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he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칼빈의 처음 제목형태)는 종교개혁의 중심이 되는 활발한 성경적 은사를 가진 젊은이로부터 만들어졌다. 이 책의 저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또 그의 "돌연한 회심" 날짜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본 책은 고뇌와 투쟁의 산물이다. 소년시절을 대 교구 도시인 노용에서 보낸 후 그는 일찍이 파리 대학에 진학하였고 후에 오를레앙(Orlans)과 부르그(Bourges)에서 법학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법조계를 떠나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왕성한 활동기간(1523-1533) 중에 그는 성경학, 복음적 열정, 박해 및 순교 등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그 시대의 종교적 위기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대학의 총장이 되었을 때, 칼빈은 콥이 1533년 11월 1일 강연한 총장 연설과 여러 가지로 관련되었다. 이 강연은 확실한 개신교적 발언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성급하였다. 도리어 이것은 마가렛 드 앙골름(Marguerite d'Angoulme)이 통솔하는 성경적 휴머니즘에 영향을 미친다. 그 공작부인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성경을 불어로 번역한 영향력 있는 매우 나이가 많은 노학자 르페브러(Jacques Lef vre of taples)였다. 루터와의 친분이 약간 있었음이 이 연설문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종교개혁 원리들을 신봉하였던 사람이 썼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연설문의 대담성은 당국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고, 칼빈은 그것과 관계되었기 때문에 피신하였고 그 다음해 거의 일 년 동안 숨어서 지냈다. 네락에 있는 르페브러를 방문한 후 그는 봄에 노용(Noyon)으로 가서 새로운 결정에 의해서 행동하였다. 그 곳에서 1534년 5월 4일, 어린 시절에 교육받았던 성직을 포기하였으므로 미개혁 교회 및 성직자와의 관계도 끊어버렸다. 비개신교 성경운동의 지도자로 은퇴한 르페브러와의 대담이 그를 개신교에 확실히 참여하게 만든 "회심"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 그 후에 복음주의적 신앙을 위한 계속적인 활동은 그칠 줄 몰랐다. 그 해(年) 말엽에 그는 열렬한 두 개의 서문을 썼는데, 이것은 조카 올리버땅(Pierre Robert Olivtan)이 삐에몬의 왈도파(Waldenses of Piedmont)를 위하여 준비한 불어 성경의 신약과 구약을 처음에 발행할 예정이었다. 이 책이 1535년 6월에 출간되었을 때, 바젤에서 칼빈은 체류하였고 그의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의 원고는 거의 완성된 것이 확실하다. 이 책을 저술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아직 프랑스에 있었던 1534년경일 수도 있다. 뒤 틸레트(Du Tillet)가(家)는 앙골름의 끌래(Claix)에 "조용한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요약하면 그가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수많은 장서들이 후에 그의 저술에 영향을 끼친 자료들을 공급해 주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상황은 새로운 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들에게는 점차적으로 위험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어디를 가든지 질문자들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칼빈은 연구를 할 수 있는 안전한 피신처를 해외에서 찾기로 결정하였다. 1535년 1월 초에 그는 프랑스를 떠나 바젤로 갔다. 그 당시 많은 개신교인들은 박해가 점점 심해져 그곳을 피해 도주하고 있었다. 국왕인 프란시스 1세는 1534년 10월 18일의 벽보 사건에 대해 격분하였다. 미사에 대하여 격렬히 반대하는 내용이 수록된 벽보들이 공공건물에 붙었고 심지어 궁전 문에까지 붙여졌다. 수많은 혐의자들이 투옥되었고 화재가 연일 발생하였다.
