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瑞雪), 그리고 남도답사 1번지
어제, 뭔가가 오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은 날씨더니 기어코 눈이 내렸다.
늦은 잠에서 깨어 창밖을 보니 세상에나! 이렇게 멋진 손님이 찾아오는 사이 나는 어느 꿈속을 헤매고 있었을까?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눈은 우리 뒤를 조분 조분 밟아와 이렇게나 황홀한 춤의 잔치를 펼쳐 보인다.
올해의 첫 눈.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눈은 내리는 게 아니라 날아오른다. 그것도 아주 가볍게, 최대한 몸을 줄여서... 나도 저 군무(群舞)에 섞여 들고 싶다. 내 속의 무거운 것들 다 던져버리고 공기처럼 가볍게 와아아 소리 지르며 저들을 따라 날아오르고 싶다.
전라도 답사 - 태백산맥의 현부자집을 시작으로 화순 벽나리 미륵, 능주 조광조 유허지(遺墟址), 화순 고인돌 공원, 운주사, 쌍봉사까지 화순을 동서남북(?)으로 종단, 횡단하며 화순의 3분의 2를 떼었다. 화순에는 그 외에도 적벽과 물염정(勿染亭) 등 볼만한 곳이 더 있지만 남해고속도로의 일요일 정체가 자꾸 우리 발목을 잡았다.
몇 년 전 봄방학 하던 날, 학교 선생님들의 답사에 입은 옷 그대로 따라 붙어 화순까지 갔었다. ‘구름이 머무는 절’ 운주사(雲住寺)는 천불 천탑으로 워낙 유명한 절이라 몇 번이나 답사를 갔었지만 그 해 답사 때엔 운주사 입구 ‘용강 식당’에서 먹은 추어탕과 숙회의 맛이 잊혀지지 않는다. 운주사엘 가면 꼭 ‘용강 식당’에서 밥을 먹어보기 바란다. 경상도 추어탕과는 아주 다른 전라도 추어탕의 진수를 맛볼 수 있고 ‘숙회’는 특히 먹어본 사람을 다시 부르는 묘한 맛이 있다. 여행의 기억은 시각보다 미각으로 오래 남는다.
벽나리 미륵은 정확한 명칭이 ‘대리(동네 이름)석불’인가 하는 이름이었는데 표지판이 없어 화순 읍내를 몇 번이나 돌았다. 다른 곳은 다 가봤지만 벽나리 미륵은 이상하게 한 번도 볼 기회가 없었고, 벽나리란 이름이 풍기는 이미지가 그 불상을 늘 환상적으로 그려보게 만들었었다.
‘천상엔 하늘이 있고 지상엔 소항(소주, 항주)이 있다’는 말에 속아 상해, 항주, 소주 여행을 얼마나 꿈꾸었던가! 항주와 소주는 내 기억 속에서 부풀리고 확대되어 한 해의 마지막 날 중국행 비행기를 탔을 땐 드디어 소항을 보는구나 가슴이 다 설레었었다. 하지만 물의 도시 소항 뒷골목의 정취는 하나도 느껴보지 못한 채 가이드를 따라 엉뚱한 곳만 끌려 다니다 여행을 끝내고 왔다.
노신(魯迅)이 글을 쓰면서 내다보던 창 밖, 베니스처럼 도시를 따라 흐르는 물길엔 노를 젓는 작은 배가 다니고 그 배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애조 섞인 노래 한 가락이 오래 가슴을 저미는 곳. 소주와 항주는 지금도 내겐 그런 곳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는 꼭 그런 소항을 보러 가리라.
하지만 벽나리 미륵은 찾아간 사람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천진함이 있다. 뒤로 돌아서 있는 그 불상의 전면과 마주했을 때 와아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답사를 다닐 자격이 없다. 불상의 표정이 얼마나 좋았던지 김선생님은 그 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기찻길 옆 논 가운데 쓰러져 겨울잠을 자고 있는 벼 그루터기를 배경으로 그 석불은 너무나 천진하고 소박한 미소로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그란 미소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원만한 미소라고 표현을 해야 할 지 약간은 코믹하고 약간은 풍자적인, 그러면서 얼굴 전체가 미소인 그 불상 하나만으로도 이번 답사의 의미는 충분하다는 김선생님의 감탄에 ‘호들갑 떨지 마세요’라며 핀잔을 주었지만 제법 답사를 다녔다는 내 눈에도 그 불상의 미소는 참 오묘한 것이었다.
화순 고인돌 공원은 산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해 놓아 뒷문으로 들어간 우리가 앞문으로 나오기 위해선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전 세계 고인돌의 40%가 우리나라에 있고 강화, 화순, 고창의 고인돌 群(수업 시간에 고인돌군이라고 소개했더니 한 놈이 고인돌양은 없냐고 질문해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상고시대(上古時代)나 고대사에 크게 흥미를 못 느끼고 있는 터라 그냥 차를 타고 공원을 한바퀴 했다.
