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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도착하자마자
어디든 첫 발을 디디게 될 목적지에 도착하면 막막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마중 나와 줄 사람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외국의 한 도시는 더더욱.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
베를린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생각지도 않았던 유스호스텔에서였다.
베를린 공항에 내리며 보니 하늘은 개어 있었고 여름 날씨였다.
자그마한 공항에서 처음으로 한 일은 안내(i)에 들러 싼 숙소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몇 개의 전화번호를 받은 뒤, 일단 공중전화 카드를 사고 전화를 걸었는데, 영어를 사용해야 했고 또 처음 듣는 지명 등으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몇 사람의 도움을 거쳐서야 겨우 목적지를 정하고 거기로 출발하려는데 문제는 짐이었다. 등에 메고 어깨에 걸치고 양손에 들었지만 나 혼자의 힘으론 부치는 양이었다.
그런 몸으로 ‘니콜라지(Nicolasee)’라는 곳에 있는 유스호스텔에 도착하기까지는 두 시간여가 소요되었다.
그 과정에 탄 기차에서 보이는 베를린의 첫 인상은 나무가 많은 전원적인 도시였다. 아카시 꽃이 피어있는가 하면 철길 변엔 스페인 것보다는 조금 커 보이는 아마폴라도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끝까지 택시를 타지 않았고, 어깨가 빠지도록 짐을 지고 유스호스텔에 도착했을 때 나는 땀으로 범벅이 된 건 물론 오랜 여행 끝의 파김치가 된 한심한 몰골의 여행객이었다.
‘처음 베를린에 도착했던 그 ‘막막함’은 지금도 가슴이 저르르하게 기억되는데, 기록은 없는 거나 다름없고 그나마도 담담하기 짝이 없네! 그렇다고 지금 그런 느낌을 덧붙여 보완할 수도 없는 거지만, 젊은 나이였음에도 지나치도록 간략하고 무심하게 기록해놓았네......’ 하고 아쉬워하다가,
‘그나저나 그러고 보면, 나이 들어서 쓸데없는 감상만 생기고 잔소리만 늘었나?’ 하고 나는 스스로 내 자신을 되돌아보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을 것 같기는 했다. 인생이란 그럴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나이 들면서 늘어가는 건 눈물과 말(잔소리) 뿐이라니까. 그렇다면 그것도 인생의 한 과정일 테니까.
4인 1실의 깨끗한 방에 들어온 뒤, 나는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한동안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푸른 숲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은 강인지 호수인지는 모르겠으나 요트들도 떠다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렇지만 나에겐 전혀 현실감 없는 허상일 뿐이었다.
젊은, 아니 나에겐 어린 아이들로 보이는 고등학생들로 북적대는 유스호스텔은 나이 따라 숙박료를 내야만 해서, 나는 41 마르크를 냈는데, 한국 돈으로는 3만 원이 넘는 비싼 가격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짐을 짊어지고 다시 낯선 도시로 나가기는 더 겁이 나 독방도 아닌 2층 침대의 4인실에 들어와 넋을 놓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처음 며칠이 더 힘들지......’ 하고 있던 나는, 그런 상황을 모두 수용할 태세가 돼 있었다.
그러나 어제 떠나왔던 내 나라와 가족이 더욱 그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왜, 내가 이곳에 왔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비행기 안에서 제공된 기내식 아침을 잘 먹기도 했거니와 마땅히 돈쓰며 식당에 갈 처지가 아니어서, 나는 가지고 있던 초콜릿만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런 뒤 샤워를 하고 나니, 룸메이트로 키가 껑충한 오스트리아 청년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베를린 기차역 보관 창고에 맡긴 짐을 찾으러 간다며 바로 나갔는데,
나처럼 짐을 들고 다닌 것보다 그 방법이 훨씬 더 나을 것 같긴 했다.
내가 여기에 짐을 들고 오면서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맨 과정만을 빼도 그게 얼마나 효과적인 방법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 청년한테 여행의 새로운 방법 하나를 배우긴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두 번씩 왔다갔다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사에서 벌어지는 일은 뭐든 다 좋기만 한 건 없는 것 같다.
무슨 일이든 항상 좋은 점, 나쁜 점이 함께 하는 거니까.
