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만드는 데 있어서의 결정은 일종의 기술적 결정이다. 어디 에 어떠한 다리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전문적이고 기 술적인 결정에 맡길 수밖에 없으며, 이 결정은 또한 많은사람들의 투 표에 의해 결정지을 수도 없다. 집행권 강화의 절실성은 국가간의 신 의마저도 이를 무조건 신뢰할 수 없는 국가 사회간의 미묘한 현실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추이는 우러들 의 운명의 선택 범위를 협소화시키고, 국제사회의 냉혹한 생존경쟁은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자유의 은혜도 불가피한 국가주의체제의 확립 을 위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국가가 긴박한 외적 위압을 받고 있을 때 개개인의 감정상의 미묘 한 회의라든가 다양한 요구를 모두 다 만족시킬 수 없으며, 협조적이 며 타협적인 개성만이 요청되고, 정책 결정자의 이성적 목표 설정을 이해하여 이를 옹호해 주는 긍정적 지식인의 적극적인 참여가 기대되 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절대적 정의란 환상에 불과하며 가치 판단 역시 본질적으로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치 관의 충돌은 정의의 원리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가치 기준, 다시 말하여 사회적 효용을 추진하는 사실상의 정치동향에 의 하여 해결되고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완전한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근대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아무 리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모방해도 사회적 토대가 동요하고 있는 한 무의미하다. 민주주의의 윈리도 국가사회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국가의식과의 대립개념으로 혹은 국가주의를 근대화와의 대립상에서 생각하는 태도는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민 주주의와 국가주의는 똑같이 근대화가 지니는 한 측면인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국민의 의사에 의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국민 의 의사란 물론 국민 일부의 의사나 소수의 의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 라 국민 모두의 의사, 즉 국민의 총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민의 총의는 어떠한 형태로 가장 충실하게 구현될 수 있을까? 대 부분의 민주국가는 간접민주제를 채택하여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를 설치하여 입법사항을 위임한다. 다시 말하자면 입법은 의회의 다수결 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의회의 다수는 국민 전체에서 볼 때 극히 소수이며, 만약그 의회가 국민의 정치동향으로부터 유리되었을 때 이러한 소수의 결정 이 국민의 총의로 간주되는 커다란 모순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국민 의 총의를 모든 국민의 의사 또는 국민 다수의 의사라고 생각하는 것 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의제에 불과하다. 국민의 총의란 개념을 입법 의지의 이념으로 파악하고 이에 명확한 해결을 내린 루소의 이론은 오늘날 우리가 재평가코자 하는 토착 민주체제 확립에 깊은 의의를 시사해 준다. 루소는 법은 국민의 충의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고 전제한 다음 민주주의의 실천면에 있어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무제한의 상대주의적 요소, 즉 다수결제도의 불가피한 결함을 지적하여 전통적 . 공식론적 민주주의이론을 재검토하는 이론을 전개했다. 민주주의의 상대주의적 성격인 관용성이 어떠한 세계관에 대해서도 무차별하게 적용될 경우 어떤 정당이 여하한 방법을 써서든 다수만 획득하면 온 국민은 결국 그 다수의 힘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나치스가 바로 이 수법으로 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결과 히틀러를 등장시켜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말살시켰다. 루소가 간접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국민의 총의는 국민의 직접투표에서만이 반영될 수 있다고 직접민주주의를 제창한 진의는 선거수단에 의한 다 수 정당이라 해서 반드시 국민의 총의라 할 수 없다는 그의 총의설의 이론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루소가 말하는 총의는 현실적으로 정치 결정의 근거가 되는 입법의 지를 말한다. 따라서 루소에 의하면 국민 중에서 가장 총명한 지도자 개인의 의지도 국민의 총의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 대, 루소는 개개인의 특수 의사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과오와 부정이 항상 수반되기 마련이며, 가령 모든 국민의 의사가 우 연히 합치했다 해도 그것은 결국은 특수 의사의 집합에 불과한 것 이다. 국민 모두의 의사와 국민의 총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 이다. 국민의 정신이 타락하여 노예 근성화되어 데마고그의 선전에 부화뇌동하여 몰의식된 군중심리는 도리 . 정의를 압도하는 무서운 힘 이 된다. 국민의 의향을 구현하여 온 국민의 에너지를 공동목적에 집 결시킬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은 결코 민주주의의 역행이 아 니라 그 시대의 절실한 요청이라 하갰다. 재퍼슨은 1813년 존 아담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가장 우수한 능력을 가진 인물을 통치자의 지위에 직접 선출할 수 있는 통치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체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링컨은 정부는 필연적으로 통 치하의 국민의 자유에 대해 이를 압박할 만큼 강력한 것이 되거나 아 니면 정부 자체의 존립을 유지할수조차 없을 정도로 약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여,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그 자신의 강력한 집행 력을 가진 정부에 의해 주어졌다. 빈약한 대통령은 집행력의 약체를 의미하고, 약체정부는 곧 나쁜 정부의 대명사 다. 일시적이기는 하나 국민의 주권 보류, 법률 집행 의 정지 등 일견해서 반민주적 현상이 잇따르고 있으나, 당시의 내외 상황은 성문법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우리 국가의 기초를 위태롭게 하 는,위기 상태를 감안할 때 수단을 위해 목적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고 이해할 수 있다.
