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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제
변 재 열*
비가 온다. 입술 언저리 감질나게 비가 온다. 평균 강우량 절반도 안 된다는 일기예보. 한숨 비울 수 없는 해. 그나마 반가워라 앞마당에 나가 쌍수로 맞이한다. 그래도 추녀 끝엔 물방울조차 볼 수 없다. 타들어가는 가슴 북치듯 두들겨 봐도 소용이 없다. 사람들 입술 언저리에 자주 오르내리는 소리- 오려면 오든지 말라면 말든지 병아리 오줌처럼 찔끔 감정 돋우는 물 냄새. 답답하다. 전답은 고사하고 저수지는 거북등으로 쩍 갈라짐. 수몰지구마을까지 비수를 꽂는다. 소름끼치는 식수, 한숨과 원망- 말이 아니다. 고랑을 갈아 업듯 콸콸 넘쳐 저 멀리 퍼져나갈 비 인정사정없이 퍼부어주소서. 배부를 땐 먹구름 미워도 했지만 지금은 하늘빛 푸르고 맑지 않아도 괜찮으니 마실 비라도 철철 배불리 내려주소서. 온 몸을 샤워라도 하듯 그러한 생명수 내려주소서. 우린 지금 너무나 목말라 하나이다. 낮과 밤 따지지 말고 오소서. 그대여 기다리는 단비여.
미안하면
살다보면 다 좋을 수야 있나?
안 좋으면 미안부터 내세우면 되는 것을
미안한 홍당무
숨도 차다
핏줄로 역류하는 엇박자 펌프질
시간 전 밥상 차리기
잘 가는 시계 보면서 발만 동동 구르기
어석거리는 서툰 행동
언젠가 또 다시 찾아올 미안함
다 그러려니 생각하며
오늘도 가쁜 숨을 달랜다.
※ 충남 공주 출생, 호-海峰/巢鶴, ≪현대문학≫(1981)에 시로 등단, 시집으로 겨울바다, 보이지 않는 江, 멀리서 가까이서 , 바람꽃 향기, 빈 잔의 메아리, 만리포 바람소리, 진홍빛 꽃잎, 「가슴 비우기 혹은 채우기」, 충남도문화상, 대전문학상, 한성기문학상 황조근정훈장 수상, 현재 대전시인협회장, 대전지방검찰청형사조정위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남북교류위원
달챙이
이형자
다다닥닥 소리가 난다
긁어 더 분명하고 싶은가
닳아 몽당해진 살강 밑에 숟가락
솥바닥의 딱 달라붙은
누룽지 긁다가 문득
고소해지는 얼굴 하나 있네
염치없이 하루가 멀게 들랑대는
사발농사꾼 차마 내치지 못해
숟가락조차도 온전치 못했네
닳고 닳은 달챙이 닮은 손톱
깎을 사이도 없다며
옆 귀퉁이 아리게 베어 물던 당신
주룩주룩 늦은 장맛비 내리는 날
빈 쌀독의 허기
감자라도 벗겨 끓인 된장국
배추뿌리 긁어 푸짐하게 익혀
작은 것도 배불리 나눠 먹여야
달달하게 맘이 놓인다던 쌍둥이네 성
솥 밑에 딱 들러붙은 깜밥 긁다
앗! 뜨거워 댕그랑 놓쳐버린 달챙이
작아 널리 나누라는 종소리인 듯
물그림자 2
강가 서 있는 나무
물속에 텀벙 빠졌다
성급한 흐름 다스리느라
산을 휘어 도는 강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푸르르 투명해지는 한낮
나무도 한 번쯤은
물길 따라
떠나가 보고 픈 때가 있는지
거꾸로 수직으로 서서
물살에 휩쓸리고 있다
무전여행
환한 눈과 귀 입까지도
단단히 빗장 채워야 한다
그늘 가득한 발자국 하나하나
이 밤으로 모두 비워야 한다
기역 니은 자 무늬 그려낸
유리창 너머 들려오는
왁자한 풀벌레 울음소리
종착역 없는 아침으로 나는
무전여행 차표 내보인다
무엇으로 이 밤을 지키고 앉았는가
