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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 연재소설】
금 강 ④
이 대 영
▣ 우는 강
공주 시가는 시시각각 긴장감이 흘렀다. 강물조차도 7월의 뜨거운 입김을 헉헉 토해냈다. 포성소리가 들리면서 등짐을 꾸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남쪽지역에 연고지가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봇짐을 꾸려 논산 혹은 대전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금강철교를 건너는 사람들은 건너는 중간 중간에 다리가 폭파될까봐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종종 걸음으로 내달렸다. 아예, 나룻배를 불러 장깃대, 창벽, 왕촌, 마암 나루 등으로 야간도주하듯 빠져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덕분에 공산성 일대에 거북등처럼 붙어살던 뱃사공들의 주머니가 불룩해지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뱃삯을 요구해 하선한 피난민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보자!”라는 욕지거리를 듣는 이도 있었다.
7월 9일부터 공주시내는 마치 시한폭탄을 안은 공간처럼 살기가 돌았다. 시민들은 눈에 띄지 않았으며, 군용차의 타이어와 군경의 군화소리가 골목길을 어지럽혔다. 미 제34연대는 전날 ‘미 제24사단 작전명령 3호’를 전달받은 후 오전 10시 경, 봉황초등학교에 연대 전방지휘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주민과 청년방위대원을 동원하여 금강 남측 야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제78전차 대대 A중대 중 1개 소대가 제34연대 지원에 나섰으며, 제3공병대대 또한, 도로 차단과 금강에 가설된 모든 교량에 대한 폭파준비에 나서고 있었다.
때맞춰, 공주형무소에서는 살생부를 확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6월 28일 이승만 정부가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하여 계엄 하에서 좌익사범에 대한 즉결처형을 인정한 것이다. 전쟁발발 첫날인 6월 25일 아침 9시에 경기도 개성 땅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형무소에서 풀려난 보도연맹원들이 그들에게 협력하여 우익인사들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때부터 평택 이남의 전 지역에서 주로 국민보도연맹원을 대상으로 한 공식적 '처형'의 명분으로 마구잡이식 학살이 진행되고 있었다.
윤 소장의 2층 집무실에 매달린 전등불이 벌겋게 피비린내를 풍겨대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 달력은 7월 5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국민보도연맹원증’과 ‘수감자 등록부’를 대조하며 작성된 살생부를 훑어보고 있는 윤 소장의 미간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앞에는 아침에 도착하여 2층 강당에 본부를 차리고 처형대상자 분류작업을 마친 육군형무소 소속 헌병대원 네 명이 앉아 있었다.
대원들에게 담배를 한 대씩 권한 윤 소장은 살생부 명단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손끝이 명부에 닿을 때마다 그 자신이 사형을 집행하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봉황산에서 새어 나오는 철없는 왜가리들의 신음 소리가 갈참나무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제민천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목욕을 하던 아이들 소리며, 빨래하며 나누던 아낙들의 음탕한 언어들도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 지 오래였다. 백제 천년의 꿈을 물살에 수장했던 공산성조차도 물끄러미 형무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 소장은 엷은 한숨을 토해냈다. 국민보도연맹원의 살생부에 그의 친구 아들을 비롯한 읍내 몇몇 유지의 자녀이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학구 아들의 이름이 걸렸다.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동창인 이학구는 공주우체국장으로 교동 향교 골목에서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한 막역한 친구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둘은 공주공립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아내를 맞이했다. 사회적 경쟁관계이기도 했던 이학구는 윤 소장과 읍내 행사에서도 자주 만났지만 둘만의 술자리도 자주하며 제민천가의 버드나무 길을 걷곤 했다. 제민천은 그들의 청춘과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물길이었다. 빨랫감을 한 아름 안고 나서는 어머니를 따라 그들은 빨래방망이를 공중에 휘젓는 무사가 되기도 했고, 처렁처렁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피리를 불 때면 필하모니의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기도 했다. 금강줄기를 따라 올라 온 피라미, 미꾸라지, 금강모치 등이 어망에 올라올 때 그들은 행복한 어부가 되기도 했고, 빨래터에서 들려오는 여인들의 음탕한 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고추를 다독이기도 했다.
이학구는 우체국장으로 나름대로 사회적 입지를 다졌으면서도 술이 취하면 빼놓지 않고 토로하는 두 가지 불만이 있었다. 첫째는 읍내 행사의 주요인사 자리에 이학구보다 “윤 소장이 왜 상석에 있어야 하는가?”이었다. 시골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는 우편행랑의 소중함을 모르는 관료적 행태가 자리배치에서도 나타난다고 그는 악을 써댔다. 이럴 즈음이면 윤 소장은 한 치 물러나 빙그레 웃곤 했다. 처음에는 “행사 주최 측에서 배정한 자리를 내가 바꿔달라고 할 수 있느냐,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형무소장이 우체국장에 비해서는 한 끗발 높지 않느냐!”며 싸우기도 했다. 이에 윤 소장은 “나는 초대 공주우체국장이 아니냐!”며 핏발을 올렸다. 그도 그럴 만했다. 1896년 공주우체국이 개국하여 1906년 공주우편국으로 개칭된 이래 시민들은 모두 공주우편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왔다. 그러다가 1949년 공주우체국으로 개칭하자마자 윤 소장이 부임했으니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만도 했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언쟁은 그때뿐이었다. 사심 없는 대화라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윤 소장은 자기가 우체국장이 되고 이학구가 차라리 형무소장이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형무소 내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인권유린이나 비행들을 과감하게 시정하는 조치들을 시도하다가도 주변의 압력이나 회유로 중단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학구의 두 번째 불만은 그의 아들에 대한 것이었다. 둘째 아들은 그의 바람대로 공주사범대학 국문학과에 재학 중이었으나, 첫째 아들은 공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농회에 취업한 이후, 여전히 공주청년회 활동을 벌이며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연맹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 등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또한 하지 말라는 야학활동도 계속하고 있었다. 이를 걱정하는 이학구의 다그침에 큰 아들은 농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영농교육을 실시한다고 둘러댔지만, 그의 주변에는 늘 피 끓는 젊은이들뿐이었다. 그들은 주로 해방 직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던 ‘공주반탁학생맹호단원’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부터 이학구는 큰아들이 좌익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변사람들의 걱정 어린 충고가 들리기 시작했다. 1948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즈음하여 열린 공주 산성공원의 군중집회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큰아들을 보았다는 제보가 들리는가 하면, 계룡면 금대리, 반포면 공암리 등지에서 발생한 산상 봉화투쟁의 주동자라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이학구 내외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을 만나야 그가 하는 일을 만류라도 하겠지만, 도통 아들은 나타나지를 안았다. 더구나 1947년 8월 말, 공주형무소 좌익수들이 간수들의 장총과 탄약을 탈취하여 인근 야산 등지로 도주, 군경과 총격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 후, 좌익계열인 ‘혁신청년회’에 대한 검거가 가속화되고 있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노심초사하며 보내던 지난 해 5월 6일 저녁,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이학구의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 왔다. 아내의 눈물 어린 직·간접적인 회유와 설득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도피생활에 지친 스스로의 결단이었으며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다는 정보를 그의 동료인 백제양복점 아들로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르면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전향자단체로 경찰에 자수를 하면 좌익전력을 무마해주고 보호, 지도해준다는 것이었다. 무지한 농민들을 회원으로 한 야학활동이나 집회, 봉화 등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이러한 활동이 과연 자신과 국가를 위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하는 회의감이 그를 집으로 오게 한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실제로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경 중앙조직을 결성한 후, 각 지방경찰에 도, 군, 면 단위 조직의 결성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2월 27일에 충남도연맹이 창립되고 이어 공주지역 보도연맹이 창립됨에 따라 이학구의 큰아들도 보도연맹원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3백여 명의 공주 사람들이 ‘30만 명의 도살명부’에 이름을 올린 셈이었다.
