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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머레이 스크랩 20세기 중반의 가장 영향력을 미친 개혁주의 신학자 / 존 머레이(John Murray)
한아름 추천 0 조회 72 12.08.25 21: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  고려신학교 연수원  http://ctcg.or.kr/ctck/board/data/view.asp?DB_name=ghpc_data52&idx=25&search=&find=&page=6

 

 

 

20세기 중반의 가장 영향력을 미친 개혁주의 신학자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


 

 

   존 머레이의 생애

 

   머레이는 1898년 스코틀랜드 서덜랜드(Sutherland) 지방의 크레이크(Creich)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청교도 신앙의 가정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통해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랐다. 대학을 진학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의 교육 도시인 글라스고우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석사학위(M.A.)를 마쳤다. 그 이후 1924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하여 당대의 유명한 워필드와 메이첸으로부터 개혁주의 신학의 깊은 영향을 받고, 고향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다시 돌아와 계속 공부하던 중 1929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부름을 받고 조직신학자 카스퍼 핫지 교수를 돕는 강사로서 신학교와 인연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가 프린스턴에 돌아온 그 이듬해에 프린스턴은 좌경화 문제로 인해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그 역사의 현장에 서있던 머레이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철저히 역사적 기독교를 옹호하는 존 그레샴 메이첸을 따라서, 1930년 오스왈드 앨리스(Oswald T. Allis) 그리고 R. D. 윌슨(R. D. Wilson),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등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메이첸이 설립한 정통장로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고(1937넌), 1966년 은퇴하기까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은퇴 이후에도 줄곧 웨스트민스터에서 강의를 하다가 1975년 사망을 하였다.

 

 

   머레이의 신학과 사상

 

   머레이의 36년 동안 반틸과 더불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대변해주는 대표적 신학자로서, 철두철미하게 분명하고 확실힌 언어로 신학을 표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한 그의 신학적 입장은 그로 하여금 한번도 애매모호한 언어유희로 신학적 도전을 피해가는 비겁한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가장 합당한 신앙적 교훈은 인식적인 앎뿐만이 아니라 실천적 경건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여 기독교 교육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성경 주해에 있어서 머레이의 신학적 강조는 ‘로마서 주석’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듯이 그리스도를 중심한 ‘구속론’에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는 양자됨을 구속적인 특권의 극치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신학과 사상을 그의 삶에 그대로 실천하였다. 주일을 철저히 거룩히 지켰으며, 말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주재하거나 젊은이들의 넘치는 기상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그 품위와 권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다. 2차 대전에서 한쪽 눈을 잃은 그였지만 문제의 핵심을 바로 꿰뚫는 안목을 가지고, 경우에 합당한 말로 전파하는 그의 설교는 ‘선명한 설교의 모델’이 되었고, 스코틀랜드 칼빈주의자의 주목할만한 ‘언어 사용’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학문과 함께 경건을 겸비했던 존 머레이 교수는 구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찰스 핫지-워필드-메이첸으로 이어지는 미국 장로교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맥을 잇는 탁월한 조직신학자로서 길이 남아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머레이의 저술들

 

   머레이가 남긴 저술들은 그가 살았던 시대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탁월한 신학서적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기독교 윤리를 다룬 『그의 행동 원리(His Conduct of Condect)』, 『로마서 주석(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2 vols., 1959, 1965)』, 그리고 그의 독특한 구속관이 제시된 『구속론(Redemption-Accomplished and Applied, 1955)』은 지금도 신학생들에게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책들을 제외한 그의 논문과 강연, 강의, 설교들은 그의 사후에 총 4권(1권: 진리의 주장, 2권: 조직신학, 3권: 살아계신 하나님 섬기기, 4권: 신학의 연구들)으로 구성된 선집(Collected Writings, 1976-1983)으로 출판되었다. 머레이의 신학 저술들에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신학적인 강조점들은 첫째, 기독교 윤리의 근거를 창조 질서에 두고, 둘째 성경적인 언약을 맹세할 의무가 있는 약속으로 이해함으로써 개혁주의 신학의 이중 언약의 개념을 채용하기를 꺼려하였다. 셋째, 성화의 교리를 성화적(Progresseive)인 것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Definitive) 것으로 설명하였다. 넷째, 그는 죄의 전가를 즉각적인 것으로 해설하였다.

   이렇게 머레이는 그의 생전에는 수많은 신학생들을 훈련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방대한 저술을 남겨서 그것을 통해 말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줌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가히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20세기 중반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개혁주의 신학자 가운데 하나였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신학교 연수원>

 

 

 

출처: 갓피플몰

 

존 머레이

 

1898년  스코틀랜드 서더랜드 지방의 뱃비에서, 알렉산더 머레이와 캐서린 머레이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다. “뱃비에 있는 집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가족은 가난했지만, 그 집에는 경건함과 기도라는 매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에 주둔하던 블랙 워치 부대에서 복무하다. 작전 중 부상으로 한쪽 눈을 잃다.
1923년  글래스고 대학교를 졸업하다. 스코틀랜드의 자유장로교회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다.
1924년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다. (그동안 프린스턴 신학교의 이름은 순결한 정통 신앙과 경건의 보루로 여겨졌는데, 당시 미국장로교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자유주의적 견해들로 인해 새로운 신학적 변화가 일고 있었다.) 3년 후 신학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받다.
1928년  에든버러 대학교의 뉴칼리지에서 공부하다.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캐스퍼 하지를 도와 조직신학 강사를 역임하다. (프린스턴 신학교가 미국장로교회 총회 산하에 자유주의를 포함해 좀 더 폭넓은 견해들을 대변하는 학교로 재편되자, 머레이는 자신이 프린스턴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1930년  그레셤 메이첸의 요청으로, 1929년 필라델피아에 설립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강사로 초빙되다.
1936년  미국 정통장로교회를 설립하다. 뉴잉글랜드 개혁신앙전파회의 회장으로 취임하다.
1937년  정통장로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로 임직하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직을 수락하다.
1955년  「존 머레이의 구속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이 출간되다.
1957년  Principles of Conduct가 출간되다.
1959년  「로마서 주석The Epistle to the Romans」 1권이 출간되다.
1965년  「로마서 주석The Epistle to the Romans」 2권이 출간되다.
1966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은퇴하다. “머레이는 30여 년간 조직신학 교수로 지내면서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았고,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적 세속 사상들로부터 성경적 진리를 지키며 개혁신학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로 자리매김했다.”
1967년  발레리 놀턴과 결혼하다.
1972년  아드게이 자유교회에서 대리 목사직을 수행하다.
1975년  세상을 떠나다. “머레이에게 순전히 학문적 영역에 머무르는 신학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신학적 이해와 실천적 경건을 자신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보여주었다. 현대 신학으로 인해 두 동강 난 이 경건과 신학을 하나로 일치시키면서 보존하고 전수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평생 추구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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