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누릴 왕적 특권
사무엘 러더포드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영광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빌 1:23). 나는 죄에서 해방되어 닻을 풀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써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분명히 가장 큰 특권입니다. 나무에서 잘리워졌다 하더라도 접붙임을 받으면 어린가지는 말라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비록 회개하였다 할지라도 여전히 돌감람나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잘리워져서 죽는다면, 멸망하지 않고 더욱 귀하고 풍성한 나무에 접붙여져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불완전한 상태보다는 완전한 상태가 더 좋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즉 아직 이것은 충분한 영광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 은혜는 아직 초기단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될 때까지는 이 은혜가 충분히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넘 앞에서는 마치 부모에게 졸라대는 어린아이와도 같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은혜를 받고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하는 새싹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그때 비로소,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충분히 무르익어 꽃이 만발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때까지는 풍성한 추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경건한 영혼의 바람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은혜가 타락시키는 힘과 뒤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광석 가운데 섞여 있는 황금, 또는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함께 가지고 있는 구름기둥과도 같습니다. 우리 의 믿음은 믿지 못하는 마음과 섞여 있습니다. 우리의 겸손은 교만한 마음으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은혜의 광채는 흐릿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은혜는 숨겨져 있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리워지듯이, 곡식이 겨속에 숨겨져 있듯이, 진주가 진흙 속에 감추어져 있듯이, 은혜는 참으로 부패시키는 힘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비록 은혜가 빼앗겨질 수는 없다하더라도 숨기워질 수는 있습니다. 다윗왕은 죄를 저지름으로써 그가 받은 은혜를 가렸고,사람들은 그의 더러운 모습 때문에 그가 입은 황금빛 옷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완전한 은혜로서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이것은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을 동안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내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을것이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경건한 영혼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여러 가지 의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 기도가 그토록 즐거울 수 있습니까? 그 영혼이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그토록 귀한 것은 그리스도를 전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성령의 날개 아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지만, 우리는 믿음이라는 날개로 그분께 올라갑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성찬은 고기대신 한 접시의 요리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편지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남편의 소식을 새로이 전해주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편지를 읽고 그리스도를 즐거워합니다. 즉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바랄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은 그의 갈증을 축여줄 수 있는 조금의 물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를 바다로 데려가 준다면, 그는 자신이 원하던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가득 찬 충만함만이 아니라 차고 넘쳐흐르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득 차서 둑 위로 넘쳐흐르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거룩하게 성화된 그리스도인은 남을 속이려고 계획하거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소원의 그릇을 넓혀주시고, 그리스도께서 물항아리의 '아구까지' 포도주로 채우셨던 것처럼 우리 소원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이 특권은 그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의 특권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 밖에서 주를 보리라
욥은 19장 26절에서 "내가 육체 밖에서 주를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롭게 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가장 엄숙하고도 황흘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의 아름다움은 숨기워져서 '고운 모양'조차 없었습니다. 신적 본질의 밝은 빛은 인간의 어두운 빛 속에 숨기워져 있었습니다. 신적 본질은 치욕과 고난 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만한 아름다움이 충만하였습니다. ”나의 택한 자를 내가 기뻐하노라." 그의 얼굴이 그때는 가리워져 있었지만, 가리웠던 것이 벗겨지고 그의 참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여호와 외에 누가 내게 있을꼬?“ 그곳에는 천사들과 천사장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을 만드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천국의 영광 가운데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
그 다음의 특권은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고 결혼관계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그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연합보다 더 친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 행복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연합은 샘솟는 기쁨이며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측복받은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있는 보배로운 모든 아름다움들이 우리 위에 흩뿌려질 것입니다.
