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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해남 4코스 제1부
원문버스정류소-삼호마을-옥동마을-외입마을-목냉기고개
20220706
1.옥매광산의 아픔과 옥매산의 위용
서해랑길 1박2일의 탐방에 나섰다. 첫쨋날 서해랑길 1코스를 끝내고 완도읍 가용리 완도항으로 이동하여 베니스모텔에서 묵었다. 둘쨋날 서해랑길 4코스와 3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하기 위해 숙소에서 5시에 출발하여 4코스의 끝지점, 해남군 문내면 원문마을버스정류소로 향하였다. 그런데 버스는 4코스 끝지점을 150m쯤 지나쳐서 5시 55분쯤 명량로에 정차한다. 제 자리에 세워주는 게 어려울까? 안내자가 무책임하다. 명량로를 따라 4코스 끝지점으로 가서 4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한다. 정방향의 탐방이 정상인데, 안내자가 자꾸 역방향으로 진행하니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어쩔 수 없는 일, 일행을 따라 서해랑길 4코스 끝지점에서 역방향 탐방을 위해 출발한다.06:03
희끄무레한 안개와 미세먼지가 가늘게 떨면서 날아가는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 들녘으로 나갔다. 7월의 빛은 푸르디 푸르다. 낮아 보이지만 위용이 넘치는 옥매산을 바라보며 용암리 푸르른 들녘을 걸었다. 참깨밭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농약을 뿌리는 농부의 일손이 바쁘다. 참깨꽃이 연분홍 빛을 날리며 피어 있다. 무성한 담배풀잎들이 넘실거린다. 담배꽃이 예쁜데 피어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물이 생장하는 여름날은 생물체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생물체들이 생장과 번식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고 있다. 그 풍경은 아름다우며 생의 숙연함으로 가슴을 물들인다. 오른쪽으로 희미한 듯 하얀 교각을 드러낸 진도대교와 바다 건너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망금산 진도타워 녹진전망대가 가늠되었다. 벅차다. 진도대교는 명량해협 위에 놓여 있다. 저곳이 정유재란 때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판옥선 13척으로 왜선 133척을 몰살한 명량대첩지이다. 그 명량대첩지를 바라보며 옥매산 자락을 돌아 옥매길로 나아갔다.
'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추모비' 1.4km라고 적힌 표지판을 보고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는 옥동리 삼호마을로, 오른쪽은 '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옥동방파제로 가는 길이다. 1km 지점의 옥동방파제로 나가고 싶지만 제한 시간을 생각하여 어쩔 수 없이 일행을 따라 삼호마을로 향한다. 서해랑길을 걸으며 알게된 '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추모비'는 무엇일까? '옥매광산 노동자 해몰(海沒)사건(1945.8.20)'이라는 아픈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반도 둘레길 트레킹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아가는 순례길이다. 환희와 슬픔이 겹겹으로 쌓인 국토의 둘레길을 걸어가는 탐방객은 깊은 감정에 휩싸인다. 옥매광산 노동자의 비극 또한 길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강제징용된 옥매광산 노동자들이 조국이 해방된 뒤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바다에서 떼죽음을 당한 일을 대한민국 국민이 얼마나 알고 있을지 의문이다. 길손 또한 역사에 멍청하여서 이 사건을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는 그동안 일본 정부에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조선여인 군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라 강제징용과 희생에도 똑같은 문제의식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해남군민들의 뒤늦은 각성과 모금 조성으로, 옥매광산 희생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추모조형물과 추모비를 2017년 9월 6일 옥동선착장에 건립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옥동리 삼호마을을 거쳐 옥동마을로 향한다. 오른쪽으로 서해 바다가 열린다. 방조제 안쪽으로 왕새우양식장이 있다. 해안 오른쪽이 예전에 삼지원(三枝院)이 있었던 곳, 조선시대에 해남 삼지원 나루에서 건너편 진도의 벽파진 나루로 연결된 바닷길이 진도와의 1급 교통로였다고 한다. 삼호마을 위쪽 옥매산에서 이 풍경을 감상하면 어떨까? 해남군 황산 8경 중에 2경이 '옥산낙조(玉山落照)'인데, 옥매산의 낙조를 예찬하는 '옥산낙조(玉山落照)' 詩가 여운이 깊다. 진도 벽파진 뒤쪽으로 떨어지는 태양이 옥매산에 풀어놓는 풍경과 삼지원 포구 풍경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옥매산(玉埋山) 화반석(華斑石)은/ 낙조(落照)의 화신(化身)인가/ 홍문백반(紅紋白班) 아롱지니/ 천하보화(天下寶貨) 따로 없네.
목동(牧童)은 노을을 싣고/ 삼호(三湖)개로 들어가네./ 옥매산(玉埋山) 곱다더니/ 저녁놀은 더욱 곱구나.
