 않으셨고, 그 열매를 안고 함께 하시는 영광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성령으로 임하지 않았다. 오순절 전의 성령 사역, 구약과 신약의 성령의 차이를 여러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설명들이 일면적 진리는 있지만, 여러 반박이 있을 수 있다. 성령을 따라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요 7:39에 근거해서 영광을 받으신, 부활하신 그 주님이 함께 하시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오순절 이후 성령 사역의 근본적인 특성은 구속을 완성하신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성령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의 수여자임과 동시에, 성령과 함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co-dweller, companion이시다. 부활로 영광을 받으신 주님이 함께 임함으로 주는 축복은, “Christ in us”의 축복이 실현 ㉠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 ㉡ 하나님 나라 ㉢ 율법의 의인 을 우리 안에 실현시켜 주셨다. 이것들은 구약 선지자로 예언된 새언약의 성취로 볼 수 있다. “말세에 내 신을 부어준다.... 하나님의 백성.... ”
(보충설명) 오순절 전후, 신구약의 성령사역 차이 이해 신약에서 성령은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다. 둘 다 하나님의 영, 삼위일체의 영이다. 선재하신 성자와 함께하는 삼위일체의 영. 구약†교회성령 - 성부 - 성자 선제하신 성자와 함께 하시는 영 * 앞으로 이루어질 새언약을 대망하고 증거하는 영육신을 입으신 성자 안에서, 이분을 통해서 함께 하시는 영 성령 - 성부 - 성자 영광 받으신 성자가 함께 하는 영 * 새언약이 성취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형성되는, 새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리게 하는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함으로써 성령을 받는다.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주는 모든 기본적 전제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성취되었기에, 성령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경건을 의지해서 성령을 받으려는 사람은 의로움을 근거로 구원을 받려는 것과 같다. “자신의 경건을 의지해서 성령을 받으려는 자는 화 있을진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예수, 과거에 일해주신 것만을 믿는 것만 아니고, 그것을 완성하시고 지금은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그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할 수 없다.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과, 그 선물을 주시는 분을 모셔들이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 모시고 연합함으로써(Christ in us),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전통적으로 Christ for us만 많이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Christ in us가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사는 충만한 삶이 있어야 한다. 부패한 인간은 주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구원의 선물, 은혜의 혜택은 바라지만,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임재로 활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 그 안에서 죄사함과 구원과 모든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이 둘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주님을 모실 때, 그 안에 죄사함, 구원, 새롭게 됨, 교제가 있다. 결론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예수의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지적 동의가 아니라, 그와 더불어 사는 성령 안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주님, 성령으로 임하신 주님을 우리 안에서 경험하는 삶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를 예수 중심적 신앙과 삶으로 인도하시고, 아버지께로 인도하신다. 결국 성령은 삼위일체적 삶으로 인도한다. 초대교회도 삼위일체적 예배와 삶을 새롭게 영위하게 되었다. 성령체험은 삼위일체체험에 들어가는 관문이다.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누렸다. 우리는 교리적,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삶에서는 그 부요함을 만끽하지 못하고 있다. 성령으로 충만해질수록 온전히 삼위일체적 삶을 산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깊이, 주되심, 주관하심, 강력히 역사하심, 형상이 이루어지심, 생명적인 교제, 그리스도는 ‘주’라는 고백이 이루어진다.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을 알게 된다.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했는가... 그 사랑이 마음에 물 밀 듯 들어오는 것을, 아버지가 우리를 자녀로 취급하시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대하시고, 모든 특권을 주신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그래서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성령사역의 일차적 특색은 예수중심적이며, 삼위일체적이다.
2) Ecclesianstical - Soteriological(교회론적이면서 구원론적)
현대 성령론은 교회 안에서와 밖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이런 경향은 종교다원주의 신학, 세속신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비 콕스 등. 신자 안의 특별한 은혜와, 불신자 안의 일반 은혜를 혼동. 세속화와 성화를 혼동해 버린다. 그러나 성경적 입장은, 성령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구원론적으로, 성화론적으로 새언약을 실현하는 역사로 일하신다. 교회가 성령의 일차적인 활동영역이다. 이 말은 성령의 역사가 교회의 울타리 안에 제한되거나, 제도나 예식에 매인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의 사역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도를 위해서 일차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오랫동안 제기된 신학적 논쟁을 언급해야 한다. - 성령 사역의 일차적인 열매는 집합적인 것이냐, 개인적인 것이냐? 교회냐? 개인구원이냐? 가톨릭과 개신교의 논쟁. 가톨릭은 성령과 교회의 관계를 일차적으로 직결. 성령과 성도는 교회라는 매개를 통해 부수적으로 연결. 신자가 교회의 예식에 참여하는 한도에서 성령과 개인이 연결된다. 이런 견해에 대항해서 극단적 개혁주의자는 성령은 우선적으로 개인 안에 역사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교회를 부차적으로 간주하는 개인주의적인 오류에 빠졌다. 우리는 교회 안의 역사와 개인 안의 역사를 균형 있게 강조해야 한다. 개혁교회 교의학은 가톨릭(의 반작용으로 개인의 구원론은 교회론보다 앞서 다루고 있다. 가톨릭 : 성령 - 교회 - 개인구원 개혁주의 : 성령 - 개인구원 - 교회 이것의 약점은 교회라는 context에서 분리해서 너무 고립된 개인주의적 경건생활의 관점에서만 이해한다. 이것이 개신교 안의 개인주의를 조장하는데 기여했다. 이런 개신교 교의학의 구조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성령론적 관점에서 개인구원론을 교회론의 맥락에서 다루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론과 성화론이 다 보완된다. 제도적인 경직성을 탈피할 수 있다. 개인이 영적으로 성숙하는 장으로서 교회가 이해된다. 그러면서 성령의 은사 등을 새롭게 또한 강조해야 한다. *** 교회론의 맥락에서 구원론을 가르쳐야 한다. 지금의 강의는 전통적인 구조를 따라서 하고 있음을 우선 이해하라. 완전히 재구성되어야 하는 굉장히 큰 작업이다. 내가 연구하는 분야가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이런 것들을 재고찰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심이 있으면 교수 논문집을 살펴보라.
<삼각형 그림>
3) Missiological - Cosmological
성령 사역은 교회 울타리 안에만 제한되지는 않는다. 성령의 은사가 교회에 주어진 것은, 교회 자체의 유익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선교사역을 위해 주어졌다. 교회를 세상에서 불러내심과 동시에 세상 속에 다시 보내어 죄인들과 함께 하게 하신다. 교회는 부패한 세상과 분리된 구별성, 성결성을 유지할 때만,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수행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을 상실하면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을 새롭게 할 선교사역 감당 못하고 세상에 의해 선교되어 세속화된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으면서도 속하지 않는 거룩성을 보존해야 한다. 성령은 그러한 원동력, 성결의 다이나믹을 공급해 주신다. 또 포괄적 의미의 선교는 교회가 세상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하는 모든 일을 포괄한다. 죄로 오염되고 파괴된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구원, 사회개혁, 문화갱신, 우주적 갱신을 포함한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앞장서도록,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통전적 선교를 다루는 선교론이 교회론에 이어서 발전되어야 한다. 전통신학은 교회론 다음에 종말론으로 끝나 버린다. 그러니까 온전히 교회 안에서 ‘보호함을 받다가 들림을 받는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통전적인 의미에서 선교론이 다루어져야 한다. 그 다음에 선교가 진행됨에 따라서 종말론이 정리되어야 한다. 분명히 성령론적 관점에서 우리 신학이 확대될 것은, 교회를 탄생케 한 성령은 교회의 자체의 발전과 유익을 위해서만 아니고, 세상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므로 교회의 선교론이 성령론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앞으로 우리의 큰 과제다. 목회에서 매우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의 메시지가 너무 교회의 삶에 집중된 메시지를 전했다. 세상 속에서 어떻게 부름 받은 자로 증인의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교육, 훈련이 안 되었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가장 큰 싸움은 세속주의와의 싸움이다. 이것을 못하니 빗발치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갱신 운동을 전개하기 전에 그것의 밑바탕이 되는 신학적인 분명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
4) Escatological
성령은 종말의 영이다. 성령은 우리의 구원과 영생의 보증으로 주어졌다. 고후 1:22 종말의 축복을 우리에게 앞당겨서 현재에 이 땅에서 맛보게 하신다. 성령 안의 삶은 근본적으로 종말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프린스톤의 과거 저명한 학자 Gerhardus Vos는 “바울의 신학은 특히 구원론, 성화론은 처음부터 종말론의 틀 속에 주조되어 있다”고 했다. 보통 신학적 사고는 기독론에서 종말론으로 가는 면에서 했는데, 바울은 정반대로 종말론에서 거슬러 내려오면서 역전적인 사고를 했다는 것이다. 바울 사상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의 모든 열매를 하늘에 올라가 안고 계신 하늘의 영역(heavenly realm), 곧 종말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그 종말의 영역의 것을 성령을 통해 따먹고 있다. 성령 안에 사는 신자의 삶은 종말의 영역에 속했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인 바(골 3:1-4)” 거기서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G. Vos의 『Pauline Eschatology』 61쪽까지만 읽어보라. 엑기스가 담겨있다. 계몽의 경험을 느낄 것이다. 기독론에서 미래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학적 사유와 함께, 동시에 미래에서부터 과거로 내려오는 역전적인 사고로서 이 진리를 재고찰 할 필요가 있다. 보통 우리 신학에서 종말론을 마지막 때를 다루는 분야로 생각했다. 그러나 종말론은 기독론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신학분야를 주관하는 통괄적인 교리로 작용한다. 우리의 모든 신학은 기독론적, 성령 안의 종말론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사역은 종말론적인 선교사역이다. 우리의 신학이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9월 7일>
Ⅲ.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n With Christ)
기독론에서는 “Christ for us”를 다루었다. 이것의 모든 혜택과 축복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객관적인 사실을 주관적으로 체험케 하신다. 이것 만 아니라, 이 모든 사역을 다 마치시고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Christ in us”로. 성령의 인격 안에 주님의 인격적인 임재를 중재해 주신다. 주님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신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은 도무지 분리할 수 없다. 성령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그분이 과거의 모든 구속사의 열매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경험케 하신다. 부패한 인간은 이 구원의 선물을 받기는 원하지만, 우리의 삶과 마음을 주관하실 주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은 환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전 과정은 예수와의 연합의 바탕과 맥락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전통적 개혁교의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의 서정에 포함시키지 않으면서 모든 단계 앞에 배치시켰다. 이는 모든 은혜의 역사가 이 연합안에 포함될 뿐만 아니라 이 연합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구원론의 서두를 연합으로 시작한다. 칼빈, 우리가 연합하지 안흥면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무효한 것이다. 모든 구속의 열매와 혜택과 은혜가.. 오직 새 언약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만...” 신약성경은 ‘in Christ'가 많이 나온다. 바울 서신에는 164번 등장. ’예수 안에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았다’ 등 많은 구절에서(엡 1:3, 골 2:10..) 언급하고 있다.
1. 연합의 특성
1) 기독론적인 관점
예수와의 연합은 간혹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어떤 신비체험이나 끊임없는 명상, 영성계발, 금욕적 수양을 통해 이루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도덕적 수양을 통해 이루어 가는 것도 아니다. 예수와의 연합은 오직 예수의 대속사역에 근거해서 주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대속 사역이 예수님과 연합이 이루어지는 공로적인 근거이다(meritorious cause). 즉, ‘Christ in us’의 축복은 ‘Christ for us’의 축복에 근거한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나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once-for-all → eternal
① 법적인 연합(judicial union)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부패한 죄인과 연합할 수 있나? 최대의 미스테리이다. 하나님은 죄를 향해서 맹렬한 진노가 불타오르시는 분이다. 그 소멸하시는 불이신 하나님과 어떻게 우리가 연합이 가능한가? 우리 개신교는 너무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것이 너무 약하다. 그래서 교인들이 너무 경망스럽게 행동한다. 접근할 수 없는데, 그분과 어떻게 영원히 하나가 되나?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아직도 부패한 죄인인데... 그 근거가 어디 있는가? 예수를 믿음으로 법적으로 새로워졌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해서 연합할 근거가 주어진다. 나의 선행이나 나의 경건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적, 전적인 타자의 선행과 타자의 의로움에 근거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선행과 의로움에 의해서 이 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법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남녀가 법적으로 혼인하여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 영광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전가되어서 완전한 의인으로 대우, 인정받게 되었다. 예수 믿는자들을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와 분리해서 우리를 보지 않는다. 예수와 결합된 상태에서 보신다. 우리는 빈곤하고 헐벗었어도, 예수님의 풍요하심 안에서 보신다. 죄를 보실 때는 맹렬한 분노가 타오르지만, 예수 안에서는 그 진노의 얼굴이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예수 그리스도께 그 진노의 잔을 완전히 쏟아 부으심으로써.. 우리를 보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하신다. 신앙생활이 뭔가? 주님이 보는 눈으로 우리도 보아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보시는 눈으로 봐야. 정죄 의식으로 우리를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연합은 영원한 것이다. 변함없다. 이루어졌다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합되었다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 무엇에 근거해서? 이 연합은 1%라도 나의 경건에, 선행에 근거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했기 때문에, 내 안의 조건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연합의 영원성, 불변성은 오직 법적 근거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움이 법적으로 내 것이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모든 아름다움, 부요함, 거룩함, 영광, 능력, 지혜가 내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대우해 주신다.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의롭게 된 자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셔서 그 영안에서 아들의 생령력을 누리게 된다. 주님이 누리신 능력과 다이내믹을 누리고 모든 은혜의 풍성을 누린다(엡 1:3). 연합을 근거로 해서 말하는 것이다. aorist다. 이 연합이 이루어지는 매체, 도구는 성령이다. 성령 안에서 주님과 우리의 인격이 만난다. 연합이 영구하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은 영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성령의 내주도 영구하시다. 오순절 성령 사역의 근본적인 특징은 무엇인가?(졸업 시험에 나간다...) 구약에서는 구속사역을 완성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영광을 받으신 주님이 함께 하시는 성령으로 임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신고로...” ‘받는다’는 의미는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것이다. 전통교회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을 때 모든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더 구할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령충만의 관점에서 계속 추구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신학을 배우는 것은, 논리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 신자들의 신앙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② 유기적인 연합(organic union) 실질적이고, 생명적이고 유기적 연합이다. 머리와 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주님의 부활의 생명력에 참여하는 것. 신자의 삶은 부활의 능력을 누리는 삶이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권세를 소유. 사망의 능력을 이기는 능력은 부활을 능력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부활의 능력이다. 이것을 누리며 살아갈 때, 우리들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하는 삶을 산다. 이런 유기적인 연합을 통해 신자는 아들의 형상, 신의 성품, 그리스도의 마음에 참여한다. 우리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마음이 합일이 될 수 있다.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바울은 계속 강조한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부모를 이해하려면 부모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 복음서를 아무리 신학적으로 알아도 그 안의 그리스도의 마음을 모르면, 진리의 사랑의 메시지의 핵심을 간파할 수 없다. 현대신학의 문제가 그것이다. 기가 막히게 신학은 개발되었지만, 그 신학자들이 정말 그리스도의 마음과 보여주고,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들의, 내(박영돈)가 안고 있는 커다란 고민이다. 그리스도의 마음, 주미의 심장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냥 옛날의 서기관과 다를 바 없다.
2) 성령론적 관점
이 연합은 성령의 사역으로 우리 안에 주관적으로 실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의 사역이 연합의 효율적인 근거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공로적인 근거, 성령의 사역은 효율적인 근거이다. 성령이 우리를 접붙여주시기 때문에. effectual cause. 요 15장에 연합의 특성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쉽게 설명하신다.
① 영적인 연합(spiritual union) 성령에 의해 형성된 결합이다. 성령은 삼중적인 역할을 하신다. (1) 성령이 이 연합의 매개체, 채널, 도구 역할을 한다. 우리를 예수님과 연결시켜주는, 본드, 매듭, 띠의 역할을 한다. (2) 예수께 접붙이는 동시에, 성령이 우리를 성령 자신과 연합시킨다. 매개체이지만, 동시에 연합의 주체이다. (3) 성령이 주님과 내가 연합되는 영역을 제공하신다. 성령은 자신의 인격을 제공하심으로, 예수와 내가 만나는 장소를 제공하신다. 그래서 우리 영이 성령과 연합하고, 또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상당히 신비적인 영역이다.
