휫필드와 18세기 복음주의

 

박명수/서울신대 교수

 

1730년대는 영미 개신교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근대복음주의의 시작이다. 1735년 봄, 영국의 웨일즈 지방의 시골학교 선생인 해리스(Howell Harris)가 사죄의 확신과 함께 은혜를 체험했다. 몇 주 후 같은 지역의 롤랜드(Daniel Rowland) 역시 같은 경험을 하였다. 이것을 기점으로 해서 영국의 웨일즈 지방에서는 성령의역사가 일어났다. 웨일즈에서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을 바로 그 때, 미국에서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1734~5년 겨울, 조나단 에드워즈는 매사추세츠의 노샘프턴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라는 설교를 했고, 많은 심령들이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했다. 이것을 기점으로 미국에서는 후에 제1차 대각성운동이라고 불리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근대복음주의의 중심에 선 부흥사
조지 휫필드는 이 부흥운동을 최초에 일으킨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을 널리 확산시키는데 누구보다도 큰 공헌을 했다. 휫필드는 1735년 봄. 옥스포드 대학생이었을 때 회심의 체험을 했다. 그리고 2년 후에 그는 웨일즈로 가서 대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해리스가시작한 부흥운동의 역사를 더욱 크게 확산시킨 것이다. 1738년에는 감리교의 위대한 지도가 요한 웨슬리가 조지아 선교의 실패를 맛보고 영국으로 돌아와 그 유명한 올더스케잇 체험을 하였다. 1738년초 휫필드는 웨슬리가 떠나온 조지아를 향해 선교사로 떠났다. 그 후 약 10개월 후에 휫필드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야외집회를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웨슬리도 휫필드의 뒤를 이어 야외집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영국에서는 본격적인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18세기 초의 미국은 아직 통일된 나라가 아니라 여러 식민지들이 따로 따로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교파도 달랐다. 즉 남부에서는 성공회가 강한 반면에, 중부에서는 장로교가 강했고, 북부에서는 회중교회가 강했다.18세기 초에 미극에는 영적 각성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역적인 것이었다. 중부에서는 테넌트 부자(William and Gilbert Tennents)가 장로교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었고, 북부에서는 에드워즈가 회중교회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지역적인 부흥운동을 하나로 묶어 미대륙의 대각성운동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휫필드이다. 휫필드는 1739년에 미국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그는 조지아의 사바나를 기지로 하여 춘계순회를 하였고, 찰스톤을 중심으로 하계순회, 그리고 추계에는 뉴잉글랜드 지역을 순회하였으며, 겨울에는 조지아로 돌아와서 사역하였다. 근대복음주의가 18세기 초에 일어난 부흥운동에 기원을 두고 있다면, 조지 휫필드는 그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요한 웨슬리와 조나단 에드워즈가 있지만 그들은 대중적인 부흥사로서 휫필드에 필적할 만한 사람들은 되지 못한다. 웨슬리는 그의 탁월한 조직력으로 만든 감리교회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고, 에드워즈는 그의 천재적인 신학을 통하여 부흥운동을 신학화했지만, 대중적인 순회전도자로서 휫필드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휫필드는 웨슬리처럼 그의 추종 세력을 만들지 않았고, 에드워즈처럼 수많은 신학서적을 쓰지도 않았지만, 사람의 영혼을 구원한 부흥사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고하다.