성경의 두 구절을 비교해 봅시다. 요한복음 17장 24절에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인간 본성의 영광은 22절에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라고 나온 것처럼 완전하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자신을 위하여 가지지 않고 우리들을 위해서 가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빛으로 인하여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는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 그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천국에서는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 그의 영광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왕의 자녀들이 모든 영화를 누리며 금으로 장식찬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 그의 보석들로 옷입혀 주실 때, 그 연합한 자의 영광스러움은 어떠하겠습니까? 성도들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모습으로 판단받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 :1).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무엇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결혼을 통해 신부의 처지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바꾸어 줍니다. 성도는 영광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될 뿐만 아니라,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형상을 나누어주시기는 하지만, 그의 본질 자체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태양이 유리 위에서 빛나며 그 아름다운 흔적을 남길 때, 태양의 광선과 유리를 구별하기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유리는 광선이 아닙니다. 태양의 광선 그 본질이 아니라 단지 그와 유사한 것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신분의 상승
그 다음의 특권은 신분의 상승인데, 다음의 두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세상을 심판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아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도들은 심판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평화의 심판관으로서 심판석에 앉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보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석에 많아서 그분의 의로운 판단을 찬양할 것입니다. 오! 그 곳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법정이되겠습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는 세상이 성도들을 심판하지만 그 곳에서는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할 것입니다.
둘째, 성도들은 천사들보다 더욱 보좌 가까이에 있을 것입니다. 천사들은 고귀하고 거룩한 영들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으로 연합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친히 육체가 되셨고, 처녀의 태 속에서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묶으셨기 때문입니다. 장차 우리는 천사들보다 더욱 큰 영광으로 영화로와질 것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친구들이지만 하나님의 신부는 아닙니다. 이 영광은 성도들의 것입니다.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천사들보다도 더 밝게 빛나며 그들의 위엄은 더욱 콜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단지 훌륭한 창조물일 뿐이며 하나님의 의로움을 덧입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는 창살 속에 갇힌 죄인들이지만, 천국의 법정에서는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도들은 천사들보다 더 높은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기쁨을 얻음
그 다음의 특권은 기쁨입니다. 성도들의 기쁨은 연합에서 말미암으며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이 완전해질 때 기쁨 또한 완전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처 씻기시매" 더이상 슬픔이 없을 것업니다.
그 곳에는 애통함이 더이상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들은 그 남편이 없으므로 슬픔 가운데 있었지만 천국에서는 그리스도가 신부의 통곡을 없애 줄 것입니다. 그분은 신부의 어둡고 누추한 옷을 벗기고, 요한계시록 7장 13절 말씀처럼 '횐옷' 을 입혀주실 것입니다. 흰옷은 성도의 순결을 상징하며, 그들의 기쁨을 나타내 줍니다. 천국에 눈물이 있다면 그 곳은 이미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지옥은 통곡하는 곳이라고 불려집니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눈물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곳에서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천국에서 결코 우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버드나무에 걸려있는 우리의 수금을 다시 내려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분은 그의 사자들과 나팔수들을 부를 것입니다. 축복받은 찬양대인 천사들이 거룩한 찬양을 할 것입니다. 성도들도 천국의 연주회에 참여할 것입니다.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도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바로 기쁨의 눈물일 것입니다. 가끔씩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물을 기쁨의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또한 친국은 어떠한 슬픔도 없으며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나오는 미소는 우리의 모든 시련들을 잊게 해 줄 것입니다. 슬픔은 마음속에 구름처럼 모여 있으면서 우리들에게 악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애통은 슬픔의 구름들이 비가 되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의의 태양이 너무나 밝게 빛나고 있어서, 어떠한 구름도 생길 수 없습니다.그 곳에는 어떠한 슬픔도 없으며, 또한 슬픔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그 곳에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어떠한 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너무나 거룩한 곳이어서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뱀이 살 수조차 없는 곳입니다. 그 곳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어떤 대적자들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했을 때,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지는 못하고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는 결코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서 괴롭힘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 그 날에 여호와의 집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더이상 없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천국에 해를 입히기 위해 접근하지 못하도록, 천국을 불타는 검으로 지키실 것입니다. 모든 영광이 지켜질 것입니다. 천국에는 슬픔을 주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슬픔의 구름을 만들어내는 일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높은 사람들의 찡그린 얼굴