부른 적 없고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목구멍 자갈밭 넘어가는
시계 초침 소리 듣는다
점점이 너에게 잡혀 먹힐지라도
불립문자를 그리며 넘어가고 있는
밤과 내일의 연결고리
어제 아주 간 사람이
이유불문하고 그리도 원한 아침
일 년 삼백육십오일
이러고 저러고도 또 다음 해를 맞는다
옷 벗고 긴 겨울밤 지키는 나무처럼
※ 충남 강경 출생, ≪창조문학≫(1998) 등단, 시집으로 숨쉬는 닥나무, 미용실의 봄, 에덴의 물방울』,
공저 옥빛 고운 자리 등, ≪꿈과 두레박≫ 문학회장, 대전여성문학회장, top-leehj@hanmail.net
겨울 숲
김 명 동
바람소리에 놀라
쉼 없이 떨어진
잎사귀들이 긴 수면에 빠져 있는 곳
알알이 나체가 되어
쏟아진 여름의 씨앗들
서릿바람 지나가고
산 짐승이 지나가고
마음이 차가워지거든
겨울 숲으로 가라
발자국을 숙제처럼 남기면
그곳에는 포근히 잠든
나무들이 어깨를 빌려줄 것이다
오늘
밤새
별밭의 하늘을 달려와
기다림으로 일렁이는
새벽을 깨우는 붉은 태양은
동녘 바다 위에
선홍의 핏빛 물감을 칠하며
오늘을 불러다 놓으며
타는 목마름을 참고
하늘가를 달려가고 있다
※경북 상주 출생, 시집 어느 바보의 작은 가슴(1990), 고향은 저만치(1992), 꿈속에 별 달(1993), 그대를 사랑하는 이유(2002), 그리움의 마당에는 당신이 주인입니다(2006), 사랑춤(2015), 동구문화상, 예총회장상, 인터넷문학상 등 수상, 현 글빛문학회장, 대전동구문학회장, kimydo812@hanmail.net
갱년기
권 예 자*
지난 가을 이맘때
산에서 왈칵 내려온
불길에 벌겋게 물들어
오래도록 신열에 시달렸지
올해는 불붙지 않으려고
수조마다 가득가득 물 받아 놓고
가슴에 빗장 단단히 채웠지
오기만 해봐
오기만 해봐
벼르고 별렀는데
이게 뭐야
이번엔 안에서 단풍이 솟네
앗, 뜨거
여섯 살
공원에 수북이 떨어져 있는
벚나무 낙엽
나는 쓸쓸하다 말하고
녀석은 땅이
이불을 덮었다고 한다
빈 도화지에
헐벗은 나무 그리노라면
녀석은 그 아래 굴러가는
바람을 그린다
내가 새의 날개 그리면
새들의 길을 그린다
보이는 것만 그리는 나는
보이지 않는 것 그려내는
그의 적수가 아니다
애초부터 아니었다
오늘도
손자에게 한 수 배운다
시들지 못하는 꽃
폐경의 그 여자
선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버릇처럼 인터넷카페에 들렀다
못 마시는 술도 호기 있게 마시고
감추었던 옛 남자와 춤도 추고
짜릿한 도박에 거금도 걸었다
시들지 않는 꽃이 되고 싶던 날
카페를 만들어
한 송이 모란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만질 수도 안을 수도
향기조차 없는 꽃이 되었다
화면 안 상큼한 스물아홉 처녀
카페 문을 닫고
일상으로 돌아올 때면
그녀는 가면을 벗고
녹슨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들 수 있는 꽃은 행복하겠다고
* 대전 출생, 수필《창작수필》, 시《문학저널》로 등단, 시집『숲이 나를 보고』『비밀일기장』, 수필집『내안의 피에타』,
『봄비, 꽃잠 깨다』등, 예술문화상, 창작수필 동인문학상, 옥로문학상 수상, bombi42@hanmail.net.
