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박용규 교수님)
▣ 박윤선의 생애와 신학 그리고 삶
3학년 5반 2008210288 김융희
서론
생애
정암 박윤선은 1905년 12월 11일 평북 철산군에서부친 박근수와 모친 김진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터득하여 사서삼경 뿐만 아니라 그 주해서까지 줄줄 외울정도로 정통했다. 선천의 신천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여기에 대해 김길성 교수는 박윤선이 박형룡 박사가 졸업한 프린스턴 신학교를 택하지 않고, 이미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하여 구 프린스턴 신학 전통을 포기한 프린스턴 신학교 대신데 1929년에 구 프린스턴 신학전통을 계승하여 설립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하여 잔 그래삼 메이천 박사에게 수학한 것을 매우 의미있게 보았다. 이러한 결정은 한국 교회사에 중대한 변화를 낳는 결정이었던 것이다. 만약 박윤선 박사가 학교의 명성만 믿고 프린스턴으로 유학을 하였다면 한국의 칼빈주의의 기초를 놓는 작업이 더디어 졌을 것이다. 박윤선 박사가 유학할 당시 프린스턴은 이미 자유주의로 물들어 있었다. 박용규 교수가 말하듯 신학은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는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보수신학의 대가인 메이첸과 그 후 반틸 박사 아래서 변증학을 배웠으며, 스톤하우스의 영향아래서 주석가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1936년 귀국 후 평양신학교에서 잠시 강의를 한 뒤 1938년 다시 도미하여 고대어와 변증학을 더욱 깊이 연구하였다. 하지만 이때 일제의 신사참배로 인하여 평양신학교는 폐교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으며, 이것을 피해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박윤선은 1939년에서 40년까지 일본 동경에서 앞서 일하던 총회교육부의 표준주석 사업을 계속하였다. 1941년부터는 박형룡 박사와 함께 만주봉천신학교에서 교수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 신학교 마저 신사참배에 동참하여 더 이상 교수직을 수행할 수 없어 1943년 사직하고 1944년 4월부터 조국이 해방될 때 까지 만주 안산에서 성경주석 집필을 하였다. 해방이 되었지만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이 되었다. 1946년 고려신학교가 설립이 되었고, 초대학장으로는 박형룡 박사를 모시기고 결정을 하였으나 박형룡 박사의 귀국이 늦어지면서 박윤선 박사가 학장서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1947년 박형룡 박사가 귀국 후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을 하였으나 1948년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된다.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난 후 1948년 5월에 박윤선 박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을 하였다. 박윤선은 고려신학교 설립 목적이 과거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한국 교회의 과오를 회개하고 교계 정화를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1960년 까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고려신학교에서 박윤선의 기여는 절대적이었다. 한상동 목사가 고려신학교라는 신학교육의 장을 만들었다면, 박윤선은 신학교육의 내용을 공급한 것이다. 1960년 박윤선 박사는 고려파와 결별을 하게 된다. 이상규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고려신학교 해임과 철수는 고신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주일 성수를 범했다는 이유로 공격의 날을 세운것은 너무나도 옹졸한 처사였다는 것이다. 그 이후 박윤선 박사는 1963년부터 1980년 까지 사당동 총신대학교 및 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서의 생애를 보냈다. 박윤선 박사는 이 기간에 잊을 수 없는 일은 박령룡 박사와 함께 가르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980년 11월에 박윤선은 1963년부터 재직하던 합동측 총회신학교와 결별을 하고 합동신학교 설립에 합류하였다. 합동신학교 합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다. 박윤선 박사는 합동신학교 설립 배경은 합동의 교권주의로 인해 총신에서 온전한 신학교육를 실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떠나야 했다고 말한다. 신학적인 문제로 총신을 떠난 것이 아니라 교권문제로 떠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란 만장한 삶을 살은 박윤선 박사는 1988년 6월 30일 83세를 일기로 주님의 품에 안겼다.