나. 유신의 의의와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
1960년대에는 근대화 붐이 한창이었으나 60년대 말로 기울면서 한 국의 르네상스를 다짐하며 주체의식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의 격랑이 있었다. 그 후 10윌유신 이후로는 민주주의의 토착화란 신풍이 온 나 라 안을 휩쓸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시대적 좌표는 상호 연쇄적 반사작용을 일으키며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급격화했던 근대화로 인하여 한국의 사회는 불량화해 갔던 것이고, 이에 대한 치유처방으로서 간절히 요청된 것이 민족적 주체의식의 부 활이었다. 고래의 전통사를 깨뜨리고 등장한 물질적 개인주의 정신 의 방탕에 위험을 느낀 데서 주체의식이 강조되게끔 되었다. 그 위에 60년대 말 불쑥 뛰어든 미국의 닉슨 독트린과 국제질서상 양극체제의 동요는 한국에 불안의식을 자아내었는데 이것이 또한 대외 불신감과 동시에 지주세력 형성에 대한 긴박감을 자극하여 민족주의에 대한 염 원을 한층 더 강렬하게 했다. 따라서 민족주의 물결의 도래는 구미적 근대화과정을 정신적인 면에서 토착화시키려는 근대화의 토착화운동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근대화의 토착화작업은 주체의식과 한국 고전 부활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에서 긴장이 환화 되어지며, 남과 북이 대화를 시작함에 따라 박대통령이 누차 천명했 던 것처럼 앞으로 남북간의 체제상의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어느 쪽이 더 우월한가 하는 경쟁은 역시 박대통령이 지적한바와 같 이 어느 편이 더 잘 살수 있느냐하는 점에서 판가름나게 되는데, 이 경쟁은 바로 한국에게 생산증대와 농어촌의 근대화 및 빈부격차의 해 소작업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긴박감을 안겨다 주게 되었다. 이 시급 한 문제들을 처리하여 가는 데는 강력한 지도체제가 반드시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구미적 자유민주주의체제로는 제도상 절실히 요구되는, 효율적이고 강력한 힘을 동원하기 어렵게 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 행정권을 강화시켜 줄 체제의 개혁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체제 개혁을 민주주의 토착화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캐나다 의 C.B.맥퍼슨 교수에 의하면 민주주의를 세개의 형태로 구분하였는 데 한국의 민주주의 토착화는 지도민주주의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맥퍼슨 교수에 의하면, 현재 세계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민주주 의는 첫째로 자유민주주의, 둘째로 전위민주주의, 셋째로 지도민주주 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자유민주주의는 현재 구미 각국에서 실현되고 있다. 자유민 주주의란 본래 두 개의 별개인 게념이 합쳐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와 민주주의가 곧 그것인데 자유민주주의는 정치 .문화.사회 및 경 제활동에 어떠한 외적 제약도 가하지 않고 자유롭게 방임해 둔다는 철학을 말한다. 그러나 적당한 규제 없는 자유경쟁사회는 약육강식의 상태를 다시 빚어 강자는 더욱 강해지며 약자는 더욱 약해지는 불평 등의 모순을 사회적으로 초래하게 된다. 이 자유주의의 취약점을 시 정코자 등장한 것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귀족적 신분사회를 부정하고 평면적 균등사회 건설을 추구하는 철학 이다. 민중 또는 대중이 사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활원칙을 담 고 있으며,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라 함은 자유주의의 불균형한 사회의 모순을 민주주의원칙에 입각하여 시정해 가는 두 개의 원리를 한데 묶은 이중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와 민주를 소화시키는 자 유민주주의는 자유시장의 생리에서 진화하였다는 데 주목하여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유로운 경쟁과 선택의 기초 위에서 온 것 이 다.