옥동마을에서는 옥연마을로 고개를 넘어 이어지는데, 서해랑길은 대산을 오른쪽으로 돌아 옥동 포구로 내려간다. 옥동 포구로 넘어가는 대산 자락길에서 삼지원 포구와 건너편 진도의 벽파진을 바라보며 가슴이 뛰었다. 벽파진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의 전초전인 벽파진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곳으로 벽파진 언덕에는 벽파진대첩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은상이 쓴 비문이 가슴을 물들인다. 오래 전 탐방한 벽파진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산 자락 언덕길 밭에 고추가 벌써 빨갛게 익었다. 여름날이면 빨간 고추를 열무김치에 감아서 또는 된장에 찍어서 먹던 지난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어머니가 그립다. 그 시절이 아득한 듯 가까운 듯 가슴에 사무치며 고추맛이 입맛을 다시게 한다. 고추밭에는 가지꽃들이 피어 있고 가지들이 열려 있다. 7월의 들판이 풍성하다. 가지나물과 열무김치에 고추장으로 비빈 비빔밥이 여름날 점심밥으로서는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입맛을 다시며 언덕을 넘어 동쪽으로 내려가면 옥동 포구, 현재는 옥동방조제와 노루목산 은산금광이 해남의 훈장처럼 우뚝 서 있다. 노루목산에서 남쪽으로 길게 내리벋는 해안은 동쪽으로 굽이도는데 굽이돌아 가는 그 언저리가 입암포일 것이라고가늠한다. 입암포는 제주도를 왕래하는 배들이 물때를 기다리거나 항해 중 바람을 피하는 정박처로 이용되었으며, 입암포 인근은 거센 물결의 울돌목을 지나려는 배들이 물때가 맞지 않으면 기다리는 장소로서, 정박했던 배들은 출항 전 항해의 안전을 위하여 입암포에서 뱃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부터 성산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자 입암포는 그 광물을 선적하여 일본으로 운반하는 선적항이 되었는데, 현재에도 입암포는 성산광산의 항구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옥동방조제는 드넓은 간척농지를 형성했다. 서해랑길은 간척농지의 남쪽 농로를 따라 이어간다. 방조제가 없었다면 바닷물은 현재의 옥동들녘으로 들어와 옥연마을과 모이산 자락을 거쳐 부곡리 부곡마을 앞까지 미쳤을 것이다. 벽파진을 바라보는 옥동 포구의 옛 모습이 떠오른다. 부곡리 입암포 앞을 거쳐 바다는 옥동리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온다. 현재는 푸르른 옥동들녘으로 변하였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옥동 포구였다. 황산면 8경 중에 4경에 해당하는 '옥포귀범(玉浦歸帆)'을 묘사한 '옥포귀범(玉浦歸帆)' 시를 읽으면 그때의 풍경이 상상된다.
오류(五柳)개 벽파진(碧波津)에/ 돛단배 돌아온다/ 삼지원(三支院) 석양(夕陽) 노을/추도석도(秋島石島) 반가워라
옥포(玉浦)에 저녁 연기(煙氣)가/ 임 반긴가 하노라/ 초립동(草笠童) 쪼으려고 / 매바위 흔들흔들
일엽편주(一葉片舟) 아롱아롱/ 포구(浦口)에 바구니 가득/ 고기 담고 돌아오네
옥동 푸른 들녘을 걸었다. 푸르른 들판을 바닷물이라 상상하며 바닷물 위를 걸었다. 바닷물은 발목에서 허리춤으로 올라왔다. 7월 오전의 햇빛은 얌전하게 바다에 내려앉고 길손은 고기가 되어 노루목산 은산광산 앞 바다를 헤엄쳐 옥동 들녘을 건넌다. 바다에 연꽃밭이 출렁인다. 연꽃들이 피어나 진흙 바다에서 맑은 빛을 뿜어낸다. 연꽃처럼 피어난 맑은 사람들이 진흙 같은 세상을 정화하는데도 아직도 세상은 진흙 구렁 같다. 그럼에도 진흙 구렁에서 맑은 연꽃들은 끊임없이 피어나고 있다.
옛 옥동 바다를 건너 부곡리 춘정마을 앞에서 외입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외입리 외입마을 입구 성산금광 골든썬(주) 앞에 성옥 이훈동 선생 공적비와 황산서교 설립연혁과 교가 표석이 세워져 있다. 성옥 이훈동 선생(1917~2010), 세상물정에 어두운 길손은 처음으로 들어본 이름이다. 그런데 그의 업적을 알아보니 그는 맑은 연꽃이 분명하다. 선생은 1917년 황산면 외입리에서 태어나, 조선내화주식회사를 국내 내화물(耐火, 불에 타지 않고 잘 견딤) 업계 부동의 1위 기업으로 성장 발전시켰고, 전남일보사를 설립했다고 한다. 이훈동 선생 공적비 옆에 세워진 황산서교 발전 유공자 표석에는 선생이 황산서교의 부지 확장을 위해 기부한 내용이 적혀 있다. 황산서교의 위치가 표석이 세워져 있는 곳인지 분명하지 않고, 기부금이 생색을 내기 위한 것인지 진정한 발전을 위한 것인지 길손은 판단할 수 없지만, 황산서교는 1999년 황산초등학교에 통폐합되었다.