칼빈은 1558년 발간된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대해 증언해주고 있다. 그는 연구를 위하여 "조용한 은신처"를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난 후 프랑스에서 발생된 수많은 화재 사건들과 그것에 관한 왜곡된 설명을 들은 상황을 간단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한다. 칼빈이 "바젤에서 아무도 모르게 은신하고 있는"동안에 박해가 발생된 격렬한 반프랑스의 운동을 완화시키려고 프랑스 궁중에서 발표된 거짓 성명서들이 독일권에서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 칼빈이 말한 대로 이 성명서들은 고난 받는 이들을 "제세례파 교도들과 선동적인 사람들"로 몰았던 것이다. 이러한 성명서는 파리의 감독이며 왕을 대신하여 독일 정부와 신학자들과 교섭하였던 기욤 뒤 벨라이(Guillaume du Bellay)가 작성한 것으로, 2월 초에 발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칼빈은 이런 성명서들이 앞으로 야기될 유혈사태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것임을 알고, 침묵을 지킨다고 하면 불충성의 비난에 대해서 전혀 변명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하는 신실하고 '거룩한 순교자들'이 그렇게 부당하게 잘못 전해지고 있는데,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당면해 있는데 그는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몇몇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친구들이었고, 그 중에는 특히 파리의 상인이며 삐에옹 출신의 왈도파 교인이었던 에띠엔느 드 라 포즈(Etienne de la Forge)는 1535년 2월 15일에 화형을 당하였다. 그의 말대로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한 죽음을 당한 형제들이 부당하게 모욕당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을 변호하고" 외국인들을 감동시킴으로써 똑같은 고난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처절한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1535 년 1월부터 8월까지 그의 책 저술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프랑스에서 발생하는 큰 사건들을 계속해서 들어 알고 있었다. 모든 출판 활동을 금지하려는 왕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1월 말에는 박해가 최악에 이르렀고, 이런 상황은 왕의 종교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되는 노(老) 추기경 뒤쁘라(Duprat)의 죽음으로 박해가 약간 소강상태에 다다른 7월까지 계속되었다. 독일 루터파 교회와의 협상이 프랑스 궁정에 의해 2년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결렬되었다가 당시에 다시 재기되었다. 교회 개혁에 대한 협의차 파리를 방문해 주기 원하는 초청장이 멜란히톤(Melanchton)의 부처(Bucer)에게 전해지고, 이것은 칼빈이 [Institutio] 원고를 탈고한 후인 8월 28일까지는 계속되었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왕은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상황이 우호적일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똑같은 기간 중에 칼빈은 유럽에서 개신교 주장이 뮨스터(Mnster)에 중심을 둔 혁명적인 재세례파 운동으로 소문이 나빠지는 것을 염려할 이유가 있었다. 재세례파 옹호자들은 오랫동안 공격을 당하였다가 1535년 6월 말에 비참하게 진멸 당하였다. 칼빈은 그의 책이 1535년 프랑크푸르트 가을 전시회까지는 출간되기를 원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강요 서문에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에 그의 이름과 날짜를 함께 기록한 8월 23일에 그의 원고는 탈고되지 않았다. 바젤의 인쇄업자인 플래터(Thomas Platter)와 라지우스(Balthasar Lasius)는 편집에 있어서 오포린(Jean Oporin)의 협력을 받아 즉시 작업을 진행하여 1536년 3월에 이 강요를 발행하였다. 초판의 라틴어 제목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 강요, 구원론에서 취급 할 전체적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모두 포함했다. 경건에 열성있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가치가 있는 책이며, 최근 판이다. 가장 기독교적인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이 책은 신앙 고백으로 왕에게 헌정되었다. 저자, 노용의 요한 칼빈, 바젤, MD XXXVI.
2. 두 부분으로 구분된 제목은 모두 심오한 뜻을 갖고 있다. Institutio란 단어 자체는 "교훈"(instruction) 또는 "교육"(education)이라는 의미로 익숙한 것이다. 본 책은 기독교 교리 개요로서 칼빈은 믿음의 형제들을 위하여 박해자인 왕에게 드리는 고백으로써 구성되었다. 왕에게 드리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탄원서인 서문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것이 기록되었을 당시의 역사적 위기를 실감나게 한다. 종교적 심성에 대한 기본적 관심은 그 계획이 장엄하며 명확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칼빈 시대의 문제점들과 개혁 교회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깊게 관계된다. 칼빈이 프란시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를 왕의 죽음 이전과 그 후에도 Institutio의 후기 판에 그대로 쓰인 것은 그의 특징적 방법이다. 그때 상황을 절실히 인식하며 쓰인 것이지만, 강요는 박해당하는 성경적 신앙 소유자들을 영구적으로 완전히 변호하는 것이다. 1536 년의 초판은 6장으로 되어 있다. 첫 네 장은 율법(십계명 해설), 신앙(사도신경 해설), 주기도, 성례전으로 되어 있고, 이것은 루터의 교리문답서의 순서에 따라 배정된 것이다. 제 5장은 중세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5가지 성례전(견신례, 고해성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에 관한 논박으로 되어 있다. 제 6장은 기독교인의 자유의 개념을 해설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논술한다. 그 책은(간단한 색인을 포함해서) 크기가 6⅛×4인치의 8절판이며 쪽 수는 520쪽이며 길이는 신약성경의 에베소서 끝까지 해당한다. 저자는 그것을 또다시 확장하여 1559년에는 최종 형태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분량은 대략 구약성경과 공관복음서를 합친 것과 똑같았다. 본서 출간 6개월 후에 칼빈은 제네바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출판한 지 1년이 채 못 되어 품절되었고 개정판을 발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힘든 노동을 하면서 이 일에 착수하였지만, 칼빈이 개정판을 완성한 것은 바젤에 머물러 있는 1538년에 완성했다. 인쇄업자가 바뀐 것을 포함하여 약간의 시간이 지연된 후에 개정판은 벤델린 리헬(Wendelin Rihel)에 의해 1539년 8월에 슈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서 발간되었다.