휫필드의 중요성은 단지 대중적인 부흥사로서의 그의 위치 때문만은 아니다. 휫필드의 부흥운동은 18세기 복음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일어났고, 따라서 그의 복음사역은 근대복음주의의 중요한 특징들을 갖고 있다. 본 글에서는 조지 휫필드를 중심으로 하여 18세기 복음주의 운동의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8세기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시대였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산업사회가 형성되며, 인쇄매체가 발달하고, 또한 대중오락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휫필드는 이런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다. 근대복음주의는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적응하는 역동성있는 신앙운동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휫필드가 어떻게 이 일을 감당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새로운 사회구조에 따른 교회의 변화
근대복음주의는 근대사회라는 새로운 사회구조 속에서 시작되었다. 근대사회란 개인주의를 그 핵심요소로 하고 있다. 중세사회가 인간을 집단적으로 이해하는 데 비해서, 근대사회는 인간을 개인적으로 이해한다. 중세사회는 개인이 사회를 위해서 존재했지만, 근대사회는 사회가 개인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이런 ro인주의가 영미 기독교의 역사에 가장 구체적으로 등장한 것은 1689년의 관용령(Toleration Act)이다. 이 관용령의 내용은 가톨릭을 제외하고, 개인은 개신교의 어떤 교파든지 개인의 결단에 의해서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국에는 여전히 국교회가 있었고, 비국교도들은 국교도들에 비하여 여러 가지 제약이 있지만 영국의 역사에 있어서, 아니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 전체의 역사에 있어서 신앙이 개인의 선택의 대상이 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종교는 개인의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고, 국가나 사회가 정해준 신앙을 따라야 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종교는 사회를 하나로 묶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종교가 여럿이라는 것은 곧 사회가 분열될 가능성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근대사회로 옮겨지면서 종교가 사회의 중심요소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따라서 종교의 선택을 개인에게 양보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후로부터 종교문제가 아니라 정치체제나 경제제도가 사회를 끓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고, 여기에서 어긋나는 것은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새로운 사회구조 속에서 교회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것은 독과점시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영국성공회는 경쟁상대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비국교도가 합법화되고, 그들은 나름대로 그들의 신앙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따라서 영국성공회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경쟁상대를 만난 것이다. 즉 종교의 자유가 시작되었고, 신앙의 다원화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중교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여러 종류의 신앙이 함께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자본주의적인 시장용어로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다원주의적 상황의 주요한 특징은, 그것들의 세부적인 역사적 배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탈독점적인 종교적 기업들이 고객집단의 충성을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제 충성은 자원(自願)적인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정의상 확실한 것이 못된다. 결과적으로 이전에는 권위있게 부과되었던 종교적 전통을 이제는 시장에 내어 놓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이상 ‘구매’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고객들에게 ‘판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원주의적 상황은 무엇보다도 시장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제도가 매매기관이 되며, 종교적 전통은 소비지석 상품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했든 많은 종교활동이 시장경제의 논리에 의해서 지배당하게 된다.”


종교적 독과점시대가 끝난 상황에서 신앙은 더 이상 강요되어질 수 없으며, 이제는 설득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성공회는 공식적으로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성공회 내에서 이런 상황 가운데서 새롭게 적응해 보려고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수많은 '신앙단체' (Religious Society)들이다. 이들은 영국성공회를 떠나지 않고 성공회를 개혁해 보려고 노력하는 집단들이었다.1세기 전의 청교도운동이 성공회 밖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이라면, 이 신앙단체들은 성공회 내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체들은 영국성공회의 범주 안에 있지만 그들의 신앙형태는 자원(自願)적인 것이었다. 웨슬리 형제가 조직하고, 휫필드가 가담했던 홀리 클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웨슬리도, 휫필드도 그들의 첫 번째 설교의주요 초점은 형식적인 신앙에 대한 공격이었다. 즉 성공회의 냉랭한 신앙형태를 반박하고, 진정한 신앙으로의 복귀를 강조한 것이다.