외입리 외입마을을 거쳐 목냉기고개로 향한다. 외입리 충신골이라는 지명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생각이 드는 충신교회를 바라보며 외입리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마을 뒤 갓바위(笠巖)에서 유래한 외입(外笠)마을을 거쳐 검푸른 물이 고요한 외입저수지 앞에서 멀리 외입리 송청마을을 가늠하였다. 송청마을은 마을 뒤편으로 200~300년 된 소나무들이 마을을 감싸안으면서 아늑한 풍치를 자랑하고 있어서 송청(松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송청마을로 가는 외입길 옆의 외입리회관에서는 태극기가 펄럭인다. 옥동리와 부곡리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외입리 풍경을 감상하면서 충신골 목냉기고개로 오른다. 고개에는 희검은 빛깔의 해송이 단정하게 자라고 있다. 이 고개가 예전의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고개였는지 이름이 목냉기(목넘이)고개이다. 목냉기고개에서 뒤돌아서면 외입마을이 부아산 아래서 평안하게 자리하고 있고, 가야할 방향으로 되돌아서면 외입리 드넓은 간척농토가 아득하게 광활해 보인다.
제2부로 이어짐
2.걸은 과정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 명량로에 서해랑길 트레킹 안내버스가 정차, 서해랑길 4코스 끝지점인 원문버스정류소로 향한다.
해남군 문내면(門內面) 용암리(龍岩里) 명량로는 전라우수영과 명량으로 가는 길이다. "해남군 문내면(門內面)은 황일면(黃一面)과 황이면(黃二面)이 1897년 합쳐져서 문내면(門內面)이 되었다. 문내면에는 조선시대 초부터 전라우수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전라우수영 영문(營門)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 해남 4·5코스 안내도는 왼쪽 언덕 입구에 세워져 있고, 그 맞은편 전봇대 기둥에 서해랑길 5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서해랑길 4코스는 명량로를 따라와 왼쪽 언덕 입구에서 마치고 5코스는 왼쪽 언덕을 올라 진행한다.
서해랑길 5코스 시작점 표지물 앞에서 서해랑길 4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서해랑길은 명량로 815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원문길로 들어가 진행한다.
서해랑길 4코스 종점에서 100m를 걸어왔다. 역방향으로 4코스 시점까지 14km를 걸어야 한다.
종려나무가 이국적인 풍경으로 보인다.
옥매산(玉埋山, 173.9m) 뒤쪽에 옥매광산이 있다. 서해랑길은 옥매산을 서쪽으로 돌아 진행한다.
원문(轅門)마을은 1630년경 나주에서 이주하여 들어온 나주 정씨 정관(鄭觀)이 입향조라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 인근 옥매광산에서 채굴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호구총수』에 원문리가 나온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제주도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던 노동자들이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에 타고 있던 배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이 마을 주민 10여 명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목마을도 옥매산(玉埋山, 173.9m) 밑에 있는 마을로 일제강점기에 옥매산에 있는 옥광산의 옥을 캐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들어선 마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시멘트 농로를 따라 앞쪽에 보이는 농가 창고 앞을 거쳐 옥매산 자락을 돌아나간다.
아침 일찍부터 농부가 참깨밭에 농약을 뿌리고 있다.
2년생 담배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담배 꽃이 예쁜데, 꽃이 피려면 멀었다. 담배풀밭 넘어 왼쪽에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를 잇는 진도대교, 그 왼쪽 뒤에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망금산의 진도타워 녹진전망대가 솟아 있다. 바로 저곳이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판옥선으로 왜선 133척을 물리친 명량대첩의 전승지 명량해협(鳴梁海협峽, 울돌목)이다.
오른쪽으로 꺾어 옥매길을 따라 문내면 용암리에서 황산면 옥동리로 넘어간다.
'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추모비' 1.4km 지점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전봇대에 걸려 있다.
왼쪽으로는 삼호마을, 오른쪽은 '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옥동방파제 가는 길, 아쉽지만 통과한다.
[개설]옥매산은 지질학적으로 진도의 해양판과 화원반도의 등줄맥이 갈라지는 분기점에 해당한다고 한다. 옥매산은 조선시대에 옥(玉)을 생산하고, 전라우수영의 관아나 군함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목재를 공급하는 국가 봉산(封山)이었다. 또 명량대첩의 승전지로 잘 알려진 울돌목의 입구에 있어 왜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강강술래를 하였다는 설화가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장식용 석재가 채취되었고, 1924년부터는 명반석을 집중적으로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명반석은 알루미늄의 원료로 태평양전쟁 당시 전투기 등 군수품 제작에 이용되었다. 당시 정확한 생산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936년까지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한 해 10만 톤이 넘는 명반석이 채굴되어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군용비행기 제작에 필요한 알루미늄의 원료를 채석하기 위하여 대규모 광산으로 개발하자 실제로 옥매광산 인근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근로자가 1,2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옥매산 정상은 해발 173.9m였지만 채굴이 진행되면서 깎여 나갔고, 지금은 168m의 다른 봉우리가 정상이다. 옥매산 등산로 곳곳에는 옥매광산 광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쌓은 어른 키 높이의 돌탑이 쌓여 있다. 옥연리 마을에서 정상까지 왕복 약 2시간이 소요된다.