윤 소장은 우선, 복지지원과장을 불렀다. 교도소 내에는 비상근무체제라 전 직원이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복지지원과장이 들어서자마자 호통부터 쳐댔다. 박 과장은 어리둥절했지만 그와 3년간 호흡을 같이했던 사람이라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윤 소장은 하루 종일 고생하시는 손님들을 왜 이리 소홀하게 대접하느냐며 숙소마련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군대 야전용 침대를 2층 강당 한 구석에 밀어 놓고 사흘 동안이나 침소로 사용하고 있음을 아는 윤 소장의 일갈에 박 과장은 이내 그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그는 헌병대원들에게 대접이 소홀했다며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지금 특식을 준비 중이라는 말과 함께 급히 소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계장에게 급히 차를 몰아 화신백화점이나 여관방에 놓여 있을 최고급 침대를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식당으로 직접 달려가 최단시간에 조리사에게 최고의 특식을 준비할 것을 주문했다. 박 과장은 그가 아끼고 아꼈던 양주 두 병도 내놓을 시간이 되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빨리 철들라며 이학구가 준 선물이었다. 스승의 날에 이학구의 큰아들이 야학 학생이 준 거라며 가져온 술이었다.
윤 소장이 서류를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잠시 물러나 휴식을 취할 것을 요청하자 헌병대원들은 강당으로 돌아갔다. 윤 소장은 급히 시국대책위원회 위원장인 서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살생부 명단에서 꼭 빼야할 사람들이 있으니 빨리 교도소로 와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서 회장은 충남피난민연락사무소 회장을 역임하고 있고 해방 후, 충남도지사를 지낸 이력이 있어 전시상황일지라도 그를 무시할 사람은 없었다. 때마침 서 소장 또한 공주여자사범학교에 다니는 딸이 전화통에 매달려 가장 절친한 친구가 죽게 되었노라며 대성통곡 하는 바람에 얼이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는지 공주 군수, 읍장 등이 몇 명의 구명자 명단을 들고 다녀간 터이기도 했다. 서 회장은 우선 네 개의 봉투에 신권지폐를 두툼하게 넣고 특부대 소속 상사와 함께 지프차에 올라 제민천 뚝방으로 향했다. 서 회장은 일주일 전부터 상사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고요한 전율이 흐르는 밤이었다. 느티나무는 한 여름의 열기에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었다. 제민천의 비릿한 물 냄새도 풍겨왔다. 그에게는 익숙한 냄새였다.
윤 소장은 서 회장을 반색하며 맞이했다. 내일 살구쟁이에서 처형 할 수감자 살생부 명단이 작성되었는데 회장님께 상의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오시라고 했노라며 그는 예의를 표했다. 윤 소장은 각설하고 현 상황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내일 아침에 1급 보도연맹원과 좌익수 등 600여명이 살구쟁이에서 처형될 예정이라는 것, 이어서 7월 11일에는 의당면 청룡리, 유구면 석남리, 장기면 송원리, 탄천면 화정리 등에서 처형이 집행될 것이라는 것, 육군형무소 헌병대에서 작성한 살생부 명단에서 꼭 구명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 형 집행은 교도소 주관이 아니라 육군정보국 소속의 방첩대원들이기에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 등이었다. 서 회장은 살생부를 짚어 내려가다 몇 군데서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는 백지에 만년필로 이름을 적은 뒤 집행정지의 이유를 간단하게 적어 나갔다. 그 명단에는 중동 법원 옆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대서방 백 씨, 산성동 백제양복점 사장 이 씨, 우체국장 큰아들과 이 회장 딸의 친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학구의 큰 아들에 대한 집행정지 이유로는 그의 조부가 상해 철혈단(鐵血團)에서 항일운동을 한 애국지사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시각 왕촌 살구쟁이에서는 특무대원들의 지휘 하에 청년방위대원들이 낮에 파 놓은 가로 3m, 깊이 2m 가량의 웅덩이 여섯 곳을 지키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공주교도소는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살생부 명단에 따른 분류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최대 수용인원이 700명인 교도소에 975명의 보도연맹원과 죄수들이 수감되어 평소에도 중합지옥(衆合地獄)을 방불케 했다. 같은 시각, 반포, 계룡, 의당 등지에서는 경찰·의경·소방대원들에 의해 검속되어 학교에 감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이 포승줄에 묶여 트럭에 실리고 있었다.
공주교도소의 아침은 특무대 소속 상사의 지휘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 소장이 집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교도소로 출근했을 때, 이미 육군헌병대는 대전으로 철수 한 이후였다. 그 자리를 육군정보국 소속의 방첩대원들이 메우고 있었다. 대원들의 옷이나 모자 어디에도 부대표시나 계급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계급과 서열에 따라 분임된 임무를 기계처럼 이행해나가고 있었다. 처벌 대상자들을 살구쟁이로 실어 나르기 위해 17대의 낡은 충남 관용트럭이 교도소 정문 앞에 늘어서 있었다. 20여 명의 특무대원들은 무장한 채, 다른 교도소로의 이감을 명한다며 살생부에 적힌 명단을 한 명씩 호명해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밖에서 다시 이름과 출생지를 확인 한 뒤 경찰과 방위대원들에 의해 포승줄로 묶이기 시작했다. 처벌대상자들을 여섯 명씩 일곱 줄로 정렬하게 한 후 우선, 가로 열로 포승줄을 묶어 나갔다. 마치 꽈배기처럼 사람과 사람의 손을 교차시켜 묶은 후, 조별로 트럭에 오르게 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수그리게 하여 일체 주변의 정황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수감자들은 포승줄을 묶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는 듯했다. 트럭 바닥에 머리를 박은 죄수들의 입에서 짐승의 울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트럭의 곁에는 실탄을 장전한 군인, 간수, 청년방위대원, 서북청년단원들이 겁먹은 눈알을 굴리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특무대 상사의 출발명령이 떨어지자 40명을 실은 관용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럭은 제민천 다리를 건너 중동 사거리를 거쳐 공산성을 우측으로 끼고 돌며 서서히 움직였다. 골목에서 뛰어 나온 똥개들이 사납게 짖어 대고, 여자들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민 아이들의 목을 끌어내리기에 바빴다. 산성동 끝자락에서 금강을 만난 트럭은 우회전하여 반포면 공암리 방향으로 향했다. 왕촌리 입구를 지나친 트럭이 산모퉁이에 이르자 준비하고 있던 경찰과 청년방위대원들이 수감자들을 인계했다. 금강 둑과 트럭의 전후방에도 경계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트럭에 실린 좌익수와 보도연맹원들은 꽈배기처럼 엮어 묶은 손과 무릎을 꿇은 다리의 통증도 심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로 실신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트럭의 바닥은 이미 그들의 배설물로 흥건하게 고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신음하나 밖으로 흘려보낼 수 없었다. 고개를 들거나 신음이라도 흘릴 시에는 여지없이 군경의 소총 개머리판이 그들의 몸을 짓이겨댔다.