예컨대, 고객은 시장에 나가 자기 스스로 상품을 선택하고 가격을 흥정하며 최선의 선택을 자연스럽게 해 나간다. 상인은 서로 다투어 물가를 적절하게 제공하고, 상품의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물가 를 조절하며 시가를 재조정하는 것이다. 상품의 질을 높이려는 자연 적인 경쟁적 충동을 받게되는 것이다. 또한 개인은 자기의 노동력이 나 생산품을 받아낸다. 이와 같이 모든 흥정은 개인의 독자적인 결정 에 의하여 좌우되게 되어 있다. 구미인들은 이러한 시장생활을 오랫 동안 영위해 오는 가운데 자유민주주의체제 운영의 기본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자유경쟁, 주체성, 계약의 준수, 타협심, 자유선택, 평면적 인 인간관계 등을 발전시켜 생활에 익힐 수 있었다. 따라서 국민과 정 부의 관계는 마치 자유시장에서의 고객과 상인의 사이 같아서, 고객 으로서의 국민은 상품으로서의 정부에 대한 기능 그리고 권력구조 등 을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에서 상품을 신택하듯 골라낼 수 있게 된다. 한편 상품으로서의 정부는 고객의 관심과 환심을 얻기 위하여 최선의 힘으로 질의 향상과 서비스에 스스로 전력을 다하게 된다. 바꿔 말하 자면 국민과 정부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고객과 상품, 즉 주인과 노복과의 관계유지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 이 시장사회체제의 관행에서 그 실현이 순조로워진다. 평면적인 인간 관계 위에서 주체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시장활동의 원 칙에서 피치자는 치자를 하나의 상품이며 대행노동력 이상으로 보지 않게 된다. 피치자는 상품과 노임을 지불하듯이 치자에게 국면으로서 의 의무를 자연스럽게 이행해 나갈수 있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치자 는 시장생활에서 굳혀진 자유경쟁 의식, 계약의 준수, 그리고 타협화 등으로 치자간에 선의의 경쟁을 겨루어 가고, 타협과 조화를 이루어 가며, 계약의 한계 내에서 사회 봉사를 펴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 한 체제적 기반 위에서만이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의 자유민주주의의 실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 하겠다. 즉, 이질적인 요소의 경 합체로서의정당기능, 참다운 민의 반영과 행정부에 대한 견제역할로 서의 의회기능, 그리고 계약준수 정신을 지켜 나갈 때 비로소 순조로 운 정권교체도 가능해질 수 있다.
둘째로, 무산계급의 민주주의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칼 마 르크는 1848년에 그 유명한 공산당선언을 발표하면서,민주주의의 승 리를 위한 첫 단계는 노동자를 혁명에 의하여 무산계급으로 승격시키 는 것이다, 라고 천명하여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도 민주주의화를 위 한 과정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의 고전에 의하면 공산사회화운동도 결국은 민주주의운동이라는 것이다. 귀족이나 자본가의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인민 전부가 주인이 되는 사회 건설이란 기치를 내걸 고 있는 것이 공산주의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현재의 공산주의 사회가 명실상부하게 그렇게 고른 민주주의사회로 발전되어 간다면 공산주의체제도 민주주의와 별다를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발전이론도 인간은 자유롭고 창조적인 동물이 라는 토대 위에 성립되었다. 상식적인 얘기가 될지 몰라도, 그에 의 하면 인간의 자유와 창조력은 자본가들이 항시 결핍되어 온 상품의 증산을 위하여 인간을 노역장에서 혹사시키는 가운데 박탈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근대적 기술혁명이 완료됨으로써 강압 노동에 메이지 않아도 풍부히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마르크스는 굳게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노동계급을 자본가의 혹사로부터 해방시킬 것 같으면 그들의 자유와 창조력이 되살아나게 되어 인류문 화 발전과 공산 낙원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노동계급의 착취가 필연적으로 악화되어질 때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이 폭발한다고 했다. 혁명 후엔 무산계급에 의한 독재정권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믿 었다. 자본가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한낱 도구로서 존재하는 국 가가 자본가들에 의하여 독재되는 바와 같이 무산계급을 위한 공산국 가는 무산계급에 의하여 독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 레닌이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을 이끌면서 절실히 느 낀 바와 같이 자본주의국가에 있어서 공산혁명은 자연발생적으로 일 어나지 않았다. 사실 레닌은 1902년 무산계급이란 게으르고 무기력하 며 무식하고 소인배 같기 때문에 혁명을 자발적으로 일으킬 만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갈 능력도 없어서 소 수의 전위 혁명가들에 의하여 혁명되고 독재되어야 한다고 솔직히 실 토한 바 있다. 일단 전위혁명가들은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소수에 의한 무 단정치를 행하면서 서서히 노동계급을 흡수한다는 이론을 폈다. 이후 공산치하에 들어가게 된 사희는 획일적으로 전위혁명가들에 의하여 독재되어 왔는데 이들은 철저한 공산당의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론의 여지없이 전위국가를 민주주의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국민에 의하여 정당한 절차를 통하여 선출된 정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비민주 절차에 의하여 정권이 수립되었다 할지라도 일단 국민 다수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하여 지지를 획득하게 되면 민주정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공산국가에서는 국민 다수를 무기력하고 무능한 것으로 제쳐놓고 참정권을 주지 않고 있으므로 재고할 여지조차 없다. 그리고 공산국가가 일당 독재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고 해서 그 이유만으로 비민주국가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일당국가라 할지라도 그 당이 내부적으로 자유로운 민주절차에 의하여 조직되고 당원의 자격이 개방적이며, 당에의 참여가 특정 인물이나 대상에 편 파적인 충성을 강요당하지 않고 오직 국민 전체에 봉사한다고 할 것 같으면 협의의 의미에서 민주국가라 할 수 있다. 