② 인격적인 결합(personal union) 이 연합에 대한 신비주의적 입장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유기적인 측면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해서, 인격적인 구분을 혼동, 모호하게 만드는 우를 범한다. 이 견해는, 보통의 인간관계는 주체와 객체사이의 관계(object-subject)인데, 주님과의 영적연합은 이러한 보편적 관계를 초월해서 주체와 객체의 구분 없이 서로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령 안에 엑스타시의 경험을 한다. 이 경험은 주체와 객체의 거리감과 모든 이질감이 사라진다. 두 인격간의 합일이 이루어진다. 예수와의 연합을 통해 나는 점점 예수화되고, 나와 융화된다. 완전한 연합은 자아 상실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주님만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인격적인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신비주의에 대항해서 분명히 강조할 점은, 이 연합은 인격적 연합이라는 면이다. ★시험★ 우리 안에서 성령은 우리를 예수와 긴밀하게 하나되게 하시면서, 분명히 예수와 구별되게 하신다. ㉠ principle of unity , oneness ㉡ principle of distinction , otherness 이 구별성을 흐리게 되면, 우리 영과 주님의 영을 혼돈해서 자유주의의 내재주의의 오류에 빠진다. 현대의 뉴 에이지, 뉴 spiritual movement에 빠진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 안의 주님을 우리와 분명히 구별되는 타자로서 경험하게 하신다. 우리와 구별되는 초월자, 거룩한 이로 경험케하신다.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경험하면 타자의 임재를 경험한다. 나 외에 타자가 나와 함께 한다. 거룩한 이가 내 안에 임재하고, 내가 그분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낀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 홀로 사는 것 같다. 은혜가 충만하면 즉각적으로 오는 경험은 타자의 임재. “내 안에 사는 분은 그리스도다”라고 바울이 고백. 영성이 깊어지면 이 sense가 계발되고, 깊어진다. 거룩한 그분이 함께 하시고, 주관하시고, 나를 도우신다는 의식이 강해지는 것이 신앙과 능력의 비결이다. 담대함, 평안과 기쁨이 몰려온다. 어거스틴도 나중에 고백, “너무나 오랫동안 밖에서 주님을 찾았나이다...” 너무 우리가 성령 없는 삶에 익숙해졌다. 주의 일을 할 사람들까지도 그런 영적 빈곤에 빠져있는 실정이다.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확실히 중재해 주신다. 로이드존스나 모든 성령체험에 대해 기록한 책들을 보면, 성령충만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화살처럼 꽂히고 사람이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어떤 목사, “어느 날 하나님이 완전히 성령을 거두어 가셔도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예배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함. 왜 우리가 수고하고 돈 들여서 이 공부하나?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사랑과 순종과 믿음의 객관적인 대상으로 경험케 하신다. 그래서 주님(object)을 잘 섬기는 주체(subject)가 되게 하신다. 주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자가 되게 하신다. 성령은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나, 주님과 진정한 사랑의 인격적 교제를 누릴 수 있는 나, 서로 사랑과 friendship을 나누는 주체자가 되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Thou)와 내(I)가 객체와 주체로서 분명히 구별되어야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인격적 구별성을 무시하면, 사랑의 관계를 의미있게 논할 수가 없다. 성령은 우리를 주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되게 하는 동시에,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주체자가 되게 하신다. 이것이 성령이 역사하시는 두 방향이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나를 감화시키도록, 그래서 주님의 사랑에 대한 내 안에서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신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새롭게 깨달을 때 내 마음 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일어나서, 내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나아가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이 구별이 주체와 객체의 구별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구분은 다만 이론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경험된다. 주님과의 연합을 통해서 나의 뜻과 의지가 주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나의 주관적인 뜻과 의지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은 주님의 객관적 뜻과 원함과 우리의 주관적인 뜻과 원함을 구별해 주신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야만 내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가 아닌가를 우리가 알 수 있다. 영적으로 너무 둔해서 내가 지금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데도, 내가 성령을 따라 산다고 착각하는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래서 먼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면, 그 다음에 우리의 마음을 감화하시고 설득하셔서 주님께 대립된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기울게 하셔서 주님께 굴복하게 하신다. 나의 완고했던 뜻과 의지가 주님의 원함과 뜻에 완전히 굴복되게 될 때,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력이 들어오는 것을 경험한다. 주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합해질 때,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충만히 임하여 기쁨이 몰려온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 비결. 내 뜻을 주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 이렇게 주님의 뜻과 나의 뜻이 완전히 일치되었을 때도 나의 뜻과 주님의 뜻은 분명히 구별된다. 하나가 된 다음에는 이제는 주님의 뜻과 대립되는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굴복된 나의 뜻이다. 그러나 분명히 구별된다.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으로 무한히 확장된다. 자기 뜻이 은혜로 자유로워지고, 자기 완성을 의미한다. 주님의 형상과 나의 현재 모습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다. 신앙생활하고 영적으로 깊어지면서, 이런 계시와 깨달음이 더 확실해 져야 한다. 주님의 이미지의 목표가 뭔가? 이것이 가슴팍에 분명히 새겨져야 한다. 내가 변화되어야 할 주님의 이미지가 무엇인가를 알고, 내가 얼마나 주님과 동떨어져 있나, 무엇을 개혁해야 하나, 어느 쪽으로 더 성화되어야 하나를 알고, 그것을 위해 더 노력하게 된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것인데, 나는 너무 추하고 부끄럽구나... 너무 안타깝다... 그런 갈망이 생긴다. 이런 것을 알려면 깊이 기도해야 한다. 깨달음이 온다. 성령 안에서 자기의 참모습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객관적인 이미지와 형상 결론, 나와 주님은 성령 안에서 온전히 하나될수록 더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 연합안에서 항상 나는 나로, 주님은 주님으로. 무한한 창조주로 변함 없이 존재하신다. 내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서도 신적인 인격에 참여하게 한다. (질문 이상돈) 성령의 임재에 대한 말을 하는 예배를 많이 한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대해 많이 말하는데, 그 개념이 정확하게 무엇인가? (답) 우리와 오순절... 용어에 대한 의미 부여가 다 다르다. 내 생각에는 기름부음과 임재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임재하는 이유는 역사하시기 위해. 성령이 임재하시면 기름부음과 성령충만이 나타날 것이다. 집회에서 emotionalism(흥분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 개혁주의 진영의 약점은 너무 객관적인 것만 강조했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자칫하면 지나친 감정주의와 흥분주의가 성령의 역사를 대치해버릴 위험이 있다. 영적인 현상을 조작하는 경우가 많다. (질문 김상용) 조나단 에드워드와 찰스 피니의 관점의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우리가 전통적으로는 에드워드적인 입장에 있는 듯하다. 오순절은 열심히... 우리가 은혜 주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답)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너무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피니는 알미니안적 측면을 복구했다고 본다. “여러분이 회개해야 한다. 성령이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옳다. 잘못된 점은 회개할 능력은 내 안에 있다고 한 점이다. 전도할 때는 은혜를 먼저 강조하면 안 된다. 지혜롭게, “회개하십시오. 성령의 역사를 따라서 회개하십시오”라고 자꾸 몰아쳐야 한다. (질문 김경식)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답)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이해해야. 구속사역의 바탕 위에서 다른 영혼을 구원하는 것. 죄와 사망의 권세를 분쇄하는 것... 어떤 면에서 양적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③ 신비적인 연합(mystical union) 전통적인 견해. 그런데 개혁주의자들의 말의 이 개념은 신비주의자들의 것과 다르다. 신비주의자들의 견해는, “주님과의 연합은 논리적인 설명을 초월한 용어다. 우리가 이 연합에 대해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설명을 시도하려 하면 연합의 본질적인 의미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한다. 오직 신비적인 체험으로만 간파할 수 있다고 한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를 논리적, 이성적으로 설명 못한다. 다만, 감탄과 경탄으로 ‘Oh !!!'로만 표현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도록 계시하셨다. 계시의 한도 내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이 연합을 여러 가지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완벽하게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성령 안에 주님이 내주하시고... 이런 거 모른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서, 인간의 영혼이 어디에 붙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영혼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그 안에서 주님의 연합을 이루시는 것.. 알 수 없다.
3) 교회론적 관점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의 모든 은택과 혜택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가 머리, 우리는 지체를 이루고 있는 몸. 우리는 몸의 지체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교회론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신비주의적, 개인주의적 오류에 치우치기 쉽다. 바울 사도는 신자간의 연합과 교제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했다. 엡 4장에서 주도 몸도, 성령도 하나요... 이 모든 지체가 같이.... 우리가 다양성이 있지만,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면에서 unity가 되었다. 같은 비전과 꿈, 갈망을 가지고 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우리 ‘신학함’도 진리 안에서 ‘교제함’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고 ‘아멘’할 수 있는 진리를 나눔으로서 세상의 누구도 누릴 수 없는 교제를 하고 있다. 현대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참된 교제가 상실되고 있다. 교회의 본질적인 의미가 상실되고 있다. 깊은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 이것이 회복된 교회로 발전시켜야 한다. 교인들을 보라. 이런 부요한 교제를 누리고 있나? 너무도 고독한 무리들이다. 특히 대형교회의 소외된 고독한 군중들이 모였다가 그냥 흩어진다. 대형교회의 공헌과 유익한 점이 많다. ok. 그러나 더욱 발전의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형교회가 이상적인 모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아주 은밀하게 미치는 마이너스가 많다. 목회의 성공은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이라는 허영심을 길렀다. 그들이 정말 존경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양심선언을 해야 한다. 성령 안에서의 인간 교제..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그것만큼 피곤한 것이 없다. 교인들이 얼마나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지... 교인들이 은혜 받을 수 있는 설교 제목. “여러분, 오늘도 당신은 외로우신가요?”
<9월 14일>
4) 선교론적, 종말론적인 관점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인 영혼 안에서만 일어나는 사건만이 아니라,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 안에’라는 말은 매우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in Christin Adam율법의 저주에서 자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다시 부여됨, 그 안에서 하나님 형상의 회복, 의의 종, 율법 앞에 의로운 삶, 안식 회복진노, 형상 상실, 죄의 종, 안식의 축복 상실
하나님의 의가 왕노릇하는 영역에서 살게 되었다. 신자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천국의 축복과 종말의 축복, 하늘의 영역에 속한 축복을 누리면서 살게 되었다. 신자와 교회는 이런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내 안에, 교회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세상 속에 확장해야 한다(선교론적 관점). ‘예수 안에’라는 개념을 고정, 격직되게 이해하지 말고, 성령의 역동적이 사역으로 영역이 확장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우주적인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가 세상 속에 presence한다는 것 자체가 세상에게는 큰 축복이다. 빛은 비치기만 해도 어둠의 세력이 물러나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종말적인 축복을 만끽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세상 속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가는 곳마다 세상이 밝아진다. force spirit이 필요. 이런 가장 중요한 면들을 우리 교회가 좀 망각하고, 다른 일에 무지무지하게 바쁜데, 세상 속에 빛은 못 비추고 연기만 피우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런 축복을 만끽하는 모습만 보여주어도 강력한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못하고 다른 일에 너무 바쁘다. 교회가 정말 그리스도 안에 축복을 누리며 연합의 열매를 맺는 일에 주력하기 않고 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이런 사역을 함으로써 만유를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교회의 선교사역을 통해 종말론적으로 성취된다.
2. 연합의 실천적인 교훈
1) 연합의 축복을 알아야 한다(to know - indicative)
어떠한 존재가 되었고, 어떤 은혜가 주어졌는가? everything is changed. 바울 사도의 기도나 사도들의 가르침 내용을 보면, 우리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연합함으로써 주어진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요즘의 복음의 메시지를 보면, 어떤 추가로 은혜를 더 받아야 한다는 것(something more)을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바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혜의 풍성을 보게 하소서. 우리 안에 역사하신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알게 하소서’라고 하고 있다. 우리 신앙생활의 빈곤은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풍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알아야 한다. indicative차원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복음을 전파할 때 먼저 이 차원을 전해야 한다. 이 엄청난 은혜의 영광을 강조하지 않고 너무나 도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영광의 은혜를 우리가 바로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저들이 그리스도 안에 세상에 있는 것보다 더 큰 보화를 발견하게 해야 한다. 신앙생활을 지혜롭게 해야 한다. 무턱대고 ‘~해라’고 하면 설득력이 없다. 은혜의 풍성 이후에 imperative로 가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축복을 주셨다(엡 1:3).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허드슨 테일러의 고백을 들어보자. 원제는 '허드슨 테일러의 영적인 비밀(spiritual secret)'인데, '~ 생애'로 잘못 번역되었다. 여기서 테일러가 깨달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내가 이미 그분 안에 있다, 이미 축복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내 노력이 먼저 앞섰다. 거기서 오는 고뇌.... indicative가 중요하다.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연합의 입장에서 특별히 신앙생활의 출발점에 우리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본다. 무엇인가 추가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심리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All in Christ(법적으로 모든 것이 주어졌다). 그 연합에 근거해서 성령을 받은 것이다. 나중에 어느 정도 깨끗하게 된 다음에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 때 충만하게 역사하신다. 이런 pattern이 신앙의 근간을 이루어야 한다. 테일러가 말하는 것처럼 이것을 깨달으면 기도생활도 달라진다. 모든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뭔가 결핍되었기에 하나님께 징징대고 요구하는 식의 기도가 아니고, 감사로 생활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기도의 본질은 감사의 기도이다. 구할 때도 그리스도안에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분명한 인식 가운데서, “아, 다 주셨으니 약속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누리게 해 주십시오.” check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감사가 너무 없다. 나의 기도의 노력으로, 공로의 대가로 뭔가를 끌어내리려는 시도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기도가 아니다. 주님과의 연합 바탕 위에서 기도의 본질과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2) abide
in Christ이기 때문에 그 영역을 떠나지 말라. 너의 위치를 지키라. 이 축복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말라. 경건의 첫 번째 조건은 ‘위치를 지치는 것’이다. 성령 안에, 예수 안에 무한한 자유와 특권을 누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아직도 죄의 가능성이 있다. 이 가능성을 남용할 여지가 있다. “자유로 육신의 기회를 삼지 말라” 우리가 객관적으로,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범죄해서 in Christ의 영역을 떠날 수 없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in Christ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성령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면, “성령 안에 거하고 있으니 성령 안에 행하라”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 영역에서 부여되는 축복과 자유의 은혜의 물결을 따라서 살라!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굉장히 힘든 삶을 살고 있다 거센 하나님의 자유의 물결을 거슬러 살려 하니 얼마나 힘든가? 곤죽이 된다. 불가능한 사람을 try하고 있다. 다른 말로는 ‘믿음 가운데 사는 삶’이라고 테일러는 말한다. 주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이다. 바울도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믿음 안에서 산다”라고.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3) 순종
연합해서 동행하는 삶을 위해서는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빨리 간다. ‘keep in step in the Holy Spirit’ 주님도 “내 멍에를 매라” “젊었을 때 멍에를 맺는 것이 좋으니”(애가)
4) 몸을 헌신
(고전 6:17-20)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특히 음행의 죄를 피해야 한다. 주의 영과 우리의 영이 하나이기 때문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성령이, 주의 영이 우리에게 거하신다. 우리 영과 연합하신다.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영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의 육체와 성령이 하나이고 긴밀하게 하나된다. 그런데 음행을 범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 직접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로 음행의 죄를 범하면 성령의 은혜가 아주 위축된다. 성령이 자유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사역자들이 음행을 범하면 용서는 받지만, 평생 자유롭지 못하다. 설교에도 능력이 없고, 일을 해도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음행은 자기 몸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무엇에 근거해서?
5) 연합의 목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엡 4:13-15),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갈 5:22)
(엡 4:13-15)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성령의 열매는 집합적인 열매이다. 우리가 함께 자라가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교회론적이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Ⅳ. 구원의 서정(The Order of Salvation, Ordo Salutis)
교의학은 전통적으로 구원의 서정을 논의해왔다. 구원론에서도 다루어야 한다.
1. 전통적 교리의 입장
구원의 서정은 구원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다양한 측면들을 논리적인 순서를 따라 나열해서 제시한 것. 구원의 은혜가 적용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단면들을 논리적으로 나열하는 것. 전통적 견해의 기본 입장은, ① 구원의 서정은 시간적 순서라기보다 논리적 순서이다(logical) 구원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단일하고 통일된 역사이지만, 이 과정에 나타나는 은혜의 역사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기에 구별되어야 하고, 명확하고 합리적인 순서로 진행된다. ② 성경의 어떤 한 구절에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았으나, 증거는 충분하다 롬 8:30 택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 이 구절에는 소명과 칭의와 영화가 언급되어 있다. 구원의 서정에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 대표적인 단계가 제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여러 구절에서 구원의 서정을 암시하고 있는, 부분적으로 밝히고 있는 구절 많다. 믿음에 이어 칭의는 롬 3:30, 5:1 갈 2:16 칭의 다음 양자는 요 1:12, 갈 2:16, 양자의 은혠는 성령의 내주(성화) 롬 8:14, 성도의 견인은 빌 1:6, 딤후 4:18, 영화는 요1서 3:2, 롬 2: 8:30 ??? 요13:9 ??? 막 1:15, 행 2:18, 20:21)
이것을 바탕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구원의 서정을 주장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다소 차이는 있어도 보편적으로는 일치한다. 존 머레이(?) 견해, ① Calling [개혁주의 신학자 중 혹자는 External Calling과 Effectual Calling으로 구분하기도. 만약 이렇다면 중생(regeneration)이 들어갈 자리는 이 둘의 중간이다] ② Redemption ③ Faith/Repentance = Conversion(후크마?) ④ Justification ⑤ Adaption ⑥ Sanctification ⑦ Perseverance ⑧ Glorification
2. 구원의 서정의 전통적 견해의 한계와 문제
상당수의 개혁신학자들에게 문제점 재고해야 할 문제점 제시 G. C. 벌코프(Bercouwer), 후크마, Weber 이들의 지적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여러 단면이 있지만, 일련의 계속되는 순서로 보는 것은 문제있다. 물론 이것이 시간적 보다는 논리적 순서로 이해를 주장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온전히 분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 이런 구원의 서정에 의하면, 한 단계가 끝난 이후에 다음 단계가 계속되는 것처럼 오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병행해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는 통일적 은혜의 역사인데, 구별의 필요는 있어서 단계적, 순서적으로 logical 순서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이런 지적은 타당하다고 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구원의 서정을 야기될 잠재적 위험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겠다(★시험★).