외갓집 풀벌레며 풀꽃들
박 헌 영*
외갓집 이사 가고
집 허물었단 소식도 옛날인데
가는 길 접어두고 찾아들었다.
뒤란 울타리에 피었던 풀꽃들
그대로 살아 햇살 쟁그럽고
풀벌레들 여기저기 튀어올라
툭툭 툭툭 가슴팍을 친다.
외할머니 떠나고 이것들
저희끼리 어떻게 살았을까.
길가에 지켜 선 살구나무는
몇 번의 꽃상여를 보내는 동안
이것들이 살아온 내력을
겹겹이 나이테로 감았겠지만
묻지 말자, 나는 알겠거니
이마 위로 떠가던 구름마다
나 몰래 세월 몰래 찾아와
꿈을 내린 것이다. 내 꿈의
별빛을 숨쉬고 이슬을 받아먹고
풀벌레며 풀꽃들 자란 것이다.
멀리서도 보였나, 지나가는 나를
홀연히 불러 세운 이것들.
풀씨 몇 낟 옷섶에 붙달리며
풀벌레 손잡고 나 사는 동네로
함께 가자 한다.
영평사 구절초
살면서 한번쯤
길을 멈춰야 한다면
그만 여기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다
꿈결에 놓친 그리움을 만난 듯
하얀 꽃길 두 손 잡고 올라
대웅전 꽃뜨랖에 마음을 누이면
슬픔도 외로움도
세상사 구절구절
다 한 송이 꽃이구나
산 자와 죽은 자, 어쩌면
태어날 이의 사연까지
10월 영평사에 쌓여
이리 설고운 꽃산을 피워 올려
보살이여, 눈물지어라
아름다워라
이윽고 몸만 돌아가
다시 가을토록
꽃절의 하늘 쪽을 바라볼 거니
송이마다 꽃잎 모아 별을 띄운다
사람의 가슴에 닳고 닳아
지문이 문드러진 누구 있으면
별 하나 찾아 제 이름 불러보아라
영평사에 올 때면
아예 부처마저 잊고 오라
오래 앓던 아이가 처음으로 눈떠
엄마 보고 웃는 잇속처럼
구절초꽃 해보얗게 미소 지으니
아마도 그대에게 그대
길게길게 평온하리
한 하늘의 가을
한 하늘에 단풍이 드네
눈물은 다시 붉어지고
바람을 물들이네
우리가 그랬던가
우리가 살았던가
흔들렸던가
멈췄던가
어느 지하로
어느 밤으로 스며
샘물이 되었나
별빛이 되었나
오래 묻어둔
가을이 왔다
조금은 부끄럽다
처음 고추잠자리처럼
설레이듯 잔잔히
네가 왔다
※ 전북 부안 출생, 시집 나 사는 집, 하늘빛 숨, 아이와 함께 가며, 그대 없이 그대를 사랑합니다, 저 나무 내게 동행하자 한다, 철이네 엄마아빠, 거품의 힘 ,붉은 꽃잎에 쓰다, 한 사람에게만 흐르기에도 강물은 부족하다, 시 선집 「즐거워라, 죽으러 가는 저 물소리」등, parnee@hanmail.net
바지를 줄이면서
이 영 순*
바람에 풍기는
초침 소리를 들으며 바지 밑단을 줄인다
키 작아진 만큼 잘라내고
옴츠러진 마음만큼 또 잘라내고
풀어진 실오라기 안으로 자꾸 밀어 넣으며
한 올 한 올 공그르기 한다
죽을 수는 있어도 패배는 모른다며
죽음 앞에 유언을 남기는 인간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녹초 되어 쪼그라졌나
제 키보다 커보이던 지난날의 길이가
주저앉은 뼈대만큼 짧아졌다