제목이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아마 개정판과 초판을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책 제목 앞에 나오는 "마침내 진정으로 제목에 적당한"(at length truly corresponding to its title)이란 이상한 문구는 초판의 상세한 제목의 가정들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확실히 새로운 판의 우월감을 내포하고 있다. 칼빈은 그 책에서 구체화시킨 변화들을 스스로 축하할 이유가 있었다. 이 책은 6장 대신에 17장으로 되어 있지만 분량은 비슷하다. 이 책의 학문적인 비중은 어거스틴(Augustine), 오리겐(Origen) 및 기타 교부들 그리고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키케로(Cicero), 세네카(Seneca) 및 최근의 몇몇 학문적인 저술 등을 인용하여 거의 모두 포함시킴으로써 상당히 증가되었다. 성경 인용도 역시 증가되었다. 증가된 장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과 차이점, 예정과 섭리 및 기독교인의 생활 등, 칼빈의 사고 형성에서 그 중요성에 인정되는 주제들을 취급하는 장들이 몇 개 있다. 1539년 8월 1일 독자에게 보내는 간략한 서신에서 저자는 초판에 결함이 있음에도 그것에 대한 반응이 호의적인 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말하며, 개정판을 내는 목적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신학 지망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감독할 준비"를 시키는 데 사용될 하나의 교과서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의도로 이 책의 형태도 책상용으로 사용하기 알맞게 제작하였다. 계수에 오차가 있을지라도 그 책은 총 346쪽이며, 크기는 13×8인치이고, 학생이 기록할 수 있는 넓은 여백이 있다. 프랑스에도 보급된 개정판 일부에는 칼빈 이름의 "Alcuinus"로 읽도록 순서와 절차가 바뀌어져 있다.
초판 발행 무렵에 프랑스어 역이 칼빈 자신에 의해 준비되고 발행됐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프란시스 다니엘(Francis Daniel)에게 보내는 1536년 10월 13일자 서신에서 칼빈은 제네바 정착과 그 후의 와병에 대해 전하면서 그의 "소책자"(libellus)의 프랑스어 판 준비에 계속적으로 집념하였다고 말한다. 그 "소책자"가 강요(Institutio)였다는 가정은 가능성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단계에서 칼빈이 그 논문을 가리켜 libellus라고 하였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1539년 판 서문에서 1536년 판에 대해 사용한 말은 opus(저작번호)이기 때문이다. 로잔 논쟁(Disputation of Lausanne) 직후에 다니엘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믿음의 훈련과 고백(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의 준비에 바빴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의 프랑스어 판이 일반적으로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라틴어 판은 실제로 1538년 판과 똑같은 것이다. 이것은 강요의 핵심 논증들을 간략하게 기술한 것으로서 간략하고 간결한 문체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실제로 "소책자"이지만, 그것의 라틴어 저작과 프랑스어 번역 출판에는 칼빈이 교회 재조직이라는 새로운 사업을 하면서 수주일 동안에 가질 수 있었던 모든 시간들을 소모하였다. 그 해 가을에 칼빈은 출판하는 일 때문에 강요의 저작을 번역할 수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1536년 또는 1537년 프랑스어 판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프랑스어 판은 1541년 판이 유명하며, 칼빈이 1539년 라틴어 판을 번역한 것이다.
