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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공의 첫사랑
by. 얼음빙수
AM. 05 : 59. 6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저절로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최고급 거위털 베개를 베고 자던 오세휘가 손만 뻗어 협탁에 놓인 알람시계를 껐다.
오세휘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케이스도 끼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통신사기본배경인 바탕화면에 도경수로부터 온 연락은 없었다. 통신기기의 존재이유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오늘 하루도 조졌군."
오세휘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무얼 기대한 거야. 앙큼하고 도도한 도도 경수에게."
케이스도 끼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오세휘가 검은색 실크 가운을 두르며 거실로 나갔다. 차갑고 광활한 대리석 바닥을 한참 가로지르자, 조리도구라곤 없는 올블랙부엌이 나타났다.
오세휘는 검은색 양문형냉장고를 열어 500mL 용량의 에비앙을 꺼내 마셨다. 오세휘의 양문형 냉장고에는 오직 에비앙밖에 없었다. 고로 에비앙 냉장고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세휘는 언젠가 자신에게 도대체 무얼 먹고 사는 거냐고 물었던 도경수 씨가 생각났다. 오세휘는 도경수 씨의 사랑이라는 로맨틱한 대답을 내놓았었다. 그때 도경수 씨 얼굴이 한 떨기 장미꽃처럼 붉어졌었지.
"에비앙을 마시다가도 도경수 생각을 하다니...... 정말 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군."
오세휘는 가난하지만 당차고 불우하지만 착하고 사람 대 사람으로 예의가 바르지만 오세휘에게만은 웃어주지 않는 도도경수를 사랑했다.
오세휘는 인성 말고는 다 가진 여자였다. 오세휘는 대기업 총수의 딸로 태어나 이루고 싶은 것은 이루고 가지고 싶은 것은 가지며 살아왔다. 도경수는 그런 오세휘를 인성과 도경수 말고 다 가진 여자로 만들어버린 남자였다.
"내가 못 가진 게 두 개나 있다니. 참을 수 없어."
오세휘는 조만간 인성을 갈고 닦아 도경수를 쟁취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오세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21세기는 오세휘의 손바닥 안에서 굴려지기 위해 존재하는 시공간이었다.
오세휘는 자신만을 위해 설계된 최신식 엑설사이즈룸에서 한강뷰를 바라보며 런닝머신 뛸 때조차 도경수를 생각했다.
오세휘는 자신의 두뇌속에서 조랑말처럼 뛰노는 도경수를 이 비싸고 럭셔리한 프리미엄 올블랙 대리석 아파트에 가둬두고만 싶었다. 도경수는 독립투사처럼 에비앙 한 모금 안 넘기고 버티며 내보내달라고 소리치겠지. 어쩌면 샤인머스캣 같은 눈을 하고 울지도 몰라.
(짜릿해)
"아침부터 도경수 생각을 너무 많이 했더니 조금 더 하고 싶군."
오세휘는 정도를 모르는 광공이었다. 오세휘는 해바라기샤워기 밑으로 일정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며 샤워할 때조차 도경수를 생각했다.
오세휘가 연락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먼저 연락하지 않는 도경수. 괜한 고생하지 말고 장가를 오라고 말하면 비혼주의자라고 답하는 도경수. 철옹성같이 철벽치다가도 오세휘가 고독한 모습을 보이면 외면하지 못하고 다가와 위로를 건네는 도경수. 그 틈을 노려 유혹하려들면 송어처럼 멀리 달아나버리는 도경수.
도경수는 정말이지 어렵고 깜찍하고 대쪽같고 소중하고 뻣뻣해서 오세휘를 고통스럽게 했다.
눈을 뜬 이후로 (물론 꿈속에서도) 도경수 생각밖에 하지 않은 오세휘는 도경수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도경수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오세휘는 전면이 통유리로 이루어진 대기업 이사실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다가도 도경수 생각에 웃음이 날지 몰랐다.
오세휘가 물에 흠뻑 젖은 머리칼을 올백으로 쓸어넘겼다. 도경수를 향한 집착으로 가득한 자신의 머릿속을 말끔히 정리하려는 듯.
물방울 튄 거울 속엔 도경수를 갈망하는,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가 처절하게 하울링하고 있었다.
광공의 첫사랑
by. 얼음빙수
슬픈 예감은 빗겨가지 않는다. 오세휘는 도경수에게 지배당하는 정신머리로 업무를 처리하다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결재란에 엉뚱발랄 직인을 찍어버린 것이다. 오세휘가 결재란에 찍은 도장은 도경수와 혼인신고서를 작성할 때 찍을 요량으로 세공장인에게 (무형문화재) 부탁하여 특수제작한 아기자기 도장이었다.