이 세상 왕들의 웃음 속에는 얼마나 야심이 가득 차 있습니까? 그러나 구름이 곧 몰려오고, 그들의 평안은 헛되이 슬픔이 찾아 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웃음을 주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결코 은혜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심판정에서 큰 은혜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기뻐하시는 한, 그분이 성도들을 기뻐하시는 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나누어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부분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잃게 됨
친구는 비밀을 나누어 가집니다. 우정은 사랑의 연합이어서 두 사람이 하나의 영혼을 가지도록 해 줍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함께 대화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연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연합이 깨어질 때 슬픔이 생깁니다. 만약 친구가 죄에서 떠나 선택받은 백성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와 만나주시고 떠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몹시도 기쁜 일입니다. 또 이 땅에서는 친구였지만 만약 그가 악한 자라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그와 더이상 친구가 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경건한 아내는 그녀의 남편을 잃음으로 인해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신실한 부모들 은 그의 자녀들을 천국에서 잃게 되더라도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관계들이 그리스 도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모든 별 자리들이 하늘의 큰 광명인 태양을 중심으로 결정되듯이 말입니다. 사람이 바다에 이르게 되면 물을 담을 물통이 없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약 간의 위로만 얻는다 해도당신이 은혜의 큰 바다에 이르러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면, 당신은 결코 물통을 두고 왔다고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는 슬프게 만드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곳에는 기쁨만 있을 것이며, 이는 천국의 기쁨은 오직 "기쁨으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라는 구절에서 잘 말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기쁨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그 곳에서는 우리가 기쁨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기쁨은 측량할 수도 없고 다른 것과 섞일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시 16:11)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충만해짐
그리스도외에는 어떤 것도 우리를 계속적인 기쁨으로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지성, 의지,사랑, 인간의 이 세 가지 요소를 삼위일체 하나님 이외의 누구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그분의 사람이 영화롭게 된 성도들의 마음을 황흘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이상의 기쁨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그한없는 간격을 볼 때 성도들의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포도주창고로 데려가서 입술에다 입맞추어 줄 때 그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혼인이 즉시 결정되고 그리스도와 영혼들의 예식이 거행될 때, 그 기쁨은 어떠하겠습니까? 이것들은 몹시도 고귀하고 풍성한 기쁨들이 될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해짐
모든 면에서, 그리고 즉시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에게 해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취는 근원적인 빛을 바라보는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신부의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뱀의 소리에 귀기울인 후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담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의 소리는 얼마나 다정하겠습니까? 그가 우리를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순결한 자아"라고 부를 때, 우리의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웅변을 잘하여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그의 청중들의 귀를 그토록 매료시켰다면, 수많은 천국의 나팔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어린양에게 할렐루야 찬양할 때, 성도들과 천사들의 거룩한 찬양을 듣게 되는 그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아름다운 향기 또한 충만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향기로운 향기를 맡을 때 그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가 입은 옷에서는 온통 몰약과 침향과 계피냄새가 풍길 것입니다. 그의 성령이 영혼들을 향하여 내쉬는 숨은 레바논의 포도주 같은 향기를 풍길 것입니다.
맛 또한 충만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부를 연회장으로 데리고 가며 그 신부는 그분의 사랑에 취할 것입니다. 이 천국의 음료를 마시는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것은 생명의 물입니다. 이것은 잘 걸러진 포도주입니다. 촉감 역시 채워질 것입니다. 성도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의 품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내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눅 24:39)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주를 만지는 것은 천국에서 우리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점에서 우리의 기쁨은 충만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다고 말한 것은 옳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조차도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했다면 그가 우리를 품어주실 때의 기쁨은 어떠하겠습니까? 헤르몬산의 이슬이 그토록 달콤하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첫 열매들이 달콤하다면, 무르익어 추수할 때 그 기쁨은 어떠하겠습니까? 즉 천국에는 성도들의 기쁨을 끊임없이 더해주는 것만 있습니다. 저주스러운 고통들도 기쁨과 승리의 일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의인은 원수갚음 보기를 기뻐하나니"라고 노래했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넘의 정의가 높이 드러나고 그들이 기적적으로 구원받는 이 두 가지 일로 인하여 기뻐할 것입니다. 그 곳에는 어떤 불쾌한 일들도 없고 오직 기쁨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함으로써 누리는 기쁨의 충만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으며 또 적절하지도 않습니다(고후 12:4). 우리는 요셉이 그의 형제들이 가는 길에 돈과 양식을 주었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읽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득 채워진 자루는 아버지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행 중에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십니다. 약간의 만나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늘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나 가득 찬 곡식자루는 천국에 갈 때까지는 열려지지 않습니다. 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 기쁨이 얼마나 큽니까? 솔로몬의 즉위식에서와도 같은 그러한 기쁨과 승리가 분명히 그 곳에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즉위 식때 온 땅이 그 영광의 소리로 가득 했다면 성도들이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는 날에 그 기쁨은 어띠하겠습까?
