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것도 좋은 것이 많지만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은 배워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주로 중국을 배웠다. 그 다음엔 일본을 통해 서구 문명을 배웠다. 간접수입이었다. 일본도 많이 배웠다. 그 다음엔 미국과 유럽을 직접 배웠다. 배우는 것이 미국에 편중된 감도 없지 않았는데, 이제는 배우는 나라가 다변화되었다. 오히려 큰 나라보다 작은 나라에서 우리가 배울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농암 유수원(1694~1755)은 〈우서〉의 「논변통규제이해(論變通規制利害)」라는 글에서 중국을 배우지 않고도 잘 지내는 주변 나라를 예로 들면서, 나라마다 선진국 배우기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사안에 따라 고유한 풍속을 유지하는 편이 더 나은 것도 있다고 분별했다. 유수원이 개탄한 것은 중국을 배운다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는 점이었다.
“외국의 나라로서 오로지 중국풍[華風]을 숭상하는 나라가 천하에 우리나라뿐이다. 그러나 소위 숭상한다는 것이 단지 외면의 형식일 뿐이다. 나라를 경영하고 정치를 도모하는 도구는 혹은 그 명목만을 답습하기도 하고, 혹은 그 껍데기만을 모방할 뿐, 그 정신과 골자를 터득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그 폐단은 마침내 부허(浮虛)·무실(無實)로 귀착했고, 무실(無實) 두 글자는 무한한 병통들을 발생시켜 바로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내가 그 병든 곳을 깊이 논하는 까닭이다. 이를 구제하려면 이름만 흠모하고 실질을 버리는 풍속에다 오직 실사(實事)·실정(實政)을 시행한 연후에야 세도(世道)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헛된 이름과 껍데기만 배우는 것은, 필요한 것이 내용이 아니라 그 권위였기 때문이리라. ‘북학(北學)’이란 말은 〈맹자〉에 나오는 단어로, 본디 ‘선진문물을 배운다’는 뜻이다. 쇼비니즘도 경계해야 하지만, 선진국 따라잡기, 선진국 배우기를 하다보면 자칫 문화종속적인 기류가 형성될 수 있다. 세계성, 보편성을 따라잡으면서도 고유성을 살리고 주체성을 견지하는 것은 우리에게 늘 중요한 과제였다. 초정 박제가의 ‘북학론’이 유명한데, 이 주장에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은 적극 동조했다.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우는 개방성과 함께 이를 통해 자강을 도모하는 것. 바로 이것도 훌륭한 전통이 될 수 있다. □ 글쓴이 : 김 태 희 (다산연구소 소장) 〈우서〉의 「논변통규제이해(論變通規制利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