3. 프랑스어 판은 제네바의 장 기라드 출판사에서 발행되었고, 7¼×4½ 인치의 소형 판이며 822쪽인, 약간 거치른 인쇄의 소형 책이다. 이 책은 휴대가 간편하며 라틴어를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 계획되었다. 프랑스에서 발행 허가의 희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발행 부수가 제한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프랑스어권 스위스 사람들이 주 대상이었다. 그 책의 서두의 개요에는 학술적 사용에 대한 말이 없다. 목적은 "구원의 교리에 대한 교육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章)의 순서에 한 가지 변화가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1539년 판에 프랑스 옷을 입힌 것뿐이다. 칼빈의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프랑스 산문의 발전을 연구하는 학도들은 그것의 문체에 대하여 극찬하였다. 또한 그것은 연속적으로 중대한 사상의 표현 매개체로서 프랑스어가 최초로 사용한 작품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프랑스어의 특색을 그렇게 창조적으로 표현할 책이 소년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라틴어로 생각하는 저자의 번역이라고 하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 책이 프랑스에 보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가 취해졌고, 다른 억압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1542년 7월과 1544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책들을 파리의 노틀담 사원 앞에 쌓아 놓고 불태운 사건이었다.
초판의 모든 변경 요소들은 저작이 방대하면서도 그대로 존속된 것은 물론이지만, 새로운 서문들과 첨가된 자료들은 신학도들과 혹은 평신도들을 막론하고 그들에 대한 교육이 점차 저자의 의도하는 목표로 되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1543년의 라틴어 제 3판(슈트라스부르그에서 리헬에 의해 두 번째 인쇄된 판)에는 네 장이 추가로 삽입되었고 그러므로 장(章) 수는 총 21장이 되었다. 이 판은 1545년에 재 발행되었고, 그 해에 증보판이 제네바의 기라드 인쇄소에서 간행되었다. 마찬가지로 기라드에 의해 출간된 1550년의 라틴어 판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1550년 판에서 주목할 만한 발전은 번호를 붙여서 절을 구분한 점이다. 총 21장에서 총 1217개의 절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색인이 권말에 추가되었는데, 첫 번째 것은 이 책에서 다룬 주제들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저자가 인용한 성구와 저자들에 대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인쇄업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1550년에 파리에서 제네바로 왔다. 그는 프랑스에서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던 성경발행과 종교서적 발간이라는 그의 일생의 사업을 제네바의 목회자들과 밀접하게 협력하며 재개하였다. 이 사람이 곧 로베르 에스띠엔느 혹은 로베르투스 스테파누스(Robert Estienne or Robertus Stephanus)이다. 그는 새로운 학문과 종교개혁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헌신한 학자풍의 인쇄업자 가문인 대(大)에스띠엔느 가문의 유명 인물이었다. 1553년 2월에 그는 칼빈이 아직까지 보지 못했던 가장 훌륭한 [강요]를 발행하였다. 이 책은 13½×8¾인치의 2절판 크기였고 활자체는 아름다웠으며 오자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왕에게 드리는 헌사와 색인을 제외하고 본문만 441쪽이었다. 그러나 내용면에는 1550년 판에서 더 진전된 것이 없다. 아담과 장 리버리(Adam and Jean Rivery)형제들이 이 책의 본문은 바꾸지 않고 색인만 증보하여 8절 크기의 소책자로 1554년에 제네바에서 재 발행하였다.