야외집회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휫필드가 독창적으로 복음주의적 기독교에 공헌한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야외집회이다. 독과점 상품은 고객들에게 군림할 수 있다. 고객들이 상품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자유경쟁 상황에서는 상품이 고객을 찾아가야 한다. 소위 세일(sale)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독과점시대의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성직자를 찾았고, 교회당을 찾았다. 그러나 자유경쟁시대에서는 성직자들이 신자를 찾아나서야 했고, 그들이 잘 모일 수 있는 곳이 집회장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상황에 새롭게 적응하려고 하는 노력이 바로 야외집회이다. 이것은 교회당 중심의 구조에서 신자중심의 구조로 전환된 중요한 사건이다.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편히 잘 모일 수 있는 곳을 집회장소로 택한 것이다. 휫필드가 야외집회를 시작한 것은 해리스의 영향 때문이다. 해리스는 평신도로서 웨일즈의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평신도인 그는 정식으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지 못했으며,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설교할 수는 더욱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해리스가 사용한 전도방법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찾아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박람회나 스포츠 경기장 등을 찾아가서 돌담이나 계단을 이용하여 복음을 증거했던 것이다. 휫필드가 엉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는 1739년 발, 휫필드는 해리스의 이런 전도방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웨일즈로 찾아가서 그의 야외집회 모습을 직접 확인하였다. 그후 휫필드는 그의 방법을 받아들여서 야외에서 집회를 갖게 되었다. 휫필드가 야외집회를 처음 시작한 곳은 브리스톨 부근에 있던 킹스우드(Kingswood)라는 광산촌에서였다. 때는 2월이었고, 그해 겨울은 매우 추웠지만 휫필드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집회를 알렸고, 첫 집회가 열렸을 때 사람들은 약 2백명 가량이 모였다. 그 다음에는 약 2천명이 모였고, 그 다음에는 4천명, 마지막에는 약 1만명의 인원이 모였다. 기독교의 역사에 새로운 기원이 마련된 것이다. 이런 휫필드의 방법은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무식한 대중을 찾아가는 것은 교회의 체통에 문제되는 것이며, 야외에서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모독하는 것이다. 이것은 휫필드의 야외집회에 대한 웨슬리의 태도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휫필드는 야외집회를 시작하자마자 웨슬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웨슬리는 망설임끝에 휫필드의 집회에 참석했다. 웨슬리는 첫필드가 브리스틀의 로즈 그린(Rose Green)의 작은 언덕에서 3만명의 사람 앞에서 설교하는 것을 본 후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들판에서 설교하는 광경을 생전 처음 보고 나는 처음에 이해하기 힘들었다.…철저하게 고상하고 질서잡힌 것만 고집하던 나는 교회에서도 그런 것이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 영혼을 구원하려 한다면 그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성공회는 신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합당한 방법으로 설교해야한다는 새로운 시대적인 사명을 아직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도 머뭇거렸지만 결국은 휫필드의 야외집회를 받아들였고, 평생 이 일에 증사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산업화와 야외집회의 관계이다. 휫필드의 야외집회는 브리스톨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신흥 산업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은 농촌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고 있었다. 산업사회를 위해서 필연적인 것이 도시의 등장이다. 도시에는 공장이 있고, 이런 공장에는 수많은 새로운 인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력은 농촌인구의 도시유입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새로 형성된 도시에는 지금까지 농촌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농촌의 신분구조를 거부하고, 새로운 문화형태를 창조하고 싶은 욕구이다. 새로운 도시주민의 대부분은 공장의 산업근로자들이며, 이들은 농촌의 봉건적인 계층구조를 싫어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 영국성공회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농촌사회의 봉건적인 계층구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런 영국성공회는 산업사회의 새로운 시민들에게는 적절하지 않았다. 신분의 구별이 없이 앉아 설교를 듣는 야외집회는 이런 새로운 사회구조에 맞는 선교방법이었다.