1) 칭의와 성화의 단계
구원의 서정 교리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단계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 결과, 칭의는 구속사역으로 부과되지만, 성화는 칭의에 연결되어서 오해될 수 있다. 칭의는 구원과 직결되지만, 성화는 구원받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닌,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간혹 이런 말 한다. “우리가 칭의로만 구원받고 성화는 구원 후 천국에서의 상급과 관련 있다”는 말. 이것은 값싼 은혜의 교리를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현상들이 개신교 안에 두르러졌다. 본 훼퍼 같은 사람들은 “귀한 은혜의 교리가 헐값의 은혜의 교리로 전락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개신교의 이런 문제점에 대응해서, 성화를 새롭게 강조하는 운동들이 종교개혁 후에 게속 일어났다. 웨슬레에서 출발해서 성결 운동, 케직 사경회, 오순절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성화를 새롭게 강조하는 운동 일어남(순서도 중요). - Wesley : Instantantious S. entire S.(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획기적으로, 2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은혜를 받은 후에 그 때부터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삶이 가능하다. - Holiness Movement : 웨슬레와 같은 맥락. 칭의와 성화를 2단계로 분리한다. 성화를 2차적이고 획기적인 경험으로 본다.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부터의 구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구별한다.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은 획기적인 은혜 필요. 그리스도인을 2부류로. 칭의의 은혜만 받은 사람과 그 다음 단계. 우리가 실제적인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는 성화를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 - Deeper Higher life Movement : - Keswick Movement(convention) : 대표적 인물 중 대중적 경건 서적을 통해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엔드류 머레이, F. B. 마이어, R. A. 토레이, D. L. 무디, D. 심슨, A. W. 토저(워치만 니도 그 부류에게 사사)... 이들의 책은 성화를 제 2의 축복으로 강조한다. second blessing의 개념을 대중화한 사람. 과거 19말 20초의 부흥 운동의 메시지가 이들이 강조한 메시지들이다. 이들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선교사로 헌신해서 한국에 왔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부흥 메시지를 분석하면 이들의 메시지와 맥을 같이 한다. 이들의 가르침은 성화의 획기적인 제2의 축복을 여러 표현으로 강조한다. 머레이는 롬 7에서 8장, 육적 삶에서 영적, 광야의 삶에서 젖과 꿀이 흐리는 가나안, 자아가 깨어지는 경험으로. 이들 중에서 19C말과 20C초기에 성화의 2의 체험을 성령 세례와 충만으로 말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게 되었다. 성령충만이라는 말로 불려졌는데, 20c 초부터 성령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점차 이런 성령론적인 표현이 선호되었다. 그래서 오순절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자신들의 견해를 성경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사도행전의 2차 축복을 암시하는 구절로 뒷받침. 그래서 오순절 성령세례의 가르침은 20C에 새로 생긴 것이 아니고, Wesley와 케직 사경회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런 가르침은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가르침은 목회현장에서 실용적인 효과가 있다. 사람을 자극하고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실용적이라도, 과연 성경적인가를 따져 봐야 한다. 성경적 가르침은, 이 성화의 은혜를 2차적으로, 획기적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발견할 수 없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게 될 뿐 아니라, 거룩하게 되었고 성령의 사람이 되었고, 그때부터 자유롭게 역사하신다. 따라서 어떤 다른 시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령충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성경이 말하는 text를 정확하게 이해한 후에, context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문제는 text는 잘 아는데, 적용하는 상황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신앙의 정도를 떠나서, 아주 영적을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다. 전반적으로, 그러기에 영적으로 심각하게 침체된 현대의 상황에서는 획기적인 체험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그런 체험자가 많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은혜는 자기에게 귀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메시지인 것처럼 강조해서는 안 된다. 정상적 신앙의 pattern이 아니고, 우리가 성경에서 많이 탈선했기 때문에 변칙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별한 경우에 회개를 해서 획기적인 체험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은혜가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에게는 2차적인 축복인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은 자신에게는 그 체험이 귀하지만, 자신의 체험을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체험을 정형화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특히 남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냉철한 신학적 검증 없이 자신의 경험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의 대부분은 특별한 체험 없이 점진적인 은혜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가운데서 특별한 굴곡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김재섭 질문) 테일러의 편지처럼, 깨닫기 전에는 연합을 누리지 못했다. 그런 깨달음을 2의 체험으로 볼 수 있지 않는가? (답) 모든 사람이 그렇게 깨달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 패턴이 아니다.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다. (?) 성화의 과정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이 다 변화되는 것인가? (답) 점진적 성화로 거칠 수 있겠지. 바울도 다메섹에서의 체험으로 모든 가치관과 세계관이 근본적 변화를 받았다고 본다. 그러나 그 토대 위에서의 성장 (이경미) 테일러도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서 믿음으로 인정하고 거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연합의 축복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뒤에 가서 주님 안에 거하고,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면, 또 어떤 부담감을 갖게 되는 순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답) 순서적 단계로 생각하지 말고, 믿음의 토대로 같이 이어지는 사건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웨슬레, H M, K C, 오순절 등의 성령세례 가르침은 획기적인 성화의 체험을 해야한다는 점에서 맥이 같다. 동일한 논리적 바탕 위에 출발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를 서로 분리된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분리는 긴밀한 연결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출발한다. 이는 칭의와 성화를 2단계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래서 성화의 중요성을 현저히 약화시키는 것이 개신교 일부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면(첫 번째 폐단), 웨슬레 등의 문제점은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똑같이 칭의와 성화를 2단계로 분리하는 논리적 바탕 위에서 강조한다. 이러한 오해가 어디서부터 출발했나? 구원의 서정이라는 도식에서 2단계로 보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칭의와 성화는 2단계가 아니고, 우리에게 동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 두 은혜 위의 바탕 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인 이 두 은혜의 구별성을 보아야 한다. 연결성과 구별성의 양면을 조화롭게 이해해야 한다. 성화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직결된다는 것을 제대로 강조하지 못한다. 성화도 기독론적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
예수님人칭의성화
<9월 25일-보강>
구원의 서정 교리의 문제점과 한계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먼저 칭의와 성화에서의 문제점을 얘기했다. 칭의와 성화가 2단계로 분리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을 주의해야. 칭의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성화는 구원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optional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화의 열매가 없어도, 거룩한 열매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은혜의 교리로 전락할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잠재적인 위험성이다. 신앙의 방종과 나태를 조장할 수 있는 위험이다. 이것이 개신교 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현상이요 문제였다. 또 하나의 문제는, 현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운동들이 새롭게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운동들이다. 몇 가지를 설명했었다. 20세기의 성령운동까지... 성화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하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성화를 2차적이고 획기적인 은혜로 강조하는 것이다. 칭의를 통해서는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는데, 실제의 삶에서 죄의 세력과 오염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2차적인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케직 사경회에서는 2nd blessing이라고 했다. 이것이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와서는 성령세례, 기름부음, 성령충만으로 불리기도 했다. 20세기 초에 성령운동이 확산되면서 성령론적인 표현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래서 20세기에 처음 나온 얘기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2차 축복을 입증하려는 구절을 동원해서 설명한다. 이런 두 가지 오류는 모두 어떤 관심과 강조점은 다르지만, 동일한 논리적 바탕 위에서 출발한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된 2단계로 이해한다.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개신교 안의 메시지의 문제점도 그러하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holiness movement 등도 성화를 2차적인 것으로 분리된 것으로 보는 사상이다. 그래서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칭의와 성화가 단계적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사고의 틀 속에 빠지는 교리로 구원의 서정이 작용할 수 있다. 이것은 동시적으로 주어지면서 항상 병행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 신분적으로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변화가 된다. 이 칭의와 성화는 그 특성상 구별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이 구별성과 함께 연합성을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 칭의와 성화가 이런 2단계적으로 발전되어 진행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논리적 사고 속에서는 성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말하기 어렵다. 성화의 기독론적인 바탕을 밝히는데 문제점을 안고 있다. 위의 도식에 의하면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일하게 근거함을 강조할 수 있다. 믿음과 성화와의 관계도 직접적으로 강조할 수 있다. 우리가 성화될 수 있는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음이다. 우리의 선행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노력이 성화에서 필요하지만, 그것은 믿음 안에서 필요한 것이다.
2) 중생과 칭의의 관계
구원의 서정에 의하면 중생이 칭의보다 먼저 배치되고 있다. 중생은 실제적이고 칭의는 신분적 변화다. 칭의는 우리 안에 선재하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구원의 서정에 의하면 칭의가 선재하는 중생에 어느 정도 근거하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
3) 믿음과 회개의 문제
구원의 서정에 의하면 믿음은 칭의를 얻는 방편으로 단회적인 행위로 이해되기 쉽다. 믿음이 칭의 바로 전에 배치됨으로써 칭의를 얻는 방편으로 단회적인 것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계속적인 행위이다. 믿음은 칭의와 구원뿐 아니라 신앙생활 전 과정의 밑바탕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견인도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선행도 믿음으로 나오는 것, 순종도 믿음의 열매로서의 순종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단회적으로 이해할 때 성경의 믿음의 포괄적인 의미를 오해하게 된다. 믿음을 단회적으로 보면 믿음과 성화의 긴밀한 연결성을 간과하며, 또한 믿음과 순종, 믿음과 사랑, 행위, 소망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오해함으로 믿음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상실한 채 즉흥적인 승인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성경은 계속적인 신뢰행위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회개도 마찬가지로 단회적일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것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믿음이 계속적인 것 같이 회개도 계속적이다. 회개는 단순하고 일시적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죄를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심령의 상태, 죄를 배격하는 지속적인 삶의 자세를 말한다. 칼빈은 신앙의 전 삶의 과정이 회개하는 삶이라고 했다. 애통하는 삶. 나중에 회개를 다시 자세하게 다룬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를 서정이라는 도식을 따라 이해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있다. 구원의 은혜가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측면이 있고, 그것을 구별해야할 필요는 있다. 그 은혜를 풍성하게 구현하기 위해서.. 그러나 단계적으로 구별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그러면, 성경에 근거해서 분명히 구별할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나?
① 신분적 변화 : 칭의 실제적 변화 : 중생/성화 ② 은혜의 즉각성, 단회성 : 칭의/성화, 믿음과 회개, 영화 은혜의 점진성, 연속성 : 성화/칭의, 믿음과 회개, 영화 ** 우리의 삶의 전 과정은 칭의의 바탕 위에 서 있다는 측면에서 칭의도 연속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화도 즉각적인 면이 있다. 어디서?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실제적으로 획기적인 변화가 있는 근본적이고 단회적인 성화가 일어난다. 또 믿음과 회개, 그리고 영화도 예수님을 믿을 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모든 것에는 단회적인 것과 점진적인 것이 있다.
(김광석 질문) 즉각적인 성화는 중생과 어떻게 다른가? (답) 성경에는 분명히 근본적인 성화를 의미하는 용어를 거듭남보다 훨씬 많이 사용한다. 그리고 성화는 칭의와의 관계성 속에서 분명히 구별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중생보다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오버랩 되는 부분이 있지만, 구별되는 면들이 있다. 나중에 근본적인 성화에서 다시 다루자.
구원의 서정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은 이런 교리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의도한 것은 아닌데, 교리 안에 있는 잠재적인 위험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교리는 구원의 은혜의 여러 측면들을 좀 더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면에서 이 교리의 유용성과 가치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치와 공헌을 이해하지만 문제점과 한계를 바로 지적해야 한다. 개혁신학은 한 전통의 노예가 아니고 항상 성경의 조명 아래서 더 성경에 부합된 신학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평가를 할 때 구원의 서정을 몹쓸 것으로 평가하지 말고, 가치가 있다. 그 은혜의 여러 가지 단면들을 좀 더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문제점 보다 가치와 공헌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보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Ⅴ. 칭의와 성화의 관계; 종교개혁의 논쟁
1. 종교개혁의 논쟁
16세기 종교개혁의 가장 핵심되는 논쟁 중 하나는 구원론 논쟁이다. 개신교는 구원론을 개혁함으로써, 칭의의 교리를 발견함으로써 출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과 개혁주의자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fair하게 진단해야 한다. 로마 가톨릭도 자기들도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 당시에서 양자가 서로 어거스틴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The whole process of Salvation is through grace"라고 했다. 그런데 양측의 입장에 있어서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나타났다.
imputed grace 신분적인 변화infused grace 실제적인 변화R. C. 믿음거룩함(선행)Ref. 믿음거룩함
R. C. : imputed grace(전가되는 은혜=신분적인 변화/믿음으로 받음) + infused grace(주입되는 은혜=실제적인 변화/우리 안에 들어와서 거룩함의 열매를 맺음) 따라서 믿음도 있어야 하고 주입되는 은혜로 말미암은 거룩함도 있어야 한다. 주입되는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의 산물로서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둘 다 은혜다. 그래서 자기들의 입장에서 구원의 전과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고 본다. 거의 비슷하다. Ref. : 오직 믿음으로. 그런데 이 믿음이 참되다면 분명히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참 믿음이 아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양측 다 믿음과 거룩함을 주장한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로마가톨릭은 거룩함을 일차적으로 우선적으로 구원의 조건이라는 측면에서 강조하지만, 개혁주의자들은 거룩함을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라는 차원에서 이해한다. 이 한마디 차이다. 이 한마디 차이가 엄청나게 심각한 차이를 초래할 수 있다.
** 거룩함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① 구원의 확신이 위협받는다. 얼마나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내가 안심할 수 있는가? 그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인가? 노력하면 할수록, 은혜가 충만할수록 우리가 더 예민하게 깨닫는 것은 우리의 부패성인데... 나의 거룩함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뼈저리게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죄의식과 갈등과 번민과 불안이 우리에게 일어난다. 이것이 루터의 경험이었다. 젊은 날 그 안에 일어난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서 겨울에도 담요 한 장 덮고 딱딱한 마루침대에서 자고 끊임없는 금욕과 고행을 했다. 얼마지 않아 말라 죽을 것이라고 일기도 썼다. 그런 영적인 쓰라린 경험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② 예수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온전히 부각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적인 사랑으로 이해하기 쉽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조건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오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그 아가페적인 사랑을... 예쁜 짓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이 없다는 상태만 되도 괜찮다. 하나님이 극도로 진노하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정반대 되는 조건으로 가득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역조건에도 불구한 사랑이다. 그것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셨다. 우리의 모든 역조건을,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고 미움의 대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검붉은 죄악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옮기신 것이다. 그 사랑하는 아들이 그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남김없이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우리에게 옮겨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조건을 우리에게 완전히 옮겨주셨다. 예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우리에게 온전히 전가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완전한 조건으로 가득 찬 자로 우리를 삼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법적으로 완전히 나에게 전가됨으로써 그 조건을 근거로 우리를 변함 없이 사랑하시는 것이다(그런 측면에서 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조건을 자기 안에서 찾으려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거룩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끌어들이는 데 조금이라도 조건이 되지 못한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죄로 범벅이 된 거룩함이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조건은 내 안에 있지 않고 예수님의 의로움에 있고 그것이 내게 법적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각도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큰 사랑을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빠지기 쉬운 오류 중 하나는, 자기 경건을 의존하는 것이다. 내가 요즘은 성령충만하고 봉사도 잘하고 설교도 잘 하니 하나님께 잘 나아갈 수 있겠다고 요 따구 생각을 하면 곧 낙심한다. 그러고 나서 정죄의식에 빠져... 하나님은 이제 날 사랑하지 않으셔... 이거 중요한 문제이다. 호스피스 사역하다보면 장로, 목사들도 자신의 경건을 의존해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니 한심하기 그지없어 다들 두려워한다. 칭의의 교리에 확신이 없으면 누구든지 다 두려움에 휩싸인다. 예수님人칭의성화 내가 의존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다시 신앙부흥이 일어난다.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다시 떨어진다. 그래서 겸손하게 만드신다. 나의 사랑과 경건에 의존해서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 깨닫게 해 주신다.
③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깊은 감사가 일어나게 된다. 신앙의 근본 바탕은 감사이다. 감사의 요소가 빠진 봉사와 예배와 헌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감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 안에 일어난다. 그래서 성화의 원동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죄의식에서 자유케 한다.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케 된다. 불안과 두려움에서 자유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헌신하고 사역자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내 안에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아무 근거도 없고, 앞으로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를 우리 주님이 완전히 나에게 만들어주셨다. 내가 너무도 초라하고 하나님 앞에 불충하더라도 완전히 하나님이 나를 영원히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나로 만드셨다. 그 관점으로 나를 보라. ④ 이 칭의의 교리는 성령께서 죄인들에게 깊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깨닫게 해 주는 효과적인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가톨릭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거룩함의 조건처럼 제시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밝혀주지 못한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전하는 성령의 효과적인 방편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 성령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될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할 때 공백 가운데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말씀을 통해서 진리르 깨닫게 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다. 그런 효과적인 방편으로 칭의의 메시지가 사용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개혁주의자의 칭의 교리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이 산출할 수 있는 영성의 특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두려움과 강박관념... 이런 영성의 특성을 확신과 감사와 자유의 요소로 바꾸어 주었다.
2.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종교개혁자들(칼빈)의 입장
1) distintion(칭의와 성화의 구별성)
칼빈은 R. C의 입장에 대항해서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을 강조했다. 칭의는 우리가 이루는 성화에 조금도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동시적이지만 논리적으로 날카롭게 구별해야 한다고 보았다. R. C.의 문제는 칭의와 성화의 열결성(unity)을 너무 강조했다. 칭의가 성화의 정도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세례 시에 받은 칭의의 은혜를 상실하면 자꾸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구원의 확신이 위협받는다. 위에서 언급한 4가지가 없이 칭의를 강조하면 남용되게 된다. 칼빈의 후예 신학자들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이해할 때 날카롭게 구별해야 한다고 보았다. 바빙크도 “날카롭게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
2) unity(칭의와 성화의 연결성) 극단적인 개신교 일부에서는 로마 가톨릭(율법주의적 메시지)과 정반대의 오류에 빠지는 현상이 있었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했다. 신앙의 방종과 나태를 초래했다. 신앙의 열심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거짓 구원의 확신에 빠지게 하는 문제가 파생되고 교리주의에 빠진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바빙크는 너무나 귀한 구원의 은혜가 너무 헐값으로 취급받는다고 한탄... 칭의와 성화는 논리적으로 구별해야 하지만, 칭의와 성화는 동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칭의가 성화보다 우선된다는 논리적 우선성을 강조했으나 시간적 동시성을 강조했다. 구원론의 측면에서 실제적으로 개혁이 일어나지 않은 측면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바로 배워라!!!!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에서 특이한 구조를 따른다. 성화를 먼저 말하고 칭의를 다루었다. 어떤 책도 이런 순서를 따르는 사람은 없다. 왜 이런 식으로 접근했을까? 그가 사역한 배경이 로마 가톨릭과 논쟁하는 맥락이었기 때문이다. 칭의의 교리는 분명히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보라는 측면에서. 칭의는 참된 성화의 바탕이다. 당신들의 염려처럼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참된 성화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이런 것을 연구하면서 “칼빈은 성화의 신학자다”라고 했다. 이것은 바르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다. 칼빈은 칭의가 관심의 종착역이 아니다. 칭의는 바탕이다. 그 기초에서만 하나님 앞에서 성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경건이 그의 신앙과 신학의 지향점이다. 칼빈은 아주 지혜롭게도 로마 가톨릭과의 대치상황에서 성화를 전략적으로 앞세웠다. 그래서 성화의 strategic precedence, 칭의의 logical precedence.
이 balance를 칼빈처럼 잘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런 바탕 위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 강단은 ①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잘못된 칭의에 대한 이해 ② 이런 개신교의 문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다시 로마 가톨릭과 비슷한 맥락에서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윤리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설교가 많다. 형식적으로, 말로만 개혁주의... ③ 성령운동과 부흥운동 등에서 웨슬레의 전통을 따라서 획기적인 2차적 은혜를 강조하는 것. 정말 성경적인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구원의 메시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혹자는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는 한국 교회가 너무 칭의의 교리를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틀렸다. 칭의의 교리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극단적 개신교는 무율법주의.
*** 개혁주의 입장은 성경적 근거가 있는 것인가?
- 바울의 입장 1) 먼저 칭의와 성화의 distiction 강조(롬 3:24-31) = Christ died for us 예수님의 죽으심과 칭의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로마서의 가르침을 보면 칭의와 성화를 완전히 분리해서 칭의를 성화보다 논리적으로 훨씬 앞세우고 있다. 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성, 5장에서는 역조건에도 불구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원수되었을 때, 죄인되었을 때, 연약할 때, 경건치 않을 때)... 바울 사도는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고전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칼빈과 같음 2) 칭의와 성화의 unity 다룸(롬 6:1-14) = We died with Christ 죄를 지을 수 없다. 죄에 대해서 우리가 죽었다. 실제적으로 변화되었다. 의에 대해서 부활했다. 무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성화를 다룸.
초대교회에도, 중세교회에도 양극단의 오류가 나타났다.