[명칭 유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해남]에 “화반석(華班石)이 황원현의 매옥산(埋玉山)에서 나온다.”라는 기록이 있다. 원래는 매옥산이었으나, 이후 옥매산(玉埋山)으로 바뀌었다. 이렇듯 옥(玉)이 매장되었다 하여 옥매산(玉埋山)이란 산 명칭이 유래되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20첩 4면]에는 옥매산(玉梅山)으로 기재되어 있다. 『조선지형도』에는 규석갱(硅石坑)이 표기되어 있다. [자연환경] 옥매산은 땅끝기맥에서 뻗어내린 화원지맥에 속한다.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백악기의 석영섬록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표 암상은 석영반암이다.
[현황] 옥매산 주변에는 옥동리 등 ‘옥’ 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옥동리 옥연 마을에서는 옥매산에서 생산된 옥을 이용해 공예품을 생산하는 소규모 옥공예품 생산 공장이 있다. 옥공예품은 모양과 품질이 우수하여 전국적으로 팔린다. 2012년 8월 15일 해남옥매산쇠말뚝뽑기추진위원회는 일제가 박은 쇠말뚝을 제거하여 평안을 기원하고 1945년 8월 일제에 의해 완도군 청산도 인근 바다에서 해몰된 옥매산광산 노동자들을 추도하는 행사를 가졌다. 해남옥매산쇠말뚝뽑기추진위원회는 산신제, 살풀이, 기풀이에 이어서 본 행사로 고유제, 쇠말뚝 뽑기와 복원 의례, 내력비 세우기 그리고 식후 행사로 평안기원제, 축하 행사 등을 개최하였다. 옥매산 등산로 곳곳에는 옥매광산 광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쌓은 어른 키 높이의 돌탑이 쌓여 있다. 옥연리 마을에서 정상까지 왕복 약 2시간이 소요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45년 4월, 두 차례에 거쳐 약 220여 명의 옥매산 광산 노동자들이 제주도로 이송되었다.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경찰과 헌병의 포위 속에 진행된 강제징용이었다.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합명령이 떨어져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선창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일제는 제주도에 진지 동굴, 해안 동굴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숙련된 옥매산 광산 노동자들의 발파 기술과 굴착 경험이 필요하였다. 옥매산 광산 노동자들이 파견된 곳은 제주도 모슬포 인근 지역과 구좌읍 해안 동굴, 산방산 등이었으며, 12시간의 고된 노동에 돌아온 것은 주먹밥 하나에 소금뿐이었다. 숙소 또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고 옥매산 노동자들은 고향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해방의 혼란 속에서 어렵사리 배를 구하였고, 8월 20일 새벽 1시경 조선인 222명과 일본인 관리자 3명을 태운 35톤급 목선은 해남으로 출발하였다. 추자도와 보길도의 중간 지점에 이르던 아침 8시경 기관실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다. 불은 진화되지 못하였고 그렇게 4시간 동안 표류하였다. 노동자들은 침몰하는 배를 피해 바다로 뛰어들어야만 하였다. 화재 8시간 정도가 지날 무렵 목포에서 진해로 가던 군함이 이들을 발견하고 구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구조된 일본인 한 명이 대부분이 조선인이라 하자 지금껏 구조한 사람들만을 태운 채 떠나 버렸다. 전원 구조가 아니었으며, 구조된 사람들도 청산도에 내려 주고 가 버렸다. 그렇게 구조되지 못한 118명은 고향을 밟지 못한 채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옥동방파제로 나가지 않고 옥매길을 따라 옥동리 삼호마을로 들어왔다.
삼호길을 따라 오른쪽 골목으로 진행한다.
서울에서 살다가 귀농한 농부가 격려의 덕담을 보내 주었다.
삼호마을은 옥매산 부근에 고인돌도 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 해남현 조에 삼기원(三岐院)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어 마을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초 입향은 1690년경 제주 양씨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삼덕포 간척지와 옥동 간척지가 조성되고 이후 옥매광산이 개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창고인 듯한 건물 외벽에 적힌 글자가 무엇일까? 역사적 의미가 있는 글자일까?
오른쪽으로 서해 바다가 열린다. 서해랑길은 왼쪽 옥동마을을 거쳐 대산 오른쪽 자락을 거쳐 언덕을 넘어 진행한다.