대중적인 새로운 설교형태

즉석설교
원래 영국교회는 귀족중심의 교회였다. 영국이라는 국가의 왕과 영국의 국교인성공회의 주교는 서로 공생하는 관계였다. 따라서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주교가 없으면 왕도 없다"(No bishop, No king)고 강조하였다. 이런 귀족중심의 기독교를 반대하고, 신흥 중산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운동이 청교도운동이었다. 청교도들은 대부분 상인들로서 이들은 자기들의 상업을 위해서는 자율성이 중요했다. 따라서 이들은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반대하고, 자기들의 이익이 보장 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원했다. 16세기 중엽부터17세기 말까지 계속된 성공회와 청교도의 싸움, 다른 말로 하면 귀족계급과 중산층계급의 싸움은 1689년의 명예혁명으로 끝났다. 이 명예혁명을 통하여 중산층들의 정치적인 참여가 보장되고, 이들의 종교적인 자유도 보장되었다. 그리하여 사실상 많은 청교도들은 영국성공회로 복귀하였고, 하나의 종교운동으로서의 청교도운동은 끝난 것이다. 18세기의 영국에는 종교 선택의 자유와 함께 산업도시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산업도시의 주요 구성요소는 일반대중들, 곧 근로자들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영국사회에서도, 영국교회에서도 결코 주역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을 선교의 주 대상으로 삼은 것이 복음주의운동이었다. 웨슬리와 휫필드의 부흥운동의 센터는 바로 산업근로자들이 모여 있던 공장도시였다. 이들이 선교의 주 대상이었다면 이제 선교의 방법도 달라져야 했다. 선교의 장소가 이들이 마음놓고 편히 모일 수 있는 야외였다면, 선교의 방법도 이들에게 적절한 것이어야 했다. 휫필드가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에 공헌한 점이 여기에 있다. 그가 외친 설교의 내용은 청교도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지만 그가 외친 설교의 방법은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휫필드는 원고에 의존하지 않는 설교를 하였다. 원고없는 즉석설교(extemporaneous preaching)는 원래 웨슬리에게서 시작되었다. 1735년 웨슬리는 우연히 즉석설교를 하였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그 후 웨슬리는 그의 옥스포드 홀리 클럽 회원들에게 이것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이 즉석설교가 보다 크게 성공한 것은 휫필드에게서였다. 휫필드는 1737년 12월 28일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서 갑자기 설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담대하게 아무 원고도 없이 설교하게 되었다. 그 후 휫필드의 부흥운동의 시간이 더해 갈수록 그의 즉석설교 횟수도 많아졌다. 즉석설교는 무엇보다도 청중들과 직접 호흡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청중과 설교자 사이에 설교원고라는 장애물이 없이 그대로 설교가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즉석설교를 하게 되면 시간과 장소에 따라 설교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변형시킬 수 있다. 휫필드가 보스톤에서 설교할 때 구름이 지나가자 “저 인생의 상징을 보라”고 말하면서 “구름이 지나가는 동안 하늘의 밝은 빛이 가려집니다. 그러나 구름은 곧 지나가지요. …여러분의 인생은 언제 저 어두운 구름처럼 흘러갈까요?… 얼마 안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모두 만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휫필드가 또한 영원한 형벌을 말하고 있을 때 번갯불이 번쩍였다. 그때 휫필드는 번갯불을 가리키며, “저길 보십시오! 여호와의 노한 시선이 번득입니다”라고외치고 “귀를 기울이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천둥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하며 “전능하신 분께서 노를 발하시며 지나가는 음성입니다”라고 말했다. 휫필드는 딱딱한 원고설교를 냉랭한 교회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의 모든 설교자들이 원고에 의존해서 설교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설교의 옛 정신을 대부분 상실했다는 분명한 표시이다.…원고 없는 즉석설교가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곳에 설교를 읽는 것이 일반화된 것은 생명력있던 종교가 부패한다는 슬픈 증거이다.” 예수님의 설교는 거의 설교였고, 동시에 즉석설교였다. 초대교회도 그랬다. 그러나 휫필드는 교회가 형식화되면서 교회의 딱딱한 건물에서 고루한 설교를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죽은 목사가 신자를 살릴 수 없는 것처럼, 죽은 문자가신자의 영혼에 불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연극 같은 설교
휫필드의 설교의 또 다른 특징은 연극 같은 설교라는 점이다.1991년 예일대학교의 유명한 미국교회사가민 해리 스타우트.(Harry Stout)는 휫필드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책 The Divine Dramatist: George Wbitefield and tbe Rise of Modern Evangelicalism(거룩한 극작가 조지 휫필드와 근대복음주의의 등장)을 썼다. 이 책에서 스타우트는 휫필드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했다. 그는 휫필드를 18세기의 무대예술과 관련하여 설명했다.