작은 살구쟁이 고구마 밭에서 일하던 중동골 조 씨 부인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동네에서 부지런하기로 소문 난 그는 전쟁 중에도 아침 일찍 작은살구쟁이 밭에 나가 풀을 뽑고 있었다. 토질이 황토라 이곳에서 수확하는 고구마는 밤같이 고소하고 맛이 있어 겨울철 양식으로는 그만이었다. 그가 동리 뒷산을 넘어 밭으로 접어들 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대 여섯 개의 붉은 구덩이가 있음에 그는 의아해 했지만 “전쟁에 대비해 참호를 파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이미 공주 반포 간 국도는 미군 통제 하에 있어 민간인의 모습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조 씨가 임신한 배를 쓰다듬으며 허리를 펼 즈음 도로로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길로 접어드는 것이 보였다. 머리를 삭발하고 수의를 입은 죄수들이 포승줄에 줄줄이 엮여 있고, 사방에서 경비원들이 이들을 경계하며 M1과 카빈으로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 구덩이는 전날 청년방위대가 삽과 곡괭이로 파놓은 것이었다. 조 씨는 처음에 이들이 진지구축을 위해 동원된 인력으로 알았지만 그들이 다가올수록 신음과 울음이 뒤섞여 있음에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단독무장을 한 군경과 간수들이 죄수들을 구덩이 속에 넣은 직후, 조 씨 부인은 섬뜩함을 느꼈다. 어느 군인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이내 밭고랑에 몸을 낮췄으나 고구마 줄기는 엄폐물이 되지를 못했다. “머리를 땅에 처박지 않으면 죽인다”는 고함이 들려왔다. 조 씨 부인은 본능적으로 고구마 줄기 사이로 온 몸을 밀어 넣었다. 이제 겨우 뿌리를 잡아 하늘로 솟구쳐 있는 검푸른 줄기들이 야속하기만 했다. 잠시 후, 콩 볶는 소리가 살구쟁이골을 뒤흔들었다. 임신 3개월째 된 뱃속의 핏덩이가 움찔하며 움직였다. 시계는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총성에 묻혀 짧은 쇳소리를 냈다. 그리고 얼마 후, 확인사살을 하는 듯 단발사격이 이어졌다. 시체를 구덩이에 밀어 넣으라는 명령과 함께 어지러운 발소리가 골짜기에 울렸다. 온 몸의 감각을 모두 열어놓고 고구마 줄기에 목숨을 기대고 있는 조 씨 부인은 배가 아파오자 자세를 바꾸려고 힐끔 현장을 훔쳤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트럭 엔진 소리가 들린 지 꽤 오래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밭고랑에서 일어나 아랫배를 몇 번 만진 후 산등성이를 타고 조심스럽게 올랐다. 그가 고갯마루를 넘어 산 아래를 내려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때 그는 몸을 움찔했다. 국도 위에는 여전이 무장한 군경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또한, 두 번째 군용차량이 먼지를 날리며 살구쟁이골로 접어들고 있었다. 혼 줄을 놓은 조 씨 부인이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며 중동골로 접어들었지만 망가진 혼은 시름시름 거리다가 이듬 해 2월 위패로 옮겨졌다.
죄수들은 한 시간 간격으로 하루 종일 운송되었다. 죄수 중에는 오빠와 아버지와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 구명을 거부한 서 회장 딸의 친구도 있었으며, 여순사건 관련자인 배순자, 현장에서 고향마을을 바라보며 울음을 토해내던 공암리 출신의 임봉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석장리 주민들은 아침부터 들려오는 총성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금강 너머 왕촌리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벌써 북한군과 접전이 붙었나 하는 불안감으로 마음은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금강은 여전히 황톳물을 토해내며 흐르고 있었다. 몇 척의 나룻배와 다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자족감으로 어둑한 시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우는 듯 간간히 이어지는 물소리가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군경을 실은 마지막 관용차가 살구쟁이를 떠나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다.
▣ 금강전투
살구쟁이골 처형사건 직후, 좌익 이력을 가진 사람들은 서둘러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다. 의당, 유구, 장기, 탄천 등지에서 진행된 보도연맹원 집단처형은 시골 민심을 흉흉하게 하며 벌레 먹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더구나 스미스 부대에 이어 미 24사단 34연대 1대대는 평택에서, 제 3대대는 안성에서 7월 6일부터 8일에 걸쳐 국도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전개하고 있었으나 적의 전차에 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미 24사단의 잔여부대가 7월 4일에 부산에 도착했다고는 하나 추가 파병이 결정된 25사단은 7월 10일과 15일 사이에 부산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전투능력을 발휘할 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었다. 스미스 부대가 소속된 미 제 24사단은 오산에서 철수한 이후 천안전투에 임했으나 금강방어선으로 밀려 조치원 정면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34연대조차도 북한군 4사단에 밀려 공주로 향하고 있었다. 더욱이 청주를 점령한 북한군 2사단까지 협공을 도모하고 있어 미 34연대는 사면초가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딘 소장은 34연대를 공주에, 19연대를 대평리에, 21연대를 옥천에 예비 병력으로 배치하고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살구쟁이에서 처형이 진행되는 동안 유구에서는 오후 4시부터 북한군과 군경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이뤄지고 있었다. 7월 9일 천안을 거쳐 유구지서 관내로 진입한 적군 약 70여명이 유구지서를 점거하여 공주경찰서에서 출동한 병력과 총격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해 강화도와 인천, 그리고 서해안을 타고 남하한 피난민 중 상당수는 마곡사 인근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마곡사는 산세가 온전하여 예로부터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로 거론되어 온 곳이기도 했다. 백범 김구 선생과 매월당 김시습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피난민들은 유구천을 따라 이어지는 국도를 이용하여 마곡사 인근으로 숨어들었지만 자지러지는 포성과 총성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공주의 34연대와 대평리의 21연대는 북한군 T-34 전차를 격파할 유용한 무기가 없어 금강의 자연지형을 이용한 방어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공주와 대전의 주요 진입로인 금강에는 세 개의 교량과 한 개의 철교가 있었다. 동쪽으로부터 신탄진 북쪽 맥포리의 맥포교와 경부선 철교, 대평리 1번 국도의 금성교, 공주 북쪽 신관리 23번 국도의 금강교였다. 그 중 대전으로 진입하기 위한 신탄진 철교와 대평리의 금성교, 공주를 거쳐 논산, 전주로 남하하기 위한 금강교를 기점으로 한 피아간의 공방은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일전이기도 했다.
윤 소장 일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학구는 큰 아들과 함께 교동의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 회장과 윤 소장 등 공주 유지의 가족을 실어 나를 군용트럭도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는 아내와 두 아들만을 동승하게 했다. 굳이 전황이 잘못되어 공주가 점령된다 하더라도 우체국장이라는 직위가 이념재판까지 받을 위치는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무엇보다도 대대손손 이어 온 삶터를 지키고 싶었고, 조부의 상해 철혈단(鐵血團) 항일운동의 이력은 북한체제에서도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살구쟁이에서 건져 올린 아들의 목숨 값을 자신이 이번 전쟁에 일조함으로써 또 다른 면죄부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7월 12일 아침, 윤 소장은 주둔군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교동 주민을 인솔하고 곰나루로 나갔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와 습기 찬 바람이 뒤엉켜 사람들의 기분을 착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갈 데 없는 노인과 장애자, 그리고 윤 소장과 같은 고집불통의 사내 몇몇이 곰나루로 넘어가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면 아마도 기막힌 기록물이 되었을 것이었다. 윤 소장처럼 참호를 파기 위해 길을 나선 사람들은 장깃대나루, 공산성, 곰나루 진지로 나뉘어 트럭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곰나루 진지는 공주 서쪽의 검상리 나루터와 해발 293m의 연미산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하고 있었다. 윤 소장은 백운산, 태봉산, 방아달산, 명덕산을 배산으로 한 방어진지가 적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참호 구축에 동원된 사람들 또한 한국군도 아닌 미 제 34연대가 구축하고 있는 금강방어선이 쉽게 뚫릴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거들었다. 윤 소장 일행이 비를 맞으며 참호를 구축하는 동안 상공을 배회하던 미군 정찰기가 갑자기 연안을 따라 마을 인근에 설치된 나루터에 포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이미 나루터 인근 주민들에게는 소개령이 내려져 있었으며 중장리, 검상리, 태봉리, 구왕리, 내흥리, 금남면 반곡리에 이르기까지 참호작업에 참여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피신하여 산속에서 귓구멍만 열어놓고 있었다. 미 정찰기에 의해 청벽나루, 그 아래에 위치한 마암나루, 전막에서 공주로의 주요 길목인 장깃대나루, 그리고 윤 소장이 구축하고 있는 진지 정면의 곰나루가 불타올랐다. 또한 이인 탄천의 진입로에 위치한 대학리 나루터, 우성면의 오동 나루터, 그리고 그 반대편에 위치한 검사리 나루터, 청양의 왕진, 독정리, 반여울 나루터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없애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나루터 및 인근 마을의 모든 도하장비는 폭파되거나 소각되었다.