현대의 독자들 중에는 초판에 더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번역서의 대본으로 사용된 1559년의 증보판보다는 1539년 판이나 그것의 프랑스어 판인 1541년 판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초기 단계에서 그들은 말하기를, 그 책이 덜 지루하고 논쟁적이며 충분히 포괄적이고 읽기에 더 편하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 반박한다는 것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말할 나위 없이 초기 판들을 재 발행하는 일은 적절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 판본들에 대한 저자 자신의 평가를 무시하고,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이상에 맞도록 그의 저서를 개작하기 위해 수많은 세월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행한 노력의 결실을 말살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1559년의 라틴어 판은 칼빈의 가장 명백한 권위 있는 인정서를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항상 주장되어야 한다. 이 책 서두에서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은 그의 저서를 풍부한 것으로 만들었던 그 이전의 개정판들에 대해 언급하고, "내가 기울인 노력들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이 저서가 현재와 같은 순서로 정리되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해 본 적이 없다"고 덧붙여 말한다. 그는 4일 동안 계속해서 열을 앓으면서 개정작업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이 일을 수행하도록" 만든 열성의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말들 가운데 표현된 성취감은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그 결과 라틴어 판에 대한 결정판이 되었고 1863년까지는 그것만이 전적으로 재 발행되었으며 번역판과 요약 판의 대본으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이 결정판을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에 칼빈 신학에 대해 관심과 존중이 점차적으로 증대되었고,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신학적 저술들의 분명한 특징이 되었다. 연구의 초점이 우선적으로 [강요]에 집중된 것은 당연하며, 현대 연구에서 그 저서를 인용하는 경우에는 1559년 판을 인용하는 것이 통상적인 예이다. 그 책의 절을 표시하고 인용하게 해주는 번호는(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처럼)신학적 논의에 있어서 공용어의 일부로 여긴다. 이 라틴어 판은 그 이전의 판본들보다도 분량 면에서 80%정도가 더 많다. 이 책이 모든 나라에서 오랫동안 관례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므로 학문적 교류를 목적으로 그 이전 판들로 돌아갈 실제적 가능성은 현재 전혀 없다.
이 책은 제네바에서 인쇄되었고 로베르 에띠엔느 인쇄소에서 1559년 8월 16일에 출간되었다. 앞에서 인용된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에 칼빈이 서명한 날짜는 8월 1일이다. 유명한 인쇄업자요 생산적인학자였던 에띠엔느는 3주일 후에 사망하였고, 따라서 최종 형태의 [강요]는 그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그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n libris quatuor nunc primum digesta, certisque distincta capitibus, ad aptissimam methodum; aucta etiam tam magna accessione ut propemodum opus novum haberi possit.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now first arranged in four books and divided by definite headings in a very convenient way: also enlarged by so much added matter that it can almost be regarded as a new work.
다음에는 저자의 이름이, 그 아래에는 발행인의 이름이 유명한 올리브 가지 마크와 함께 나오고 맨 밑에는 GENEVAE / M.D.LIX이다.
4. 칼빈은 라틴어 판 강요를 더 이상 개정하지 않았다. 제네바의 장 끄레스뺑(Jean Crespin) 출판사에서 증보된 프랑스어 판이 1560년에 발행되었다. 칼빈은 이 번역판을 직접 준비하거나 주도하게 지도하였다는 것이 대다수의 현대 학자들의 견해이다. 이 책의 라틴어 판과 프랑스어 판은 똑같이 그 수요가 모두 광범위하였고 칼빈이 사망하기(1564) 전에도 여러 번 재판되었다. 1561년에 라틴어 판이 두 가지로 인쇄되었는데, 하나는 슈트라스부르그의 칼빈 전담 인쇄업자인 리헬이 출판한 것으로 보이는 매력적인 2절판 책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앙트완느 레불 또는 안토니우스 레불리우스(Autoine Reboul or Antonius Rebulius)가 만들어낸 8절판 크기로 980쪽 분량의 책이나, 레불은 그가 권말에 장, 절을 예시하면서 알파벳순으로 색인을 삽입시킨 것은 독자들 다수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쪽 번호 없이) 59쪽 분량의 다소 방대한 이 색인은 후에도 라틴어 판 및 프랑스어 판과 함께 인쇄되었고, 때로는 아래에 언급된 말로라(marlorat)의 두 색인과 함께 인쇄되기도 하였다. 레불이 펴낸 책은 읽기 쉬운 작은 활자로 조판되었고 참조 성구가 적절하게 되어 있다. 후대의 라틴어 판들 가운데 두 가지가 특별히 중요한 편집상의 문제이다. 이것은 라이덴(Leiden)의 유명한 인쇄업자들인 엘제비르(Elzevir) 가문이 1654년에 출판한 유명한 2절판 [강요]와 1667년에 암스테르담의 쉽퍼(J. J. Schipper)가 발행한 [Opera Calvini]의 제 9권이다.