스타우트에 따르면 휫필드는 어려서부터 희곡을 즐겨 읽었다. 그가 읽은 희곡은 세익스피어의 고전 작품에서부터 당시의 유행하는 코미디 희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는 희곡을 읽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연습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후에 자기의 자서전에 연극연습을 하기 위해학교를 결석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가 연극에 타고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계발하는 데는 그의 환경의 도움도 받았다. 휫필드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여관을 운영했고, 어렸을 때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를 도와 손님들의 심부름을 해야만 했다. 또한 휫필드가 옥스포드에 들어갔을 때 그는가난했기 때문에 부유한 환경의 학생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그 대가로 학비를 조달받았다. 이런 어려운 환경은 그로 하여금 자기에게 주어지는 어떤 역이든 즉각적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주었다. 휫필드는 어려서부터 성공회 신자였다. 성공회는 청교도들과는 달리 극장을 죄악시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극장을 죄악의 온상으로 보았으나, 성공회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휫필드는 어려서부터 연극을 즐겨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옥스포드에 입학한 뒤 홀리 클럽에 들어가면서 그는 이것을 버려야 했다. 엄격한 경건훈련을 강조하는 홀리 클럽은 연극을 죄악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휫필드에게 어렸을 때의 재주가 드러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안수를 받고 설교를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휫필드가 설교를 시작했을 때 그의 설교는 단지 원고의 낭독이 아니라 희곡에 의한 연기였다. 그러나 어렸을 때와 같이 세속적인 이야기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의 역사를 전달하는 거룩한 배우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거룩한 연기의 주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심이었다. 이것은 그의 설교의 주제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 복음주의의 주제이기도 했다.


휫필드가 위대한 설교가로서 유래없는 성공을 거두었을 때 영국에는 막 새로운 연극의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도시로 밀려드는 많은 근로자들은 새로운 오락거리를 찾았고, 이들에게 연극은 매우 좋은 오락이었다. 지금까지 연극은 주로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여 공연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초 연극의 대상은 귀족 층에서 일반도시민으로 이전되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연극이 갑작스럽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1732년 런던의 극장들은 한 주일에 1만2천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것은 1660년대의 왕정복고시대 이후 가장 놀라운 숫자였다. 청중이 일반 대중으로 바뀌어 지면서 연극 역시 이들에게 맞도록 재구성되었다. 이 당시에 연극의 지침서를 보면 감정은 인간행위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며,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연극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감정의 표현을 위해서는 단지 대사뿐만이 아니라 얼굴과 몸을 잘 동원해야 한다. 연극에 있어서 언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얼굴과 몸짓이다. 이런 것들로서 인간 감정의 열 가지 표현들, 곧 기쁨, 슬픔, 두려움, 분노, 애처로움, 경멸, 증오, 시기, 놀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연극의 기본원리였다.


휫필드의 설교는 바로 이와 같은 한편의 연극과 같았다. 그의 설교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고 있었다. 그의 설교는 단순한 언어로 만이 아니라, 얼굴의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의 설교의 대상은 도시의 근로자들이었다. 이런 휫필드의 설교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으나,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을 야기시켰다. 첫째는, 연극측으로부터의 비판이다. 연극과 휫필드는 같은 대상(상업적인 언어로 하면 같은 고객)을 놓고 청 증유치를 위해 경쟁했던 것이다. 휫필드는 극장을 부흥집회의 가장 큰 경쟁자로 여겼고, 극장역시 부흥집회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극장은 악마의 무대였고, 이런 전통은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근래까지 계속되어 왔다. 둘째는. 영국교회로부터의 비판이다. 영국교회는 극장 가는 것을 죄악시하지 않았으나 설교자가 배우처럼 설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성직자의 권위를 실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국교회의 태도는, 교회는 일반 대중에게 뿌리를 내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교해야 된다는 시대적인흐름을 인식하지 못한 완고함에 근거하고 있다.