오세휘가 처리한 결재서류를 보고 분노한 오세휘의 쌍둥이형제 오세훈이 이사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뭐 하는 짓이야. 노크할 줄 몰라?"
"너야말로.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오세훈이 거칠게 구겨진 종잇장을 오세휘 눈앞에 들이밀었다. 오세휘는 뻔뻔스럽게도 아기자기도장이 찍힌 결재서류를 외면했다.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도경순가 경수돈가 하는 거에 빠져서 정신 못 차린다더니. 참 가관이구나."
"도경수 씨 이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
"내가 뒷조사를 좀 해봤어. 네가 사랑하는 도경수에 대해 말이야. 우리 회사 실내정원 관리자로 있는 사람이더군. 부모를 일찍 여의고 가난에 파묻혀 갖은 고생을 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꿈을 향해 내달린 결과 대기업 계약직 사원이 되었지."
"뭐 하자는 거야, 오세훈."
"스펙을 한 번 읊어볼까? 도경수 씨는 초등학교 4학년 시절, 과학의 날 행사 물로켓 날리기 부문에서 은상을 수상했어."
"오세훈."
"중학생 땐 불조심 표어를 지어 도지사상을 받았지."
"그만두지 못해?"
"고등학교 다닐 땐 이달의 모범학생으로 두 차례나 선정되기도 했다는데."
"어디까지 파헤친 거야!"
"가장 놀라운 건 역시 얼굴이야. 만 6세 시절 찍은 유치원 입학 사진에서 몸만 자랐더군. 오세휘! 고작 이렇게 동그랗고 귀엽게 생긴 놈 하나 때문에 회사를 통째로 말아먹을 셈이야? 직원들 사이에서 네가 드디어 미쳐버렸다고 소문이 자자해. 한날한시에 태어난 나조차 너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그런 네가 한낱 찹쌀경단 같은 인간 때문에 실실 웃으며 돌아다닌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래. 난 찹쌀경단에 미쳐버린 걸지도 몰라."
"정신 차려. 오세휘."
"됐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호들갑 떨지 말고 꺼져."
"걱정돼서 찾아왔더니 뭐? 꺼지라고? 그리고 너, 언제쯤 나를 오빠라고 부를 거야. 30년 기다려줬으면 이젠 오빠라고 부를 때도 됐잖아."
"15분 먼저 태어난 것 가지고 무슨 유세야."
"15분은 시간이 아니야? 비즈니스하는 사람한테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 몰라?"
"그럼 너도 한 달 먼저 태어난 저스틴 비버한테 형이라고 부르든지."
"나를 오빠라고 부를 생각도 하지 마. 오세휘."
오세훈이 들어올 때 만큼이나 강한 힘으로 이사실을 박차고 나갔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간 공간에 싸늘한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오세휘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끈대는 골머리를 짚었다. 오세훈이 도경수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회장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오세휘가 구겨진 결재서류 옆에 놓여있던 최신형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저장된 연락처라곤 도경수밖에 없는 휴대전화였으나, 여전히 도경수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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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빙수
오세휘가 도경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도경수 씨. 제정신입니까? 지금 당장 제 사무실로 올라오세요.」
도경수의 답장은 차분하고 정중했다.
「무슨 일로 그러시죠?」
도경수는 대기업 이사가 계약직 사원에게 직접문자로 지시할 일따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하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침 점심 시간이니 식사하면서 이야기 나누죠.」
용건은 결국 점심 식사나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오세휘는 도경수의 약속상대를 잡아다 골프채로 두들겨 패버리고만 싶었다. 그러나 잠시 격분했던 감정을 추스르고 여유만만한 답장을 보냈다.
「그럼 가볍게 먹고 와요. 점심이야 두 번 먹으면 되는 거니까.」
오세휘의 답장을 확인한 도경수가 들고 있던 화분을 내려놓으며 이마를 짚었다. 도경수는 벌써부터 급체한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떻게 점심을 두 번 먹자고 할 수 있지? 저녁을 먹자고 하면 되잖아. 물론 그것도 거절할 거지만.'