*** 현대의 상황은 어떤가?
계속해서 거듭해 나타나고 있지만,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종교개혁과는 달리 우선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무율법주의적인 경향이 팽배하게 나타났다. 이런 경향성에 대응해서 unity를 강조해야 한다. 그러나 unity를 강조할 때 많은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을 본다. 따라서 율법주의 distinction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도 바울과 칼빈처럼 이 양면성을 함께 간직하면서 설교의 메시지를 만들어 가야 한다. 나의 설교의 메시지가 이 양면성이 조화롭게 강조되고 있는지를 항상 점검해야 한다. 교회 안에는 이런 경향에 치우치는 사람이 늘 나타난다. 사람에 따라서 반대점을 강조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율법주의에 치우치면 distinction을 강조하고, 무율법주의에 치우치는 삶을 살면 unity를 강조해야 한다. 지혜를 최대로 활용해서 다루어야 한다. 우리 안에는 양극단이 항상 공존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부패성의 특성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천성적으로 율법주의적이고(교만), 동시에 무율법적이다(멋대로 살고 싶은 욕망). 우리의 구원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10월 12일>
Ⅵ. 개혁주의 칭의론
1. 개혁주의 칭의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1) Legal Declaration(칭의는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
구약에는 의롭게 하다는 단어로 ???가 hifil 형태로 사용되어서 ?????(to declare righteous, justify)로 쓰인다. 신 25장, 잠 17:25, 욥 27:5, 출 23:7... 법정적인 의미로 사용. 신약도 구약과 같은 맥락에서 ‘의롭게 하다’는 의미가 대개 법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δικαιοω(로마서에 15번), δικαιοσ(34), δικαιοσυνη(7), δικαιωμα(5).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λογιξομαι)』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Και ελογιεθη αυτω εισ δικαιοσυνη(It was reckoned him for righteousness).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의의 원천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는’ 하나님 자신의 행동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는 신적인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다. (롬 3:26-28)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5:1, 8:30, 갈 2:16 등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해주신다는 의미로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런 성경적 증거에 근거해서 개혁신학에서는 칭의를 법정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법적 절차(forensic)의 용어로 사용한다. 개혁신학은 칭의를 로마가톨릭(to make righteous) 과는 달리 “to declare, consider, reckon, accept, regard righteous”라고 생각한다. 로마가톨릭은 윤리적인 방종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어거스틴은 아직 칭의의 법정적 용어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그런 포인트를 지적하면서 오히려 자기들의 구원론이 어거스틴의 구원론을 충분히 따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적인 변화는 없이... 그러나 법정적인 의미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와서(루터, 칼빈, 멜랑크톤) 정립되었다. 로마가톨릭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성화가 진정됨에 때라서 칭의가 더욱 발전되는 것이라고. 완전한 칭의는 완전한 성화와 함께 이루어진다. 완전한 죄용서함은 성화가 완성될 때까지 유보될 수밖에 없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완전한 칭의에 이를 수 없다. 이 땅의 누구도 완전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특별한 경건의 경지에 이른 어거스틴 등만 확신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성화가 계속 진전되어야 한다고, 그에 따라서 칭의가 증가, 감소, 소멸되기도 한다. 세례 시 받은 칭의의 의미가 결정적인 죄(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죄)를 범하면 칭의의 은혜를 상실한다. 그것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고해성사, 보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땅에서 온전히 성화가 안 된 사람들은 죽은 후 연옥에 가서 성화되어야 한다. 가톨릭 전통에는 성화에 대한 관심이 많다. 성화의 중요성을 개신교의 칭의론이 너무 약화시킨다고 그들은 판단을 하기 때문에 개혁주의 입장을 배격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연옥설이 나온 것이다. 종교개혁 바로 전에 로마 가톨릭의 부흥사 케텔(?)이 설교를 하는 중, “여러분들의 하나님을 위한 헌금이 연보함에 탁~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여러분의 부모와 처자가 연옥에서 천국으로 바로 들어갑니다”라고 설교... 루터가 이를 듣고 열 받아서 종교개혁 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로마가톨릭의 이런 입장을 요약하면, continually being justify : always remains "partly justified". 여기에 대응하는 개혁신학의 입장 once for all & always "perfectly justified"
2) 법적 선언의 두 측면
① 소극적 측면 :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완전한 사함을 받았다는 선언.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책과 형벌과 심판과 정죄가 없다는 분명한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과 인정.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죄가 하나도 없는 자로 인정해 주신다. 그렇게 우리를 법적으로 받아주시고 간주하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롬 8:1) (골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② 적극적 측면 :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으나 윤리적인 중립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죄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의로움을 소유한, 의로움으로 충만한 의인이 되었음을 하나님이 선언하셨다. 그림으로 설명(‘-’는 죄, ‘+’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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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예수님
3) 법정적 선언의 근거는 우리에게 전가된 예수의 완전한 의로움
어떻게 죄로 가득한 사람을 ‘죄가 없다’고 하실 수 있는가? 불의한 자를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말로만 하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법정 선언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지 않는 법정근거가 있어야 한다. 용서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대리자를 마련하신 것이다. 우리가 진노의 대상인데, 우리의 진노를 대신 받을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련하셨다. 내 안의 모든 (-)를 예수님께 전가하고, 예수님이 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치루셨다. 모든 저주와 진노를 감당하셨다. 이것이 법적인 근거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구속으로 이루신 모든 (+)를 또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가해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이루신 율법의 완성으로 이루신 의로움이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가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인이 되고 형벌을 감당하셨기에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의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 법적인 선언의 의로움의 근거는 ‘예수님의 대속사역, 죽으심’이다.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기억할 것은, 우리에게 전가된 의로움은 예수님의 신적 본질에 속한 비공유적 의로움(essential righteousness)은 아니다. 예수님이 언약의 대표자, 둘째 아담으로서, 참된 인간의 형상으로 오셔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갖추어야 모든 율법적이 의무를 갖추어야 할 의로움을 완수하신 그것이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 인간론을 배울 때 예수님의 순종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편의상만...실은 분리하기 힘듦). ① passive obedience(죽으심 - 우리가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심 → 죄사함) ② active obedience(삶 - 율법 앞에 의로운 삶 → 의롭다함) ∴ 주님의 죽으심과 삶을 통해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는다!
예수님의 완전하신 순종이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근본적인 바탕이다. (롬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주님의 뜻을 완전하게 지킨 삶으로 우리를 보신다. 주님의 관점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라. 주님의 순종이 법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우리도 주님 안에 완전히 순종하는 종으로 인정되었다. 법적으로 우리에게 전가되었고, 또 주님의 순종이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옮겨졌다. 순종의 효력이 성령으로 적용되어서 육신의 굳은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주심으로써 마음 중심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살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주셨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계속 롬 6:16, 18에서 ”순종의 종“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롬 6:16-18)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축복의 비결은 순종이다. 새 언약의 모든 보화들을 누리고 성령의 생수를 만끽하며 살 수 있다. 이런 순종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우리가 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순종의 공로로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의 길을 확~ 열어주셨다. 우리가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신앙은 주님이 다 이루어주신 것을 뒤를 쫓아가면서 그 승리의 열매를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큰 배가 폭풍을 가르며 앞서가면 잔잔한 배가 그 뒤에서 유유히 따라간다. 예수님을 focus로 해서 우리의 신앙을 영위해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는데, 이 전가는 예수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 의로움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오신다. 성령 안에서 예수를 소유할 때 실제적으로 의로움이 주어진다. 칭의는 교리가 아니라, 성령으로 주님을 모실 때 그 축복을 누린다. 성령론 안에서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주님 자신,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 안에 오시기 원하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모셔야 한다. 그러나 예수가 없는, 예수와 분리된 의로움의 전가는 있을 수 없다. 항상 예수 안,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경험되고 실현되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요 죄성의 근본적 성향 중 하나는 항상 독립적으로 의롭게 살려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에 항상 신세지지 않고 살려는 교만. 주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것은 교만한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 주님께 의존하는 삶에 권태감을 느끼는 심리... 그러나 항상 의로움을 누리는 것은 주님과 연합해서 누리는 것이다.
4) 칭의는 믿음이라는 채널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바울의 강조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갈 2:16, 롬 3: 롬 5:1, 믿음은 칭의의 공로나 근거가 아니고, 칭의가 주어지는 방편, 채널이다. “by means of faith(δια τη? πιστεω?)” 믿음은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은혜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형식상 ‘조건’이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공로적 의미는 아니다. 믿음은 채널, 수단이다. vessel(칼빈, 패커)이다. 이중적 은혜(스펄전)다(은혜를 받을 손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그러면, 왜 하나님이 ‘믿음’을 택하셨는가? ① The exact of opposite of trusting ourself 인간의 죄성의 근본은 자신의 의로움을 의존하고,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영적인 교만. 믿음은 이 영적인 교만이 죽는 것이다. 자기의 의를 세워서 하나님 앞에 나가려는 쉼이 없는 노력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나 포기합니다” 교만한 자아의 죽음(The end of myself, the start of the grace). 성령의 강력한 능력으로만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 ②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려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의 발로.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을 인간 본연의 자리에. 모든 의로움과 거룩함은 주님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믿음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자유롭게 일하시게 하라’ 그것이 생산적인 수고이다. 안식을 누리는 비결이다. 목회를 잘 하는 분들은 노력도 많이 하지만 이 비결을 알기에 쉽게 하더라. ③ 믿음이란 창조 시 의도하신 참된 인간의 삶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관문이다. 인간론에서처럼, 인간의 원래 삶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신뢰하는 삶이다. 죄로 말미암아 그 의존감이 파괴되었다. 이제 의존으로 돌아가는 관문, 그리고 그 과정이 믿음이다. 주님께 바짝 밀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원래 참된 인간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이기에 믿음을 택하셨다. ④ 오직 믿음만이 사랑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모든 인간관계에도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5) 칭의의 선언은 기독론적이면서 종말론적이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사역에서 이루신 의로움(기독론적 바탕)에 있다. 그러나 또한 종말의 최종적인 선언에 근거한 것이다. (갈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종말의 축복들이 성령 안에서 현재로 소급되어서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종말론적 측면으로 볼 수 있다. “already not yet” 성화는 이 두 축 사이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지만, 칭의는 그런 관점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완전하게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 바탕 위에서 죽을 때까지 서서 신앙생활을 한다. 기독론적 칭의의 선언과 종말론적 칭의의 선언에 내용적인 면은 변화가 없다. 완전한 칭의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유보되는 것은 없다. 동일하다. 기독론적 축과 종말론적 축을 이어주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께서 기독론적 칭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시고, 앞으로 이루어질 종말론적 칭의를 소망하게 한다. 우리 신앙생활의 다이나믹은 믿음과 소망으로 승리하는 삶이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믿음이 커가고 소망이 깊어진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소망을 가졌다.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었다. 따라서 칭의를 과거의 단회적 은혜라는 경직된 은혜로 보지 말고 다이나믹하게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서 거룩한 경지에 이르러도 칭의의 바탕 없이 성화의 관점으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다.
2. 칭의론이 어떤 면에서 성화의 참된 바탕이 되는가?
로마가톨릭이 개혁자들의 칭의론을 계속 배격한 이유는 칭의의 교리를 강조하면 성화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신앙의 방조와 나태 조장, 거짓 구원의 확신에 빠질 위험, 신앙의 열심을 약화시키는 단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비난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성화의 다이나믹을 제공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참된 성화의 바탕을 제공하는가?
1) 칭의론은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제공한다.
가톨릭의 약점은 칭의와 성화의 unity를 강조함으로 그 구별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구원의 확신을 위협했다. 그 가르침에 의하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죽을 때까지 거룩함이나 선행에 기초해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는 없다. 칭의의 바탕은 내 밖에 있다(alien righteousness에 근거한 것이다). 전적으로 예수 안에 있다(The ground of Justification lies entirely in Christ outside us). 칭의와 성화는 날카롭게 구별되어야 한다(바빙크).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으로 경험될 수 있지만... 성경에는 ‘너의 믿음을 믿으라’는 말이 없다.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 믿음의 역할을 믿음 자체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향한 영적 시선을 자기에서부터 예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내 믿음마저도 참으로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두 손 들고 ‘오직 내가 의존할 것은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예수님의 의로움밖에 없습니다’라고 할 때 참된 믿음이 싹트는 것이다. 자꾸 “구원의 확신을 받았습니까?” 이렇게 물어보고... 어떤 확신의 감정에 근거해서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삼으려면... 시간이 지나면 흐려진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칭의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칭의의 중요한 포인트는 “We receive the opposite of what we see and feed inside us.” 칭의의 내용은 내 죄가 완전히 사함을 받는다, 완전한 의로움으로 가득한 의인으로 하나님이 인정한다... 이것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가? 죽을 때까지 이 칭의의 내용을 우리는 체험하지 못한다. 죄의식에서 완전하게 우리가 자유할 수 없다. 우리의 느낌과 체험과 완전히 반대되는, 거스리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제공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은혜로 인한 깨달음으로 그 성경의 법적인 선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비유한 것이다. 100세가 되었으니 자기 몸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 느낌과 생각을 거슬려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니 하나님을 믿었다는 그런 성격의 믿음이다. 미국 시민권 받을 때 선서를 하는데, 그 선서를 하는 순간에 미국 시민이 되어 버리더라. 미국 정부가 그렇게 분명하게 인정을 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코가 높아지고 피부가 노래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 버렸다. 미국 정부보다 훨씬 높으신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선언하셨다. 우리의 신앙의 닻을 거기에 내려야 한다. (롬 8:33-36)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피조계의 어떤 존재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이 결정을 흔들 수 없다. 사단도 어쩔 수 없으니 우리도 우리 자신을 정죄하며 정죄의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 죄 사함 받은 확신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단의 집요한 전략이다. 루터도 항상 이 문제 때문에 괴롭힘을 받았다. 그런 사단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사단의 송사를 잘라 버렸다. “그래 나 같은 놈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셨다” 은혜가 충만할수록 내가 의존할 것을 예수님의 의로움과 공로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울 사도도 그랬다. 그래서 사단이 가장 우리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교리가 이 ‘칭의’ 교리이다. 경험과 느낌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계속 정죄의식에 시달리게 해서 주 안의 자유함과 담대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루터는 이 진리를 깨달아서 교회 역사를 획기적으로 변혁했다. 한 사람이 이 진리의 말씀을 가슴의 확신으로 성령의 은혜로 깨달으면 삶이 바뀐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은혜로 설정되었다. 그 영원하신 사랑의 나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면, 신앙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우리 안에 죄성이 있어서 죄의식에서 완전히 자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정죄의식으로 발전되지 않게 하라. - sense of sin :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죄를 지을 때 양심의 가책, 아픔, 안타까움을 가져야 한다. 건전한 역할을 한다. 죄의식은 그래서 생명에 이르는 회개로 인도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의존하게 한다. 그래서 늘 회개하는 삶을 산다. 죄인으로 나아간다. - sense of condemnation : 칭의의 은혜를 알지 못하면 사단이 비틀어 버린다. 잘못 와전되어서 낙심, 무력, 영적 침체케 하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된다. 낙심케 해서 하나님께 멀어지게 한다.
<10월 18일>
개혁교회의 칭의론이 어떤 면에서 참된 성화의 바탕이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 칭의론의 관점에서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칭의(1차적) + 성화(2차적) = 논리적 우선순위 ① 칭의에 근거해서(1차적). 칭의의 근거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밖에 있다. innate righteousness에 근거하지 않고, alien righteousness(외래적이고 이방적인 의로움)에 근거한다. 구원의 확신은 내 밖의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외래적이고 이방적인 의를 전적으로 바라봄으로 얻는다. 칭의의 내용을 느낄 수 있는가? 죽을 때까지 경험하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칭의의 내용과 정반대를 경험한다. 은혜를 받을수록 우리가 부족한 자임을 느낀다. ‘나의 죄가 양털처럼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느끼지 못한다. 감정적인 이상한 상태나 착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실제적 변화가 아니고 법적인 변화기 때문에. 그래서 칭의를 아는 것은 내 안을 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칭의의 은혜를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의 역할은 나의 믿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적인 시선을 나에게서 돌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나의 경험에서 근거를 찾으려 하면 안 된다. 말씀이 분명히 선언해 주고 있다. 말씀을 보면서 우리 삶 속에 칭의에 대한 확신을 얻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놋뱀을 세웠다. 놋뱀을 쳐다볼 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난다. 나의 상처만 들여다보면 healing이 일어나지 않는다. 놋뱀을 보는 순간 고침을 받는다. ② 성화에 근거해서(2차적). 우리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
2차적인 근거의 문제는 1차적인 근거에 비해서 ‘상대적’이다.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기에 불안전하다. 1차적인 것은 절대적,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완전인 것으로부터 절대적인 근거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완전하게 의로움이 주어지는 1차적인 근거를 확고하게 붙들어야 한다.
* 여기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성을 생각해 보자. 우리 안에도 율법주의적 성향과 무율법주의적 성향이 공존한다. R. C or 율법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항해서는 구별성을 강조해야 한다. 칭의는 전혀 성화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안에도 자기 안에서 의를 찾으려는 욕구가 강하다. 또한 무율법주의적 가르침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런 경향에 대해서는 ‘칭의+성화’를 강조해야 한다.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은 구원의 열매가 나타난다.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을 얻은 것이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율법폐기론적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면 열매가 있어야 함을 강조해야 한다.
* 실제적인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2차적인 근거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2차적인 근거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분석해 보면, ① 오직 1차적인 근거에 의해서 구원을 확인하지 않고, 자기 안의 느낌에 의존해서 구원을 확신하려는 사람들.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니 어떻게 생명의 열매를 맺겠는가.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특권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주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는가. 자기 안의 의로움을 강조하기에 절대적인 의로움에 근거해서 확신을 갖지 못한다. ② (무율법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방종한 삶, 거짓된 삶을 excuse하는 논리적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현대 교회 안에 참 많다(그러나 여기서 구분해야 하는 것은, 아주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를 의존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르칠 때 조심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을 절대적인 근거에서 찾지 않고 자기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칭의의 근거는 ‘내 밖에’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무율법주의적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해야 한다. 그들의 양심을 무디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들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용서를 받았다는 것인데, 미래의 죄는? R. C.는 ‘지금까지의 죄’를 사함 받는다고 한다. 또한 세례를 받은 후에 심각한 죄를 지으면 칭의의 은혜를 상실한다. 고해성사나 satisfaction(보상)을 해야 한다. 거기는 죄를 2가지로 나눈다. venial sin(가벼운 죄) / mortal sin(영적인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죄, 칠거지악) 우리의 구원론이 조금이라도 죄를 조장하는 신앙의 방종과 나태에 흐르지 않게 하려는 보완장치를 철저하게 가지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것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 개신교는 문제가 많다. 우리의 입장은 어떤가? 구원 받은 후 지은 죄(미래의 죄)는 원칙적으로 그것도 용서함을 받았다고 본다. 그러나 주의해야 하는 것은 죄를 범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가르치면 안 된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 안에는 미래의 죄에 대한 용서의 약속이 이미 보장된 것이다. 용서의 법적인 근거가 이미 확보되었다는 것이다. 죄를 범하지도 않았는데 미래의 것을 다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목회적인 관점에서 지혜로운 표현법이 아니다.
*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완전한 죄 용서함을 받았는데, 계속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를 받아야 하나? 구원파는 우리가 죄 때문에 계속 울고 불고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우째 생각하나? 그러면 우리가 계속 회개해야 하는 것과 이 칭의의 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칭의는 단회적 행위이지만, 종말을 향해서 지속적으로 다이나믹하게 진행되는 종말론적 은혜이다. 항상 칭의의 바탕을 한순간도 떠나서 살 수 없다. 매일 이 은혜를 우리 삶 속에 적용해야 한다. 칭의의 은혜를 붙잡는 방편이 믿음이다. 믿음은 단회적이면서 연속적이다. 믿음의 또 다른 한 면은 신뢰하는 믿음뿐 아니라 회개하는 믿음인 것이다. 이 동전의 양면을 기억해야 한다. 칭의의 은혜를 의존하는 것은 계속 회개함으로써 칭의의 은혜를 의존하면서 사는 것이다. 항상 죄인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한다. ‘칭의의 측면’에서 우리는 ‘justified sinner’다(성화의 관점에서는 아니지만).
