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有
대유괘는 상괘는 불인 리괘(☲), 하괘는 하늘인 건괘(☰)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이름이 화천대유이다. 리괘는 불을 상징할 때 밝음, 문명의 의미를 띤다. 대유(大有)는 ‘크게 가지다’는 뜻인데, 大는 인간 세상의 부유함을 넘어 하늘로부터 받은 부유함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괘사
大有 元亨 (대유 원형)
대유는 크게 형통하다
상괘인 리괘는 ‘문명’한데 아래 건괘에 응하므로 하늘의 때를 잘 따르고 그 기운을 받아서 농사로 치면 대풍작을 이루게 된다. 괘의 효 모양을 보면 하나만 음이고 나머지 다섯이 양이다. 리괘의 가운데 한 음효가 다섯 양을 따르게 하므로 마치 사람, 물건, 일, 지위 등을 크게 소유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형통할 수 밖에 없다. 대유괘는 주어진 때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큰 괘이다. 옛 말에도 부자는 하늘이 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늘의 운을 받을 때는 그 소멸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므로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므로 대유를 잘 사용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상전). 꼭 대유가 아니라도 하늘은 주고 인간, 또는 생명은 잘 쓰는 것이 본분이다. 태양에너지가 지구 상 모든 생명활동의 원천이고, 모든 생산의 근원임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생산의 주인이라 자부하기보다는 유익한 방향으로 쓰는 것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형통함은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
=효사
初九 无交害 匪咎 艱則无咎 (초구 무교해 비구 간즉무구)
초구는 해로운 것과 사귈 일이 없다. 허물은 아니지만 어렵게 여기면서 처신해야 계속 허물이 없다.
交害, 해로움과 사귄다는 것은 해로움에 빠진다는 뜻인데, 우연히 해롭게 될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러니 ‘무교해’는 해로울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임을 나타낸다. 匪는 ‘~아니다’의 非와 같은 뜻이다. 艱은 어렵게 여기다, 則은 ~하면의 뜻. 허물이 아니면(匪咎) 좋은 일인데, 다시 어렵게 여기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艱則无咎는 해로움이 없으니 당연히 탈도 없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당연하게, 쭈욱 그렇게 될거라고 자만할 수도 있으니, 그러지 말라는 경계로 해석한다. 초효는 대유의 초기로 우연히도 풍요로운 상황이 앞에 닥친 것이다. 交(사귀다, 만나다)를 쓰므로써 코로나 초기의 마스크 제조업처럼 큰 부란 만나는 것이지 창조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害를 쓰므로써 부란 마냥 행운이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간즉무구하라는 것이다. 왜일까? 우리는 큰 부를 만나면 그게 온전히 내 능력으로 인한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만 그건 하늘이 준 것이다. 그러니 승승장구할 것 같은 자신감을 누르고, 이건 하늘이 준 것이지 내가 만든게 아니라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
九二 大車以載 有攸往 无咎. (구이 대거이재 유유왕 무구)
구이는 큰 수레로 실으니, 가는 바가 있어서 허물이 없다.
車(거)는 수레로 고대에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다. 載는 짐을 싣는다이다. 大車以載, 큰 수레에 짐을 싣는다는 것은 많은 부를 소유한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많은 부의 축적은 집안창고로 상징할 것이다. 수레는 짐을 싣고 가는 용도이다. 큰 수레는 큰 길로 다니며 누구 눈에나 띈다. 부는 두루 쓰이기 위해 공공연히 옮겨 다녀야 함을 알 수 있다. 큰 부자는 큰 수레에 싣고 부를 탕진하는 자일 것이다. 반면 사익을 취하는 돈은 부피를 최대한 줄이고(5만원권), 그 행적을 숨긴다(사과박스). 아무리 액수가 많아도 이런 돈은 큰 부가 아니다. 구이는 강(양)이어서 튼튼하여 잘 갈 수 있고, 中이어서 욕심내지 않고 적정량을 실으며, 음의 자리에 있어 때를 잘 따르는 특성을 갖는다. 攸(유)는 ‘~하는 바’이다. 往 간다는 것은 일을 쭈욱 한다는 것이다. 有攸往 无咎는 대유의 일을 하는데 별탈 없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九三 公用亨于天子 小人弗克 (구삼 공용형우천자 소인불극)
구삼은 제후가 천자를 형통하도록 한다. 소인은 할 수 없다.
