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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4일(금), 이스라엘, 예루살렘 순례
오늘부터 내일까지 이틀간 이번 성지순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성지순례가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국토면적이 21,000㎢로 강원도 크기이며, 2011년 통계로 747만6천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크게 3종류로 구분되는데 첫째, 순수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이 597만명으로 전체의 75.4%이며, 둘째는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아랍사람이 157만명으로 전체의 20.4%, 나머지 4.2%가 외국인이다. 유대인은 전 세계 108개국에 디아스포라로 약 1,500만명이 살고 있다. 수도는 예루살렘이며, 내각책임제 정치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언어는 히브리어이며, 아람어와 영어를 함께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지에서 사용되는 화폐는 세겔(Sheqel)이며 1US달러는 3.74세겔이니, 지금 환율을 기준으로 할 때 1세겔은 약320원에 해당된다.
이스라엘의 국토를 살펴보면, 지중해 연간은 샤론평야가 펼쳐지며, 이스라엘 인구의 절반이상이 이곳에 거주한다. 동부는 계곡지대로 갈릴리 호수에서 홍해와 사해로 이어지는 계곡지대이다. 북쪽은 비옥한 편이나, 남쪽으로 내려오면 사막에 가까운 건조한 날씨이다. 중앙은 주요 도시인 베들레헴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대부분 산악지대로 광야가 펼쳐진다.
이스라엘은 4-10월까지의 여름 건기와 11-4월까지 겨울 우기로 나누어진다. 강우량은 남쪽으로 갈수록 적어진다. 지중해를 끼고 있어 여름에는 무더운 열대성 기후를 보이다가도 봄 가을에는 일교차가 크고, 겨울에는 따뜻하면서도 다습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평균강수량을 보면 6-9월에는 거의 비가 오지 않으며, 우리가 방문중인 5월에는 5mm 정도의 강수량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에는 유대교의 율법을 따라 코세르(KOSHER)라는 음식물 제한규정이 있다. 돼지고기나 조개류 등은 식당에서 판매가 금지되며, 육류와 유제품을 함께 먹거나 같은 그릇에 담지 못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금요일 오후~토요일 저녁)을 철저하게 준수한다. 따라서 금요일 오후부터는 모든 유대인 상점, 공공기관, 대중 교통수단이 운행 정지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곳을 성지순례를 하는데 있어서는 도로사정이 원활하여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하이파 항구 도착, 예루살렘으로 이동
우리가 타고 있는 크루즈가 이스라엘의 하이파 항구에 도착하였다. 전체 인원을 3개 조로 나눈 뒤 3대의 버스에 탑승하였다. 우리가 탑승한 1호차에는 이곳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우 목사가 현장 가이드를 맡았다. 버스에 탑승하면서 오늘 순례와 관련하여 유의해야 할 몇 가지 당부사항을 전달한다.
첫째, 이스라엘 순례 중 “여보”를 잘 챙겨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여보”란 ‘여권’과 ‘보따리’를 의미한다. 워낙 많은 관광객들이 오는 곳이라 만약 여권이나 짐을 잃어버리면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특히 여권을 잃으면 대사관에 가야 해결되므로 전체 일정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화장실 여건이 열악하므로, 화장실이 있는 곳이면 무조건 들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맑아 햇살이 따갑지만 그늘 아래에 들어가면 매우 시원하다. 성지순례하기에 매우 좋은 여건이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아침 인사를 하나 배웠다. “보케르 토브” 이말의 의미는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이다. 특히 ‘토브’란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 사용한 히브리어 단어이다. 따라서 이 인사는 “오늘 하루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날 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 관광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아랍사람이라고 한다. 유대인이 아닌 아랍사람이 운전하는 버스를 타는 이유는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내로 들어갈 때 유대인은 일체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운전하는 버스를 타면 버스 기사가 들어갈 수 없으니 우리도 또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 이곳 예루살렘을 순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왜냐하면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다가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풍토병이나 강도의 위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와서 예배드리고 싶어했던 예루살렘을 우리는 지금 편안하게 버스를 타고 입성하고 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던 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감격을 가지고 다 함께 찬양을 불렀다.