그제야 나는 좀 쉬고 싶어서 2층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잠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잠이 들면 안 되는데......’ 하고 자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우리나라 시간으론 한밤중인 데다 오랜 비행시간으로 피로가 겹쳐, 절로 감기는 눈을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잠을 자면, 밤엔 잠이 안 와 힘들 텐데......’ 하면서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꿀맛 같은 잠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한 시간여의 잠에서 깨어 몸을 추스른 뒤 식당엘 가보니,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밖에 나가 맛도 못 느낀(없는) 감자햄버거를 사 먹었는데, 입에 맞지 않아 반절은 버리고 말았다.
우리 돈으로 9천 원이나 되었는데, 맛없는 건 그렇다 쳐도 먹자 할 것도 없었다.
‘근데, 이런 물가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는다지?’
5 . 28
*
잠은 잘 잔편이다.
뭔가 중요한 일을 마무리 짓는 꿈을 꾼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나진 않는다.
새벽 4시에 깨어 지금은 5시 반인데,
밖은 훤하다.
지금이 여름이고 이렇게 숲도 우거진 곳인데도, 창문을 열어놓고 잤지만 모기가 없는 것이 신기하다 못해 이상하다.
밤새 젊은이들의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는데 새벽이 되자 새소리만 들려온다.
방을 구하고 있는 룸메이트인 오스트리아 청년과 함께 시내에 나갔는데,
나간 김에 그는 나에게 ‘브란덴부르크 문’과 ‘알렉산더 광장’, ‘베를린 동물원(Bahnhof Zoologischer Garten)역’ 부근 등, 시내 중심부를 안내해 주었다.
베를린은 시내 곳곳에 숲이 우거진 공원이 많았고, 거기엔 또 수많은 이들이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로 하이킹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난 베를린이 이렇게 더운 줄을 몰랐는데, 게다가 오늘도 햇볕이 강한 맑은 날이었다.
그런데 그는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집을 구하고 있는데,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없이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나로선 여간 부러운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는 여기 베를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는 거의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 그래서인지 나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마치 자신이 형이라도 되는 듯 나를 다루고 있었다.
그만큼 자발적으로 나를 도와주려는 의지가 엿보여, 그게 고마워서 점심은 내가 사기로 했는데, 그가 가자는 데로 따라간 뷔페식당 야채 코너에서 내가 큰 접시에 음식을 담는데, 그가 다가와 내 옆구리를 쿡 누르더니,
“나를 따라 해 봐!” 하며 생선과 치즈를 먼저 담은 뒤 그 위에 상추나 토마토 등으로 수북하게 덮는 것이었다. 일종의 속임수였다.
그렇지만 야채만 먹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 음식 값을 적게 계산할 수 있다기에,
나도 그를 따라 정어리 절임과 치즈를 먼저 담은 뒤, 그 위에 상추 토마토 오이 등으로 가득 덮어 계산대에 가니,
정말 야채만 계산되어 적은 돈만을 지불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둘이 마주보고 앉아 웃으며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음식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내가 원래 적게 먹기 때문에)
결국은 그들을 속인 거지만, 그 순간엔 나도 ‘도덕’이네 ‘불법’이네 하는 건 관심 밖이었고 그 행위 자체가 즐거웠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그래, 이게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법이야!’ 하며 정당화와 합리화까지 시켰던 나다.
그렇게 오스트리아 청년과 함께 하다 보니, 세상이 정말 즐겁기까지 했다.
5 . 29
‘흠, 그러고 보면 나는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처음 만나 조금이라도 신세를 진 사람들에겐 늘 뭔가 그 보답을 하려는 자세만은 변함이 없네. 그 당시 돈에 상당히 쪼들렸을 때일 텐데도 타인에게 점심도 산 걸 보면......’
*
몸은 피곤한데도 시차적응을 위해 잠을 참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 잠이라서 난 이른 초저녁인데도 안경을 깔고 자는 선잠을 자고 말았다.
언뜻 오스트리아 청년이 돌아왔다는 걸 인식했지만, 이내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또, 뭔가 인기척을 느껴 깨어보니 또 다른 투숙객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내 아래쪽 침대에 들어가려고 준비 중이었고, 시계를 보니 1시 반이었다. 그래서,
‘이제 다시 잠 들기는 틀렸구나!’ 했는데도, 잠은 계속 쏟아져 왔다.