바닥에 치렁거리던 바지 나이에 맞게 줄여 놓고
늦가을 나비처럼 춤을 춘다
하느작하느작
갈바람 속을 유영한다
고철의 노래
보이는구나
이글거리는 용광로의 불꽃이
소박맞은 쇳덩어리들
제 이름 제 모양 잃은 지 오래
제 자리 빼앗기고 밀려나던 날
이름은 고철이 되었구나
보이는구나
이글거리는 용광로의 불꽃이
삽질하여라 삽질하여라
불꽃 속에 무덤이 보인다
부어라 부어 철철 녹아내리도록
부서지고 깨진 네 이름들
보이는구나
이글거리는 용광로의 불꽃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
열광하며 몸부림치는 네 모습에
내 가슴까지
뜨겁게 달아오르는구나
※ 대전 출생, 월간 《문학세계》신인문학상(2001), 《꿈과 두레박》, 《백지》 동인, 《꿈과 두레박》 회장, ly1103@hanmail.net
네모 별
김 창 유*
오늘도 그 별은 떴다
네모별
내 창밖 저 높은 곳에
늦은 밤 이른 새벽에도
어두울수록 더욱 빛나는 창문별
무슨 사연 있길래
모두 깊이 잠든 밤에도
저토록 홀로 반짝이는 가
늦은 밤까지 공부하는 자녀?
새벽같이 일터로 나가는 식구?
생계를 꾸리는 부업의 손?
혹여 어둠을 싫어하는 깊은 환자?
형광등과 문틀이 십자가로 아른대고
은하계의 별은 아니지만
정성과 사랑이 발광하는 창문
누굴까 저 별빛을 짓는 이는
부디
소망과 환희의 별빛이 되어라.
민들레
봄바람을 타고 여행을 한다
보드랍고 둥근 대화 두둥실 피어나고
다시 돌아갈 기약도 없이
철없이 솜털에 싸여
사분히 내려앉는 낙하산
어미 떠나 다시 못 올 길
지금, 서두르고 있음을 알기나 할까
새 생명 거듭 날 때까지
더 멀리 가지 못 할까봐
가슴조이는 어미
이별의 아픔
홀로서기와 대물림의 섭리
폐교 유감
‘바르고 튼튼하게 자라라’
교문아치는 저 만큼 무정하게 처박혀 있고
‘21세기를 주도하는 유능한 한국인 육성’
낡은 표지판이 아직도 주인 잃은 폐교를 지키고 있다
험상궂게 누추한 외벽
여기저기 축 늘어진 전선들
남녀 유별하던 화장실은 거미줄이 출입을 막고 지킨다
귀한 소식 들려주던 스피커는
내장이 드러난 채 간신히 매달려 있고
1994. 4. 7. <독서신문>
‘널뛰기 윷놀이’ 서예작품 한 조각 마지막 흔적들
맘껏 뛰놀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운동장
정답던 내 동무, 우리 선생님들은 다 어디 갔나
오르기 어렵던 조회대는 녹슨 몸으로 헐떡이고
온갖 잡초 속으로 개구리 방아깨비 지렁이들이 판을 치고 있다
빈 술병 과자봉지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흩날리는데
그나마 하얀 클로버, 노란 민들레꽃이 환하게 웃어준다
내 키 동갑하던 사철나무 울타리는 수목으로 변했고
울타리 저 너머로 코레일 열차가 내달리고 있다
무상함을 기웃거리며.