「이사님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조금만 과식해도 체하는 체질이라서요. 그리고 오늘 할 일이 많아 점심을 두 번 먹을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오세휘는 과도한 식사로 인해 쓰러진 도경수를 vvip 병실에 입원시키고 정성껏 간호하는 상상을 했다. 며칠 유급휴가를 받고 푹 쉬며 오세휘와 도란도란한 시간을 보내면 될 일이었다. 오세휘는 24시간 내내 도경수 곁에 머물며 일정한 강도와 박자로 등을 두들겨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도경수가 아픈 건 선약을 잡은 그 새끼보다도 싫어.'
오세휘는 애절한 마음과 다르게 무정한 답장을 보냈다.
「그러니까 조금만 먹고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오세휘는 도경수를 위해서라면 거지가 될 수도 있는 헌신적 재벌공이었지만, 사랑해서 놓아준다는 말은 죽어도 이해 못 하는 집착공이기도 했다.
과도한 양액이 제초제가 되듯, 오세휘의 도를 넘은 집착은 도경수의 감정을 바싹 메마르게 만들었다. 저러면 피어보려던 사랑도 금세 죽어버리고 말지.
지켜보다 못한 김비서가 오세휘에게 조언했다.
"저, 이사님...... 점심 약속을 잡으시는 것보단 저녁 약속을 잡으시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보통 사람은 점심을 두 번 먹지 않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두 번의 식사는 소화기관에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또 처리해야 할 업무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예기치 못한 일로 시간을 쓰게 되면 야근이 불가피해집니다. 과식과 야근은 스트레스의 원인이고,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죠."
"김비서가 뭘 알아."
"죄송합니다. (말을 해줘도.)"
"지금 당장 도경수 씨랑 점심 약속 잡은 놈이 누군지나 알아 와요."
"알겠습니다. (지랄이야.)"
"잠깐."
김비서를 돌려세운 오세휘의 안광이 초승달처럼 번뜩였다.
"김비서가 뭘 아는 것 같네."
오세휘의 얇은 입매가 부메랑처럼 서늘하게 휘어졌다.
"방금 김비서가 도경수 씨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변론을 쏟아냈잖아요."
"이사님, 그건..."
"김비서. 도경수 씨한테 관심 있어요?"
"네?"
"단 한번의 마주침 만으로도 영혼을 거두어가는 사람이긴 하지. 도경수 씨가."
"그런 것 아닙니다."
"이걸 어쩐다...... 예상은 했지만 도경수 씨의 매력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매우 치명적이군."
"그런 것 아닙니다 이사님! 믿어주세요!"
"그런데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도경수랑 점심 먹기로 한 게 누군지 알아오라니까."
"알겠습니다. (씨발 진짜…….)"
경쟁자를 권력으로 찍어누른 오세휘가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기다리던 도경수로부터 짤막한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알겠습니다.」
김비서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대답이었으나, 남다르게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오세휘는 도경수와 나눈 사랑스런 문자들을 영구보관함으로 이동시켰다. 도경수 씨가 돌려주는 말에 온기라곤 존재하지 않는대도 상관없었다. 오세휘는 상처도 받지 않았다.
오세휘는 태양 같은 인간이었다. 태양은 과하게 뜨겁고 강렬하여 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보이는 달을 데우는 것만으로 모자라, 빛나게마저 할 수 있었다.
과연 달이 그것을 원하였는가는 중요치 않았다.
광공의 첫사랑
by. 얼음빙수
도경수는 오세휘의 문자에 알겠다는 답장을 보낸 후, 동료와의 점심 약속을 파기했다. 또 이사님 때문이냐고 묻는 동료에게 어색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호텔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에는 오세휘와 도경수를 제외하고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기어다니지 않았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불편해하는 도경수를 위해 오세휘가 공간을 통째로 빌린 것이다.
사실 그건 핑계고, 오세휘는 다른 놈들에게 도경수 씨를 보여주기 싫었다. 방심했다가는 김비서 꼴이 날 수도 있었다.
"왜 이렇게 못 먹어요."
"이사님은 왜 안 드세요."
"전 광공이라 에비앙이랑 위스키만 마십니다."
"건강관리 안 하세요?"
"도경수 씨야말로 건강관리 안 합니까? 평소 캡싸이신떡볶이와 고혈당스무디 같은 정크푸드를 좋아하던데. 그런 거 먹으면 200살까지 못 삽니다."
"그런 거 못 먹고 200살까지 살아서 뭐 하겠어요."
"도경수 씨, 우린 그런 거 말고도 할 거 많아요."
스테이크를 어슷썰기만 하고 입에도 대지 않던 도경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복잡한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보이는 라운지였다.
오세휘는 창밖을 보는 척 하며 창에 비친 도경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던 도경수가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보시죠."
"부끄럼을 타는 겁니까? 지금 해보자는 거죠?"
