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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님께.
어떻게 인사를 시작할까요?
저는 2년 반 전에 페미니즘을 접하고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대한민국 여성입니다. 페미니즘 명저『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와 『엄마는 페미니스트』라는 두 권의 책으로 작가님을 만났습니다.
TED강연을 책으로 엮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책을 펼치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이지리아 태생의 소설가는 처음이었어요. 나이지리아에도 훌륭한 작가와 뛰어난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어요. 엄청난 무지와 편견이지요. 편지를 쓰면서 들은 TED강연 “단편적인 이야기의 위험성”도 정말 좋았어요. 고정관념의 불완전성과 심각성을 균형감각을 가지고 호소력 있게 전달하셨더군요.
작가님은 한국에 『보라색 히비스커스』 출간 기념으로 2019년 8월 중순경 방문하셨지요? 제가 극적으로 페미니즘을 접하기 딱 한 달 전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하 세바시) 강연장 연단 위에서 작가님의 강연을 귀 기울여 듣던 여성들이 정말 부러웠어요. “페미니스트로 행복하게 살기” 세바시 강연 영상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TED강연처럼 놀라웠어요.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성별에 따라 정말 다르게 판단하는 실례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셨지요. 무엇보다 성별 이분법으로 고통 받는 한국 여성과 남성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어요. 더욱이 16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성별에 합당한 대안을 제시하신 모습에 감탄했어요. 한마디로 설득의 명수셨죠. 이번에도 페미니스트와 함께 걸어갈 사람이 여성만이 아닌 모든 사람임을 강조하셨어요.
잠깐 페미니즘이 제게 준 수많은 선물 중에 가장 특별한 선물을 소개하려 합니다. 단연 의심 없이 받아들인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는 거였어요. 성별이분법 교육의 문제점을 제기한 페미니즘의 질문을 마주하거나 들여다보면 사회구조나 언어, 역사 속에 엄청난 편견과 고정관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무엇보다 제 몸과 정신, 언어 속에 숨 쉬는 편견을 들여다보는 일은 정말 아팠습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가지 성만 있는 줄 알았다가 전 세계에 300만 이상의 간성, 인터섹스(intersex)라는 성 정체성이 있다는 걸 들었을 때의 충격은 지축을 흔든 느낌이었어요. 대다수의 간성이 태어나면서 또는 어린 시절에 의사의 제안과 부모의 결정에 따라 하나의 성으로 교정하는 수술을 받더군요. 청소년이나 성인이 되면 대부분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어요. 부모나 의사에 의해 자신의 성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경우도 영화로 보았어요. 세상은 또 얼마나 많은 진실을 ‘정상’과 ‘일반’이라는 허구적 규범과 제도 아래 감추고 있을까요? 한참 동안 우울감과 슬픔에 휩싸였어요. 간성만 아니라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 논 바이너리, 바이섹슈얼 등 다양한 성적 지향이 있다는 것도 페미니즘을 통해 배웠어요. 다양한 존재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충격과 슬픔으로 다가왔어요. 한국 사회와 정치, 종교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지운 존재. 무지해서 들여다보지 않았던 존재들이 “우리, 여기 있어요.” 아우성치고 있었거든요.
최근 114돌 여성의 날 새벽에 문득 깨닫게 되었죠. 등장하지 않은 무례하고 불쾌한 침입자를 향한 두려움으로 정말 글 쓰고 싶은 누군가를 배제하는 건 정의에 반한다는 사실을요. 그 날, 곧바로 글쓰기 플랫폼에 성별 가입조건을 여성에서 “모두”로 상향했어요. 몇 안 되는 회원들에게도 특별 공지를 올려 양해를 구했지요.
제 이야기를 조금 풀어 보았습니다. 작가님께 저라는 사람을 소개하려면 페미니즘을 만난 이후의 충격과 혼란스럽던 과정을 들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늦은 감이 있지만, 작가님의 책 이야기로 돌아가고 싶어요. 먼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성차별적인 사회구조를 향한 분노보다 ‘모두의 페미니즘’이라는 균형감각과 ‘행복한 페미니스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꿈꾸게 한 책이에요.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 많은 경우 분노가 일었어요. 작가님의 책을 읽고 나서는 타인과 사회에 대한 분노보다 저를 돌아보고 위로하며, 제 변화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페미니즘 책을 읽은 후에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낀 건 처음이에요. 작가님을 멘토로 모시고 싶은 결정적인 이유에요.
많은 독자가 그러셨겠지만, 저 또한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글귀에 밑줄을 그었어요. 몇 가지 내용은 특히 마음에 남아요.