이 조건에도 공산국 가는 현재까지 민주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광의로 볼 때 인긴의 평등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이 평 등이란 자유사회에서는 보다 나은 계급으로 향상할 수 있는 기회상의 균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산사희에서는 그러한 경쟁상의 기회균등 이 허락되지 않는 이면에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거나 딛고 서 서 긍정적인, 계급 없는 인간 평등사회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공산사회가 새로운 관료계급사회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아 이것 역시 계급사회로 규정지을 수 있지만 그 관료 이외의 사회계급 의 분화란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계급부재의 현상을 나타내 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계급부재의 현상을 나타 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계급부재의 사회의 주 인이 전체 무산계급이 아니라 오직 소수의 전위혁명가들에 국한되고 있으므로 전위민주주의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다. 이제 주로 살피고자 하는 유신하의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 개념이 위에서 분류해 본 자유민주주의나 전위민주주의와 다른 독특한 성격 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경우 구미 자유민주주의의 발원이 되었던 자 유시장사회 형성이 역사적으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성장될 기본 토대부터 조성되지 못하였다. 거듭 지적되거 니와 전통적 시장사회의 부재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요소인 자유경 쟁 .평등원칙 . 계약준수.타협 .자유선택 그리고 평면적인 인간관계 수립 등이 발전되기는 어렵기 마련이다.
한국은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시일을 두고 고유의 문화 적 타성을 굳혀 왔다. 즉, 인습적인 족벌의식, 권력 독점의 편향성, 유교사상에서 온 예속성과 종적인 인긴관계 그리고 비타협성 등이 자 유민주주의에 대한 성벽을 쌓아 왔다. 이러한 타성은 경제생활에서 상거래 윤리의 악순환으로 나타났다. 사업인들은 고객과 상품 간의 자유경쟁에서 이윤을 추구하려는 것보다는 비경쟁적인 부정수단에 의 한 치부를 하려는 성향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조선 말엽까 지 근대적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요인도 일찍부터 자유시장 발달이 부재한데 기인한다고 본다. 정치적 경쟁의식도 경제적 경쟁과 마찬가 지로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므로 구미 각국에서처럼 자유경쟁적인 정 당활동과 제도를 발전시키기 어려웠다. 의회의 기능도 마찬가지의 숙 명에 빠진다. 우선 교육수준이 높고 매스컴과의 접촉이 번번한 도시 를 제외한 농어촌지역의 선거민은 그동안 많이 개화되었다 할지라도 아직 시장 사회성과 거리가 먼 전통 생활관에 묻혀 있으므로 선거동 태 자체부터가 비민주.비자유주의화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선출된 의원들에게서 실제 정상적인 의회운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도 자연적인 귀결이라 하겠다.물론 의회의 기 능은 여러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최소한도 행정부에 대한 질의 및 견제역할과 민의를 행정부에 반영해 온 데서 그런대로 부분적으로 나마제구실을 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기능의 발휘가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나타났느냐는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우선 여당에 속 한 의원들은 행정부 수반과의 주종관계 때문에 자당의 행정부에 객관 적인 민의반영을 정상적인 레벨에서 결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야당은 실권이 없는 당이므로 당의 한국적 지도체, 즉 주종관 계가 성립되지 않아 평면적인 견해 소통은 원활하지만 그대신 당 자 체가 통일성을기하지 못하였으므로 종힁으로 결집된 민의를 국정에 반영시킬 만한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의회가 재구실 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 이 다.
사실 한국의 의회역사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동태론적인 면에서 볼 때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해 온 것만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 러나 민주주의원칙에 조명해 볼 때 그런 대로 부분적이나마 그 존재 적 가치를 유지한 흔적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행 정부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서의 역할과, 국가시책에 대한 국민적 참 여의식의 고취 그리고 한국의의회가 체제상으로 자유민주주의 구조를 답습.지향하고 있다는 내외적 자부심을 일으켜 주었던 점 등이다. 국회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속하여야 할 국책 시행 에 지연을 초래하는 존제라 할지라도 체제적 자부심과 민주주의 연습 이라는 대의명분으로 국회의 존재를 합리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국이 당시 직면하고 있던 화급한 내외정세 때문에 체제적 자부심과 민주주의 연습이라는 대의명분만으로 국회의 존재적 가치를 평가하기 에는 현실이 너무 급해지면 국회 존재에 대한 인식은 달라지기 마련 이다. 특히나 내외 정세에 직접적으로 도전을 받는 행정부는 그 받는 강도가 다른 정치인들보다 강하여 국정의 효율화에 대한 집념을 키워 가게 된다. 이 집념이 어느 한계점에 다달았을 때 의회 권한의 약화와 행정권 의 강화를 상대적으로 다져 줄 체제상의 개혁을 생각해 내게끔 된다. 이래서 민주주의토착화라는 체제개혁의 절규는 국민이나 국회로부터 창도되는 것이 아니라 행정부로부터 발원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보아 진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제적 긴장 완화에서 오는 불안감, 남 북대화 이후 강하게 도전해 오는 농어촌의 근대화와 빈부 격차의 해 소, 그리고 생산의 증대 등과 같은 시급한 해결점의 압력은 이 벅찬 임무를 해낼 강력한 행정력의 구현을 요구하게 되고, 그에 대한 체제 적 유신을 갈망하게 된 것이라고 보아진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반 위 에 행정력의 강력한 구사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는지 자못 주목 거리임에는 틀림없다.