꿈을 꾸고 깨고 자고를 반복하다 눈이 떠졌는데, 새벽 5시 반이었고 더 이상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첫날 왔을 때 우글대던 어린애들이 어제 아침에 빠져나가 오늘은 유스호스텔이 한적하다.
‘어떻게 할까? 오늘 ‘함부르크’에 갈까?’
어차피 여기 베를린에 정착할 근거를 빨리 만들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한 서둘러 내가 작년에 남겨두고 멕시코로 돌아갔던 함부르크의 짐을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들은 오늘부터 주말인데다 다음 월요일까지 3일간의 연휴로 모든 공식적인 활동이 중단된다니,
어쨌든 지금 가지고 있는 짐도 문제라,
한 시라도 빨리 짐들을 정리하는 게 좋겠다.
5 . 30 아침
다, 아바나에 도착하면서
그렇게 비행기에 올랐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깐꾼까지 밤새워 날아왔던 나는, 또 다시 밤을 샌 새벽 4시에 쿠바의 수도 ‘아바나(Habana)’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깐꾼 공항에서 체크인할 때 PCR 검사표를 요구해서 보여주었더니,
이미 한 달이나 지난 검사 결과라(내가 인천을 출발한 게 거의 한 달이 다 되고 있었다.) 쿠바에서 거부될 가능성이 있다며, 현지에서 하게 된다면 검사비용은 내가 지불해야 된다고 하기에, 그러겠다고 했는데,
아바나 공항에서는 그런 건 묻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국가라 뭔가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잔뜩 긴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멕시코에서 보다 훨씬 쉽게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올 수 있어서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새벽에 도착해서 그러기도 했겠지만, 깐꾼의 그 붐비던 분위기에 비해 아바나 공항은 음침하면서도 한산하다 못해 어쩌면 죽어있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소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공항 청사 밖으로 나오니, 여기도 택시 기사들이 밀려들었지만,
“지금 새벽인데, 무슨 택시를 타겠냐? 택시 타려고 나온 게 아니다!”면서 손사래까지 쳤더니, 그들도 더 이상은 귀찮게 달라붙지 않아, 다시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
어차피 날이 샐 때까지는 뭔가 정리도 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을 짜기도 할 요량으로.
#한 젊은이와의 만남#
그런데 ‘아바나(Habana)’ 공항은 안내 전광판만을 봐도, 항공편 자체가 적어서 승객들이 드나들 일조차 없을 것 같이 썰렁했다. 그러다 보니 조명도 희미하고(차라리 어두워) 승객들의 모습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는데, 내부를 둘러보니, 2 층에 몇 사람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그래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더니, 양쪽에 까페떼리아가 있었고 한 쪽에 세 사람 정도가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니,
‘무슨 한 나라 수도의 인터내셔널 공항이 이렇게 썰렁하고 한산해?’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고, ‘이게 무슨 국제공항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에겐 조용한 게 싫지만은 않아 거기 비어있던 탁자에 가서 앉았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조차 잠을 쉽게 자지 못하는 나라 그냥 앉아 있다가, 그 반대편의 다른 까페떼리아 주인인 듯한 사람이 이쪽으로 왔다갔다하는데 보니 나이가 지긋한 것 같아(세상 물정을 알 사람 같아) 말을 걸어보았다.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저는 쿠바에 처음 온 사람인데, 혹시 저에게 쿠바의 안내나 정보 같은 걸 주실 수 있는지요......” 하고 가뜩 예의를 갖추어 물었는데,
그의 대답이 너무 성의가 없고 기계적이었다.