먼저, “하지만 나는 여자였고, 그 아이는 남자였으므로 그 아이가 반장이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공감이 되었어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김명남 옮김, 창비, 2018, 16쪽)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도 나이지리아처럼 반장선거 차별이 있었어요. 이 일은 시작에 불과했지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상과 사회 곳곳에서 숨 쉬듯 차별을 겪으면서도 몰랐어요. 성차별 문제는 공교육과 한국 사회의 책임도 과중하고, 미디어나 문학, 예술작품 등에서 공고히 한 측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직의 여성화”를 성별 편향적이며 균형적 교육의 측면에서 문제적이라며 걱정하면서도 정작 교육정책을 집행하고 연구하는 관리직교사와 고위 교육직공무원의 대부분이 남성이며 특히 국공립 일반대학 교수의 대부분이 남성인 사실은 왜 문제 삼지 않는지 답답합니다.
정말 교직은 여성화되었을까요? 2007년 4월에 발표한 한국여성개발원의 <교직의 여성화와 남교사 할당제> 라는 제37차 여성정책포럼의 결론을 참고하면, 엄밀하게 말해 교직의 여성화는 “초중등 단계 평교사의 여성화“ 입니다. 여성의 교직 진출이 많은 이유 또한 다른 직업군보다 임금격차와 성차별이 적고 가정생활과 양립 가능하기 때문이라면, 오히려 기업과 사회의 성차별을 개선하고 임금격차와 노동시간 단축, 남녀 간 동일한 육아휴직 보장 및 육아휴직 이후 안정적 고용을 보장하는 정책을 강화할 일이지. 단순하게 남성할당제 도입을 거론할 문제일까요? 게다가 남성들이 교직을 매력적으로 느낄 국가 정책이나 재정적 지원 없이 초중등 단계 평교사의 균형적 교육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은 혹시 최근 막바지까지 결과예측이 어려웠던 대한민국 대통령선거를 보셨나요? 부끄럽게도 한 야당대표는 양성평등채용목표제인 성(性)할당제를 여성할당제로 왜곡, 남성청년에게 역차별이라며 선동하였습니다. 국민통합에 앞장서야 할 당 대표와 대통령후보가 함께 이대남(20대 남성 줄임말)과 이대녀(20대 여성 줄임말) 사이를 비열하게 갈랐지요. 부의 대물림이나 불공정이라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교묘히 숨긴 채 단순히 청년세대간 성별 갈등으로 왜곡, 선거에 악용한 정치인들을 영원히 퇴출시킬 방책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사회발전과 국가생존전략의 일환으로 노르웨이나 많은 유럽 국가가 성 평등지수를 높이고 성 평등한 사회구현에 앞장서는 데 비해 정반대방향으로 내달리는 대한민국의 성 불평등 시계는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두 번째는 인권옹호자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를 쓰는 이유가 명쾌해서 좋았습니다.
물론 페미니즘은 전체적인 인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젠더에 얽힌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부정하는 꼴입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여성들이 배제되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 꼴입니다. 이 문제가 그냥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콕 집어서 여성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세상은 지난 수백년 동안 인간을 두 집단으로 나눈 뒤 그중 한 집단을 배제하고 억압해왔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그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남자들은 페미니즘이란 개념에 위협을 느낍니다. 내 생각에 그런 반응은 남자아이들이 자라면서 받았던 교육, 즉 그들은 남자니까 ”당연히“ 우위를 차지해야 하며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그들의 자존감이 훼손될 거라는 가르침이 야기한 불안감 탓입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앞의 책, 44쪽)
분명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 마지막 TV 토론이었습니다. “페미니즘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는 경쟁후보의 질문에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의 하나”라고 이제는 대통령 당선인이 된 분이 대답했습니다. 구체적이고 특수한 여성의 불평등과 성차별 문제를 일부러 가린 답변이라 못마땅했습니다. 휴머니즘이란 답변에 반박할 말이 필요했는데, 작가님의 논리를 접하니 속이 다 시원했어요.
세 번째는 문화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문화를 만든다는 명제에 공감합니다.
내가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 증조할머니는 페미니스트였습니다. 할머니는 결혼하기 싫은 남자의 집에서 달아나 자신이 선택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토지에 대한 소유권과 접근권을 박탈당한다고 느끼자 그에 대해 거부했고, 항의했고, 나서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할머니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던 것은 아닙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되찾아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앞의 책, 51쪽)
저는 유독 작가님의 『엄마는 페미니스트』란 책이 좋아요.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 이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페미니스트에게 전하는 열다섯 가지 제안’으로 읽혔어요. 따라서 본문에 있는 ‘가르칠 것’이라는 제안은 능동형으로 바꿔 읽습니다.