한국민은 이미 일상 생활만은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흠뻑 적어 있어 그 관행을 쉽사리 포기하기 어려울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효율적 인 행정력의 구사를 위해 생활상의 자유민주주의 분위기를 보장해 주 는 것이 보다 능률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출현된 강력한 지도체제는 민족적 대업을 치러야 할 과정으로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한 국민총의라는 대의명분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토착화 또는 지도민주주의 작업은 수단보다 목적에 비 중을 더 두고 있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추상적인 민주주의의 연 습보다는 국면총의로 설정된 국가적 목적을 성취해야 한다는 행동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고전적 민주주의윈리를 창도한 장 자크 루소 도 사회의 병폐나 정치의 모순은 국민총의의 수술로 제거되어야 한다 고 주창한 바 있는데, 실상 강력한 지도력의 출현은 이 국민총의 이론 에 부합한다 하겠다.
다. 유신의 정치역학 및 그 평가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후 미국은 월남전에서 손을 떼기 시작함과 동시에 주한 미군의 감군을 단행하였다. 미국은 감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군사원조도 감축시킴으로써 한국의 방위는 더 이상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 1970년대에 전개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방위 전략 변화와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로 한국의 자주국방 문제가 제기 되 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유신체제하의 국방이 크게 강화되었음은 사 실이다. 첫째로 1972년 말에는 항토예비군 설치법을 개정하여 그 편 성이나 훈련장비에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여러가지 정치적 문제가 야기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수에 있어서나 장비에 있어서나 훈 련 시설에 있어서나 북한의 노동적위대 이상의 전력을 갖추게 되 었다. 뿐만 아니라 1975년에는 민방위대가 조직되어 후방 방위능력이 보강 되었고,1973년부터는 그동안의 노동집약적인 중화학공업을 지 향함과 동시에 군수조달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 공포하여 자주국 방에 필요한 각종 군수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유신기 간 중에 M1소총이 M16소총으로 대체되었고, 그 외에도 박격포, 고 성능 전차가 자체 생산되었다. 유신하에서 국방능력은 다른 어느 부 분보다도 계획적으로 효율적으로 발전되었던 분야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국방능력의 배양에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었던 것은 1975년 7 월 16일 제정한 한시법인 방위세법에 근거한 방위세의 역할이 지대 했다 하겠다.
유신 이후 취한 최초의 경제적 조치는 중화학공업정책의 선언이 었다고 할 수 있다. 박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의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선언으로 집약되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발표하였다.70년 대에 들어서면서 두드러진 외국의 수입규제 강화와 후발 개발도상국 의 추격으로 기존 공업제품의 수출만 가지고는 수출신장에 한계를 느끼게 된 것이 이 정책의 배경이었다. 그러한상황아래서 단위당 수 출규모가 크고 부가가치 및 외화가득률이 높으며 외국의 수입규제가 적은 중화학제품을 생산하고자 한 것이다. 정부는 고도성장정책의 일환으로 수출중심의 경제정책을 펴 나감에 따라 1972년 1인당 국민소득이 300불에서 1977년 850불을 넘어섰고, 1978년에는 1,000불을 넘어서게 되었다. 또한 1981년을 목표하였던 100억 불 수출이 1978년에 조기달성될 정도로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한편 70년대 한국경제에 영향을 준 주요현상으로 물가상승을 지적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1970년대 후반에 대폭적인 물가의 상승은 그 주요요인이 무엇보다도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체험하면서 국제 원자 재 값이 크게 상승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주로 수입원자재에 의존 하여 왔던 우리나라의 산업은 그 피해가 즉각적으로 크게 나타났던 것이다.