새시대 홍보방법인 인쇄매체를 활용
휫필드가 18세기의 가장 유명한 설교가로 등장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쇄매체의 이용이다. 휫필드 이전에도 부흥운동은 있었다. 영국에서도 이미 휫필드 이전에 웨일즈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었고, 미국에서도 그랬다. 미국에서는 1720년대와 1730년대에 이미 뉴저지에서 뉴잉글랜드에 이르기까지 산발적으로 부흥운동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산발적인 부흥운동을 묶어 전국적인 대각성운동으로 이끈 사람이 다름 아닌 휫필드였다. 그러면 무엇이 휫필드로 하여금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가? 프랭크 램버트(Frank Lambert)의 주장에 의하면 휫필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인쇄매체를 이용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17세기 말 영국과 미국에는 출판사상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수단으로서 인쇄물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출판이 있었지만 이전에는 모든 출판물이정부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나 1695년 영국에서는 인쇄허가법이 폐기되었고, 자유로운 출판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문과 팸플릿들이 넘쳐나게 되었다.17세기 말에 전 영국에 오직 20개뿐이었던 출판사가 1724년에는 런던에만 75개로 불어났다.1740년에 런던은 3개의 일간신문, 5개의 주간신문 등을 자랑했다. 미국에서는 1702년 처음으로 신문이 출판된 이후, 계속적으로 그 숫자가 증가했다. 휫필드는 이 신문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부흥회를 선전했다. 이렇게 신문들이 늘어나게 된 데에는 독서인구의 증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래 미국의 청교도들은 사단은 문맹을 통하여 역사한다고 생각하여 문자교육을 강조했다. 또한 18세기의 복음주의자들도 성경을 읽히기 위해서 문자를 가르쳤다. 따라서 문맹률의 저하는 개신교의 전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휫필드는 신문과 잡지를 통하여 자기의 집회를 널리 알렸다. 그가 1740년 미국에 가기 전에 그의 사역은 이미 신문과 잡지를 통하여 미국에 널리 알려졌다. 여기에는 그가 영국에서 얼마나 성공적으로 사역을 하고 있었는지 잘 소개되었다. 또한 휫필드는 자신이 회심하게 된 이야기인 Short Account of God' s Dealing with tbe Rev. Mr. Georse Whitefield.(조지휫필드 목사에게 주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짧은 설명)를 출판하였고, 이것은 영국과 미국에서 널리 읽혔다. 그리고 그의 중생에 관한 설교 역시 출판되어 뉴잉글랜드의 목사들에게 교리적인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1739년에는 미국의 10개 이상의 주간신문들이 휫필드의 집회소식을 보도하고 있었다. 이런 준비작업 위에 휫필드는 1740년에 미국에서 대대적인 대집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 와서도 휫필드의 부흥집회는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램버트는 휫필드가 인쇄매체를 다루는 방법을 다음의 제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휫필드는 개교회라는 사적인 제도보다는 언론이라는 공적인 제도를 이용하여 자기의 사역을 선전했으며, 둘째, 휫필드는 자기의 사역을 객관적으로 선전하기 위하여 제 3자로 하여금 기사를 쓰게 했으며, 셋째, 독자들에게 신뢰도를 높이기 위하여 통계적인 수치를 제시했다. 이 당시에 유럽의 신문들의 주된 관심은 정치였는데 비하여, 미국 신문들의 주된 관심은 종교였다. 그리고 이 신문들은 대체적으로 부흥회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그리하여 부흥회를 반대했던 보스톤의 촌시(Charles Chauncy)목사는 신문이 일방적으로 부흥회를 선전한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이러한 부흥회에 대한 신문의 긍정적인 태도는 새로 부상하는 인쇄 매체가 그 기반을 새롭게 형성되는 일반대중에게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신문과 부흥회는 다같이 일반 대중에게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인쇄매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휫필드의 부흥집회가 미국 전역을 포괄하는 대집회로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복음주의적 연합과 회심의 종교
