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양선비는 경기도 양주에서 김을초(규정공파)에
자양 자미 자온 3형제중에 장남으로 태어나
양주에서 살다가
1410년경에 김자양(金自養)이라는 선비가
영천도동에서 이곳으로 와 마을을 개척했다 하고 그후
이 배원이라는 선비가 선산에서 이 곳으로
입향(入鄕)하여 살았으며 정차근(鄭次謹)이라는 선비도
입주했다. 이배원(李培源)의 자인 이의와
김응생과 정윤량 선비등이 함께 구지에 자양서당을
구축하여 사림의 강학소로 하였다 한다.
자양서당은 향내많은 문인을 배출하고
1974년 10월 24일 영천댐 공사로 인하여
수몰됨으로써 지방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 받아
영천군 임고면 삼매리로 이건하였다.
동인각의 바로 옆자리이다.
김자양(金自養)
자(字)는 선군(善君). 호는 호연당(浩然堂),
정숙공(貞肅公) 인경(仁鏡)의 7세 손이다. 태종조에
문과(文科0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통천군수(通川郡守)와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역임하여
치적이 잇었음에 그 지방 백성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자녀는 백돈 중돈 계돈이며
김계돈(金季敦)
자양(自養)의 아들로 세종, 문종, 단종조에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역임햇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되었다.
자녀는 장미 중미 숙미 경미
김장미(金長美)
조선때 문신(文臣)으로 시호는 양신(良愼), 계돈(季敦)의 장남이다.
연산(燕山)의 혼정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歸鄕)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후에ㅜ다시 부름을 받아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자녀는 김준 김흡 2명
김준 (金濬) (영능참봉) 준(濬)-參奉公
자 응생(자양서당.명산공파) 응기 응정 3명
김응생(金應生) 명산공파
1496(연산군 2)∼1555(명종 10).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경주.
자는 덕수(德秀), 호는 명산(明山). 영천출신.
13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하자 고을사람들로부터 효성이 지극하다는
평을 들었다. 1549년(명종 4)에 진사가 된 뒤 벼슬을 단념하고 향촌 교육에 뜻을 두어
각종 서적을 스스로 번역하여 널리 보급하니 배우려는 사람이 많이 몰려왔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을은 정몽주(鄭夢周)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나온 곳으로 ‘해동의
백록동(白鹿洞)’이라고 하면서 정윤량(鄭允良) 등과 함께 재물을 모아 태학(太學:成均館)의
제도를 본떠 학사를 짓고 이황(李滉)에게 묘우(廟宇)의 액(額)을 청하는 한편, 학규(學規)를
정하여 후배의 교육에 진력하였다
자 김조 김현 김완 3명
김완(金完)
김 완(1546~1607) 김응생의 제3자로 노항리에 태여나
자(字)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 자양(自養)의
현손(玄孫)인 공(公)은 일찍이 서경(書經)과 손오병서(孫吳兵書)에
통달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올라
사도(蛇渡) 첨사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장군과 더불어
옥포(玉浦), 한산도(閑山島)
등지에서ㅜ대공(大功)을 세워 척후장(斥候將), 조방장(助防將)
정3품 절충(折衝)에 올랐다.
1607년 (선조10) 향년 82세에 별세하여
어명(御命)으로 불조묘동인각(不眺廟東麟閣)을세워
봉안치제(奉安致祭)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