유신통치하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바뀌어지는 가운데 가장 심한 변화의 압력을 받은 곳은 아마도 농촌지역일 것이다. 60년대의 제1. 2차 경제개발계획과 더불어 발빠른 경제성장이 진행됨에 따라서 도 시.농촌간의 격차가 생기게 되었고, 여기에 정부에서는 새마을 운동 이라는 농촌지역 개발운동을 1970년 초애 내놓게 되었고, 유신에 와 서 이것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새마을운동은 1972년까지 주로 환 경개선사업이라 할 수 있는 가꾸기사업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1973년 이후 대상지역이 농촌에서 도시까지 확산되였다고는 하나 그 중점은 역시 농촌이었다. 1973년 이후 새마을사업은 가꾸기 사업 이외에도 소득사업, 정신계발사업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업 의 확산이 있었으며, 환경계선사업으로서 농촌주택개량사업, 취락구 조개선사업 등도 전개되어 농촌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 1978년까지 전국의 농촌이 오지와 도서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화가 가설된 것 은 그 중에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었다. 새마을운동 이외의 농촌개발정책으로서 1977년 초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유통 근대화와 가격안정을 위한 비축 수매사업의 근거를 마련한 바 있고,1978년에는 한국농촌경제연 구원을 설립하여 농정대안의 개발, 농정여론조사, 공직자와 농어민의 교육을 담당케 하여 농정발전에 기여케 하였다. 또한 1978년에는 농 업기계화촉진법을 제정하여 농업기계화를 위한 금융지원, 사후봉사, 기술훈력 등의 사업을 실시하였다. 1968년 이후 고미가정책과 1969년 이후의 2중맥가제 실시는 70년대에도 계속하여 실시함으로써 농가소 득읕 향상시키고 인플레를 억제하며 곡가의 계절적 진폭을 완화시킴 으로써 생산자와 소비자의 복지에 다같이 기여하였다. 유신통치하의 사회개발 부분의 대표적인 것은 고속도로의 확장, 지 하철과 철도의 강화 등을 들 수 있다.60년대 말에 경인고속도로가 개 통되였고,1970년대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1970년 12월 30일 의 호남선 회덕.전주간의 개통에 이어 1973년 11월 14일에는 전주. 순천간에 고속도로가 연결되었고, 같은 날 남매선인 부산. 순천간의 고속도로가 연결되었다. 영동선은 71년 11월 30일 신갈.새말간이 개 통되었고,75년 9월 30일에는 새말.강릉간이 연결되어 마침내 인 천.강릉간의 국토 횡단축이 관통되었다.75년 10월 15일에는 강릉 . 삼척간의 동해신이 게통되었으며,77년 대구. 마산을 이어주는 구마 선이 개통됨으로써 전국의 대소도시는 일일생활권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전철과 지하철이 등장했는데,1973년에 중앙선이 처음으로 전철 화되었고,74년에는 태백선과 수도권 전철화가 이룩되었으며 서울의 지하철이 개통되었다.75년에는 영동선 및 중앙선.태백선 등의 전철 화로 수송시긴도 대폭적으로 빨라졌다.74년의 서울지하철 개통은 수 도권의 대중교통난의 현격한 해소를 가져왔고 도시기능을 광역화함은 물론 도심인구의 교외 분산효과를 가져온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유신통치가 성립될 즈음의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는 미 ·소 중심 의 양극화된 냉전체제에서 미 .소.중. 일 중심의 다극화된 화해체제 로 전환하고 있었고, 한반도 내에서는 72년 초부터 남북한 고위충간 의 비밀협상으로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는 등 해빙무드가 지배하던 때였다. 이와 같은 국내외적인 상황은 국력의 조직화 및 능률의 극대 화를 표방하는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박대통령의 주 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주었다. 곧 박대통령 스스로 밝힌 유신의 동기인 국제정세에의 적응, 남북대화의 성공적 추진, 한국적 민주주 의의 정착이란 명제가 국민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하였다고 보아도 무 방할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활양식이나 문화전통에 걸맞을 뿐 아니 라 당시 우리가 적극 추진하고 있었던 근대화의 과업을 가장 효율적 으로 달성할 수 있는 민주제도가 절실했던 셈이다. 더구나 우리 민족 이 처한 역사적 상황이 다른 나라들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 국토의 분단과 북한 공산집단의 부단한 침략위협 아래 전시 또는 준전시상태로 살아 왔고, 지금도 또한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처한 이러한 특수상황을 무시하고 이러한 문제와 고민을 갖고 있지 않은 나라들의 제도를 무분별하게 모방했을 경우 그것은 우리의 문제와 고민을 해결하기는커녕 자칫하면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 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었다. 서구의 민주사회에 있어서도 전시나 혹은 국가적인 위기상황 아래에서는 국가의 제도나 기본권의 보장에 있어서 이러한 위기와 고민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탄력성있게 운영되어 왔다. 오늘날에 있어 어느 민주국가에 있어서나 국가 원수에게는 비상대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것은 국가의 위기에 처하여 민주주의 자체를 수호하는 과정에서 발전된 제도적 관행이라 하겠다. 미국만 하더라도 남북전쟁을 전후해서 국가의 존립을 판가름 하는 위기가 닥쳐왔을 때 대통령의 비상대권에 의해 헌법의 일부 인 권조항등이 정지되고, 수만명의 시민들이 반국가 활동을 한 혐의로 영장없이 체포되기도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인 것이다. 