그저, 아침 8시 반 경에 저 아래 ‘안내(Information)’에 물어보면 정확한 정보를 줄 것이고, 그런 다음 택시를 타고 아바나에 가서, 호텔을 잡고 다음 행선지로 가라는 등의, 굳이 물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형식적인 답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긴 했는데, 어쩐지 내가 더 머쓱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거기 플라스틱 탁자에 엎드려 잠을 청하고 있던 사람들 중 두엇 정도가 내 행동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았는데, 그 중 좀 젊은 사람이 일어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무슨 일이신데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하고, 상당히 자발적이고도 선의에 찬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러니,
“아, 그래주시겠어요? 나는 조금 전에 여기 아바나에 도착한, 쿠바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는 초보 여행객인데......” 하며 그에게 찰싹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토니’(‘안토니오(Antonio)’인데 줄여서)라고 자신을 소개를 한 그는, 아주 젊어 뵈는데도(40대?) 어느새 대학의 교수도 했던 전력이 있다는 사람으로, 그 뒤에 개인 사업을 하기도 했는데, 쿠바의 사회 경제가 너무 안 좋다 보니 성공을 못하고, 지금은 새로운 삶을 찾아 카리브 해에 있는 다른 섬나라로 가려고 공항에 나와 있다고, 굳이 내가 묻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썩 자랑스럽지 못할 수도 있는 현 상황까지 서슴없이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내가 약간 당황까지 했지만, 그만큼 솔직하고 소박하게 나를 대하는 모습에 그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방금 쿠바에 도착해 알고 싶고 필요한 것이 너무 많은 나에게 현실적이고도 다양한 정보를 성의껏 제공해주면서 어떻게든 도움이 돼주려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고마움을 넘어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사람을 만난 것 자체가 행운이다!’ 하는 생각과 함께 그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의 ‘장소’ 문제, 그리고 가장 급선무이기도 했던 ‘환전’ 문제 등으로 주제를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그 자리에서 나에게 달러를 환전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역시 지금 해외로 떠나려는 사람이라 달러가 필요했고, 나는 쿠바에 도착했기 때문에 쿠바화폐가 필요했던, 상생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쿠바의 현 경제 상황인 ‘네그로 머니’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는데,
쿠바는 사회주의 경제로 국가가 공식적으로 내 건 미 달러와의 환율이 1 달러에 24쿠바 뻬소인데, 실질적으로 민간인들에 유통되는 건 1달러에 100 쿠바뻬소라면서,
자신이 나에게 당장 100:1로 환전을 해주겠다기에, 내가 미화 100불을 환전해 달라며 지폐 한 장을 넘겼더니, 그가 자기 가방에서 꺼낸 돈이 부족한지 아래층 현금인출기로 가서 돈을 꺼내온다며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역시 나를 신뢰하는지 자신의 가방을 탁자에 그대로 올려놓은 상태로 내려갔다가 한참 만에 돌아왔는데,
‘무슨 돈이 저렇게나 많지?’ 하고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다발이나 돼 보이는 돈을 그가 세어주는데, 쿠바 지폐 50뻬소 짜리로 200장이었다.
그런데 원래 돈 개념이 별로 없는 나로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 지경이었는데, 그가,
“그만큼 쿠바 돈의 가치가 없다는 뜻이지요.” 라고 덧붙여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럼, 여기서 일반적인 한 끼 식사의 비용으로는 얼마 정도가 드나요?” 하고 그 돈의 상대적인 가치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300 뻬소 정도를 줘야 햄버거 하나를 사 먹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 사실 나는 어느새 그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해야겠다고 맘을 먹고 있었던 것으로 그 가격이라도 알아두려던 것이었다.