첫 번째 제안, ‘충만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이 가장 좋았어요.
엄마라는 말이나 다른 수식어들로 자신을 정의하지 말고 충만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멋져요. 사회가 부여하고 요구하는 모성을 책임지려하지 말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 일하기와 돈 벌기에서 오는 자신감과 충족감을 사랑하라. 특히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지고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라는 말이 좋았어요. 종종 아내의 역할을 과도하게 수행하려는 저를 멈추는 말입니다.
여섯 번째 제안, ‘흔히 쓰이는 표현에 의구심을 가질 것’이란 내용도 좋았어요.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사용하는‘여성 혐오’나 ‘가부장제’라는 추상적인 표현을 남발하지 말라는 지적이 신선하면서도 인상 깊었어요. 작가님의 강의에서 한 번도 두 표현을 들은 적이 없어요. 언제나 구체적인 사례로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주셨죠. 뭔가에 여성 혐오라는 꼬리표만 붙이지 말고 왜 여성혐오인지를 설명하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셨어요. 작가님의 강연은 성차별과 고정관념을 말하지만, 편향적이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 개인이나 사회가 변해야한다고 설득하세요. 특히 예시나 설명이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워서 좋아요.
여덟 번째 제안, ‘호감형 되기를 거부할 것’은 최고의 조언이었어요.
페미니스트가 해야 할 일은 호감 가는 사람이 아니라 충만한 사람,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거라는 말에 감동했어요. 자기 의견과 진짜 생각을 정직하게 말하는 용감한 사람이 되라. 다른 사람들이 너의 친절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하라. 자기 것에 대한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라.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소리 내어 말하고 외치라. 모든 사람의 호감을 살 필요가 없다. 내가 남들이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남들을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도 정말 좋았어요.
씨네21 기사에서 강조했듯이, 다양성에 대한 지향이 페미니즘이며 우리 모두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할 자유가 있다(장영엽,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소설가·페미니스트·인플루언서인 그가 한국을 찾다」, 인터넷 『씨네21』, 2019. 9. 12.,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3824”, 2022. 3. 25 접속)고 설득력 있게 전 세계에 전하는 작가님을 동시대에 만날 수 있어 정말 행운입니다. 페미니즘을 알고, 특히 작가님을 알고부터 ‘생물학적 여성’인 제 욕구를 덜 제한하게 되었고, 감정과 몸의 언어를 예민하게 의식하고 존중하게 되었어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사회적 통념과 평가라는 색안경으로 본다면 자신을 대하는 똑같은 잣대로 타인을 억압하고 통제한다는 중대한 사실도 작가님의 책을 통해 배웠어요. 제 몸과 감정, 언어에 자유로울수록 타인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생각에서 놓여날 수 있다는 것도. 앞으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성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글쓰기에 더 적극 나서려 합니다. 작가님 덕분에 우리 모두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성 평등한 사회라는 확신이 듭니다.
생애 처음으로 ‘작가님’께 편지를 썼어요. 글을 쓰다 보니 왜 작가님을 좋아하는지, 어떤 점에서 작가님의 글이 와 닿았는지, 저 개인과 사회에 어떤 변화를 바라는지 깊이 고민할 수 있어 좋았어요. 갑자기 작가님의 소설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감각과 비판의식, 상대를 설득하는 논리력과 호소력, 소수자를 향한 민감성을 에세이에서 만났다면, 소설 속에는 또 다른 작가님의 다채롭고 자유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겠지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님!
길어서 어렵던 이름을 드디어 자연스럽게 적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을 써주셔서요.
정말 고맙습니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가 편협한 철학이나 삶의 방식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임을 전 세계에 알려주셔서요.
특별히 고맙습니다. 번역이 있어 한국에서도 작가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요.
언젠가는 꼭 작가님을 뵙기를 기대합니다.
깊은 감사와 사랑, 신뢰를 담아
2022. 4월 어느 날에.
https://youtu.be/DOuv8Uc53Qo(한글자막있음)페미니스트로 행복하게 살기(세바시 강연 '보라색 히비스커스' 저자)
https://youtu.be/4bcfEaryo64[TED+강연정류장] 단편적인 이야기의 위험성 - 치마만다 아디치
https://youtu.be/hg3umXU_qWcWe should all be feminists | Chimamanda Ngozi Adichie | TEDxEuston
첫댓글 좋은글 찐감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