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리사입니다.
몇 달 전, 백마화사랑에서 출판사 준비한다고 인사드렸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해녀들의 섬>의 작가 리사 시를 존경해서 닉네임을 리사로 했다고 말씀드렸을 때, 한자로 배나무, 배꽃 리에 역사 사나 생각 사가 어떠냐고 하셨지요. 생각지도 못한 접근방식이 정말 신선하고 마음에 들었어요. 존경하는 시인께 새 필명을 선물받은 것 같아 감격했어요.
올해 8월 말경, 선생님의 열다섯 번째 시집<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낭독회에 못 가서 얼마나 아쉽고 속상하던지요.
오래 전에 잡힌 일정 탓이었지만, 다시 한번 뵙고 말씀 들을 기회를 놓친 게 내내 마음에 걸렸어요. 선생님을 뵙고 난 후에 시가 더 좋아져서 여러 시인의 낭독회와 시를 공부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찾아서 들었어요. 시가 뭔지 알고 싶고,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 시를 써도 되는지, 쓰고 싶은 장르가 시인지 탐색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몇 달을 치열하게 시를 공부하고 시를 쓰면서 시가 뭔지 알 것 같기도, 여전히 모를 장르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안 사실은 더욱 당혹스러웠습니다. 올해로 시행 107년째인 일간지의 신춘문예 등단 제도가 일제강점기 총독부 기관지였던 1915년 <매일신보>로 시작했다는 사실과 일본에서도 오래전 자취를 감춘 신춘문예가 세계에서 유일한 한국 문학만의 특성이라니(일본에서도 시행한다는 견해도 있음) 충격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출판 시장과 독자에게 문학적 평가를 맡기는데 반해 우리 나라는 특정 언론사와 심사위원의 성향과 기호에 따라 작가들이 등단합니다. 독립출판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문단의 영향력이나 인지도는 일간지나 문예지의 등단 작가를 중심으로 출판과 홍보가 이루어집니다. 신춘문예 등단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지만, 제도를 없애기보다 순응하거나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한 시인은 신춘문예 공모를 하는 신문사만 4-50종이며, 신인 작가를 뽑는 문예지도 200-300종으로 한 해 공모전으로 등단하는 시인만 만 명이라며 독자보다 시인이 더 많은 세태를 개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예와 수천에서 수백 만원의 상금이 주어지는 신춘문예의 계절인 9월부터 11월 말 또는 12월 초는 신춘문예 등단을 준비하는 문학도들의 열기로 여전히 뜨겁습니다.
무엇보다 대다수의 문학 공모전 당선자를 배출하는 각 대학 문창과나 국문과의 오랜 전통 역시 신춘문예 등단반을 운영하고, 핵심 지도 내용과 방법 또한 심사위원 성향을 분석하고 신춘문예로 등단한 선배의 지도를 받으며 치열하게 합평을 한다지요?
선생님께서도 10여 년간 신춘문예 심사위원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여러 이야기들을 들으니 갑자기 시 쓰려는 열정이 푹 꺼졌습니다. 선생님처럼 열정적으로 시를 사랑하고 오랫동안 시를 쓰고 싶은데, 한국의 등단 시스템을 따라가다가는 시를 싫어하다 결국 떠날 것 같아 두렵습니다.
https://youtu.be/SgVfNBeYZKY문정희 시인이 말하는 나의 시세계 - ETB 교육산업신문TV
https://youtu.be/sl_vauRq-pE문정희 시인 서울도서관서 문학콘서트 - ETB 교육산업신문TV
하지만, 유튜브에서 "문정희시인"을 검색해 다양한 강연을 듣다보니 다시 시를 향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선생님은 50년 넘게 시를 써보니 남은 것은 '허무와 이슬'이라는 굴레 밖에 없다셨지만, 영원한 정복이 없고 영원한 등반만 있는 시가 지금은 좋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독법이 필요한 고급 장르인 시의 독법은 잘 모르지만, 천천히 제 호흡과 안목으로 자유롭게 시에 다가가보려 합니다. 남의 글은 1회용 밴드지만, 자기 글쓰기는 치유를 위한 걸음이라는 말씀이 정말 좋았어요. 저도 다양한 글쓰기를 통해 제 자신을 치유하는 모험에 지속적으로 도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