‘근데 내가 지금 ‘독일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쿠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어째,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느낌이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고, ‘이거 ‘주객이 전도되는 거 같은데......’ 하는 우려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어차피 낯선 외국 땅에 첫발을 내딛으며 벌어진 일이니 그게 어디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 어차피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 상황을 어떻게 해쳐나가느냐에 있으니까. 게다가 25년 전에 있었던 독일 베를린에서의 이야기는 그저 짧은 기록을 그대로 옮겨올 수밖에 없는 상황과 조건이지만, 여기 쿠바 아바나 얘기는 바로 요 며칠 전에 있었던 따끈따끈한 얘기니, 다소 길어진다 해도 나쁠 것까지는 없을 것 같고, 독일 이야기는 며칠에 걸친 일기에 불과하지만, 여기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생생한 현장에서의 기록이니......’ 하는, 나 편할 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아무튼 상황이 그렇게 바뀌면서, 처음엔, 내가 깐꾼에서 다른 한 쿠바 젊은이한테 추천을 받았던 ‘바라데로(Varadero)’라는 곳으로 가려한다고 했는데(내가 거기로 갔다면, 이 얘기는 전혀 다르게 펼쳐졌겠지만), 그도 거기가 좋은 곳이기는 하다면서도, 내가 조용한 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말을 하자, 뭔가 약간의 여운을 남기려는 듯 자기 고향도 바닷가 마을이라면서,
“유명 관광지라 사람들도 많고 값도 비쌀 ‘바라데로’에 가실 바에야, 비록 외지고 멀기는 하지만 때 묻지 않은 우리 고향에 가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혹시 그럴 의향은 없으세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쿠바 동남쪽 끝의 한 ‘곶’인 ‘까보 끄루스(Cabo Cruz)’라는 마을인데(굳이 번역한다면 우리말로 ‘십자 곶’인데, 나는 우선 그 이름이 맘에 들었다.), 주변이 ‘국립 자연 생태 보전 공원’으로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곳으로, 거기에 가면 자신의 80세인 노부가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요?” 하고 내가 관심을 보이자,
“우리 아버지하고 저는요, 생김새도 성격도 똑 같다고 주변 사람들이 다 말하기 때문에, 가기만 하면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겁니다.” 하더니, 자신은 아버지를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올긴(Holguin. 그 순간엔 이 도시 이름도 퍽 낯설기만 했다.)’이라는 도시에 모셔다 함께 살고 싶은데, 아버지가 독립적으로 혼자 사시기를 원해서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만으로도 나는 이 젊은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얼마나 공경하는지가 느껴져,
‘부모를 잘 모시는 자식이 어찌 나쁜 사람일 수 있을까?’ 하는 믿음까지 생겨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갑자기 그의 고향이라는 ‘까보 끄루스(Cabo Cruz)’ 쪽으로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바로,
“그렇다면, 거기로 가야겠다!”고 결정하는 것으로 내 목적지가 정해진 것이다.
물론 그런 내 즉흥적인 행동이, 나 자신 뿐만 아니라 그에게까지 다소 경망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쿠바’가 초행이었던 나에겐 어딜 간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던 것이고,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런 사람을 만났다지?’하고 그를 만난 걸 하늘에 감사라도 드리고 싶었던 나로서는, 차라리 그렇게 된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내가 그 ‘까보 끄루스’에 찾아가는 일에 집중하게 되는데,
일단 내가 현지에 도착하게 되면 나에게 필요할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해 줄 수 있다는 토니 자신의 ‘윌리암(William)’이라는 절친에게 이 상황을 알리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직은 너무 이른 시각이라선지(6-7시)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토니가 이번엔 자신의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었고, 지금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한국 분이 ‘까보 끄루스(Cabo Cruz)’로 가시겠다고 하니, 가게 되면 바로 아버지를 찾아갈 거예요......” 하고 내 얘기까지를 하는 식으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이용해 비교적 쉽게 내가 아바나에서는 900km를 가야 한다는 ‘까보 끄루스(Cabo Cruz)’에 도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는데,
‘쿠바가 그렇게나 큰가?’ 하고, 우선 나는 교통 거리가 900km는 된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사실 내 머릿속 쿠바 지도에서의 수도 ‘아바나(Habana)’의 위치는 긴 섬의 중심부이자 북쪽 끝이었기 때문에, 이 조그만 섬나라에서 무슨 900km씩이나 갈 것인가에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아바나는 섬의 정 중앙이 아닌 서쪽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라, 동쪽 끝부분에 자리한 ‘까보 크루스’까지는 900km 거리가 충분히 가능했던 것으로, ‘쿠바는 작은 섬나라’라고만 생각했던 내 착각이자 오류였던 것이다.)
그렇게 토니와 내가 머리를 맞대가며 인터넷 검색 등으로 그 일정과 행로를 정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코스가 하필이면 밤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연거푸 이틀 밤을 뜬 눈으로 새웠던 나는,
“토니, 도무지 오늘 밤엔 못 갈 것 같아. 무엇보다도 나는 잠부터 자야만 하니, 좀 이따 ‘아바나(Habana)’ 시내에 가서 제일 먼저 숙박시설부터 찾아 쉰 뒤, 내일 밤에나 출발해야 할 것 같아.” 하면서 공항 앞에 있다는 여행사에 가서 다음 날 밤 버스표를 예매하기로 했다.