그 당시 링컨대통령이 만일 의회의 맹렬한 반대에 굴복하여 국가 위기의 극복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높은 목적에 적합하지 못한 통상적인 절 차만을 고수했다면, 과연 미국이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와 부강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링컨 대통령의 신속한 결단과 과감한 행동이 없었던들 미국은 아마도 오늘날 사분오열된 군 소국가로 쪼개졌을 것이며, 세계사의 진로와 방향마저 크게 탈라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1930년대의 미국이 당시 전세계를 휩쓸었던 대공 황으로부터 벗어나 경제부흥을 이룩하고, 전체주의와의 대결에서 민 주진영의 승리를 가져온 것도, 루즈벨트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현명하 게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헌정사상 유일한 4선대통령이었을 뿐 아니라 2차대전을 수행하면서 전례없이 강력한 비상권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전통적 인 자유경제의 원리를 수정해서 엄격한 가격통제를 실시했으며, 하와 이주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일본계 미국인을 본토에 이주시켜 강제 수용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나아가서 전쟁의 경과를 보도하는 데 있어 서 선동적인 언론과 출판을 철저하게 규제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의 미국내의 일부 세력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위 기의 심각성과 그 비상조치의 정당성이 올바로 인식됨에 따라 미국 국민들은 이를 전폭 지지하고 따랐다고 한다. 오늘날에 이르러 미국내의 여러 언론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링컨 대통령과 루즈벨트 대통령은 역대 미국대통령 가운데 가장 위대한 대 통령으로 숭앙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국가존립의 일대 위기에 처하여 가장 능률적으로 보전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 프랑스에서도 1950년대 후반에 알제리 독립을 둘러싸고 국론이 분일되어 심각한 국가 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드골 대통령은 국가원수의 임기를 7년으로 늘리고 그 권한을 대폭 강화함 으로써 국정의 능률과 정치의 안정이 이룩될 토대를 닦아 놓았다. 이 를 통해 프랑스는 당시의 위기를 효율적으로 극복했을 뿐 아니라 잃 었던 프랑스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을 만큼 각 분야에서 눈부신 성 장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오늘날 심각한 혼란과 격동을 간단없이 겪 고 있는 이웃의 민주국가들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스가 비교적으로 상 당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드골 헌법에 의해 새롭게 마 련된 민주제도가 확고하고 발전적으로 정착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얘기한 바와 같이 민주제도는 한 나라에서도 그 나라가 처한 역사적 현실에 따라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주주 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있을 때에는 갈 등과 투쟁으로 인한 국력의 낭비와 비능률을 줄이고 온 국민이 한데 뭉쳐 이에 대항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어져 온 것이다. 위기 의 정도가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형식과 절차보다는 내용과 실질을 중 시하고 경쟁과 타협보다는 단결과 효율을 앞세워 위기상황을 극복하 는 가운데 민주주의를 성숙하게 성장.발전시켜 왔다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할 때 국토의 분단과 준전시라는 한국 민족의 역사적 상황은 이들 서구민주국가들이 겪었던 위기보다 훨씬 더 심각 하고 절박한 만큼, 우리에게는 이러한 특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보다 능률적인 우리식의 민주제도가 필요했던 셈이다. 그러나 유신통 치 시기에는 이처럼 분명한 이치를 올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 일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곧 민주주의를 너무 피상적으로 이 해한 나머지 자유의 신장을 외치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과 책임 을 소흘히 했고, 민주주의 수호를 주장하면서도 그에 수반되어야 할 실질과 능률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무제한의 자 유와 무질서가 마치 진정한 민주주의인양 그릇 인식되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와 같이 개인의 자유와 창의가 존중되는 개방사회에서 는 어느 정도의 국민적 갈등이나 마찰이 없을 수 없는 것이고, 때로는 다소의 혼란과 잡음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사회가 폐 쇄적인 공산주의사회에 비해 보다 자유롭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갈등과 마찰이 단기적으로는 낭비와 비 능률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발전적이며 창조적인 동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민주사회의 장점인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민주사회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분명히 넘어서는 안 될 한계가 있는 것이며, 또 그러한 한계의 수준은 나라마다 그 형 편에 따라 크게 다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미국과 같이 그 이웃에 적대국도 없고 국방력과 경제력이 충분한 형편이라면, 어느 정도의 비능률과 낭비가 있더라도 그것이 바로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척지간에 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 는 공산침략집단과 대치하고 있을 뿐더러 나라의 힘이 남아돌 만큼 튼튼하지도 못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용납될 수 있는 갈등과 투쟁의 한계나 허용될수 있는 낭비와 비능률의 규모가 미국과 같이 여유있는 나라에 비해 좁고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자제와 기율을 통해 스스로 지켜야 할 명백한 한계를 망각하고 극한 투쟁과 낭비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불순세력의 준동을 유발하여 국기를 흔드 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분단과 준전시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국력의 축적은커녕 그나마 애써 서 배양해 온 국력마저 소모시켜 끝내는 국가의 존립도 국민의 생존 도 기약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은 이미 체득한 사실이다. 