쌍봉사는 대웅전 건물이 특이한데 그 건물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탑 세 기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3층 목탑, 진천의 보탑사 3층 목탑이 그것인데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은 1층만을 법당으로 사용하며 위층으로 올라갈 수는 없는 구조인데 반해 보탑사 목탑은 내부 계단을 통하여 3층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아마 답사를 다니면서 보탑사 목탑도 보고 3층까지도 올라가 봤을 텐데 워낙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답사기라도 써 놓지 않으면 무얼 보고 왔는지 특별한 곳 아니면 기억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답사는 첫날밤 궁전모텔에서 참 몇 년 만에 두 남자와 고스톱을 쳐서 돈을 땄다는 기억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그 외에도 쌍봉사에는 국보인 철감선사 부도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탑비가 있다.
우리가 미녀를 본 다음에 추녀를 보면 미추(美醜)의 구분이 더 뚜렷하게 실감되듯이 전국의 아름다운 부도를 많이 보고 다닌 터라 철감선사 부도의 아름다움은 그다지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아니었다.
부도의 아름다움을 시대별로 제일 잘 볼 수 있는 절은 지리산 연곡사(鷰谷寺)이다. ‘제비골짜기’란 이름 또한 얼마나 예쁜가! 피아골이란 이름이 연상시키는 피 칠갑의 역사는 아픔이지만 피아골의 이름도 피밭골(잡곡인 피)이란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과 그 절로 들어가는 길가의 올망졸망한 다랑이 논에서 아픈 역사의 질곡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무디어 지고 잊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연곡사에선 동부도, 서부도, 북부도 등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까지 부도의 변천사를 다 볼 수 있다. 이름 하여 ‘부도의 학습장’이다. 언제 한 번 부도를 보러 떠나보자. 섬진강을 끼고 가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를 달리다보면 쌍계사, 연곡사, 화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자락의 사찰들을 다 순례할 수 있다. 철감 선사의 호가 쌍봉이었다는 설명만 읽고 시간 관계상 후딱 쌍봉사를 떠났다.
꼭 여름, 겨울 방학이 아니더라도 꽃 피는 계절에 마음 맞는 사람끼리 조촐하게 한 답사 떠나보는 것도 괜찮은 외도가 아닐런 지...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 떠난 여행이었지만 여행은 사람을 항상 겸손하게 만든다. 언젠가는 나도 저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리라. 산천의 한 자락에 느긋하게 누워 시간 맞춰 일어나 동동거리며 일터로 뛰어나가지 않아도 될 그런 날이 오리라. 세상살이의 피곤한 짐 다 내려놓고 복잡한 이승의 일 모두 잊고 유유자적 흐르는 세월을 바라볼 그런 날이 오리라. 벽나리 석불의 미소와 똑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 날이 오리라. 그러기 위해선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살 것, 지친 마음과 몸을 일으켜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갈 것, 한 해의 남은 시간들을 향해 씩씩하게 진군(進軍)할 것.
첫댓글 잔잔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글. 며칠전 후배가 제주에서 방 잡아놓고 부르는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못했습니다.
갈걸, 언니처럼 입은 옷 그대로 그냥 확 갔다올걸...
가지 그랬냐? 전국을 발로 직접 걸어다니며 답사를 하는 지리과 선생님이 명퇴를 하곤
제주도에 한 달 살러 갔다. 그 선생님은 앞으로 살고 싶은 곳에서 계속 한 달 씩 살아볼거래.
아이 둘 다 출가시켜 홀가분하고 사모님과 같이 갔단다.
80만원짜리 월세방을 얻었대. 6월 4, 5, 6일 제주엘 오라고 문자를 보냈던데
7, 8, 9일 3일간 5년만에 받는 정기종합감사라 학교가 정신이 없다.
'가자제주닷컴'인가 하는 사이트에 들어가 표 알아보다가
감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포기했다.
포기하면서도 좀 억울했다. 이번 감사에 뭐라도 하나 받으면 내년 발령에 지장 유.
아직도 기회는 있는 건가? 맘을 다시 먹어볼까?
헤겨아, 너무 느게서야 이 좋은 글을 읽는다. 곳곳에서 헤경이의 당찬 모습이 느껴지는 글을. . .
오늘 경상남도 교육청에 들어가 혜경이의 이름을 찾아보았구나. 혹시나 하고. . .
다음해에는 혜경이의 이름이 커다랗게 각인되어 나타나지 않을까 기다려 보자꾸나.
그리고 우리도 울아저씨 퇴임하면 전국을 돌며 한 두 달씩 살아보고 싶은 바램이 있다.
그 때 한 번 오렴. 그러면 또다른 답사기 한 편이 이 방에 오를 수도 있으리니. . . .
언니의 댓글을 저도 9월 6일인 오늘에야 읽게 되었네요.
올해 연수 받은 사람들은 올해 발령불가가 원칙입니다.
5차에 걸쳐 연수를 받는데 마지막 기수가 9월 19일날 연수 받으러 간다네요.
2학기 연수자들과 형평을 맞추기 위해 발령도, 공모에도 응할 수 없게 못을 박아놨어요.
연수 받기 전에는 연수가, 발령 받기 전에는 발령이,
사는 게 참 기다림과 인내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고 글을 열심히 읽어주셔서 또 감사합니다.
집에 가서 찾아보니 언니의 시집이 있어서 요즘 한 편씩 읽어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