도장골 금광으로 숨어 든 이 행수와 일가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들리는 포성에 전전긍긍해야 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개, 닭, 소 같은 동물들도 몸을 숨기며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장깃대나루와 곰나루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는 윤 소장의 마음은 두려움을 넘어 착잡하기만 했다. 장기, 우성, 청양, 정산, 마곡, 유구 등 수 많은 장돌뱅이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나루터가 폭격으로 불타오를 때, 자신의 양 다리와 팔이 잘려나가는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곰나루에 얽힌 전설도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대대손손 쉬어가던 장깃대 나루 옆의 주막집도 잿더미가 되고 있었다. 더욱이 64년간 백제의 부흥을 도모했던 공주산성과 그 아래에 놓인 철교의 운명 또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형국이었다. 윤 소장의 마음은 이미 왕촌에 닿아 있었다. 정찰기가 나루터를 소각하고 주민들에게까지 소개령이 내려진 것으로 보아 피아간의 접전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참호를 파고 있는 교동 주민들 또한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면 어디로 피신 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윤 소장이 왕촌으로 피난처를 정한 것은 우선, 우체국 직원 중에 중학교 후배인 김 계장의 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 계장은 대구로 가족과 함께 피난길을 떠나면서 정말로 공주에 남을 것이라면 자신의 집에라도 와 있을 것을 간곡히 권유하고 떠난 터이었다. 왕촌의 상왕리에는 관절염으로 다리를 못 쓰는 김 계장의 구순 노모가 토구(吐具)를 껴안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있을 것이었다. 상왕리는 해발 326m의 명덕산 서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골이 크고 깊은 마을이었다. 여름에 우체국 직원들이 김 계장의 집에 삼겹살을 들고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김 계장이 직원들에게 집 뒤에 있는 저장용 토굴을 자랑한 적이 있었음을 상기하며, 윤 소장은 한 숨을 돌렸다. 여전히 빗줄기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깊어지는 참호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미 24사단장 윌리암 에프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예하의 모든 병력을 금강 방어선에 집결시키고 있었다. 이에 공주에는 미 34연대가,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 일대에는 미 19연대가 배치되어 일전을 불사하고 있었다. 문제는 방어해야 할 영역이 너무 넓다는 데에 있었다. 금강 서안의 이인면으로부터 금남면의 금남교 까지는 직선거리로 30㎞, 강의 굴곡을 감안하면 48㎞ 구간이었다. 또한, 북한군은 정공법이 아닌 야음을 이용하여 포격 개시 후 도하작전을 전개할 것이었다.
청벽나루가 내려다보이는 봉곡리 진지에 11포병대대 드레슬러 소령(Willam E. Dressler)이 지휘하는 155mm 자주포 2문과 함께 연대지휘소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중령 아이리스(Harold B. Ayres)가 지휘하는 21연대 1대대를 공주 서남쪽 10km 상의 이인리에 예비대대로 배치했다. 공주 서남쪽 5.5km 지점의 검상리에는 소령 랜트론(Newton W.Lantron)이 이끄는 사단 수색중대를 배치하고, 공주 서쪽 2km 지점인 한산리에서 검상리 서남쪽 7km 지점인 대학리에 이르는 방어진지에 수색대를 위치하게 했다. 그리고 삼교리를 원점으로 좌로부터 K, I, L 중대를 최전방에 배치했다. 그리고 그 후방의 태봉리 148m 고지에 도슨(Rovert H. Dowson) 중령이 이끄는 63포병대대 지휘소를 두고 좌로부터 A중대, 본부중대, B중대의 진지를 구축했다. 윤 소장과 교동 주민들이 구축한 곰나루 진지에는 J중대가 투입되고 장깃나루 앞의 공산성 진지에는 K중대, 청벽나루 진지에는 L중대가 투입되어 강안 6km의 방어에 나섰다. 금남면 일대에서 방어에 나선 19연대는 강 건너 장군산 우측 용호리에 본부를 구축한 소장 이영호가 이끄는 북 제 3사단을 막아내야 했다. 이에 연대장 대령 가이 멜로이 주니어(Guy S. Meloy. Jr)는 155mm 곡사포로 무장한 11포병대를 삼교리 동쪽 4.5km 지점인 봉곡리에, 그리고 105mm 곡사포를 지닌 13포병대대를 용잠리에, 52포병대대를 두만리에 배치시켰다. 그리고 비학산 아래 발산리에는 4대대 본부를 설치하고 괴화산 아래 대평리 지역 중앙에 A중대, 그리고 좌측에 B중대, 우측에 C중대를 위치시킴으로써 금남교 강안에 대한 방어진지 구축을 마무리 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압박을 못 견딘 미군은 공병 D중대에게 금강교 폭파명령을 하달했다. 12일 23시경이었다. 마치 원자폭탄이 터지 듯 가교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지축이 흔들리며 산성동 성안마을 사람들의 창문이 날아가고 벽에 걸어 놓은 옷들이 출렁거렸다. 다음 날 새벽 4시에 또 한 번의 굉음이 성곽을 흔들었다. 반파된 금강철교 밑에서 솟아오른 폭음 때문이었다.
윤 소장은 왕촌에서 금강교가 완파되는 소음을 김 계장의 노모와 함께 고스란히 들었다. 어둑한 안방에서였다. 윤 소장은 교각이 반파되었을 때 공주 시가지에 접전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윤 소장은 노인의 성화에 못 이겨 이불을 들고 토굴로 이동했다. 자정 무렵부터 이어지는 포성도 포성이거니와 노파의 겁먹은 신음으로 윤 소장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공주 방면으로 공격해 오는 인민군 3사단의 포격이 본격화 되고 있었다. 움푹 파인 동공을 움직이는 노파의 얼굴은 더욱 수척해져 갔다. 방벽을 흔들 정도로 강력했던 포성이 새벽녘에는 아예 집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요란해졌다. 귀청을 찢는 듯한 포성이 들리는 가운데 전막 등 금강 일원에 화염이 번져 오르고 있었다. 5일장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신작로를 걸어 온 장꾼들이 좋아하던 장깃대나루 밑의 장떡집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공주 읍민들은 물론, 완장을 차고 시내 곳곳을 누비던 청년방위대원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군화소리와 군용트럭 소리에 놀란 주인 잃은 개들만이 빈 공간을 찾아 숨어들고 있었다.
윤 소장이 공포에 질린 노인의 등 위에 이불을 감싸주고 한참이 흐른 뒤에야 포성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토굴이라 공기가 냉하였기에 망정이지 안방이었다면 노파가 질식했을 지도 모를 만큼 밖은 후텁지근했다.
