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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제6대 (1457년)
端宗-莊陵-端宗(이홍휘) 流配生活에서 賜藥, 庶人 降等. 中宗11년에 封墳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 121번지- 사적196호
[제6대 단종실록]
[1. 비운의 왕자 홍위]
문종은 병약하여 많은 후사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세자빈 권씨마저 몸이 약해 외아들홍위를 나은 지 3일 만에 죽었다. 그래서 홍위는 세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서조모인 혜빈양씨의 손에서 자라났다.
현덕왕후는 스물 다섯의 나이에 경혜공주에 이어 홍위 왕자를 분만하게 되었는데,난산이라 간신히 아이를 낳긴 했지만 해산에 기력을 완전히 빼앗긴 탓으로 죽음을앞두게 된다. 그녀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 만에 숨을거두었다.
혜빈 양씨는 후덕한 여자였다. 태어난 지 불과 3일 만에 어머니를 여윈 세손 홍위에게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렇게양육된 홍위는 여덟 살이 되던 1448년(세종 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홍위를 무척 아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한 그는 성삼문,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앞날을 부탁했다. 세종은 자신도 이미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처지였고세자 향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세종이 이런 간곡한부탁을 한 것은 바로 혈기왕성한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은 어릴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죽음을 앞둔 연로한 왕은 어린 세손이그들 대군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일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홍위는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그때 홍위의나이 열 살이었다.
조선 제5대 왕으로 등극한 문종은 세종이 예상한 것처럼 오래 살지 못하고 즉위 2년3개월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일)을남기고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홍위의 나이 12세었다.
[2. 어린 단종의 즉위와 왕위를 찬탈하는 왕숙]
(1441-1457, 재위 기간 1452년 5월-1445 윤6월, 3년 2개월)
단종은 어린 나이인 12세로 왕위에 올랐다. 스무 살 이하인 미성년의 어린 왕이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좁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당시 궁중의 사정은 그렇지도 못했다.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는왕비도 없었다.
단종의 모후 권씨가 산욕열로 죽었고 문종의 후궁으로도 귀인 홍씨, 사즉 양씨 두사람뿐이었다. 비록 세종의 후궁 중에 혜빈 양씨가 있기는 하였지만 늦게 입궁한데다후궁인 탓으로 정치적인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후궁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다만내사를 돕는 정도에서 그쳐야 했다. 따라서 단종은 수렴청정조차도 받을 수 없는 처지로즉위한 것이었다.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 태어난 단종은 조부인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때부터 명석했다. 세손 시절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고,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이개와 유성원이 그의 교육을 맡았다.
단종은 즉위하긴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모든 조처는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했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인사문제에서도 대신들은 황표정사 제도를 썼는데, 이는 조정에서 지명된 일부 신하들이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을 하는방식이었다. 따라서 모든 정치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이른바 고명대신들인 황보 인,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왕족의 세력이 팽창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 등의왕숙들이 서서히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안평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간의 세력 다툼은 급기야 엄청난피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은 문종이 죽자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 황보 인 등의 대신들이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수하인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피살하고, 황보 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대궐로 불러들여 죽였다. 이들의 죄명은 안평대군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는것이었다.
계유정난으로 고명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동시에 장악했다. 수양은 자신의 집권 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정난공신에 봉하고,그들이 지칭한 난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안평대군은 사사시키고 우직은 진도에 유폐시켰다.
중앙을 장악한 수양은 변방에 자신의 세력을 심기 위해 함길도 도절제사를교체하였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신임 절제사로부임하던 박호문을 참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은 원래 4군과 6진 개척에 공로가컸던 인물로 김종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수양이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수양을 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징옥의 난은 무위로 끝났다.
이처럼 정치적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에 수양대군이 자기 수하의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수강궁으로 옮겨갔다.
이후 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과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유배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나이로사사되었다.