그러자 토니는 내가 현지에 도착하면 나를 그 바닷가 마을 ‘까보 끄루스’에 실어다 줄, 자신이 잘 아는 택시기사 에게 전화를 걸더니,
“모레 오전에, 버스 터미널에서 기다렸다가 한 동양인이 내리면 ‘리(Lee)’냐고 물어라. 그러면 이 분이 맞다고 할 거다!” 하고 알려 주기까지 했고,
그러면서도 가장 시급하고 중요할 수도 있는 바닷가 마을 친구 ‘윌리암’과 통화를 계속 시도했는데, 그 쪽에선 도통 전화를 받지 않아 시간이 얼추 8시 정도로 돼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그에게 아침을 사기로 하고, 거기서 내온 햄버거 비슷한 빵으로 식사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윌리암이라는 친구에게 전화를 몇 차례 걸었는데, 무슨 일인지 그는 계속 받지를 않았고,
그 와중에도 대화를 계속 나누다 보니,
토목공학자인 그는 자기가 설계 공모했던 도로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산 비센테(San Vicente)’라는 나라에 개설되는 문제로 가는 중이라며, 자기가 사는 ‘올긴(Holguin)’이란 곳을 출발해 어젯밤 9시 경에 이 공항에 도착했는데, 오늘 오후 3시 출발 비행기여서 시간도 넉넉하다고 좀 더 구체적인 자신의 얘기도 했다. 그런 걸로 보아, 그가 어젯밤 ‘아바나’의 숙소(호텔)로 가지 못하고 공항에서 그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그만큼 이 나라의 교통 시스템이 좋질 않다는 반증이자, 경제 상황이 안 좋다는 뜻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유추도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 젊은이는 돈이 없어서 그 긴 시간을 공항에서 시간을 때우며 기다리고 있다는 빈곤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는, 당당함과 자존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몇 년 전에 독일로 ‘교환 교수’로 갔던 적이 있는데, 독일 생활에서 가장 인상 깊었고 절실하게 배웠던 것이 ‘규율’이라는 얘기로 발전시키던데,
독일 사람들은 규율을 잘 지켰고, 그 사회에 그런 기본이 갖춰져 있어서 그런 선진국이 됐을 거라면서,
“우리 쿠바 사람들은 규율 면에선 너무 취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 같다.”는 자조적인 한 마디도 덧붙이던데,
‘아, 공교롭게도 이런 대목이 나오네!’ 하면서 나는 잠시 일손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 ‘토니’란 젊은이가 그 순간에 하필이면 ‘독일’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그리고 독일과 쿠바를 비교하는 바람에,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독일 이야기’ ‘쿠바 이야기’’와 마치 무슨 연관이라도 있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그건 아닌데.’ 하면서도, ‘그런데도 이 글을 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와 얘기할 당시에는 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나 자신도 그 말을 전혀 중요시하지 않았고, 지금도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하면서 다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나는,
‘그게 뭐, 어디 여기 쿠바뿐일까? 여기서 아주 가까운 ‘멕시코’도 더하면 더했지 못할 거 없을 것이고, ‘스페인’도 우리 한국도 독일 같지는 않은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가 알기로는, 동양도 그렇다면서요?” 하더니, “‘일본’은 너무 지나치게 그렇다고 하는 것 같고, 중국은 또 너무 아니라고도 하는데, ‘한국’은 그 중간쯤이라는 것 같아요, 안 그래요?”하고 물어 와서 나를 당황스럽게 했는데,
“글쎄요, 그 말이 틀린 건 아닌 것 같은데...... 세상은 너무 크고 다양하잖아요? 그러니, 그저 한 마디로 어떤 지역이거나 나라를 단정 짓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봐요, 난......” 하면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지내보면 좋은 점 나쁜 점은 다 있는 거니까요.” 하자,
“그러니까, 그 중간 정도(‘중도’)를 유지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하고 웃기에, 나도 거기엔 동조해주기는 했다.
그러다가 9시가 넘어가면서, 아직도 여전히 공항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던 나에게 그는, 본인이 직접 내 여정의 버스 예약도 도와주겠다면서, 나를 공항 밖 ‘버스 여행사’ 사무실로 데려갔다.