토굴 안에는 김 계장이 노모의 의식주 마련을 위해 준비한 잡다한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윤 소장은 그의 효심에 감탄했다. 지열과 습기 방지를 위해 땅 위에 볏짚을 깔고 비닐을 덮은 후, 그 위에 멍석을 두 개나 얻어 놓았다.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멍석 위에 군용 모포를 깔고, 다시 두 겹의 비닐을 덮어 노모를 위한 효성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간장과 고추장, 젓갈 단지는 물론, 밤에 이용할 수 있는 손전등과 초, 등잔, 타구, 요강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7월 14일 새벽, 이권무 소장이 지휘하는 정안 지역의 북한군 4사단은 야음을 틈타 금강 하류의 검상리 나루터로 이동하고 있었다. 강 북안에서는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와 전차도 함께 전진하고 있었다. 그 시각, 트리그브 리(Trygve Lie) UN사무총장은 회원국들에게 한국으로의 지상군 파견 요청을 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 함대의 서해안 작전 가담에 고무된 이승만 대통령은 38도선으로 북진하여 한국을 통일한다는 자신감을 이야기하고자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고 무명의 사체들이 간간히 강 위로 떠오르며 영혼의 안식처를 찾고 있었다. 번개를 동반한 이틀간의 폭우로 금강은 물이 많이 불어났으며 황토색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북한군 4사단은 금강도하 여명작전에 따라, 인민군 105전차사단 소속 T-34 전차 50여대를 앞세운 보병이 이인면 일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군 정찰기는 어디로 갔는지 상공에는 YAK기가 날고 있었다. 뿌우연 안개로 덮인 아군의 3대대 방어진지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봉곡리의 155mm 곡사포를 중심으로 63포병대대, 11포병대원들은 방열을 끝내고 좌표만 하달되면 즉각 쏘아 올릴 태세에 들어갔다. 이윽고 312.6m의 월성산 위로 햇살이 번져 올랐다. 잠시 환해지는가 싶더니 햇살은 이네 칙칙한 구름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이때를 틈타 북한군은 두 척의 작은 배로 검상리를 도하하고 있었다. 21연대 1대대와 검상리의 사단수색중대 사이를 교묘히 공략하려는 의중이었다. 이는 금강도하를 한 후 우회하여 63포병대대와 전방에 전진 배치된 중대진지를 공격함으로써 전력을 무력화 하려는 전술이었다. 이윽고 검상리로 도하하는 두 척의 배가 아군의 정찰기에 포착되었다. 이 정보는 34연대 지휘소를 통해 각 진지로 전달되었다. 특히 63포병대대 바터(Charles T. Barter) 소령과 검상리, 삼교리, 태봉리 일대의 진지는 숨 가쁘게 전투에 들어갔다. 서덜랜드 대위와 스타엘스키 대위는 적의 도하지점에 좌표를 설정하고 포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적이 도하를 시작했음에도 대대의 명령은 하달되지 않았다. 바터 소령은 보다 유효한 포격목표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두 척의 배에 값비싼 포탄을 쏟아 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편, 봉곡리에 지휘부를 둔 11포병대대 드레슬러(Willam E. Dressler) 소령은 달랐다. 삼교리에 위치한 A포대와 B포대원들에게 “차례 포!” 명령을 하달하고 정찰기에서 보내 온 좌표를 정확하게 짚어 발포명령을 내렸다. A포대에는 천안 전투부터 동행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로렌스 제임스 윌리엄 볼트(James William Bolt)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는 자주포 옆에 개인 참호를 구축하고 두 개의 포탄박스를 방패삼아 금강변을 향해 카빈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제 그는 발포 준비명령에 따라 방열된 자주포에 바짝 붙어 있었다. 포대원들은 7월 9일 오전부터 포열을 완료하고 진지를 구축한 후 내내 이곳에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고 식수가 고갈될 즈음 천둥번개를 동반하며 이틀 동안 내린 폭우는 그들에게 샤워를 할 수 있는 고마운 선물이었다. 더욱이 강 수위마저 불어났으니 자연방어 진지가 구축된 셈이었다. 그러나 나이프 중위와 베어풋 선임하사를 비롯한 모든 장병들은 적의 동향을 보았을 때, 그들이 14일 경에 공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13일 오전 10시, 트럭을 통해 C-레이션, 트레일러 물탱크, 105밀리 포탄, 주유 트럭 등을 보급 받아 민가에 적재하고 상황에 따라 빠르게 이동할 준비까지 갖춘 상태였다. 그러는 동안 대대장도 윌리엄 드레슬러 소령으로 교체되었다. 대대의 전 포문이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11포병대대의 드레슬러 대령은 아군 정찰기가 보내온 포격좌표에 따라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155mm곡사포 2문에서 포가 발사되었다. 포가 발사되자 A포대와 B포대는 물론 제 일선에 배치된 J와 L중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금강으로 모아졌다. 포탄은 목표물을 훨씬 벗어나 붉은 금강물만 허공으로 퍼 올렸다. 좌표설정을 다시 해야 했다. 이동하는 목선을 한 방에 명중시킬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불발’이라는 음성은 포대원들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좌표가 다시 설정되어야 했지만 무전기는 감감무소식이었다. 3대대와는 이미 적의 포격으로 모든 송신경로가 차단되어 있었다. 적 YAK기에 쫓겨 좌표를 설정해 줄 정찰기조차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 틈을 아용하여 북한군은 본격적인 도하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날 어천리, 죽당리, 오동리, 옥성리, 평목리 일대에 걸쳐 적의 도하를 방어하기 위해 퍼부은 포격을 비웃기라도 하듯 적은 소형보트와 바지선을 구해와 도하를 시작했다. YAK기의 조명탄 투하와 함께 무차별적인 포사격도 동반되었다. 각종 포와 105전차사단의 지원화력을 동원한 적군은 19연대 지휘소와 1선 아군의 진지일대에 미친 듯이 화력을 쏟아 붓고 있었다.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배터리 충전이 안 되는 무전기로 통신이 두절되고 정찰기마저 자취를 감춘 금강을 적은 무혈입성 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아군의 후방사격지원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드레슬러 대령의 포사격과 더불어 19연대는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그들의 도하를 다시 저지했다. 연대 지휘소는 적재된 조명탄을 다 쏘아 올리도록 명령했다. 제 13, 제 52, 제 11의 3개 포병대대 30여문의 곡사포와 각종 중·소화기도 도강하는 적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개시했다. 수영 혹은 뗏목으로 북한군의 일부가 강안에 접안했다고는 하나 성공적인 방어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날이 점점 밝아옴에 따라 강안에 접안하는 적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1개 대대병력이 강안에 상륙하자 적은 삼교리의 포병진지를 급습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박격포 공격으로 본부진지를 파괴하고 지휘체제를 끊어버리면 포대는 물론 제 1선의 보병진지까지도 쉽사리 공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들의 전술은 유효했다. T-34 전차가 미군 참호를 향해 집중 포화를 퍼붓자 미 보병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으며, 오전 9시경에 북한군은 500여명 가까이 도하에 성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들은 A포대 후방진지 공략에 들어갔다. 전방에서 도하작전을 벌이고 후방에서 압박하는 적의 전술에 전방에 배치된 K, I, L중대는 고전하고 있었다. 포대지휘부에서 이들 진지가 위험에 직면했음을 안 것은 오전 11시 30분경이었다. 무전이 두절된 상황에서 적에 쫒긴 34연대 L중대 소속의 하사관이 포대본부를 직접 찾아와 북한군의 상륙과 전방진지의 상황을 알린 것이다.
윌리엄 볼트는 순간적으로 카빈총을 움켜쥐며 비상식량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가까운 위치에 식당용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다. 그는 트럭으로 달려가 과일과 크래커 등이 들어 있는 깡통들을 마구 집어 들고 포좌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본 제임스 토마스가 그에게 다가왔다. 토마스는 대대 통신병이었다. 그는 본부포대와의 통신선을 깔아야 한다며 탄창을 바꿀 것을 제안했다. 토마스는 15발이 남은 탄창이 불안 해 30발이 장전된 볼트의 탄창을 원했던 것이다. 볼트는 주저 없이 탄창을 바꿔 주었다. 그리고 복숭아 통조림 뚜껑을 따서 토마스에게 권했지만 그는 손을 가로 젓고는 방철통을 메고 본부를 향해 뛰어갔다. 그것이 볼트가 본 토마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종전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본부로 이동 중 머리에 관통상을 입어 사망하고 말았다.