신학
1. 신학적 배경
박윤선은 개혁주의 신학을 석명하고 이를 구체화하였을 뿐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위에서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성경의 절대적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 진정한 개혁신학자였다. 하비 콘이 말하기를 박윤선은 단순한 근본주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고 함으로써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자였음을 지적했다. 박윤선 박사의 신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화란개혁주의 신학을 가장 많이 채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반틸 박사의 영향 때문이었다. 김길성 교수도 박윤선 박사와 박형룡 박사의 차이점은 박형룡 박사는 주로 평양신학교 구프린스톤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한 데 반해, 박윤선 박사는 구프린스톤의 전통과 화란의 전통을 합일시키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1934~36까지 메이첸 밑에서 구프린스톤의 전통을 배우고, 1938~40년까지 반틸 밑에서 전제주의적 변증학을 섭렵함으로써 개혁주의 내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배웠고, 이 두 개혁주의 유산의 조화의 필요성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틸 박사의 영향으로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을 만나게 되었고 1952년 화란으로 유학을 하면서 직접 화란의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직접 교통할 수 있었다. 카이퍼, 바빙크, 스킬더 등의 이름이 그의 전 주석 거의 매 페이지마다 발결 될 정도로 화란개혁주의 신학에 철저했다. 화란 유학이 아니었다면 신구약 주석 저술에 있어서 진리를 깨닫는 데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이라고 소고하였다. 주경신학자로서의 박윤선 박사의 신학적 원리는 칼빈주의 신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중신사상의 신학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곧 계시의존사상을 항상 강조하였다. 김길성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신학과 사상을 네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박윤선 박사는 한국교회에 성경신학에 기초하여 신학 함의 초석을 놓은 분이다. 둘째, 한국 교회 앞에 개혁신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분이다. 셋째, 한국교회에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접목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남기신 분이다. 넷째, 일평생 교회를 위한 성경연구와 신학 함을 몸소 실천한 분이라는 것이다.
2. 박윤선의 개혁주의
박윤선 박사는 1979년 가을호 신학지남에서 “개혁주의 소고”라는 글을 남긴다. 여기에서 개혁주의를 전면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라 특징 몇 가지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박윤선은 개혁주의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또한 신구약의 연속성을 바로 지적하고 계시의 단일성에서 진리의 확신을 가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개혁신학에 이르러 신약과 구약은 결국 동일한 사상을 가진다는 계약 신학이 발단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개혁주의의 주요원리로서 하나님의 주권은 초월세계에서 뿐 아니라 시간 공간 세계도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생각하며, 성경관에 있어서는 교회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가 앞서는 것이라고 하면서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앞세운 로마 카톨릭의 성경관을 비판한다. 개혁주의의 인생관은 일반 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그리스도 외에 아무런 중간체를 용납하지 않으며 과학과 관련하여서는 개혁주의는 과학을 무시하지 않고, 영원적인 것만을 고조하지 않고 시간적인 것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의미에서 과학을 적당하게 존중시하여 불신자보다 더욱 과학적이어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박윤선은 계시를 하나님이 나타내신 그의 능력와 그의 성품과 그의 의지라고 보았다. 그는 바르트의 일반계시를 비판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은 피조물을 자체를 가르켜 일반계시, 또는 자연계시라고 부르고, 특별계시로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이적과 기사, 예언, 꿈, 이상, 성경으로 정의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개혁주의의 근본원리를 말한다면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로 정의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는 현대신학자 중에 특히 바르트 비판을 통하여 현대신학의 폐혜를 한국교회에 소개하고, 한국교회가 나아가야할 개혁신학의 방향을 바르게 제시하였다.
3.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접목
박윤선 박사는 그의 스승 존 머리 교수의 신학방법에 따라, 성경신학에 기초한 조직신학의 길을 열어놓은 학자이다. 박윤선 박사는 자신이 전공한 성경주해와 성경신학의 터 위에 조직신학의 여러 주제들을 성경신학적으로 심도 있게 다룸으로써 스승인 존 머리 교수를 따라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접목을 시도한 신학자였다.