무릇 정치제도란 국가와 민족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실용적 수 단인 것이며 그것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 는 특정한 민주국가의 제도적 장치를 무조건적으로 모방한다 해서 달 성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유신은 우리가 당면했던 우 리의 현실여건 아래서 우리의 문화와 전통에 알맞는 방법으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행복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이상을 최대로 실현할 수 있 도록 하는 발전된 우리의 민주제도라고 단정적으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건국 당시 유럽에서 싹트고 있었던 민주이념을 일 방 받아들이면서도 유럽의 정치제도를 곧이곧대로 모방하는 대신 미 대륙의 특유의 경험을 거울삼아 고유한 선거제도와 함께 대통령중심 제라는 독특한 민주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그 결과로 오늘날에 있어 서는 국력에 있어서는 물론 정치사조에 있어서도 오히려 유럽대륙을 앞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민주정치의 역 사를 내외에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날로 뻗어가는 미국의 국력은 바로 이러한 독특한 미국민주정치의 활력을 과시하고 있는 동시에 그 웅대한 국력 때문에 미국식 민주정치는 더욱더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신이 본받았던 것은 미국적 경험의 산물인 그들의 제도가 아니라 그 독특한 제도를 만들어낸 그들의 자주성과 창조정신이었다. 서구와는 판이하게 다른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한국 민족에게 는 서구의 정치풍토나 사조를 그대로 추종하는 대신 우리 민족의 정 치 전통과 문화의 바탕 위에서 자주적으로 미래의 방향을 설계할 필 요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의 역사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경험을 거울삼아 우리 자 신에게 보다 합당하고 보다 생산적이며 보다 능률적인 민주제도를 가 져야 하겠다는 것은 우리의 오랜 숙제이자 온 국민의 희구였고 그것 에 대한 부응으로 유신이 필연적으로 도래했다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0월유신과 국가존속력 강화
한 나라의 발전은 그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가는 정치지도자의 이념 적 정향에 따라 국가발전의 내용과 속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이 국가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지도자의 지도이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라 하겠다. 국민이 그 지도 자의 지도이념에 공감을 느낄 때는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있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할 때는 반목과 오해 속에 분산되어 생성과 발전은커녕 소멸과 퇴영의 길을 걷게 된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 박대통령의 지도이념 곧 정치이념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념이란 철학적으로는 이성으로 얻어진 최고의 개념 또는 관념을 말하나, 정 치이념이란 현실적 기반 위에서 실천하고 도달하여야 할 가치를 의미 한다. 그렇다면 과연 박대통령의 가치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이념적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정치면에서는 반공민주국가의 건설이라 하겠다. 혁명공약 제 1항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라고 천명했다시피 박대통령 이 내걸었던 민족주의사상은 서구민족주의의 한국적 병폐에 대한 소 독제가 되었다.
둘째, 경제면에 있어서는 자립경제의 달성이다. 우리가 이상으로 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은 확고한 경제적 기반이 없이는 이 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이므로 박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라는 이념적 지향을 쟁취하는 전략적 방법으로 자립경제의 달성을 추 진했던 것이다.
셋째, 안보 . 외교면에서는 자주국방태세의 확립만이 우리가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굳게 확신하였다.
넷째, 사회면에 있어서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복지사회의 건설이 그 의 집념이었다.
다섯째, 문화면에 있어서는 민족의 주제성을 확립하여 민족문화를 꽃피우는 것이었다.
일곱째, 행동면에 있어서는 새마을정신의 생활화로 근면 . 자조 . 협 동이야말로 한국적 민주주의가 개화 . 결실되는 실천적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었다.
여덟째, 통일면에 있어서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주적 .민주적 자유. 평화통일을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줄기찬 의지를 가졌었다. 그 렇게 하기 위해서는 북보다 월등한 경제력과 군사력 및 국민 모두의 총화단결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무릇 통치자 또는 영도자의 지도이념이란 현실적 조건과 상응하개 발전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며, 원대한 민족의 이상과 꿈을 제시하여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사기를 고양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실천 가능한 구체적인 정책을 부단히 제시하고 전개해 나가야 할 것 이다. 이상과 같이 박대통령의 민족지도의 원리는 각 분야 하나하나 가 서로 동떨어진 내용이 아니고, 그 이념적 내용이 체계화되어 당면 한 목표이자 중간 목표인 조국근대화의 명제에 결부되어 있으며, 그 것은 다시 조국근대화를 통한 민족의 중흥이라는 종합적이고 최종적 인 목표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이념은 한 마 디로 요약하여 자유민주주의를 통한 '한민족의 중흥,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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