파인애플 통조림을 입에 털어 넣자 달콤한 맛이 볼트의 혀끝을 달궜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미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난데없는 총소리와 함께 볼트가 들고 있던 깡통이 산산이 부서지며 과일즙이 윌리엄 볼트의 얼굴을 덮쳤다. 저격수였다. 윌리엄 볼트가 땅에 뒹구는 동안 아군들이 북한군 저격수를 향해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위치를 노출한 저격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구릉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잠시 후 우측능선에서 한국군이 나타났다. 전방 초소에 배치되었던 K, I, L 중대가 북한군 4사단 16연대의 도하병력에 밀려 포대진지까지 밀리고 있었다. 윌리엄 볼트는 절박한 상황을 감지하고 소총의 자물쇠를 풀었다. 안소니 대위의 시야에 북한군이 포착되자 그는 능선에 M1919A7 브라우닝 30구경 기관총을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 윌리엄 볼트는 터커 사수와 함께 엄폐 가능한 지점으로 이동했다. 터커는 푸른 눈을 가진 뉴햄프셔 출신으로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길이 96.4cm, 분당 400∼600발이 발사되는 14kg의 기관총도 터커의 큰 덩치 때문인지 장난감처럼 보였다. 그의 앞에서 달리는 윌리엄 볼트의 양손에는 250발들이 급탄용 탄통이 들려 있었다. 급히 서두른 때문인지 볼트는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지면서 탄통을 놓쳤다. 육중하게 땅에 박히는 탄통 소리가 들렸다. 볼트가 탄통을 주우려고 몸을 숙인 순간 신음을 내며 터커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허망한 순간이었다. 기관총사수를 잃은 볼트는 안소니 대위의 복귀명령에 따라 다시 포좌로 돌아왔다. 그는 왼쪽경계를 맡았다. 포대는 전방에 놓여 있는 논을 향해 포사격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저격수들이 근접하여 사격을 가했고 박격포탄마저 진지를 때려 더 이상 방어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방 논 위에 출현한 적을 향해 미친 듯이 사격을 하던 볼트의 탄창은 금방 비어 버렸다. 그는 듄 선임하사가 준 두 발의 수류탄을 전방을 향해 투척했다. 적과의 거리가 상당했음에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수류탄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포진지로 달려갔다. 공이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후퇴 시 공이를 제거하는 것은 자기 포에 맞아 죽지 않기 위한 포병의 기본 행동이었다. 포반장 듄 선임하사는 다른 대원들이 허둥대는 동안 5문의 105mm포 중 3문의 공이를 제거했다. 북한군은 어느새 산 위로 달라붙고, 좌측에서는 4백여 명의 적군이 A포대를 점령한 후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적 4사단 17연대 병력이었다. 대원들은 후방 148고지의 대대지휘소를 향해 황급히 내달렸다. 박격포탄을 맞고 안 맞고는 운명에 맡길 일이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223m 떨어진 서더랜드(Lundel M. Southerland) 대위가 지휘하는 A포대는 갑자기 출현한 100여 명의 적군을 포화기 사격으로 제압한 뒤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출현한 적군에 그는 적잖히 당황하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서더랜드 대위는 105mm 곡사포 5문을 점검하고 진지를 재편성 했다. 본부포대가 적의 박격포 공격으로 교환대가 파괴되고 무전차량이 파괴된 상황에서 곡사포는 그야말로 전시물에 불과했다. 믿을 것은 적이 시야에 포착되는 대로 사격할 수 있는 기관총과 소총뿐이었다. 적이 공격을 시작한 지 채 한 시간이 못되어 본부포대는 박살나고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또 다시 삼교리 전방 500m 지점 둑 위로 적군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서더랜드 대위가 사격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박격포탄이 마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은 이미 소개령에 의해 마을을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포대원들은 엄폐물에 머리를 쑤셔 넣거나 미친 듯이 전방을 행해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서더랜드 대위 옆에서 자동화기를 쏘아대던 레이(Lawrence A Ray) 하사가 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서더랜드 대위가 전령과 함께 포사격을 피해 엄폐물로 숨어드는 순간 포탄이 정확하게 그의 위치에 떨어졌다. 그의 몸이 참호에 고스란히 갇히는 순간이었다.
레이 하사의 어깨는 파편이 스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다시 M1919A7 브라우닝 30구경 기관총을 집어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적은 이미 100m 전방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600발의 탄피가 비 오듯이 부사수인 에릭 상병 옆으로 떨어졌다. 에릭 상병은 부산하게 탄통을 열고 재장전을 했다. 또 다시 사격을 가하자 일선에서 달려오던 적군들이 주춤하며 논바닥에 엎드렸다. 머리를 들고 다시 달려오던 적병 서너 명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논 위로 나동그라졌다. 탄통 하나가 금방 비워졌다. 진지에 아군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음을 인지한 에릭 상병이 레이 하사의 어깨를 치며 엄지손가락으로 후방을 가리켰다. 순간, 총알이 레이 하사의 왼쪽 상박근을 뚫고 지나갔다. 레이 하사가 입술을 깨물며 옆 참호에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고 있는 윌슨 병장과 일행에게 후퇴할 것을 주문했다. 레이 하사가 탄통 여섯 개를 다 비우는 동안 A 포대원들은 곡사포를 버리고 후퇴하고 있었다. 기관총에 제압당한 적 보병들은 좌측진지로 우회하여 진격하고 있었다. 이에 레이 하사는 남측으로 방향을 잡고 탄통 하나를 더 비웠다. 그리고는 에릭 상병을 대동하고 논산을 향하여 내달렸다. 그의 뒤에는 본부포대원과 A포대원 15명이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레이 하사보다 먼저 진지를 떠난 63포병 대원들은 대대지휘소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고 있었다. 또한 포대 전방을 방어했던 K, I ,L 보병중대원들은 B포대 진지까지 밀리며 고립무원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제 1선의 방어진지보다 후방의 포대가 쑥대밭이 되면서 보병들은 화력과 통신이 두절되어 탈출로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A포대까지 점령한 북한군은 우회하면서 B포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전 병력이 몰살 될 상황이었다. 이때, 유구전투에서 공주로 복귀하던 기병중대의 후방지원은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다. 가까스로 기병대의 도움으로 퇴로를 연 병사들은 논산 혹은 대평리, 공주 방면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불과 1시간 30여분의 접전에 포 10문과 탄약을 적재한 차량 70대가 파괴되고 11명의 장교와 123명의 사병이 죽거나 실종되는 어이없는 결과를 낳았다.
볼트는 포진지를 떠나 이인면에 위치한 태봉산, 구절산을 거쳐 기산리 원동마을의 미 21연대 도로차단점 진지에 이르렀다. 오후 6시경이었다. 도로 건너편에는 계룡산 아래 갑사가 위치하고 있었다. 여전히 삼교리 마을과 포병진지에서는 총성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아직 아군에 합류하지 못한 병사들이 퇴로를 개척하느라 악전고투하고 있을 것이었다. 볼트는 병과가 포병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한 숨을 돌렸다.
실탄 30발씩을 재 수령한 63포대원들은 보병과 공조하여 경계근무에 들어갔다. 언제, 어디서 또 적군이 나타나 그의 심장을 박살낼지 모를 일이었다. A포대원들에 비해 B포대원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총과 탄피를 내던지고 철모만 갖고 있는 병사가 대부분이었다.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것을 피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레이 하사를 비롯한 부상자들은 응급처치를 받고 트럭에 실려 논산 방면으로 일찍 출발했다. 사선에서 벗어나는 부상병이 오히려 부러웠다. 볼트는 천안전투에서 밀리고, 이제는 금강방어선 마저도 무너졌으니 이 전쟁이 언제 끝나나 싶었다.
볼트는 고향인 사우스캐롤라이나 로렌스에 있는 가족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목화밭에 나가 여전히 일을 할 것이고, 집에서는 막내 여동생이 어머니의 곁을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군 입대를 강하게 만류했었다. 볼트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아 그와 함께 생활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볼트는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왔다. 어머니는 볼트가 미 보병 24사단 소속으로 일본 큐슈섬에서 105mm포 장전수로 건강하게 있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고 그가 입대했음을 알았다. 아버지와 다소의 언쟁이 있었으나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아들 자랑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전에 투입되기 직전, 볼트가 오사카에서 받은 어머니의 편지는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남북전쟁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이미 경험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로렌스에 있는 가족의 안녕을 위해 기도했다.