1560 년 프랑스어 판은 1561년에 제네바에서 두 차례 재판되었다. 1562년에는 제네바와 까엔(Caen)에서 각각 1회씩 인쇄되었고, 장소와 발행인 표시가 없는 두 가지 판본이 발행되는 등 모두 4회 발간되었다. 1563년에는 리용(Lyons)에서, 1564년에는 제네바에서 각각 출판되었다. 제네바의 인쇄업자 쟈크 부르죠아(Jacques Bourgeois)가 1562년에 발행한 8절판은 어귀스뗑 말로라(Augustin Marlorat)가 만든 두 개의 색인을 하나로 합한 최초의 [강요]였다. 말로라는 학자적인 성직자이며 이류 신학적 작가로 같은 해에 루엥(Rouen)에서 박해자들의 손에 일생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가 만든 두 개의 색인들 중에는 첫 번째 것은 강요에서 다룬 중요 문제들의 색인이며, 다른 하나는 인용되거나 강요에서 언급된 성구 색인이다. 말로라는 재미있는 서문을 썼는데, 그는 이전에 발행된 판본들의 참조 성구의 애매함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칼빈이 오로지 확인 문구만을 사용하는 곳에서도 성구를 완전히 제시한다. 이 유용한 색인들의 라틴어 판은 그 후의 라틴어 판 [강요]와 함께 간행되었다. 예를 들면, 프란시스 뻬렝(Francis Perrin)이 1568년에 제네바에서 펴낸 강요와 후대의 수많은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네덜란드어 판들이 그것들을 사용하였다.
프랑스어 이외의 외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1536년 판은 1540년에 부르고스(Burgos)의 프란치스꼬 엔지나스(Francisco Enzinas)에 의해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 같다. 그는 멜란히톤(Melanchton)의 친구이며, 크랜머(Cranmer)의 보호를 받고, 칼빈의 통신원이었고 유명한 신약 학자요 번역가였다.14a)만일 최초의 스페인어 판이 칼빈 자신의 프랑스어 판보다 실제로 앞선 것이라면, 최초의 이탈리어 판은 보다 늦은 프랑스어 판에 의거하였다. 이탈리아사람이며 청년시인이며 종교적 이유로 제네바에 피신한 파스깔리(Giulio Cesare Pascali)가 그곳에서 1557년 이탈리아어 판을 만들어냈다. 파스깔리는 1551년에 개정되고 1553년과 1554년에 재 인쇄된 프랑스어 판을 일차적으로 이용하였다. 그것은 제네바의 이탈리아인 피난자 교회의 가장 유명한 회원이며 비꼬(Vico)의 후작인 갈레아조 까라치 올리(Galleazzo Caracc oli)에게 헌정 되었는데, 이 사람에게는 칼빈이 일 년 전에 그의 고린도전서 주석을 헌정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의 수많은 번역판들은 완성된 [강요]를 대본으로 하였다. 일찍이 1560년12월 5일에 네덜란드어 판이 엠덴(Emden)과 도르트(Dort)에서 동시에 출판되었는데, 번역자는 자기 이름의 머리글자만을 따서 "I.D."라고 만 밝히고 있다. 이 머리글자들은 요한네스 뒤르키누스(Johannes Dyrkinus d.1592)를 의미한다. 그는 상당히 저명한 목사요 저술가였고 그 당시에는 엠덴에 체류하였다. 1572년에는 하이델베르그에서 최초의 독일어 판이 발간되었는데, 이는 그곳의 신학부 교수들이 작성한 것으로서 해석적인 개론이 첨부되어 있다. 이 번역판은 1582년에는 하이델베르그에서, 그리고 1597년에는 하나우(Hanau)에서 재 발행되었다. 같은 해에 스페인어 판이 출판되었다. 이것은 스페인계 피난자인 치프리아노 드 발레라(Cipriano de Valera)의 작품이다. 그는 제네바에 체류한 뒤에 영국에서 수년간을 보냈으며 캠브리지에서 매스터(master) 학위를 받았다. 1599년에 사망한 지리크 슈트렉(Jirik Strejc)의 체코어 판은 1617년에 제 1 권과 제 2 권이 발행한 것뿐이다. 헝가리어 판은 헝가리 개혁교회의 유명한 목사요 학자이며 시인인 알버트몰나르(Albert Molnr)에 의해(d. 1634년경) 1624년에 하나우에서 발행되었다. 아랍어 판이 취리히의 동양학자 죤 헨리 핫팅거(John Henry Hottinger 1667년 사망)에 의해 출판되었다고 학자들이 주장하였지만 입증된 적은 없다.