♫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 아멘.
예루살렘 입성
예루살렘은 어원적으로 ‘평화의 도시’ (IR=도시 SHALOM=평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해발800m의 산악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그 역사가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BC 1000년경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세운 이래 수많은 침략자들에 의해 주인이 바뀌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예루살렘성이 높은 지형에 세워진 것은 무엇보다 군사적 방어에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주변으로 기드론 골짜기, 힌놈의 골짜기 등이 있어서 높은 곳에 위치한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쉽지 않았다. 따라서 외부의 공격에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잇점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예루살렘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예루살렘성(Holy city)과 19세기말 이후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신시가지(New city)로 구분된다. 예루살렘 성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당시인 16세기에 슐레이만 1세 황제가 쌓은 사방 1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신시가지는 그 주변으로 예루살렘의 100배 크기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특히 구도시의 경우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성지들이 자리잡고 있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은 특히 도시정책상 새로 건축되는 모든 건물의 색깔을 옅은 베이지식 돌만 이용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은 일몰 때가 되면 온 도시가 황금빛을 발한다.
감람산 (Mount of olives)
감람산은 4개의 봉우리를 가진 조그만한 언덕으로, 가장 높은 봉우리의 경우 해발 800m가 넘는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계곡 건너편에 있는데 이 산에는 감람나무(Olive tree)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예루살렘보다 90m 가량 높은 곳에 위치하므로 이곳에 올라가면 예루살렘 전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예수님 당시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AD 1세기 경 숲이 망가졌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 산을 출발점으로 하여 일련의 봉화들을 밝히곤 하였는데, 바벨론으로 끌려간 동족들에게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윗왕이 하나님께 경배하였고, 솔로몬의 산당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이 산을 자주 찾아와서 기도하셨고, 이곳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셨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으며, 부활하신 후 이 곳에서 하늘로 승천하셨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승천장소를 베다니 근방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 이 감람산 꼭대기라고 전해진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신 겟세마네 동산은 이 곳 감람산의 서쪽 기슭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시작된 곳이며, 예수님께서 성전 파괴를 예언하신 곳이기도 하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19:41-42)
예수승천 기념교회(돔)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예수승천 기념교회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40일만에 감람산에서 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이를 기념하여 AD 380년경 세운 최초의 승천기념건물은 처음에는 지붕이 없는 팔각형으로 지어졌다. 지붕 없이 지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지붕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이며, “예수께서는 가신 것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하였으므로 지붕이 있으면 그곳에 다시 오지 못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기념교회는 AD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성지순례를 다니다가 예수님의 승천하신 흔적을 발견하고 그곳에 예수승천기념교회를 세웠다. 그 후 십자군이 재수축하였고, 1187년에 무슬림 교도들에 의하여 지붕이 돔(Dome)이 씌워졌다. 그래서 돔 위에 무슬림을 상징하는 반달모양의 표시가 붙어있다.
기념교회 건물 중앙에는 승천 때 예수님이 밟은 발자국이라고 전해지는 바위가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누가복음 24:50-51).
주기도문교회
주기도문교회는 4세기경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에 의해 예수께서 ‘주(Lord)의 기도’를 가르쳤다고 전해진 곳에 세워졌다. 현재 이 교회는 카톨릭 갈멜수녀원이 관장하고 있으며, 교회의 주랑 벽면에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시작된 최초의 주기도문이 1102년에 새겨졌으며, 그 이후 한글을 비롯하여 약70개국의 언어로 새겨진 주기도문이 게시되어 있다.