삶
1. 성경주석 집필
박윤선 스스로 평생 중요 사업은 신학교육과 성경 주석 사업이라고 증언한대고 성경 주석 집필은 그의 필생의 과업이었다. 이러한 주석 사업의 동기는 자신이 먼저 성경을 깊이 알고 남들에게도 올바로 전하려는데서 시작하였다. 성경주석에는 먼저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이 중요하며 칼빈주의 신학 처지에서 일관성 있게 주석을 편찬하려는 칼빈주의 신학 지식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1949년 요한계시록을 시작으로 1979년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주석에 이르기 까지 30년에 걸쳐 작성된 박윤선 주석은 그가 웨스트민스터에서 메이첸으로부터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칼빈주의 신학을 의식적으로 적용하였다. 성경주석사업 보다 기쁜일은 없었지만 40여년 동안 성경을 집필하면서 펜을 들 수 없는 심적고통도 많았지만, 그런데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다. 박영희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성경주석 집필은 자유주의의 성경적 입장을 막아주는 커다란 울타리를 치는 것이었으며,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을 방어해 주고 변호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한다. 그의 주석서는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입장을 말해줌으로써 더욱 더 개혁신앙을 자극시켰고, 1,000편이 넘는 그의 설교는 한국 교회 강단에 크게 밑거름이 되었으며, 목회자들에게는 많은 자료를 제공했다고 말한다. 이호우 교수는 박윤선의 성경주석에 대해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야함을 한국교회에 일깨워 주었고, 개혁주의 성경관을 한국교회에 가르쳐 주었다고 말한다.
2. 설교
박윤선은 신학자일 뿐 아니라 설교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교수의 사역과 설교사역을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61~64년에 동산교회, 65~67년에 부산 성산교회, 68~73년 한성교회 등에서 설교자로 꾸준히 자리를 지켰으며, 그 외의 시기에도 그는 주일마아 말씀전하는 일을 거의 쉬지 않았다. 목회자를 키우는 신학교 교수는 반드시 목회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박윤선은 생각했다. 그는 “나의 설교 나의 신학”에서 말하기를 대학시절 4년 동안 거의 매주일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하였고, 60년가까이 강단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을 의식하면서 설교한것은 1937년 이후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오묘한 깊은 진리가 숨겨져 있고 진리를 증거할 때 그는 온몸으로 외치는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관은 설교는 성경말씀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을 바로 깨닫고 전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성경연구를 깊이 하는 동시에, 기도를 많이 해야 되며, 보다 더 설교자 자신이 그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그대로 살지 않으면서 전함은 무력하다는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당시 강단의 실상이 하나님 말씀 중심보다 체험 중심, 예화중심이며, 교회와 사회의 구분선을 보여줌에 있어서 오늘날(당시)교회는 극리 막연하다고 말하고,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왕성하고 지적하고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개혁주의 원리를 실행하려면, 성경을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박윤선 박사의 설교의 특징은 칼빈주의 핵심인 하나님 사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은총을 동시적으로 설교하는 이른바 성경전부를 증거하는 개혁주의적 설교였다. 그의 설교 매용은 제목과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만 곧 오직 성경만의 사상이 포함되고 있다. 또한 언제나 하나님의 거져주시는 은총이 거의 모든 설교의 제목마다 보인다. 오직 은총은 종교개혁자들이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3. 기도의 삶
박윤선 박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숭실전문학교 재학 시절부터 그는 몇 몇 친구들과 기도모임을 만들고 새벽에 1시간 거리인 모란봉으로 기도하러 올라갔다. 그때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동료들 사이에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그가 화란에서 공부할 때 가장 아쉬웠던 부분도 화란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고 한다.그는 기도없는 신학은 인본주의로 떨어지게 되면, 참된 기도로 뒷받침하는 신학연구는 동시에 경건의 능력을 소유한다고 강조하였다. 설교를 준비할 때도 그는 기도로 준비되지 않은 설교를 감화력이 없다 하면서 기도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김명혁 교수도 박윤선 박사를 평가하면서 박윤선 박사의 기도 생활은 기도를 생활화신 분이라고 하였다. 기도를 매우 수고스럽게 하시고, 총신에 계실 때 매일 새벽, 총신에 오셔서 뒷산에 올라가 2~3시간씩 기도하시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특별히 설교 사역에 있어서 기도를 매우 강조하였다. 박윤선 박사가 어떤 때에는 여러 시간 준비 기도를 했는데도 그 설교가 별로 은혜롭지 못했던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후에 생각해 보니 준비 기도시간에 시간을 바쳤지만, 전심으로 기도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된 기도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4. 경건의 삶