주 안에서 얻는 참된 안식
그 다음의 특권은 안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체 안에 운동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수은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안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라켓 위에 있는 공처럼, 파도 위에 떠 다니는 배처럼 결코 휴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가지고 있는 한 수은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끊임없이 요동하며 불안해 합니다. 시인은 “나의 죄로 인하여 내 에 평안함이 없나이다"(시38:3)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악인들이 존재하는 한 결코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난하다면 그는 부자들에게 핍박받을 것입니다. 그가 부자라면 가난 한 사람들에게 시샘을 받을 것입니다. 때로는 손실로 인하여 걱정하며 때로는 법적 소송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무도 그를 구출하러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죄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은 나그네와도 같습니다. 사도들은 거할 곳 없는 정처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고후 4:11).
우리는 이 세상의 끊임없는 요동 속에서 계속적으로 허둥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때로는 밀려갔다가 때로는 밀려오는 조수와도 같습니다. 이 곳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중심권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영혼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에게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합니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북극을 가르칠 때까지 계속 흔들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가 날려보낸 비둘기는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방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모형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 그 왕국은 요동치 않을 것이며 우리는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서 천국은 안식을 상징하는 곳간에 비유되고있습니다. 밀은 땅에 있을 때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날려다닙니다. 그러나 곳간에 쌓이면 평안히 쉴 수 있습니다. 선택받은 사람은 영적인 알곡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밭에 있을 때는 결코 쉴 수 없습니다. 핍박의 바람이 그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이 거룩한 밀이삭을 쥐어뜯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곡이 천국 곳간에 비축되면 이제 안식할 것입니다. 그 곳에는 안식만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들이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권태와 피곤이 없을 뿐입니다. 천국은 편안한 일들과 안식이 충만할 것입니다. 이 땅에는 차나운 바람이 불어대지만, 영광의 장소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바람이나 나쁜 안개가 없을 것입니다.
흔들리지 잃는 터전
마지막 특권은 안전함입니다. 사람이 잠시 동안 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곧 어떤 상실과 변화들이 닥칠지 알지 못함으로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는 어떤 것에게 도움을 구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 4:18)고 했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곧 이 영광을 잃게 되면 어쩌니' , '이 재물을 곧 모두 잃게 되면 어쩌나' 믿는 사람들조차 오랫동안부유한 처지에 있었을지라도 여전히 불안해하며 의심합니다.
때때로 그는 자신이 은혜의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자문해 봅니다. 즉 '도대체 나는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믿고 있지 않는 것일까?'이렇게 의심하게 됩니다. ‘나는 반짝거리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짜 진주목걸이일지도 모른다 나의 신앙은 일종의 추측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사랑은 자기사랑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마음을 바르게 권고하시더라도 그는 곧 다시 흔들리게 됩니다. 닻을 내리고있는 배가 비록 안전하다 할지라도 흔들리고 물이 넘쳐 들어올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들은 사람들을 슬프게 만듭니다.
두번째로 비록 그가 은혜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죄의 올무에 빠져 성령을 근심케 하며, 의인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며, 그 자신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고, 죄인들에게 용기를 주며,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낙담시키며, 신성모독적인 입술로 노래하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가리우시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타락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더러운 오점을 기독교에 남길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약속의 자녀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는 여전히 죄의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현재의 도움과 약속을 받을 수 없고, 슬피 울며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두려움은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 여전히 올라오는 검은 연기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기만 한다면 그의 마음은 평안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위협이나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돛대 끝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현재에 안전하게 앉아 있을지라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바람이 갑자기 불어 닥친다면 그 배는 폭풍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나 큰 바위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평안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마치 돛대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때로는 잔인한 핍박자들이 올라와서 그의 배에 총을 쓸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영혼들인 승객들이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배가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북풍이 불어올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가'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어떠한 위험도 없습니다. 그의 마음은 주저하거나 두려워서 떨지 않을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만 한다면 돛대 꼭대기에서 떨어진다 하더라도, 바위 위에 놓여진다 해도, 그의 마음은 평안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나는 깊은 심연을 드디어 다 건너왔어. 이제 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어. 어떤 것도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품에서 빼앗아갈 수 없어"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출처 :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