볼트는 밤새 한 잠도 잠을 자지 못했다. 새벽이 되자 도로차단점으로 105mm포 4문이 지나갔고, 이어서 트럭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볼트는 듄 선임하사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트럭에 몸을 실었다. 트럭은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논산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우금티 고개를 넘은 북한군은 태봉리에서 경천이 아닌 이인 방향으로 길을 잘못 접어든 미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이 남긴 먼지의 뒤 끝, 그곳에는 적군이 만드는 죽음의 덫이 모양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 허물어지는 대평리
금강의 남쪽에 위치했다 하여 붙여진 금남면은 강을 경계로 큰 들이 전개되어 있다. 그러기에 산을 넘어 도하작전을 전개해야 하는 장깃대나루나 곰나루, 오동나루에 비해 아군의 방어진지로 요새가 될 수 있었다. 교량들이 폭파된 상황에서 500m 가량 펼쳐진 남면평야를 지나 금강을 도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금강을 사이에 두고 무명고지 아래에는 절벽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한창 자란 모가 심겨 있는 논들이 2백여 미터 전개되어 있어 낮에는 작전을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13일 낮에 21연대 스테픈스 대령으로부터 진지를 인수한 24사단 19연대장 멜로이(Guy S. Meloy. Jr) 대령은 공주 일원이 적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더구나 미 24사단 34연대가 천안에서 패하고, 7월 11일, 21연대 3대대가 천안에서 조치원으로 넘어오는 개미고개 터널에서 거의 몰살된 상황이었다. 개미고개에서 전체 병력 667명 중 505명이 전사하고 12명이 실종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7월 12일, 조치원 북쪽에 홀로 남았던 1대대도 적의 공격으로 쫒기기에 바빴다.
멜로이 대령은 일단 적의 공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라 생각했다. 금강 방어선이 뚫린 이후의 일은 워커사령관이나 딘 소장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금남교 건너 용호리에는 소장 류경주가 이끄는 105전차사단의 지원 아래, 소장 이용호가 이끄는 북한군 제3사단 병력이 원수산과 진열산을 기점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국도 1호선을 따라 남하하고 있는 그들은 금남교, 신탄진교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대전으로의 진입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권무가 이끄는 제 4사단이 공주에서 미 34연대를 공략하고 도하작전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용호는 조급해지고 있었다. 3사단이 4사단의 전과에 밀리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거만한 이권무 소장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들을 방어하는 미 19연대의 지휘소는 금남교가 좌측면에 내려다보이는 비학산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도 163m의 비학산은 산세가 학이 나는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비학산에서 바라본 대평리 벌판은 뿌리를 내린 벼들이 무성하게 자라 잔디밭처럼 펼쳐져 있었다.
연대 지휘소 전방에는 제 1대대 윈스테드(Otho T. Winstead) 중령의 지휘 아래 대평리, 용포리에 A중대, 좌측 성덕리에 B중대, 우측 신촌리에 C중대를 위치시켰다. 그리고 34연대를 공략한 적 4사단이 청벽을 도하하여 진날산과 청벽산 방향으로 우회 공격할 것을 예상하여 제 2대대장 맥그레일(Thomas M. Mcgrail) 중령의 지휘 아래 예비병력이었던 G중대로 하여금 좌측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했다. 이제 예비병력이라고는 도암리의 F중대뿐이었다. 대박리와 신탄진에 이르는 강안에는 E중대가 매방산과 불무산을 거점기지로 삼고 참호를 구축했다. 연대 지휘소 후방에는 수리산을 거점으로 52포병대대장 중령 밀러 페리(Miller O. Perry)가 105미리 포를 방열하고 있었다. 또한 용담리에 13포병 대대장 중령 찰스 스트랜튼(Charles W. Stratton)이, 그 좌측 봉암리에 11포병대대의 155미리 곡사포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대전권 사수를 위해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이었다.
멜로이 대령은 적이 주간에는 도하작전을 펼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적이 T-34 전차를 앞세우고 있다고는 하나 아군에는 B-26과 F-80 폭격기가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더욱이 앞에는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 것 같은 붉은 금강이 가로놓여 있었다.
멜로이 대령은 각 대대에 야간경계를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지원야포와 박격포로 적이 점거중인 강북의 마을들을 포격케 하여 그들의 병력집결을 방해토록 했다. 공중지원과 함께 실시된 이 포격은 산넘어골, 가재골, 산양골 일대를 초토화 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에 남하를 멈출 적이 아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강 건너 나성리로 적 전차 10여대가 진입하기 시작했다. 전차 중 3대가 빠른 속도로 강안으로 달려오며 B중대 3소대장 찰스 얼리(Charles C. Early)의 진지에 포격을 가했다. 다행히 좌표설정이 잘 못된 적의 포탄은 진지 위로 날아가 논 위로 떨어졌다. 그런데 뒤이어 적의 야포가 전차와 가세하여 포격을 시작함으로써 한동안 피아간의 포격전이 이어졌다. 적군은 SU 76mm 자주포, 85mm 고사포, 122mm 야포, 120mm 박격포, 45mm 대전차포 등 모든 화기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괴화산의 미군진지는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참호 이곳저곳에서 비명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오히려 강안 뚝방에 참호를 구축하고 있는 B, A, C 중대원들은 피해가 적었다. 강둑을 적의 포가 정조준하기도 어려웠거니와 참호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미군을 공략하기도 쉽지 않았다.
1대대의 윈스티드 중령은 뚝방 참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후방 지점에서 지프차를 엄폐물로 삼아 전방을 관측하고 있었다. 적 전차를 발견한 윈스티드 중령은 급히 연대에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그러자 11포병, 13포병, 52포병대의 포신에서 일제히 포탄들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남면평야가 초토화 되고 있었다. 아울러, 대전 비행장에서 이륙한 F-80 전폭기 2대가 출동했다. 국도 1호선을 따라 선공에 섰던 적 전차 2대가 급히 방향을 선회하여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전차 1대가 포탄에 맞아 보기 좋게 나동그라졌다. A중대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군의 반격으로 적의 포화가 잠시 침묵하는 듯했다. 그러나 F-80 전폭기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보병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나성리 정면의 강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피비린내를 품은 석양이 사라졌음을 서러워하는 조문행렬이었다. 뜨거웠던 지열이 어둠을 지피기 시작했다. 전차에 바짝 붙어 전진하던 적들이 하나 둘 강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수영에 자신이 있는 적의 선발대임에 틀림없었다. 일부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급조한 뗏목을 이용해 도하를 시작했다. 머리를 처박고 있던 1대대 참호 속에서도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었다. D중대의 무반동총과 기관총도 절단된 금남교에서 뛰어 내리는 적을 향해 집중 포화를 쏟아 부었다. 총에 맞은 적은 붉은 강 위에 시신을 눕히고 있었다. 그것이 차라리 편할 수도 있었다. 뗏목을 타고 도하하던 무리도 무반동총에 제압당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집중 사격을 피해 C중대 혹은 A중대로 우회 침투한 소수 병력은 강안 상륙에 성공하여 내륙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강하게 한 번 밀어 붙였던 적은 아군의 반격에 움찔했는지 밤새 미동도 하질 않았다. 그 사이, 아군과 적군 진지에서는 부상병을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송차량을 통해 실탄을 비롯한 보급품들이 조달되고 공격과 방어를 위한 치열한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아군 진지에서는 밤새도록 적의 도하를 정찰하기 위해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쑥대밭이 된 들판 어딘가에 숨어 있을 생명체들은 일제히 몸을 숨길 것이었다.
새벽이 되자 대평리 들판에 시원한 이슬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명의 시간이 왔음을 알리는 기상징후였다. 갑자기 금남리 벌판 상공에 야크기가 떠올랐다. 야크기가 적색 신호탄을 터뜨리고 사라지자 적 포병연대와 105전차사단의 화력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에 19연대도 사단포병의 지원 하에 적에게 모든 화력을 쏟아 붙고 있었다. 뿌리를 내린 벼와 이틀 전에 내린 빗물로 가득 찬 논을 적군이 가로지르는 일은 쉽지 않을 터였다. 또한 도하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아군은 조명탄의 지원 하에 운 좋게 강안까지 도달한 적이 강으로 뛰어들면 사격을 하여 물귀신으로 만들면 될 뿐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적은 아군 진지를 교란하기 위해 후방 진지에서 포사격을 그치지 않았다.