왼쪽에 보이는 산은 떡봉산, 그 왼쪽 자락 옥동방파제가 있는 곳에 '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추모비'가 있을 것이다.
앞의 산봉은 대산, 장골길을 따라 옥동마을을 거쳐 대산 자락길을 따라 돌아나간다. 단축하려면 오른쪽으로 진입한다.
황산면 삼호마을에서 진도로 배를 타고 건너가는 옛 포구인 삼지원(三枝院)이 작은 섬 추도 앞에 있었다. 역(驛)에 비해 원(院)은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이나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요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위치했다. 명량해협(鳴梁海峽)은 조선시대에 해남의 우수영(右水營)과 진도의 녹진(鹿津)이 연결되었고, 해남의 삼지원(三枝院)은 진도의 벽파진(碧波津)을 통하여 수로로 이어졌던 곳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산은 조봉산, 작은 섬은 추도, 건너편은 진도군 벽파리 해안일 것이라 가늠한다.
정자 맞은편 전봇대 옆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옥공예체험장 1.7km 직진 표시는 서해랑길에서 벗어나 있다. 서해랑길은 정자 오른쪽으로 진행한다.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와 문내면 용암리 사이에 있는 옥매산(玉埋山)은 조선시대부터 옥으로 이름난 산이었다. 1910년 니시자키 쓰루타로[西崎鶴太郞]를 시작으로 일본인들이 옥매산 광산을 본격 경영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7월부터는 아사다화학공업주식회사[淺田化學工業株式會社]가 경영을 이어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황산면 옥동리(玉洞里)는 옥연이라고도 불렀는데, 마을이 옥매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연마을은 옥동마을과 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옥동리의 옥(玉)과, 마을 중앙이 제비집을 닮았다 하여 제비 연(燕)을 붙여 옥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 황원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삼호리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옥동마을, 옥연마을, 삼호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옥동마을의 입향조는 조선 현종 때인 1654년경 고산 윤선도의 증손 윤광서가 해남읍 연동에서 들어왔다고 전한다. 옥연마을은 옥동마을과 한 동네였으나 1952년에 분리되었다. 옥연(玉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장이 있어 ‘농장’이라 불리던 곳을 해방 후에 일본식 명칭을 없앤다 하여 옥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0년대 일본인이 삼덕포 제방을 막아 농장을 만들면서 형성되었으며, 1940년쯤 일본 한전화학회사가 옥매산을 개발하면서 각지에서 일거리를 찾아 온 사람들에 의해 마을은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1884년에 들어온 유인방이 입향조이며, 1915년경 유흥선이 들어왔다고 한다. 옥매산은 일제감정기에 명반석 광산으로 개발되면서 수십억 톤의 납석과 명반석을 캐내던 광산이었다. 일제강점기 제주도에 강제 동원되었던 옥매광산 노동자들 118명이 1945년 8월 23일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해몰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옥매광산'이라고도 불리는 옥매산은 일제시대 일본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일본이 옥매산에 눈독이 들이고 개발한 것은 군수물자 생산에 필요한 알루미늄 제련의 원료로 쓰이는 명반석(백반석)이 많이 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아사다화학공업주식회사(옛 시카마화학공업주식회사)는 1916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 명반석 채취 등을 위해 마을 주민·광부 등 수백 명을 강제로 동원했다. 현재 옥동 선창 인근에는 당시 명반석을 저장하기 위해 세운 저장고가 있고, 선착장 밑 부분에는 명반석을 운반하는 데 사용한 레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옥매광산 노무자 강제동원은 일제의 국책사업으로 행해졌다. 옥매광산에서 생산된 명반석은 1938년 '조선중요광산물증산령'이 공포되면서 중요 광물에 포함됐고, 알루미늄을 만들기 위한 원료로 공출품목이 됐다. 공출품목이 됐다는 것은 제국의 필요에 의해 국가관리하에 있는 주요 물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옥매광산 노무자들의 노동 자체가 일본이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공출품목을 생산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보고서는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강제동원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고 적시했다. 1944년 4월25일 일본 군수회사법에 의해 아사다화학공업은 지정 군수회사가 되면서 모든 임직원과 기술자, 노무자 등 사업장이 통째로 현원 징용됐다.
-시사저널, 호남취재본부 정성환 기자, 2019. 9. 2.
오른쪽 섬은 송도, 그 왼쪽 작은 섬은 소래도, 맨 왼쪽의 섬은 추도, 추도 뒤 오른쪽 섬은 감부도, 그 오른쪽 뒤가 진도 벽파진이라 가늠한다. 벽파진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선을 격파한 곳으로 명량대첩의 전초전인 벽파진대첩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오른쪽 해남의 삼지원(三枝院)은 건너편 진도의 벽파진(碧波津)을 잇는 주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언덕을 넘어 해안으로 나간다.
오른쪽에 나즈막한 산은 노루목산으로 은산금광이 있다고 한다.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 노루목산에서 해안선이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황산면 부곡리 입암포(笠巖浦)는 해안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나가는 곳에 있는 것 같다. 건너편은 진도 해안이다.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 입암마을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포구.