주기도문교회 옆에 작은 동굴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자주 이곳에 와서 쉬셨다는 말이 전해진다.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유대인들의 묘지
유대인들의 공동묘지가 예루살렘 시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들의 묘지는 돌로 만든 석관(石棺)으로 땅에 묻지않고 지면 위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가까이 가서 보니 석관의 뚜껑위에 작은 돌들이 여러 개 올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묘지 앞에 꽃을 꽂아두는데, 돌을 올려놓는 이유는 “우리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관을 땅에 묻지않고 표면에 보이도록 두는 까닭은 머잖아 부활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장례식을 거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데 멀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가이드가 우리들에게 너무 웃고 떠들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냐하면 저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낸 슬픔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눈물교회 (The Chapel of Dominus Flevit)
눈물교회 또는 예수눈물교회라 불리우는 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 장차 파괴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우신 것을 기념하여 감람산 기슭에 세운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교회 강대상은 동쪽을 향하여 있으나, 눈물교회만큼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서쪽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물교회는 강대상이 서쪽으로 향하게 지어졌으며, 강대상 뒷면은 유리로 되어 있어, 성도가 회중석에 앉으면 강대상 뒤편의 예루살렘이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눈물교회의 지붕에는 항아리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눈물을 상징하는 모양이라고 한다. 즉, 눈물을 뒤집어 놓으면 항아리 모양처럼 된다는 것이며, 예수님의 눈물을 항아리에 담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눈물교회 옆에 1세기 때의 가족묘가 보존되어 있었다. 과거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임종을 맞이할 때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을 썼다. 이 말의 의미는 과거 아브라함이 죽으면 그 시체를 가족묘에 넣어두었다가 썩으면 가루로 만들어 보존하며, 그 아들 야곱이 죽고 난 후에는 야곱의 뼈 또한 아버지 아브라함의 뼈 위에 두고, 요셉과 그 이후 모든 자손들에게 동일하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죽음을 열조, 즉 조상들에게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겟세마네교회 혹은 만국교회 (The church of All nations)
겟세마네교회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 기도를 하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같이 흐르는 결사적인 기도를 드렸던 자리에 세워진 교회이다. ‘고통의 교회’라고도 한다.
현재 교회는 1920년 비잔틴과 십자군 시대의 교회의 잔해 위에 12개 국가의 성금으로 이탈리아 건축가 안토니오 바르루치가 12개의 돔 모양의 지붕으로 설계 건축하였다. 그래서 이 교회를 만국교회라 부른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고, 강대상 아래에는 졸고 있는 두 제자의 모습이 재미있게 설치되어 있다. 예수님이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 졸고 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이 시대에 신앙의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졸고 있는 두 제자의 모습이 마치 나의 모습인 것 같아 무척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겟세마네교회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 기도를 하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같이 흐르는 결사적인 기도를 드렸던 자리에 세워진 교회이다. ‘고통의 교회’라고도 한다.
베드로 통곡교회
일정 상 이 교회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교회 옆으로 지나갈 수 밖에 없어 아쉬웠다. 베드로는 예수님 수난 직전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였으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부인하고 난 직후에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밖으로 나가 통곡하였다.(마26:69-75)
이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뜻에서 세워진 교회가 베드로통곡교회이다. 이곳은 시온산 남쪽 언덕에 있는 힌놈 골짜기와 치즈 골짜기, 기드론 골짜기가 만나는 곳을 동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교회 안에는 베드로가 한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는 모습과 닭의 모습을 새긴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예루살렘 시내 평화의 대행진
오늘 우리는 매우 뜻깊은 행사를 가졌다. 예루살렘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곳으로 이동하여, 태극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양손에 들고 이 땅에 진정한 하늘의 평화와 정의를 내려주시기를 기원하는 평화의 대행진을 가졌다. 이 행사에 이스라엘 정부 관광청의 아시아 담당 최고책임자가 참석하였다. 우리 일행은 약1km 정도 평화를 기원하는 행진을 하면서 힘차게 찬양을 불렀다. 행진을 하는 도로 주변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행진에 동참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과거 우리나라와 이스라엘 사이에 국교가 단절된 때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아랍으로부터 원유를 도입하기 위하여 친 아랍정책을 썼을 때라고 한다. 그 때 이스라엘에서 일방적으로 한국과의 외교를 단절해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이스라엘과 한국은 매우 긴밀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제품도 많이 수입하고 있다. 실제로 도로를 다니면서 보니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를 많이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하게 제품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함께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의 대행진을 마친 후 함께 모인 자리에서 먼저 총회장 유중현 목사가 이스라엘에 평화가 임하기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낭독하였다. 이어서 이스라엘 관광청의 책임자가 화답의 메시지를 보냈으며,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패를 전달하는 시간을 가졌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후 이 세상에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 땅끝이 어디일까? 에 대한 많은 주장이 있으며, 그 가운데 그 땅끝이 이스라엘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독교가 처음 시작된 곳이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이스라엘, 지금도 자기들이 기대하는 정치적인 메시야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이곳 이스라엘에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곧 땅끝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선교단체에서 Back to Jerusalem! 이라는 구호로 이스라엘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복음화를 시키기 위해 힘을 쏟기도 한다.