윈스티드 중령은 A중대 후방에 위치하여 대대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여전히 1대대 병사들은 자기진지를 사수하며 선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다. 밤새도록 금강을 밝혀주었던 조명탄 발사가 중지되면서 강안으로 붙는 적군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무려 20여 분이나 조명탄은 떠오르지 않았다. 포수가 조정간을 잘못 조정하여 조명탄은 오히려 아군진지를 밝혀주고 있었다. 어둠을 틈타 도하에 성공한 적은 신촌리 방향의 C중대로 우회하며 공격을 시도했고, 정면 돌파를 시도하던 적은 약속이라도 한 듯 B중대와 A중대 사이를 교묘하게 헤집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뚝방 참호 속에서 무던하게 버티던 A중대원들도 강안으로 달라붙는 적에 밀려 괴화산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적은 강둑을 넘어 괴화산을 공략하기 위해 논두렁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멜로이 대령은 지휘소의 취사병, 운전병, 행정병까지 총동원하여 뚝방진지 탈환에 나섰다. 유효사거리 1km에 분당 500발을 발사하는 M1919 브라우닝 기관총의 지원 하에 A중대와 B중대는 다시 진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측면을 방어하고 있는 F중대와 G중대에 있었다. 적은 원봉리를 거쳐 성덕리, 도암리, 굴곡리, 봉암리로 공격조를 편성하여 우회 침투하고 있었다. 더욱이 52포병대대가 있는 두만리까지 진격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공주에서 34연대가 공략 당한 전황이 그대로 대평리에서도 재현되고 있었다. 전황이 다급해지자 멜로이 대령은 지프차를 몰아 두만리로 달렸다. 좌측방어를 담당했던 G중대를 불러들이고 F중대장을 불러 2차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적의 우회침투를 저지토록 했다. 그는 다시 차를 돌려 연대지휘소가 있는 발산리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미 무명고지를 점령한 적은 대령의 차를 그냥 두지 않았다. 저격수가 쏜 탄이 그의 어깨를 정확히 관통했다. 운전병이 무사하여 진지로 귀환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동분서주하던 멜로이 대령의 부상으로 지휘권은 1대대장 윈스테드 중령에게 넘어갔다.
윈스티드 대령은 정신이 없었다. 대평리 벌판을 사수하던 1, 2대대병력 중 2대대가 와해되고 연대장마저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도하하는 적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강물에 떠내려간 적군만 해도 수백 명이 될 터인데 사단병력의 적 인원은 줄어 들 줄을 몰랐다. 참호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는 중대를 지켜보던 윈스티드 중령은 마침내 B, A, C 중대장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감성리와 용담리로의 퇴로 확보를 위해 지프차를 1번 국도로 올렸다. 무전병을 대동하고 이동하는 윈스티드 대령은 적의 쉬운 표적이 되었다. 이미 도암리 무명고지를 접수한 적의 집중포화가 이어졌다. 지프차가 기우뚱 하더니만 길가로 쑤셔박혔다. 그리고는 얼마 되지 않아 지프차는 화염과 함께 전소되고 말았다.
연대장이 부상하고 1대대장마저 잃은 윌리엄 딘 소장은 다급해졌다. 2대대장인 토마스 중령에게 연대 지휘권을 부여했다. 아울러 M-24 전차 2대와 M-16 대공포, 장갑차 6대 등을 지원하여 대전으로 향하는 퇴로를 개척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미 국도를 접수한 적은 아군의 유일한 퇴로를 쉽게 열어줄 리 없었다. 예비 병력이라도 있으면 이를 투입해 적을 교란 할 수 있었지만 1대대는 강안으로 달라붙는 적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좌우측에서 적은 점점 압박해오고 있었다. 급기야 딘 소장은 대평리 방어에 실패했음을 인지하고 예하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후방에 위치했던 포병을 중심으로 퇴로를 돌파하는 일은 전차가 가장 유용한 방법이었다. 토마스 중령은 부상당한 멜로이 대령과 동승했다. 한 여름의 전차 안은 숨이 턱턱 막혔다. 딘 소장은 대전 방어를 위해 지휘관들을 더 이상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연대의 작전 보좌관들로 하여금 남은 병력을 통솔할 것을 명령했다. 이제 살아 숨 쉬는 자들의 목숨은 하늘에 맡길 일이었다. 전차가 선두에 섰다. 그리고 운 좋은 병사들을 실은 트럭들이 전 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국도로 접어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적의 소총 사격이 이어졌다. 다행히 전차를 저지할만한 적의 화기는 도하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적진을 향해 아군 전차가 포신을 돌려 사격을 가하자 적은 위세에 눌렸는지 이내 잠잠해졌다. 철수병력은 죽음의 공포를 트럭에 가득 싣고 유성을 향해 내달렸다.
오후 내내 접전은 이어졌다. 폭염은 싸우고 있는 이들을 지치게 했지만 목숨을 담보로 한 피아간의 혈투를 막아 내지는 못했다. 참호를 사수하며 선전했던 1대대 병력과 좌우측 측면에서 밀린 2중대 병력들이 괴화산과 비학산을 넘어 1번국도로 이어지는 수리산 능선을 타고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괴화산 참호 속에는 이미 전사한 미군들의 시체로 가득 했다. 아울러 1대대 보급차량들은 아군에 의해 소각되어 붉은 화염을 퍼 올리고 있었다. 총성과 100여 대의 차량이 내는 폭발음, 백병전으로 뒤엉킨 비학산, 금병산, 수리산 일대는 초열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수리산에서 부상병과 함께 이동하던 군목 제임스 소위의 마지막 기도도 병자들의 비명에 묻혀 가물거리고 있었다.
B중대 3소대장 찰스 얼리(Charles C. Early) 소위는 도암리, 굴곡리로 좌회하여 퇴로를 차단한 적군에 의해 고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송곡리로 방향을 잡았다. 두만리의 원두만 마을은 이미 마을의 형체를 잃었으며 장터거리와 거친목에 펼쳐진 논들은 이미 적의 포격으로 난장이 되어 있었다. 이미 철수한 두만리와 용담리의 포병대대를 찾아 간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찰스 얼리 소위는 573고지 우산봉으로 기어 올랐다. 부상병들을 이끌고 오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이미 1번 국도를 차단당한 상황에서 접적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실탄도 바닥이 나고 분대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사들은 이미 수류탄마저 소진하고 없었다. 그를 따르는 소대원은 열다섯 명에 불과했다. A중대와 C중대와는 통신이 두절된 지 오래였다. 대전비행장이 최종 집결지라는 대대장의 목소리가 마지막 교신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병사들과 함께 살아 돌아오라”는 소리는 끝내 듣지 못했다.
우산봉에 오른 찰스 얼리 소위는 지도를 펴 들었다. 지도를 덮고 있는 코팅지는 땀으로 범벅되어 습기가 가득했다. 병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늘로 찾아들어 여기 저기 몸을 던졌다. 소대장의 손 끝 아래 570고지 신선봉, 469고지 갑하산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공암에서 넘어 오는 국도의 중간에 마티고개가 성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분대장들이 보는 앞에서 검지로 등고선을 따라 국도까지 길게 선을 그었다. 그 선은 마치 생명선과도 같은 것이어서 보는 이들의 가슴에 뭉클한 감동이 밀려 왔다. 3분대장 윌슨이 일어나 뒤쪽을 가리키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곳에는 계룡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해발 500미터의 장군봉이었다. 그 옆 임금봉에서는 의관을 벗어던진 태고적 왕이 태연히 앉아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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