톨룩(A.Tholuck, 라틴어, 1834, 1846, 1872), 바움가르트너(F. Baumgartner, 1560년 프랑스어 판, 1888), 시주(A.Sizoo, 라틴어 판의 네덜란드어 역 판, 1931, 1949) 등에 의한 [강요]들은 오직 참고서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이다. 라틴어 판을 번역한 베버(O.Weber)의 독일어 판(단행본, 1955)과 1560년 불어 판을 개작한 까디에르(J.Cadier)의 현대어 판(4권, 1955-1958)에는 분석적인 문제와 분류된 색인이 제시되어 있다. 마사끼 나까야마(Masaki Nakayama)가 라틴어 판을 번역한 일본어판이 1934년에 동경에서 출판되었고 1949년에 다시 발행되었다.
5. 본서의 독자들은 최초의 영어 판 강요 보다 상세하게 언급하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1559년 판 이전의 라틴어 판들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보급되었지만 기독교인의 생활을 취급한 제3권 6장10장만이 영어로 번역되어 권말에 별첨되었을 뿐이다. 그때 전 작품이 검은 활자의 2절판 크기인 멋진 책으로 나왔는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The Institution of Christian Religion, wrytten in Latine by maister Jhon Calvin, and translated into Enhlysh according to the authors last edition. Seen and allowed according to the order appointed in the Quenes Maiesties instructions.
청동 뱀이 휘어감은 나무 십자가를 악수한 손들이 받쳐진 그림의 상징이 인쇄업자의 "주후 1561년에 레놀드 울프(Reinolde Wolfe)와 리차드 헤리슨(Richarde Harison)이 런던에서 인쇄함"이라는 간기(刊記) 다음에 나온다. 그 책 마지막 쪽에 발행 장소는 "Paules Churcheyard"이며, 발행일은 "1561년 5월 6일"이라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번역판은 라틴어 판이 제네바의 스테파누스(Stephanus) 출판사에서 출간된 지 21개월이 채 못 되어 런던에서 인쇄되었다. 그러나 발행인들은 쪽 후면에 책이 늦게 출간된 이유에 대한 사과 내용의 문구를 눈에 잘 띄지 않게 삽입하였다. 번역하는 작업은 죤 도우즈(John Dawes)에게 맡겼지만, 그는 "12개월 이상이 지난 후에" 원고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발행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완전히 다시 번역하도록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본문 마지막에는 머리글자 "T.N."이 인쇄되었고, 그 다음 6쪽에는 각 장 제목과 간단한 색인 목록이 있다. 1562년의 제2판에서 역자는 간단한 서문을 삽입하고 이름의 머리글자로 서명하였다. 제목 쪽에 "Thomas Norton"이란 이름을 처음 기록한 것은 개정판인 제3판 때부터였다.
토마스 노턴(Thomas Norton, 1532-1584)은 그의 번역본이 출판되었을 때 약 29세였다. 그는 이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노턴과 그의 친구요 법학도인 토마스 새크빌(Thomas Sackville)의 합작품인 The Tragedy of Gorboduc이 1561년 1월 5일 밤에 최초로 상연되었고 그리고 2주일 후에는 명령으로 여왕 앞에서 공연되었다. 영광스럽고 매우 감동적인 무운 시극은 현대 영국 비극의 최고봉이며 노턴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그가 라틴어와 영어로 지은 초기의 시들처럼, 대단한 성공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일부 시편들을 시로 개작한 작품들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친숙하였으며, 그와 함께 종교서적의 번역서들과 교회의 문제를 논쟁적으로 취급한 몇 개 산문들도 유명하였다. 그는 서머셋 경(Duke of Somerset)이 칼빈과 편지를 교환하던 때에 경에게는 매우 조숙한 시기였다. 서머셋 사후에 칼빈이 그의 자녀들에 대해 안부 편지를 쓰고자 할 때, 답신을 대신 하도록 임명받은 사람이 노턴이었다. 1555년에 그는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딸과 결혼하였고, 후에는 대주교가 남긴 중요한 원고들을 공개하였다. 확실한 칼빈주의자로서 또한 그는 청교도들의 교회개혁조치들을 지지하였고, 한때는 감독들을 비판하여서 투옥되기도 하였다. 노턴은 1558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국회의 논쟁과 위원회에서의 활동으로 명성을 떨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그는 로마 카톨릭, 특히 1569년의 반역에 관계된 자들의 재판에 참여하였고, 그것으로 인하여 거칠고 비난받을 만한 열정을 보였다. 학자적이고 다재다능하였지만 노턴은 문학과 직무에 있어서 주요 역할을 담당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그가 [강요]의 영어 번역자였다는 점에서 칼빈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1574년에 제3판에서 그는 어떠한 환경에서 번역작업을 진행하였는가를 정확히 보여주기 위해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최초의 서문을 개정하고 증가하였다. 