※ 충남 서천 출생, 한국 공무원문학협회 회원, 서양화가, kcy42@hanmir.com
전어(錢魚) 잡기
송 은 애*
그땐 그랬다. 전어가 풍년이면 세상 버리고 떠난 나의 연인이 돌아온다고 했다. 아무도 그 말에 시비 거는 사람없이 화톳불 밝히며 전어 잡이 어선은 갈 길을 떠났다.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콘크리트 건물이 한층 올라갈 때마다 꿈은 한층 씩 내려가고 붙잡을 수 없는 욕망은 야관문 액기스 광고문구를 쓰게 하더니 전립선은 타고 있었다. 겹쳐서 구멍 난 호수는 괜스리 엉뚱한 곳에 물을 뿌리고 밤새 내린 가을비는 배추속살을 살찌우지만 농부의 마음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란다. 이상하게도 무 잎새는 왕성한데 심오한 땅속에선 짜증 섞인 말투로 쌈박질이다. 서풍은 부는데 동쪽에선 비가 내린다. 해가 떠야 할 곳에선 낮잠자기 여념없고 달빛에 드러난 여인의 속옷에선 비릿한 전어 냄새가 난다. 향불 대신 촛불을 켜지만 밖을 밝히기엔 역부족인가 자꾸 구경꾼이 몰아친다. 바다를 향해 부는 바람이 거세질수록 그리움은 더 해 가는데 길 잃은 텃새 한 마리 훨훨 타오르는 장작불을 접어두고 기름진 전어를 굽는다.
어머니의 밤
늘 깨어 있었다.
밤이 되면 흔들리는 그녀의 어깨를 이해한 지 두어 해
가슴 속마저 비워버린 패닉속의 밤
손끝에서 살아나던 학의 날개 짓이
밤을 그리워하듯 모두 날아가 버렸다.
분명 그녀의 푸른 공단에 누워 있어야 할 재두루미
인생의 갈래 길에서 이정표를 잃었나보다
가로등 하나도 없는 그 길에서
혼돈의 밤을 기억하는 건
무척이나 괴로운 일들
차라리
그 어둠속에서 혼자가 되더라도
밤을 껴안을 것이다.
벽시계 멈추어 나를 갈망하더라도
봄이다
올 수밖에 없었다.
그 깊은 겨울 속에서도 흐르는 저 냇물을 막을 수 없었기에
그대로 가슴을 열고 있었던게지. 그것을 너는 알고 있었지만
차마 펼쳐낼 수 없었던거야. 땅속 깊은 곳에서도 남극을 녹일
만큼의 열기가 솟아오르고 하루 멀다 전해지는 뜨거운 정치판
오열들이 오합지졸로 돌아다니니 합을 이룰 수 없었지. 잠자리
설칠 미덥지 못한 속삭임에 잠 못 들고 해매이던 그 날들이 쌓여
지쳐버린 심신들과 야단법석으로 내림굿하듯 전신을 누르고
있었겠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구설수마저 떠돌 때 바람,
잔설 그리고 근질거리던 피부에 검버섯이 설치고 앞마당 휘몰아
치던 솔개의 날갯짓에 멈칫하다가 백구는 황구를 내밀 듯 해산을
하고 붉어진 꼬리를 게 눈 감추듯 한다.
햇살 그리고 저 떠오름
별빛 그리고 저 내려앉음
바람 그리고 저 스며듬
구름 그리고 저 흩어짐
그리고 봄이다.
멈춤의 단상
도시의 소음이 자작자작 스며들만한 거리 쯤 밤사이
석고개 근처에서 소음이 멈추었다.
목이 마를 대로 마른 연(蓮)대가 고개를 숙이며
침을 삼키니 여름도 잠시 멈추었다.
밤새 내린 아쉬움이 여름비를 끝으로
주춤하던 호남선 철길도 움찔 멈추었다.
길 건너 모자리엔 한달여 남짓 뿌리 내리지 못하고
널부러진 모판 몇 개가 휘둥그레 자리 잡지 못하고 멈추었다
직선도로 개통을 목 메이게 지켜보던
마을주민들의 갈증 난 목젖도
침을 삼키지 못하고 잠시 멈추었다.
그 멈춤 사이로
비집고 들어선 햇살 한 줌
여유를 찾게 하지만 그들의 손길은
여전히 분주하다.