∴ 칭의의 교리를 가르칠 때 신앙의 방종을 조금이라도 조장할 수 있는 교리로 가르치면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의존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주님만을 의존하고, 죄인으로서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사는 삶이다. 우리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칭의와 동시적으로 성화가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난다. 동시적이기에 하나님 앞에 바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칭의의 교리가 잘못 이용될 가능성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R. C. 보다 더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교리가 될 수 있다.
만약 죄를 신자가 고질적인 죄를 지을 때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서 신자들에게 주지시켜야 한다. 죄 용서를 받은 신자들이 심각한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나? 신자의 죄는 영적인 자살 행위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성을 붕괴시키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잠정적으로 단절된다. 죄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영적 은혜와 특권을 suspend 시켜 버린다. ‘운전면허 정지’ 죄는 은혜의 가장 큰 적이다. 그리고 신자들이 죄를 계속 지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죄 속에 계속 살면 징계가 있는데, 징계를 칭의의 관점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복된 가르침이다. 많은 사람들이 징계의 가르침은 교권을 확립하고 목사의 권위를 세우는데 이 메시지를 교묘하게 사용하고 있다. 징계는 더 이상 형벌, 처벌, 죄의 보응의 의미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처벌을 받으셨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징계의 채찍은 더 이상 진노가 아니라 사랑의 손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바로잡아 주시는 손길이다. 징계의 성격이 칭의의 바탕 위에서 완전히 바뀌었다. 목적과 성격이 다른 것이다. 진노의 대상에 대해 주어지는 형벌이 절대 아니다. 이런 징계를 당할 때는 나에 대해서 하나님이 화가 나셔서 굉장히 미워하시는 것처럼 경험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징계는 아주 곤혹스럽게 체험되더라도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손길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아야 한다. 나를 아들로 대우하신다.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를 놓지 않으시고 세부적인 사항까지 간섭하셔서 선하게 인도하신다. 징계하시는 손길 배후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이 아닌, 아주 밝게 웃으시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미소의 얼굴이 가려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베일로 가려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사실 변함이 없다. 우리를 바라보실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얼굴로 바라보시는 얼굴은 변함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망을 느끼게 하시기 위해서 잠시 미소의 얼굴을 베일로 가리신다. 그 징계가 효과 있게 하시기 위해서. 이런 점들을 강조해야 한다.
(김상용 질문) 신자의 영적 자살이 무엇인가? (답) 잘 지적했다. 좀 과격한 표현이다. 그런데 목회를 하다보면 좀 과격한 표현이 필요하다. 바울 사도도 그런 경고의 차원에서 ‘성령의 은사에 참여하고 타락한 사람은 결코 용서함 받지 못한다’고 했다. 경고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칭의의 교리를 남용할 위험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의롭다함을 얻는 순간부터 그때부터 성령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을 신약에서 바울이 명백하게 강조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 교회들은 많이 탈선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서 탈선하니까 완전히 영적 혼돈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에 어떤 목사님은 설교하면서 욕도 사용했다. 하용조 목사도 “과거에 욕쟁이 목사님들 많았는데, 교인들이 욕을 해도 은혜를 받더라”면서 강단에서 품위 없는 행동은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교인들 중에서는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쌀 사람들이 있다고 또한 말하더라. 우리는 죄의 위험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어떤 표현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액면 그대로 보기보다는 심각한 상태에 빠진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도 “너희들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으리라’”고 했다.
우리는 징계를 칭의의 관점에서 잘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 징계의 의미를 잘 깨달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교훈을 얻도록. 증오의 대상에 대한 형벌이 아니며,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가 얼마나 흉악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죄 속에 살면 죽으리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잠언에, ‘상하게 때리는 것이 죄를 없이 한다’는 말이 있다. 어떻게 보면 징계를 받고 빨리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 나중에 박살이 난다.
2) 칭의의 교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가페를 온전히 부각시켜 준다.
R. C.의 교리는 조건적인 사랑으로 이해되기 쉽다. 물론 R. C.의 학자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론의 논리적 구조는 신앙생활의 처음뿐만 아니라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부각시키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죄용서함의 근거가 우리들의 의로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사랑 받고 인정받는 조건을 놓치면 그 은혜에서 끊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의 교리는 구원의 전 과정에 걸쳐서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화가 없다. 우리가 죄 속에 방황할 때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조건이 없어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변함없다는 점을 칭의의 교리가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기억하라. 칭의 아래에 우리가 있음을. 우리가 영적으로 잘 살고 있을 때, 자꾸 우리 속에는 우리의 의로움을 근거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 기도를 들으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우리가 바로 살면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신다. 요 15:10, “너희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한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의문이 있지 않나? 조건적인 사랑 같아....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 없다. 그 말씀 다음에 뭐가 나오나? “내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 따라서 우리가 바로 살면,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진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이다. 일방적이지 않다. 그 사람에 창조적으로 역사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게 한다. 우리의 문제는 일방적인 사랑의 관계로 나타나게끔 딱딱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 사랑에 제대로 반응하면, 그 사랑을 큰 기쁨으로 누리게 된다. 사랑이 온전하게 된 증거이다. 그렇다고 해서 계명을 따라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지 않은 것이 안다. 변함이 없지만, 사랑을 큰 근심으로 체험하게 된다. 우리 안의 성령이 탄식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으로 경험한다. 그 차이다. 이점에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해서는 역조건에도 불구한 사랑으로 나타나지만,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 안에서는 ‘조건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무한한 증오를 가지신 거룩하신 공의의 하나님이다. 그 공의의 하나님은 거룩함을 무시하면서 무조건적으로 죄인을 사랑하시지 않는다. 자신이 우리가 안고 있는 하나님께 진노와 저주를 받을 모든 역조건을 도말하셔야 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고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선한 조건을 가득 차게 하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를 인간과 똑같은 존재로 보내셔서 그분에게 내가 안고 있는 모든 역조건을 옮기셨다. 완전히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선한 조건을 그분이 나에게 옮기셨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큰 희생을 지불하고 사랑하셨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때, 얼마나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인간적으로 묘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칭의의 교리를 통해서 십자가의 사랑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죄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 그 역조건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진노와 저주를 받으셨다. 그래서 주님의 죽으심은 어찌 보면 굉장히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이다. 주의 일 하다보면 사소한 일 하나에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원통한가? 그런데, 그 모든 역조건의 비난을 다 짊어지고, 전혀 변호될 수 없는 완전 죄인이 되셔서 너무도 많은 유죄를 짊어지셨다. 그래서 칭의를 전할 때 하나님은 죄를 쉽게 넘기시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죄인의 죄의식을 무마시키고 죄인들의 방종한 삶을 조장한다. 그래서 남용되기 쉽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과 확신으로만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성령께서 효과적으로 적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조건에도 불구한 사랑을 전하게 하실 때 좋은 메시지가 된다. 내가 설교를 보면 아주 은혜가 많은 설교자들은 주로 칭의의 교리를 전했다. 성령의 은혜가 없으면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없다. 스펄전 목사는 10년 동안 계속 하루 한 편씩 읽곤 했다. 처음엔 너무 개인적 차원들만 강조해서 매력이 없었다. 나중에 조금씩 읽으면서 그분의 진수를 발견했다. 이분의 설교가 너무나 칭의를 많이 강조하는 설교다. 스펄전의 설교는 현대에 다시 revive되어야 한다. 칭의의 교리의 온전한 의미가 제대로 밝혀지는 메시지를 듣기 힘들다. 너무 윤리적 설교들이 많다.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려면 이런 메시지가 부활되어야 한다. 이 칭의의 메시지를 통해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해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깨달아야 죄인들이 변하고 구원받는다.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책망을 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죄에서 돌이키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서...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이 이론은 자칫 메마른 이론으로 전달되기 쉽다. 오히려 죄악을 심상히 여길 교리로 남용되기 쉽다. 사실 이 칭의의 교리를 전달하는 축복이 얼마나 큰지... 사랑 받는 조건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 선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3) 칭의의 교리는 성령의 역사하시는 길을 잘 밝혀줌으로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효과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성령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 죄인들의 강퍅한 마음을 녹이신다. 성령께서 이것을 진리를 통해 깨닫게 하신다. 우리는 지식에 근거한 사랑이다. 맹목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 지식의 내용이 담긴 메시지가 전달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R. C.의 메시지를 전하면 성령께서 온전히 역조건적인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데 잘 사용되기 힘들다. 성령께서 이 칭의의 메시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고, 동시에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감사가 일어나게 한다. 그리고 자유함과 확신이 일어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칭의의 메시지를 사용하심으로써 우리 안에 성화를 일으키신다. 감사와 확신과 하나님께 대한 자유함은 우리 안의 생내적인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이미 성령의 역사요, 성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칭의의 메시지를 사용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론적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의 unity를 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칭의의 메시지를 성화의 효율적인 방편으로 사용하신다. 그래서 칭의와 성화는 성령 안에서 서로 연합된다. 그러나 성령께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해서, 칭의를 사용해서 성화를 일으키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신다. 우리의 ‘신학함’, ‘개혁주의 신학’은 성령의 방법을 자세히 관찰해서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그 패턴을 논리적으로 요약한 것.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4) 칭의는 성화의 최대의 적인 영적인 교만과 공로의식을 배격하고 우리 안에 참된 겸손을 배양한다.
가장 무서운 죄는 자신의 경건과 거룩함에 대한 영적 우월 의식이다. 너보다 내가 좀 더 나아...(holier than thou). 하나님 앞에 거룩해지면 거룩해질수록 더 교만해질 수 있다. 개혁주의 칭의론은 성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겸손을 배양해 준다. 가장 큰 장애물을 제거하고 가장 큰 원동력을 제공한다. 바울 사도는 이 칭의의 은혜를 설명한 후, 롬 3:27에서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뇨? 없다”고 한다. 또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indicative)을 제시한 후, imperative를 강조한다. “그러므로...”라고 하면서. 그런데 보통 항상 “겸손하라”고 시작한다. 빌 2:3. 기독교 윤리는 겸손에 근거한 윤리다. 'holiness through Humility' 경건의 첫 번째 원리는 겸손을 통해서 거룩해지는 것이다. 겸손은 모든 은혜의 바탕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칭의의 은혜에 바탕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겸손이 중요하다. 겸손은 foundational한 은혜이다. 정상적인 은혜가 오면 우리를 낮추는 은혜가 임하고, 그 위에 다른 은혜가 세워진다.
이 칭의의 교리는 또한 개인적이고 교회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에도 부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라인홀드 니버의 역작, “The Nature & Destiny of Man” 꼭 읽어 보라. 아주 중요한 고전이다. 이 책에서 “개신교 교리가 유럽의 근대문화발전에 있어서 좀 더 영향을 미치는 사회변혁의 원리로 적용되었더라면 현대 세속주의 문화의 발전을 막고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계몽주의 이후의 현대 세속문화는 어떤 면에서 복음의 열매로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중세교회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지적인 계몽은 종교개혁이 복음의 진수를 바로 발견해서 얻은 복음의 열매이다. 세속주의 문화의 문제는 이 복음의 열매를 남용한 것이다. 자유가 주어진 것을 절대화했다. 하나님의 권위를 배격하고 인본주의 토대 위에서 발전했다. 현대문화의 저변에는 인간의 교만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만을 철저히 분쇄하고 문화변혁을 일으키며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게 하는 강력한 사상적 바탕으로 칭의의 교리가 강조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다. 칭의가 너무 교회 안, 종교 속에서만 강조되고 사회원리, 문화적 원리에 적용할 수 있도록 교회가 세상 속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칭의에 근거한 세계관, 인간관계에서...
5) 칭의의 교리는 영적 회복의 바탕을 제공한다.
R. C의 구원관은 죄에 빠지면 칭의의 은혜를 상실한다는 오류에 빠진다. 개혁교의 칭의론은 비록 신자가 타락해서 칭의의 은혜는 변함 없다. 영적 회복의 분명한 바탕을 제공한다.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제2의 찬스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매일 주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영적 스프링 보드 역할을 한다. ‘의인은 7번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침체되고 타락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칭의의 교리를 전해야 한다. 그래야 주님께 돌이킬 수 있다 구약에 가장 선명한 부분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선지자들의 메시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선지자의 메시지는 죄를 먼저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하면서 함께 칭의의 메시지, 죄 용서함의 메시지를 전한다. 항상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때, 죄를 책망하는 메시지와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강조하는 메시지가 강조되었다. 부흥의 시기마다... 조지 윗필드,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드의 메시지에도 칭의의 메시지가 핵을 이루고 있다. 우리도 부흥이 필요하다... 우리의 설교 메시지도...
우리가 영적 침체에 빠져도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1월 2일>
칭의가 어떤 면에서 성화의 바탕이 되는가를 공부하고 있다.
죄에 빠져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 영적으로 매우 황폐한 상황에 빠졌을 때, 영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를 때, 얼마나 나의 삶을 고쳐야할지 모를 정도로 침체에 빠졌을 때 우리는 칭의의 교리를 의존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회복될 수 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갈 때 아직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달려왔다는 것처럼 칭의의 교리는 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와서 어떻게 주님께 돌아가야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칭의의 교리가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심의 은혜를 제공해준다. 이 은혜를 다시 의존할 때 즉각적으로 주님께 돌아올 수 있다. 우리가 중생한 다음에도 우리의 부패성, 연약함이 남아있기 때문에 쓰러진다. 신앙에서 쓰러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잘 일어나야 한다. ‘벌떡 일어나야 한다’ 쓰러져도 우리는 칭의의 메트리스 위에 쓰러지는 것이다. 어제까지 영적으로 침체했어도 오늘 칭의의 메트리스 위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다. 항상 과거의 기억에 매여 있는 잘못된 심리 속에 사로잡혀서 칭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삶을 살지 못할 수 있다. 바로 살려고 노력해도 우리 믿음이 온전치 못하기에 쓰러지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죄를 통해서도 무엇인가 영적인 유익을 얻게 하신다. 사단이 우리를 쓰러뜨리고 자기가 승리한 것처럼 쾌재를 부르지만, 우리다 다시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면 사단이 겁을 먹기 시작한다. 우리가 결국에는 승자가 되어서 일어난다. 리차스 심스라는 청교도 목사는, “성도가 자주 죄에 넘어질수록 타락한 본성은 점점 힘을 잃는다. 넘어지는 일을 통해 타락한 본성의 뿌리를 더 많이 보게 되고, 타락한 본성을 더욱 혐오하고 회개와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입어서 완전히 그것을 정복하기까지 싸우겠다는 결단이 더욱 강해진다”고 했다. 더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더욱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점점 강해지고 승자로 일어난다. 문제는 죄와 결탁해서 마음대로 허용하면서 사느냐, 우리의 의지와 마음을 개혁하면서 사느냐이다. 우리가 죄를 대적하는데도 자주 실패한다. 이런 죄와의 싸움에서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자꾸 지치는 것이 죄짓고 또 회개하고, 또 죄짓고 또 그에 대해 고뇌하고.. 자꾸 이런 악순환을 계속 하니까 낙심하게 된다.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단하지만 또 지어.. 그러면 정말 답답하다. 자존심이 상한다. ‘내 모습이 이정도 밖에 안 되나?’ 그러나 아직 우리의 교만한 자존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여태까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데, 그것을 잘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마음속 깊이 죄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더 겸손해 지고 하나님을 의뢰해야 한다.
6) 칭의의 교리는 사역의 바탕이 된다.
칼빈은, “우리들의 전인이 의롭다함을 얻었다. 인격과 됨됨이와 사역이 칭의의 바탕위에서 하나님 앞에서 상달될 수 있다” 사역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는 칭의다. best work도 죄로 얼룩져있다. 거룩하신 주님 앞에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법적인 근거는 칭의다. 기도도 불완전하고 거짓되고 허물스럽다. 가증한 것이 더 많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고... 순수하게 드리는 눈물의 회개도 또 회개가 필요하다. 기도도 하나님께 상달되는 근거가 칭의이다. 그래서 바로 살지 못할 때 기도할 마음이 나지 않을 때도 칭의의 은혜를 의존해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회개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 때가 가장 기도해야 할 때고, 그 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이다. 자꾸 감정에 치우쳐서 신앙생활하면 영적 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목사가 되면 계속 설교해야 하는데, 어떨 때는 그런 무드와 상태가 아닐 때가 있다. 특히 토요일 저녁에 아내와 말다툼을 하면 설교하기가 곤혹스럽다.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칭의의 은혜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강단에 서야 한다. 사단은 항상 꼭 토요일에 부부싸움을 하게 만든다. 엉뚱하게 신경을 돋우고, 설교 작성을 방해한다... 사단도 상당히 전략적으로 역사한다. 그럴 때 정말 너무 부끄럽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시 칭의의 은혜를 의존하고 담대히 사역을 하라.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항상 바로 살면서도 주의 사역을 하면서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여 사역하는 것이다. 항상 성령의 임재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사역의 영광을 경험한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어떤 때는 내가 은혜 안에 살았기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자신 있게 섰다가 강단에서 무력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반면 영적으로 위축되어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할 때 아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영적 싸움에서도 칭의의 바탕 위에서 마귀와 싸워야 한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때도, 형제들을 바라볼 때도 칭의의 바탕위에서. 현재의 모습은 문제가 많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이 계속 용서하고 그를 받아주시니 나도 형제를 받아주어야 한다.
7)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gold chain(금사슬)’로 연결하는 교리이다.
칭의가 오면 다른 은혜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구원의 모든 은혜들이 칭의로 엮어져있다. 성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칭의가 오면 동시적으로 성화가 주어진다. 칭의로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회복한다(롬 5:1). 의롭다함을 얻었기에, 의인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인 ‘아들됨의 축복’을 누린다. 동시에 아들의 영이 우리에게 부여된다. 칭의와 성령 받음은 직결된다. 바울 사도는 롬 5:1-2, 8:30에서 칭의와 영화를 연결하고 있다. 종말론적인 관점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칭의가 모든 은혜를 금사슬로 엮어준다. 칭의와 견인도 연결된다(빌 1:6). 우리가 의롭게 됨으로 성령을 받는데, 성령이 보증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완전히 죄사함을 받고 칭의의 근거로 성령의 은혜를 받는다.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는, 예수를 믿는 순간에 성령을 온전히 받을 수 없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부분적으로밖에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 완전히 의로워야 성령을 받는데.... 그래서 성화가 진행되는 만큼 성령을 받는 양이 증가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입장은 예수를 믿을 때 완전히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교인들이 자주 질문한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여러 가지 잘못을 하는데, 그럴 때는 성령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 거룩한 성령이 그렇게 죄를 지을 때도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는가? 그렇다. 우리들의 느낌이나 경험으로는 죄 속에 살 때 성령이 떠나시는 것 같지만, 칭의의 근거로, 우리가 죄 속에 살 때도 성령이 떠나시지 않는다. 영적으로 내주하신다. 원칙적으로는 죄인된 사람 안에 거하실 수 없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안에는 성령이 없다. 오히려 두렵다.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 내주할 수 있는 근거는 칭의의 근거에 의해서이다. 그것을 근거로 우리 안에 오실 수가 있고, 우리가 죄 속에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영구적으로 거하시고, 영원한 사랑의 언약을 어기시지 않는다. 진노의 영이 아니고 사랑의 영으로 임하시기 때문에.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세상 사람들에게 임한다면 그것은 진노의 영이다. 사랑의 언약 때문에 우리 안에 영구적으로 내주하신다. 그토록 사랑하시고 우리를 온전히 인도하시기를 기다리시고 소원하신다. 칭의의 은혜로 놀라운 ‘자리바꿈’이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수치와 고난과 저주와 형벌과 징벌을 받으시고, 내가 예수님처럼 의인이 됨으로 아들 됨, 영광, 성령, 하나님의 vip로 대우받는 삶을 살게 되었다.