[개설] 조선시대 입암포(笠巖浦)는 제주도를 왕래하는 배들이 물때를 기다리거나 항해 중 바람을 피하는 정박처로 이용되었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부터 성산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자 입암포의 서쪽 포구는 광물을 선적하여 일본으로 운반하는 선적항이 되었다.
[명칭 유래] 입암포의 지명은 해변의 삿갓바위에서 유래하며 조선시대에 제주를 왕래하는 배들이 정박하는 곳이었다.
[형성 및 변천] 제주도를 왕래하는 배들이 물 때를 기다리거나 항해 중 바람을 피하는 정박처로 이용되었다. 입암포 인근은 거센 물결의 울돌목을 지나려는 배들이 물때가 맞지 않으면 기다리는 장소이다. 정박했던 배들은 출항 전 항해의 안전을 위하여 입암포에서 뱃고사를 지냈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부터 성산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자 입암포는 그 광물을 선적하여 일본으로 운반하는 선적항이 되었다. 현재에도 입암포는 성산광산의 항구로 이용되고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 904번지의 해안이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新增)』,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 『해남읍지(海南邑誌)』에 “현 남쪽 50리[약 19.64㎞]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현 황산면 부곡리의 선창으로 진도 벽파진과는 서쪽에 마주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해남읍지』[1872]에 의하면 “제주에 내왕하는 배가 정박한다.”라고 하였다. 『해남읍지』[1872]에서는 입암의 지명 유래를 알 수 있다. “바다에서 보면 입석이 높이 솟아 있는데 높이가 10여 장이 된다. 거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흰옷에 흰갓을 쓰고 있는 것과 같다. 벽파진 아래에 있으며 큰 바닷가이다[笠巖浦 濟州船泊處 立石屹立如巨人狀 高十餘丈 望若白衣白苙之形 在碧波津下 大海之邊矣].”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쪽파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노루목산 금광 설명을 들었다. 건너편 왼쪽 산은 진도군 임회면의 여귀산, 오른쪽 뒤 구름에 가린 산은 진도의 최고봉 첨찰산으로 진도 기상대 하얀 건물이 그 증표가 된다.
앞쪽에 옥연마을, 그 오른쪽 중앙의 낮은 구릉은 신흥뫼산, 그 오른쪽은 모이산인 듯.
옥동방조제에 의해 드넓은 간척농토가 형성되었다. 옥동 간척농토를 중심으로 모이산에서 오른쪽으로 빙 돌아가는 길이 황산면 옥동리와 부곡리의 경계를 이루는 것 같다. 모이산에도 금광이 있다고 한다.
옥동유수지 오른쪽의 옥동방조제 배수갑문에서 노루목산 앞을 거쳐 오른쪽은 황산면 부곡리(富谷里)에 속한다.
부곡(富谷)이란 명칭은 마을의 형국과 관련이 있다. 간척공사 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는 형세를 동남쪽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보인다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부수(浮水), 부실, 부옥촌, 부뜰이라 불렀는데, 후에 부곡이라 개칭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부자 양반만이 살았다고 하여 부곡(富谷)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부곡리에 있는 은산광산에서는 금광개발회사가 금을 채굴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축사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옥동리 들녘 농로로 이어진다. 중앙의 낮은 구릉은 신흥뫼산이라 불리는 듯.
시멘트 농로를 따라 옥동방조제 배수갑문으로 이어진다. 부곡리 노루목산에서 은산금광(주)이 금광석을 채굴하고 있다.
중앙 뒤쪽에 옥매광산이 살짝 보인다. 오른쪽에 옥연마을, 중앙에 축사가 있다. 축사 앞에서 농로를 따라왔다.
이곳을 경계로 북쪽은 옥동리, 남쪽은 부곡리로 나뉘는 것 같다. 건너편 위쪽에 부곡리의 노루목산 은산금광이 있다. 서해랑길 이정목에 시점까지 9.5km라고 적혀 있다.
유수지에 갈대밭이 형성되어 있다. 왼쪽의 신흥뫼산과 모이산을 거쳐 옥동리 들녘을 빙 돌아 부곡리 경계가 되는 듯.
시멘트 농로 끝까지 가서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오른쪽에 노루목산 은산금광이 보인다.
왼쪽에 대산, 오른쪽 뒤에 옥매광산, 앞쪽에 옥동리 옥연마을이 펼쳐져 있다.
옥매광산과 옥연마을이 왼쪽에, 오른쪽 낮은 구릉의 신흥뫼산과 그 오른쪽 모이산 앞쪽은 옥동리에 속한다.
