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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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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면 현정리에 소재한 영귀서원은 명종 19년(1564)에 옥과 유림들이 옥과 현감으로 재임했던 하서 김인후 선생의 학문과 절의를 추모코자 건립한 사원으로써 처음 옥과면 죽림리에 영귀정사로 세워진 뒤 숙종 20년(1694)에 영귀서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로부터 304년이 지난 고종 5년(1868, 무진) 9월 미사액 서원 훼철령에 따라 철거되었는데 당시 김인후, 이흥발, 신이강외 허소와 허계 형제가 추배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철거된지 92년이 지난 1960년에 이르러 현재의 위치에 재건되어 하서 김인후를 비롯 설암 허소, 청파 신이강을 봉안하였다가 1965년에는 옥과현감을 지냈던 위백규를 추가하여 현재는 6위의 위패를 봉안, 매년 음력 3월 18일에 인근의 유림과 후손들이 모여 제향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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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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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면 남양리에 소재한 영사제는 흔히 심씨제각이라 불리는데, 약 300년전 청송심씨 12세조인 언겸(彦謙, 벼슬은 동지중추 부사공에 이름)을 모시기 위한 제실로 한때는 관리 소홀로 붕괴 위기가 있었으나, 30년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현재 이 제실은 청송심씨 곡성 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묘제일은 당초 매년 음력 10월 15일로 하였으나, 97년부터 음력 10월 6일로 정해 묘제를 지내고 있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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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파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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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면을 감싸고 있는 장파봉(해발 427M)은 약간은 투박하나 겸면을 받쳐주고 있는 진산인데, 고려말 최영, 이성계와 함께 여말 3명장이라 부르는 경렬공 정지장군의 혼이 깃든 전설이 살아잇는 산이다. 즉 고려말 왜구 섬멸로 창궐로 인한 민심이 흉흉할 때 정지장군 (1347∼1391)이 마전리 쪽 미타사계곡에서 왜구 2,000여명을 섬멸하여 대승첩을 거둔 산이라고 전해진다 이로부터 유래하여 산명을 장군봉 (왜구를 섬멸했던 봉우리)이라 불렀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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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순 장판개 (1886∼1938) |
전북 순창군 옥과현 (현 곡성군 겸면 현정리)에서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한 소리꾼으로써 세인들의 가슴을 녹인 명창인데 그는 판소리 뿐만 아니라 명고수이기도 했으며, 거문고.대금.피리에도 정통하여 각기 일가를 완성한 사람으로 20세 안팎에 발써 그의 명성은 삼남일대에 퍼져있었다 그는 판소리 다섯마당 전부에 장하였으나 특히 〈적벽가〉에 특장하였고 〈적벽가〉중에서 『장판교 대전』은 박기홍이후의 절창으로 실전을 방불케하는 신기를 발휘했다고 한다. 지금 현재 그의 생가의 흔적은 없으나, 연세가 많으신 마을주민들에게 어렴풋이 그의 풍모를 들을 수가 있으며, 최근 그의 후손들도 선조의 생가복원등 추모사업을 염원하여 군. 면에서도 관심을 갖고 자료수집 및 생가고증등을 추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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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 원홍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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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군 오산면 성덕산 관음사 창건 사적기에는 현 심청전 내용과 유사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즉 충청도 대흥현에 "원량"이라는 가난한 장님은 아내를 잃고 "홍장"이라는 어린 딸과 살고 있었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중국에 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원량봉사가 길을 가다가 흥법사 화주승인 성공스님을 만나 딸을 팔아서 소원을 이루겠다고 하여 화주승을 따라 서해바다에 당도하니 금관옥패를 찬 사자가 황후마마라 불렀다. 그후 황후가 된 홍장은 관음성상을 빚아 석선으로 고국에 보냈는데 석선이 다다른 곳이 승주땅 낙안포(벌교)였다. | |
이튿날 옥과땅의 성덕처녀가 느낌에 의해 낙안포 해변에 도착하니 한 돌배가 다가와 멈처 올가가 보니 금빛 관음상이 있어 등에 업으니 깃털처럼 가벼워 낙안 바닷가에서 옥과까지 불상을 업고 대취정,샘정,미타정,율목정,불휴정,흥복정,현정,삽정을 거쳐 아흐레 동안 머물렀다해서 구일정인데 여기서 백아산, 추월산, 설산으로 갈까 망설였다. 마침내 갈길을 백아산으로 결정하고 운교정에서 쉬고 하늘재에 이르자 가볍던 관음상이 갑자기 태산처럼 무거워 고개마루에 터를 잡아 관음성상을 모신곳이 관음사가 되었고 산이름도 성덕이라 불러다고 한다. 이상 우리 고전 심청전과 너무나 유사한 이야기가 관음설화 내용이다. 이상과 같이 설화에 의하면 성덕처녀가 우리면을 거쳐 같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현재 그 정자의 흔적은 없으나 그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어 설화의 신빙성을 뒤받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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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쌀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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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면 상덕리 국도 27호선을 지나다 보면 도로 한켠에 특이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는데 이곳 주민들은 이 바위를 "좁쌀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에는 신귀한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데 즉 심술굿고 성질이 고르지 못하나 힘이 장사인 정갑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혼기가 넘어 장가를 들지 못하여 마을사람들을 괴롭혀 원성을 사고 있어 마침 이 길을 지나던 한 여인이 마을사람들의 이 같은 말을 듣고 그와 내기를 걸자고 제의했는데 즉 만일 저 좁쌀같이 작은 돌을 여인이 말한 곳까지 옮긴다면 기꺼히 그의 처자가 된다고 하였다. | |
그러나 정갑산의 눈에는 그 작은 바위가 큰 바위로 보여 능히 옮기지 못하였으나, 그 여인은 하나의 작은 좁쌀로 보여 쉬이 치마에 싸서 옮겼다. 이에 정갑산은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고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현재 그 바위에는 비문이 새겨진 흔적이 있어 그 유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6.25동란때 훼손하여 전혀 글씨를 알길이 없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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