휫필드의 부흥운동은 근대복음주의운동의 기원이다. 만일 복음주의가 어떤 특정한 교파나 전통을 뛰어넘어 형식적인 신앙을 반대하고 체험전인 신앙을 강조하는 성서적 기독교를 가르치는 명칭이라면, 이런 신앙의 뿌리를 우리는 휫필드에게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휫필드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지만 그는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폭넓게 활동했다. 휫필드의 부흥운동은 교파를 초월한 운동이다. 부흥운등의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교구목사와의 갈등이다. 교구목사는 부흥사들을 항상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휫필드는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는 결코 교회를 세우지도, 교파를 세우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물론 휫필드가 잠시 칼빈주의적 감리회의 대표로 있었지만 그것도 포기해 버렀다. 어떤 특정한 단체에 속한다는 것은 그의 활동영역이 제한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휫필드의 부흥운동은 성공회, 장로교, 회중교회, 침례교회, 개혁교회 등 모든 교파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휫필드는 교파적인 차이가 강조되는 것을 반대하고 교회의 공통되는 요소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휫필드는 필라델피아의 재판소발코니에서 행한설교에서 하늘을우러러보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아버지여, 천국에 누가 있습니까, 감독교인들이 있습니까? 아니다. 장로교인들이 있습니까? 아니다. 독립파나 감리교도들이 있습니까? 아니다. 결코 없다. 그리면 거기에 누가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여기에 있는 모두는 기독교인들이다.…참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오, 하나님이여 우리로 하여금 모든 분파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행동과 진리에 있어서 크리스찬이 되게 하옵소서!” 휫필드는 칼빈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칼빈주의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였다. “도대체 칼빈은 무엇이고 루터는 무엇인가? 이름과 분당 그 이상의 것을 보자. 예수님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삼자. 그리하여 그분이 전파되도록 하자.” 휫필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끓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 휫필드가 모든 교파나 전통의 장벽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하나로 묶으려고 할 때,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중생, 혹은 회심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여러 가지 기준으로 참신자를 구분해왔다. 종교개혁시대 이후에 형성된 개신교 정통주의에 있어서는 신조에 대한 동의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청교도 시대에서는 어떤 교회의 제도를 택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휫필드에게 있어서 참신자의 기준은 그런 교리나 제도가 아니라 회심의 체험이었다.