우리가 칭의교리 배웠는데 잘 공부해서 교회 사역에 활용하라. 은혜를 전하라. 너무 윤리적인 설교... 교인들이 다 안다. 나는 요즘 와서 새롭게 교리의 진가를 확인한다.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는다.
Ⅶ. 근본적인 성화
개혁교회에서는 성화론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듣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과의 논쟁에서 칭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화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했다는 지적이 있다. 엔드류 메러이는 종교개혁은 반쪽만 개혁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종교개혁자 중에 특히 루터에게는 이런 경향이 나타남을 부인할 수 없다. 칭의를 가장 중요한 교리로 강조했다. 모든 교리를 점검하는 척도로. 성경의 정경성도 칭의라는 기준에서 평가했는데,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매우 중요하게 보고, 야고보서는 정경성이 가장 희박하다고 보았다. 물론 칭의의 열매로서 선행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로마 가톨릭의 비난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러나 좀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성화를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성화론이 칭의에 비해서 부수적으로 다루어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칼빈은 아주 균형 있게 강조했다. 가톨릭과의 논쟁 속에서 칭의에 우선 관심을 두었지만, 기독교 강요 3권 구원론에서 칭의에 앞서 성화를 다루었다. 다른 교의학에서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구조와 순서를 발견한다. 바르트가 지적하기를, 성화를 칭의보다 전략적으로 앞세우고, 칭의는 논리적으로 앞세워서 다룸으로 가톨릭의 비난을 원천적 봉쇄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성화의 신학자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는 칭의 자체가 최종 목표가 아니고, 경건한 삶, 성화가 목표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참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의 바탕이 되는 것이 칭의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칼빈의 통찰이 그 후예들과 개혁주의 전통주의 신학자들에게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칼빈의 기본적 사상 위에서 성화론이 발전되지 않고 변칙적인 성화론이 웨슬레 등에서 등장했다. 얼마 전까지 확실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성화는 즉각적이냐 점진적이냐 하는 것이다. 성화는 즉각적인가, 점진적인가? 전통적으로는 점진적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18C 웨슬레는 전통적인 성화론에 의하면 교인들이 전혀 성장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낌. 그래서 전통적인 성화론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획기적인, 변화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칭의 후에 즉각적인 성화. 완전 성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봄. 그의 논리는, 성화는 인간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성령 충만해야만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지는데, 자유롭게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그것을 방해하는 우리의 옛 자아와 성품이 온전히 처리되어야 한다. 그 순간부터 성령이 자유롭게 충만히 역사함으로써 그때부터 성화가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점진적인 성화가 있고, 완전한 성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칭의즉각적인 성화완성
웨슬레가 처음으로 전통적인 성화론에 대항에서 극적적인 성화를 강조했다. 또한 20C의 칼 바르트도 성화의 즉각성을 많이 강조했다. 바르트는 신자는 예수 안에서 연합함으로 이미 거룩해졌다. 신자의 성자이며 거룩한 사람인데, 그것은 예수의 거룩성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는 예수 안에서 이미 거룩함에 참여한 즉각적인 성화를 바로 강조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성화되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때 일어난 성화는 우리 안에 주관적으로 체험된 성화가 아니고, 칭의와 비슷하게 위치적으로 객관적으로 일어났다고 보았다. 웨슬레가 주장하는 것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성화라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두 입장이 이 면에서 서로 대조된다. 이 두 입장이 일리가 있지만, 문제도 있다. 웨슬레 입장의 문제는 성화가 즉각적으로 한번 일어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완전히 성령에 사로잡히는 point가 꼭 나중에 가서야 일어나야 하느냐에는 의문점이 있다. 성경이 이런 패턴을 지지하느냐? 바르트의 경우 문제는, 예수를 믿을 때 왜 꼭 객관적으로만 성화가 일어나야 하느냐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20C 중엽에 이 성화의 즉각적인 측면을 성경적으로 잘 정리해서 존 머레이(John Murray)가 ‘Definitive Sanctification'을 발표했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견해가 개혁주의 성화론의 새로운 지평을 연 획기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안토니 후크마도 그의 책에서 머레이의 견해를 그대로 따른다. 나는 확정적인 성화, 결정적인 성화보다 오히려 이 성화는 모든 점진성화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성화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면 근본적인 성화란 무엇인가?
*** 근본적인 성화★
1)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보통 구원의 서정에 의하면 구속, 칭의, 성화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의 관계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는 구속사역과 칭의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물론 칭의가 성화의 근거라는 점은 일리가 있다. 칭의의 바탕 위에서만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지니까. 그런데 이렇게 볼 때 칭의는 성화의 효율적인 방편이라는 면에서 효율적인 근거라고 볼 수 있다(efficient cause, ground). 그러나 공로적인 면(meritorious cause)에서는 칭의가 성화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 죽으심과 부활이 성화의 근거다. 따라서 전통적인 도식에서는 밝히 알기 힘들다. 따라서 내가 특허 낸 도식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人성화칭의 십자가의 보혈, 부활의 효력으로부터 성화의 원동력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2) 예수 안에서 단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머레이는, “신약에서 성화에 대해서 사용되는 대두분의 특정 용어들은 어떤 진행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완성된 사건을 의미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고전 1:2에도 완료형 시제. αγιαζω. 고전 6:11, 롬 6:2, 6:6, 골 3:1, 3, 9, 고후 5:17 등에는 과거의 단회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완료형이나 아오리스트 시제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근본적인 성화는 예수 안에서 단번에 일어난 사건이다.
3) 단번에 일어난 근본적인 성화의 내용은 ‘우리가 예수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해서 죽고 새 생명 가운데 부활했다’는 것
머레이와 후크마는 로마서 6장에 근거해서 주로 설명한다. απεθανομεν.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의미 - 우리 안의 죄성이 죽었다거나, 죄에 대해서 유혹을 받지 않는 상태를 말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내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죄와 결정적으로 분리됨을 의미한다. 죄의 지배에서부터 우리들이 확정적으로 획기적으로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radical liberation from the rule of sin. 죄와의 단회적이면서도 영구적인, 확정적인, 다시 되풀이될 수 있는 분리와 결별을 말한다. 우리의 존재의 영역이 바뀌었다.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영역에서 성령 안에서 자유케 하는 능력이 왕 노릇하는 영역으로 옮겨졌다. 어둠의 나라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하나님 안에서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새로운 존재의 영역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죄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죽고, 의에 대해서 부활한 새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죄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옛사람이 처리되고 새 사람이 되었다(골 3:10). 바울 서신의 모든 명령들은 이 근본적인 성화의 사실을 제시하는 indicative에 근거해 있다. 죄에서 전격적으로 해방되었다는 indicative의 사실을 먼저 전함. 그리고 이것에 근거해서 죄에서 자유했으니 죄를 대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화에 대한 모든 imperative는 이 indicative에 근거한다. 그래야 율법주의적인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성화의 삶은 우리의 힘으로 나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아니고,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십자가의 은혜가 단번에 이룬 그 축복 안에서 매일 매일 성령 안에서 체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근본적인 성화로 이미 새사람이 되었으니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거룩한 사람이 살아가는 패턴을 신약성경이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칭의는 good new지만 성화는 달갑지 않는 소식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화도 복음으로 전해져야 한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죄에서의 자유함, 자아에서의 자유함이 십자가의 은혜로 이루어졌다고 은혜로 제시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도 로마서 강해에서 6장에서 근본적인 성화의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 자기의 삶과 사역이 새롭게 되는 체험을 했다고 고백한다. 나(박영돈)도 이런 체험을 했다. 존 머레이가 이 글을 처음 발표할 때, 왜 이 글이 이제야 나왔나 하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성경에 분명히 제시된 성화의 즉각성을 제대로 정리해서 교리화하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웨슬레 전통의 도움을 받았다. 도움을 받지만 많은 논리적 혼란에 빠질 위험도 함께 있다.
imperativedailyindicativeonce-&-for-all putting off of old self putting on of new self
4)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점진적 성화 과정에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성화에는 인간의 역할이 배제된다. 수동적이다. 내 안에 근본적인 성화가 이루어지지 위해서 기여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죄에서 자유하기 위해서 내가할 일은 없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할 수 없는 것을 십자가가 이루어주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초월자가 밖에서 와서 감옥의 문을 열고 해방시켜주어야 한다. 우리의 자아를 전격적으로 처리해 주셔야 한다. 그것이 은혜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해야할 역할이 없다. 예수님의 보혈에서부터 내가 죄에 대해 죽을 수 있는 원동력이 흘러나온다. 예수님의 죽음은 결국 나의 죽음을 이루어주시는 죽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하지 않는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니고,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한다. 롬 6장에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라고 한다. 우리의 문제는 죄를 계속 짓게 하는 옛사람이 문제이다.
5) 근본적 성화는 2차적인 체험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옛사람이 처리되었다. 그 때부터 새롭게 된 사람으로 살아간다. 성령께서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예수님점진적인 성화근본적인 성화칭의완전
그리고 칭의와 성화는 함께 간다. 함께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나중에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근본적인 성화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점진적인 성화이다. 이런 도식에서 이해해야 한다.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일어나기에 꼭 나중에 가서 성령충만 받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새사람의 존재 영역이다. 물고기가 물에 살듯이. 새 사람은 성령 안에서만 그 기능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해졌기 때문에 그 사실 안에서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부른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문제는 그러한 성도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 세례의 근거가 무엇인가? 칭의라고 생각하는데, 개혁주의 교리는 근본적인 성화에 근거해서 세례를 주는 것이다. 앞으로 성령을 따라 사는 제자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서약이다. 현대의 문제는 세례의 의미가 사라지고,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 세례의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켜야 한다.
<11월 9일>
근본적인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믿을 때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했다. 죄의 지배로부터 전격적으로 해방되어서 거룩한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근본적인 성화는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웨슬레가 주장하는 철학적 성화와는 달리 2차적인 은혜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주어지는 것이므로,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죄에서부터 완전히 해방된 사람으로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이다. 죄에 대해서 죽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과 결단이다. 성령을 따라서 사는 제자도의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다. 그런 사람을 성령이 take-out하셔서 죄에서 자유한 삶,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하신다. 현대의 많은 교인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정도를 따라서 살지 못한다. 예수를 믿을 때부터 온전히 성령에 이끌리는 성령충만의 삶을 살지 못하는 예가 많다.
6) 근본적인 성화는 위치적으로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고 주관적이며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바르트의 견해에 대응해서).
칭의와 근본적인 성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칭의는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객관적이고 신분적인 변화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성화는 객관적일 뿐만 아니라 realistic하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어떤 학우의 질문처럼, ‘칭성’이라고 한다면 칭의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다. 칭의와는 다른 것이다. 예수를 믿을 때 죄의 세력에서 실제적으로 자유하는 것이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거룩한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계속 aorist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웨슬레가 말하는 것 같은 완전한 성화는 아니다. 혹자는 이것이 중생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중생은 신약에 2번 나오지만 근본적인 성화는 매우 많이 등장한다. 근본적인 성화와 중생이 중복되는 요소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중생이라는 것은 새생명의 씨앗이 우리에게 심겨지는 point로 이해하고, 근본적인 성화는 죄와 근본적으로 분리된다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화의 즉각적인 측면으로 점진적인 성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와, 성화의 기독론적인 바탕과 성화와 믿음과의 직접적인 관련성, 칭의와 성화의 unity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성화를 중생과 다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침례교 전통에서는 중생을 더 많이 강조했다. 사실 성경이 더 근본적인 성화를 의미하는 용어들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성화의 첫 걸음은 우리 안에 근본적인 성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성화의 첫걸음이다. 변화된 자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축복은 무엇인가? 신자들의 문제는 너무 빈곤한 사상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 어떤 은혜의 축복을 받았는지.. 그래서 복음전파자는 이런 빈곤한 자아상을 깨고 근본적인 변화의 모습을 바로 가르치고 전파해서 아주 부요하고 영광스러운 크리스천의 자아상으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이런 근본적인 성화에 근거해서 인격의 변화도 가능하다. 성향이나 기질적인 특성은 잘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질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옛 성품은 바뀔 수 있다. 나쁜 성격은 변화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성화의 문제이다. 신앙생활 오래 하는데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아서 세상에서 교회의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도 설교는 잘 해도 인격이 변화되지 않아서 목회에 고충을 겪는 경우가 많다. 성령도 내 성질을 못 고친다??? ^^ 잘못된 이야기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옛 성품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치명타를 입었다. 옛 성품 배후에 역사하는 악한 영이 그 등뼈가 꺾였다. 그러기에 우리 안의 옛 성품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처럼 위협하지만 실은 종이 호랑이이다.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살고 십자가를 의지하면 아무리 못된 성품을 가진 사람도 새롭게 살 수 있다. 그런 성화의 은혜를 가르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는 것이다. 몇 전만 해도 이것을 구원론에서 배우지 못했다.... 이젠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으므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인격이 변화되고 성격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이런 충분한 은혜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확신 있게 알지 못하기에 이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이것을 알더라도 우리에게 자원하는 마음이 없어서 누리지 못한다. 죄의 유혹과 미련... 옛 성품이 몇 십 년 나와 함께 한 것이라서 버리기가 아깝다. 이것을 떼면 존재가 흔들려버리는 것 같은.. 그래서 인간이 사실 변화를 두려워하고 망설인다. 또 세상을 살다보면 조금 모난 성격이 필요한 것 같기에... 그래서 성깔 한번 발휘하려고 안 버리고 간직하고 있다. 나도 한국에 나와 보니까 답답하고 화나는 일들이 많더라.. 내 안의 독일 전차 군병의 악랄함을 발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 근본적인 성화에 근거해서 우리의 성격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라.
7) 근본적인 성화를 다룰 때 꼭 제기되는 문제는 근본적인 성화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라면, 왜 우리의 실제 경험은 그것과 다른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는 이 진리, 말씀은 참 받아들이기 힘든 진리다. 실제 경험과 이것이 다르기 때문에. 아직 죄의 결박에서 자유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죄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이 말씀은 원리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경험이야 어떻든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일어난 사실이고 우리들의 실재이다. 그래서 먼저 우리의 경험과 감각으로 확정하려해서는 안 되고 믿어야 하는 사실이다. 이 면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성화의 사실을 믿는 것은 칭의를 믿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칭의는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느낄 수 없고 경험할 수도 볼 수도 없다. 왜냐?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가 의미하는 대로 완전하게 의로워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는 죄성과 죄의식에서 자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칭의의 사실을 믿고 확신하는 것은 우리의 느낌과 경험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내리신 법적인 선언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사하게 근본적인 성화가 일어났다는 사실도 우선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 확증하기에는 힘든 사실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니 그것을 인식하고 믿고 그 믿음 가운데 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서 불구하고 아직 의문이 말끔히 가시지 않는 것을 느낀다. 그래야 정상이다. 어떤 의문인가? 칭의는 그런 법적인 선언이라 이 땅에서 온전히 경험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실제적으로 체험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근본적인 성화는 실제적인 변화라고 했지 않는가? 우선적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라도, 그 후에는 실제적 변화된 사건이니까 어느 정도는 체험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이 칭의와 다른 점이다. 칭의는 죽을 때까지 체험할 수 없다. 성화는 처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체험의 요소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이런 체험이 결여되고 있는가는 의문에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이 대답은, 생각보다 굉장히 간단하다. 심리학이나 인간학, 사회학에서 자주 제기되는 문제다. essence/existence의 괴리 현상, reality/experience의 괴리 현상... 이런 철학적인 개념을 따라 이해하지 않더라도 이런 현상을 얼마든지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다. 심각한 이 괴리 현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 고등학교 동창 중에 그 위에 누나가 스트레이트로 6명 있다. 6명 딸을 낳도록 아들을 낳으리라는 소망을 잃지 않고 try했다. 그래서 성공해서 또 try했는데 또 딸.... 그래서 7공주 틈바구니 안에서 살았다. 이 친구는 남자지만 사는 모습은 여자라... 우리가 육신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느냐고 성경은 말한다. 신자들의 문제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는데, 이 실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이 부요한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지 못한다. 그래서 이론만 아니라 매일 말씀에서 묵상을 하고 성령의 큰 깨달음과 확신으로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다.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이런 삶의 괴리감을 점점 극복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8) 어떻게 근본적인 성화가 우리에게 체험되는가?
근본적인 성화는 오직 믿음 안에서 체험된다. 그것이 시작이다. 우리에게 이루어진 성화, 거룩함은 독립적인 거룩함이 아니고, 항상 의존적인 거룩함이다. 예수를 의존할 때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되고 체험하는 거룩함이다. in Christ in the Spirit. ① know(알라) 롬 6:2-3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 하면서 역설적인 강조용법이다. 바울사도의 특이한 어법. 꼭 알아야 한다. 근본적인 성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② reckon(여기라)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③ Act upon it(행하라) (롬 6:12-13)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에게 어떤 특권이 주어졌는지 알고 살라. spiritual warfare를 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요약한 기도문을 사용한다. 그때 능력이 나타난다. 사단이 꼼짝 못한다. 우리도 이 특권을 행사하면서 사단을 대적해야 한다. 미국에 권총 강도가 많다. 나도 5분 동안 권총 강도가 내 이마에 총을 들이댔다. 특별한 은혜로 벗어나.. 권총 강도가 ‘freeze!’하고 외치는 것처럼 우리도...