경건은 박윤선 박사의 삶 자체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육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경건을 삶의 방향으로 삼았던 박윤선 박사의 전 생애는 학문과 신앙이 혼연일체를 이룬 삶이었고, 말씀과 기도가 병행된 삶이었다. 무엇보다도 말씀과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그의 가르침을 그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이었음이 틀림없다. 김명혁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삶을 개혁주의적인 삶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라고 평가한다. 칼빈주의 신학을 하나의 신학 체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인 뜨거운 신앙의 원리로 나타남을 보여주셨고, 소극적 분리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포용과 교제의 삶인 것을 보여주셨으며, 세상에 무관심한 반문화주의가 아니라 사회문제와 구제사역 등에 적극적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변혁주의인것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한다.
결론
지금까지 박윤선 박사의 생애과 신학 그리고 삶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생애와 활동은 한국교회에 바른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라는 부흥의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다. 또한 그의 삶은 한국교회의 여러 가지 고비의 한 복판에 서있던 분이었다. 자유주의 도전, 신사참배의 고난, 교회의 분열, 교권주의의 압박 등 교회가 당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당해보았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평양신학교, 만주봉천신학교, 고려신학교, 총회신학대학교, 합동신학교의 관계는 바로 한국교회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그른 어는 한 교단이나 교파의 목사가 아니라 한국장로교의 목사요 칼빈주의 신학의 대변자로서의 삶이었다. 박윤선 박사의 생애와 신학 삶을 보면서 진정한 신앙인이요, 신학자의 모습을 보았다. 말로만 외치는 성경과 복음이 아니라, 실천하는 신앙인 양심인 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필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럽게 느껴졌다.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지만 복음의 참된 진리를 수호하려는 이러한 선배 신앙인 있었기에 지금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게 전수되었다고 볼수 있다. 복음의 참된 진리가 희석되어지는 오늘날과 같은 시기에 이러한 훌륭한 선배 신앙인의 모습을 더욱 더 고찰하고 연구하여서 후대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참고도서
1. 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서울: 영음사, 1996) 2. 박윤선, “개혁주의 소고” 「신학지남」통권 185호,(1979년 9월) 3. 박윤선, “나의 생애와 신학” 「신학정론」통권 14호 (1989년 12월) 4. 박윤선, “개혁주의 계시론 소고” 「신학정론」통권 3집(1984.4월) 5. 박아론, 『보수신학연구』(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6.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2』(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8) 7. 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장동민 역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8. 심군식, 『한상동 목사의 삶과 신학』(부산: 고신대학교출판부, 2006) 9. 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서울: SFC출판부, 2006) 10. 정성구, 『박윤선 목사의 신학과 설교 연구』(서울: 한국칼빈주의연구원, 1991) 11. 합동신학교출판부,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수원: 합동신학교출판부, 1995) 12. 간하배, “해방 후의 한국 장로교 보수 신학” 「신학지남」통권 170호(1975. 9) 13. 김길성, “박윤선 박사의 신학과 사상” 「신학지남」통권 307호(2010) 14. 김명혁, “내가 좋아하던 박윤선 목사님” 「신학정론」통권 14권(1989,12월) 15. 박영희, “한국의 주경신학과 박윤선 주석의 의의” 「신학정론」통권 14호(1989.12) 16. 이호우, “한국교회 부흥에 끼친 박윤선의 신학과 신앙”, 「신학정론」통권 49집 |
출처: 생명나무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