단종의 부인은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로 두 사람 사이엔 후사가 없었다. 단종은 1681년(숙종 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그의 능은장릉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3. 계유정난의 배경과 사건 분석]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조선 제6대 왕으로 즉위하자 조정은 고명대신에 의해장악된다. 이는 곧 조정이 신권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신권의 팽창이 왕권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왕권을 위협한 것은 수양을위시하여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왕족들이었다.
당시 조정은 영의정에 황보 인, 좌의정에 남지, 우의정에 김종서가 포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이 해 10월에 좌의정을 내놓게 되고, 좌의정에 김종서,우의정에 정분이 앉게 된다. 당시는 의정부서사제였기에 조정의 권력은 의정부의삼정승이 쥐고 있었는데 건강이 악화된 남지가 정사에 적극 참여할 수 없자 조정은 황보인과 김종서가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되었고, 정분이 우의정이 된 다음에도 계속 두사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단종실록에는 이들 대신이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 양씨, 환관 등과 모의하여궁중에까지 세력을 펴는 한편, 황표정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요직에 배치하여 붕당을조성하고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수양대군에게 위협을 가한 것이 계유정난의 원인이라고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단종실록이 세조 때에 편찬된 점을 고려할 때 이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높다. 즉 황보 인 등 고명대신들은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왕을 보필하는 데 최선을다했을 뿐, 붕당을 조성하려고 한 흔적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대신들의 협의체인의정부가 본래의 권한을 넘어서 왕권을 미약하게 만들었던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한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백관은의정부는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됐다'고 했다.
또한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도 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의 예는 곧 의정부가 권력을 남용했다는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왕권이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하지만 대신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세력을 키워 수양대군을 제거하려 한 것 같지는않다. 수양은 자청해서 명나라에 고명 사은사로 간 바 있는데 만약 의정부가 그를제거하려 했다면 이 기간에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양은 그의 수하들의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을 다녀왔다. 이는 곧 당시 김종서 등이 수양의 행동에 별로 관심이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수양은 명을 다녀옴으로써 의정부 대신들에게 자신이정권에 대한 야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의정부 대신들을 안심시켜허를 찌르겠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이는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이 명에서 돌아온 뒤 급진전된점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수양대군은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에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6개월 뒤에 드디어 거사를 감행했다.
그는 우선 김종서를 제거했다. 당시 김종서는 병권을 쥐고 있었고, 조정 대신들의구심체였기에 그를 제거하지 않고는 거사를 성공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해 10월10일 밤 유숙, 양정, 어을운 등을 데리고 김종서를 찾아가 간계를 써서 그를 철퇴로죽였으며,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을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했다.
또한 친동생 안평대군을 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사사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형제들 중 뜻을 달리했던 금성대군을 유배시켜서 죽였으며,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낸 후 다시 노산군으로, 그리고 서인으로 전락시켜 죽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수양대군이 왕권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일들이었다. 또한 비록 의정부 대신들이 조정을 쥐고 있었다고 해도 이는 적어도 왕권에대한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왕이 권한을 펼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한시적인 일이었다.
조신이 개국 초부터 재상 중심제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할 때 사실 왕은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어도 통치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계유정난은수양과 그 주변 무리들이 왕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 것이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4. 단종 복위운동을 했던 사람들]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역모로 단정지은 사람들은 단종복위운동을 전개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세조 즉위 4개월만에 발생했는데, 집현전학사 출신의 대신들과 일부 무인들이 주동이 된 사건이었다.
1455년 윤6월에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신하들을 귀양보내고 왕으로등극하자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의 문관들은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들과 모의하여 상왕으로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되었다. 당시 세조는 명나라 책명사를 맞이하기위하여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순간에 유응부가세조를 살해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무위로 끝나고 만다. 세조가 별운검을 동반하고 연회장을 나서는것이 위하다고 판단한 한명회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을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암살 계획은 뒤로 미뤄질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 정찬손에게 이 사실을 알려결국 단종 복위계획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사실 이 단종 복위 사건의 정확한 주모자를 파악할 만한 자료는 아직 없다. 다만김질이 고발할 때 성삼문에게 들은 말이라고 했고, 성삼문은 박팽년, 이개, 하위지,유성원 등이 같이 모의하였다고 했다. 이에 더 추궁하자 유응부와 박정도 등도 이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등과 이에 연루된 17인이 투옥되었다. 이들은 모두 옥이 일어난 지 7일 만인 6월 9일에 군기감앞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중종 때 이들 중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유응부 등은 사육신으로 기록되었다.