* 우리 삶 속에 결여되는 이유 두 가지
① 인식론적인 문제 근본적인 성화의 사실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기에 자유함의 특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이론적으로만 알아야 할 진리가 아닌데... 이 사실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교인들에게 굉장히 약하다. 긴가민가. 이 사실을 안 후에도 심한 영적인 건망증이 있어서 이런 인식과 믿음이 약해지고 흐려지는 경우가 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자주 가르쳐주고 반복 교육을 시켜야 한다. 어떤 교수가 강의하는데, 좋은 진리를 반복교육 시키면 그것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했다. 충무회집 앞에 차들이 빨리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요철을 하나 만들어 놓았었다. 이성구 교수님이 특공대를 동원해서 없애버렸는데, 항상 나는 거기를 지나면서 습관적으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새로운 인식, 자꾸 입력을 시켜야 한다. 옛 구습이 남아서 그렇다.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새로운 실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노예 해방의 예화에도, 자기가 자유했다는 사실을 안 다음에도 길거리에 가다가 주인을 만나면 옛날 생각이 나서 꾸벅~ 인사를 한다. 그와 마찬가지이다. ② 의지론적인 문제 willingness가 부족하다. 이 사실을 알고도 죄의 미련와 일락을 버리지 못해서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한 새 삶을 살기 원치 않는다. 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데 또 죄의 멍에로 머리를 치밀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죄짓고 살기 굉장히 힘들어졌다. 그런데 그 일을 하고 있으니 고달픈 것이다. 그런데 의지론적인 문제는 인식론적인 문제와 아주 직결되어 있다.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복스러운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지도 부족한 것이다. 알면 자원하는 마음이 강해질텐데...
Ⅷ. 점진적인 성화
1) 점진적인 성화는 근본적인 성화의 바탕 위에서 가능하며, 진행된다.
성경에 성화에 대한 권면과 명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indicative에 근거한다. 거룩한 삶의 지침들은 획기적으로, 근본적은 변화된 사람만 지킬 수 있는 변화이다. 그래서 성경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은 근본적인 삶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변화된 사람의 새생명의 자연적인 표출, 나타남을 묘사한 것이다. 새생명의 삶의 패턴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점진적인 성화는 성령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근본적인 성화와 성령의 사역은 두 측면에서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① 성령은 근본적인 성화의 실체를 매일의 삶 속에 경험케 하시고 실현시켜 주신다. 그래서 성령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을 매일 공급해 주신다. 성령충만하게 살면 근본적으로 변화된 성화된 삶의 모습과 열매가 나타난다. 실제 체험하면서 산다. 그래서 성령은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사람의 존재 영역이다. 그런 삶의 원동력이다. 우리가 공기 속에 존재하듯, 물고기가 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듯이 근본적인 성화된 사람을 성령을 떠나서는 살 수 있다. 새사람은 다른 말로 성령의 사람이다. 새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존재인데, 그 형상의 중요한 특성은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새사람, 성령의 사람은 항상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산다. 우리의 거룩함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새사람은 자기 안에 자가 동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매일 같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할 때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고, 근본적인 성화의 실체를 체험하면서 살 수 있다. 아주 기능이 좋은 냉장고를 하나 사 놓았다. 음식을 잔뜩 채워 놓아도 전기 소켓을 꼽아 놓지 않으면 음식이 다 썩는다. ② 반대로 근본적인 성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성령 충만의 역사가 가능하다. 롬 8:7-8 (롬 8:7-8)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6장의 논리적 흐름은 8장으로 이어진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웨슬레가 성령 충만과 옛 자아의 처리를 직결해서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영적 통찰력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꼭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을 때 이미. 우리의 문제는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이런 것을 체험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다. 나중에 가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중에 미룰 필요가 없다. 그것이 정상적인 패턴이다. 새신자에게 첫출발을 잘 가르쳐야 한다. 운전도 처음에 변칙적으로 배우면 항상 그렇다. 성령 안에 붙들리는 삶을 살게 해야 한다. 나중에 육신적 삶에 익숙한 상태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굉장히 힘들어진다. 자유함을 살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축복이 주어져 있다. 그렇게 살기 원하는 willingness가 필요하다. 빨리 십자가에 올라가서 거기서 죽으라. 그것이 문제다. 어떤 시인이, “나는 내가 너무 무겁다” 옛 자아의 욕망에서 자유하면 사역이 더 쉽다. 내가 제일 문제다. 빨리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근본적인 성화의 축복을 누리고 사는 것이 승리하는 신앙, 성공적인 목회의 비결이다. 이것을 우리 교단에서 강조해야 하는데, 한신의 별세의 신학을 강조하고 있다. 그 양반은 매일 죽은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하나님 은혜로 그냥 죽는 삶을 살면 그만큼 행복한 것이 없다. 더 지체하지 말고 빨리 죽읍시다. 아멘~~~
3) 신자의 역할
① 믿음 근본적인 성화의 부요한 축복, 놀라운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한다. 칭의에도 복음을 듣고 알고 믿음을 요구하는 것처럼, 성화에도 성경이 먼저 행하라, 선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성화의 사실을 ‘알라’고 강조한다. 은혜를 제시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많은 경우에 칭의는 good new로 전하지만, 성화는 근본적인 성화의 바탕을 전하지 않기에 율법적인 메시지로 들릴 때가 많다. 스펄전의 설교를 읽으면서 감화 받았다. 오랜 목회 경험으로 “목사들이여 윤리를 전하라. 윤리를 전하면 교인들이 더 비윤리적인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한국 교회에 윤리적인 문제가 많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때는 바른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윤리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은혜를 제대로 못 전하고 있다. 안타깝다. 전하는 게 주로 예수 믿으면 잘되고 성공한다는 것만... 성화의 은혜를 바로 알아야 한다. 제발 여러분이 이 교리를 잘 배워서 잘 전하라. 이단으로 평가되는 류광수 목사도 “한국 교회는 구원의 메시지가 없다”는 말을 하더라. 먼저 성화에서 윤리를 제시하지 말고 은혜를 말하고 그 바탕위에서 책임을 말해야 한다. 근본적인 성화의 부요한 진리를 바로 전하라. 새로운 정체성, 십자가의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일으켜 주셨는가, 사단이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못함, 종말의 영역 속에서 살고 있음을 기억.
↑ 성령
육신 ↓ 점진적인 성화 ↓ ←2차 은혜(오순절) 하나님의 형상, 율법의 의로운 삶, 하나님 나라, 화평과 의의 열매가 주어지는 영역근본적인 성화칭의경험세계 완전reality, 죄의 영역, 육신의 영역, 영적인 생명은 겨우 유지 text와 context를 분명히 알고, 제대로 적용해야 한다. 현대 상황이 어떤가를 잘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 잘 하고 있습니다”라고 강조만 하지 말라. 성화를 전공해서 박사를 받은 사람이, “성화라는 게 있어?”라며 너무 회의적이더라. 현실에는 너무 없다는 것이다.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기된 하나의 처방전이, 웨슬레와 같은 성령 운동. 그들의 주장은 현실에 적용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육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획기적인 은혜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효력과 적용성이 있다. 개혁주의 목회자들이 우리 개혁주의 교리가 목회 현장에서 효력이 약하다는 것에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이 현대의 상황에 어느 정도 효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실용적인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성경적인가를 따져야 한다. 성경이 이런 패턴을 나중에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런 패턴은 간혹 나타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잘못과 영적인 방황과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파생된 문제이다. 문제를 진단해 보자.
* 나중에 가서야 자아가 처리된다면, ⅰ) 영적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이 매우 단축되어 버린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문제가 있다. ⅱ) 성령 충만이 주어질 때까지는 우리가 무력한 삶을 살아도 어느 정도 그 삶이 합법화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에 의하면, 오히려 예수를 믿을 때부터 그렇게 살 수 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삶을 살았는가를 말하면서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ⅲ) 꼭 2차적인 은혜를 받음으로써 이런 성화를 받는다면, 어떤 극적인 굉장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때부터 항상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동적으로 보장 되는 것이 아니다. 이후로도 점진적으로 자라가야 한다. 그 point만 강조하면 문제가 있다. 완전히 전무후무한 2차적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문제다. 성령 체험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점진적으로 자라가는 사람도 있고, 갑작스런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다. ⅳ) 영적인 엘리트의식에 빠지기 쉽다. ⅴ) 증거주의에 빠질 오류. 여러 가지 조건을 이루어가는 여러 준비 작업을 이루어 가야 하는 부담. 이 은혜가 주어진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evidence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뜨거움 둥의 증거주의...
따라서 우리의 가르침을 현대 상황에 맞게 강력하게 전해야 한다. 지금 영적 시대를 분별할 선지자적 시각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영적인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너무도 안타깝다. 세상의 영에 억압되어서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님을 알려야 한다. 성경의 정로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ⅰ) 복음의 메시지도 변해야 한다. 예수 믿을 때부터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제자도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ⅱ) 세례의 의미를 부활시켜야 한다. 확실하게 제자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출발하도록 안내해야 한다. ⅲ) 성령 안에 살 수 있는 양육, 훈련이 필요하다. 교회가 성령 안에 살 수 있는 영적 토양,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인간은 환경적 존재이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 하기 어렵다. 초대교회 같이 성령 충만한 생활 하는 교회에 접붙임을 당하면 그도 그렇게 될 가능성 높다. 만약 중세 교회에 접붙임 당하면 그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교회가 context, 장, 분위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복된 전염을 만들어야 한다. 성령 충만한 교회가 있으면 그 안에 접붙임 당하면 자연히 그것을 본 받는다. ⅳ) 모든 교회의 훈련 프로그램이 성령의 사람으로 성숙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제도적으로 그 정도를 탈선했을 때 그들을 엄격하게 경계하는 권징이 부활되어야 한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서 떠날 때 심각하게 경고해야 한다. 정도를 탈선하지 않도록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갖도록 분명한 권징이 실시되는 교회의 생활이 회복되어야 한다. 성령을 따라 사는 정도를 떠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한 가지 마지막 소망은,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성령에 붙잡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예수 믿는 처음부터 흐릿하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어떤가? 오랫동안 영적 침체에 빠져있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면 우리가 획기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멀리 와서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너무도 많은 것이 변화되어야 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면 즉각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무엇에 근거해서? 칭의와 근본적인 성화의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날 때는 오랫동안 영적 침체에 빠졌던 사람이 획기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꼭 모든 경우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②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11월 16일>
2. 성화의 4가지 측면
1) 기독론적인 바탕(성화의 바탕)
성화의 전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계속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변화를 받고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예수의 구속사역이 성화의 전 과정의 foundation이다. 그 지상 구속사역을 바탕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성령이 성화의 원동력이다. 성화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를 온전히 주관하실 때 성화가 이루어진다.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열매를 많이 맺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성화의 바탕이고 근거이며, 살아계신 예수님,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이 성화의 능력(dynamic)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셔야 새 생명을 누리고 살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이 성화의 패턴이다. 그분을 닮아가야 한다. 내 안에서 온전히 살아 역사하게 함으로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온전히 나타나게 해야 한다. 그의 성품을 우리 안에 reproduction하시게, 우리 안에 자유롭게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 성화의 비결!
2) 성화의 교회론적인 문맥
너무 개인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화의 공동체적인 차원, 집합체적인 차원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와 연합한다는 것은 예수의 몸인 교회와 연합한다, 접붙임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두 가지를 분리할 수 없다. 헤르만 리델보스, 성령 안의 삶은 바울은 개인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의 삶을 의미한다. 성령은 일차적으로 예수의 몸인 교회 안에서 구원론적으로, 교회론적으로 역사하신다. 그 안에서만 성령의 열매가 맺혀질 수 있다. 따라서 참된 성화는 교회 안에서만 가능하다. Emil Brunner는 “참된 성화의 첫걸음은 isolation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개인주의적인 경건을 추구하는데서 나와야 한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이런 개인주의적 신앙이다. 혼자는 경건한데, 정작 나타나야 할 공동체 안에서 쓴 열매를 맺는 경우가 많다. 바울 서신에서 분명한 것은 성화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성화의 명령은 복수형으로 주어지고 있다. 모든 미덕과 성품은 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참된 성화가 이루어지지 위해서는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질 영적인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성령 안에서의 참된 코이노니아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두 가지 역사는 우리 안에 역사하는 성령과 우리의 관계성 안에 역사하는 성령. fellowship과 함께 온전한 성화를 위해서는 신자들의 은사와 달란트를 계발해서 공동체 안의 구체적인 섬김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 성령의 은사를 활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 가운데 열매가 맺는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교인들에게 은사를 주셨다. 구체적으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서로를 섬기는 섬김의 장이 교회에 마련되어야 한다. 몇몇 교역자들에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몸이 한쪽만 자라면 기형아가 된다. 많은 평신도들의 잠재력과 은사를 사장시킴으로써 교회의 성장에 지대한 마이너스. 앞으로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잘 활용하게 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섬기는 장이 마련될 것이다. 그럴 때 만인제사장의 원리가 교회 안에 실현될 것이다. 모든 평신도들이 하나의 작은 목자로서 자신의 은사를 최대한 활용해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 일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목표인 개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도 가능하다. 은사를 발휘할 때 사랑도 실천되고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교회 안에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 은사활용을 적극 권면하고 교회 속에 잘 실천되도록 지도하라.
3) 성화의 선교론적인 목표
거룩해져야하는 목적은 세상 속에 증인이 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수 있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종교적인 일에만 익숙한 자가 가르쳐서는 안 되고, 세상 속에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성령은 교회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게 해 주시는 성결의 영이다.
전통교의학은 구조적인 약점. 성령 사역의 두 가지 측면(개인적, 집합적)이 있는데, 그런 성령 사역의 관점 하에서 교회론과 성화론, 구원론을 긴밀하게 연관시키는 교의학적 작업이 필요하다. 그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지금은 그렇게 다루기 힘든 형편이다. 교회 안에서 정상적인 영적 성숙이 이루어진다, 교회는 성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변화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교회의 목표로 삼고 지도자들이 이런 구호를 가지고 교인들을 인도해야 한다. 교회의 프로그램과 훈련도 여기에 맞추어서 설정해 나가야 한다. 성화의 목적은 선교다. 세상 속에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 속에 참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참된 인간을 보여주기 원하신다.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성을 상실할 때 교회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 세상 속에서 분명히 그들의 분리되는 구별성을 유지할 때 세상 속에서 전도와 선교에 효과가 있게 된다.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세상의 원리 두 가지가 함께 역사한다고 볼 수 있다. 두 가지의 원리가 세상 속에서 충돌해서 상호 교류하고 영향을 미치고 견제하면서 이런 복합작용을 통해서 세상의 문화가 형성되고 발전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사람들, 교인들이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서 좀 더 충실한 원리를 따라 세상 속에 살 때 하나님 나라가 누룩처럼 번져간다. 만약 우리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세속화된 삶을 살면 세상의 문화가 극단적으로 세속주의로 빠지게 된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교회 안에서 종교적인 일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서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나 미국 교회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보수는 세상과의 구별성을 너무 강조해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소극적, 도피적 영성을 가진다. 개인 영혼 관심. 진보측은 세상과의 동화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적극적 사회참여를 강조한다. 사회개혁 관심. 이에 따라서 양극단의 spirituality가 형성되고 있다.
보수진보분리, 구별, 소극적, 도피, 개인영혼동화, 적극적, 사회개혁
우리는 구별성을 강조하면서도 세상을 깊이 끌어안는 영성을 가져야 한다. 잘못된 성속의 구분에 빠지는 신앙관에서 탈피해야 한다. 교회 일과 종교적인 일만 영적이며, 세상일을 하는 것은 육적인 일이라는 성속 분리는 잘못 되었다. 성령의 임재 하에 하는 모든 일이 거룩한 일이다. 교회 안에서 하는 일 중에도 아주 속된 일이 많다.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하느냐, 성령의 임재 하에 사느냐에 따라서 그의 일이 드러난다. 우리들의 성화는 사회적 함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개인이나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의 변화에 기여해야 한다.
4) 종말론적인 특성
성화의 모든 과정은 종말론적인 특성을 띄고 있다. 성령은 근본적으로 종말의 영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누리게 하시는 축복은 하늘의 영역에 속한 신령한 축복을 우리에게 현재로 끌어당겨서 맛보게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또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참된 경건의 삶을 살 수 있다. 믿음이 경건의 비밀인 동시에 소망이 경건의 비밀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뛰어난 dynamic한 경건도 소망 때문. 성령이 충만해 질수록 믿음이 성숙하고, 소망이 커져간다. 현대 교인들에게 소망이 줄어든다는 것은 성령충만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얽매이지 않게 하는, 천상의 삶을 살게 한다. 코람데오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눈과 인격을 의식하는 종말론적인 삶. - already : 웨슬레의 성화론은 이미 완성된 종말의 측면을 많이 강조한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그 안에 살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 이미 주어진 성령의 축복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완전주의적인 오류에 빠질 우려가 있다. 이미 이 땅위에서 승리가 주어졌다는 것 강조. 그러나 자칫하면 영적인 교만과 우월감에 빠질 수 있다. - not yet : 칼빈주의 성화론은 너무 불완전한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불완전주의/패배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웨슬레가 원리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왜 칼빈이 그랬나? 로마 가톨릭의 주장에 대응해서. 가톨릭이 성화를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는데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 우리는 두 측면을 조화롭게 강조해야 한다.
Ⅸ. 믿음과 회개
1.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해야 하나?
1)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방편이다(instrument, channel)
꼭 필요하다는의미에서 조건이지만, 공로적인 측면에서는 조건이 아니다. 믿음은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단이요 방편이다. 인간이 믿어야 하고 선택해야 하는데, 믿음을 가능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동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선재해야 한다. 영안이 열려서 진리를 깨닫게 되고 억압된 의지를 풀어주어 강팍한 마음이 부드럽게 되어야 주님을 믿게 된다. 그래서 중생의 은혜가 선재해야 한다.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을 vessel이라고 했다. 구원의 은혜를 주실 때 믿음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주신다.
2) 믿음은 구원의 선물을 받는 빈손이다.
J. Packer는 「knowing God」에서 ‘empty hand'라고 했다. 그 선물을 주시기 전에 그 선물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게 하시고, 그것을 구하고 사모하게 하신다. 믿음이란 그 선물을 받으려고 내미는 손인데, 빈손인 것은 공로를 쥔 손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가치의 독생자의 선물을 주시는데, 자기의 몇 푼 안 되는 선행의 대가를 지불해서 환산하려는 것은 진귀한 선물을 주시는 분을 모독하는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독생자의 선물을 주시는데, 무가치한 우리의 공로를 가지고 환산할 수 있어? 하나님은 아무 보상과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가 있다면, thanks이다. 신앙의 전 과정은 thanks이다. 완전한 구원의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깊은 감사의 삶.
3) 믿음은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인간 본연의 자세,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신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는데, 우리는 거기에 있지 않고 의인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길이 서로 엇갈린다.
4) 인격적인 신뢰가 믿음이다(personal trust)
예수님의 역사적 사실, 하신 일을 그저 알고 지적으로 승인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구원받을 믿음은 아니다. 전인적인 신뢰와 앎이 믿음이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propositional truth로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했다(교리주의적으로). 그러나 신정통주의(칼 바르트)는 그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만남(personal encounter)이라고 했다(인격적 강조). 믿음은 성령 안에서 복음의 세미한 음성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을 만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입장은, 계시는 사실 지식인 동시에, 그 지식 안에서 찾아오시는 그 인격과의 만남을 다 강조해야 한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다.