노턴은 유명한 두 인쇄업자들로부터 여왕을 위해 그렇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에드워드 휘트쳐치(Edward Whitchurch)이다. 그는 리챠드 그라프톤(Richard Grafton)과 함께 1539년에 Great Bible을 발행하였고 1549년에 [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출판하였다. 또 한 사람은 레지날드 또는 레이놀드 울프(Reginald or Reinolde Wolfe)이다. 그는 슈트라스부르그 태생으로 영문 서점가의 중심인물이었다. 역자가 번역을 마무리한 곳은 바로 그레이프라이어스(Greyfriars)에 있는 휘트쳐치의 집이었다. 노턴은 휘트쳐치의 부인이 그랜머(Granmer)의 미망인 곧 자기 본부인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다. 휘트쳐치가 1561년 후반에 사망한 후 쓴 편지에서 노턴은 그를 가리켜 "노련한 열정의 복음 전도자", 즉, 내 생애에 가장 솔직하고 진실한 친구였다"고 한다. 그는 여러 "학자"들의 비평적 조언에 감사를 표하면서 특히 데이비드 화이트헤드(David Whitehead)의 이름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화이트헤드는 그의 번역문을 라틴어 본문과 일일이 대조하였다. 화이트헤드는 1555년 프랑크푸르트(Frankfurt) 투쟁에서 에드워드의 "기도서"를 지지한 당과 연관되어 망명한 자로서 전(前) 메어리 여왕 당원이었다.(독학으로 취득하였지만) 학식이 높은 유명한 목사였으며, 그는 아마그(Armagh) 교구의 감독직을 사양하였고, 캔터베리(Canterbury) 감독직도 거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1845 년에 헨리 비버리지(Henry Beveridge)는 "노턴이 그의 일을 대체적으로 아주 충실하게 해냈다"고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어의 문체를 크게 손상시키면서 라틴어형식을 지나치게 고수하려한 점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노턴 스스로가 칼빈의 저서가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의 논쟁들과 얽혀 있다"는 점에서 몹시 난해하기 때문에, 자신은 칼빈이 의미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영어의 표현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칼빈의 말을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설명한다. 때로는 이 방법이 부자연스럽지만, 비버리지처럼 노턴이 "라틴어식 영어"를 사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오해하기 쉽다. 그의 번역이 엘리자베스 시대 초기의 전형적인 명쾌한 산문은 결코 아니다. 어떤 권위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 당시에 "대부분 성직자들과 번역자들의 작품"이었고 그 다음 세대들의 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허세와 꾸밈이 전혀 없었다. 제3판에서 노턴은 인쇄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오자들을 바로 잡을 수 있어서 만족하였다. 그는 이 오자들이 "자신의 글씨가 난필이라는 점과 그의 사본들에 나타나 있는 혼선들, 그리고 인쇄업자들만이 알고 있는 몇 가지 다른 이유들" 때문에 발생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2차 개정 때에 약 300곳의 잘못된 곳을 지적하였고, 제3판에는 그러한 것들이 실제로 없다고 믿는다. 번역판에는 레불(A.Reboul)이 작성한 라틴어 색인의 번역판("Table of Matters Entreated of")이 당시 처음으로 첨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말로라(Marlorat)가 작성한 두개의 색인이 그의 서문 다음에 수록되었다. 이 1574년 개정판은 발행된 이후 약간의 변형을 거쳐 1578, 1582, 1587, 1599, 1611, 그리고 1634년에 재 발행되었다. 이 판본들, 특히 마지막으로 언급된 판본은 언어 변화에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므로 1634년 판에서는 "Jhon Calvin"이 "John Calvin"으로, "truthe"가 "truth"로 "glorie"가 "glory"로, "geuen"이 "given"으로 바뀌었고, 초판에서 사용된 약어들이 모두 없어졌다. 이 작품을 현대어로 개정하려는 시도는 1762년의 글래스고우(Glasgow) 판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판본은 당시 유행하던 철자법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라틴어식 표현이나 고어체의 표현들을 쉽게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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