1995년 캐나다의 아이반호라는 광산업체는 금맥을 찾기 위해 우리나라 전역을 항공촬영했다. 이를 토대로 이곳 노루목산과 인근 모이산, 전남 진도군의 가사도 3곳에 다량의 금이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후 2000년 1월 노루목산 시추작업을 통해 이곳에 폭 1.5m, 150m가량의 노다지에 500억원대의 금과 은이 매장돼 있는 것으로 판명됐고, 2002년 1월부터 본격 채광에 들어갔다. 아이반호는 2004년 8월 투자금액을 회수한 뒤 철수했고, 현재는 순신개발이라는 국내 업체가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464㎏(약 64억2000만원어치)의 금을 캤으며, 올해에는 총 264㎏(약 39억6000만원어치)을 채광할 예정이다.
은산광산은 해남의 광활한 벌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노루목산(해발 34m)을 깎아 만들었다. 푸른 논 사이로 황토빛 속살을 드러낸 광산에 여기저기 컨테이너 막사가 세워진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터널은 높이, 넓이 5.5m 크기로 해수면 아래 87m 깊이까지 요리조리 미로처럼 뚫려 있다. 총 길이가 1.2㎞에 달한다. 지하 84m에 위치한 막장엔 지하수로 인한 습기와 덤프트럭, 터널 전용 운반차량(LHD)에서 뿜어대는 매연이 가득했다. 예전엔 협소한 갱도에 레일을 깔고 광차를 이용해 광석을 옮겼다. 대개 수직-수평-수직 갱도가 번갈아 있어 사람 손이 많이 필요했다. 지금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덤프 트럭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완만한 경사의 터널을 뚫고 있다.
-세계일보, 2005.9.8. 박진우 기자
연꽃이 피어나고 있다. 뒤쪽에 태양광발전소 집광판이 설치되어 있다.
전남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 국내에서 채취되는 금의 95% 이상이 이곳 출신이다. 2011년 8월 12일 현재 국내 금광은 노루목산과 인근 모이산을 포함해 충북 4곳, 경남 2곳 등 모두 7곳이지만 노루목 금광을 빼면 그 양은 극히 미미하다. 금은 사금과 산금으로 나뉘는데, 산금은 산에서 직접 채굴하는 금이다. 이전 업체인 은산개발이 2001년 10월 개발허가를 받은 뒤 캐나다 광산업체의 항공촬영 도움을 받아 금맥을 발굴해 이듬해부터 채굴을 시작했고, 2009년 11월 대우조선해양 계열 SMC㈜가 인수했다. 생산량은 매년 평균 200㎏ 정도. 2002년부터 지금까지 약 2500㎏, 시가 1500억원어치다. 돌에 섞인 금을 솎아내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하지만 이날도 24명의 광부들은 서슴지 않고 지하 87m의 갱 안으로 들어갔다. 노다지를 위해서다. 아침 7시~낮 12시는 천공작업, 오후 1시부터는 다이너마이트 발파로 '선광'(광석에 들어 있는 금을 모으는 일)을 한다.
-서울신문, 2011.8.13. 최종필 기자
시멘트 농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 부곡리로 넘어가 언덕 위의 한아름영농조합법인 앞에서 왼쪽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황산면 부곡리 한아름영농조합법인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이어진다.
옥동리 간척농토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왼쪽에 옥매산과 옥연마을, 오른쪽에 모이산과 태양광발전소 집광판이 있다.
왼쪽에 노루목산, 중앙에 대산과 옥매산, 그리고 옥동리 간척농토가 펼쳐져 있다.
부곡길 지선에서 부곡길 간선으로 나왔다. 한아름영농법인, 노루목산 금광, 대산, 옥매광산, 옥동리 간척농토가 보인다.
춘정마을 갈림목까지 부곡길을 따라간다.
오른쪽은 춘정마을, 왼쪽은 외입리 외입마을 가는 길, 서해랑길은 왼쪽 외입리로 넘어간다.
오른쪽으로 춘정마을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서남쪽 해안 가까이로 성산마을이 있을 것이다. 서해랑길은 왼쪽 외입리 방향으로 올라간다.
춘정마을은 이천 서씨 서진걸이 1500년쯤 함평 월야면에서 최초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이후 1780년에 서울에서 달성 서씨 서익수가 내려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성산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성산광산이 개발되면서 인구가 점차 유입되었다. 마을 단위로는 최초로 신사(紳士)가 세워진 아픔을 간직한 마을이기도 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부곡길 간선을 걸어온 길이 한눈에 보인다. 부곡길 위쪽의 작은 숲 뒤에 옥동저수지가 보인다. 모이산 앞쪽에 소정마을, 그 오른쪽 앞에 신곡마을과 부곡마을이 위치한다.
황산면 부곡리(富谷里)는 본래 해남군 황원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황원면의 춘정리, 부곡리, 소정리, 외립리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부곡마을, 신곡마을, 소정마을, 춘정마을, 성산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부곡은 부곡촌으로, 춘정과 성산은 내립암 지역으로 황일면에 속하였다.