"아니요. 이런 식으로 보는 거. 그만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저를 놔주세요. 이사님."
오세휘는 시작도 못해봤는데, 도경수는 무엇을 그만하자고 하는 것인지.
오세휘는 도경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사람처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도경수 만큼이나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사님께서 제 뒷조사 하신 거 다 알고 있어요."
"도경수 씨."
"초등학교 때부터 모아온 상장들이 갑작스럽게 전부 사라졌거든요."
"오세훈 이 미친......."
"제 뒤에 사람 붙이신 것도 알아요."
"도경수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집주변 상점들 매수하신 것도 알아요. 떡볶이집 사장님께서 자꾸만 제가 100번째 손님이라며 떡볶이를 공짜로 주시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나는 도경수 씨에게 친절한 세상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제 휴대전화 통신사기록 뽑아보신 것도 그렇고."
"그건 도경수 씨가 하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으니까 전산에 문제가 발생한 줄 알고 그런 겁니다."
"아니라는 것 잘 아시잖아요."
"난 이것보다 더한 것들도 할 수 있는데,"
"그만 하세요. 제발."
제발이라니. 오세휘는 운명이란 신의 얄궂은 농간임을 통감했다. 도경수의 부탁이라면 신을 족쳐줄 수도 있는 오세휘건만, 고작 한다는 말이 그만 보잔 소리였다.
"그것 말고 다 돼요."
"이사님."
"나는 안 되는 거 도경수 씨밖에 없으니까."
"얼마 전에 이사님 어머니께서 저를 찾아오셨어요."
"제기랄."
"더는 이사님 곁에서 얼쩡대지 말라며 봉투를 주셨어요."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같이 날 화나게 하는군."
"봉투에 12조가 들어있더라고요."
"내가 면목이 없습니다."
"위조지폐인 줄 알았는데... 사모님께서 체면 구겨지게 그런 짓을 할 것 같냐면서 원한다면 섬을 하나 사줄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고작 그런 뇌물로 도경수 씨를 매수하려 하다니."
"솔직히 인생역전의 기회잖아요. 이 기회만 잡으면 더이상 무시도 안 당하고, 하고 싶은 건 하고 하기 싫은 건 안 하면서 여유롭게 살 수 있을 텐데. 저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흔들렸어요."
"나한테, 아님 돈한테."
"둘 다요."
도경수의 속마음을 전해 들은 오세휘는 감격스러움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구의 중심축처럼 완고한 도경수 씨가 내게 흔들렸다니. 겉으로 티를 안 내니 전혀 몰랐잖아. 역시 앙큼한 도경수.'
"그래서 무엇을 선택했죠? 도경수 씨는 나를 아주 아주 싫어하니까. 당연히 돈을 선택했으려나."
'오세휘, 이 어리숙한 머저리! 그딴 걸 왜 물어. 돈을 받았다고 하면 어쩔 거야. 그땐 정말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버릴지 몰라!'
"둘 다 선택하지 않았어요."
'oh, jesus christ! why!'
"아이러니하게도 돈에 휘둘리는 것 역시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일 중 하나였거든요."
짧은 사이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간 오세휘가 끓어오르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하...... 도경수 씨. 그렇게 비밀리에 혼자서 올바르게 살면 누가 알아채고 표창장이라도 주는 줄 압니까? 도경수 씨는 그냥 돈도 받고 나도 만나면 돼요! 도경수 씨는 충분히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이사님. 정말 뻔뻔스러우시네요. 그래서 우리가 안 되는 거예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평소 같았으면 테이블을 뒤집어 엎은 뒤 아무 데나 권총을 갈기고도 남았을 오세휘가 애써 성질을 죽인 채 굳어있었다. 나를 참게 만드는 건 오로지 도경수 당신뿐인데 너는 죽어도 모르지.
도경수는 결국 음식물을 입에도 대지 않은 채 먼저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세휘는 도경수를 잡지도, 다시 앉으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 돌려 도경수가 바라보던 서울의 전경을 내려다봤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영원히 나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 따위 없을 거라고 확신하던 오세휘에게 불어온 첫사랑민들레는 오세휘 가슴에 전에 없던 시련과 고통을 남기고도 좀처럼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 보들보들한 감정에 농락당한 사람이 비단 오세휘뿐만은 아닐 것이다.
"비참하군."
오세휘는 달궈진 쇳물을 삼킨 것처럼 속 아팠다. 너무나도 개비스콘이 필요했다.
광공의 첫사랑
끝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12.26 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