집현전 학사 출신의 단종 복위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영월로 유폐되었는데, 이때 또 한 번의 단종 복위 사건이 발생한다.
두 번째 단종 복위 사건은 수양의 친동생이자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일으킨다. 금성대군은 수양의 친동생이긴 했지만 촌수로 따지면 재종간이 된다. 그는세종에 의해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자 태종이 이복동생인 방석의 손자로 입적되었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종친 자격으로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게 되었다. 하지만수양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자 이에 항의하다가 유배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유배지를 전전하던 금성대군은 순흥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 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거사 직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해 반역죄로처형당하고 만다.
그는 형제들 중 세조의 등극에 반기를 든 유일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정조 때사육신을 비롯해서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의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에육종영의 한 사람에 올랐다.
단종 복위 움직임은 비단 이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계유정난 직후에발생한 '이징옥의 난'도 따지고 보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막으려는 시도로 볼 수있을 것이고, 세조 집권 이후 생육신들을 비롯한 유생들이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대해비판을 가한 것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수양대군의 왕권 계승은 당시 조선인들에겐 왕위 찬탈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수 다. 그리고 후대에 단종을 위해 충절을 보였던 신하들을 높이 평가했던 점으로미루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논쟁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5. '단종실록'편찬 경위]
'단종실록'은 총 1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명은 '노산군 일기'였다. 그래서표지에는 '단종대왕실록'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은 각 면에는 모두 '노산군일기'라는표제가 붙어 있다. 이는 단종이 상왕으로 밀려나 다시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다시서인으로 전락했다가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1452년 5월부터 1455년 윤6월까지단종 재위 3년 2개월 동안의 각 방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편년체로 기술되어 있다.
'단종실록'에 대해서는 1455년 8월 29일에 '춘추관의 건의에 따라 노산군 즉위 이후의시정기를 편찬하기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 그 과정이나 참여 인물에 대한 정확한기록이 없다.
1464년 10월 14일에 세조가 '정난일기'의 편찬을 명하였는데 그 내용이'노산군일기'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뒤 1469년(예종 1년)에 왕이춘추관에 명하여 노산군 때의 일기와 계유정난 때의 사초를 들이게 하여 그 범례를 살핀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곧 당시에 '노산군일기'의 편찬 작업이 마무리되어 있었다는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노산군일기'에서 수양대군을 세조라고 부르고있는 것으로 보아 세조가 죽은 뒤에 작성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노산군일기'의 구성은 대부분 실록과 비슷하나 서술방식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있다. 맨 앞쪽에는 왕의 출생과 즉위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적었고, 즉위 뒤의 사건은실록의 기재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실록들이 권말에 편찬자의 명단을부록하고 있음에 반해 '노산군일기'에는 그 명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 대신 숙종때 만든 부록이 붙어 있다.
단종이 복위된 것은 1698년으로 숙종 24년 11월 때의 일이고 '단종실록'이라는 표제를붙인 것도 이때인데, 숙종 때 붙인 부록에는 이 경위가 적혀 있다.
'단종실록'은 단종의 치세에 대한 중요한 사료이지만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곤란한 점이 많다, 특히 세조의 찬탈 경위가 미화되어 있어 자칫하면 역사를 왜곡된시선으로 바라보게 할 소지가 있다.
'노산군일기'는 1473년(성종 4년)역대의 실록을 인쇄할 때 처음으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 뒤 1603년(선조 36년)에 여러 실록을 함께 필사하였는데 이때에 '노산군일기'도 같이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