중국 고대에는 봉건제, 일종의 부족연맹체라 중앙의 천자, 각 지역의 제후들로 권력이 분산되었다. 公은 제후의 직급이다. 用은 以와 같아서 주격조사. 于는 목적격 조사. 천자는 공동체의 대표이니, 천자의 부는 공동체의 부를 상징한다. 제후가 천자를 형통하도록 한다는 것은 부유함을 개인의 부로 독점하지 않고 공공의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유라는 부의 속성을 볼 수 있다. 제후는 물론 개인의 부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공공의 부로 여기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이 준 부는 마치 공기와 같다. 그것이 두루 돌아다닐 수 있어야 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대에는 이런 부의 본질적 속성을 잃어버려서 곳곳에서 막혀버렸다. 그렇게 부의 활로를 막아버린 사람들을 소인이라 한다. 공공의 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므로 소인은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소인이 하면 탈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괘인 건괘의 세 효는 모두 큰 부의 특성을 보여준다. 초효에서는 부가 자기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그 사귐을 어렵게 여기고, 이효에서는 부는 공공연히 순환시켜야 하며, 삼효에서는 사적소유도 공공의 소유로 여기고 그를 위해 소인을 벗어나야 한다. 세상을 심란하게 한 대장동 화천대유사는 소인의 일을 대유의 일로 여긴 것임을 알 수 있다.
九四 匪其彭 无咎 (구사 비기방 무구)
구사는 지나치게 번성하지 않도록 하면 허물이 없다.
彭은 성씨에 쓰일때는 ‘팽’으로 읽는다. 여기서는 ‘성대할 방’으로 본다. 구사는 강으로 상괘에 있어서 부유함이 꽤 커진 상태이다. 그런데 오효 아래에 있는 사효는 존위인 오효의 덕을 누릴 수 있지만 또한 견제 대상이기도 하다. 사효는 한계를 그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는 자리이다. 대유의 번성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건 개인이든 시대이든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적 부가 결여한 것이 바로 이 한계긋기이다. 부는 인간이 창조하는 것이 아니므로 하늘이 준 것 이상을 넘어갈 수 없다. 인간문명의 비약적 발전이라고 지나친 번성에 도취할 때, 다른 편에서는 결핍에 시달리게 된다. 부의 일정량 법칙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불균형은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성장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구사의 비법은 무얼까? 리괘여서 지혜롭고, 음이어서 부드럽고 겸손하다. 깊이 음미해볼 효이다.
六五 厥孚交如 威如 吉 (육오 궐부교여 위여 길)
육오는 믿음으로 사귀니, 위엄이 있으면 길하다.
厥은 ‘그’의 뜻을 갖는 정관사이다. 여기서 육오효와 다섯양의 관계를 암묵적으로 지칭한다. 孚는 사회적 믿음, 상호신뢰, 내면의 믿음이다. 如는 ~와 같은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厥孚交如는 성실과 믿음으로 똘똘 뭉친 모양새이고, 威如는 경외심이 넘치는 모양새이다.
육오는 다섯양을 이끌어서 대유를 이룬 효이다. 그런데 그 비결이 그 음의 성질에 있다.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품성으로 다섯양의 강성함을 신뢰로 묶은 것이다. 부란 첫째 하늘이 주는 것이고, 둘째 인간들의 신뢰 관계가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부라 해도 그것은 어떤 신뢰, 활동을 따라다니는 것이지 그 자체 독립적이고 목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의 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크고 길게 보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威如는 혹시라도 육오의 유순함으로 신뢰형성이 친목도모처럼 무리의 이익만 취할까봐, 강하고 위엄있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경계하는 것이다.
上九 自天祐之 吉无不利 (상구 자천우지 길무불리)
상구는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아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
自는 ~로부터, 祐는 ‘하느님이 보우하사~’의 ‘우’로 돕는다는 뜻이다. 自天祐之는 하늘이 돕는데, 상구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육오 위에 있는 상구효는 자기 힘을 과신하다고 망치는 경우가 많은데 대유괘는 오히려 자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리괘의 현명함을, 그것도 지극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이 상구에서 다시 강조하고 있다. 대유는 하늘이 준 것이므로 그 하늘의 용법을 그대로 따라해야 하는 것이다. 앞의 효들도 그런 정신 속에서 취해야할 대유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