휫필드는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월 28일, 월요일. 핵크니(Hackney)의 들판에서 …1만명 가량의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나는 중생의 교리가 얼마나 합리적인지를 힘주어 강조했다.…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물론 이 회심의 체험은 청교도들이 매우 중요하게 강조해오던 것이었다. 회심의 증거가 교회의 회원이 되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휫필드는 바로 이런 청교도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휫필드가 단순히 청교도의 전통을 이어받은 데서 끝난 것은 아니다.


청교도와 휫필드는 다같이 회심을 단순히 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회심은 구체적으로 경험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와 휫필드의 회심을 비교해볼 때 중요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첫 번째, 청교도는 회심이 긴 과정의 자기 성찰 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휫필드는 회심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청교도 신학자 퍼킨스에 의하면 회심은 열 가지의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참된 겸비(humiliation)이다. 즉 인간의 무력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을 때 회심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여기에 비해서 휫필드는 회심의 즉각성을 강조했다. 휫필드는 그의 회심기록에서 그 자신의 구원은 대학시절의 스쿠갈(Henry Scougal)의 The life of God Within the soul of man(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읽던 바로 그 밤에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다. 휫필드는 청중들에게 회심은 지금 당장, 설교를 듣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의 신생에 대한 설교에서 “그러므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시오. 그러면 당신의 죄가 씻어질 것입니다. 보시오, 그러면 당신은 집에 가기 전에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청교도와 부흥회의 컨텍스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청교도의 회심은 목회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목회라는 장기적인 과정에서 회심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부흥회는 짧은 기간에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부흥사에게는 긴 시간이 없다. 따라서 부흥사는 즉각적인 회심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의 대각성 이후 이 즉각성은 미국복음주의의 하나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두번째, 청교도에게 있어서 회심은 교회의 멤버십과 관련된다. 그러나 휫필드에게는 회심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청교도에게 있어서 회심의 경험을 한 사람만이 교회의 정식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곧 청교도사회의 당당한 시민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교회의 회원만이 일반사회의 투표권을 갖는 시대는 지났으며, 영국에서의 관용령 이후에 종교는 개인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정치와 종교가 하나였던 청교도사회에서 회심은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입문단계였지만,18세기에 와서는 회심은 단지 개인의 종교적인 사건으로 축소되었다. 이것은 근대사최의 또 다른 특징, 곧 개인주의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휫필드의 부흥운동은 이런 새로운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런 새로운 회심의 이해는 교회에 대한 새로운 사상과 관련된다. 이제 신자들은 교회라는 구조와 관련없이 신앙을 이해하게 되었다. 신자에게 있어서 교회는 이차적인 것이다. 교회라는 제도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우리를 구원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특히 미국의 기독교에는 교회론이 약하다.


이런 상대화된 교회관을 반영하는 것이 '교파 (denomination)이다. 교파라는 용어는 트뢸치가 말하는 교회(church)나 분좌(sect)와는 다르다. 유럽의 교회나 분파는 상호배타적이면서 각각 자기들만이 참된 교회라고 주장한다. 대부분 국가 교회에 속하는 교회형의 교회는 분파를 이단으로 보며, 분파형의 교회는 기존 교회를 적그리스도로 본다. 국가 교회는 분파를 박해하며, 분파는 국가에 협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에는 이런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는 국가 교회가 없다. 따라서 분파도 없다. 지금까지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교회의 형태, 곧 교파가 있을 뿐이다. 교파는 자기들의 교회를 절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 개의 선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교파주의는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교회의 제도나, 예배 양식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교파의 다양성을 넘어서서 근대복음주의를 하나로 묶는 공통점은 바로 회심이다. 교회의 신학이나 제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회심의 경험이다. 이것을 최초로 강조한 사람이 휫필드이다. 그래서 나단 해치(Nathan 0. Hatch)는 “휫필드는 교회들을 보다 더 큰 실체, 곧 신생이라는 개인적인 경험에 종속시킨 새로운 종교문화를 촉진시켰다. 이런 구조 속에서 개인적인 경험은 교파적인 신조, 성례전, 그리고 공동서약과 같은 기존 종교의 절대적인 요소들을 대치했다. 교회나 신조보다도 신생을 강조하면서 휫필드는 부흥회중심의 자원(自願)운동의 전파자가 되었고, 이것은 또한 미국기독교의 특징이 되었다”고 말한다.

복음주의와 근대사회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복음주의에 대해서 오해해왔다. 그래서 복음주의를 근본주의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우리는 휫필드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복음주의가 쾨쾨묵은 보수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18세기 초에 일어난 복음주의는 개신교의 어떤 형태보다도 근대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18세기에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 개인주의의 등장, 산업도시의 형성, 새로운 오락 문화, 인쇄매체의 발달 등 수많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고, 이런 새로운 사회구조 속에서 근대복음주의는 복음을 새롭게 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정치와 분리된 종교는 더 이상 국가에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일반인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신앙을 갖느냐가 교회존립의 핵심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새 시대의 새로운 계층으로 떠오르는 도시근로자들을 상대로 하여(도시선교), 그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장소로 찾아가(옥외집회),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원고에 매이지 않는 드라마틱한 설교), 새시대의 커뮤니케이션수단을 이용하여 집회를 선전하며(신문과 인쇄매체의 이용, 모든 교파를 넘어서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공동의 복음(중생)을 전했던 것이다. 영국성공회가 기존의 권위만 내세우고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 무관심할 때, 휫필드가 일어나 새로운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복음은 불변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