5) 주님을 Savior, Lord로 믿는 것
예수를 구세주와 주관자인 주로 믿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주로 칭의에 근거해서 Savior의 측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성화의 바탕 위에서 Lord의 측면을 강조했다. 바울은 롬 에서 바울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익숙한 노예 제도를 통해서 설명했다. 종이 되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바울의 구원관은 예수를 믿는 것을 주로 받아들인다는 측면이 강했다. 그 당시에는 사실 Lord를 받아들이는 것은 죽음을 건 결정이었다.
2. 믿음의 양면성
1) receptive/passive : 하나님의 은혜를 수납하는 측면 2) operative/active : 믿음은 우리 안에서 은혜가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반응을 올려드리게 하는 방편. 감사 등 은혜 → ① → US → ② → 책임
1) receptive/passive
① 믿음은 은혜와 능력의 통로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성화의 은혜가 전가된다. 믿음으로 주님의 의로움을 빌려서 구원얻고, 그 후에도 주님의 공로를 계속 꾸어다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더 빚을 많이 진 사람이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그만큼 빚을 많이 졌기 때문이다. 은혜로 한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그만큼 자기가 덕을 본 삶을 사는 것이다.
② 믿음은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중재해 주시는 채널이다.
2) operative/active
①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믿음과 회개는 분리할 수 없다. 회개 없는 믿음은 참된 것이 아니며, 믿음이 없는 회개는 회개해야 될 회개이다. 회개는 신뢰하는 회개, 믿음은 참회하는 믿음이다. 동시적으로 항상 같이 가는 것이지만, 만약 논리적으로 구별한다면 믿음이 선재한다. 그래서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것이다. 스펄전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올 수 없으면, 주님 앞에 나아와서 회개하라”고 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은혜가 역사한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믿음의 우선성을 주장할 수 있다. 믿음의 통로로 근본적인 성화의 은혜가 주어지는데, 회개는 근본적인 성화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근본적인 성화를 바탕으로 철저하게 성령 안에서 회개하라고 강조해야 한다. 믿음이 단회적이면서 계속적인 것처럼, 회개도 단회적이면서 계속적이다. 칼빈도 신앙의 전 과정이 회개하는 삶이라고 했다. 참된 기쁨과 축복의 비결이다. 회개할 때 성령충만과 위로의 은혜가 충만하다. 회개는 음울함으로, 경직됨으로, 슬픔으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풍성과 자유로 돌이킴을 의미한다. 그래서 회개를 굉장한 사건으로 주님이 묘사하셨다. 그래서 신자가 성화의 과정에서 회개가 깊어져야 한다. 더욱 은혜를 받고 거룩해 질수록 더욱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된다. 지난번 설교에서 언급했듯이, 내가 거룩해지고 충만해질수록, 실제적으로 죄를 짓지 않을수록 아주 깊은 회개를 하는 삶을 산다. 점점 양심이 예민해지는 삶을 산다. 반대로, 가장 죄 속에 빠져 어둠에 사는 사람은 죄의 독성이 양심을 굳게 만들어서 죄에 대한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은혜 충만한 삶을 살 때 회개의 눈물이 있다. 구원파 같은 데서는 이런 영적 삶의 기본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영적 ABC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더욱 깊어질수록 회개를 많이 하게 되어 있다. 혹자는, “요즘은 회개할 것이 없어 심심하다”고 한다.
<11월 23일> 믿음의 양면성에 대해 공부했다. 수동적인 면과 능동적인 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납하는 채널이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 안에 역사하는 믿음이다. 회개의 열매를 맺고, 근본적인 성화의 은혜를 우리 안에 주입시킨다. 근본적인 성화는 또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 체험되고 실현된다. 성령 안에 살면 근본적으로 성화된 사실, 실제를 경험하며 살게 된다. 그런데 성경께서 이 근본적인 성화를 우리의 삶과 체험 속에 실현하실 때 나에게 먼저 willingness가 있어야 한다. 죄에서 자유한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근본적인 성화의 사실을 경험케 하는 것은 그렇게 변화된 사람으로 살려는 갈망을 주신다. 죄와 옛 자아를 미워하게 하신다. 이제는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을 살기 원해야 한다. 우리 삶 속의 가장 큰 짐은 ‘나는 내가 심히 무겁다’는 의식. 옛 자아의 부패성을 내가 혐오한다는 것. 죄의 근본적인 쓴 뿌리는 옛 자아의 욕망이다. 앞으로 여러분이 사역을 하면 할수록 여러분 안에 무서운 죄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일을 한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발견할 것이다. 은밀하게 나를 위해 설교하고 나의 탁월함과 인기와 명성을 위해서 주의 일을 하는 내 자신을 본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 것으로 괴로워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에 이찬수 목사도 그런 고백을 했다. 나는 그 양반을 보면서 메시지도 깨끗하고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최소한의 솔직함을 가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여러분도 이런 것을 잃어버리면 목회자의 생명이 끝난다. 성령은 항상 자원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를 인도하신다. 근본적인 성화의 바탕 위에서 회개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옛 자아를 죽이는 철저하고 근본적인 회개가 꼭 있어야 함을 강조해야 한다. 초대교회 등 항상 부흥 운동이 일어날 때는 철저한 회개가 일어난다. 지금 교인들이 냉랭한 것은 첫 출발에서 죄의 끈을 끊지 않으니 진전이 없는 것이다.
② 믿음은 순종으로 역사한다. 순종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는 없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육신에 속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고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믿음의 통로로 우리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법을 즐겨 순종하는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중생의 은혜, 근본적인 은혜가 믿음의 통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믿음은 온전히 하나님을 순종케 하는 은혜의 통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반역하던 원수된 마음이 청산되고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기 원하는 순종의 dynamic이 심겨진다. 롬 6장 앞부분에 바울은 성화의 사실을 말하면서 이어서 우리가 순종의 종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새로운 생명력이 우리 안에 심겨져서 하나님을 항상 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
③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갈 5:6). 순종은 사랑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을 통로로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하신다. presence channel.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것. 믿음은 우리 안에 예수께서 사시게 함으로써 예수의 성품을 산출하게 하는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회개, 순종, 행위, 사랑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믿음의 양면성을 통해서 살펴보게 된다. 많은 경우, 믿음이 그 안에 구체적으로 함의된 내용이 상실된 것으로 전달될 때가 많다. 그래서 믿음의 양면성을 이해해야 한다. 분리해서 잘못 가르치면 무율법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믿음과 분리해서 회개와 순종, 행위, 사랑을 강조하지 않으면 잘못하면 율법주의적 오류로 빠진다. 이런 믿음의 두 측면(receptive, operative)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구별할 필요도 있다. 왜? 어거스틴이 믿음을 정의할 때 항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이 계속 논쟁할 때 가톨릭은 어거스틴을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이 더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믿음의 수동적인 역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은혜가 역사하는 산물로서 이런 책임(행위, 사랑)들도 함께 수행하게 된다.
** 행함/믿음/행함 A 행함믿음B 행함X○○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육신의 행함, 육신적인 동기성령의 산물로 얻어지는 행함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는 의로움을 얻지 못한다고 강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또 예수를 믿은 다음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믿은 후에도 A행함을 할 수도 있다. 성령을 따르지 않고 아직 잔재한 육적인 소욕을 따라서 신앙생활 할 수 있다.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것도 육적인 동기에서 할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처럼 우리도 혼합된 상태에서 살 가능성이 많다. 자기를 나타내고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육적이다’고 했다.
** 율법/은혜/율법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롬 8:4 참고. 성령을 따라 사는 성령의 열매. 은혜 가운데 살면 율법의 참된 영적인 의미를 이루는 실천의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행함은 B 행함이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양면성 중에서 operative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너무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무율법주의에 대항해서 분명히 진실한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측면. 그러나 바울 사도는 믿음의 receptive한 측면을 먼저 강조한다. 믿음은 빈손이다. 모든 하나님의 공로를 빌려오고 받아오는 수동적인 역할. 롬 3장 등에서. 그런 후 6장에서 무율법주의에 대항해서 operative한 면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야고보서와 바울 서신의 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Ⅹ. 신자 안의 죄성과 내적 갈등
1. 신자의 죄성
1) 신자의 정체성
그리스도인들은 새사람인가, 옛사람인가? 전통적으로 ① mortification(옛사람 죽음), daily dying, daily putting off of the old self(옛사람을 벗어버린다) ② vivification(새사람 가운데 성숙), daily rising, daily putting on of the new self(새사람을 입는다)
- A. Hoekema, W. Pannenberg, K. Barth의 비판 이런 가르침의 문제성은 매일 새사람으로 입는다고 표현하기에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는 것. 후크마는 신자로 하여금 확실한 자기 자신이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게 하여서 poor한 자기정체성을 가질 때가 많다고... 판넨버그도 전통신학은 신자는 아직 옛사람임을 너무 강조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 바르트도 칼빈의 성화론은 너무 지나치게 성화의 부정적, 소극적 측면만 강조해서 신앙의 죄와의 싸움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신자의 삶을 너무 어둡고 음울한 율법주의적 삶으로 말 하고 있다고 비판.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들을 조금 성경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
- 롬 6:6, 골 3:9, 고후 5:17 / 엡 4:22-24 롬 6:6, 골 3:9, 고후 5:17에 근거해서 신자는 온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옛사람을 조금씩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의 탄생에서 시작한다. continuity가 없다. 100% 온전한 새사람, 백성이 되었다. 성령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나 엡 4:22-24에는 명령형으로 되고 있는데, 원어는 부정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명령형보다 서술형 부정사로 이해될 수 있다. 이미 그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기에 이미 너희 안에 실현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후크마 주장. 조금 애매한 부분을 안고 있다. 그러나 다른 구절을 볼 때 온전히 벗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아직 옛사람’이란 말은 매일의 삶 속에서 성화의 실체가 되풀이 되어서 경험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이 안고 있는 오해의 소지를 배제하기 위해서 표현을 바꿀 필요가 있다.
- old man, old self(παλαιο? ανθρωπο?), flesh(σαρξ) 등은 더 이상 사용하지 말자. - new man 안에 new nature와 old nature가 있다. 새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 지배적인 세력(predominant force)으로 있다. 그러나 new man인데, old nature의 inclination, tendency가 남아 있다.
2) 죄성에 대한 두 극단적인 입장
① 완전주의 - iradication of old nature : 신앙생활 중 큰 은혜를 체험하면 우리 안의 old nature가 제거된다고 주장. 이것은 성화론적 이단이다. 심각한 오류.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성향은 근본적 성화로 제거되지도 않고, 일생동안의 점진적 성화로도 제거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에 제거된다. - 웨슬리와 keswick의 차이점 : 웨슬리의 성화론의 문제가 이렇게 치우치는 경향이다. 완전한 성화를 주장하지는 않고, 2차 성화의 은혜를 주장했는데, 그런 2차의 성화의 체험으로 완전해진다고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 충만해 진다’고는 했다. 그러나 그런 은혜로 우리 안에 어느 정도는 제거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가르침에 많은 혼동을 야기시키는 약점이 있다. 그러나 케직 운동의 가르침은 죄성이 어느 정도 ‘제어’된다고 주장. 그러나 온전히 제어되어서 완전히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 수있다고 해서 완전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도 ‘백파’...
② 불완전주의 - 개혁주의 전통. 성화의 중요성 강조 + 성화의 불완전성 강조. 당시에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을 배격하기 위해서 성화의 불완전을 강조했었다. 그래서 십계명을 좌·악 해설하고서, 결론적으로 다 지킬 수 없다고 함. 그런데 이 불완전의 교리가 너무 보수, 개혁교회에서 남용되어 왔다. 그래서 웨슬레주의가 나온 것이다. 완전히 죄 속에 살면서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며 그대로 살아... 온전하다(be perfect, τελειο?, τελειοω)의 의미 : 성경의 ‘완전하라’는 교훈은 절대적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건강한, 생명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요일 3:21-22. 바울도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리라” 불완전하다는 말이 불순종을 애매하게 하는 말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2. 롬 7:14-25의 해석 (롬 7:14-25)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성경에서 가장 논쟁이 많은 부분이다. 아직 미해결. 그러나 이것이 우리 신자의 삶, 내적 갈등, 죄성의 문제, 율법의 기능 등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이것을 최대한 바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크게 두 가지 입장 a. 불신자의 경험 - J. Wesley, A. Hoekma, H. Ridderbos, M. Turner, 이한수 b. 신자의 경험 - Augustine, J. Calvin, J. Murray, C. Hodge, J. I. Packer, J. Dunn, C. Spurgeon, 청교도 목사들. 전통
※ 최근 성경신학계에서는 불신자의 경험을 묘사한다는 입장이 강세를 떨치고 있다.
1) 거듭난 자의 경험이라는 입장
여기 묘사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분명한 갈망이 있다는 점. 불신자의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제기하는 것은, 갈망은 있으나 문제는 이 사람이 아무리 원하는 갈망이 있어도 결국에는 죄를 범하고 말아버리는,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결박된 사람이라는 것.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지배에서 결정적으로 자유했다는 바울의 입장과 정면으로 상충된다. 그리스도인은 과연 별 수 없냐?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냐?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마음뿐이고 실제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가? 승리의 가능성은 이렇게 없는가? 원함은 있으나 그것이 우리 안에 고뇌만 가중시키는 것 아닌가? 갈망이 산산히 무너져 내리는 쓰라린 좌절을 계속 맛보는 비참한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그러나 바울은 어디서도 육신이 약해서 죄를 짓는다고 말한 부분은 없다. 오히려 전체적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안에서 승리, 넉넉한 이김, 성령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빌 3:17, 고전 15:57, 롬 8:37
2) 거듭나지 않은 자의 경험이라는 입장 : 롬 7:22, 7:10, 14, 9-13
거듭나지 않은 자들도 도덕적으로 살려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양심의 법대로 살지 못할 때 아주 마음에 괴로움과 가책을 느낀다. 그것은 사실이다. 율법주의자들도 그것을 선하게 여기고 그대로 살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대로 살지 못할 때 번민과 가책을 느낀다. 일리는 있다. 믿지 않아도 양심의 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불신자가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살려는 갈망이 있겠는가? 본문은 분명히 원함과 갈망이 있는 사람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 바울의 가르침,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나? 또 문제는 여기 사람은 자기의 부패성을 깊이 깨닫고 있다는 점. 14, 18절. 이것은 거듭나기 전이 바울 사도의 모습과는 다르다. 거듭나기 전의 바울은 율법으로는 온전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가 주님을 만나고 진리의 빛이 비췬 후에는 율법의 신령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절대 지킬 수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면 이것이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경험이라고 볼 수도 없다. 딜레마...
3) 다른 견해 a. 회심시의 경험 - M Lloyd-Jones, Bandstra(칼빈신학교의 교수), C Finney(중생 전 죄를 자각한 사람들) 이 부분의 말씀은 신자의 경험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니고, 거듭나기 전에서 거듭나는 그 시기에 경험되는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 경험 후 눈멀고 다메섹에 갔을 때, 아나니아가 안수하기 직전. 많은 사람들이 회심 시에 이런 경험을 했다. 그러나 이 견해의 문제는, 이런 신자들의 갈등의 경험이 회심할 때 그 짧은 기간에만 국한되는가? 문맥 속에서 정당화되지도 않는다.
b. 육적 그리스도인의 경험 - Keswick M., Holiness M. 이 부분의 말씀은 거듭난 사람인데, 정상적인 경험이 아니고 아직 성령 충만하지 못한 그리스도인, 옛자아 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묘사한 것. 2차의 은혜 강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2차적인 성화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 미성숙한 삶을 산다.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체험이 중요하다. → 상당히 매력적인 가르침이다. 경험적으로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성령 체험 이후에 과연 신자에게 이런 갈등이 없는가?
4) 결론적인 고찰
6-8장의 문맥 속에서 ; 두 관점에서의 고찰 - 율법 / 성령 7장과 8장의 긴밀한 연계성
가장 원만한 해석은, 본문을 우선 문맥으로 보아야 한다. 6장이 8장까지 논리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중간에 7장을 보충 설명하는 것. 단순성의 약점이 있지만, 3장은 칭의, 믿음, 5장은 칭의의 열매, 6장은 근본적인 성화, 7장은 내적 갈등, 8장은 성령안의 자유하는 삶을 말하고 있다. 우리 안에는 자가 동력이 없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7장에서 바울은 우리 안의 죄성의 문제, 율법의 역할,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밝혀주기 위해서 자기의 경험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롬 7과 8장은 긴밀한 연결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7장만 분리해서 그 문맥을 고려하지 않으면 바른 해석이 아니다. 신자의 상태와 경험을 2중적인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이다. 7장은 율법의 관점에서 내적인 갈등을 조명하고 있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고 신령하나 우리의 육신은 약해서 육신의 힘으로는 율법의 요구대로 살 수 없다는 전적인 부패성을 말한다. 우리 안의 죄의 법이 무엇인가를 경험으로 묘사한다. 8장은 다른 관점에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관점에서 묘사한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7장은 우리 안에는 아직 죄의 성향이 남아서 죄의 법이 역사해서, 중력의 법처럼 나를 의지하면 쓰러진다는 약함을 밝혀준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존해서 살 수 있다. 8장은 완전히 상반된 확신과 깨달음. 약하지만, 그러나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며 살 수 있다. 2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우리를 죄의 결박에서 자유케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더 밝혀주고 있다. 7, 8장은 신앙생활에 꼭 있어야 할 계단을 밝힌다. 7장은 신자의 경험, 상태의 일면이 묘사되어 있다. 8장은 다른 또 한 면. 그래서 7, 8장을 합해서 신자의 경험이 어떤 것인가의 한 폭의 그림을 볼 수 있다. 합해서 보아야 한다. 우리의 상태와 경험의 일부를 밝혀서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확신을 준다.
이 두 가지 깨달음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항상 공존해야 한다. 이 두 가지 가운데서 우리 신앙이 계속 자라가야 한다. 그래서 상대적인 지식이 깊어진다. 내가 얼마나 약한지를 깨달으면서, 상대적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강해진다.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 우리 신앙의 문제는 어떤 한쪽의 확신이 약하거나 결여될 때 발생한다. 자기 약함과 부족을 보는 사람은 자기 안에 성령이 역사함을 알아야 한다. 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긍정적 믿음은 가졌으나 실제적으로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문제. 이론으로 알지만 주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해.
* 실제의 경험에서 간혹 7장의 경험에 빠질 때 1) 두 가지 확신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 때. 베드로처럼. 각오는 좋지만 자기가 얼마나 약한지를 몰랐다. 실패한 다음에 밖에서 통곡하고 울면서 이 롬 7장의 절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2) 계속적인 죄악으로 성령을 거역하며 살 때 주님의 능력이 없으니까 우리 삶이 7장의 경험과 비슷하게 된다. 육신적인 삶을 살면 항상 죄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 3) 회심하는 시기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영적으로 침체했다가 다시 돌이키는 과정에서 이런 회심 때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데, 죄의 결박에서 훈련하시면서 이 자유함을 사용하게 하신다. 은혜를 조금 보류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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