부곡마을은 1600년 경 밀양박씨가 최초 입향하였고, 조선 후기 전주이씨 영양군파의 후손 이갑운이 영암에서 입거하였다고 한다. 신곡마을은 본래 부곡마을과 한 마을로 신곡마을을 상마을, 부곡마을을 하마을로 불렀다. 신곡마을 입향조는 문화 유씨와 서흥 김씨로 250년 전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소정마을은 광복 후에 부곡마을에서 분리되었고, 1900년 경 삼덕농장과 옥동농장이 간척지화될 때 몇 가구가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최초 입향조는 문화 유씨 유동로라고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은 부곡리 부곡마을, 앞쪽은 황산면 연당리(蓮塘里) 일대이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외입마을 방향으로 이어진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성산금광 골든썬(주)이다.
부곡리 춘정마을 갈림목에서 고개를 넘어 외입리로 들어왔다. 오른쪽 뒤에 옥매산이 분명히 보인다.
성옥 이훈동 선생(1917~2010)고인은 1917년 황산면 외입리에서 부친 이영률 선생과 모친 이백임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6세 때인 1932년 일본전기공업주식회사에서 운영하던 황산면 성산 쇼와(昭和)광업소에 견습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8ㆍ15 해방과 더불어 정부가 일본인으로부터 환수한 성산광산을 매각 받았으며, 노화광산을 매입하여 운영했다. 1974년과 1978년 조선내화 포항 1, 2공장을 준공한데 이어 1986년 광양공장을 세워 국내 내화물(耐火, 불에 타지 않고 잘 견딤) 업계 부동의 1위 기업으로 성장 발전시켰다. 이 회장은 해남에 있는 성산광산, 한국분체, 완도 노화 광산, 조선내화, 전남일보 등 19개 기업을 일구었다. 선생은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은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모란장, 인촌상(제22회) 특별상을 수상했다.
-해남우리신문, 2010.11.9.
이훈동 선생이 기부한 황산서교의 부지가 이곳인 줄 알았는데 이곳이 아니라 외입리 초월마을인 것 같다. 황산서교는 1999년 황산초등학교로 통폐합되었다고 한다.
황산면 외립리(外笠里)는 마을 뒷산에 갓을 씌운 모양의 바위가 있어 갓바우라 하였는데, 마을이 바위의 바깥에 해당한다고 하여 바깥갓바우 또는 외립(外笠)이라 불리게 된 데서 명칭이 유래하였다. 내립암(內笠巖)에 해당되는 마을은 부곡마을과 춘정마을이다. 본래 해남군 황원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초월리, 연당리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외입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외입마을, 초월마을, 송청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외입마을은 조선 숙종 때인 1650년 원주이씨 이의동이 입향하여 형성되었다고 전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481]의 기록에는 입암포(笠巖浦)로 나타나며,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는 황일면 외립암리(外笠巖里)로 기록되어 있어 마을의 형성 시기를 400여 년 전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송청마을의 입향조는 송씨라고 전한다. 황원의 토착성씨 중 하나였던 송씨는 조선 초 불안한 남해안 정세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정종의 아들 덕천군의 후손인 이관덕이 입향하였다. 『호구총수』에 의하면 송청마을은 외입암리라 불리며 외립마을과 한 마을이었다. 이후 1958년 행정구역 개편 때 외립마을에서 분리되었는데, 마을 뒤편으로 200~300년 된 소나무들이 마을을 감싸안으면서 아늑한 풍치를 자랑하고 있어 송청리(松靑里)로 부르게 되었다. 초월마을의 입향조는 황산면 호동리에서 들어온 통천 최씨라고 전하며, 제주 고씨가 600년 전에 현재의 자리 너머 터에 살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외입길을 따라가다가 외입저수지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목냉기고개 방향으로 진행한다.
외입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외입저수지 앞 정자 방향으로 진행한다.
왼쪽 위에 목냉기고개(목넘이고개)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외입저수지 앞을 거쳐 목냉기고개로 이어진다.
목냉기고개에 아담한 해송이 보인다. 왼쪽의 골짜기를 충신골이라 이르는 듯.
서해랑길 4코스를 역방향으로 진행하여 종점에서 7.6km를 걸어왔다. 4코스 시점까지 6.8km가 남아 있다. 오른쪽은 충신골.
전봇대 뒤 첫 번째 건물,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 외입리회관이 보인다. 맨 왼쪽 뒤 마을은 외입리 송청마을이다.
오른쪽 끝에 외입리 송청마을이 보인다.
외입저수지 뒤 중앙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외입리회관이 보인다.
충신교회와 걸어온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의 산은 부아산.
해송이 멋지게 자라고 있다.
이 주택 뒤로는 태양광발전소 집광판이 펼쳐져 있다.
왼쪽에 부아산, 저곳에 갓바위가 어디에 있을까? 갓바위 바깥에 있기에 바깥갓바위(외립, 外笠)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부아산 뒤쪽의 마을은 부곡리 춘정마을이다. 외입마을 앞에 푸르른 논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은 충신골이라 이르는 듯하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충신교회라 지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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