계절을 쓰다
붉어진 단풍을 연상하며 무궁화를 그린다. 작은 꽃무늬 가방 안에 계절을 보낸 사과 한 개와 불면의 밤을 보낸 치즈 한 쪽, 맥주 한 캔을 모서리 구겨진 원고지 한 묶음과 몇 번을 수리한 만년필 채워 넣고 들판으로 나설 여인의 귓전엔 봄의 소리를 들으며 노을이 활짝 웃는다. 선뜻 서두를 잡을 수 없는 연서의 시작점 끄트머리엔 가을이 매달려 있다. 가을에 봄을 떠올리던 여인, 안간힘을 다해 견디고 있는 계절을 발견한다. 추억을 찾아낸 것이다. 붉은 단풍의 가을과 다가서는 봄으로 연서를 쓴다. 겨울로 달려가는 계절의 사각지대에서 동면의 그 잠을 깨운다. 그리고 희망을 쓴다.
※ 茶軒, 시집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이름없는 들꽃 이야기, 다래순 먹는 여자, 관저동 연가,
술 예찬 꽃 예찬하면서 茶 한 잔, 인연, sea5610@hanmail.net
마 감
조 영 숙*
원고 마감 시간은 다가오는데
해야 할 일은 늘어나고
몸은 물기 젖은 솜처럼 늘어지고
생각은 갈피를 잡지 못해 비틀거린다.
소털 같이 많던 시간에는 무얼 하고
쫓기며 생각을 다듬는다.
그렇지, 삶이 이러한 것을
그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그날 준비해야 할 것을 미처 못하고
당하는 이별, 얼마나 안타까울까
계절에 색깔이 있다면
봄이 색깔이 있다면
노란색일 것 같다
산수유, 개나리, 종달새, 꾀꼬리
연두색을 배경으로
노랑으로 인사한다.
여름이 색깔이 있다면
단연 녹색일 것 같다
앙증맞은 야생화에서부터
고목에 이르기까지
녹색 숨결로 일렁이는 숲
가을이 색깔이 있다면
붉은 색일 것 같다
무성한 녹음을 뒤로하고
붉은 옷고름 사이로
유방 같은 발그레한 열매를 보이며
겨울이 색깔이 있다면
흰색일 것 같다
마른 나무들과 텅 빈 들판
우유 빛 하늘이 변하여
오염되지 않은 은백색 세상으로
※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수료, <글샘회> 동인, 양평문협회원, ysc1951@naver.com
오일장에서
백 경 화*
시골 오일장
새우등 닮아가는 어머니들
봉고차 타기 위해
등이 산처럼 솟아 뛴다
고단한 삶 등에 잔뜩 지고
뼈가 으서져도
내려놓을 줄 모르고
저 쭈글쭈글한 얼굴
저 굽은 등에서
박사 변호사 장관도 나온
위대한 산실이다
뜬금없이 가슴이 뭉클하다
상사화
비 내리는 초가을
용천사* 뒤뜰
화장한 여인들이 나와
웅성거리고 있네
닿지 못할 사람
제자리에서 마음 피우다가
바람만 끌어안고
산모퉁이 늘어지게 바라보고 있네
진홍빛으로 탄 얼굴
해마다 구월이면 몰려왔다
이맘때면 비를 맞고
떠나가는 여인들
아, 화장한 여인들이
웅성거리고 있네
* 전남 함평에 있는 절 이름
※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수필집『산의 향기를 찾아서』, 시집『술래잡기』등, 대전문인협회 회원, 대전국제펜문학 회원,
≪꿈과 두레박≫ 회원,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첫 연애편지
김 근 수*
친구의 부탁으로
연애편지를 대신 써 주었다
그렇게 주고받은
그녀의 연애편지
사랑은 남몰래 하는 건가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눈이 멀어진다고 했지
막상 내 마음을 담아
보낼 편지는
밤새 써지지 않았다
널 좋아한다는 편지를
쓰다 지우고
쓰다 지우고
첫 연애편지는 그랬다
부부사랑
여보!