‘근데, 도대체 이 쿠바라는 나라가 얼마나 크기에(나는 그리 크다고 여기지는 않는데) 버스를 타고 12시간이나 간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 하면서도, 아직 쿠바 지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나에겐 무엇보다도 다음날 밤 버스를 타고 약 12시간을 달려 다 다음날 아침 11시 경에 도착해야 한다는 여정이 문제였다.
그렇게 사무실에 가서 알아보니, 버스 값은 48유로인데 현금은 안 되고 (비자)카드 결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카드로 결제를 하려고 했는데,
무슨 일인지, 담당자가 몇 차례를 시도해도 안 되자,
“어차피 ‘아바나’에 갈 거 아닌가요? 그러면, 거기 시내 사무실에 가서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하기에,
“좋은 생각이네요!” 하고, 거의 녹초가 돼 있었던 나는 그 상황에서도 순간순간 눈이 감기는 등, 오로지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그런데 사실은 거기서 좀 더 분명한 판단을 했어야만 했다. 물론 내 몸 컨디션이 이성적으로 거의 통제 불능의 상태였던 건 맞지만, 아무튼 그렇게 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로 나는 많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렇게 힘들어 하는 나를 보고 토니는, 내가 자기 고향에 가서 지내더라도 인터넷(이 메일)으로 교류를 하자는 말을 하며 자신의 메일 주소를 적어준 뒤, 우리는 헤어졌다.
그런데 어찌나 힘들던지 나는 택시의 합승마저 기다릴 수 없어서, 20달러나 하는 택시비를 혼자 지불하면서까지 급하게 아바나로 향했다.#
#운명적인 만남#
그런데 막상 그와 헤어지고 나니, 나는 정말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 같았다. 모든 게 원위치 되어, 정말 모든 걸 내 스스로 해야만 했다. 여전히 나는 쿠바에 첫발을 내디딘 나그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일들이, 토니와 공항에서 세웠던 계획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그건 나중 문제고, 그런 순간에도 나는,
어쩌면 ‘예사롭지 않았던 것 같은 ‘토니’와의 만남’을 그냥 무의미하게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저 스쳐지나가듯 공항에서 만났던 사이라고 보기엔, 그 젊은이와의 만남이 너무나 극적이었고(공항에 내리자마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무궁무진했을 텐데도 내가 왜 그가 있는 곳까지 찾아갔으며, 또 왜 그가 하필이면 거기서 잠을 청하고 있었는지부터), 그가 대화에 끼어든 것도, 게다가 나에게 꼭 필요했던 행로와 환전문제도 그 스스로 나를 돕기 위해 나서준 건 물론 서로 나눈 대화 역시 내용적으로도 너무 풍부했고, 아무런 확신이 없었던 내 쿠바에서의 행로가 정해진, 그러니까 ‘무(無)’에서 ‘유(有)’로 바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헤어질 무렵,
“리(Lee), 근데, 참 이상하네요. 어쩌면 운명적인 것 같기도 하고......” 하더니, “왜, 그 많던 시간 놔두고 하필이면 제가 쿠바를 떠나려는 시점에, ‘세뇨르 리’가 막 쿠바에 도착한 것일까요? 그러면 만나지 않았어야 했을 사람일지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만나 이런 얘기를 나누고, 또 당신이 저의 고향까지 가신다고 하는지......” 해서야,
“아, 그러고 보니... 참, 그렇네요! 토니가 쿠바에 있다면 나에겐 뭔가 천군만마 같은 역할을 할 터라 너무 좋을 텐데, 이렇게 헤어져야 하다니...... 내 입장에서도 너무 안타깝기는 한데, 그렇지만 또 아예 만나지 않았던 거에 비한다면 너무 값진 만남이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엇갈리면서 만나게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인데, 정말 뭔가 심상찮은 것 같기는 하고......” 하면서 아쉬운 웃음을 짓기는 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렇게, 우리는 엇갈린 운명 속에서 만났던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막 도착하는데, 그는 떠나는 입장이었다니!
글쎄, 남들은 그 ‘운명적’이란 말을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그 젊은 친구에 의해 빌어서(?) 사용하기는 했지만, 우리의 만남에 적용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운명적인 만남’이란 게 꼭 드라마틱하고 애절한 남녀간의 전유물도 아닐 테고, 역사적인 인물들 간의 조우일 수만도 아닐 테니까.' #