하나님! 대한민국에도 다시 한 번 1907년 대부흥의 바람이 불게 하시고, 무력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7천명 용사의 비전을 통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함성이 하나님 보좌 앞에 이르게 하옵소서.
한식 도시락으로 먹은 점심
이스라엘에 계신 선교사들 가정에서 직접 준비한 한식 도시락을 먹었다. 모처럼 먹은 한식 도시락은 너무나 맛이 있었다. 오전 일정에 많이 걸어 배가 고프기도 하였지만 그동안 배 안의 음식이 느끼한 양식뿐이며 한식 음식이 그리웠다. 그러다가 오늘 한식 도시락을 대하니 너무 맛이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 이 정도 도시락은 평범한 수준이다. 그렇지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맛이 있는지!
그 때 나는 평소 식탁을 대할 때 이런 감사함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가 타국에서 빈털터리가 되고, 흉년이 들어 배가 고플 때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않았던가? 평상시 우리의 일상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검문소 통과
팔레스타인은 구약성경에서 블레셋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원어는 그리스 말로 팔라이스티네. 에게해 지역 팔라이스티네 출신 사람들이 바다 건너서 점령해 정착한 곳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곳을 전통적으로 유대와 사마리아로 불렀다.
그 후에는 로마인이 지배하게 되는데, 이들은 132~135년의 유대 반란을 진압한 뒤 유대인의 흔적까지 말살해버리려고 이 지방에 시리아 팔라이스티나(Syria Palaestina)라는 라틴어 지명을 붙였다. 7세기의 새로운 점령자 아랍인은 이곳을 필라스틴으로 불렀다. 오늘날 우리는 이 지역을 1917년 새로운 주인 영국에서 명명한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다.
역사상 거주민의 종교를 꼽자면 다신교·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등이 얽혀 있고, 언어로 따지면 그리스어·라틴어·히브리어·아람어·아랍어 등 다양한 말소리가 거리를 울렸던 팔레스타인. 정복자가 누차에 걸쳐 바뀌고, 유형·무형의 신이 교체되고, 시장 언어가 달라지는 등 오랜 역사 속에 그야말로 다양한 문화를 담아온 곳이다.
이곳을 근세기의 유혈 낭자한 전장으로 만든 주인공은 영국이었다. 팔레스타인 지배 당시 영국은 아랍인과 유대인에게 각각 국가를 세워주겠다고 지킬 수 없는 이중 약속을 했는데, 해결이 어려워지자 분할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아랍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나 몰라라 손을 떼고 UN에 맡겼다. UN은 1947년 11월27일 분할안을 표결에 부쳐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존재의 근거를 마련한 이스라엘이 이듬해 5월14일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바로 다음 날 이웃 아랍 국가들이 침공해 제1차 중동전쟁의 서막이 올랐고, 이후 1973년까지 모두 네 차례 전쟁이 터졌다. 이스라엘은 교전국이던 요르단·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시리아와는 여전히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안에 있지만 팔레스타인의 자치지역이므로 이곳 안으로 들어가려면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이 지점을 통과할 때 군인들이 버스에 올라와서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의 여권을 일일이 대조 확인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관광버스 기사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가진 아랍사람이어야 했던 것이다. 같은 도시 안에 있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나라가 공존하는 셈이다.