들여다 보아요
맑은 샘물을 보듯
내 마음을 다 들여다 보아요
보았나요?
당신 사랑만 가득 찬
내 마음을
나도 샘물처럼 솟아나는
당신 사랑도
다 들여다 볼거예요
우리 부부
사는 만큼 곱게 채색되는
참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해요
여보!
미안하고 사랑해요
갈대와 사랑을
겨울바람 펄럭이는
은빛 갈대밭
늘 그대와 손잡고
오랜 그리움을 쏟아 낸다
지난밤 동침한 흔적으로
꽃잎처럼 얼굴 붉히고
저리도 여린 자태로
들꽃처럼 숨어 우는지
홀로 바람에 서성이며
내일 또 가는 들길에
내 몸짓에 파묻히는
소중한 연인도 없으리라
※ 계간 문학세상 신인상, 금강축제 금강문학상, 한국농촌문학상 대상, <한국문학신문> 대전광역시 본부장,
문화체육관광부 ‘책 읽기 캠페인’ 초청 작가, 시집 유천동 블루스, 오월의 연가 등, powerg@choi.com
목디스크
이 경 숙*
참으로 오랫동안 오른쪽으로 잠을 잤다
목은 점점 아파오고 왼쪽으로 고개가 안 돌아가
몸 전체를 돌려야 한다
참으로 오랫동안 오른쪽으로만 잠을 잤다
외로움이 커 갈수록 이불의 두께는 두꺼워져 가고
뜯긴 구들장처럼 온기는 마음을 빠져 나갔다
가슴으로 곱씹던 초록의 언약이
아픈 어깨 밑으로 바스러질 때쯤
등 뒤의 담장도
저 홀로 허물어져 갔다
통증이 몸을 돌려 눕힌다
참으로 오랜만에 왼쪽으로 잠을 잔다
사랑의 말들은 더 이상
몸 하나를 데우지 못하고
어설픈 몸짓으로
가을 속에서 바스러져 버린다
익을 대로 익어 주저앉은 통증이 말을 건다
안개는 더 이상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는다고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 마음을 비우라고
※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상상의 힘≫ 작품상(2009) 수상, asysook@hanmail.net
가을 일흔아홉
김 택 중*
소주 두 병에
지린내 나는 굴 한 판 먹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면 벌떡 일어서
애국하느라 소리를 향하며
몸 들던 피곤한 술잔이었다
가끔 버티고 싶기는 하지만
쭈뼛거리며 눈치를 봐야하는
그런 날도 지났다
우리 정말 잘했다
그래서 이제 힘깨나 쓸 나이 되니
해병대 지원하듯 자랑스러운 것 잊고
자기학대가 살아나니 그래서
대를 이어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있는
이 날들 참 잘했다
얼마나 가야
몸에 밴 쇠가 스스로 결을 풀지
아직은 아닌 것 같아서
홀로 설 수 없는
그래서 제일 독하게 몸을 버려야하듯
버려지는 선생과 학생,
국가와 박정희, 이후
박 근 온통 마조히즘이다.
비오는 날
비가 온다고 밖으로 나가
깊은 웅덩이 찾아가는
맹꽁이 같은 사랑
길 잃으면 안 되지
하늘마다 구멍 내는 빗방울
집에서 벗어나는 충동
몸의 게놈구조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유전적 결합
내부에서 소리 향내가 난다
비마지 가서 손바닥 뒤집듯
쉽게 세상 벗어나
또 다른 웅덩이 빠질까
마음만 쏟아져 내리는 날
끈적거리며 맹꽁이 향내가 따라다닌다
머리도 사라지고
가슴에 핀 몸 냄새도 지우며
황홀한 술잔도 거두어
내가 논데 담그길.
※ 충남 논산 출생. 계간 다층(2007) 등단. 저서 현대소설의 문학지형과 공간성 연구, 현대시의 논리와 그 해석,
문학의 창조적 대화 등 현재, 우송대학교 한국언어문화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