독일을 동서로 갈랐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는데 아직 이 지구상에는 우리 한반도와 이곳 팔레스타인 지역이 높은 장벽으로 가로막혀 끊임없는 분쟁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 “하나님, 우리나라의 남북 분단의 철조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너지게 하시고,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
베들레헴이란 지명의 뜻은 ‘빵집’이다. 베들레헴에는 밀 농사가 성행하였고, 밀을 재료로 한 빵이 유명한 지역이다. 룻기서를 보면 보아스와 룻이 밀밭에서 만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며,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본적지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아우구스도가 천하 만민에게 호적을 하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요셉의 본적지인 베들레헴에 호적을 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예수탄생교회는 길이 52m, 넓이 24m로 다섯 개의 복도가 있으며 이스라엘의 빨간 돌로 만든 11개의 돌기둥이 네 줄로 세워져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사랑의 문] 또는 [겸손의 문]이라 불리고 있다. 이 문은 겨우 1m 20cm 높이에 폭은 80cm에 지나지 않아 허리를 굽히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원래의 문은 3개였는데 십자군 시대에 양쪽 문은 막고, 중앙의 문을 작게 만들어 군인들이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내부에는 크린트식의 기둥머리를 한 아름다운 홍석 회암의 우아한 원기둥이 있고, 그 위에는 지금도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이름이 쓰여진 성인들의 프레스코화의 흔적이 보인다. 동굴로 내려가는 두 개의 입구가 있는데 라틴어와 hic de Maria Virgine jesus Christus Natus est (여기에 예수께서 나셨다)라고 새긴 은으로 만든 별이 예수의 탄생 장소를 표시한다. 구유는 그 옆에 오른쪽으로 있다.
그리고 이 교회 마당에 제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제롬은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최초의 학자이다. 그를 통하여 성경이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게 된 것이다. 그가 번역한 성경 버전을 일컬어 ‘불가타 성경’이라고 부른다. 그의 동상을 자세히 보면 한쪽 발로 해골을 밟고 있다. 이는 언젠가 자신이 죽을 날이 올 것임을 항상 기억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마가의 다락방 교회
초기 기독교에 있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고,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오순절 성령강림, AD 48년 예루살렘 사도회의(행15:1-29)를 행한 장소가 시온산이다. 다시 말하면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 중심이 바로 시온이었으며, 이곳에 세워진 예루살렘교회는 모든 이방인교회의 모교회였다.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시온으로의 귀향을 하나의 메시야 운동의 핵심으로 보았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드신 다락방, 이곳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오순절 성령강림의 큰 역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성벽을 시온문으로 빠져나가 약100m 쯤 걸어가면 2층 석조건물이 있으며, 옥외로 난 돌계단을 올라 마가의 다락방을 보게 된다. 수백년동안 줄이어 이곳을 찾는 성지순례객들의 발길이 닿아서 계단 돌들이 움푹 패여있다.
로마네스크식 건축물인 다락방 내부는 천정이 아치식으로 되어있다. 방 가운데 3개의 기둥은 주위 벽에 서 있는 기둥들과 곡선으로 연결되어 아치를 이루며 천정을 받치고 있다. 이태리의 천재화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은 이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나누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막14:15)
오늘 들어간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공간은 허름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벌이신 곳이며,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충만,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에 매우 귀중한 곳이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 형틀은 가장 흉악한 죄인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두려움과 저주의 상징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달리신 곳이므로 사랑과 공의가 합쳐지는 상징이 되었다.
하나님,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셨던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루살렘의 성문
예루살렘성은 그 둘레가 약 4km이며, 총11개의 성문을 가지고 있다. 동쪽에 황금문과 스데반문, 북쪽에는 헤롯문과 다메섹문이 있다. 서쪽에는 새문과 욥바문, 남쪽에는 시온문과 분문의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이 문들은 그 모양과 특징이 모두 달라서 특이하다. 우리 일행은 스데반문을 통하여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의 여정을 따라 올라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